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3/15)

<계약연애의 정석> 외전

#1

“근데, 요즘은 왜 자기라고 안 불러?”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한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슨 소름 끼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정에게서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들은 예현이 음식 간을 보던 모습 그대로 굳은 채 고개만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예전엔 자기라고 불러 줬잖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자기라니,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데. 내가 그런 오글거리는 호칭으로 누군가를 불렀을 리가? 예현이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자기라고 불렀던 거, 영상까지 남아 있는데.”

“아…….”

그제야 이정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들은 예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자기라, 그래. 확실히 그렇게 부른 적이 있긴 했었다.

계약서를 대강 작성하고 그의 회사 앞을 나오다 기자들 앞에서 사이좋은 연인을 연기해 보겠답시고 자기 타령을 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사람들 앞이라서 그런 거고,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냥. 문득 생각난 건데, 이제 우리 같이 살기까지 하는데 여전히 호칭이 ‘야’인 건 좀 너무한 것 같아서.”

“뭘 그런 것 가지고 쪼잔하게…….”

찔리는 구석이 있는 예현이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예서가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서로의 집에 더 자주 드나들게 된 두 사람은 쓸데없는 시간을 단축할 겸, 서로의 얼굴을 더 자주 볼 겸 함께 살게 되었다.

진짜 연인이 되어 들어온 이정의 집. 많은 것이 바뀌진 않았지만 관계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예현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지난 연애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낯간지러운 호칭이 영 달갑지가 않아 어정쩡하게 “야”, “강이정” 따위의 호칭으로 불러 왔는데 이정은 그게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기라고 부를 땐 진짜 사귀지도 않았었고, 지금은 사귀는 사이잖아. 그것만 봐도 호칭은 아무 의미 없는걸.”

예현이 보란 듯이 왼쪽 손을 이정 쪽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낯간지럽다고 피하던 커플링을 맞춘 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은 몰랐지만 맞추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 그땐 자기라고 불러 달라고 안 했잖아. 지금은 사귀는 사이니까 욕심 좀 내고 싶은데, 안 돼?”

그러나 이정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툴툴거리며 예현에게로 다가온 그가 등 뒤에서 예현을 안고 어깨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말했다.

“응? 자기야.”

“……그런다고 그렇게 불러 줄 생각 없어. 예쁜 이름 놔두고 왜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러 달래.”

“뭐, 내 이름이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애칭이라는 게 주는 두근거림이 있는 거잖아.”

아무래도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고 가스 불을 껐다.

“강이정. 이상한 데서 고집부리지 말랬지.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이럴 시간에 내일 뭐 할지나 제대로 체크하세요.”

“아야야.”

예현이 이정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나한테 그렇게 확신이 없어?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대본 들어온 거 읽어 보는데, 자기라는 대사가 있어서 생각이 났거든.”

예현이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대본을 힐긋 바라보았다. 이정은 최근 드라마 하나가 촬영이 끝나 휴식기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작품 들어가면 쉬지도 못하는데, 스케줄 없을 때 푹 쉬어 놔야지. 걱정하지 말고 맞춰서 휴가 일정이나 잘 잡아 둬.’

그리고 내일은 이정이 세 달 내내 고대하던 바다 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예현의 이모 집이 있는 조용한 바다가 아닌 5성급 호텔이 있는 관광지.

그런 곳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지는 못할 테니 사실상 호캉스나 마찬가지겠지만, 시원한 바다 경치가 한눈에 보이는 넓은 객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여행 가기 전날까지 일이라니. 일하기 싫어 죽겠다고 말만 하지 사실은 좋은가 봐?”

“일이니까 힘들고 싫은 거지. 대본 읽을 때까지는 아직 업무 아니거든. 원래 대본 고를 때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야. 어떤 역인지, 내가 저 역을 연기하면 어떤 시너지가 날지.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시간도 빨리 가고 재미있거든.”

이정이 대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정이 보던 대본 위에는 자기라는 단어를 포함한 온갖 낯간지러운 대사가 적혀 있었다.

“‘자기야, 난 자기 없으면 죽어.’, ‘아니야. 나도 자기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는걸.’ 이게 뭐야. 대사가 왜 다 이런 식이야?”

