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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4화 (4/125)

4화

“집이요?”

작게 묻자, 하준서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제가… 집이 있나요?”

보육원에서 나온 후 쭉 좁아 터진 고시원에서 생활한 김민석에게 집이라는 것은 꽤나 달콤하고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실린 얼굴로 묻자, 하준서가 작게 웃었다.

“당연히 집이 있죠. 집이 없으면 어디서 살겠어요?”

“그럼 가족도 같이 사나요?”

“…아뇨. 하윤 씨는 혼자 살아요.”

하준서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집이 어떤 집인데요? 고시원? 원룸? 투룸? 하숙집? 아니면… 설마 오피스텔이나 아파트?”

환자복을 입고 있는 데다 이 몸의 신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눈앞의 두 남자뿐이라, 이 몸의 경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머무는 거라도 일단 부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준서가 손을 뻗더니 김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묘하게 그리움이 실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 우리 하윤이.”

우리 하윤이,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정다움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이 몸과 하준서가 정말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정이 담뿍 실린 눈빛과 목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 그만하고, 퇴원하게 빨리 옷이나 입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채 지켜보던 최상혁이 사물함에서 옷가지를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평범한 청바지와 셔츠였다. 일단 병원에서 나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김민석은 순순히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환자복 상의를 벗으려다 멈칫했다. 같은 남자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저들은 게이가 아닌가. 그것도 이 몸의 애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훌러덩 옷을 벗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지. 오히려 신경을 쓰는 게 더 이상하지.’

김민석은 곧 마음을 고쳐먹고 상의를 시원하게 벗어 던졌다.

❖ ❖ ❖

퇴원하며 걱정한 것 중 하나는 병원비였으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퇴원 수속은 두 남자가 알아서 했고 병원비 역시 결제한 모양이었다. 김민석은 틈을 봐서 살짝 빠져나가 김민석이라는 사람이 실려 온 일이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으나 어림없었다. 최상혁이 없을 때는 하준서가, 하준서가 없을 때는 최상혁이 옆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일단 김민석은 병원 이름만 머리에 단단히 기억했다. 나중에 전화해서 김민석이라는 환자가 실려 왔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주차장으로 나가자 해방감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걱정 먼저 들었다. 이게 진짜 현실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힐끗 본 하늘은 화창하고 눈부셨다. 눈으로 내리꽂히는 햇볕에 눈매가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현실이구나.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두 사람은 양쪽에 붙어 걸었다. 최상혁은 쌀쌀맞은 얼굴로 반보 정도 앞서 걸었고, 하준서는 바로 곁에 달라붙은 채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한 발 한 발 부축하듯 걸었다. 다정한 거야 감사한 일이지만, 어린아이 돌보듯 하는 태도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당장으로써는 최상혁의 태도가 차라리 편했다.

주차장 한가운데 멈춰 서자 문제가 생겼다.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선 최상혁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오른쪽에 주차된 육중한 검은색 벤츠를 가리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하준서가 왼쪽에 주차된 날렵한 하얀색 포르쉐 쪽으로 김민석을 이끌었다.

“타.”

“타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김민석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두 사람의 얼굴과, 두 사람이 가리킨 비싸 보이는 외제 차를 번갈아 보았다.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두 사람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의 차 역시 그랬다. 검은색 차는 최상혁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고, 하얀색 포르쉐 역시 하준서에게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둘 다 가난뱅이 김민석의 엉덩이를 붙이기에는 소름 끼치게 비싼 차라는 사실이었다.

“우와, 씨….”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양 차를 탐욕스레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더라니 이런 대단한 부자들이었다. 이런 부자들과 사귈 정도라면 이 몸의 주인 서하윤도 부자가 아닐까? 엄청난 기대감이 치솟았다.

양쪽 차를 다 감상하고 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뭘 탈지 가늠할 사이도 없이, 최상혁이 크고 단단한 손으로 김민석의 손목을 낚아채 벤츠 쪽으로 잡아당겼다. 병원에서 처음 만난 이래로 늘 그랬듯 거칠고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얼마나 힘이 센지 몸이 당장에 휘청 이끌려갔다. 하지만 어깨를 쥐고 있던 하준서가 재빠르게 김민석의 몸을 감싸 안듯 잡아당겼다. 최상혁이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하준서를 쳐다보았다. 딱히 자신을 노려보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김민석은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그 눈빛을 받는 하준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옅게 웃고 있었다.

