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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5화 (5/125)

5화

“어디로 갈까요?”

하준서가 시선을 느낀 듯 눈길을 마주치며 물었다.

“네?”

김민석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묻자,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내 집으로 갈까요, 아니면 하윤 씨 집으로 갈까요?”

“…당연히 서하윤… 아니, 내 집으로 가야죠.”

김민석의 말에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서로의 집에도 들락거리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저기 그런데 내 집은, 우리 집은 그러니까….”

김민석은 말 나온 김에 묻기 위해 입을 뗐다. 하지만 뒷말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애매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몸이 부잣집 도련님이냐 아니면 가난뱅이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묻기에는 너무 민망하지 않은가.

하준서는 김민석이 진짜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아챈 것 같았지만, 질문을 끝마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민석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며 진짜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저 어디 사는데요?”

“음… 아파트?”

서울의 아파트라니.

“월세예요, 전세예요, 자가예요?”

하준서가 작게 웃었다.

“몇 평인데요?”

“아마 서른 평대일걸요?”

“오!”

김민석은 숨김없이 감탄을 토했다. 서울에 서른 평대 아파트라니! 그것도 혼자 사는데?!

“저 혹시 부자예요? 부잣집 도련님이거나 뭐 그런 거예요?”

하준서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그냥 웃어넘겼다. 그러더니 한 손을 뻗어 김민석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역시 귀엽다니까.”

하준서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눈가와 입가에는 진한 웃음에 배어 있었는데, 잘못 본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입가의 미소가 살짝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하준서는 묻는 것은 뭐든지 고분고분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몇 가지 질문은 그냥 작게 웃는 걸로 넘겨 버렸다. 이미 얻어 낸 대답만으로도 상당한 성과가 있는지라, 김민석도 두 번 세 번 캐묻지는 않았다.

차는 어느새 고층의 고급스러운 아파트 단지로 접어들었다. 하준서의 차는 이미 아파트에 등록된 듯, 입구를 손쉽게 통과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차를 세운 하준서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비싼 차이니만큼 작은 흠집이라도 낼세라 조심스럽게 안전띠를 풀고 나니 하준서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차에서 내리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하준서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번에 김민석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김민석은 어찔한 머리를 짚으며 확실히 머리를 다치긴 했나 보다 생각했다.

“억지로 움직이지 말고 잠깐 가만히 있어 봐요.”

하준서가 그를 부축한 채 다정하게 말했다.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이고 나니 시야가 맑아졌다.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김민석은 자신을 부축한 하준서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하준서는 영 안심이 안 되는지 더 부축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김민석이 밀어내니 순순히 한 걸음 물러섰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하준서가 23층을 눌렀다. 김민석은 엘리베이터 옆면에 붙어 있는 큰 거울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병원에서 의사가 보여 준 작은 거울이나, 병원 유리문에 비친 어슴푸레한 모습은 보았지만 이렇게 큰 거울에 바짝 붙어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짝 파리해 보이는 피부는 눈처럼 희었고, 눈물점 위로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눈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거울 속 인물을 살피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서하윤이라는 이 남자는 잘생기다 못해, 전신에서 진한 매력과 묘한 색기까지 흘렸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다 거울 속에 비친 하준서와 눈이 마주쳤다. 관찰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김민석을 응시하던 하준서는 눈이 마주치자 이내 싱긋 웃었다.

땡.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하준서가 앞장서서 내리며 오른쪽에 있는 집 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서슴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는 서하윤과 김민석의 생일이었다.

‘생일로 비밀번호를 하다니 도둑맞기 딱 좋게 해 놨네.’

김민석은 속으로 생각하며 하준서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부풀었던 기대감은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오-!”

김민석은 숨김없이 감탄하며 서둘러 신발을 벗어 던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서른 평대라고 하더니 과연 집이 대궐만큼 넓었다. 뭐 삼십 평까지고 대궐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좁아 터진 고시원에 살던 사람에게 이만한 집이면 대궐이고도 남았다.

