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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3화 (3/125)

3화

돌아온 1인용 병실 안엔 무겁고 껄끄러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김민석은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발치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한쪽에는 검은 정장의 남자가, 그리고 반대쪽에는 갈색 남자가 서 있었다. 두 남자는 상당한 장신에 미남이라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검은 남자는 정장에 비싸 보이는 시계와 구두로 무장하고 있었고, 향수 냄새를 풍겼다. 김민석을 바라보는 눈은 차갑고 견고한 느낌이 들어서, 이 몸을 굉장히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그런 것치고는 병실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편안한 차림새의 갈색 남자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입가에 옅게 떠올라 있는 미소며 살짝 휜 눈꼬리 때문에 다정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에게서 풍기는 옅은 섬유 유연제 향기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김민석을 응시하는 다갈색 눈동자 역시 부드럽기 짝이 없어서, 그가 서하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몸의 주인을 상당히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 분은 최상혁 씨고….”

김민석이 검은 정장 남자를 보며 말하자, 남자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좋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기에 원래 그런 성격이려니 싶었다.

‘그렇게 싫으면 그냥 여기서 꺼지든지.’

김민석은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갈색 남자를 보며 그에게 들었던 이름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쪽 분은 하준서 씨고….”

“맞아요.”

갈색 남자, 하준서가 잘 말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섬세한 느낌의 미남이 기쁜 듯 웃으니 병실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김민석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대관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진짜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된 건지, 어쩌다 몸이 뒤바뀐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지금 서하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내 몸을 돌려 내라 떠들고 다니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강경하게 나갔다가는 꼼짝없이 정신 병동에 갇힐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저기 그럼 두 분은… 이 몸이랑, 그러니까 서하윤 씨랑 어떤 사이신가요?”

김민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검은 남자는 인상을 한층 더 찌푸렸고, 갈색 남자는 미소를 좀 더 진하게 지었다.

“혹시… 형제?”

생긴 것으로 봐서는 별로 가능성이 없는 얘기 같았지만 일단 던져 보았다. 갈색 남자, 하준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친한 지인인가요? 아니면 일하는 곳 사장님이신가요?”

하준서가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향을 풍기며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김민석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을 잡더니 말했다.

“애인이에요.”

“……네? 애인이요?!”

머리에 렉이 걸렸다. 애인? 무슨 애인? 그런 애인? 아니, 그런 애인이 뭔데? 데이트하고 뽀뽀하고 그러는 애인?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으려니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폭탄을 날렸다.

“네. 맞아요. 우리는 하윤 씨 애인이에요.”

쾅!

해머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강타했다. 눈앞이 어찔해졌다.

“우리는, 이요?”

김민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하준서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애인이라고요?”

김민석은 떨리는 눈으로 검은 남자, 최상혁을 쳐다보았다. 최상혁이 미간에 주름을 진하게 잡더니 씹어 먹을 것 같은 눈으로 툭 내뱉었다.

“그래.”

“아, 씨발. 그냥 게이도 아니고 변태 게이 몸에 들어왔네.”

김민석은 멘탈이 아작 나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러운 걸 털어 내듯 자신의 손을 쥔 하준서의 손을 떼어 내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일단 지금 이 몸을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한 멋모르는 남자들과 애인 따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이상한 삼각관계에 휘말리는 것도 절대 사양이었다.

“헤어지죠, 우리.”

김민석이 하얀 병원 시트로 방어하듯 몸을 가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두 남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무표정하게 변했다. 찌푸린 채, 혹은 다정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일순간 씻은 듯 무표정하게 변하니 팔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본능적인 두려움? 공포심?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살벌하다는 단어 외에는 이 분위기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뭔가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몸이 움츠러들었다. 두 남자가 당장 달려들어 다리를 분질러 버릴 것 같은 비현실적인 두려움마저 들었다. 왜일까. 저 두 남자가 진짜 이 몸의 애인이라면, 애인에게 이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상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런 말은 쉽게 하는 거 아니에요, 하윤 씨.”

하준서가 문득 빙긋이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 방금 전까지의 무표정은 마치 착각이었던 듯 깨끗이 사라진 뒤였다. 최상혁의 무표정 역시 스르륵 풀어져서,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이 조금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방금 느꼈던 공포심에 반발해 약간의 수치심이 올라왔다. 내가 누군가. 이 한 세상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김민석 아닌가. 겨우 게이 두 명에게 헤어지자는 말하는 걸 두려워해서야 쪽팔린 일이었다.

김민석은 언제 어깨를 움츠렸냐는 듯 가슴을 쭉 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전 지금 서하윤이라는 기억도 전혀 없고요. 두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꼭 계속 사귀어야 하나요? 지금 저는 두 사람 중 누구한테도 애정을 못 느끼고 사귀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러니까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최상혁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하준서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하윤 씨. 하윤 씨는 우리랑 못 헤어져요.”

하준서가 단정하듯 말했다. 김민석은 울컥 올라오는 반발심을 가득 실어 짧게 물었다.

“왜요?”

대답은 하준서가 아닌 최상혁이 했다.

“나랑 헤어지는 순간 너는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최상혁은 무시무시한 말을 해 놓고 이제 어쩔 거냐는 눈길을 보냈다.

“아니, 씨발. 조폭이세요?”

김민석은 황당한 눈빛을 감추지 않으며 따지듯 물었다.

“아니야.”

“네.”

각기 다른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최상혁이 하준서를 노려보았고, 하준서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조폭이거나 그 비슷한 거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다. 일단 까불지 말자. 김민석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길을 피했다.

“…그러니까, 최상혁 씨는 저랑 헤어질 바에는 죽여 버리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이 몸을 사랑하고 있다…, 뭐 그런 감동적인 얘기인 거군요.”

김민석은 최대한 순화해서 얘기하려 애썼다. 툭하면 튀어나오는 욕설을 참아 보려고도 했다.

최상혁이 이걸 어떻게 한 대 패면 다치지 않고 최대한 아프게 후려칠 수 있을까 가늠하는 눈으로 김민석을 훑어보았다. 설마 사랑하는 애인이 다쳐 있는데 진짜 때리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괜히 쫄렸다. 김민석은 다급히 시선을 하준서에게 돌렸다.

“그럼 일단 하준서 씨라도 헤어져 주시죠.”

“그건 안 돼요.”

“왜요?”

“그거야 우리는 깊이 사랑하는 사이니까요.”

하준서가 손을 부드럽게 깍지 껴서 쥐며 말했다. 김민석은 낯선 남자와의 손깍지에 소름이 돋아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이 섬세하게 생긴 미남은 생긴 것과 달리 얼마나 힘이 센지 대관절 손이 빠지질 않았다.

“저는 이제 하준서 씨를 사랑하지 않는데요.”

“괜찮아요. 제가 사랑하니까요.”

하준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손깍지를 한층 더 강하게 쥐는데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순간 참지 못하고 아, 신음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아팠어요?”

하준서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으며 손에서 힘을 좀 풀었다. 하지만 단단히 깍지 낀 손은 여전히 꽉 잡은 채였다.

어째 지금 헤어지자는 말을 더 주절거려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면 죽이겠다는 조폭 애인도 문제지만, 헤어지자고 했다가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부러뜨릴 것 같은 하준서도 별로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게이들의 애정이며 사랑이란 다 이렇게 격렬하고 정열적인 건가? 게이인 적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퇴원해서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고 만나지 않으면 끝날 문제 아닌가. 더구나 자신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면 다 해결될 문제였다.

김민석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닫자, 하준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의사한테 물어보니 퇴원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병원은 삭막하고 지루하니까 일단 집으로 가죠.”

“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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