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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9화 (9/125)

9화

하준서만 아니었다면 당장 주차장에 내려가 차부터 구경했을 것이다. 아니, 차를 몰고 나가 긴 드라이브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준서 때문에 김민석은 꼼짝없이 집에 박혀 있어야 했다.

하준서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단지 부엌 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집에는 안 가요?”

김민석이 조심스레 묻자, 하준서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윤 씨를 혼자는 못 두죠. 그런 일도 있었는데.”

그가 말하는 ‘그런 일’이라는 건 서하윤이 3층에서 뛰어내린 일을 말하는 것일 터다.

서하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풍요로운 생활과 보기 좋은 외모까지 타고난 행운을 저버리고 죽으려고 들다니 말이다. 아니, 그런데 애초에 죽으려고 들었으면 3층이 아니라 최소한 5층 이상에서 뛰어내렸어야 하는 거 아닐까? 죽으려고 뛰어내리기에 3층은 너무 애매한 높이였다. 운이 더럽게 나쁘면 목이 꺾여 죽겠지만, 대개는 팔다리나 좀 부러지고 말 것 같은 높이였다.

뭐, 서하윤이 무슨 생각이었든 상관은 없었다. 덕분에 가난뱅이 흙수저 김민석은 이 좋은 몸을 차지하고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김민석은 다짐하듯 말했다. 하준서는 잠시 김민석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꼭 그게 아니라도 하윤 씨는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요. 혼자 두고 싶지 않네요.”

하준서는 그렇게 말하며 김민석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다정하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김민석을 응시하는 눈길 역시 매우 다정해서, 순간 가슴속 깊은 한구석이 살짝 울컥해졌다.

타고난 흙수저 김민석은 이런 식으로 남에게 애정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려서는 보육원에서 같은 방 형들에게 맞으면서 컸고, 조금 자라서는 인생에 아무 기대하는 것 없이 살았다. 그나마 성인이 되어서는 보육원에서 손에 쥐여 준 전 재산 몇 백만 원을 들고 세상에 던져졌다. 남의 애정은커녕 따뜻한 방 한 칸, 따뜻한 집밥 한 끼 기대하기 어려운 인생이었다. 그런 김민석에게 하준서의 따스함은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 낯설었다. 피하고만 싶었다.

“…전 안 외로운데요. 하나도요.”

김민석은 가슴속 말라비틀어진 외로움을 느끼며 거짓말을 했다. 하준서가 옅게 웃더니 김민석의 귓불에 끼워진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하윤 씨는 거짓말할 때 귓바퀴 끄트머리가 살짝 붉어지는 거.”

“…….”

김민석은 말없이 자신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살짝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도 못 하는 주제에 입에 항상 거짓말을 달고 사는 게 참 귀엽더라고요, 내 눈에는.”

“…그것참 취향이 특이하시네요.”

김민석의 불퉁한 말에 하준서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거 하윤 씨가 항상 하던 말이에요. 나는 취향이 특이하다고.”

“취향이 어떻게 특이하신데요?”

“글쎄요…. 하윤 씨는 어떨 것 같아요?”

“저야 모르죠. 기억도 하나도 안 나는데.”

“그거 좋네요.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하나씩 알아 나가는 일.”

그렇게 말한 하준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나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치는 거.”

하준서의 가늘게 뜬 눈하며 말투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몰랐다.

“아…. 예….”

김민석은 오스스 소름이 돋은 팔을 연신 쓰다듬었다. 하준서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히 즐거운 얼굴이었다.

농담 따먹기인지 아니면 진지한 대화인지 헷갈리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배가 부른 데다 두 남자, 특히 하준서를 상대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지라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니 하준서가 어디선가 잠옷과 속옷을 꺼내 와 건네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씻고 와요.”

애인끼리 씻고 오라는 얘기는 가끔 야한 의미로 쓰이겠지만, 하준서의 말에서는 그런 기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로 전혀 씻지 못한 상태였기에 급격히 찝찝함이 몰려왔다. 김민석은 잠옷과 속옷을 받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 샤워기를 틀었다.

대번에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수압도 만족스러웠다. 호텔 같은 고급스러운 욕실에서 뜨거운 물줄기를 만끽하려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김민석은 다 씻은 후에도 뜨거운 물줄기 아래 선 채 따뜻함을 즐겼다. 한참 만에 겨우 샤워기를 껐을 때는 손가락 끄트머리가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속옷과 부드러운 감촉의 잠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걸치고 나왔을 때, 집 안엔 밝은 빛 대신 은은한 무드 조명이 켜져 있었다. 모던한 분위기의 집은 조명이 달라지니 한층 더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안방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 기대앉아 있는 하준서가 보였다. 그는 안방 욕실에서 샤워했는지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지금 김민석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잠옷 차림이었다.

“어….”

김민석은 당황해서 안방 문간에 선 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거 지금 같은 침대에 눕자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하준서가 누워 있으니 틀림없이 그런 의미였다.