이 대본은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예현이 불결한 것을 보는 눈으로 대본을 바라보자 이정이 대본을 도로 회수해 가며 말했다.

“한 페이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 개그 신일 수도 있고, 상상 신일 수도 있고. 유치한 대사 한두 줄 있다고 무조건 이상한 대본인 건 아니라고.”

“그런가. 하긴, 대본이 한 장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긴 하겠다.”

“이거 나름 유명한 작가님 차기작인데. 뭐……, 사실 이 작품은 할 생각 없긴 했어. 한동안 로맨스만 했으니까 다음은 좀 무거운 걸로 가 보고 싶어서.”

이정이 대본을 닫아 테이블 구석진 곳에다 밀어 놓으며 말했다.

“왜? 로맨스의 황태자라잖아. 잘하는 거 하면 좋지.”

“그런 건 또 어디서 봤대. 오글거리니까 하지 마.”

이정이 기겁을 하며 예현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시늉을 했다. 로맨스의 황태자, 기사에 종종 등장하는 이정의 별명이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었다.

“별 이상한 호칭 가져다 붙이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뭐, 어쨌거나 여태 한 작품들도 다 로맨스였잖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대?”

“했던 것만 반복하면 재미없기도 하고. 우리 자기가 질투하니까 그렇지.”

“……내가 언제 질투를 했다고 그래.”

예현이 이정을 툭 밀치며 말했다. 힘이 실리지 않은 손짓에 순순히 밀려나 준 이정이 헤실거렸다.

“그래. 뭐, 내 착각인 걸로 하지 뭐.”

“어쨌거나 너도 로맨스의 황태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싫지? 나도 자기라고 부르기 싫어. 어서 가서 짐이나 싸 둬.”

“치사하게.”

이정이 툴툴거리며 테이블 위에 쌓아 둔 대본을 정리했다. 뭐, 바로 다음으로 들어갈 차기작은 촬영 일정이 이미 나와 있고, 이번 휴식기는 한 달 가까이 잡혀 있으니 급하게 볼 필요는 없겠지.

“밖에서 돌아다니진 못하겠지만, 호텔 안에선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괜찮을 거야. 피차 사생활 방해받기 싫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거든.”

“알았어. 어차피 나 혼자 돌아다니면 대부분 못 알아보는걸. 뭐.”

“설마 나 혼자 두고 돌아다닐 생각인 건 아니겠지?”

“앗, 들켰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하고 피식 웃었다. 오랜만의 휴가가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놀러 간다고 휴가 써 보는 거 처음이야. 연차 수당 받으려고 있는 연차도 일부러 안 쓰고 최대한 버텼는데.”

“예서도 시험 기간이라고 이번 주는 기숙사에서 보낸다고 하고. 신경 쓸 것 없으니까 더 재미있게 놀다가 오면 되겠다.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어서 짐이나 싸. 부산까지 가서 뭐 안 챙겨 온 거 있으면 곤란해지잖아.”

“새로 사면 되는데 뭘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챙기려고 해.”

돈이 남아도냐는 말을 하려던 예현이 멈칫했다. 하긴, 돈이 남아돌겠지.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하려고 했던 거람.

“그래도 쓸데없이 사는 것보단 있는 거 쓰는 게 낫지. 아무튼 짐 잘 챙겨 놔. 나중에 가서 빠트렸다고 하면 화낼 거야.”

“어이쿠, 무서워라.”

이정이 몸을 파르르 떠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얄미워. 예현이 입술을 조금 삐죽거렸다.

“장난치지 말고 가서 짐 싸고 얼른 밥이나 먹어. 늦게 먹으면 그만큼 늦게 잘 거잖아.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으면서, 졸음운전 하면 안 되는 거 몰라?”

“분부대로 해야지요. 알았어. 형은 짐 다 챙겼어?”

“내가 너냐. 당연히 다 챙겼지. 그대로 가져가서 차에 싣기만 하면 돼.”

예현이 그렇게 말하며 간을 보다 만 국을 향해 걸었다. 얼른 밥이나 마저 해야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여행 가서까지 대본 보고 있을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얌전히 집에 두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자기.”

“자기 타령 그만하라니까.”

