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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7화 (7/125)

7화

최상혁과 하준서의 시선이 부딪혔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김민석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제 욕이 튀어나올지, 주먹이 날아다닐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 두 사람은 싸우지 않았다. 단지 서늘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맞대고 있을 뿐이었다.

“또 잔머리 굴리지, 서하윤.”

최상혁이 눈동자를 돌려 김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준서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그게 동감을 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김민석은 입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이상했다. 두 남자는 서하윤이 양다리를 걸치다 들켰는데도, 두들겨 패거나 욕을 퍼붓기는커녕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게다가 연적인 상대와 싸우려 들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서하윤이 깨어나지 못했던 3일간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설마 서하윤을 공유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걸까? 그러면 문제였다. 아주 큰 문제였다.

“두 사람이 결정하기 싫으면 제가 둘 중 한 사람만 고르는 방법도 있고요.”

김민석은 조심스레 말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몰아쉬고 용기로 가슴을 채우며 물었다.

“두 분이 결정하든, 아니면 제가 결정하든. 어느 쪽이 좋으세요?”

“…골라? 네가? 우리를?”

최상혁이 느릿하게 말했다. 말과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몸이 오싹해졌다. 건드리면 안 될 부분을 건드린 느낌이었다.

주춤주춤 최상혁에게서 멀어지는데 등 뒤에 하준서가 툭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려는데 하준서가 양손으로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나쁜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하윤아.”

앞, 뒤. 최상혁의 눈길과 하준서의 손길에 붙잡혀 도망갈 곳이 없었다. 두 사람이 딱히 뭔가 한 것도 아닌데 대단한 위협감이 느껴졌다. 대충대충 상대해 넘길 인간들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그러게요. 기억도 안 나는데 함부로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이 얘기는 나중에… 상황 봐서 다시 하든지… 하죠.”

김민석은 얼른 꼬리를 말고 납작 엎드렸다. 그게 정답이었던지, 짓눌려 짜부라질 것 같았던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었다.

서하윤의 몸에 들어온 건 로또급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인데, 지금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혹시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몸이 들어와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 ❖ ❖

전화를 받은 최상혁은 썩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집을 떠났다. 몇 번이나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리는 걸 무시하더니, 더는 버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조폭이든, 아니면 조폭 비슷한 것이든 일단 일이 바쁘긴 한 기색이었다.

안녕히 가시라는 김민석의 인사에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기쁨이 배어 있었다. 일단 한 명이라도 이 집에서 몰아낸다는 것이 기뻤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 뒤에는 속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는 강렬한 소망도 함께 중얼거렸다. 최상혁은 잠시 그 새카맣고 무거운 눈으로 김민석을 응시하다가 대문을 나섰다.

최상혁이 떠난 집에는 하준서가 남아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자신의 옆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는 하준서는 마치 제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김민석은 느릿하게 소파로 다가가면서, 어떻게 해야 남은 한 남자마저 이 집에서 몰아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척 보기에도 상대하기 어려운 최상혁과 달리, 하준서에게는 말을 꺼내기가 쉬웠다. 그는 부드럽고 다정한 분위기의 남자였으므로 아무래도 만만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간혹가다 느끼는 싸한 느낌은 하준서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본능을 일깨워 줬지만, 일단 최상혁보다야 대하기 편했다.

“하준서 씨도 이제 가 보셔야죠?”

김민석은 편하게 말을 던졌다. 말은 곱게 했지만, 속뜻은 빨리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빨리 하준서마저 내보내고 이 집 안을 속속들이 뒤집으면서 부잣집 도련님의 삶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준서는 이 집을 나설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상태도 안 좋은 하윤 씨를 두고 갈 수는 없죠.”

“뭐 볼일 같은 건 없으세요?”

“네. 전 최상혁 씨와 달리 굉장히 한가해요. 하윤 씨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옆에서 간호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결론적으로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김민석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귀찮은 기색을 살짝 내비쳤다. 아주 살짝이라도 분명 알아챘을 터임에도, 하준서는 마치 그 표정을 보지 못한 것처럼 과일을 하나 찍어 입 앞에 내밀었다. 귀한 과일을 낭비할 수는 없기에 김민석은 자동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서 과일을 받아먹었다. 입 안에 들어온 과일을 우적우적 씹으며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자니, 하준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저녁 준비해야겠네요.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어요.”

하준서가 김민석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이 집에 와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 하준서는 냉장고를 열어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식재료를 쏙쏙 빼내었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손길이었다.

