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5/15)

#3

“사이클 테라피 휴식 기간이 다 되어 가네.”

달력을 빤히 바라보던 이정이 날짜를 체크해 보다 말했다.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예현이 고개를 돌려 이정을 바라보았다.

“너 지금 한창 촬영 중 아니야?”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이런 부분은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다 체크하니까. 며칠 정도는 뺄 수 있어.”

사이클 테라피, 시술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예현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 그 시술을 이정이 가볍게 입에 올렸다.

“괜히 휴식 기간 놓쳤다가 문제 생기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날짜 잡아서 며칠 고생하고 끝내는 게 낫기도 하고.”

알파와 오메가라면 누구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페로몬, 그리고 사이클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사이클이라도 모두가 사이클을 똑같이 넘기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은 사이클을 호르몬제로 겨우겨우 견디거나, 연인이나 사이클 파트너와의 관계를 통해 페로몬을 해소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며칠마저 허투루 날리기 아쉬운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사이클 테라피였다. 간단한 시술을 통해 사이클을 최대 2년까지 겪지 않게 해 주는 사이클 테라피는 편의성만큼 어마어마한 비용을 자랑했다.

물론 예현의 기준에서 그런 것이지 이정에게는 그리 대단한 돈이 아닐 테지만 말이다.

“마지막 휴식 기간이 형 만나기 한 달 전이었으니까, 다음 달에는 테라피 없이 일주일을 보내야 해.”

사이클 테라피를 받지 않고 일주일을 보낸다는 것, 그건 그 일주일 동안 이정에게 러트가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예현은 사이클 테라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2년 만에 찾아오는 러트이니 평범한 러트보다는 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 기간엔…… 보통 뭘 하고 지내?”

“지금까지는 약 먹고 일주일 내내 집 안에 박혀 있었지. 괜히 누구라도 들였다가는 사생활 논란 같은 데 휩싸일 수도 있으니까.”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성, 게다가 2년씩이나 쌓인 사이클을 일주일 동안 견디려면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힘들었을 텐데.

예현이 조금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예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챈 이정이 예현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이번엔 나도 예쁜 애인이랑 보낼 거라 괜찮은데.”

“어?”

“어? 라니. 혹시 나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이었어?”

그건 좀 상천데…… 이정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예현을 바라보았다. 예현이 당황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힘들었겠다 싶어서.”

연인이 된 이후로 예현은 늘 이정과 함께 사이클을 보냈다. 이정은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 예현의 히트 사이클 중 하루 이상은 그의 곁을 지키려 노력했다.

물론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매번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정은 늘 예현이 혼자 사이클을 보내지 않게 해 주었다.

“정확히 언제인데? 맞춰서 연차 낼게.”

예현이 짐짓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농담으로 한 말에 진지해진 예현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한 이정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누른 채 말했다.

“다다음 주 주말.”

“알겠어. 그럼 그때 맞춰서…….”

예현이 제 일정을 확인하며 말했다. 몇 번이나 함께 사이클을 보냈으면서도 이정의 러트는 처음이다 보니 또 새로운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알았어. 나도 애인이랑 보내는 건 처음인데…… 기대되네.”

이정이 예현의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곤 웃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

그리고 얼마 후, 기다리던 그날이 찾아왔다. 이정은 전날 사이클 테라피를 받던 병원으로 가 늘 맞던 주사 대신 사이클 촉진제를 맞았고, 아침이 지나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깨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첫날 아침에는 열이 올라서 바로 일어나진 못할 거예요. 아파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시술 특유의 증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예현이 주석에게 전해 들은 주의 사항들을 곱씹어 보며 이정이 누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클을 함께 보내는 것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자신이 제정신인 것은 처음이다 보니 긴장이 됐다.

늘 페로몬에 취해 허덕거리는 자신을 이정이 도와주는 형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정이 정신조차 차리지 못한 채 끙끙거리고 있고 자신이 맨정신으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관계를 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이상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는데. 예현이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꼼지락거리며 이정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으음…….”

이정이 깨어나기라도 하려는 듯 작은 소리를 냈다. 일어나는 건가. 예현이 목을 어색하게 돌려 이정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붉어진 얼굴 그대로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좀 오래 잘 수도 있다는데…… 저도 뭐, 지금까지 사이클 테라피 쉬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그냥 깨어나기 전까지는 신경 쓰지 말고 지내는 게 제일 마음 편할 것 같네요.’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애인이 끙끙거리며 누워 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할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예현이 잔뜩 긴장한 채로 이정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삭막한 분위기 속 공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읏…….”

강한 페로몬이 이정에게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우성 알파의 러트라는 이름에 걸맞는 강렬한 페로몬이었다.

목덜미가 오싹해질 정도의 페로몬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정작 페로몬의 주인인 이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현은 달랐다. 평소에는 페로몬을 잘 갈무리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관계를 맺을 때는 이정 역시 페로몬을 어느 정도 방출하기에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은 여태 예현이 느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제 히트 사이클에도 이정이 자신을 봐주고 있었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통제를 잃은 페로몬이 이 공간 안에 있는 유일한 오메가에게 날아가 찌릿하게 박혀 들었다. 손가락 하나 닿지 않고 몸이 달아 버린 예현이 어느새 이정과 같은 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정아, 강이정…….”

예현이 이정을 흔들어 깨우려 했다. 그러나 간절한 손짓에도 불구하고 이정은 깨어나지 않고 예현이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라고…….”

이정을 흔드는 손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으나 이정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분명 러트를 겪는 것은 이정인데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자신이라는 게 억울한 예현이었다.

“…….”

예현이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이정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이정이 깨어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그러나 예현은 그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예현이 떨리는 손을 들어 이정의 이불을 걷어 버렸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누워 있는 이정의 몸 전체가 보였다.

어차피 벗을 옷이라지만, 그래도 옷은 입고 자야 하지 않겠냐며 고른 벗기기 쉬운 옷이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예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이정의 바지와 속옷을 내리기 시작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머뭇거리던 예현이 어느새 드러난 이정의 성기를 보곤 침을 삼켰다.

“어차피…… 어차피 순서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스스로를 설득시키듯 작게 중얼거린 예현이 이정의 바지를 완전히 벗겨 버리곤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버린 예현의 뒤쪽 사정과는 다르게 이정의 성기는 재수 없을 정도로 여유롭게 누워 있었다.

우성과 열성이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뭔가 분한 기분이 드는 예현이었다.

츕- 그러나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이 눈앞의 성기로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은 어느새 본능에게 밀려 의식조차 되지 않는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예현이 이정의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주인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끙끙거리고 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래는 착실하게 크기를 키워 갔다.

츕, 츄웁. 이정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평소에는 이런 여유를 부릴 만한 틈도 없이 몸을 섞기도 했었고, 애초에 예현이 펠라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엔 이걸 왜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늘어진 상태에서도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성기가 고개를 빳빳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뿌듯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츕, 츕, 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정의 성기가 고개를 드는 만큼 방을 채운 페로몬의 농도는 점점 짙어져만 갔고, 예현의 아래 역시 간지러울 정도로 달아 있었다.

“우응…….”

이정의 성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살짝 숙인 예현이 자세를 고쳤다. 엎드린 자세로 한쪽 손으로는 이정의 성기를,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는 제 뒤를 만지기 시작한 예현이 다시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는 츕츕거리는 소리로, 아래는 손가락이 움직이며 나는 찌걱거리는 소리로 방 안이 가득 찼다.

어느새 이정의 성기는 예현의 목구멍을 쿡쿡 찌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예현이 이정의 성기를 입 안에서 빼내자 구부러졌다 고개를 든 이정의 성기가 예현의 볼을 퉁, 하고 치고 지나갔다.

핏줄이 바짝 선 성기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 평소에는 자세히 볼 일이 없는 광경이 예현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게 내 몸속에 몇 번이고 들어왔었다니, 마주하고 있으니 이정의 것이 안에 들어와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예현은 이 성기를 다시 자신의 안에 넣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정의 바지를 내렸을 때부터, 이성 따위는 이미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예현이 침을 꿀꺽 삼키곤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은 자세를 한 채 이정의 골반께까지 제 몸을 끌어온 예현이 아직 벗지 못한 상의를 벗으려 팔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서일까, 옷은 한 번에 벗겨지지 않고 콧대에 걸려 버렸다.

그러나 다시 팔을 들어 옷을 제대로 벗을 여유조차 잃어버린 예현은 돌돌 말린 옷의 아랫부분을 대충 입으로 물어 버리곤 이정의 바짝 선 성기를 움직여 제 구멍 입구를 툭툭 건드렸다.

“흐으…….”

예현이 천천히 허리를 내려 이정의 성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페로몬으로, 그리고 조금 전까지 열심히 움직이고 있던 손가락으로 눅진하게 풀려 있던 구멍이 어렵지 않게 침입자를 맞이했다.

성기가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크고 뜨거운 성기가 구멍 안을 조금씩 채우고 들어올 때마다 버거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으, 하…….”

벅찬 숨에 입에 물려 있던 셔츠가 조금 빠져나와 흘러내렸다. 애매하게 걸쳐져 불편한 옷과 아직 반 정도밖에 들어가지 못한 성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열이 오른 몸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옷을 제대로 벗어 버리고 계속하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흑?!”

그러나 성기를 잠시 빼내기 위해 허리를 들썩이던 예현은 자의가 아닌 힘으로 인해 그대로 이정의 성기 위에 앉혀졌다.

신음 소리를 참지 못해 그대로 입에서 빠져나가 버린 티셔츠가 완전히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아흐, 아…….”

예현이 갑작스럽게 안을 가득 채운 성기에 허리를 바들거리며 신음했다. 그런 예현의 골반을 붙잡고 지분거리는 손이 있었다.

“꿈인 줄 알았네…….”

이정이 나른한 얼굴을 하고 예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깨어난 거지. 예현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손을 움찔거렸다.

“어, 언제부터…….”

“글쎄, 형이 내 좆 빨고 있을 때부터?”

거의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말이잖아. 예현이 밀려오는 자괴감에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그러면서도 뒤로 물고 있는 성기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는 듯 아래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정이 그런 예현을 보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발열과 깊은 수면, 러트가 오기 전의 증상이 으레 그랬기에 깨어나자마자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가 이상하다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뭔가 어색한 점이 있었다. 이제 겨우 러트의 시작일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아래가 뻐근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아직 몽롱한 머리를 살짝 들어 아래를 확인해 봤더니 아주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입으로는 제 성기를 빨면서 손으로는 뒤를 풀고 있는 예현의 모습. 처음에는 자신이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평소엔 펠라 같은 걸 굳이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런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 예현이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외설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저 뒤통수를 짓눌러 예현의 목구멍 깊은 곳까지 제 성기를 처박고 싶은 이정이었으나, 예현이 스스로 어떤 짓까지 하는지를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신음 소리를 참고, 이불 아래로 감춰진 손으로 시트를 꽉 움켜쥔 채 예현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뒀더니 어느새 혼자 재미를 보려는 듯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고 몸을 일으켜 제 성기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뜨끈한 내벽이 단단히 고개를 쳐든 제 성기를 반쯤 삼켰을 때, 갑자기 멈춘 움직임에 조급함과 심술기가 차오른 이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예현의 골반을 잡았다.

“일어나 있었으면서, 그냥…….”