그냥 아는 남자면 상관없었다. 침대는 크고 둘이 누울 자리는 충분하니 적당히 같이 누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하준서가 이 몸의 주인인 서하윤의 애인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가랑이를 벌렸네 어쩌네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던가. 같은 침대에 눕는 건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위협적이었다.

“어서 이리 와요.”

하준서가 자신의 옆자리 이불을 들치며 불렀다. 그래도 김민석이 움직이지 않으니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이리 와요. 피곤하잖아요?”

하준서의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안 잡아먹겠다니, 그럼 그렇고 그런 일이 안 생긴단 말이었다. 무엇보다 뜨거운 물 아래 한참 있었더니 피로가 어깨를 짓눌러서 당장 코를 골며 한숨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하준서 옆자리에 조심스레 누웠다. 아까 잠시 몇 번 눌러 보았던 것처럼 침대는 끝내주게 푹신했다. 이런 편한 침대는 처음이었다.

김민석은 혹시 하준서가 무슨 짓을 할세라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 편한 자세를 잡았다.

“저 그럼 잡니다?”

통보하듯 말하고 눈을 감자, 하준서가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려던 즈음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머리칼 사이를 헤치고 귓바퀴와 귓불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아도 성적인 뉘앙스가 가득했다. 김민석은 그대로 빨리 잠들어 버리려고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하준서가 그리 놔두질 않았다.

귀를 어루만지던 손은 목덜미로 내려왔다. 부드러운 손끝이 쇄골의 윤곽을 덧그리듯 슬그머니 피부 위로 미끄러졌다. 눈꺼풀을 짓누르던 무거운 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고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하준서 씨.”

결국, 김민석은 눈을 뜨며 하준서를 불렀다. 하준서는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김민석을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왜요?”

하준서가 쇄골 위를 느릿하게 덧그리며 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태연자약한지 몰랐다.

“하지 마세요, 그거.”

김민석은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하준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보드라운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싫어요.”

“네?”

“싫다고요.”

하준서가 재차 말하더니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김민석 위로 올라탔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전개에 김민석은 눈을 크게 뜨며 하준서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부드럽고 상냥한 외양과 달리, 크고 넓은 데다 강한 힘이 실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뭐 하자는 것 같아요?”

“전 싫은데요.”

“나는 하고 싶어요.”

“아니, 하준서 씨가 하고 싶은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우리는 애인이잖아요.”

하준서가 부드럽게 말하며 상체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에게서는 지금 김민석의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샴푸 냄새가 풍겼다.

하얗고 섬세한 미남의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김민석은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는 하준서의 턱을 손으로 밀어냈다. 하준서의 눈이 곱게 휘어지더니 이윽고 그의 두 손이 김민석의 양 손목을 잡아 침대 위에 억눌렀다. 손을 빼내 보려 했지만 얼마나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요.”

“싫은데.”

지금껏 쭉 존대하던 하준서의 말투가 변했다. 하준서의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관찰하는 눈으로 김민석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이거 놓으라고요!”

김민석은 와락 화를 내며 외쳤다. 하준서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그거 알아? 나는 네가 화낼 때마다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자, 이렇게….”

하준서가 말끝을 흐리며 김민석의 한 손을 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끌려간 손등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김민석은 부드러운 잠옷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것이 단단하게 발기한 하준서의 성기라는 것을 깨닫고 기겁을 했다.

“야, 이 미친놈아!”

김민석이 기겁하며 외치자, 하준서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눈동자에 실린 관찰의 빛이 한층 짙어졌다. 하준서가 그 상태로 물었다.

“우리 하윤이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게 맞을까?”

“기억 안 나! 안 난다고!”

“그런데 어쩜 하는 말이 그렇게 한결같이 똑같을까?”

“미친 짓을 하는데 미친놈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야 되는데?!”

“흐음….”

하준서가 옅은 숨을 몰아쉬었다. 김민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하준서는 지금까지 내내 서하윤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억을 잃었다는 말에 어울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한층 더 오싹해졌다.

“저기요, 하준서 씨. 난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고, 당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기억 안 나요. 내가 싫다고 하는데 이대로 밀어붙이면 그거 강간입니다. 강간.”

김민석은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하준서가 빙긋 웃었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요, 하윤 씨.”

이 인간은 아무래도 겉보기와 달리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웬만해서 오늘 밤은 참아 주고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최상혁이 돌아올 테고, 그럼 또 그 새끼한테 우리 하윤이를 빼앗기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백지상태 하윤이 동정을 떼 주는 일을 그 새끼한테 넘길 수는 없죠. 그러니 지금 하는 수밖에.”

느릿하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하준서가 김민석의 양손을 머리 양쪽으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김민석은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해 버렸다. 하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양손이 갑작스레 풀려났다. 김민석은 깊이 안도하며 하준서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밀려나는 대신 김민석의 몸을 잡아 돌렸다. 그런 다음 침대 위에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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