이상한 데서 끈기 있단 말이야. 예현이 밉지 않게 툴툴거리며 핀잔을 줬다. 그러나 예현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이상한 데서 끈기 있는 거 알면서 그러면 안 되지. 더 자극 되게.”

“장난치지 말고 와서 밥이나 먹어.”

이정은 이상한 곳에서 정말 끈기 있다는 것. 그리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것.

이정의 ‘자기’ 타령은 이제 막 시작이라는 것을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는 예현이었다.

“중간에 바꿔도 됐는데.”

“됐어. 운전 연습은 동승자 태우고 하는 거 아니거든.”

차에서 내린 이정이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매번 운전은 자신이 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예현의 면허증 위로는 먼지가 쌓일 판이었다.

“5시간이나 혼자 운전해서 내려오는 것보다는 낫지.”

“걱정하지 마. 어차피 휴식기고, 옆에서 잘 놀아 줘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왔는걸. 체크인하러 가자.”

이정이 예현을 데리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부산엔 진짜 오랜만에 와 본다. 엄마가 부산 출신이라 어릴 땐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데 크고 나서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거든.”

“난 촬영 때문에 종종 들러서, 세 작품에 한 번 정도는 오는 것 같은데.”

“체크인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런트의 직원이 이정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고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돌아와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두 사람은 카드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고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는 사용하는 사람이 적어 두 사람은 함께 탄 승객 없이 객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와아.”

예현이 평소답지 않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객실, 그리고 한쪽 벽면을 완전히 차지한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시원한 오션 뷰까지.

이런 맛에 비싼 돈 주고 호텔에 오는 거구나.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내려놓고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하늘 위에서 보는 것도 색다른 느낌이긴 하다. 그렇지 않아?”

“그런…… 그렇네. 오늘은 날씨도 좋고, 여유롭게 사람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익숙한 풍경이었기에 그닥 감흥은 없었지만 예현의 들뜬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늘 어른스럽게 굴던 사람이 겨우 이런 것 하나에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의외이기도 했다.

“방 구경도 좀 하지 그래? 일부러 좋은 곳으로 잡았는데.”

예현이 그제서야 방을 둘러보았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전경에 정신이 팔려 방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그의 말대로 방 역시 두 사람이 머무르는 호텔 방이라기엔 굉장히 넓고 호화로웠다.

“방 안에 스파가 있네.”

“위층에 프라이빗 수영장도 있는데, 가기 싫으면 방 안에만 있어도 돼.”

“3일이나 있을 건데 뭐. 운전해서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갈 거면 내일 가자.”

예현이 방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했다. 이정이 잡은 호텔이 어디인지 비밀이라며 말을 해 주지 않아 이제야 방이 어떤 구조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비싼 방이겠지. 예현이 조금 있다가 이 호텔의 객실 비용이 얼마 정도 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힐긋 쳐다봤다.

“방은 마음에 들어, 자기?”

“……그건 어제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

예현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끝난 얘기라니. 이제 시작인데.”

“갑자기 이상한데 꽂혀 가지고 억지나 부리고. 강이정. 너 몇 살이야?”

“스물여덟.”

“진짜 물어본 게 아니잖아…….”

예현이 골 때린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정이 생글생글한 웃음을 지으며 예현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자기란 말에 언제부터 연령 제한이 있었다고.”

“……아무튼, 싫어.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

“그럼 그러던가.”

“응?”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예현이 오히려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거였으면 이 얘기를 다시 끌어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정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뭐라고 부르는지는 내 자유인 거잖아. 그렇지, 자기야?”

“너…….”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본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웃긴 꼴이람. 예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 네가 어떻게 부르는지는 네 마음이지. 네 마음대로 해.”

“응. 자기야.”

이정이 예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이렇게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일단 점심부터 먹고, 좀 돌아다니다가 올라올까?”

“식당 예약해 둔 곳 있어?”

“당연하지. 이번 휴가는 내가 다 준비한다고 했잖아.”

이정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 말했다. 예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 예약이야?”

“1시 반.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지금 출발하면 시간 맞겠다.”

분명 일찍 출발했건만, 거리가 있다 보니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하고 다시 호텔을 나와야 했다. 그러나 2박 3일간의 일정이기 때문에 그닥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근데 우리 뭐 먹으러 가는 거야?”

