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번 촬영은 되게 정기적으로 진행되네?”
“어?”
의심은 언제나 사소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예현은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이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놀라긴 뭘 놀라. 그냥…… 우리 자기가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니 감동받아서 그러지.”
순식간에 평소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온 이정이 예현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 요즘 이정의 생활 패턴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한동안 하루는 새벽에 나갔다가 하루는 새벽에 들어오곤 하더니, 요즘은 들어오는 시간이 일정했다.
게다가 들어올 때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단 말이지.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원래 매일 들어오는 시간이 달랐던 것 같은데, 요즘은 되게 규칙적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요즘 웰메이드 드라마라면 제작 과정도 웰메이드여야 한다고, 노동 환경 꽤 잘 챙겨 주는 곳도 있거든. 덕분에 오늘도 형 퇴근하기 전에 돌아왔잖아.”
이정은 집을 나갈 때,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예현이 자고 있거나 자리를 비운 상태면 꼬박꼬박 문자로 제 동선을 보고하곤 했다.
요즘 이정이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칼같이 5시, 그것도 5시 20분에서 30분 사이.
규칙적인 것도 한두 번이지, 슬슬 직장인인 자신보다 규칙적으로 귀가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게 된 예현이었다.
“그래? 난 그런 건 잘 모르니까.”
종종 이정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기도 하고,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에 관심이 생기기도 해 가끔씩 연예 기사 면을 쭉 내려 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예현에게 연예계란 어려운 세계였다. 그나마 촬영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긴 했다.
“우리도 다 일하는 사람인데, 노동법 준수해야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너도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기라도 하면 좋겠다더니, 잘됐네.”
예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정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니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싶었다.
“일찍 들어오면 좋지. 저녁도 같이 먹을 수 있고.”
이정이 일찍 들어오는 날에도 식사는 늘 예현의 몫이었다. 정확히는, 예현이 이정에게 허락 없이 불 앞에 서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린 것이었다.
조금은 삐뚤어진 마음으로 말했던 진실. 이정의 요리 실력이 심각하다는 것을 말한 이후, 예현은 이렇게 된 거 그냥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이건 하루 이틀로 고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냥 요리는 내가 할게. 내가 못 하는 날엔 시켜 먹거나, 간이 아예 필요 없는 음식만 하는 걸로 하자.’
그때, 이정은 상당히 충격받은 얼굴을 하긴 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날 이후 요리는 늘 예현의 몫이었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 예현은 그런 점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이정은 예현이 혼자 요리를 하고 있으면 늘 씁쓸한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곤 했다.
오늘도 그렇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재료를 사는 것 정도는 하게 해 달라는 이정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에, 요리 재료는 항상 이정이 맡아 냉장고 가득 채워 두곤 했다.
이정의 요리 실력이 끔찍해서이기도 했지만, 예현 역시 요리하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다.
“저녁은 비빔밥 위에 계란후라이 하나 올려서 먹을까. 너 계란후라이 되게 예쁘게 굽잖아.”
“그럴까?”
이정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간단한 일 정도는 가끔 시켜 줘야 풀이 죽어 있지 않으니, 예현은 일부러 종종 이렇게 이정한테 작은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비빔밥은 엄청난 요리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메뉴였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정이 지나친 도전 정신을 발휘해 기상천외한 양념을 만들지 않게 할 것. 하나뿐이었다.
그것만 조심하면 함께 만들 수 있는 요리였기에 오늘은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함께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간단한 반찬거리 몇 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이것저것 만들던 참이었다.
“손 베인 거야?”
그러던 중, 이정의 손에서 못 보던 상처를 발견한 예현이 물었다. 칼을 쓰는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지금 다친 건 아닐 테고, 손에 상처가 있는데 밴드도 붙이지 않고 요리라니. 상처에 뭐가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예현이 이정의 손을 잡아 올렸다.
“아…… 아까 살짝 베였는데,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불편해서 오다가 떼 버렸어.”
“그래도 하루 정도는 붙이고 있어야지. 어쩌다가 베인 거야?”
“……대본 보다가, 종이에 베였네.”
