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5)

#12

처음 강이정을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 아는 형의 소개로 촬영장 보조를 나가게 된 날이었다.

기껏해야 촬영과 진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에게 맡겨질 업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뿐이었다.

짐을 옮기고, 감독의 명령을 이리저리 전달하는 잡일뿐이었지만 촬영장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보람이었다.

“잠깐 쉬다 와라.”

휴식 시간, 괜히 촬영장 분위기를 느껴 보겠다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길을 잃은 것은 우연이었다.

“아씨. 30분까지 다시 오랬는데…….”

비슷하게 생긴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보람이 낯익은 얼굴 하나를 보고 멈춰 섰다. 분명 배우 강이정이었다.

저 사람을 따라가면 촬영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통화 중인 것 같은데, 전화 끝나면 말 걸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가던 보람은 이정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골목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어. 이제 그만두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은 그만해 줬으면 좋겠는데.”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보다. 전화 끝날 때까진 방해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핸드폰을 꺼냈는데 무시하기 힘든 내용의 말이 이어졌다.

“어머니도 실패한 자식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으실 텐데, 마지막으로 효도나 하려고.”

실패한 자식? 보람은 그 말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이정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분명 최근에 개봉한 영화가 대박이 나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근래 최고의 스타인데 실패한 자식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그러게. 그깟 목도리가 뭐라고, 본인이 주신 것도 잊어버리고 계셨던 걸 멍청하게 끼고 다녔네.”

목도리? 무슨 목도리를 말하는 거지. 아, 혹시 영화에 나온 그 목도리?

보람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 걱정 없이 살 것 같은 연예인이 저런 얼굴을 하고 실패한 자식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괜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가 막장 드라마를 향해 치닫았을 때쯤, 이정의 전화가 끝이 났다.

“더 할 얘기 없으면 끊어도 되지? 촬영 중이라.”

이정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것을 확인한 보람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촬영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30분은 조금 지났지만, 그래도 배우가 도착해야 촬영이 시작될 테니 그렇게 크게 혼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뒤를 쫓아야 할 이정은 전화를 끊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

나 혼자서라도 가야 하나, 고민이 될 때쯤 보람은 이정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발견했다.

조금 전 촬영장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단단하고, 멋있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저런 사람도 우는구나. 보람은 이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가만히 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임마. 30분까지 오랬잖아. 지금이 몇 분이냐? 어?”

“죄송해요, 형. 길을 잘못 들어 가지고…….”

“아이 씨, 됐어. 그래도 강이정이 좀 늦게 와서 다행이다. 네가 만약에 진짜 여기 스태프고, 강이정이 제시간에 왔으면 넌 바로 찍히는 거였어. 알아?”

친한 형이 툴툴거리며 잔소리를 했지만 보람의 시선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정에게 꽂혀 있었다.

저런 대단한 사람과 나만 아는 비밀이 생기다니. 촬영장에 오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그 통화를 듣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너 내 말 듣고는 있냐? 기껏 불러 줬더니.”

“네, 네? 듣고 있죠. 촬영 이제 시작할 것 같아서 잠깐 살펴보느라고.”

이날 이후 이정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보람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고 그런 일을 해서 뭐 하냐며 혼이 날 때마다 이정을 생각했다.

그 사람이라면 이런 내 마음을 공감할 수 있을 텐데, 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전 국민이 모두 아는 스타와 자신이 똑같은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이정을 만났을 때 보람은 이정과 자신이 정말 대단한 인연으로 묶여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보람은 집에서 거의 버린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의사인 아버지, 교수인 어머니. 의사인 누나, 변호사인 형.

당연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할 자식이 취미도 아니고 직업으로 카메라를 잡겠다는 말에 가족들은 보람을 한심하게 여겼다.

“버린 자식이지 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사실인데 뭘. 그리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할 때면 주위 사람들은 늘 지나치게 덤덤한 놈이라고 말하며 그를 불쌍하게 여겼지만 보람은 정말 괜찮았다.

버린 자식이면 뭐 어때. 나나 강이정이나 다를 게 뭐 있어.