“어디 탈래요? 하윤 씨?”

하준서가 상냥하게 물었다. 어디까지나 김민석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말투였다.

김민석은 자신의 손과 어깨를 속박하고 있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하준서 씨 차가 편할 것 같아요.”

최상혁의 새카만 눈이 김민석에게 꽂혔다. 그의 입은 단단히 맞물려 있었지만, 눈빛에서 쏟아져 나오는 질책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겨우 응시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가 죽는데 같이 차를 탔다가는 얼마나 어색하고 불안하겠는가. 자신은 마땅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춥겠다. 어서 타요.”

하준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김민석을 이끌었다.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부축해 앉히고 다시 문을 고이 닫아 주었다.

하준서가 보닛 쪽으로 빙 둘러 운전석으로 가는 동안, 최상혁은 제자리에 선 채 유리창 너머로 김민석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이건만 얼마나 마음이 불편한지 몰랐다. 결국, 김민석은 차 안을 구경하는 척 차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그 시선을 피했다.

운전석에 올라탄 하준서가 손수 안전띠를 매어 주었다. 하는 행동마다 얼마나 자상한지 진짜 애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누군가에게 이런 과한 친절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라 영 어색했다.

“혹시 가다가 멀미나거나 머리 아프면 바로 얘기해요.”

하준서가 걱정스럽게 김민석의 머리를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서가 그제야 차 시동을 걸었다. 앞을 보니 그 짧은 사이 최상혁의 모습은 사라진 상태였다. 건너편을 보자 차에 올라탄 최상혁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누가 조폭 차 아니랄까 봐 선팅이 짙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병원 정문을 나서는 길. 김민석은 혹시라도 자신의 본래 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병원 건물을 백미러로 응시했다. 기억도 없이 실려 들어왔다가, 다른 사람 몸에 들어앉은 채로 나서는 길이라니.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대관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낮게 한숨을 몰아쉰 김민석은 엉덩이가 배기는 느낌에 뒤로 손을 가져갔다. 바지 뒷주머니에 잡히는 것을 꺼내자 검은색 가죽 지갑이 나왔다. 그가 가져 본 적도, 가져 볼 상상도 못 해 본 명품 지갑이었다.

지갑을 열자 신분증이 바로 보였다. 운전면허증이었다. 면허증을 꺼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거울 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 박혀 있었다. 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에 눈 밑에 박힌 눈물점이 인상적이었다. 뭐라도 바른 것처럼 붉은 입술이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까지. 어떻게 뜯어보아도 연예인 뺨치는 미모였다.

미모? 남자에게 미모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사진 속의 서하윤에게는 확실히 그 단어가 어울렸다.

‘잘생긴 남자는 유부남이거나 게이라더니.’

김민석은 힐끗, 옆자리의 하준서와 면허증 속 사진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진 옆에 박힌 서하윤이라는 이름을 보다 다시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옆의 생년월일을 본 순간 잠시 멈칫했다. 22살. 2월 11일. 김민석 자신과 똑같은 생년월일이었다.

김민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과 외모는 전혀 딴판이지만 똑같은 생년월일. 혹시 몸이 뒤바뀐 데는 이것이 영향을 준 게 아닐까?

“몸은 괜찮아요?”

하준서가 살짝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조수석의 김민석을 걱정한 것인지 상당히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김민석은 짧게 대답하고 운전면허증을 지갑 속에 돌려 넣었다. 그리고 꽂혀 있는 카드 몇 장을 하나씩 꺼내 살피다 또 멈칫했다. 카드 한 장에는 서하윤이라는 영문 이름이 고이 찍혀 있었지만, 나머지 두 장은 이름이 달랐다. 김민석은 카드에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영어 이름을 입속으로 읽었다.

‘준서 하. 그리고 상혁 최.’

세 장의 카드 중 두 장은 하준서와 최상혁의 카드였다.

김민석은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일단 제자리에 돌려 넣었다. 제대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애인 사이에 카드를 공유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니…. 진짜 있을 법한 일인가?’

김민석은 운전에 열중한 하준서의 옆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대뜸 물어봐도 괜찮을지 가늠이 잘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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