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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1화 (1/125)

1화

00.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흰 천장이 보이며, 병원 특유의 냄새가 퍼뜩 다가왔다.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팔을 들어 봤다. 링거가 꽂혀 있는 것을 보니 병원이 틀림없었다.

‘병원으로 향한 기억도 없는데 난데없이 왜?’ 하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1, 2초 정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선 채였다면 분명 쓰러졌을 터였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정신이 좀 명료해졌다 싶을 때에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요를 들춰 보니 병원 마크가 잔뜩 찍힌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환자용 침대, 머리맡에 걸린 링거와 침대 옆 환자용 사물함까지. 확실히 병원이었다. 응급실도 아닌 1인용 병실이 틀림없었다.

아니, 뜬금없이 내가 왜 여기 있지?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간호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간호사는 프로답게 금세 얼굴을 수습하고는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정신이 좀 드세요?”

“아… 네.”

한껏 잠긴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흘러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짧게 말한 간호사는 바쁘게 멀어졌다. 간호사가 사라진 병실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때를 잔뜩 탄 크록스 신발을 신고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다가온 의사가 침대 밑에서 차트를 꺼내 쭉 훑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응시하며 입을 뗐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은 나세요?”

의사가 대뜸 물었다.

“……아뇨. 그냥 눈을 뜨니까 병원이네요.”

조금 멍한 얼굴로 말하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부딪쳐서 뇌진탕이 오긴 했는데 MRI 결과는 좋아요. 아프거나 이상이 느껴지는 부분 있습니까?”

“좀… 두통이랑 목이 아픈데요.”

“뇌진탕 때문에 두통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아주 심한 것 아니면 약은 안 먹고 좀 참아 보세요. 혹시 너무 심해지면 꼭 말씀하시고요.”

“예.”

의사와 평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정신이 멍했다. 반쯤 정신이 빠져 있는 느낌이랄까. 내가 대체 어쩌다 병원에 있는 거지? 뇌진탕이라고? 머리를 다친 건가? 언제 다쳤지? 응급실도 아니고 병실인 걸 보면 며칠 지난 건가?

“MRI상으로 문제는 없으니까 일단….”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혼자 떠들던 의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서하윤 씨?”

“…서하윤요?”

“……?”

의사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런 의사를 보고, 그가 들고 있는 차트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입을 뗐다.

“전 김민석인데요?”

의사가 눈을 내려 차트를 확인했다.

“이름이 서하윤이 아니라고요?”

“네. 아닌데요.”

대답하면서도 황당했다. 아니, 이 병원 일을 제대로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의사가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오해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했다.

“제 이름은 김민석인데요.”

의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간호사의 미간에도 작은 주름이 생겼다. 나는 둘을 번갈아 보며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신분 확실히 확인한 거 맞습니까?”

의사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간호사의 표정이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잠시만요.”

간호사가 작게 말하며 병실에 있는 환자용 사물함을 열었다. 간호사가 사물함에서 옷가지를 꺼내 들고 왔다. 간호사는 침대 발치에 옷가지를 내려놓고, 그 위에 놓은 검은색 가죽 지갑을 집어 들었다.

간호사가 지갑을 펼쳐 한번 확인하더니 의사에게 건넸다. 의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지갑 안쪽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곧이어 신분증으로 보이는 카드 한 장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신분증 사진과 내 얼굴을 비교하듯 몇 번 번갈아 본 후 느릿하게 입을 뗐다.

“김민석 씨라고요?”

“네.”

의사와 간호사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왔다.

“음… 일단 보호자가 돌아오면 다시 얘기하죠.”

의사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하며 신분증을 지갑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차트를 침대 발치에 꽂아 넣더니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는 잠시 고민하듯 나를 응시하고선 옷가지를 들어 사물함에 정리해 넣었다.

“보호자 곧 돌아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링거를 한번 살피는 시늉을 한 간호사가 상냥해 뵈는 미소를 한 번 지어 주고서는 병실 밖으로 사라졌다.

환자가 뒤바뀐 것의 대처라기에는 이상했다. 상체를 일으키기 무섭게 머리가 핑하니 돌았지만 몇 초 동안 눈을 감고 있으니 괜찮아졌다. 꾸물꾸물 움직여 침대 발치로 손을 뻗었다. 거리가 애매했다. 다시 엉덩이를 좀 더 움직여 아래로 내려가고서야 차트에 손이 닿았다.