이정의 대답에 예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이에 베인 것치고는 상처가 조금 큰 것 같았다.
얕고 길게 난 상처 자국. 예현이 그 상처를 보다 손을 씻고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진짜 신경 쓸 정도는 아닌데.”
“됐어.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게. 얕은 상처여도 혹시 모르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조심하는 게 좋잖아.”
예현이 이정의 손에 연고를 발라 주고 그 위로 밴드를 붙였다. 어차피 요리도 끝물이었기에 예현은 이정을 식탁으로 쫓아내고 부엌을 정리했다.
“맛있다.”
“넌 뭘 먹어도 맛있다고 하잖아.”
이정은 정말 뭘 던져 주어도 맛있게 잘 먹는 편이었다. 본인이 만든 괴식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며 먹는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처음엔 입맛이 이상한가, 싶었는데 그냥 뭐든 잘 먹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아예 맛에 대한 기준이 이상한 것보다는 나으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형이 해 준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특히 이거, 진짜 잘 구워졌다. 며칠 전에도 먹었었는데, 그거랑 비교가 안 되네.”
이정이 반찬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한식당 같은 곳 갔었나 보네.”
“아니, 그냥…… 큼, 큼.”
이정이 말을 하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시늉을 한 이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포트로 도시락이 들어왔는데, 그런 반찬이 있더라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말투였지만 예현은 이정이 아주 뛰어난 연기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현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래? 맛있었겠네. 다른 반찬으로는 뭐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어, 어?”
“서포트 도시락이라니, 신기하잖아. 사진 같은 거 없어?”
예현이 집요하게 캐물었다. 이정은 얼핏 보기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예현의 눈에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사진…… 찍어 놓은 게 없네. 다음엔 꼭 찍어서 보여 줄게. 음, 나 계란 되게 예쁘게 구웠다. 그렇지?”
이정이 티 나게 말을 돌렸다.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것이 많은 예현이었으나 우선은 넘어가기로 했다.
정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거라면, 당장 들들 볶아 조심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방심하게 만든 후 증거를 털어 보는 것이 나았다.
“응. 너 계란으로 하는 건 거의 다 잘하잖아. 계란말이도 그렇고, 오믈렛도 잘 만들고.”
“그렇지? 내일은 내가 오믈렛 만들어 줄까? 아, 이틀 내내 계란 먹는 건 좀 그런가?”
“아니야. 두 끼 연속도 아닌데 뭐.”
예현이 한 발짝 물러나 때를 노렸다. 대체 뭘 숨기고 있길래 저러는 걸까. 사고라도 친 건가? 평소엔 귀찮을 정도로 행선지를 꼬박꼬박 보고하면서.
“아, 잘 먹었다. 설거지 그냥 내가 할게. 형은 쉬어. 고무장갑 끼고 하니까 상관도 없고 어차피 난 내일도 오후 촬영이라 쉴 시간이 많거든.”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들을 수거해 갔다. 역시 수상해. 예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금슬금 자신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예현은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제 핸드폰을 들어 이정에 대한 것들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아직 방영이 시작되지 않은 이정의 차기작 제목이라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드라마에 대한 것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실의 시간 서포트]
[진실의 시간 촬영]
그리고 한참 동안 이런저런 검색어를 사용해 가며 알아낸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정보들이었다.
[‘웰메이드’ 드라마 감독으로 자리 잡은 장명진 감독은 이번에도 그만의 촬영 방식을 고수한다. ‘만드는 과정이 즐겁지 않다면 시청자 역시 즐거울 수 없다.’는 소신을 밝힌 장 감독은 이번에도 출연진과 연출 팀 모두에게 2주의 휴가를 선사했다. 리프레시를 위한 시간이 그의 차기작 ‘진실의 시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진실의시간 세 번째 서포트! 간이 베이커리와 카페 서포트에 이어 이번에는 생과일 주스 서포트가 들어왔다. 촬영 과정은 고되고 힘들지만 이런 소소한 행복이 있어 촬영 과정이 즐거운 게 아닐까 싶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다음엔 도시락 같은 게 서포트로 들어왔으면…… #진실의시간 #서포트 #배우님팬덤최고 #소확행]
이정은 지금 휴가 중이었다. 게다가 그 드라마의 촬영 현장에는 도시락 서포트 같은 것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럼 대체 어딜 쏘다니느라 촬영이라는 거짓말까지 하는 거지. 예현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설마…….”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행선지와 동선을 숨겨야 하는 이유. 보통 연인 사이에 그런 거짓말이 오가는 이유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예현이 제 입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출근해?”
