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렇게 한바탕 패션쇼를 하다 보니 콧속으로 좋은 냄새가 솔솔 밀려들어 왔다. 김민석은 거울 앞에서 한번 쓱 돌아 보았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단장한 모습을 감상한 뒤 드레스 룸 밖으로 나갔다. 부엌을 보니 그사이 음식을 다 한 듯 하준서가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배고팠죠? 어서 와서 앉아요.”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식탁 의자를 빼 주었다. 그의 과한 친절은 아무래도 몸에 밴 습관인 모양이었다. 김민석은 조금 쭈뼛거리며 걸어가 하준서가 빼 준 의자에 앉았다. 김민석이 앉자 하준서 역시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식탁 가운데 있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가뜩이나 콧구멍을 실룩이게 하던 냄새가 김민석을 화악 덮쳤다. 그것은 무슨 재료를 넣고 끓였는지 모를 죽이었는데, 그 모양새가 얼마나 맛깔나 보이는지 몰랐다. 제대로 된 집밥을 먹어 본 적이 거의 없는 김민석에게는 너무나 유혹적인 향기였다.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키자 하준서가 그릇에 죽을 덜어 주었다.
“어서 먹어요.”
하준서가 권했다.
“잘 먹겠습니다.”
김민석은 사양하지 않고 서둘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죽을 한 입 떠서 입에 넣는 순간, 혀끝에 느껴지는 그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맛에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때요? 입에 맞아요?”
하준서가 물었다.
“네. 맞아요. 완전 맞아요.”
김민석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는 죽을 계속 떠먹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최고라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보였다. 하준서가 귀엽다는 듯 작게 웃더니 반찬을 집어 김민석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식사는 그야말로 폭풍같이 이어졌다. 죽뿐만 아니라 모든 반찬이 너무나 맛있었다. 그야말로 집밥이라는 느낌이었다. 김민석은 하준서에 대한 평가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다정한 남자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두 남자 중 하나를 꼭 남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하준서를 선택할 것이다.
하준서는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종일관 김민석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김민석이 우물우물 죽을 씹으며 슬쩍 눈길만 보내도 그 반찬을 밥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이게 애인인지 보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결국 김민석은 죽을 두 그릇이나 먹고 나서야 식사를 마쳤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자 하준서가 흐뭇한 얼굴로 보면서 작게 웃었다.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운 것이 조금 민망해서, 김민석은 하준서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먹은 건 제가 치울게요.”
김민석이 일어나며 말하자, 하준서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치울 테니까 하윤 씨는 집 구경이나 마저 해요.”
하준서는 바쁘게 음식을 하면서도 김민석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민망한 생각이 들었지만, 집 구경을 마저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치우는 소리가 났다. 김민석은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이번 방은 말 그대로 하나의 작은 피시방이나 다름없었다. 척 보기에도 사양이 엄청날 것 같은 본체와 커다란 모니터가 그 빛나는 자태를 뽐내고 있고, 컴퓨터 책상이며 의자까지 모두 최신 피시방에서나 볼 법한 브랜드로 꾸며져 있었다. 나란히 놓인 두 대의 컴퓨터 뒤쪽 벽으로는 피시방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자와 컵라면 진열대가, 그 옆으로는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앞면이 투명한 음료 냉장고가 떡하니 자리했다. 냉장고 안은 별의별 음료가 종류대로 쭉 진열된 상태였다.
“와…. 헐. 대박이다. 대박이야.”
김민석은 방 안을 훑고 또 훑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남의 몸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그냥 기억을 잃은 거다. 나는 김민석이 아니다. 서하윤이다. 죽어도 서하윤이다.
김민석은 마치 왕좌에 앉는 기분으로 컴퓨터 의자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순간 온몸에 전해지는 편안함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졌다. 본체 부팅 버튼을 누르고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을 얹는 순간이었다. 키보드 옆에 놓여 있는 무언가가 김민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건….”