하준서가 저녁을 만들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하준서를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의 눈길에서 벗어나게 된 셈이었다. 김민석은 아까부터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일들을 하기로 했다. 바로 집 안 탐험이었다.

제일 먼저 들어간 것은 안방이었다. 잘 정리된 커다란 침대가 정중앙에 놓여 있고, 양옆으로는 협탁이 있었다. 협탁 위에 놓인 모던한 느낌의 조명을 보고 있자니 딱 호텔 방에 있는 것 같았다. 침대 발치 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대와 작은 욕실이 나타났다. 사용감 하나 없이 깔끔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경대 위로 여러 가지 화장품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 사람이 사는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안방 탐험은 그렇게 금방 끝이 났다. 눕기만 해도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 포근한 침대를 괜히 손으로 몇 번 눌러 보며 방을 나서자 부엌에서 뭔가 썰고 있는 하준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김민석은 그런 하준서를 힐끗거리며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드레스 룸이었다.

벽의 삼면이 시스템 옷걸이로 가득 차 있고 옷이 어마어마하게 걸려 있었다. 옷 가게 하나를 통째로 다 털어 와야 겨우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규모였다. 저게 다 이 몸의 옷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청바지 세 개에 셔츠 몇 개로 돌려 입는 김민석의 신세와는 아주 딴판의 세계였다.

잠시 옷들을 손끝으로 쓸며 방을 배회하던 김민석은 방 중앙으로 갔다. 방 중앙에는 하얀 서랍장이 놓여 있었는데, 맨 위 칸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장 안쪽으로 시계들이 가지런히 놓인 게 보였다. 손목시계 자체가 없었던 김민석의 안목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시계들뿐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유리장 한쪽을 차지한 액세서리 정리함에는 번쩍거리는 반지며 팔찌, 귀걸이까지 가득했다. 하나같이 그 아름답고 럭셔리한 자태를 빛내고 있었다.

‘귀를 뚫었었나?’

김민석은 한쪽 구석에 있는 커다란 전면 거울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귓불을 살폈다. 확실히 양쪽 귀에 하나씩 구멍이 나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귀걸이를 끼지 않은 상태였다. 한 번도 귀를 뚫거나 액세서리를 해 본 적 없었던 김민석이다. 마침 잘되었다 싶어 유리장을 열어 손가락으로 귀걸이들을 쓸었다. 기왕 이렇게 잘난 외모에 귀까지 뚫려 있으니 그놈의 귀걸이라는 걸 한번 해볼 요량이었다.

딱히 치렁치렁한 모양새의 귀걸이는 없었다. 침 뒤에 동그란 볼이 달린 작은 피어싱이 대부분이었다. 김민석은 거울 속의 하얀색 미모의 얼굴과 귀걸이를 번갈아 보며 가늠하다가, 그중 새빨간 작은 보석이 반짝이는 귀걸이를 골라 들었다. 거울 앞에 다가가 귀에 대 보니 눈물점과 어우러져 대단히 색기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남자가 색기를 흘려서 좋을 게 뭐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나쁠 건 또 뭐란 말인가. 메이크업한 남자 아이돌이 난무하는 지금 세상에 와서는, 여자든 남자든 예쁘고 멋지고 매력 있고 색기 있는 게 최고였다.

결정을 내린 김민석은 피어싱을 조심스레 귀에 꿰었다. 처음 해 보는 거라 몇 번이나 실수로 땅에 떨어뜨리고 더듬어 찾는 것을 반복하고서야 제대로 착용했다.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양 귓불에 반짝이는 피어싱을 꽂고 거울을 보자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쯤 되니 김민석은 잔뜩 흥이 났다. 액세서리 정리대에서 무난해 뵈는 반지를 빼내어 엄지손가락에 끼고, 시계도 하나 빼서 손목에 찼다. 그리고 걸려 있는 옷들을 이리저리 빼서 몸에 대보며 옷을 골랐다. 이렇게 많은 옷을 가지고 있는데 하루 종일 같은 옷만 입고 있는 건 낭비였다. 평범한 옷부터 클럽이나 무대에 오를 때나 입을 법한 화려한 것까지 다양했는데, 하나같이 비싼 브랜드 옷이 틀림없었다.

몇 벌 갈아입어 본 끝에 고른 것은 결국 제일 무난하고 평범한 바지와 셔츠였다. 외출하는 것도 아닌데 삐까번쩍하게 빼입는 것도 좀 그렇고, 항상 후줄근하게 입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이라도 튀는 옷은 도저히 입고 있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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