그냥 해 주지. 내가 혼자 무슨 짓까지 하고 있었는데. 예현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이정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이정이 영원히 잠들어 있을 것도 아니니 들킬 거라는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어났으면 바로 일어났다고 알려 줄 것이지, 자신이 이런 짓까지 하고 있을 동안 가만히 보고 있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으응.”

그러나 원망스러움보다는 달아오른 몸쪽이 더 급했다. 예현이 허리를 들썩이며 이정의 골반 위로 콩콩 제 엉덩이를 내리찍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또 안달이 나는지 소심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정에게는 그쪽이 더 자극적이었다.

“내가 좀 더 일찍 일어나서, 형이 달아서 내 좆에 달려들기 전에 먼저, 이렇게 해 줬어야 했는데.”

“아, 흣, 아아!”

이정이 씨익 웃으며 예현의 골반을 붙잡고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자신도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하으, 응, 너무…….”

온몸을 자극하는 페로몬과 아래에서 위로 내리 찍어 대는 성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현이 몸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이정의 가슴팍 위로 무너지다시피 한 채로 흔들렸다.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으읏, 흐…….”

예현이 이정의 가슴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신음했다. 전혀 갈무리되지 않은 페로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이정의 옷을 벗겨 성기를 빨고, 성기를 세워 저 좋을 대로 하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이렇게 하는 게 좋아? 한 번쯤 이렇게 해 보고 싶었어?”

“아응, 아. 아니야아…….”

예현이 이정이 뭐라 말하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거친 추삽질이 이어지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이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자기,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었나 봐.”

“응, 으응?”

“콘돔 한 박스나 사 놓고, 생으로 넣고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나마 아직 사정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었지, 뒤늦게 중요한 것을 알아챈 이정이 제 성기를 쑥 빼내곤 협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러트가 온 것은 자신인데 어째 자신보다 예현이 더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자는 동안 페로몬이 전혀 갈무리되지 못하고 그대로 예현을 향해서 그랬던 걸까.

그러나 이 상황에 페로몬을 정리할 여유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정은 급하게 콘돔을 뒤집어씌우곤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는 예현을 바라보았다.

“빨리, 빨리…….”

예현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보채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래서 누가 누구의 사이클을 도와주는 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넘치던 평소와 달리 능글맞은 말 한마디 없이 예현을 밀어 눕힌 이정이 빳빳하게 선 성기를 예현의 안으로 곧장 밀어 넣었다.

이미 꽤 이어졌던 움직임으로 인해 눅진하게 풀려 있던 안이 익숙하게 이정의 성기를 삼켰다.

“흐아, 아!”

“하, 씨발…….”

정말이지, 이제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여유가 남아 있질 않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자신의 페로몬 사이로 달달한 향이 느껴졌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옅게 깔린 페로몬이었으나 이정에게는 아무리 옅고 여린 향이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향이었다.

평소엔 관계를 맺으면서도 이런저런 장난기 어린 말을 하던 이정이 말없이 예현을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였다.

맞닿은 하체 사이, 성기가 더 깊은 곳에 닿을수록 목덜미에서 퍼지는 향이 조금씩 짙어졌다. 이정이 그 여린 향을 잃어버리기라도 할세라 예현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박은 채 예현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흐아…….”

예현이 긴 탄식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어느새 팔을 뻗어 이정의 넓은 등을 가득 끌어안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예현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안을 파고드는 성기에 놀라 몸을 떨었다.

“나, 나 방금 갔…….”

“미안. 기다려 줄 여유가 없어서.”

평소에는 예현이 진정하기를 기다려 주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그럴 틈도 없다는 듯 이정이 곧바로 움직임을 이어 갔다.

예현이 사정하며 내벽을 강하게 조인 탓에 이정 역시 사정을 앞두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민한 곳을 괴롭혀지는 예현에게는 그 잠깐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아, 아아!”

예현의 신음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정을 끌어안은 손에 그의 등에 패인 자국을 남길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후…….”

“하아, 하…….”

오래 지나지 않아 이정이 예현의 안에 사정했다. 이제 조금 숨 돌릴 수 있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옷……. 더워, 이것 좀 벗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정이 손을 뻗어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겨 내 주었다.

이제야 좀 살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고개를 돌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몸이 뒤집혔다.

“나, 나 아직 힘든데…….”

“미안, 내가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서.”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손이 허리를 붙잡았다. 몇 번이고 맞닿아 가볍게 얻어맞은 것마냥 달아오른 엉덩이 뒤로 그새 부푼 이정의 성기가 느껴졌다.

“하윽!”

이정의 러트는 이제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이제는 이게 몇 번째 사정인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해가 쨍쨍한 시간에 시작한 관계였는데,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가 바깥이 캄캄했다.

“하으으…….”

이제 신음을 내뱉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로 쏟아지는 페로몬도 아득하게만 느껴질 정도로 지친 예현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관계는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을 정도로 집요한 시간이었다.

목덜미는 빨리다 못해 물어뜯긴 것마냥 울긋불긋하게 변해 있었고 엉덩이는 얻어맞은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다.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흥건한 애액이 침대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는데도 이정은 지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예현이 쉬어 버린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했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눈앞이 아득했다.

분명 처음엔 자신도 페로몬에 취해 꽤 즐겼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온몸의 수분을 다 빼앗긴 것마냥 지쳤다.

“목말라…….”

게다가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에 부칠 정도로 목이 아팠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침대 위에서만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히 체력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정이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앞뒤 따지지 않고 몰아붙이던 조금 전에 비해서는 이성이 많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후으…….”

예현이 제 손톱자국이 죽죽 늘어진 이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히트도, 러트도 며칠은 가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이제 겨우 시작일 텐데 벌써부터 괜찮은 걸까 걱정이 됐다.

이정이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내 마셨다. 이내 물병 하나를 들고 침대로 돌아온 이정이 예현의 상체를 받쳐 올려 주었다.

“고마워.”

예현이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이정에게 물을 받아 마셨다. 물병을 기울여 주는 대로 입술을 대고 있는 꼴이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그러나 역시 제 손으로 물병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예현은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반쯤 흘리고 있었다.

“콜록, 콜록.”

사레가 들린 예현이 쿨럭거리며 물을 주르륵 흘렸다. 축축하게 젖은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온몸에 붉지 않은 곳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유독 그 입술이 이정의 눈에 아른거렸다.

“잠깐만 쉬자, 한…….”

예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술이 틀어막힌 탓에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지친 기색이라곤 없는 이정이 다시 예현에게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고 있었다.

“너…… 읍, 으응…….”

등을 받치고 있는 손도, 입 안을 핥는 혀도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아무리 밀어내도 밀려나질 않는 품이 답답했다.

예현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이정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진짜…….”

“정말?”

이정이 조금 사그라들었던 페로몬을 다시 한껏 방출하며 물었다. 치사하게 이런 방법을 쓰다니. 예현이 축축히 젖은 입술을 살짝 자근거리며 말했다.

“정말…… 못 해.”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정말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이대로 기절해 버릴지도 모를 것 같았다.

“나 자고 있는 동안 혼자 재미 봐 놓고…….”

“흐으…….”

그러자 이정이 페로몬 탓에 민감하게 달아오른 예현의 몸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 없게 만들어 주면 되는 거네?”

“……어?”

예상치 못한 말에 예현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하고 이정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예현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정이 예현을 뒤로 밀어 넘어트리곤 그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되는 거잖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아!”

연이은 삽입 탓에 조금 부은 구멍 사이로 이정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예민한 감각은 그대로였다.

예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잠시만, 한 시간만이라도 좀……!”

“괜찮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필요 없게 해 줄 테니까. 형도 그렇게 해 줬는데, 나도 받은 만큼 보답해야지. 안 그래?”

이정이 깨어나기 전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은 죄가 있어 입을 다문 예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정이 예현을 조심스럽게 다루며 입을 맞추었다. 깊고 질척하던 조금 전의 키스 같은 입맞춤이 아닌, 어린애 장난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흐읏.”

그러나 달달한 입맞춤을 퍼붓는 얼굴과는 달리 손은 예현의 내벽을 가위질하고 있었다. 풀어 줄 필요도 없이 눅진하게 풀려 있었으나 손장난을 치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그러던 중,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는 듯 씨익 웃음 지은 이정이 예현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지탱할 바닥을 잃은 몸이 반사적으로 이정에게 매달렸다.

“가만히만 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무슨……, 아!”

이정이 한 손으로 예현을 완전히 안아 든 채 자유로운 쪽 손으로 예현의 뒤를 괴롭혔다.

설마,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든 예현이 몸을 살짝 떼어 내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예현과 마주친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아아!”

예현이 새된 신음을 내지르며 이정의 목을 감싸 안았다. 매달린 채 성기를 받는 낯선 감각에 놀라 이정의 목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 해 봤지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나무도 아니고, 왜 이렇게 타고 올라가려고 해.”

“아흐, 그걸…… 농담이라고…….”

이정이 예현의 뜨거운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웃었다.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기 위해 움찔거린 예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정의 성기가 예현의 배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아, 흐, 너무 깊, 깊어. 이거…….”

예현이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이정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자신의 무게가 완전히 실려 성기가 평소보다 더 깊이 들어왔다.

아랫배의 가죽 바로 아래까지 밀고 들어온 것 같은 감각에 예현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배 위까지 튀어나온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괜히 움직이다 더 무게가 실릴까 무서워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 예현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정은 예현을 단단히 안아 든 채 그를 고쳐 안을 뿐이었다.

“응!”

예현의 신음 소리가 이정의 어깨에 묻혀 뭉툭한 소리를 냈다. 몸이 흔들리는 대로 몸속에 있는 성기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예현의 내벽을 자극했다.

그리고 자세 탓에 묘한 각도로 안쪽 깊은 곳까지 자극하는 성기 때문인지 자꾸만 정액이 아닌 다른 것이 나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려, 흐읏, 줘.”

“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자세잖아.”

흐트러진 페로몬을 보면 분명 이정이라고 마냥 여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번에도 급한 쪽은 예현이었다.

“나, 나 쌀 것 같아. 진짜…….”

내일모레면 나이가 서른인데 관계를 맺다 더러운 꼴을 보는 것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예현의 그런 간절한 마음을 모르는 이정은 자신의 어깨에 폭 기대어 있는 예현의 머리에 제 볼을 부빗거리며 걸을 뿐이었다.

“아, 흐으, 아아!”

이정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예현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이정 역시 슬슬 여유 부리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떨어지기 싫다는 듯 강하게 내벽을 조이는 예현에 그의 아랫배를 짓누르고 있는 성기가 끝을 모르고 팽창했다.

“나 진짜, 진짜…….”

“응, 나도 갈 것 같아.”

“아니, 나 그게 아니라…….”

이정이 억울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예현을 벽으로 밀어붙이곤 무게를 실어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흔들리는 대로 신음 소리만을 뱉던 예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이정의 어깨를 물어뜯다시피 하며 사정했다.

“아으으!”

그러나 예현의 성기를 타고 나온 것은 몇 번이고 사정해 옅어질 대로 옅어진 정액이 아닌, 투명한 물이었다.

사정을 한다기보다는 줄줄 흘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마치 오줌을 싸기라도 하는 것마냥 많은 양의 물을 이정의 배 위로 토해 낸 예현이 창피함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러, 그러니까 내려 달라고…… 말했는데…….”

사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가슴과 복근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액에 시선을 빼앗긴 이정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이정이 제 배 위로 뿌려진 액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더니 제 입가로 가져갔다.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이거 오줌 아니야.”