이런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진짜 강이정과 대화를 나눠 볼 기회가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살던 보람 앞에 이정이 다시 나타난 것은 그에게 충분히 대단하고도 운명적인 일이었다.

“그래, 그건 진짜 운명이었다고. 나는 정말 손끝 하나 댄 적 없어. 우연, 아니. 운명이었던 거지.”

보람이 그때를 떠올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신데렐라 같은 소리, 그딴 게 무슨 운명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 운명이지. 내가 강이정이랑 다시 만난 건 우연 같은 게 아니야. 그때 내 기분이 어땠었는지, 너 같은 게 이해나 할까?”

보람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예현의 이마를 툭, 툭 건드렸다.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는 건가, 그렇지만 이정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혼란스러운 예현을 뒤로한 채 보람이 회상을 이어 갔다.

“잘 부탁드립니다.”

2년 전, 알바와 휴학을 반복해 가며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대타로 급하게 들어간 첫 촬영팀.

그곳에 이정이 있었다.

“처음 뵙는 분이네요.”

“어. 이번에 그 누구냐, 제훈 씨가 빠져서 대타로 들어왔어. 제훈 씨 과 후배라더라.”

감독의 소개에 이정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예인 처음 봐? 뭘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아, 강이정이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이정이…….”

“뭐야. 강이정 팬이라도 돼? 그래도 일은 일이니까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해라.”

처음 가 본 촬영장, 그리고 처음 정식으로 합류한 촬영장 두 군데 모두 강이정이 있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나를 세상에서 가장 제대로 이해할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됐다는 사실에 보람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운명이야. 운명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어.

이정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의 일이었다. 촬영장 스태프인 데다가 그의 매니저인 주석은 은근히 입이 가벼운 인간이라 그의 동선을 이리저리 흘리고 다니는 편이었다.

처음엔 선물과 편지부터 시작했다. 갑자기 말을 걸면 당황스럽겠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아라 씨 집 앞까지 사생이 찾아왔었대. 어휴, 아이돌 사생 무섭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번엔 소속사에서 고소도 해 준다고 했다던데?”

“이정 씨는 사생팬 없어요? 아이돌은 아니지만 이정 씨 인기도 장난 아니잖아요.”

언젠가 촬영장에서 사생, 스토커 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보람은 아닌 척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그의 대답에 집중했었다.

“음……. 가끔 과격하신 분들이 계시긴 한데, 그래도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또 모질게 생각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에엑, 그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팬도 아니야~.”

“그래도요.”

집 앞까지 선물을 두고 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럼 내심 내 선물을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역시 강이정도 날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지. 잘못된 망상은 점점 크기를 키워 갔다.

부모님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이정이 보람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줄 때마다 보람은 자신과 이정을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강이정 같은 사람도 부모님에겐 실패한 자식인데, 실패한 자식이라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생각하면 부모님의 무시도 참아 낼 수 있었다. 국민 배우 강이정의 아픔을 알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묘한 우월감도 있었다.

“유연 씨랑 하나 씨가 이정 씨랑 제일 친하지 않나?”

“뭐, 그렇긴 하죠? 몇 년 동안 얼굴 봤으니까요.”

“이정 씨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음, 머리 이렇게 힘주는 것보다는…….”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이정에 대해 아는 체를 할 때면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그 사람을 제일 잘 아는 건 난데, 지들이 뭘 안다고 저렇게 떠들어 대는 건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정과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보람은 이정에 대한 정보를 남들보다 더 많이 얻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상 이정을 따라다녔다.

그럼 적어도 그의 동선이나 다음 스케줄, 차기작 등의 정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이정에게 보람이 모르는 변화가 생겼다.

우르르 감독의 별장에 몰려간 것까지는 상관없었다. 그런데 별장에서 나온 이정이 해리와 함께 나와 연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붙어 있는 꼴을 보는 순간 보람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제가 뭔데, 지가 강이정에 대해 뭘 안다고 저렇게 붙어 있는 거지?

저렇게 쪼개면서, 허리를 붙잡고, 눈을 마주하고…….