김민석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물체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 눈을 의심해서였다. 잠시 그것을 살피던 김민석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하준서 씨! 하준서 씨!”
김민석이 다급하게 부르자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있던 하준서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눈앞에 들고 있던 물건을 들이밀며 다급하게 물었다.
“이거, 혹시 제 거예요?”
김민석의 얼굴과 손에 들린 물건을 번갈아 본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윤 씨 거예요.”
그 순간, 김민석의 온몸에 진한 환희가 번져 나갔다.
“와 씨. 이게 진짜 내 거라고요? 진짜로, 진짜로요?!”
김민석이 숫제 방방 뛰며 외치자, 하준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김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하윤 씨 거예요. 몇 달 전에 내가 선물해 줬잖아요. 기억 안 나요?”
“선물이라고요?!”
하준서의 말에 김민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안의 물건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차 키였다. 그것도 그냥 차 키가 아니라 BMW 로고가 붙어 있는 차 키.
나한테 차가 있다니! 그것도 외제 차라니! BMW라니!
김민석은 그 자리에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민석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에 있는 하준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선물 고마워요! 하준서 씨! 사랑합니다! 완전 사랑해요!”
김민석은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준서를 끌어안은 채 방방 뛰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하준서가 김민석을 마주 안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하준서가 끌어안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는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하, 하준서 씨. 아파요. 하준서 씨!”
김민석이 크게 외치는데도 하준서는 꽉 끌어안은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키 차이가 워낙 나서, 꽉 안겨 있으려니 그의 쇄골과 어깨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끔 하준서에게 느꼈던 싸한 느낌이 올라왔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얼마나 힘이 센지 어림도 없었다.
숨쉬기가 벅찰 정도였다. 김민석이 움직임을 멈추자 하준서의 힘도 아주 약간 약해졌다. 하준서는 그 상태로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귓가에 하준서의 숨결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지금 하준서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석은 아픈 것도 참으며 죽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드디어 하준서가 입을 뗐다.
“겨우 차 한 대에 사랑한다고요?”
하준서가 중얼거렸다. 딱히 대답을 원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훗. 하준서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김민석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왼쪽 손목에는 아까 고른 시계가 걸려 있었다. 하준서는 시계 위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 차보다 이 시계가 더 비싼 건데. 이거 받았을 때 뭐라고 한지는 기억나요?”
“…기억 안 나죠. 당연히….”
김민석은 약간 겁먹은 채로 중얼거렸다. 김민석이 겁먹은 것을 눈치챘는지 하준서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김민석은 이번에는 속지 않았다. 하준서는 여전히 기분이 매우 나쁜 상태였다.
“차라리 계속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네요. 우리 하윤 씨.”
하준서가 김민석의 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억이 영영 안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희망 사항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치스러운 몸에 들어앉아 있다가 본래의 볼품없고 가진 것 없는 몸으로 돌아가면, 대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요. 그편이 나을 거예요. 만약 하윤 씨 기억이 돌아온다면….”
하준서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선 약간 흐릿한 눈으로 김민석의 눈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그가 입을 맞추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김민석은 그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하준서의 입맞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준서가 입술을 떼어 내자 김민석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의 입술이지만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준서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입술을 김민석 귓가에 가져대 다고 뒷말을 마저 속삭였다.
“날 배신한 일… 절대 곱게는 못 넘어갈 테니까요.”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 그 속삭임을 듣는 순간 김민석은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절로 숨이 멎었다. 하준서는 언제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속삭였냐는 듯 김민석의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역시 하윤 씨는 귀걸이가 잘 어울린다니까. 착하게 시계도 귀걸이도 다 내가 선물한 거로 했네요?”
하준서가 기쁘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본색을 아주 조금 엿보고 만 김민석은 귀걸이고 시계고 당장 벗어 내팽개치고 싶었다. 물론 그럴 용기는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