예현이 분수 같은 액을 싸는 동안 경련하듯 조여든 내벽으로 인해 이정은 예현을 떨어트릴 뻔한 것을 간신히 버틴 참이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자신이 뭘 싼 건지도 모르고 울먹이는 예현을 보고 있자니 묘한 정복욕이 치밀어 다시 흥분되기 시작한 이정이었다.

“이렇게 물처럼 싸지를 정도로 좋았나 봐. 응?”

“아으, 아니, 아니야…….”

예현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말했다. 이정이 제 정액으로 꽉 찬 콘돔을 빼내고 제대로 묶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역시 두 박스 가득 사 두길 잘했네.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예현을 침대 위에 눕히고 새로운 콘돔을 뜯어 끼웠다.

쓰레기통에 끄트머리가 묶인 채 버려진 콘돔에서 스물스물 눅진한 액체가 새어 나온다는 것은 밤이 새도록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러트의 첫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예현 씨,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서 주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내내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는 예현이 영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며칠 좀 무리했나 봐요.”

예현이 작게 콜록거리며 대답했다. 피로의 원인으로 예상 가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현이 주임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팀에는 신입 사원이 하나 들어왔다.

신입 사원은 열의는 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전형적인 초보 타입으로, 몇 번이고 가르쳐 줘도 돌아서면 사고를 쳐 대는 스펙타클한 인간이었다.

차라리 성격이라도 못됐으면 화를 내기라도 할 텐데, 커다란 덩치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연신 숙이는 모습이 처량해 보여 화를 내기도 힘들었다.

“서원 씨 때문이지? 어휴, 입사한 지 이 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기본적인 걸 실수해서야…… 걱정이 태산이다, 정말.”

“그래도 아직은 자잘한 실수만 하니까요. 좀 더 지켜봐야죠.”

“그야 자잘한 일밖에 안 시키니까……. 암튼, 수고가 많아. 예현 씨.”

신입 사원 서원의 사수로 배정된 예현이 그의 사소하고도 열받는 실수들을 다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피로가 쌓일 수밖에.

“근데 그런 것치고도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웬만하면 병원 한번 가 봐. 별거 아닌 것 같다고 방치하다가 큰 병 된다.”

“네. 내일까지도 안 좋으면 병원 가 볼게요. 걱정 감사합니다.”

예현이 서 주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서 주임이 자리로 돌아간 뒤, 예현은 잠시 심부름을 다녀온 문제의 신입을 발견하곤 물었다.

“서원 씨, 김 주임님이 뭐라고 하셔요?”

“아, S 물산 건은 작년에 처리했던 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1팀 쪽으로 자료 바로 보내 준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거, 받아 왔습니다.”

서원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서류 정리를 맡기면 자꾸만 자잘한 사고를 쳐 대는 탓에 신입을 뽑아 놓고도 어쩔 수 없이 잡일만 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 수고하셨어요. S 물산 자료 받으면 보내드릴 테니까, 바뀐 양식으로 정리해서 저한테 보내 주세요.”

“넵!”

군기가 바짝 든 서원이 차렷 자세로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참, 열의는 많은 사람인데 능력이 열의의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어이, 신입. 이리 와 봐.”

신입이 온 이후 멋있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며 돼먹지도 않은 허세를 부리고 있는 중인 김 과장이 서원을 향해 까딱까딱 고갯짓을 했다.

잔뜩 긴장한 서원이 과장의 자리로 쪼르르 달려가자, 과장이 한껏 잘난 체를 하며 서원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일도 좋지만 조금씩 쉬어 가면서 해야지. 자, 내 카드 줄 테니까 카페 가서 먹고 싶은 거 사 와.”

“지, 진짜 사 와도 되나요?”

“그럼 내가 그런 걸로 신입을 놀리겠어? 먹고 싶은 거 다 사 와. 선배라고 부당하게 갈구는 사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나한테 얘기하고.”

힘든 일은 예현이 다 도맡아 하고 있건만 허세는 김 과장이 부리고 있었다. 멋있는 직장 상사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싶나 본데, 그 계획에 자꾸만 자신을 끌어들이는 꼴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예현 씨한테 힘든 일 다 시켜 놓고 이미지는 자기가 챙기겠다 이거지. 하여튼 성격 이상하다니까.”

“하하…….”

옆자리에 앉은 이 대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예현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원 씨가 좀…… 단순해 보이긴 하는데, 설마 저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가진 않겠지?”

“설마요. 그리고 좀 미움받아도 어쩌겠어요. 가르칠 건 다 가르치고, 혼낼 건 혼내고 해야죠.”

예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어쨌거나 서류에, 면접에 이런저런 과정을 통과해 취업한 사람이니 잘 가르쳐 주면 머지않아 1인분은 하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서원을 감싸 준 예현이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기껏해야 커피 하나 사러 간 사람이 왜 이렇게 늦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서원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그, 그게 다 뭐야?”

예상치 못한 구매 목록에 당황한 김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분명 자기 먹고 싶은 걸 사 오라고 했는데, 서원은 본인이 먹을 것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아, 선배님들 드실 것까지 챙겨 왔습니다!”

서원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 수만큼 맞춘 음료 하며, 카페를 털어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빵까지.

모로 보나 김 과장이 예상했던 지출보다 훨씬 큰 구멍이 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호, 혹시 그럼 안 되는 거였나요?”

입을 떡 벌린 김 과장의 모습에 뒤늦게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듯한 서원이 손에 든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거 혼낼까요, 안 낼까요?]

[글쎄, 아직 이미지 관리 중이니까 혼 안 내지 않을까요?]

[예상보다 지출이 좀 커지긴 했겠지만, 과장 달고 그 돈 가지고 신입을 진심으로 갈구는 것도 그림이 좀……]

잠깐의 침묵 사이에 사내 메신저로 수많은 추측들이 오갔다. 잠시 후, 얼어붙어 있던 김 과장이 삐걱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연…… 당연히 괜찮지! 아, 역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구만. 제대로 된 신입이 들어왔어. 당연히 선배들 것까지 챙겨야지.”

“아, 역시 그렇죠? 제가 팔 힘 하나는 자신 있어 가지고, 한 번에 다 들고 왔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모카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과장님 몫으로 사 왔습니다.”

눈치가 없어서 해맑은 서원이 과장의 자리로 음료와 모카번 하나를 가져갔다. 생각했던 지출의 열몇 배 정도를 긋고 돌아온 카드가 과장의 지갑 속으로 돌아갔다.

“서 주임님은 저번에 보니까 바닐라라테만 드시는 것 같던데, 맞으신가요?”

“어머, 눈썰미 좋네.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대요?”

“그리고 박 대리님은 에스프레소 맞으시죠?”

업무 매뉴얼은 죽어라고 못 외우더니, 이런 건 또 언제 완벽하게 외워 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가만히 일하다 공짜 음료와 간식을 얻게 된 팀원들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웃으며 서원에게서 제 몫의 음료와 간식을 받아 들었다.

“신 주임님은 이거, 아메리카노 시럽 추가에 허니브레드 맞으시죠?”

“허니브레드까지는 없어도 됐긴 한데, 그래도 챙겨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과장님께서 사 주신 건데요 뭘.”

그분은 나한테 이런 걸 사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만 말이죠. 예현이 애써 웃고 있는 김 과장을 흘깃 보고는 음료와 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신입이 눈치가 없는 게 이런 데서 쓸모가 있네. 수습 끝나기 전까지 이 방법으로 과장님 열 좀 올려 볼까.

예현이 조금 치사한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공짜 간식을 얻었으니 먹고 당 좀 채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빵을 조금 떼어 내 입가로 가져왔는데, 평소엔 곧잘 먹던 허니브레드의 냄새가 이상할 정도로 역하게 느껴졌다.

“욱…….”

“예현 씨, 괜찮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헛구역질을 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떨어트리자 옆자리에 있던 이 대리가 조금 놀라 예현의 상태를 살폈다.

“사, 상한 건가요?”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나 싶어 빵의 냄새를 맡아 본 이 대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죄송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갑자기 속이 뒤집혔나 봐요.”

“그것 봐요. 예현 씨 지금 상태 별로 안 좋다니까?”

서 주임이 자기가 뭐라고 했냐며 예현을 타박했다. 걱정은 고맙지만 예현은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자, 잠시만 화장실…….”

이대로 있다가는 키보드에 토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예현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화장실을 향해 뛰어갔다.

“우욱, 욱.”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상하게 정말 토가 올라오지는 않았다. 평소엔 허니브레드 냄새를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역하게 느낀 적은 없었는데 대체 왜 그런 거지.

문을 닫지도 못한 채 변기를 잡고 주저앉아 있던 예현은 속이 조금 진정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병원을 가 봐야 하나. 회사 건너편에 있는 병원이 8시까지 진료를 봤던 것 같은데, 미리 예약을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섰는데, 문 앞에 웬 덩치 하나가 음울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깜! 짝이야…….”

“죄송합니다. 주임님. 저 때문에…….”

서원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제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오롯이 서원 탓인 것도 아닌데, 괜히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진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평소엔 잘만 먹던 거였는데요. 뭘.”

“그래도 임신하신 분 상대로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괜…… 네?”

괜찮다며 서원을 달래려던 예현이 서원의 사과에 무시할 수 없는 단어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팍 쳐들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임신이라니…….”

“아닌가요?”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요 며칠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임신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 그런…… 그런가요?”

서원이 어버버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대체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이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은 거예요?”

“그, 들은 게 아니라…… 제가 알파거든요. 그리고 알파 중에서도 페로몬 변화에 좀 예민한 편인데…… 저희 누나가 임신했을 때랑 페로몬 상태가 비슷하시길래, 임신하신 줄 알고 있었어요.”

제가 착각한 거였나 봐요. 서원이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서원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자기 코가 녹슬었나 보다, 하며 너스레를 떠는 서원을 보는 예현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

“네, 임신 맞네요. 7주 차 접어드셨습니다.”

“……검사 결과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없나요?”

“피 검사 결과도 임신으로 나왔고…… 페로몬 수치도 임신했을 때의 수치와 가깝네요. 정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시면 산부인과로 내원하셔서 초음파 한번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퇴근하자마자 찾아간 내과, 예현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혹시 자신이 임신했는지를 검사받았다.

피를 조금 뽑고 페로몬 수치를 검진한 결과 나온 것은 임신 7주 차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 그렇지만 피임은 철저하게 했는데요. 콘돔도…….”

“콘돔 착용한다고 해서 피임 확률이 100퍼센트인 건 아닙니다. 불량품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콘돔을 갈아 끼우는 과정에서 제대로 착용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요.”

예현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평소에는 사용한 콘돔에 물을 채워 철저하게 확인을 하는 편이었는데, 지난 이정의 러트 시기에는 정신없이 몸을 겹치느라 그럴 경황이 없었다.

게다가 임신 7주 차라면 시기적으로도 그때와 꼭 맞아떨어졌다. 결국 관계를 하다 몇 번이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을 정도로 시달렸던 그 5일.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신 건가요?”

“……네…….”

예현이 얄미운 이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낮까지 지방 촬영이 있어 집을 비운 그가 유난히도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자세한 건 산부인과 내원하셔서 확인해 보시는 편이 빠르겠지만, 환자분이 열성 오메가이시다 보니 일반 오메가나 우성 오메가보다 좀 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할 겁니다. 상대와의 지속적인 페로몬 교류도 필요하고요.”