“응. 너는? 오늘은 몇 시부터 촬영이야?”
“형 출근하면 나도 슬슬 나갈 준비해야지. 들어오는 건 오늘도 5시쯤일 거야. 그럼 조심히 잘 다녀와.”
기사에서 확인한 촬영의 휴식 기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5일이나 남아 있었다. 14일의 휴가를 받았는데, 실제로 집에서 하루 종일 쉰 날은 3일이나 되려나.
지난 일주일간 이정의 동선이 어땠는지를 되짚어 본 예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회사 가기 싫어?”
“……회사는 언제나 가기 싫지. 그냥. 오늘따라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래? 그럼 오늘은 다녀와서 몸보신할 수 있게 들어오면서 고기 좀 사 와야겠네.”
휴가면서, 어딜 나갔다 들어온다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예현은 겨우 참고 웃는 시늉을 했다.
“응. 그럼 나 다녀올게.”
정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최대한 빨리 확인하는 것이 맞을 텐데,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출근은 해야겠지…….”
예현이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당장이라도 월차를 내고 이정을 감시하고 싶었지만, 예현은 당일 월차를 내겠다고 할 만한 패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필 일도 바쁜 시기라 자신 하나 빠졌다가는 팀에 어마어마한 민폐가 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예현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로 출근했다.
“예현 씨. 아까 보내 준 자료, 올해 자료가 아니라 작년 자료던데?”
“아, 죄송해요. 지금 바로 다시 보내 드릴게요.”
예현이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만 실수가 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승진 심사도 잘 끝났고, 한창 의욕에 불타 있더니.”
“……죄송합니다.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정신 똑바로 차릴게요.”
예현이 자신의 양 볼을 찹찹 내리치며 말했다. 이 대리가 예현의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 그래도 정 집중 안 되면 잠깐 커피라도 사 와. 나도 슬슬 카페인이 당기네.”
“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 대리가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으나 예현은 극구 사양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대리가 오늘 하루 고쳐 준 오류만 벌써 세 개였다.
죄송해서라도 자신이 사야겠다며 1층 카페로 향한 예현이 카운터로 가 주문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네. 현재 주문량이 조금 많아 5분에서 10분 정도 대기하셔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하필 예현의 앞 손님이 단체 주문을 한 탓에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예현이 카운터 근처의 대기석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 남친 바람 피운 거 맞다고?”
그런데 오늘따라 옆 사람의 대화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바람’이라는 단어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운 예현이 근처에서 음료를 기다리는 여성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좀 작게 얘기해. 하…… 그래. 어쩐지 야근이니 승진 심사 때문에 정신이 없느니 하면서 연락도 뜸해지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든다 싶었더니…….”
“미친 거 아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내가 바보지. 나 영업 2팀에 친구 하나 있거든, 걔가 요즘 2팀 그렇게 안 바쁘다고 말할 때 이상한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역시 행선지를 속이고, 한가하면서 바쁘단 거짓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한 가지뿐인 걸까. 예현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더니 대답을 못 하더라. 거기서 아, 다 끝났구나 싶었지. 바로 한 대 갈기고 나왔잖아.”
“그 정도로 돼? 비밀 연애 아니었으면 소문이라도 내라고 할 건데.”
“야,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회사에 그런 소문 나느니 차라리 퇴직하고 말지.”
여성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격하게 내저었다.
“그냥…… 내가 보는 눈이 그것밖에 안 됐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끝날 거면 그냥 수상할 때 바로 붙잡고 따지기라도 할걸. 괜히 아닐 거라고 생각하다 맘고생만 하고.”