강이정 옆에 있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난데.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나쁘다 못해 당장 달려가 두 사람을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이정에게 처음으로 공격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이 터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올라온 기사를 보고 뒤늦게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사진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사가 떴네. 이건 날 안심시키기 위해 빠르게 기사를 띄운 거겠지?

착각은 망상의 범주로 접어든 지 오래였지만 보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여태 너무 안일하게 행동해서 그래.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강이정도 내 존재를 더 의식해 주겠지.’

그렇게 그의 행동은 점점 과감해져 갔다. 급기야 한 번은 목소리를 감추고 그의 앞에 나타나 말을 걸기까지 했다.

‘나랑 사귀자. 널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건 나야.’

놀라 도망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언제까지나 모습을 감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용기를 얻자 그다음은 쉬웠다. 하긴 바로 받아 주는 것도 재미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이정 같은 사람의 곁에 있는 건데, 몇 번 차이는 것 정도는 감안해야 하지 않겠어?

보람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이정의 앞에 나타나 가스를 마신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 애인 있다니까요?’

이쯤 되면 사귀는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아직도 저렇게 튕기는 걸까. 보람은 이정의 말을 무시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날은 정말 이 지지부진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각오를 한 날이었다. 이번엔 내 얼굴을 보여 주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

처음 보는 남자와 강이정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이런 상황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당장 이정과 저 남자를 붙잡아 자초지종을 들으려는데 어디선가 핸드폰 카메라의 촬영음이 울렸다.

사진에 찍히기라도 했을까 봐 반사적으로 도망친 보람은 집으로 돌아와 좁은 방 안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튕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이쯤 되면 그만하고 내가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때도 됐잖아.

분에 못 이겨 난장판을 만들고 잠들고 일어난 후에 듣게 된 소식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21세기 신데렐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씨발……. 다들 눈들이 삐었나.”

강이정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촬영장에서도 늘 나와 함께 있고 촬영장 아니면 집과 회사만 가는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지. 곧 정정 기사가 날 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보란 듯이 그 가증스러운 것이 이정을 자기라고 부르며 꼬리를 쳤다는 내용과 함께 열애를 인정하는 기사가 났다.

용서할 수 없었다. 믿지는 않았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촬영장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지만 속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분명 몇 번이나 경고했잖아. 어? 근데 왜 말귀를 못 알아먹냐고.”

보람이 예현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네가 무슨 수를 써서 강이정의 옆자리를 꿰찼는지 모르겠는데, 넘볼 걸 넘봐야지. 네가 강이정에 대해 뭘 알아, 그 사람이 가족한테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

‘그렇다기엔 서류 한 장으로 끝날 사이처럼 행동하던데.’

언젠가 엿들은 이야기가 영 찜찜해 위험을 감수하고 집을 뒤지기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경찰 조사를 시작할 빌미만 제공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그를 계단에서 밀어 버린 이후로는 수사망이 점점 좁혀지는 것 같더라니 기어코 경찰 쪽에서 자신을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여기까지 몰린 마당에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그렇지만 보람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잡혀 들어가면 내 인생은 끝이야. 너만 없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건데, 네가 강이정 인생에 나타나서…….”

여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날 내버려 두던 강이정이었는데, 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어. 보람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내 인생도, 강이정 인생도 망친 거야. 그런데 너만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걸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아?”

“당신 제정신 아니야. 난…….”

애초에 난 강이정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변명을 위해 계약서를 쓰고 몇 달 연극을 하기로 했을 뿐인 가짜 애인에 불과한데.

“난 강이정이랑……”

“닥쳐.”

짜악, 거친 손에 예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강이정 이름 입에 올리지 마. 아,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나.”

“컥…….”

보람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예현의 목을 틀어잡았다. 어차피 오늘은 이 굴러들어 온 돌에게 경고 따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강이정 인생에서 사라져 주면 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예현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실어 넣은 보람이 희번덕거리는 눈을 하고 웃었다.