“네…….”

“아무튼, 초기에는 감기 증상과 착각해 임신인 줄 눈치채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신데 이렇게 바로 찾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의사가 그렇게 말하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무런 약도 처방받지 못한 채 병원을 나선 예현이 멍하니 병원을 빠져나왔다.

“지금 시간에 하는 산부인과…… 없겠지.”

퇴근을 하고 나서 병원에 온 것이다 보니 시간은 이미 오후 7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응급실이 아니고서야 웬만한 병원은 모두 닫았을 시간이었다.

임신 확인을 해 달라고 응급실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더 미칠 것 같은 시간대였다.

“초음파 찍어 봤는데, 착각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예현이 일어날 리 없는 일을 기대하며 중얼거렸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부터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일단……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 하나를 산 예현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해 본 예현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할 여지가 없는 두 줄이 테스트기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 :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늦어도 형 퇴근할 때쯤엔 집 도착할 것 같은데, 왜? 오전 7 : 15]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하는 걸까. 나 임신했대? 나 임신 7주 차래? 아니, 문자로 할 말은 아닌가?

예현이 한참 동안 자판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액정을 응시했다. 출근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 준비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였다.

[일단 집에 와서 얘기해. 오전 7 : 34]

고민한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짧은 답장을 쓴 예현이 화면을 꺼 버리곤 또 한숨을 쉬었다. 우선 출근부터 하자.

준비를 끝내고 나니 택시를 타지 않고서야 늦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지만 예현은 아깝다는 생각 없이 택시를 불렀다.

돈이 궁하진 않아도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것이 버릇이 된 상태였는데, 오늘은 대중교통을 탔다가는 멍하니 서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칠 것만 같았다.

“XX동 OO카페 앞으로 가 주세요.”

어쨌거나 이정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사정한 적은 없었으니 막연히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일함의 결과가 너무 크게 돌아와 버렸다.

생명이라니, 그것도 자신과 이정의 아이라니. 예현이 아직 전혀 나오지 않은 배 위에 손을 올리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정에게 남아 있는 차기작이 몇 개더라. 지금 촬영하고 있는 건 다다음 달까지 촬영이고, 아마 2년 뒤의 일정까지는 대충 잡혀 있는 상태였지 않나?

자신과 이정의 열애가 기사화됐을 때, 호감도 높은 젊은 배우의 열애설치고는 이례적으로 반응이 좋았다고는 들었지만…… 결혼을 했을 때도 똑같을 거라고 볼 수 있을까?

현실적인 걱정들이 예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혼을 생각할 만한 나이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이정도, 예현도 일에 욕심이 있었다.

애는 자신이 낳는 거라지만, 승승장구하고 있는 배우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혼전 임신은 딱히 흠이 아니니 그건 문제가 없겠지만, 어쨌거나 연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큰 스캔들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할 것 같았다.

종종 이정과의 미래를 상상해 보면서도 이런 미래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예현이 깊게 한숨을 쉬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

“그래, 하루 종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해 가지고 앉아 있느니 그냥 가라.”

점심을 먹고도 끊이질 않는 생각 때문에 결국 단단히 체해 버린 예현은 서 주임과 이 대리에게 등 떠밀려 반차 신청을 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탓인지, 과장은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빨리 가 버리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산부인과부터 가 봐야겠지.”

멍하니 서 있던 예현이 홀린 듯 핸드폰을 들어 가까운 산부인과의 위치를 검색해 보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병원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이동하려는데, 이정에게서 문자가 한 통 날아들었다.

[♡ : 이제 30분만 지나면 서울 도착할 것 같아. 오후 2 : 01]

[♡ : 사진 오후 2 : 01]

차 안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행선지를 보고하는 문자였다. 아무 걱정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던 예현이 잠시 고민하다 문자를 보냈다.

[지도 오후 2 : 03]

[여기로 와.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오후 2 : 03]

어쨌거나 우리 두 사람의 아이니까 함께 의논해야겠지. 문자를 보낸 예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이 금방 끝난 산부인과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접수를 한 지 15분도 지나지 않아 진료실에 들어간 예현이 침대 위에 누워 의사의 확진을 기다렸다.

“네, 임신 7주 차 맞으시고요. 여기, 이쪽에 보이는 점이 태아입니다. 잘 착상한 걸로 보이고요.”

임신 테스트기에 페로몬 수치, 피 검사까지 모두 오류일 리는 없으니 솔직히 예상한 결과였다.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곤 까맣고 하얀 것들로 가득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창 조심해야 할 시기고, 산모분이 열성 오메가셔서 더더욱 철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스트레스받는 일 없이 상대 알파분과 지속적인 페로몬 교류를 해 주셔야 합니다.”

의사가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예현에게 내밀며 당부해야 할 사항 몇 가지를 일러 주었다.

“다음에 내원하실 때에는 웬만하면 보호자분과 함께 한번 내원해 주세요.”

“……네.”

“철분 수치가 좀 떨어지는 걸로 나오는데, 아이 위해서. 그리고 본인 건강 위해서라도 잘 챙겨 먹고 웬만하면 철분제도 챙겨 드세요. 혹시 아이 아버지와 연락이 안 되거나, 교류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시죠?”

의사가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현이 고개를 젓자 의사가 다행이라며 대답했다.

“열성 오메가분의 경우에는 아이 아버지와의 교류가 없으면 임신 기간 동안 굉장히 힘들어질 수 있거든요. 그런 경우는 초기부터 미리 체크해 두고 호르몬제를 처방해야 하니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예현이 종이 한 장을 달랑 든 채로 병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사진으로 보고 있자니 더 착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기……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이정은 당장 지금도 작품 촬영 중에 있었고 촬영이 끝나고 2주도 지나지 않아 바로 차기작 촬영에 돌입해야 했다.

한창 바쁠 시기, 그리고 한창 전성기인 시기에 발목을 잡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예현의 어깨를 건드렸다.

“깜짝이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병원 건물 주소만 찍어 놓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잖아.”

아, 병원이라고 무음 모드로 설정해 뒀었지. 하도 긴장한 탓에 핸드폰의 존재조차도 잊고 있던 예현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정을 보고 나니 그제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이 건물은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내과, 정형외과, 치과, 신경외과 등 병원이 종류별로 자리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예현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를 이정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중요하게 해야 할 이야기라는 게 뭔데?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아픈 건…… 아닌데, 너한테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일 수도 있어.”

예현이 손에 들린 초음파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 어떤 반응이 나오더라도 미루지 않고 바로 마주하는 게 낫겠지.

“이거.”

예현이 이정을 바라보지도 않고 손에 들린 사진을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을 하고 사진을 받아 든 이정이 사진의 정체를 확인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 사진 맞아?”

“어제 몸이 안 좋아서 내과 갔다가 알게 됐어. 확실하게 확인받고 이야기하려고……. 반차 내고 바로 여기로 온 거야.”

예현이 변명하듯 말하며 이정의 반응을 살폈다.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예현의 심장 소리만이 그의 귓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당황해도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속상할 것 같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고 이정을 흘깃 쳐다보니 그는 아직 멍하니 예현이 내민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초, 2초, 3초. 길게도 느껴지는 몇 초를 지나 이정이 고개를 팍 들었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마도 네 러트 때……!”

고개를 푹 숙인 채 변명하듯 대답하는데, 이정이 말없이 예현을 꽉 껴안았다. 숨 쉴 틈조차 없이 강하게 안긴 예현이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기도 잠시, 한술 더 떠 길거리에서 예현을 번쩍 안아 올린 이정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격한 움직임에 쓰고 있던 모자가 살짝 들려 이정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좋은 일인데.”

“그래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악!”

예현이 여전히 조금 울적한 얼굴을 한 채 대답하자 이정이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예현을 안은 채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야. 난 너무 좋은데.”

“잠깐만, 어지러워. 내려…… 욱.”

그렇지 않아도 속이 좋지 않았던 예현이 헛구역질을 하자 이정이 깜짝 놀라 예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새 사색이 되어 괜찮냐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정을 진정시킨 예현이 그의 모자를 제대로 씌워 주곤 말했다.

“정말 좋아?”

“응. 너무 좋아. 좋은 일인데 왜 이렇게 안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 혹시…….”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이야기하던 이정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라도 이정이 안 좋은 반응을 보일까 걱정하던 내 얼굴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챈 예현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해야 하는 것들도 많고 너한텐 이 아이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하고 있던 생각이었는데, 이정의 앞에서 그런 걱정을 떠올리자니 갑자기 더 서러워졌다.

“그냥…….”

예현의 큰 두 눈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이정이 그런 예현을 말없이 안아 주었다. 이정이 품에 안긴 작은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너무 감동해서 그런 거지? 나도 그래. 너무 좋아서 눈물 날 것 같아. 길거리에서 울면 창피하니까 참아야지.”

현실적인 부분에서 걱정이 많은 애인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농담식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본인이 아닌 이정 자신의 배우 커리어를 걱정하며 고개를 내젓던 예현이었다.

그런 걱정 같은 건 전혀 할 필요 없는데, 돈이라면 이미 벌 만큼 벌었고 지금보다 인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괜찮았다.

지금처럼 인기작의 주연이 아니라 제목조차 생소한 작품의 인물 소개 두 번째 줄에 들어갈 만한 역할을 맡게 된다고 해도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걱정 많은 애인은 자신이 지금 같은 자리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자신보다도 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길거리에서 이러고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날씨도 추운데, 밖에 오래 서 있으면 안 좋아.”

어떤 쪽으로든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가는 예현을 더 자극하는 꼴이 될 것 같았기에 이정은 되려 차분하게 굴었다.

“응?”

“응…….”

예현이 눈물을 겨우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어리광이 는 것 같은 예현을 보듬으며 이정은 두 사람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

“러트 날, 그 날인 것 같아. 임신 7주 차면 시기적으로도 그때고…….”

집으로 돌아온 예현은 곧바로 이정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싫어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7주 차면 한창 조심해야 할 때네.”

조급한 마음의 예현과 달리 이정은 더없이 차분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임신 소식을 알고 나서 기뻐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정이 어색한 예현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너 지금 촬영하고 있는 작품도 있고, 끝나고 바로 차기작 들어가잖아. 거기에 영향이라도 가면…….”

“영향 안 가. 영향 간다고 해도 상관없고.”

그런 걸로 위약금 청구하는 곳도 없지만, 청구해도 그냥 줘 버리면 그만이지 뭐. 이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이정의 속도 굉장히 복잡했다. 처음엔 그저 기뻤다. 더 따질 것도 없이 기뻤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아이가 생겼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예현을 안은 채 집까지 달려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예현이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직업이 예현에게 부담을 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부분은 괜찮았다. 예현이 진정될 때까지 그런 것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을 만큼 기쁘다고, 좋다고 알려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저, 예현이 이정의 일을 걱정하듯 이정 역시 예현의 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승진 축하 파티를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신입이 사고를 쳐 대서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 선배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미묘하다는 말을 하며 웃는 예현을 본 것이 겨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잠깐만, 잠깐……!”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몸 걱정만 해야지. 병원에서 뭐래? 조심해야 하는 건? 필요한 건 없대?”

그런데 자신이 마냥 기뻐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자신이야 작품 활동을 조금 쉬어 가도 괜찮고, 어떻게든 배우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예현은 달랐다.

이제 겨우 예서를 조금 키워 놓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승진한 참인데, 자신이 더 신경 썼어야 하지 않았나.

