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2화 (2/125)

2화

이름 : 김민석.

나이 : 22세.

가족 : 없음.

거주 : 보육원에서 독립한 후 쭉 고시원에서 거주.

직업 :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중.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김민석은 의사의 눈빛을 살폈다. 검은 뿔테 안경테 너머의 눈은 평온했다.

의사는 차트에 휘갈기던 펜을 내려놓고 양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잠시 김민석을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조금 더 심도 있게 상담을 해 봐야겠지만, 현재까지로 봐서 환자분은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리성 인격 장애요? 지금 제가 미쳤다는 건가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인격 장애고 뭐고 그냥 제가 김민석이라니까요?”

도대체 눈을 뜬 이후로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김민석은 속이 문드러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깨어난 이후 보았던 두 남자부터 시작해서, 이곳 진료실까지 오며 내가 바로 나라고 줄곧 주장해 왔건만. 결국 돌아오는 건 미쳤다는 말뿐이었다.

의사는 김민석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겠다는 듯 가만히 응시하며 관망할 뿐이었다. 김민석은 땅이 꺼질 것처럼 무거운 한숨을 몇 번 내뱉었다. 그런 후에야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다시 입을 뗐다.

“아무튼 저는 퇴원하겠습니다. 가 봐도 되죠?”

“서하윤 씨.”

“김민석인데요.”

“네. 그럼 일단 김민석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그거 고맙네요.”

일부러 삐딱하게 말했건만 의사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의사가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물었다.

“병원에 오기 전 상황은 기억나십니까?”

“아니요.”

“그럼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뭡니까?”

“아르바이트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요. 깨어 보니까 병원이네요.”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 세례만 받았지, 정작 자신이 궁금한 건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김민석은 의사를 향해 물었다.

“저 어쩌다가 병원에 온 건가요? 사고라도 났나요? 교통사고예요? 가해자는요?”

만약 교통사고라면 땡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히 길 가다 치인 데다 병원 신세까지 졌으니 합의금을 톡톡히 받아 낼 수 있으리라. 그거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는 안 하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서하윤 씨는.”

의사의 말에 곧장 인상을 찌푸리자, 의사가 다시 바꿔 말했다.

“환자분은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습니다.”

“…네?”

김민석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3층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가벼운 뇌진탕뿐이니 그야말로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니, 내가 대체 왜 건물에서 떨어져? 분명히 아르바이트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는데 옥상에는 대체 왜 간 건데? 그리고 떨어지긴 왜 떨어진 건데? 설마 누가 끌고 가서 밀었나?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의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팔을 뻗어 책상 구석에서 동그란 모양의 탁상 거울을 끌고 왔다.

“보세요.”

의사가 거울 각도를 김민석 얼굴에 맞춰 주며 말했다. 김민석은 별다른 생각 없이 거울을 보았다가 이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에는 유난히 새카만 눈과 머리칼,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을 가진 젊은 남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생긴 것은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들처럼 기생오라비 형상이었고, 왼쪽 눈 아래에는 눈물점이 찍혀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만약 지나가는 길에 마주쳤다면 ‘오, 연예인인가?’ 하며 눈여겨보았을 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김민석이 기억하는 자신의 얼굴과는 영판 다르다는 점이었다. 김민석의 얼굴은 그리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의 표본이었다.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이 절대 아니었다.

김민석은 거울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었다. 거울 속의 사람도 김민석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건….”

김민석은 신음하듯 중얼거리다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지금까지 말하면서도 몰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평범한 중저음이던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정신이 멍해졌다. 이게 대체 뭐지? 그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거울을 보고 또 봐도,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여도, 거울 속 얼굴은 자신의 움직임을 그대로 구현했다. 손으로 얼굴을 꼬집자 아픈 것도 매한가지였다.

“저기요….”

김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겨우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 낸 후, 의사에게 다소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무래도 다른 사람하고 몸이 바뀐 것 같은데요.”

의사는 당황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통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 생기는 기억 상실증이나 해리성 장애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차차 좋아지게 마련이니까요. 물론 치료도 꾸준히 병행해 줘야 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이 사람, 그러니까 이름이 뭐라고요?”

“서하윤 씨.”

“네. 이 서하윤이라는 사람이랑 나랑 몸이 바뀐 것 같다니까요. 이 사람 3층에서 떨어졌다면서요. 아마 나도 사고를 당한 모양인데 그래서 영혼이 바뀌거나, 뭐 그런 것 같은데요. 혹시 이 병원에 김민석이라고 사고로 들어온 사람 없는지 확인 좀 해 주세요.”

자신이 들으면서도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말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이 말이 얼마나 어이없이 들릴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완전히 딴 사람의 외모가 돼 버린 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진짜 김민석이었고, 보육원에서 자라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생생히 기억했다.

“자, 일단 진정하시고요.”

의사가 앞에 놓은 거울을 옆으로 치우며 달래듯 말했다.

“아니, 이게 지금 진정할 때예요?!”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저는 전적으로 환자분 편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 같이 찬찬히 이 상황을 풀어 나가 보죠.”

의사가 한결같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한 것을 달래려 하는 말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의사가 침착한 모습을 보이니 이쪽의 흥분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김민석은 한숨을 몰아쉬며 입가를 쓸었다. 그리고 의사가 옆으로 치워 놓은 거울을 흘깃 보았다. 의사가 눈치 빠르게 거울을 다시 들이밀었다. 김민석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아니지, 서하윤의 얼굴을 조심조심 더듬어 보았다. 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희고 고운 피부를 만지는 감촉이며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 김민석이 서하윤이라는 사람의 몸을 입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김민석은 힘없이 물었다. 돌아올 대답을 들어 봐야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통 이 정도의 해리성 장애가 오면 단기간이라도 입원 치료를 권하는데….”

입원 치료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말하는 입원 치료라는 건 정신 병동 입원을 말하는 거였다. 정신 병동이라니!

다행히 의사가 바로 덧붙였다.

“이번 경우는 강한 두부 충격 때문에 발생한 케이스라, 입원 치료보다는 예후를 지켜보면서 상담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민석은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다른 사람 몸에서 깨어난 것도 미칠 노릇인데, 정신 병동에 갇히기까지 한다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났다.

“저 그럼 이제 나가 봐도 되나요?”

김민석은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 문을 열자,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동시에 일어났다. 검은 정장 남자는 우울해 보이는 김민석의 얼굴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고, 갈색 남자는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로 다가와 부축했다.

“의사가 뭐래요?”

갈색 남자가 물었다.

“……해리성 장애가 생긴 것 같대요.”

김민석은 일단 정직하게 말했다. 그러다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검은 정장 남자를 올려보며 물었다.

“혹시 이 병원 응급실이나 입원 환자 중에 김민석이라는 환자 없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검은 정장 남자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눈빛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표정에, 김민석은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갈색 남자는 잠시 그를 빤히 응시하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아는 볼게요.”

“고맙습니다.”

김민석은 몸을 살짝 뒤로 튼 자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갈색 남자의 섬세한 얼굴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아주 찰나에 든 그 묘한 느낌이 거슬렸지만 김민석은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진짜 몸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어, 다시 몸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정신 병동에 갇히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행동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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