지잉, 지잉-

먹먹한 귓가에 멀리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틀어 잡힌 목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이대로 죽으면 예서는 어떻게 해. 아직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데, 스무 살에 보호자를 잃은 것도 힘들었었잖아. 예서는 아직 열여섯인데…….

조금씩 흐려지는 시야에 죽어라 발버둥을 쳤지만 보람은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빠진 것은 예현이었고 예현은 점점 멍해져 가는 머리로 생각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그냥 내 존재 자체가 문제였던 걸까?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박규진 같은 인간을 만나고, 감히 급이 맞지 않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꿔서 뒤늦게 현실 속에 내던져졌다.

그러고도 정신을 차리질 못해서, 또 이 꼴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이었던 걸까. 멍청하게 길거리에서 펑펑 울면서 걸어 다녔던 것? 아니면 그깟 복수심 하나에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것?

아니야. 차라리 거기서 끝났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다정함이 진심이라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진실을 다 알게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그 다정한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이 손이 목을 조금만 더 누르고 있으면 다 끝인데, 그럼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이 상황까지 와서도 떠오르는 것이 강이정의 얼굴이라니, 문제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없었다.

“허억.”

예현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숨이 부족해서일까, 눈물이 앞을 가로막아서일까.

“이제 다 끝이야.”

쐐기를 박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스르르 눈이 감길 때쯤, 큰 소리와 함께 갑자기 조인 목에 차가운 공기가 들이닥쳤다.

“헉, 허억…….”

“형.”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이정이 예현을 일으켰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예현이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멀리 나가떨어진 보람이 얼굴을 부여잡고 있었다.

“네. 빨리 와 주세요.”

열린 문 너머로 주석이 핸드폰을 붙잡고 다급히 말하는 것이 보였다. 머리채를 잡히기 직전 잠금이 풀린 문을 통해 들어온 것 같았다.

“괜찮아?”

손목을 아프게 조이고 있던 넥타이가 떨어져 나갔다. 목을 조르고 있던 손도, 아픈 다리를 짓누르고 있던 몸뚱이도 멀어졌지만 예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리……. 나 봐, 괜찮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죽을 뻔한 것은 예현인데 어째 이정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왔어?”

예현이 아픈 목을 쥐어 짜내 말했다. 눈앞이 흐려지던 순간마저도 머릿속을 떠다니던 사람을 만났건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쿨럭, 왜…….”

“씨발, 강이정…….”

무언가 말하려는데 불청객 하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얼굴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보람이 흉흉한 눈을 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정아, 왜 그래…….”

그러기도 잠시, 돌연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목소리를 지어낸 보람이 말했다.

“쟤 때문에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러니까 쟤를 치워야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 아냐. 어?”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어. 거짓말이지? 이정아, 내가 너 섭섭하게 한 거 있어? 진짜 서운하다.’

언젠가 들었던 정신 나간 개소리. 무엇을 삼킨 것인지 목소리를 변조한 채였지만 저 말투만큼은 익숙했다.

예현과 친하게 지내던 무리에 속한, 몇 번인가 촬영팀에서 본 적이 있던 남자. 얌전하고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정아, 왜 그래……. 너 나 알잖아.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밖에 없고, 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나 하나뿐이야. 그런데 우리가 서로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무슨 소리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언제 제대로 된 대화라도 해 본 적 있는 사이였던가요.”

이정이 소름 끼친다는 목소리를 하고 말했다.

대화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사람이다. ‘감독님이 찾으세요.’,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정도의 대화야 해 봤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제가 어떻게 보람 씨를 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정이 예현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말했다. 왜 저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다. 이정은 경찰이 오기 전까지만 시간을 끌 요량으로 말했다.

“아, 그래. 하긴 내가 너무 사리긴 했지……. 그렇지만 그건 다 널 위해서였어. 너한테 준비할 시간을 준 거라고. 내가 너무했지. 알아. 그래서 당당하게 네 앞에 나서려고 했는데…….”

보람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보람이 이정의 뒤에 있는 예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 저거 때문이잖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게 갑자기 튀어나와서……. 씨발, 몇 번이나 경고를 했는데 정신을 못 차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악의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이정이 보람에게 예현이 보이지 않도록 그를 온몸으로 가리며 말했다.