이정이 그런 생각들을 지우려 부러 예현을 꼭 끌어안고 애교를 떨었다.

“먹고 싶은 건 없어? 입덧하는 경우도 많다던데, 못 먹겠는 건? 내 냄새는 안 거슬려?”

“조, 조금만 놓고…….”

예현이 숨이 막힌다며 이정을 겨우 떼어 놓곤 숨을 몰아쉬었다. 말이 없던 것 같은 건 그냥 기우였나. 언제 그랬냐는 듯 속마음을 숨기고 자신에게 안기는 이정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된 예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열성이라 병원은 매주 와서 체크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언제라도 병원으로 오래. 초기엔 아기 아빠랑 페로몬 교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페로몬 교류?”

드라마에서도 단골로 나오는 페로몬을 주고받는 장면, 그러나 이정은 페로몬을 주고받는 장면을 연기하기만 해 봤지 실제로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리고 다음 검진 때는 아기 아빠랑 같이 오래. 그런데 그게 어려우면 따로 약물 처방이 필요해서 빨리 이야기해 달라고…….”

“지금 바로 가면 되나?”

이정이 정말 다시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지갑을 찾았다. 방금 들어왔는데 뭘 또 바로 나가겠다는 건지. 예현이 식겁하며 이정을 붙잡았다.

“아니, 당장은 아니고. 수요일에 다시 오라고 했어.”

“다음 주…… 다음 주 수요일?”

이정이 핸드폰 화면을 켜 다음 주의 일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창 촬영 중인 드라마의 일정이 이정 좋을 대로 맞춰져 있을 리가 없었다.

“하…….”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또 지방 로케이션이 있었다. 하필 그냥 촬영도 아니고 지방으로 가는 일정이 있을 건 또 뭐란 말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이정을 본 예현이 조용히 말했다.

“당분간은 네가 계속 바쁠 테니까, 그냥 미리 약 처방 받아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냐. 일단 병원부터 옮기자. 거긴 집에서 가기도 불편하기도 하고, 검진 날짜 옮기면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정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촬영이고 뭐고 함께 가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해진 일정 속에서 최대한 예현에게 맞추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정이 예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내가 집에 아예 안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내가 해야지. 아기한테 그런 것도 못 해 주면 너무 속상할 것 같은데.”

“그래도, 너 지금도 많이 바쁘잖아. 오늘도 집에 잠깐 왔다가 저녁에 또 나가야 한다며.”

그 말대로였다. 이정은 지금 퇴근한 것이 아니라 잠시 집에 들른 것뿐이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회사로 나가 작품 회의에 참여해야 했다.

배우가 필참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이정은 신인 시절부터 항상 그 회의에 참석해 왔다.

심지어 그 시간에 회의가 잡힌 것도 이정의 촬영 스케줄에 맞춰 스텝들이 편의를 봐준 건데, 이제 와서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괜찮아. 저녁에 가는 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빠질 수 있어.”

잠시 고민하던 이정이 대답했다. 아직 몇 시간 남았으니 지금 이야기하면 조금 혼나긴 하겠지만 취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결혼하고 아이 낳은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 사람 사는 곳이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정이 다 괜찮을 거라고, 본인 몸만 걱정하면 된다며 예현을 토닥거렸다.

그러나 다짐이 무색하게도, 일과 사랑,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모두 감당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

“있잖아, 이정아. 혹시 내가 요즘 되게 심심해 보였냐?”

“갑자기 무슨 이상한 소리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대형 폭탄을 또 던질 이유가 없지 않냐? 할 말이 있으면 제발 직접 해라. 기사로 접하게 하지 말고.”

재련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신경질을 내며 제 핸드폰을 이정에게 집어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해 죽겠는데 왜 성질이야.

이정이 투덜거리며 재련의 핸드폰을 제대로 들었다. 그리고 그가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이정이 한숨을 쉬곤 마른세수를 했다.

[강이정, 여전한 애정 전선……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두 사람 뒤의 간판이 주목받은 이유는?]

삼류 가십 기사 같은 제목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예현을 안은 채 빙글빙글 돌던 것이 누군가에게 사진으로 찍혀 올라가 있었다.

“평소엔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도 잘만 숨기더니, 갑자기 무슨 변덕이 불어서 한낮에 길거리에서 영화 한 편 찍고 온 거냐고. 장소도 참…… 하.”

재련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진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현의 얼굴이 나오지 않은 사진이었고, 보이는 것은 모자가 살짝 들려 드러난 이정의 얼굴뿐이었다.

그런데 그 뒤의 배경이 문제였다. 분명 2층부터 10층까지 전부 병원으로 들어찬 건물인데, 사진에는 하필 산부인과의 간판만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제작사 쪽에서도 전화 오고 난리다. 사귀는 사람 있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문제도 안 되는데, 왜 하필 이런 간판 앞에서 영화를 찍냐고, 찍기를!”

재련이 돌돌 말린 서류로 책상을 팡팡 내리치며 말했다. 하필 산부인과 간판 앞에서 사진이 찍힌 것이 완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보니까 거기, 산부인과만 있는 게 아니라 온갖 병원이 다 있던 건물이던데…… 일단 그런 식으로 해명 기사 내려고 준비 중이다.”

재련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연애가 비밀이 아니다 보니 그리 많은 주목을 받은 기사는 아니었지만, 때아닌 임신설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이 문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이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근데 그 시간에 병원 앞엔 뭐 하러 간 거야? 너야 건강한 거 빼면 시체고, 예현 씨가 어디 아프기라도 해?”

재련이 멍하니 핸드폰을 보고 있는 이정에게서 제 핸드폰을 빼앗아 가며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핸드폰을 빼앗기고도 성질을 내기는커녕 멍하니 서 있는 이정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이 차올랐다.

“……아니지?”

재련이 조용히 물었다. 설마, 설마. 이 미친놈이 아무리 미쳐 있다고 해도 일에는 철저한 놈인데.

결혼이라도 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래도 몇 년은 더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하던 것이 몇 달 전의 일이었는데. 재련이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내려 애를 쓰며 물었다.

“아니라고 해. 빨리.”

“뭐가 아니라고 하란 건데.”

“아, 뭐든 빨리 아니라고 하라고!”

어느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재련을 보던 이정이 제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이런다고 영영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찍힌 건 우연인데, 거기서 나오던 길인 건 맞아.”

“미친…….”

재련이 목 뒤를 잡고 뒷걸음질 쳤다. 아니, 촬영 도중에 이런 기사가 났는데 그게 사실이라고. 심지어 첫 방송이 당장 오늘 저녁인데?

“너 오늘이 첫 방인 건 알지?”

“당연히 알지.”

“언제…… 아, 설마 그땐가.”

이정의 사이클 테라피 휴식 기간이 한 달 반쯤 전이었다는 것은 재련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7주 차래.”

“하, 그냥 부작용이 오든 말든 계속 사이클 테라피나 받으라고 할걸…….”

재련이 반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언젠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거란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너무 빨랐다.

아무리 호감도가 높은 배우라고 해도 국민 남친이라고 불리는, 아직 30대도 되지 않은 배우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성격 급한 놈이니 그리 늦게 결혼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른은 넘어 결혼할 줄 알았는데 결혼 소식도 전에 임신 소식부터 전하다니.

“하…….”

이미 생긴 애를 어떻게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재련이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곤 생각에 잠겼다.

“잠깐, 지금 7주 차면 만삭 때쯤엔 너 유재현 작가 작품 촬영할 시기 아니냐?”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에 재련이 몸을 일으켰다. 남성 오메가의 임신 기간은 7개월에서 8개월가량.

지금 두 달 차에 접어들고 있다면 7-8개월쯤에는 이정의 차기작이 촬영 중일 것이었다. 지금이 12월이니 5, 6월쯤에는 아이가 나올 텐데 차기작의 예정된 촬영 기간은 최소 5월 중순까지였다.

그 촬영이 조금이라도 밀리거나 아이가 빨리 나오게 되면 아이를 낳을 때 옆에 있어 주기도 힘들 텐데. 재련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제발 차기작 엎을 거라는 얘기만 하지 말아 주라.”

“안 엎어. 이미 기사까지 다 나갔는데, 엎었다가는 형이 제일 속상해할 거니까.”

그 이후의 일정은 아직 계약서를 쓰지 않은 작품도 있었고, 아직 일정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작품도 있었기에 조정할 수 있을 터였으나 당장 지금 촬영하고 있는 작품과 뒤이어 촬영할 차기작이 문제였다.

게다가 유재현 작가의 작품은 이정이 꽤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했다. 시나리오도 마음에 들었고, 예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감독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일도, 형도, 애도 다 책임질 거야.”

“그게 말처럼 쉽냐. 예현 씨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배 속의 애나 촬영이나 다른 사람 일정 봐주는 것들은 아니잖아?”

“그래도 해야지. 내가 약한 모습 보이면 형이 제일 걱정할 텐데.”

“내가 걱정하는 것도 좀 신경 써 주라…….”

재련이 잠깐 새 혼이 빠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반박 기사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일단 임신했단 기사는 최대한 늦게 터지게 해 볼게. 그 기사는 무슨 그런 것 가지고 임신설이냐면서 욕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무대응으로 일관하면 금방 사그라들 거고, 딱 두 달만 버텨 봐. 드라마 종방은 하고 기사 나야 할 거 아냐.”

기사가 터지자마자 욕을 먹긴 하겠지만 그래도 드라마에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었다.

“병원은…… 믿을 만한 친구 와이프가 산부인과 의사야. 손님 빠진 시간에 봐 달라고 하면 도와줄 테니까 그리로 옮기고. 같이 가지 말란다고 안 갈 것도 아니잖냐.”

“고마워.”

이정이 짧은 시간 내에 최선의 대비책을 내놓은 재련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선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의 촬영이 끝나기까지는 한 달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반을 쉬고 3월 중순부터는 다시 촬영에 돌입하는 일정이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차기작을 급하게 잡았을까.

이재현 작가 복귀작이라길래 앞뒤 안 재고 결정한 거였지. 이정이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쉬었다.

“예현 씨가 걱정이네. 승진한 지도 얼마 안 됐다며? 너야 철판이니까 괜찮겠지만, 예현 씨는 눈치 보일 텐데.”

재련이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저놈이야 별로 걱정되지 않지만 이정이 봐야 할 눈치마저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은 예현은 조금 걱정이 됐다.

게다가 열성에 남성 오메가라 임신 기간이 더 힘들 텐데.

“진짜 괜찮겠어?”

“괜찮아. 내가 그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이정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은 되지만, 그만큼 열심히 할 테니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4시에 촬영하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벌써 두 시 반인데, 일단 가라. 대책은……. 대책은 또 내가 세워야겠지 뭐.”

재련이 어서 가 버리라며 훠이훠이 손짓했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대책을 찾아 줄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이정은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재련의 방에서 나왔다.

“오늘 촬영이 새벽까지였지. 집에 가면 형은 자고 있겠네.”

이정이 일정을 체크해 보며 중얼거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일을 쉬었으면 좋겠지만, 예현은 일에 대한 욕심이 있는 편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은 신입 교육 때문에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 몸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오후 2 : 38]

이정이 예현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고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예현이 아프다고 해도 촬영 중에 달려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이, 자신의 직업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신 주임님 이거…….”

그리고 같은 시간, 걱정 가득한 문자의 수신인, 예현은 오늘도 사고를 쳐 버린 서원 때문에 문자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서원 씨. S 물산 자료 정리 다 해 두셨어요?”