“형이 좋아하는 로제 파스타.”

“뭐야, 내가 언제 그거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예현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좋아하는 건 맞지만 자신은 호불호를 곧잘 표현하는 편도 아니고, 자주 먹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안 건가 싶었다.

“그 정도야 먹을 때 표정만 봐도 알지.”

“그런가.”

워낙 무언가를 좋다 싫다 표현하지 않는 편이다 보니 누군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눈치채 준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챙김받는 기분도 나쁘진 않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예약자 강이정 님 룸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식당 앞에는 길게 대기 줄이 늘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자신이 먹을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예현은 이정이 좋아하는 게 뭐였는지를 곰곰이 떠올리며 물었다.

“넌 뭐 시킬 거야?”

“그러게. 우리 자기는 로제 파스타고…… 난 뭐 먹을까.”

이정의 말에 예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룸 안에 두 사람밖에 없다면 모를까, 지금 룸 안에는 두 사람의 안내와 주문을 위해 따라온 직원이 있었다.

“너…….”

“나도 우리 자기가 좋아하는 걸로 먹을까? 아님 다른 거 시켜서 나눠 먹어도 좋고.”

보란 듯이 모자까지 벗어 버리곤 생글거리며 예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는 예현이었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에 서서 주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예현은 창피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너…… 너 이런 식으로 나오기야?”

예현이 이정에게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정에게는 마냥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부르든 좋다고 한 건 자기잖아. 왜 부끄러워하고 그래.”

내가 언제 좋다고 했어.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 예현이 표정으로 항의하며 이정을 노려보았다.

“자기가 갑각류는 못 먹으니까 해산물 들어간 건 어려울 것 같고, 피자는 고르곤졸라 제일 좋아했었지?”

그놈의 자기 타령. 예현이 잠깐 사이에 기가 다 빠진 얼굴을 했다. 그놈의 호칭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람.

게다가 처음엔 비즈니스적인 표정을 잘 유지하고 있던 직원 역시 점점 자기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제발 입 좀 다물어 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으나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자기 매운 건 별로 안 좋아하던가? 음…… 면 하나 시킬 거니까 하나는 밥으로 하는 것도 괜찮겠네.”

그놈의 자기 타령. 무엇을 바라고 저러는 것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예현은 왠지 이정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이러면 괜히 또 오기가 생긴단 말이지. 일단은 직원을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예현이 이정을 무시하고 직원에게 말했다.

“로제 파스타, 불고기 필라프, 그리고 고르곤졸라 피자요.”

“네. 음료는 따로 주문하지 않으시나요?”

“자몽 에이드 하나, 콜라 하나로 부탁드릴게요.”

“자기,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네? 감동이야.”

빨리 직원을 내보내려 평소 이정이 자주 마시는 음료를 읊어 주었을 뿐인데 이정이 한껏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로제 파스타, 불고기 필라프, 고르곤졸라 피자. 그리고 음료는 자몽 에이드와 콜라 맞으신가요?”

“네.”

예현은 그런 이정을 애써 무시하고 주문을 확인하는 직원을 보며 겨우 웃었다. 주문을 체크한 직원이 왠지 모르게 들뜬 얼굴을 하고 룸을 빠져나갔다.

“너, 유치하게 이러기야?”

“왜 그래. 내가 뭐라고 부르던지 그건 내 마음이라고 한 건 자기잖아.”

“둘이 있을 때 그렇게 부르던가, 왜 사람들 다 보는 곳에서 이러는 건데.”

“다 보는 곳이라니. 기껏해야 직원 한 분이 다였는데.”

하여튼 우리 자기는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예현에게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벌써부터 이렇게 부끄러워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달콤한 목소리, 다정한 말이었지만 오싹 돋아 오르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떤 예현이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을 다니는 건 반드시 자제해야겠다.

“벌써부터라니,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 줄래?”

예현이 그렇게 다짐하며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이정에게 딱밤 한 대를 날렸다.

“평일 낮이라 사람도 별로 없는데, 바닷가 산책이나 하고 돌아올까?”

“아니. 난 피곤해서.”

예현이 이정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나가면 분명 또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자기 타령을 해 대겠지. 두 번은 당해 줄 생각이 없는 예현이었다.