차트를 들여다보는 순간 절로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름란에 적혀 있는 세 글자. 서하윤. 아까 의사가 부른 이름이었다. 확실히 환자가 뒤바뀌거나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인지 모르게 머리가 깨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도 황당한데 신원 파악도 제대로 안 되어 다른 사람으로 오인당하고 있었다니. 그럼 보호자라는 사람도 제대로 불렀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주름진 미간을 문지르다 사물함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마 핸드폰도 저 안에 있겠지.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한 건가? 그럼 대체 누굴 부른 거지? 그러고 보니 MRI까지 찍었으면 병원비가 대체 얼마나 나오는 거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검은 정장 차림을 한 남자였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를 보는 순간 처음 든 생각은 더럽게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진한 눈썹 아래 자리한 강렬한 눈길은 거침이 없었고, 보기 좋은 만큼 높은 콧대와 잘 맞물린 입술까지. 여러모로 완벽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침대에 앉은 채라 정확한 키는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장신이 분명했다. 어깨는 떡 벌어져서 위압감이 느껴지고, 멋모르는 내가 보아도 헉 소리 나게 비쌀 것이 분명해 뵈는 정장은 맞춤인 듯 완벽한 핏으로 떨어졌다.

내가 남자를 훑고 감상하는 동안 남자 역시 강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자신을 관찰할 시간을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관찰하기 위함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강렬한 인상의 남자는 이쪽을 응시하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누구세요?”

말을 내뱉어 놓고도 좀 멍청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은 빈틈없이 차려입은 차림새, 반면에 이쪽은 후줄근한 환자복 차림이라는 점도 괜스레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하-!”

남자가 처음 내뱉은 것은 비웃음이 한껏 서린 한숨이었다. 남자의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저기요?”

나는 다소 조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을 하자는 거지?”

남자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차트를 잡기 위해 침대 아래까지 내려가 있던 몸이 저도 모르게 뒤로 슬슬 움직였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과 뒤로 슬슬 내빼는 엉덩이 걸음 중 무엇이 빠를지는 명약관화했다. 침대 바로 곁에 도착한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내 팔뚝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악력이 얼마나 센지, 그리 세게 잡은 것 같지 않은데도 인상을 찌푸려졌다.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저기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남자가 내 턱을 쥐어 올렸다.

“저기요?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서하윤. 내가 네 이런 장난질에 일일이 장단 맞춰 줄 만큼 한가한 사람이야?”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턱뼈가 아팠다.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얼마나 좋은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서는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가 났다.

“씨발. 이거 안 놔요?”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나마 말끝이 존대로 끝난 것은 잘못하다 남자에게 두들겨 맞을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었다.

역시 욕은 좋지 않았던 걸까? 새카만 남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맞는 건가? 하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손 놓고 말하지.”

낯선 목소리에 눈을 뜨자, 남자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하얀 얼굴과 갈색 머리칼에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고 섬세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정장 차림 남자의 눈빛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나는 잔뜩 굳었다. 내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는 게 아닌데도 온몸의 근육이 긴장될 정도였다. 하지만 사나운 눈빛을 받는 당사자, 갈색 남자는 살벌함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 옅게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손 놔. 하윤이가 아파하잖아.”

아파한다는 말에 검은 남자가 나를 힐끗 보았다. 내 표정은 살짝 일그러진 채였는데, 그것을 확인한 남자가 턱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겨우 풀려난 턱을 손으로 매만졌다. 남자가 마음만 먹었다면 턱뼈가 으스러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하윤 씨? 3일이나 못 깨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검은 남자를 밀치듯 침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병실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에 반사된 다정한 갈색 눈동자엔 걱정이 어려 있었다. 갈색 남자에게선 부드럽고 편안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갈색 남자가 내 허리를 덥석 안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떡 진 게 분명한 머리칼을 쓰다듬는 하얀 손이 다정하고 상냥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것을, 갈색 남자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간신히 물을 수 있었다.

“저기…, 근데 누구세요?”

갈색 남자의 다정한 눈빛이 쩡하니 굳는 게 보였다. 검은 남자는 다시 하! 하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재차 물었다.

“저 아세요?”

두 남자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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