“아, 네! 어제 다 끝내고 퇴근했습니다.”

서원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별문제 없이 처리했겠지. 예현이 메일함을 확인해 보았다.

“어, 어제 과장님께서 바로 보내 달라고 하셔서 최종 파일 보냈는데…….”

“그래도 제가 사수잖아요. 잘 끝냈는지 확인은 해 봐야죠.”

이미 과장님이 검수하시고 최종 파일을 넘겼다는 서원의 말에도 예현은 자료를 열어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과장이 제대로 확인을 했을지 못 미덥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쪽이 여러모로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여기 이 부분…… 자료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그렇게 자료를 확인하던 중 예현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중간까지는 작년 자료가 앞에 나와 있었는데, 어느 부분을 기점으로 작년 자료와 올해 자료의 위치가 바뀐 채로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진 작년 자료가 앞인데, 왜 여기부턴 올해 자료가 앞에 나와 있죠?”

“어, 어?”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서 예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원이 당황해 목을 쭉 내밀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서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과, 과장님께서 확인 끝났다고 하셔서…… 이미 자료 보냈는데…….”

“아니,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서원의 말이 끝내기도 전에 2팀의 박 과장이 1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 과장과 차장 승진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 1팀과는 그닥 사이가 좋지 않은 상사였다.

“아니, 오전부터 무슨 시비입니까.”

“시비가 아니라, 김 주임이 분명 자료 제대로 확인해서 넘겼는데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자료 잘못된 거 아니냐는 연락이 오냐고요.”

박 과장이 큰 소리로 김 과장을 다그쳤다. 아직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김 과장이 역으로 큰소리를 쳤다.

“아니, 무슨 일이든 그쪽에 연락 온 거면 그쪽에서 실수한 거겠지. 왜 애먼 데다가 화풀이야?”

“그쪽에서 미리 체크하다가 혹시나 싶어 이쪽으로 연락 준 건데, 진짜 이대로 참고해서 발주 넣었으면 대형 사고 날 뻔한 걸 커버 쳐 줬더니!”

박 과장이 가져온 서류철을 김 과장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보기 좋게 정리까지 해 온 것인지, 얼핏 보기에도 형광펜 자국이 가득한 서류를 받아 든 김 과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재수정해서 점심시간 지나기 전까지 보내 달라고 하니까,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서 보내드리세요.”

예현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7분. 12시 반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인데 점심시간 지나기 전까지 일을 끝내 달라는 건 점심 먹기는 글렀다는 이야기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서원이 총알같이 달려가 박 과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제 딴에는 상황을 수습해 보겠다고 한 일이었겠지만, 김 과장의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를 내는 행동이었다.

“작성은 신입이 했어도 사수가 재차 체크하고 팀장이 최종 확인까지 했을 건데, 이게 신입 하나만의 잘못이냐고요.”

“사, 사수분이 어제…….”

“됐고, 제대로 처리해서 다시 보내드려요. 늦어도 2시 반까지는 보내드린다고 했으니까 시간 잘 지키시고요.”

제멋대로 데드라인을 정해 버린 박 과장이 김 과장에게 확인 좀 제대로 부탁드린다며 쐐기를 박고 1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 사원, 따라 나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아 보이는 과장이 서원을 데리고 나갔다. 서원은 곧 과장에게 깨질 테고, 수정은 내 몫이겠지.

예현은 푸념을 늘어놓을 시간도 없이 바로 수정에 들어갔다. 다시 보니 수치를 잘못 입력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수식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양이 많았다.

아무래도 점심은 못 먹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일에 집중하려는데, 홑몸도 아닌데 신경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휴, 솔직히 그 기본적인 거 하나 제대로 못 본 과장님 잘못도 있는데 고생은 예현 씨가 다 하네. 몸은 좀 괜찮아요?”

“아, 그냥 피로가 좀 쌓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내일까지만 나오면 주말이니까 주말에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 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원이 들어온 이후 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은 사고 수습을 하느라 자잘하게 일이 많이 늘어나 아직 다들 정신이 없었다.

예서가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꼭 정시 퇴근을 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어서 회사 생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정과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느라고 월차나 연차, 병가까지 알차게 쓰다 보니 오히려 더 눈치가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임신했으니 당분간 쉬어야겠다는 이야기까지 하기엔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복지가 잘 되어 있는 회사이기는 했지만 제도가 있다고 해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입이 제대로 1인분을 하기는커녕 마이너스 0.5인분 정도 하고 있는 지금, 예현까지 빠졌다가는 팀이 제대로 굴러가기는 할지가 의문이었다.

“수습 3개월이지? 벌써 한 달 거의 다 지나갔는데 아직까지 저래서야…….”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그래도 아무나 들어오는 회사는 아닌데, 저 정도로 일 못 하는 신입이 들어온 건 의문이네요.”

서 주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박 대리가 갑자기 고개를 팍 들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건 그냥 찌라시인데, 이 사원이 회사 높으신 분 아들이라는 말이 있더라고.”

어지간히도 입이 근질근질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 주임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회장님은 이 씨가 아니잖아요?”

“아니, 회장님이 아니라 이사님 중의 한 분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더라고. 과장님도 그래서 막 대하지 않고 참고 계신 거고.”

하긴 신입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는 짓 따위, 예현이 신입이던 시절에는 없던 일이었다. 단순한 신입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소문일 뿐이긴 한데…… 과장님이 저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진짜인 것 같기도 해. 과장님이 언제부터 누구 혼낼 때 밖으로 데려가서 조용히 혼내고 그랬어? 옆 팀에까지 다 들리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면 질렀지.”

박 대리의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긴, 아무리 신입이어도 그렇지 일을 너무 못 하긴 해.”

“그럼 수습 지나면 정직원 되는 거 거의 확정이네요? 아. 예현 씨 어떻게 하나.”

“하하하…….”

웬만해선 5개월 차부터는 일을 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때까지 서원이 1인분, 아니. 0.7인분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일단은 사고 수습부터 해야겠지. 예현이 잡담을 그만두고 화면에 집중했다. 결국 예현은 점심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일을 마무리했고, 거기다가 원래 해야 했던 일까지 처리하느라 4시가 지나도록 핸드폰 한 번 보지 못한 채 업무를 이어 갔다.

[괜찮아. 나 너무 걱정하지 말고 촬영 잘 다녀와. 오후 4 : 16]

한참 늦은 답장을 보낸 예현이 겨우 숨을 돌렸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잘 먹어야 할 텐데, 잘 먹기는커녕 평소보다도 쪼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커피라도 한 잔 사 줄까?”

“괜찮아요. 병원에서 당분간 카페인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양심이 찔리는 예현이었다. 평소엔 이런 상황이라면 빵이라도 먹는 편이었는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노릇한 빵 냄새와 달달한 향이 너무 거슬려 입가에 가져다 대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그래? 하긴 요즘 커피 너무 많이 마시긴 했지.”

다행히 이 대리는 예현의 변명을 그리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퇴근까지 2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집에 가서 많이 먹으면 되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일에 집중했다. 서원은 혼이 난 이후 평소보다 더 풀이 죽어 자잘한 실수를 연발했고, 그걸 처리하다 보니 오늘도 하루가 우당탕탕 지나가 있었다.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게 회사를 나선 예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온갖 반찬을 늘어놓고 저녁을 먹었다.

다행히 역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 냄새와 빵 냄새뿐이었기에 식사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니 이번엔 곁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나 온다고 했었지…….”

어젯밤, 두 사람은 온갖 영상을 보며 페로몬 교류하는 법을 익혔다. 확실히 피로가 조금 풀리고 안정이 되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정을 못 본 지 아직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그 감각이 그리웠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왠지 모를 휑한 기분이 드는 것이 해결되려면 꼭 이정이 옆에 있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하아…….”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정도, 자신도 일이 있고 그런 사정 때문에 빠지기엔 팀에 민폐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겨우 하루잖아. 참으면 될 거야. 예현이 애써 울적한 기분을 지우려 하며 아직 납작한 배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나 임신 기간도, 이정의 촬영과 예현의 고난도 하루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서원의 사고 치는 횟수는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정도로 나아진 것은 아니었고, 이정 역시 유독 지방 촬영이 많은 이번 작품의 특성 때문에 일주일의 반 정도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산모분, 지금 일하고 계시죠?”

“네? 네.”

아무리 시간을 맞춰 보려 해도 이번 주는 통 시간이 맞질 않아 혼자 병원에 온 예현이 긴장한 채 대답했다. 꽤나 심각한 얼굴을 하고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말했다.

“일하면서 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인가요?”

“네?”

“아이가 주 수에 비해 좀 작아요. 산모 건강 상태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고요. 열성이셔서 그렇지 않아도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예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겨우 12주 차에 접어들고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20주까지는 일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엔 휴직계를 조금 더 빨리 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임신 기간의 1/3이 지나갔건만 예현은 아직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였다. 아직 서원의 수습 기간만 해도 2주가 넘게 남아 있었다.

“……좀 더 신경 쓰는 걸로는 안 될까요? 제가 더 조심하면…….”

“물론 산모님께서도 많이 신경 쓰시겠지만, 외부 요인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보니 의사로서는 최대한 빨리 휴직계를 내시는 방향으로 조언을 드리고 싶네요.”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예현이 화면 위에 떠 있는, 저번 주보다 아주 조금 커진 하얀 점을 보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만약을 위한 조언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이정 씨 곧 종방이죠?”

“……네. 다다음 주 초에…….”

“페로몬 교류도 좀 더 자주 해 주시고, 좋은 생각 위주로 편안히 지내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의사가 심각한 얼굴을 한 예현을 위로해 주려 했다. 예현이 겨우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러 가지 유의 사항을 듣고 병원에서 나오는 예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일을 생각보다 더 빨리 쉬어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사이클 휴가 쓰느라 눈치 보이는데, 임신으로 인한 휴직이라니.

최대한 미루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이가 우선이었다. 예서에게서 신경을 꺼도 되는 시기가 온 지 1년이 겨우 지났는데, 벌써부터 일을 다시 뒷전으로 보내야 했다.

돈에 쪼들리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 욕심이 꽤 있는 편이었기에 더 아쉬웠다. 생계 때문에 앞뒤 따질 것 없이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그래도 일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었다.

자신이 버는 돈이 이정의 재산에 비하면 사막에다 모래를 한 줌 붓는 급의 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쭉 쉬는 것이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쓰다가 만약에라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게 더 괴로울 것 같았다.

“그래도 당장은 어렵겠지.”

지금 당장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고 휴직계를 내더라도 처리되는데 2주 정도는 걸릴 것이었다. 2주 동안 최대한 맡은 일을 다 처리하고 가야겠지.

“하아…….”

팀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정에게도 그래야겠다고 말은 해야겠지? 오늘은 못 들어온다고 했고, 내일 저녁에나 볼 수 있겠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마지막 촬영까지는 2주일도 안 남았고, 막방까진 이제 4주도 안 남았네.”

“…….”

“그러니까 제발 표정 좀 풀고 살자.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너 무슨 일 있는지 물어본다고.”

주석이 죽는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촬영 내내 평소에 비해 날카로운 분위기를 하고 있는 이정 탓에 몇 주째 질문 세례에 시달리고 있었다.

“딱 4주만, 아니지. 이제 3주 반만 참으면 돼. 그럼 병원 한 번 갈 때마다 첩보물 찍을 필요도 없을 거고…….”