“왜 그래. 자기. 아까까진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던데.”

“……이제 보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 타령 계속해야 해?”

예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정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땡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보는 사람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우리 자기 놀리려고 그렇게 부르는 건 줄 알겠네.”

“맞잖아…….”

“아닌데. 날 너무 무뚝뚝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은 장난으로라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예현이 무뚝뚝한 이정을 상상해 보다 소름이 돋았는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쨌든, 여기서도 바다 잘만 보이는데 뭐 하러 밖에까지 나가려고 그래.”

예현이 넓은 창 너머로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엔 해외로 나가자. 예전에 종방연으로 해외 나간 적이 있었는데, 거긴 또 다른 느낌이더라고. 여기보다 사람도 적고, 느긋하고…….”

“비행기에서만 이틀은 걸릴 텐데 다녀올 시간도 없고, 여기도 충분히 좋은데 뭐 하러 멀리까지 가.”

“낭만이 없어. 낭만이.”

이정이 예현을 뒤에서 껴안은 채 툴툴거렸다. 꿍얼거림도 잠시, 이정의 장난이 조금씩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여기에 있기만 할 거면, 슬슬 할 일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너…….”

그 말과 함께 이정의 페로몬이 방 안에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일을 예상하지 않고 여행을 온 건 아니었지만 아직 해가 쨍쨍한데.

예현이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아직 해도 안 졌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밥 먹었으니까 운동해야지. 안 그래?”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모습이 꽤 얄미웠다. 그러나 얄미운 모습과 달리 그의 목소리도, 페로몬도 너무나도 달콤했다.

“침대가 참 넓고 푹신해 보여. 꼭 누워 달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아?”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페로몬을 쏟아붓고 있는 주제에 말은 태연하게 이어 가는 이정이었다. 예현 역시 슬슬 한계였다.

“진짜…….”

예현의 페로몬이 점점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맞닿은 피부 탓인지 더 강하게 느껴지는 향을 직접 맡은 이정 역시 어느새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게 되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섞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몸을 돌려 이정과 마주한 예현이 이정의 입술을 탐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직 해도 안 졌다며?”

“너야말로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예현이 다리에 닿는 묵직한 무언가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어차피 이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푹신한 침대 위로 두 사람의 무게가 합쳐졌다. 여행을 위해 나름 심혈을 들여 고른 옷이 거칠게 벗겨져 침대 아래로 쫓겨나듯 내던져졌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이제 나도 승진해야지. 이것저것 맡아서 하다 보니까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그럼 운동이라도 해야겠네. 한동안 여유로울 테니까 내가 책임지고 운동시켜 줄게.”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예현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예현은 그 운동이 혹시 침대 위에서 하는 운동이냐 물으려다 어찌 되든 상관없나 싶은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으응…….”

이정이 장난치듯 예현의 허벅지 위에 입술 도장을 찍어 댔다. 여린 살 위를 간지럽히는 말캉한 입술이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졌다.

“한동안 운동을 너무 안 하긴 했어, 그렇지?”

“흐으…….”

이정이 예현의 허벅지를 지분거리며 그를 놀렸다. 그러나 말투와 달리 뜨거운 숨결이 허벅지에 와 닿고 있었다.

본인도 여유 같은 건 하나도 없으면서. 예현이 조금 약이 오른 듯 손을 뻗어 이정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벌써 섰으면서, 자꾸 이런 것만…….”

“재촉하는 거야?”

“자꾸 그럴 거면…… 아!”

이정이 예현의 허벅지 안쪽을 약하게 할짝거리곤 이미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를 예현의 성기 위에 겹쳤다.

뜨거운 것이 이미 반쯤 선 예현의 성기를 툭툭 두드리며 그 크기를 키워 갔다.

“얼마나 섰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너…….”

뜨거운 성기 두 개가 비비적거리며 점점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짙어지는 페로몬에, 먼저 정신이 흐릿해진 것은 예현이었다.

“이런 거 싫어……. 그냥 해 줘, 응……?”

“그럼 어떤 게 좋은데? 좋아하는 대로 다 해 줄게. 말을 해 줘야 형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알지.”

상대적으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정이 예현의 입술 위에 짧게 제 입술을 쪽쪽거리며 물었다.