“우리가 촬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나요? 제가…….”

“실패한 자식이라고 힘들어했잖아. 응?”

움찔, 예상치 못한 말에 이정의 어깨가 굳었다.

“난 다 알아. 네가 뭐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그게 어떤 마음인지……. 그 목도리도, 어머니한테 받아서 소중하게 여겼던 거였잖아.”

“그걸 어떻게…….”

“근데 그걸 저 주제도 모르는 게, 씨발, 저게…….”

우연히 엿들은 전화는 보람에게 운명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그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이정과 이정의 부모님이 어떤 관계일지 상상에 상상을 거듭한 보람이었다.

그중에는 우연찮게 맞아떨어진 망상도 있었다.

“실패한 자식이라는 게 싫어서 꺼내지도 못하던 걸 저게 가져갔어. 주제도 모르고, 급도 안 되는 게. 지 주제도 모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보람은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안다고. 나도…….”

그때,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온 주석이 홀린 듯 중얼거리는 보람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를 붙잡아 진정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툭.

그러나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주석의 발끝에 채인 핸드폰 때문에 들키고야 말했다.

“씨발, 뭐야!”

소스라치게 놀란 보람이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으악!”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다들 내가 우습지?”

보람이 씩씩거리며 신발장 위에 있던 꽃병을 움켜쥐었다. 주둥이가 좁은 화병을 거꾸로 잡자 들어 있던 꽃과 물이 후두둑 바닥 위로 떨어졌다.

애애앵-

저 멀리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당장 내려서 뛰어온다고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는 몇 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보람이 손에 든 화병을 휘두르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5초?

“일단 진정해요. 보람 씨. 일단 대화로…….”

“닥쳐!”

주석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보람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 다 원래대로 되돌리면 되는 거야. 그럼 다시 둘밖에 남지 않겠지.”

보람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뗐다.

“그럼 되는 거잖아. 어?”

보람은 이미 망상에 잡아먹혔다. 경찰의 수사망이 다가올수록,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더 그랬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이제 경찰관들이 들이닥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직은 보람이 조금 더 가까웠다. 다리를 다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예현과 그가 휘두른 팔에 맞아 미끄러진 주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정이 심호흡을 하며 보람에게 말했다.

“일단 그거 내려놔요. 뭐든 얘기를 해야 알 거 아니에요. 나한테 뭐가 서운했는지……. 내가 뭘 몰라줬는지 말해 줘요. 그래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죠.”

이정이 보람을 진정시키려 말했다. 3분, 아니 2분만이라도 좋았다. 우선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그래. 이야기하자. 이정아.”

화병을 쥔 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생글거리는 얼굴이 소름 끼쳤지만 이정은 티 내지 않고 유순한 얼굴을 했다.

“그래요.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얘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그 말과 함께 득달같이 달려든 보람이 이정을 밀쳤다.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예현과 보람의 눈이 마주쳤다.

“누구 뒤에 숨어 있는 거야. 짜증 나게.”

보람이 화병을 든 손을 높이 쳐들었다.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보람의 손에 비하면 너무 먼 소리였다.

“안 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주석이 보람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슬로모션을 설정해 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서로의 목표물을 향해 가까워지는 사람들이 예현의 시야 속에 들어찼다.

쨍그랑, 모든 것을 끝내는 소리가 엉망이 된 거실을 울렸다.

“아, 안 돼…….”

누군가가 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뒤늦게 집으로 들어온 경찰이 다급히 보람의 손목 위로 수갑을 채웠다.

“구급차 불러. 빨리.”

“일어나실 수 있으십니까?”

“으아아악!”

보람이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손이 묶인 그는 경찰의 손에 손쉽게 제압됐지만 체념하지 않고 계속해서 버둥거렸다.

“이정아, 강이정. 왜 그랬어. 왜!”

보람이 휘두른 화병에 맞은 것은 예현이 아니었다. 예현은 아픈 다리 대신 멀쩡한 손을 더듬거리며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강이정…….”