“하아…… 모르겠어. 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임신, 드라마 속 상대 역이 임신한 역할을 맡아 다정한 예비 아빠를 연기해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잦은 지방 촬영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완전히 제각각이 되었다. 3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왕복 8시간을 써도 모자라게만 느껴지는 게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페로몬 교류는 낭만적인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해 줘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가 제 옷을 잔뜩 꺼내 끌어안고 잠든 예현을 봤을 때는 미안한 마음에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을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었다.

예전엔 회사 일이 힘들다며 별생각 없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던 예현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얘기를 하면 자신이 걱정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일을 그만두라고 하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회사 얘기도 일절 꺼내질 않았다.

아이가 생긴 건 기쁜 일인데, 자신이 예현에게 믿음을 줄 만한 상황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하루 종일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번 주말은 쉬잖아. 이틀 꽉 채워 쉬는 게 얼마 만이냐. 저번 주 방영분 일부는 완전 라이브로 찍어서 진짜 하루도 못 쉬고 달렸는데.”

“그래. 주말이라 다행이지.”

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오랜만에 함께 보낼 수 있는 주말이었다.

이번 주 내내 챙겨 주지 못한 만큼 잘 챙겨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 이정이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을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는지 계속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 병원 다녀오는 날이었지? 일찍 자지 그랬어.”

“할 말이 있어서.”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자고 있거나, 잘 준비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할 얘기가 있다고 진지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꽤나 중요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검사 결과에 문제라도 있었어.”

이정이 가방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는 예현에게로 다가갔다. 예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큰 문제는 아니고, 아기가 주 수에 비해 조금 작대. 그래서…….”

“왜?”

이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예상보다 격한 반응에 예현이 되려 이정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냐. 그냥…… 내가 열성이기도 하고, 요즘 회사 일도 좀 바쁘다 보니까 그런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웬만해선 최대한 빨리 휴직계를 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예현이 이정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말했다. 일을 쉬는 것이야 이정 쪽에서 더 기뻐할 것 같았지만, 괜히 걱정만 실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정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예현이 그런 이정의 손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난 정말 괜찮아. 생각보다 육아 휴직이 좀 더 빨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기가 제일 우선이니까…….”

“진짜 괜찮아?”

“응. 의사 선생님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쉬면 괜찮을 거라고 했…….”

“아니, 그거 말고.”

이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이던 이정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승진하고 나서 엄청 좋아했었잖아. 일하는 거, 힘들긴 해도 보람 있다고…….”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은 예현이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애매한 침묵을 뭐라고 생각한 것인지 모를 이정이 말을 이어 갔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애를 낳아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형한테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아니야. 왜 그런 생각을 해.”

예현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이정을 안아 주었다. 자신이 하던 생각을 이정이 똑같이 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 애 때문에 네 커리어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버리는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나는……!”

“나도 마찬가지야. 일도 중요하지. 솔직히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야. 그런데, 그래도 지금은 너랑 아기가 제일 중요해.”

예현이 이정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잠시 예현의 토닥거림을 받고만 있던 이정이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언제나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같이 만든 아기인데 혼자만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아니야. 솔직히 처음엔 나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잖아. 어떻게 소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네가 날 생각하는 만큼, 나도 똑같이 널 생각하고 있어.”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이정 역시 꽤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예현이 그런 이정을 한참이나 안고 다독였다.

“잘할 수 있어. 어떻게 처음부터 완벽하겠어.”

예현이 페로몬을 살짝 내비치며 말했다. 분명 아이를 위해 시작한 페로몬 교류인데, 어째 예현보다 이정이 더 안정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촬영 끝나면 1초도 안 떨어지고 형 옆에만 있을래.”

“그래, 그래.”

“한 발자국도 안 움직여도 되도록, 화장실 갈 때도 업어서 옮겨 줄게.”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정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예현은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아빠가 이렇게 속상해하면 아기도 다 느낄 건데, 좋은 생각만 해야지.”

“그럼 안 되지.”

이정이 꼭 끌어안은 품을 놓아주고는 호흡을 골랐다. 예현이 그런 이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 서투르고 불안만 가득한 예비 아빠들이지만 분명 조금씩 나아질 거다.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 주기 위해선 지금보다 좀 더 빠르게 어른이 되어야 할 테지만, 언제나 그랬듯 잘 이겨 낼 거라 믿었다.

“아기가 불안한 게 뭔지도 모를 만큼 좋은 생각만 하게 해 줄게. 꼭.”

이정이 자신 있게 다짐하며 예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오늘도, 서툴고도 평범한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결국 의사의 조언에 따라 조금 이른 휴직계를 낸 예현은 이정의 드라마 촬영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육아 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금만 더 버텨 주면 안 돼? 하필 지금…….’

‘어쩌겠어. 남은 사람들끼리 잘해야지 뭐.’

‘주임님…… 제가 너무 일을 못 해서 스트레스받으신 거죠…….’

물론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축하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서원의 수습 기간이 끝나던 날, 예현이 낸 휴직계가 육아 휴직계라는 것이 알려지며 회사가 한바탕 뒤집어졌을 때는 정말 눈앞이 아찔했었다.

이정의 드라마가 종방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입이 가벼운 회사 동료 몇몇 때문에 예현의 임신 사실이 순식간에 알려질 뻔한 적도 있었다.

예현의 애인이 누구인지는 회사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히 아이의 아버지를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련과 주석의 눈물 나는 노력으로 겨우겨우 기사가 터지는 것을 일주일 늦출 수 있긴 했지만, 그리 쉽게 이뤄 낸 일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예현이었다.

‘저한테 미안하시면 다른 것보다 몸 관리만 잘해 주세요. 예현 씨 조금이라도 아프면 이정이 놈 분위기부터가 삭막해지니까.’

미안해하는 예현에게 주석이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그의 말대로 예현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건강을 잘 챙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이틀 뒤면 30주. 남성 오메가의 임신 기간은 통상 31주에서 32주 정도였으니 슬슬 아이를 만날 준비를 끝내야 할 시기였다.

[꼬물이는?]

“잘 있지.”

[그럼 우리 자기는?]

“여기 잘 있는 거 빤히 보이면서.”

이정의 차기작 촬영도 어느새 막바지였다. 잠깐이라도 시간이 나면 영상 통화를 걸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이정이 이제는 익숙해진 예현이었다.

아이에게 태명도 생겼다. 작정하고 지은 것은 아니고, 첫 태동이 느껴졌던 날 이정이 감격에 겨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꼬물…… 꼬물거렸어…….’ 하는 말만 수없이 반복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봐야지.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안 그래도 속상한데.]

이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곤 말했다. 다음 주면 드디어 이정의 촬영이 마무리된다.

임신 소식이 기사화되고,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 봐 기사를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몇몇 사람들에게 받은 축하 소식만 보고, 사람들의 반응에는 연연하지 않기로 한 예현이었다.

혹시라도 차기작에 타격이 있지 않을까 조금 걱정하긴 했는데, 스케줄 변동 없이 촬영이 시작된 것을 보니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저녁에 오잖아.”

[아직 2시밖에 안 됐잖아. 한참 남았는데.]

이정이 투덜거렸다. 예현이 그런 이정의 장난을 받아 주며 많이 부푼 배를 통통 두드렸다.

‘초기에 좀 느리게 자랐는데, 다행히 지금은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어요. 산모 건강 상태도 양호하고요. 여기 아기 얼굴 보이죠?’

이제 아기 얼굴이 초음파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자라 있었다. 쪼글쪼글한 얼굴이지만 벌써부터 코가 높고 오똑한 것이 커서 꽤 미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정이 촬영장으로 끌려가고, 전화를 끊은 예현은 갑자기 다시 초음파 사진이 보고 싶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꾸며 놓은 아기방은 예현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자 가장 공을 들여 꾸민 곳이었다.

몇 시간이 멀다 하고 들어가는 방이다 보니 아예 자주 손 닿는 물건들을 모두 그리로 옮겨 놓은 참이었다. 2년 가까이 살면서 들인 짐보다 몇 달 동안 사들인 아기 물건이 더 많은 것 같은 건 아마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여기 있다.”

가장 최근에 받은 초음파 사진을 발견한 예현이 아기 침대에 기대앉아 사진을 확인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이정을 꼭 닮은 것 같은데, 이정은 예현을 꼭 빼닮았다며 우겼다.

“아무리 봐도 강이정 미니미인데.”

예현이 아직 다 펴지지도 않은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온갖 아기 용품으로 채워진 방에서는 좋은 향이 나고 있었다.

이제 한 달 정도 지나면 귀여운 아이가 이 침대에 누워 있겠지. 예현이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다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아기 낳고, 형 몸 좀 회복되고 나면 애는 내가 볼 거야.’

구체화되지 않은 차기작 계획을 죄다 취소해 버린 이정은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자신이 돌볼 테니 몸이 회복하는 대로 복직해도 괜찮다 말했었다.

너무 오랫동안 쉬는 것도 민폐였고, 처음엔 서먹하게 굴었던 팀원들도 다행히 지금은 예현에게 가끔 연락을 주곤 했다.

‘아기 엄청 예쁘겠다. 아기 낳으면 나도 한 번만 불러 줘요. 얼굴 구경 좀 하게.’

‘주임님. 저 이제 1인분은 한다고 칭찬받았어요. 돌아오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회사에서 예현 씨 엄청 찾아요. 강이정 홍보 모델로 쓰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물론 마냥 호의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조금 얽힌 부분도 있기도 했지만 뭐,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요즘은 또 너무 빨리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예뻐서야 태어나고 나서는 하루 종일 아기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아이의 형질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얼마 전 병원에서 듣기론 여자아이라고 했다. 강이정을 닮은 딸이라니, 분명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울 것이었다.

예현이 곱게 접어 올려 둔 연분홍색 잠옷을 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옷을 펼쳤다. 예현은 옷이 보일 때마다 작고 귀여운 옷을 펼쳐 보곤 했다.

“이렇게 쪼끄마한 옷인데, 이걸 입는다니.”

예현이 손바닥을 펼쳐 옷의 크기와 제 손바닥의 크기를 비교해 보았다. 정말 이렇게 작은 옷을 사람이 입을 수가 있다니, 사면서도 괜찮을까 싶어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예현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미 몇 번이나 살펴본 아기방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도 모르게 방 안에서 잠이 든 예현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

“으음…….”

분명 해가 중천인 시간에 잠들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게다가 분명 아기방에 있었는데, 침실에서 이불을 덮고 깨어난 것을 보니 이정이 집에 온 것 같았다.

“언제 왔어?”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저녁 준비를 거의 끝낸 이정이 예현을 보곤 웃었다. 꾸준히 요리 레슨을 받은 덕인지 이제 이정의 요리는 무난한 수준이 아닌, 맛있는 경지까지 발전했다.

“자는 것도 좋지만, 자기도 꼬물이도 밥은 먹어야지.”

이정이 예현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웃었다. 다행히 이번 촬영은 거의 수도권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이틀 이상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없었다.

물론 그래도 같이 있을 시간이 많이 모자라 아쉽긴 하지만, 나쁜 생각보다는 기쁜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기로 한 두 사람이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입원이었지?”

“응. 나 촬영 끝나는 대로 바로 챙겨서 갈 수 있도록.”

이정의 마지막 촬영 날짜는 다음 주 월요일. 그래서 화요일 오전에 함께 입원 수속을 밟기로 했다.