평소에는 좋다, 싫다를 잘 말하지 않는 예현이 이때만큼은 솔직했기에, 이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현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여기 말고…… 여기에.”

예현이 이미 질척하게 젖기 시작한 제 엉덩이 골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애절함마저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어떻게?”

이정이 그런 예현을 약 올리듯, 예현이 원하는 것이 아닌 손가락으로 입구를 지분거리며 물었다. 달달한 페로몬이 목뒤가 짜릿할 만큼 퍼져 이성의 끈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아슬하게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다.

“자세하게 말해 줘야지. 평소처럼.”

“으으…….”

예현이 원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예현을 노려보며 새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분명 사랑의 크기는 같을 텐데, 페로몬의 양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침대 위에서 안달 내는 쪽은 항상 자신이라는 것이 억울했다.

“응? 우리 자기.”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해 봤자 침대 위에서 약자는 항상 자신이었다. 예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이정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여기, 네가 원하는 대로…… 안에 넣어 줘? 응?”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낸 이정의 달아오른 얼굴 위로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예현에게 짧게 입 맞춘 이정이 협탁 위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응, 그런데 그 전에 이것부터.”

이정이 협탁 위에 준비되어 있던 콘돔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평소 피임의 중요성에 대해 구구절절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쪽은 예현인데, 침대 위로 올라오기만 하면 예현은 피임의 존재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빨리…….”

이정이 콘돔의 포장지를 입으로 뜯어 제 성기 위로 가져갔다. 그러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생각난 듯, 이정이 예현의 손을 콘돔을 잡은 손 위로 가져왔다.

“뭐 하는 거야…….”

“콘돔 잘 씌워졌나 직접 확인해 봐야지. 원래 뭐든 철저하게 확인해 보는 게 좋다고 알려 준 건 우리 자기잖아. 그렇지?”

와중에 잊지 않고 자기 타령을 이어 가는 이정이었다. 그러나 예현은 달아오른 머리 탓에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떨리는 손을 들어 이정의 성기와 손을 겹쳐 잡았다.

“그래, 그렇게 아래로. 잘 씌워졌는지 꼼꼼하게 확인해야지. 응?”

예현이 멍한 머리로 이정의 말을 따라 그의 성기 위로 콘돔을 씌웠다. 고무 막 아래로 느껴지는 핏줄과 열감에 그렇지 않아도 몽롱한 정신이 더욱 흐릿해졌다.

“이게 그렇게 좋아?”

“으응…….”

어느새 집요할 정도로 자신의 성기를 지분거리는 예현을 본 이정이 피식 웃었다. 조금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슬슬 한계인데, 하얀 손이 예민한 곳을 만지작거리기까지 하자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면 이 손을 떼 줘야 할 것 같은데.”

“…….”

예현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이정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괴롭혔나, 어느새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예현이 이정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놔주면…… 이제 진짜 해 줄 거야?”

“응, 내가 언제 우리 자기 하고 싶은 거 못 하게 한 적이 있었나?”

이정이 예현의 손을 가져가 제 손과 깍지를 낀 채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정이 자유로운 손으로 예현이 직접 꼼꼼하게 콘돔을 씌워 준 제 성기를 예현의 엉덩이 골 위로 올려 두었다.

입구를 축축이 적신 애액을 보니 굳이 풀어 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성급하게 행동했다 예현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 이정은 예현의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넣어 가위질했다.

“아아, 아!”

스스로 흘린 액으로 질척해진 구멍이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내벽을 드러냈다.

“손가락 말고, 흑, 네 거 넣어 주겠다고 했잖아…….”

이 정도면 괜찮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을 빼내려는데, 예현이 이정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무 놀렸나, 이정이 예현을 달래 주려고 하는 순간 예현이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내가 네가 해 달라는 대로 안 해 줘서 그래?”

“응?”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정이 예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뚱하게 구기며 인상을 쓰고 있던 예현은 이정의 그런 반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입술을 자근거리며 말했다.

“……야.”

“방금 뭐라고 했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이정이 되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예현의 말에, 하마터면 이정은 성기 위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사정할 뻔했다.

“자기야아…… 장난치지 말고.”

하루 종일 자기, 자기 타령을 해 가며 쫓아다녀도 듣지 못했던 그 말이, 예현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

“응? 자기야아…… 이제 장난 그만하고…….”