한 마디 한 마디 제 이야기 같은 기분이었다. 예현은 괜히 그 자리에 더 앉아 있다가는 기분이 더 심란해질 것 같아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슬슬 단체 주문의 음료 제조가 끝나 가는 걸 보니 예현의 음료도 금방 나올 것 같았다.
“143번 손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예현이 커피 캐리어를 한 손에 들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나온 것이었는데, 어째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만 한 것 같았다.
“표정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무슨 일 있었어?”
이 대리가 그런 예현을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 예현이 자리로 돌아가 빨대를 물어뜯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예현이 스스로에게 되뇌며 파일을 재차 확인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일 생각으로 머리를 꽉 채워서 잠시라도 이정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싶었다.
“예현 씨 무슨 일 있나? 오늘따라 되게 사람이, 음…… 전투적이네.”
“그러게.”
사무실의 사람들이 말없이 업무에 집중한 예현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현은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조금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릴 뿐이었다.
*****
퇴근 후, 예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일부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정류장에서 내렸다.
집에 가서 이정을 마주했을 때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가자마자 뭐라 물어봐야 할지도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휴가 중인 거 안다고, 뭘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어보면 되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하아…….”
예현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으로 이정을 검색했다. 그러던 중, 예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이건…….”
예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오늘 올라온 한 게시글이었다. 이정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온 게시글. 예현은 망설임 없이 그 게시글을 눌렀다.
[오늘 병원 갔다가 1층 로비에서 배우 강이정님을 만났어요! 모자에 마스크까지 썼지만 아우라부터가 다르더라구요 ㅎㅎ]
모자를 눌러쓴 이정이 한 여성과 함께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예현이 스크롤을 내려 글을 계속 읽었다.
[사실 엘리베이터 탔을 때부터 그 자리에 계셨는데 핸드폰만 보다가 내리고 나서야 알았네요~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을까요? 어쨌거나 실물로 보니까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잘생겼더라구요. 사진 찍어 달라니까 바로 찍어 주셔서 완전 두근두근 했답니다.]
그 이후의 글은 작성자의 일상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예현은 그 게시글 속에서 작성자가 이정을 만난 병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 예현은 이내 그 병원에 관해서 검색해 보았다. 작성자가 자신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는 이정이 이미 그 안에 있었다고 했으니, 그 건물에 병원보다 높은 층에는 어떤 가게가 있는지만 보면 될 것이었다.
6층이 병원이고 그 위로 7층은 입원실. 8층은 대여형 스튜디오였고 9층에는 요리 학원이, 10층엔 체육관이 있었다.
“요리 학원은 매주 수요일마다 휴무…….”
그럼 스튜디오 아니면 체육관에 갔다는 건데, 예현이 알기로 이정이 다니는 체육관은 이 동네가 아니었다.
[자기♡]
그럼 스튜디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정이 몰래 고쳐둔 저장 명이 예현의 핸드폰 위에서 반짝였다.
“여보세요?”
얼떨결에 수신 버튼을 눌러 버린 예현이 핸드폰을 귀 옆에 가져다 댔다. 수화기 너머의 이정이 발랄하게 물었다.
[어디야?]
“나 지금…… 실수로 버스를 잘못 타서, 다시 갈아타느라고 조금 늦을 것 같아.”
습관적으로 지금 퇴근한다고 문자를 보내 둔 탓에 늦어지는 귀가에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해 버린 예현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넌, 집이야? 촬영 다녀왔어?”
[응. 다녀왔지. 늘 들어오던 시간에 들어왔어.]
거짓말. 예현이 자유로운 한쪽 손을 꽉 말아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이미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건만 왠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이따 들어가서 보자.”
[응, 이따……]
예현이 이정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일단 들어가서 뭐라고 말할지부터 제대로 정리하고 들어가자. 만에 하나라도 오해일 수 있으니까…….
아니, 그건 그냥 내 희망 사항인가. 예현이 한숨을 폭 쉬고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단지 안에서 돌아다니다 그것도 지쳐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예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신예현 씨?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아…….”