아이에게 별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언제 양수가 터질지 모를 만큼 아이가 자란 상태였고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미리 입원해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꼬물이 얼굴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아직 이름도 못 정했는데.”

“제일 예쁜 이름으로 정해 주고 싶은데, 느낌이 오는 이름이 없단 말이지. 만나기 전까진 이름 정해 둬야 할 텐데.”

이정이 예현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꼬물이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콩콩 배를 찼다.

“봐, 꼬물이도 빨리 이름 정해 달라고 하잖아.”

“입원하면 아기 이름 뭘로 할지만 생각하자. 이게 다 네가 고민만 하려고 하면 여기저기 불려 가서 그런 거잖아.”

예현이 이정의 코를 가볍게 잡아 비틀었다. 아야야, 엄살을 떤 이정이 예현의 어깨에 턱을 기대곤 투정했다.

“나야 매일 집에 붙어 있고 싶은데, 날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그래도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어. 다음 주부터는 제발 저리 가라고 해도 옆에 꼭 붙어서 안 떨어질 테니까 각오해.”

“빨리 다음 주가 됐으면 좋겠다.”

예현이 이정의 뾰루퉁한 볼을 콕콕 찌르며 대답했다. 입원 일정을 여유롭게 잡았으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최대한 예쁘고 어울릴 만한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고민을 할 만한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

“…….”

그러나 안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며칠 뒤, 나른하게 낮잠을 즐기던 예현은 불길한 예감에 홀로 눈을 떴다.

침대 시트가 온통 축축했다. 게다가 축축하게 젖은 시트를 보자마자 밀려오는 통증에 뭘 해야 할지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핸, 핸드폰…….”

이정의 마지막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인 월요일 오후 세 시의 일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119를 불렀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가 어디냐는 구급 대원의 질문에 겨우겨우 병원의 이름을 말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 진통제를 주사 맞고 나서야 겨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이 돌아왔다. 식은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양수가 터져 젖은 바지뿐만 아니라 티셔츠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이렇게 아픈데 정신은 남아 있다니, 차라리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은 예현이었으나 진통제와 의사는 예현을 그리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정신 놓으면 안 돼요. 양수 터졌고, 산도 거의 다 열려서 바로 수술실로 옮길 거예요.”

“아, 아파요…….”

예현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했다. 아플 거란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도 이것보다 아프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예현이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신음했다.

“아, 아악!”

“보호자분 오고 계시다고 하시고, 아. 지금 바로 수술실로 들어갈게요.”

지금 몇 시지? 이정이 촬영은 끝내고 여기로 오는 거겠지? 아니, 촬영이고 나발이고 그냥 빨리 낳고 기절이라도 해 버리고 싶다……

예현의 머릿속이 핑글핑글 어지러운 탓에 단편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자신도 모르게 팔다리를 버둥거리게 될 정도로 몸이 통제가 되질 않았다.

*****

“아기 머리 살짝 보여요. 좀 더 힘주세요. 하나, 둘!”

“으흐, 악!”

의사가 카운팅에 맞춰 숨을 쉬라는 듯 옆에서 열심히 숫자를 세 주었지만 예현에겐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악, 아악!”

옆에서 숫자를 세 주는 것이 무안할 정도로 엇박자로 비명을 질러 대던 예현이 몸부림을 쳤다. 분명 한참 전부터 조금 더, 거의 다 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못 할, 못 할 것 같아요.”

“산모님. 할 수 있어요.”

몇 분이 지난 건지, 몇 시간이 지난 건지조차 가늠이 가질 않았다. 예현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못 하겠다며 도리질을 쳤다.

“밖에 아기 아빠 와서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힘내 보세요.”

이정이 왔다는 얘기에 예현이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그런 예현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아기 아빠랑 빨리 아기 안아 봐야죠. 자, 힘주세요. 하나, 둘!”

“아악!”

예현이 비명을 지르며 의사의 신호에 맞추어 몸에 힘을 주었다. 죽을 것같이 아팠지만 그래도 이정이 문밖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진정이 됐다.

“거의 다 왔어요. 한 번 더!”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거의 다, 조금 더, 라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들은 것인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예현은 다시 한번 의사의 거짓말에 맞춰 힘을 주었다.

“형. 자기, 형…….”

언제 들어온 것인지도 모를 이정이 예현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애는 자신이 낳는데 이정의 얼굴이 더 엉망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악! 악!”

예현의 비명 소리가 다시 한번 수술실을 울렸다. 제 손을 잡은 이정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보여요! 머리 나오기 시작했어요!”

“거짓, 말…….”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밖으로 뱉은 예현이 줄줄 울면서도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줬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듯, 몸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우렁찬 울음소리가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

“응애! 응애!”

“건강한 공주님입니다. 손가락 발가락 열 개 다 있고요, 울음소리도 아주 우렁차고 좋아요.”

“아흐…….”

아이와 함께 온몸의 힘 역시 몸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예현이 긴 한숨과 함께 몸에 힘을 빼고 그대로 늘어졌다.

“형……!”

이정이 그런 예현을 끌어안았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아? 얘기 듣자마자 바로 왔는데, 너무 늦었지…….”

땀과 눈물로 메이크업이 엉망으로 번진 데다가 어지간히도 속을 졸였는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예현을 마주했다. 지금 내 얼굴도 저렇게 엉망이려나. 예현이 힘없는 손을 들어 이정의 얼굴을 쿡쿡 찔렀다.

“킁, 진짜 바로 왔는데…… 꼬물이가 이렇게 갑자기 나오고 싶어 할 줄은 몰라서…….”

“애는 내가 낳았는데 왜 네 얼굴이 이렇게 엉망진창이야.”

“아기…… 안아 보시겠어요?”

꿇고 앉아 예현을 끌어안듯 엎드린 자세로 울고 있는 이정의 뒤에서 아이를 안은 채 뻘쭘하게 서 있던 간호사가 이정의 울음이 조금 사그라들자 아이를 두 사람 쪽으로 보여 주었다.

쪼글쪼글한 핏덩이 하나가 히잉, 하고 울며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꼬물이…… 안 안아 줄 거야?”

“아니, 아니야. 제, 제가 안을게요.”

이정이 힘이 다 빠져 늘어져 있는 예현을 대신해 꼬물이를 받아 들었다. 아이가 바스라지기라도 하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아이를 받쳐 든 이정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너무 작아…… 어떻게 해.”

“바보야. 애도 그쳤는데 아빠가 그렇게 울고 있으면 어떻게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이정을 보자니 예현 역시 코끝이 찡해졌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저 작은 아기를 내가 낳았다니.

조금 전까지 죽을 것같이 악을 쓴 기억은 그새 휘발되어 사라지고, 눈앞의 아이가 너무 작고 소중하다는 생각만 드는 예현이었다.

“예쁘다. 너무 예뻐.”

이정이 아이를 조심스럽게 예현의 머리맡에 놓아 주었다. 몸을 다 펴지 못한 채 웅크린 아이가 꼬물거리며 예현의 옆에 눕혀졌다.

“봐 봐. 우리 꼬물이야.”

예현이 고개를 돌려 옆에 눕혀진 아이를 보았다. 방금 배 속에서 나와 쪼글쪼글하고 엉망진창이었지만 예현의 눈에는 세상 그 어떤 아기보다 더 예쁘게 보였다.

“너랑 닮았어. 특히 코가…….”

“아니야. 형이랑 더 닮았어. 여기 얼굴형도 그렇고…… 형?”

예현을 말을 하다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 쓴 데다 긴장까지 풀리고 나니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형, 형!”

“우웅…….”

이정의 다급한 목소리와 아이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예현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집에 왔다. 이현아.”

그로부터 2주 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 예현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기방의 문을 열었다.

“우으. 웅.”

“우리 공주님. 여기가 네 방이야. 아빠들이 예쁘게 꾸며 놨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지?”

예쁜 이름을 지어 주겠다고 그렇게 난리 법석을 피우고, 온갖 작명소에서 수많은 이름을 받아 와 놓고 결국 아이에게 붙여 준 것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이현이라는 이름이었다.

“부으.”

“마음에 든다고? 정말?”

“네. 마음에 들어요.”

아이를 안은 이정이 이현 대신 대답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침대 위에 눕힌 예현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현을 바라보았다.

“침대가…… 너무 큰가? 이현이가 너무 작은 건가?”

“아냐. 애들은 빨리 큰다잖아. 적어도 1-2년은 쓸 거니까 이 정도 크기여야 괜찮지.”

남성 오메가의 아이는 임신 기간이 조금 더 짧은 만큼 여성 오메가나 여성 베타의 아이보다 조금 작은 것이 정상이라지만, 이현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좀 작은 편이었다.

“이것도, 이렇게 작은 옷을 어떻게 입나 했는데 이현이보다 옷이 더 커.”

예현이 미리 사 둔 옷을 이현에게 대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인데도 이현보다 한 사이즈 정도 더 커 보였다.

“괜찮아. 금방 클 건데 뭐. 당분간은 잘 감싸 놔야지.”

“우으, 웅!”

이현이 이정의 말에 동의하기라도 하듯 팔을 꿈틀거리며 옹알거렸다. 2주 새 주름이 좀 줄어든 이현은 이정의 얼굴을 많이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강이정 딸이네.’

‘얘는 길 잃어버려도 부모 금방 찾겠다. 유치원 보내자마자 강이정 딸이라고 소문 쫙 나겠는데.’

쌍꺼풀진 예쁜 눈, 오똑한 코, 새하얀 피부. 입매까지 모든 것이 이정을 쏙 빼닮은 딸이었다.

“형이랑 닮았어.”

“글쎄, 아무리 봐도 네 미니미라니깐.”

“아냐. 얼굴형이 형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얼굴 작고, 볼도 포동하고…….”

이정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말을 반박했다.

“그렇지, 이현아?”

“부으.”

“봐, 이현이도 맞다잖아.”

이정이 이현의 의미 없는 옹알이를 제 좋을 대로 해석하곤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웃어서 기분이 좋아진 이현 역시 꺄륵하고 웃었다. 아무리 봐도 붕어빵 부녀였다.

“복직은 다다음 달?”

“응. 다다음 달 24일.”

미리 이야기해 둔 대로 이현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이정이 작품 활동을 쉬고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예현은 정말 괜찮은 거냐고 걱정했지만 이정은 자신도 휴식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며 예현을 안심시켰다.

“그때쯤엔 이 옷 꼭 맞겠지?”

“혹시 모르지. 엄청 빠르게 커서 이 옷 안 들어갈 정도로 커질 수도 있고.”

이정과 예현이 침대에 누워 꼬물거리는 이현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임신부터 아이를 낳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2년 반, 이정이 스물아홉이 되고 예현이 서른이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당장 2년 반 전으로 돌아가 2년 반 후의 두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 믿기는커녕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코웃음을 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지나 지금의 서로가 있었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또 2년 반이 지나면 그때는 또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한 일들이 잔뜩 일어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있고, 사랑스러운 사랑의 결실이 새액새액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불안하고 서툰 시간을 보내더라도 모두 이겨 내고 행복한 미래로 다가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정석 같은 연애사가 아니라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발을 건다고 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해피 엔딩을 향해 나아갈 것이었다.

이정과 예현이 손을 맞잡고 이현을 바라보았다. 평화롭고도 행복한, 그리고 평범한 오후였다.

<계약연애의 정석> 외전 完.

계약연애의 정석 외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