“하아.”

헛웃음을 흘린 이정이 예현의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잡고 그가 원하던 것을 예현의 몸속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아!”

“자기야, 그렇게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 시작도 하기 전부터 창피한 꼴 보일 뻔했잖아.”

“아으…….”

단번에 예현이 원하던 것을 그가 가장 느끼는 지점까지 밀어 넣은 이정이 예현의 반대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양 발목을 붙잡힌 예현은 이정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아, 응. 아!”

“우리, 자기, 장롱면허라 그런가…… 깜빡이의, 중요성도, 모르고.”

“아흐, 깊어. 이정아…….”

“이정아 말고, 자기야. 우리 예쁜 자기. 응?”

이정이 허리 짓을 이어 가며 예현의 귀에다 계속해서 질척한 말을 속삭였다. 그러나 예현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이정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며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자 조금 심술이 난 이정이 허리 짓을 멈추고 예현의 어깻죽지를 자근거렸다.

“아!”

“너무하네. 나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 우리 자기는 자기 좋은 대로만 하고.”

“으응, 뭐가…….”

이정의 입술 아래에서 붉은 꽃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현의 정신은 온통 이정의 성기가 들어찬 제 아래에 집중되어 있었다.

“왜, 왜애…….”

예현이 이정의 심술에 허리를 들썩거리며 이정을 밀쳐 내었다. 가볍게 밀려난 이정이 입술을 살짝 내민 채 말했다.

“내 말 안 듣고 있었나 보네.”

“말……?”

예현이 말꼬리를 늘이며 조금 전 이정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흐릿한 기억 속에서 ‘자기’라는 두 글자를 기억해 낸 예현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자기, 자기야…….”

“네, 자기예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정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애초에 오래 애를 태울 만한 인내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아! 아흐, 이정아, 자기, 야아.”

별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닌 두 글자의 단어가 왜 이렇게나 좋은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정이었다.

그러나 유치하게도 그 단어가 너무 좋았다. 예현에게 이런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자신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 좋았고, 호칭 하나로 기분이 이렇게나 들뜨는 것이 낯설었다.

“기억해 두고 있었다니, 감동인데.”

게다가 지금은 나도 딴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형 쪽에서 먼저 자기라고 불러 주다니.

곱씹어 볼수록 들뜨는 일이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자기라고 말하던 예현을 떠올린 이정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안에 사정했다.

“후…….”

콘돔을 갈아 끼우기 위해 예현의 안에서 제 성기를 빼낸 이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장난질을 하기에는 이미 불이 붙어 버린 탓에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이정이 조금 급한 손길로 새 콘돔을 제 성기 위로 씌우는 동안 예현은 조급한 얼굴을 하고 허리를 들썩거렸다.

“빨리, 그냥…….”

“그냥 하면 안 되지. 자기가 아직은 일하고 싶다고 했잖아. 응? 기억 안 나?”

빠르게 새 콘돔을 씌운 이정이 예현의 뒤를 다시 가득히 채우며 말했다. 분명 콘돔 안에다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보다 더 질척해진 것 같은 내벽이 이정의 성기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응? 기억 안 나냐고.”

이정이 예현의 목덜미에 입 맞추며 물었다. 예현은 그런 말 따위 기억나지 않는 듯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몰라, 그냥…… 힉, 빨리 해 줬으면 좋겠, 어서…….”

“그래서 해 주고 있잖아. 우리 자기는 욕심도 많지.”

이정이 예현이 좋아하는 곳을 강하게 짓누르며 말했다. 예현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이정의 흥분 역시 짙어져 갔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득 찬 이정의 페로몬 속에서 예현의 향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옅었지만 이정은 이미 그 향에 정신이 나갈 만큼 중독되어 있었다.

“임신하면 형이 좋아하는 이런 거, 해 주지도 못할 텐데. 그래도 아기 가지고 싶어?”

“응, 으응…….”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행위에 취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달콤한 말이 듣고 싶었다. 이정이 예현의 한쪽 젖꼭지를 약하게 비틀며 말했다.

“아!”

“그럼 여기에서 젖도 나오겠지? 형은 남자니까 애가 배부르게 먹을 만큼 나오지는 않겠지만.”