익숙한 목소리에 예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예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현의 어깨를 두드린 것은 다름 아닌 서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파트에 살았었지.
예현이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에서 서연을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며 서연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정곡을 찔린 예현이 어깨를 흠칫했다. 시선을 피하는 예현을 본 서연이 뭔가를 눈치채고 예현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잘 지내요?”
마지못해 먼저 말을 건 예현이 서연을 힐긋거렸다. 어째 이 사람 앞에선 항상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저야 잘 지내죠. 파혼하고 나서 잠깐 여행도 다녀오고, 박규진 같은 꼴통 말고 제대로 된 애인도 생겼고요.”
서연이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제 왼손을 바라본 예현이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예현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여태 신경도 쓰이지 않던 반지였는데, 어째 한번 의식하고 나니 자꾸만 손이 갔다.
눈치가 그닥 좋지 않은 서연이었지만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세히는 몰라도 이정과 관련된 문제이겠구나, 싶었다.
“금방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어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들어가야죠.”
“맞아요. 맛있는 거 해 두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
생뚱맞은 소리에 예현이 고개를 들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서연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강이정 씨 요즘…….”
*****
“다녀왔습니다.”
잠시 후, 예현이 조금 홀가분해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현을 반겼다.
“다녀왔어?”
“응.”
예현이 이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에게 다가와 어제 밴드를 붙여 준 손을 들어 올렸다.
“밴드가 바뀌었네.”
“아, 응. 촬영하다가 밴드가 떨어져서 다시 붙였어.”
촬영장은 가지도 않았으면서. 예현이 밴드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내려놓았다.
“저녁은 뭐 먹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나는 아무거나 다 괜찮은데.”
“그럼 크림 파스타 어때?”
예현의 말에 이정이 어깨를 살짝 흠칫거렸다. 이정이 다친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왜 크림이야? 로제 좋아하잖아.”
“먹고 싶은 거야 그날그날 달라질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왠지 오늘은 네가 그걸 잘 만들어 줄 것 같네.”
예현의 말에 이정이 입을 조금 벌린 채 멍하니 예현을 바라보았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이정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알았어?”
“너 휴가 아니더라. 검색만 해도 나오는 걸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예현이 조금 전과 달리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상황에 대한 진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예현이 서연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이정 씨 요즘 요리 수업 듣잖아요. ○○동에서…….’
서연이 몰랐냐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예현이 눈을 깜빡였다. ○○동이라면 아까 찾아본, 그 게시글의 작성자가 다녀왔다는 병원이 있는 곳이었다.
‘저도 요즘 취미로 수업 듣거든요. 근데 거기 강이정 씨 사인도 걸려 있고, 오늘도 잠깐 일이 있어서 학원에 가서 짐 좀 챙겨 왔는데 강이정 씨가 개인 수업 듣고 있던데요.’
수요일은 휴무라던 그 학원, 그 학원이 이정의 행선지였다. 손의 베인 상처도 아마 그곳에서 얻은 것이었겠지.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로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었겠지만, 이틀 동안 오만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 내심 괘씸한 예현이었다.
“과정도 웰메이드긴 하네, 2주씩이나 휴가도 받고.”
“…….”
이정이 이마를 짚은 채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귀 끝까지 빨개진 얼굴은 덤이었다. 놀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얼마 안 됐어.”
사실 바람 피운 건 아닌가 속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낫겠지. 괜히 말했다가 자기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며 역으로 혼이 날 것이 뻔했다.
“그래서, 5시 퇴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었어?”
“주말에 멋지게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했는데, 다 들켜 버렸네.”
이정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어쩐지 요즘 내내 들떠 있는 것 같아 보이더라니, 다가오는 이벤트를 기대하며 그런 것이었나 보다.
“오늘 미리 해 주면 안 돼?”
“안 돼. 아직 재료도 준비 못 했고, 또…….”
이정이 고개를 숙이고 투덜거렸다. 하여튼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애인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
이정이 밴드가 붙여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걸려 버릴 줄은 몰랐다.
