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럼, 퇴원도 했으니 이제 제대로 얘기를 시작해 볼까?”
최상혁이 허벅지 위에 양손을 깍지 껴 얹은 채 선언하듯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사람 귀에 아주 선명히 꽂혀 드는 묵직함이 있었다.
“…얘기? 무슨 얘기요?”
김민석은 아주 달콤한 사과 한 쪽을 입에 넣은 채 우적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최상혁의 한쪽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삐뚤어 올라갔다. 그가 김민석을 노려보며 아주 느릿하게 입을 뗐다.
“네가 저 인간과 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들킨 건에 대해서 말이야.”
“……? …켁!”
최상혁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한 김민석은 이내 씹던 사과가 목에 걸려 캑캑거렸다. 하준서가 걱정스레 등을 두드려 주었다. 김민석은 결국 접시 위에 씹던 사과를 몽땅 뱉어 내고서야 기침을 멈추었다.
“괜찮아요? 하윤 씨?”
하준서가 이번에는 가슴을 쓸어 주며 물었다. 김민석은 그 손을 밀어내며 외쳤다.
“아니요! 하나도 안 괜찮은데요!”
작게 외친 김민석은 경악한 눈으로 자신의 양쪽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두 사람은 서하윤이 양다리 걸치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
침묵이 흘렀다. 아주 무거운 침묵이었다.
김민석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여유 있고 상냥한 태도로 받아 주던 하준서가,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다정한 듯 아닌 듯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응시해 왔다. 그 태도로 답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서하윤이 병원에 실려 가고 보호자로 불려 왔다가 둘이 우연히 마주치게 된 건가요? 서로 애인이자 보호자라고 주장하다가 서하윤이 이제껏 양다리 걸치고 있었던 걸 알게 됐고요?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은 걸 알았는데, 막상 상대는 머리를 다쳐서 누워 있어 화도 못 내고 있었고요? 그런데 심지어 깨어나고 나니까 두 사람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있는 상태고?”
말을 늘어놓을수록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힘이 실렸다. 말하면 할수록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김민석은 서하윤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제3자의 입장에서 말하듯 노골적으로 내뱉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해 놓고 보니 양쪽에서 쏟아지는 분노와 원망의 눈길은 결국 김민석의 몫이 되어 버렸다.
최상혁의 턱 근육이 꿈틀거리고, 하준서는 씁쓸하고 상처받은 눈길을 보냈다. 그들 사이에 놓인 김민석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고도 저지른 게 되어 버린 죄의 무게에 짓눌려 깨갱하는 심정이 됐다.
“그것참….”
작게 입을 뗀 김민석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이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치 비꼬는 것처럼 돼 버린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에 최상혁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김민석은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혹시 최상혁이 때리겠다고 달려들면 얼른 하준서의 뒤로 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요…. 진짜 그런 거라면 너무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일이긴 한데, 아시다시피 제가 기억이 하나도 없잖아요? 사과하고 싶어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란 말이죠….”
김민석은 이번에는 몸이 바뀌었다는 말을 쏙 빼놓았다. 아까 생각했듯이 본래 몸으로 굳이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몸을 계속 독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원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이제 해리성 장애가 아니라 기억 상실증 정도로 우길 심산이었다.
어쨌든, 이 몸을 차지하기로 한 이상 자신은 서하윤이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였다. 김민석은 앞으로 철저히 서하윤으로 처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음…. 그러니까 최상혁 씨. 하준서 씨.”
둘을 번갈아 보며 부른 김민석은 최상혁과 하준서에게 차례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나름대로 진심을 짜내어 담아 사과를 하자 최상혁과 하준서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별 희한한 꼴을 다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렇게 잘생기고 번듯한 두 미남을 두고 몰래 양다리를 걸쳤다니 참 쓰레기 같은 짓을 했네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다친 저를 배려해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니… 참 감사합니다.”
김민석이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말을 잇는데, 두 남자는 여전히 희한한 것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보통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다가 들키면 욕을 먹고 차이게 마련이잖아요. 두 분께서 저한테 어떤 욕설을 퍼붓고 설사 따…귀를 때리신다고 해도….”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최상혁과 하준서의 손을 보고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깨끗이 헤어져 드리겠습니다.”
겨우 말을 마친 김민석은 이제 욕을 퍼붓든지 잡아 패든지 알아서 하라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오른쪽에서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왼쪽에서는 옅은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뜨자 비웃음을 지은 최상혁과 묘한 미소를 지은 하준서가 보였다. 두 사람은 욕을 할 생각도, 때릴 생각도, 헤어져 줄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
“병원에서도 말한 것 같은데…. 나는 하윤 씨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어요.”
하준서가 먼저 말하며 한 손을 가져가 깍지 꼈다. 아프게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위협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최상혁을 보자 그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헤어지면 널 죽여야 하는데, 죽고 싶은가 보지?”
거기까지 말한 최상혁이 다리를 바꿔 꼬며 덧붙였다.
“물론 나 몰래 저 새끼랑 붙어먹은 걸 들킨 시점에서 넌 이미 죽은 목숨이긴 하지만.”
“아니, 최상혁 씨는 왜 말을 항상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세요….”
김민석은 죽은 목숨이네 어쩌네 하는 말에 대번에 따지고 들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는 큰 효과가 없었지만.
“날 놔두고 다른 새끼한테 가랑이를 벌리는 것부터가 극단적인 선택 아닌가?”
최상혁이 묵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랑이를 벌리다니 뭐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하세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그리고 제가 하준서 씨한테 가랑이를 벌…, 어쨌든 그랬는지 어땠는지 어떻게 알고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세요.”
김민석은 여전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일단 했다. 최상혁이 하,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왼쪽에 앉은 하준서가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작게, 그러나 최상혁의 귀에 충분히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렸어요. 가랑이.”
“…….”
김민석은 하준서의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상스러운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 속삭임을 고스란히 들은 최상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눈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선 하준서를 타박했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꼭 해야 해요?”
원망이 가득 실린 눈초리로 쳐다보자, 하준서가 미묘한 미소를 옅게 지으며 말했다.
“화가 난 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하윤 씨. 날 놔두고 여태껏 다른 남자랑 흘레붙다니, 정말 깜찍하고 귀여운 짓을 했잖아요?”
하준서가 정말이지 화사하게 웃었다. 사람이 웃는 모습에 섬찟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김민석은 그 순간 처음 알았다. 싸한 느낌에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 도망가고 싶어졌다.
“……어쨌든, 저는 지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김민석은 써먹기 편한 기억 상실을 무기로 빼 들었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니 양심에 거리낄 게 없었다. 김민석은 내친김에 배짱을 튕기기로 했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고사하고 나에 대해서도 기억나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저도 어쩔 도리가 없네요. 어차피 양다리 걸치는 걸 들켰으면 한바탕 싸우고 헤어지는 게 기본적인 순리일 테니까 깨끗하게 헤어지시죠.”
“살기를 포기했나 보지?”
“그건 안 돼요.”
두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그러자 김민석은 한발 양보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둘 중 한 분이라도 헤어져 주세요. 제 양심상 양다리는 못 걸치겠거든요. 전 어차피 기억도 없으니까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김민석은 소파에 등을 깊이 묻어 두 남자 사이에서 몸을 뺐다. 일단 자신은 쏙 빠져나간 뒤, 두 사람이서 싸움을 하든 합의를 하든 하게 할 요량이었다. 일단 한 명이 빠지고 나면 나머지 한 명도 어떻게든 떨쳐 내면 된다. 둘보단 하나가 상대하기 쉽지 않겠는가? 꼼수였지만 좋은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