“와. 완전 부잣집이네.”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리며 집 안을 바쁘게 이리저리 휘젓고 돌아다녔다. 아파트는 인테리어부터 가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어딜 보아도 먼지 하나,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화장실도 사용 흔적이라고는 없이 깨끗했다. 가 본 적은 없지만 대충 고급 호텔 같은 느낌이었다.

김민석이 그렇게 온 집 안을 구석구석 구경하고 다니는 동안, 하준서는 익숙하게 부엌 냉장고에서 과일과 음료를 꺼내 준비했다. 김민석은 과일을 깎는 하준서를 신기한 눈으로 흘끔했다가 이번에는 탁 트인 거실 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와, 저거 혹시 한강이에요?”

김민석이 창에 달라붙은 채 묻자, 하준서가 말없이 웃었다. 긍정인 것 같았다. 아니, 굳이 하준서가 대답해 주지 않아도 이 서울 바닥에 저만한 물줄기가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서울 금싸라기 땅에 한강이 보이는 신식 고층 아파트라니! 게다가 혼자 사는데! 부자도 어마어마한 부자가 틀림없었다!

잠시 멍하니 한강을 내려다보던 김민석은 창에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이만한 외모에 이만한 재력을 가진 몸이라니. 김민석이 아무리 운이 좋아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런 행운아로 태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몸을 차지하다니. 이건 어쩌면… 일생일대의 행운을 거머쥐게 된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김민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본래 몸으로 돌아갈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진짜 김민석은 그저 그런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를 가졌다. 전 재산은 이백만 원이 조금 넘어가는 통장과 좁아터진 고시원 방 하나가 전부다. 대학은 한 학기 다니고 중퇴해 버렸고 제대로 써먹을 만한 자격증도 별반 없는 하류층 인생…. 그에 비하면 이 서하윤의 몸은….

“하윤 씨?”

뒤에서 하준서가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김민석은 천천히 몸을 돌려 하준서를 보았다. 상냥한 눈길.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서슴없는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민석이 감히 바라지도 못하던 모든 것을 다 가진 몸. 이 몸은 그런 몸이었다. 그런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왜 그래요? 또 어지러워요?”

하준서가 걱정스레 이마를 짚었다. 정신을 차린 김민석은 지나치게 상냥한 그의 손길을 슬며시 피했다. 하준서는 상심한 기색 없이 김민석을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으니 앞에 놓인 과일 접시와 음료가 보였다. 과일을 얼마나 예쁘게 깎아 장식했는지 보는 순간 절로 웃음이 났다.

“입맛 없어도 먹어 봐요. 조금 있으면 저녁이니까 그때 제대로 챙겨 먹게요.”

“네.”

김민석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평소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과일 몇 종류가 오직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기분이 달콤해졌다. 포크로 과일을 하나 콕 찔러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삑삑삑삑-

전자음이 들리더니 이내 현관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최상혁이었다. 그는 처음 본 이후로 늘 그랬지만 기분이 나쁜 얼굴로 신발을 벗고 걸어 들어왔다. 김민석은 일단 손님이 온 거라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최상혁을 바라만 보았다.

“…최상혁 씨도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아요?”

김민석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애인을 둘이나 끼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인데 그 두 사람 모두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 주다니. 이 서하윤이라는 인간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벌써 거사를 치른 사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둘 중 하나와 야한 짓이라도 하다가 나머지 하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쩌려는 건지.

‘헐. 야한 짓이라니! 야한 짓이라니!!’

김민석은 속으로 잠시 떠올린 상상을 서둘러 털어 냈다.

“어서 먹던 거 먹어요.”

하준서가 김민석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앉히며 말했다. 최상혁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찌푸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천천히 소파를 향해 걸어왔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김민석은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준서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마치 달래듯 어깨를 작게 도닥였다.

최상혁이 일자 소파를 스쳐 지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검은색 가죽 소파에 등을 깊게 묻고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몹시 오만해 보였다. 문제는 그런 모습이 마치 명화 속 그림처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뭐, 이 몸도 최상혁 앞에서 쫄리는 외모는 아니라고.’

김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비죽였다.

“그럼, 퇴원도 했으니 이제 제대로 얘기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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