요리 학원을 다닐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스스로 먹어 봤을 땐 이게 뭐가 잘못된 건질 알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예현으로 맛 실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휴가를 받았을 때, 이정은 이거다,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예능 촬영을 하면서 만났던 요리 강사가 언제든 환영이라며 주고 간 명함이 있었다. 2주 정도면 적어도 먹을 만한 요리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휴가가 끝나기 전에 서프라이즈로 멀쩡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면 예현도 놀라겠지.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디데이를 며칠 앞두고 걸려 버리고 만 것이다.
“진짜 어떻게 안 거야? 휴가가 아닌 건 알았어도 내가 뭘 하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을 텐데.”
“워낙 유명한 애인을 뒀다 보니 조금만 검색해 봐도 애인이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되더라고.”
“아, 그 사진…….”
이정이 오늘 팬과 사진을 찍어 준 것을 기억해 내곤 탄식했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정을 보던 예현이 아프지 않게 이정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래도 뭐 하고 다닌 건지 알게 돼서 다행이지, 몰랐으면 주말이 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라 죽었을걸.”
“그런가. 아, 몰라. 망했어.”
이정이 소파에 드러눕듯 기댄 채 투덜거렸다.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며 쿡쿡거리던 예현이 말했다.
“그래도, 기대되네.”
“어?”
“그렇게 속상해할 정도면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설마 서프라이즈로 못 하게 됐다고 요리 안 해 줄 건 아니지?”
“절대 아니지.”
이정이 꾸물꾸물 소파에서 일어났다. 예현이 그런 이정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기대하고 있을게. 고마워.”
매번 혼자 요리하는 자신을 보며 이정이 아쉬워하기도, 미안해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정은 늘 예현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그럼 주말에 잠깐 자리를 비워 줘야 하나, 아직 수요일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기다리지.”
단순한 이정이 예현의 말에 다시 웃음 지었다. 이런 이정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단 생각이 드는 예현이었다.
“기대해. 어차피 들킨 거,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테니까.”
이정이 언제 주눅 들었냐는 듯 큰소리를 쳤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보였던 예현이 이정의 볼에 짧게 입 맞춰 주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예현이 이정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제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은 두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예현은 냉장고를 열었다 그 큰 냉장고를 가득 채운 요리 재료에 경악해 아침부터 이정의 등짝을 한 대 때려 주었다.
*****
“이정 오빠가 해 주는 요리라니, 완전 기대돼!”
그리고 주말, 이걸 어떻게 둘이서 다 먹냐는 예현의 잔소리에 초대된 예서가 잔뜩 들뜬 얼굴을 하고 말했다.
자신은 이정의 원래 요리 실력을 아니까 먹을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만족할 수 있지만, 예서는 아닌데.
설마 눈치 없이 맛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예현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예서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기대해.”
그런 예현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두 사람이 사이좋게 떠들며 식사를 준비했다. 요리는 제가 할 테니 정리하는 것만 도와 달라는 이정의 말에 예서는 이정의 조수가 되어 재료를 옮기고 요리를 플레이팅하느라 바빴다.
“다 됐다. 자, 그럼 손님. 이제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이정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예현을 불렀다. 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우선 냄새나 비주얼은 멀쩡했다. 그러나 처음 이정의 요리를 먹었을 때도 겉보기엔 별문제 없었기에 완전히 안심한 상태는 아니었다.
예현이 조금 긴장한 채로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이정이 야심 차게 내민 반찬을 베어 문 예현이 놀란 얼굴을 했다.
“맛있지?”
이정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정의 말대로 예현이 베어 문 요리는 굉장히 맛있었다. 평범한 맛만 되어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예현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응. 맛있어.”
“진짜 맛있다. 식당에서 먹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자주 놀러 와. 많이 해 줄 테니까.”
이정이 예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게 2주 만에 가능한 수준인가. 예현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식사를 이어 갔다.
“앞으론 서로 자주 요리해 주는 걸로 하는 거야, 알겠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지만, 절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요리 실력까지도 바뀔 수 있는 거구나.
그만큼 자신을 위해 노력해 준 거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2주 동안 괴상한 요리 취향을 가진 이정을 새 사람으로 만드느라 죽도록 고생한 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