젖꼭지를 꼬집힌 예현이 안을 강하게 조였다. 예현이 원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곧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긴 이미 울고 있는데, 그런 얼굴 해 봤자 별로 마음 아프지가 않은걸.”

그러나 이정은 피식 웃으며 예현의 바짝 선 성기를 건드렸다. 이미 몇 번이나 사정한 연분홍색 성기가 이정의 손끝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이런 것도, 아기 생기면 하고 싶은 만큼 못 할 텐데 정말 괜찮다고?”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예현의 안쪽 깊은 곳에 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예현이 파르르 떨며 허리를 젖혔다.

“응? 그래도 좋아?”

“아니, 으응. 싫어. 그건 싫어…….”

예현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이정의 등을 끌어안았다. 짧은 손톱이 이정의 등에 패인 자국을 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픔보다 강한 쾌감이 이정을 잠식했다. 이정이 그런 예현이 귀엽다는 듯 짧게 입을 맞추었다.

“평소에도 이러면 진짜 좋겠는데. 아니, 아니지. 침대 위에서만 이러니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취한 예현에게는 의미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예현이 그런 말을 할 정신이 있으면 자신에게나 집중해 달라는 듯 이정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기야, 내가 누구야?”

“강, 이정…….”

“그거 말고. 응?”

“아!”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이정이 일부러 예현이 좋아하는 곳 근처를 비껴 찔렀다. 페로몬에 잠식된 시간이 끝나고, 정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냉정한 예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지금 실컷 들어 두고 싶었다.

“자기, 흣. 자기야…….”

“응. 자기. 자기야…….”

이정이 다시 한번 예현의 안에 사정했다. 두 번째 사정은 첫 번째 사정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잠시 끌어안은 채 여운을 즐기던 두 인영이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보다 더 뜨거운 낮이었다.

*****

“자기야.”

“…….”

정사가 끝났다고 해서 기억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들은 뇌리에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쉽게 말해 지금 예현의 머릿속은 ‘자기’를 외치며 이정에게 매달리던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응? 아까는 자기라고 잘만 이야기해 줘 놓고 갑자기 왜 낯을 가리고 그래. 서운해.”

이정이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정사 끝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 일어난 예현과 달리 이정은 쌩쌩한 모습을 하고 내내 예현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저리 가.”

괜히 부끄러워진 예현이 이정을 침대 저편으로 밀어 버렸다. 아직도 이정에게 꼬집힌 양 젖꼭지가 얼얼했다.

“왜 그래. 나 오늘 별로였어? 그럼 한 번 더 할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예현이 찌릿한 통증에 그대로 허리를 부여잡았다. 오랜만의 정사였던 탓일까, 평소보다 허리가 더 아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아?”

“어.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가 봐.”

예현이 허리를 문질거리며 말했다. 하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나 치는 직장인에게는 꽤 격렬한 운동이었다.

“스파나 한번 할까.”

이정이 방 안에 부담스럽게 자리한 스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의 야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위치한 스파가 예현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차피 하라고 있는 거니까.”

“그럼 내가 준비해 놓을게. 잠깐 쉬다가 저녁 먹으면 되겠다.”

분명 섹스는 같이 했는데, 왜 이정만 쌩쌩한 걸까. 나이도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말이지. 예현이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어 괜히 이정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등 괜찮아?”

그러다 자신이 긁어 놓은 긴 자국을 발견한 예현이 놀라 물었다. 분명 손톱을 잘 정리했는데도 저만한 자국이 난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강하게 긁은 것 같았다.

“별로, 다른 자극이 너무 강해서 느껴지지도 않던데.”

이정이 예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스파에 물이 적당히 채워지자 이정이 예현을 침대 위에서 안아 올려 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늘에서 보는 밤바다는 또 다른 느낌이야. 그렇지?”

자연스럽게 스파 안으로 들어온 이정이 예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커다란 손이 울긋불긋한 자국이 가득한 허벅지 안쪽을 지분거렸다.

이정이 예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스파 안에 고인 물이 찰랑거리며 바닥을 적셨다.

“……바다엔 관심도 없으면서.”

예현이 바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정과 시선을 마주했다. 천천히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길고 따스한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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