보람의 손에 밀쳐진 이정은 곧바로 일어나 망설임 없이 예현을 감싸 안았다. 궤적을 바꾸지 못한 손은 그대로 이정의 머리를 내리쳤다.

“손……. 그렇게 하지 마. 위험하잖아.”

겨우 고개를 든 이정이 유리 조각이 즐비한 바닥을 더듬거리던 손을 붙잡았다.

“이정아.”

“구급차 불렀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머리 최대한 움직이지 마세요.”

“놔, 이거 놓으라고!”

두 사람을 지겹게도 괴롭히던 스토커가 결국 경찰에 손에 붙잡힌 채 퇴장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런 거 걱정할 때야?”

“난 괜찮아. 그것보다…….”

“괜찮다고?”

예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을 조를 때처럼 강한 힘으로 내리친 화병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머리를 타고 흐르는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손 베였잖아.”

그런데 눈앞에 이 달콤한 거짓말쟁이는 제 머리가 아니라 유리 조각에 베인 제 손가락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네 머리나 걱정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건 예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고개를 숙이자 바닥 위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여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예현이 그제서야 소리를 내며 울었다.

“왜, 왜 여길 와서 이런 꼴을 당해? 정말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멍청한 나는 또 네가 날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게 되잖아. 예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내가 꺼져 주겠다고 했잖아. 급도 안 맞고, 주제도 모르던 게 사라져 주겠다고 하면 그대로 돌아보지 말고 가야지 왜 와서 이런 꼴을 당하냐고!”

예현이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외쳤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자신을 찾아온 이정도, 자신을 대신해서 다친 그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울고 있는 자신도. 하나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울지 마. 나 진짜 괜찮아. 여기 온 건……. 시어터룸에서 형 옷을 하나 찾아서, 그거 주려고……”

“그냥 버리지 그랬어. 없는 줄도 몰랐는데 그게 뭐라고…….”

두고 온 물건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실내용 가디건 하나를 시어터룸에 벗어 두고 나온 것이 기억났다.

그게 뭐라고, 그거 하나 돌려주겠다고 여기까지 온 걸까.

“그냥 핑계야. 그래야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정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자신이 다친 것처럼 우는 예현 앞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야 문이라도 열어 줄 것 같아서. 그래야…….”

그래야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지, 그래야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지러움에 비틀거리기 시작한 이정을 지켜보고 있던 경찰 하나가 받쳐 세웠다.

화병 파편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낭패일 터였다.

애앵-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사건의 끝이었다.

*****

병가 기간이 늘어났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고 짓밟힌 다리의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나쁜 놈,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

눈이 퉁퉁 부은 예서가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보람은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주석에게 듣지 않았던 이야기는 역시나 중요한 내용이었다.

“나도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줄은 몰랐어. 그냥 다들 한 번씩 더 조사받은 줄 알았는데…….”

병문안을 온 명아가 예서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보람은 경찰에게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어 속을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알았으면 조심하라고 얘기했을 텐데. 미안해.”

“네가 미안해할 건 없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재하 씨도 완전 펑펑 울더라. 시간 나는 대로 병문안 오겠대.”

티비만 틀면 이정과 보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망상장애를 가지고 있던 촬영팀 스태프의 기행. 대충 이런 헤드라인을 단 기사들이 무섭게 쏟아져 나왔다.

보람의 진술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담당 경찰관에게 듣기로 보람은 이정의 개인적인 대화를 들은 것을 계기로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첫 촬영장에서 만난 것, 그리고 집안에서 무시당하던 것을 원인으로 조금씩 망상이 깊어져 갔고 결국 저렇게까지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이해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대단한 이유를 가져와도 그 소름 끼치는 모습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보람 씨가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 그냥 조용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몰라. 그런 사람은 그냥 깜빵에서 영원히 못 나오게 해야 해. 이게 뭐야……. 또 다치고, 아프기만 하고.”

예서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예현에게 자잘한 상처 따위는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그리고 이정 오빠도……. 킁.”

예서가 코를 삼키며 말했다.

이정은 보람이 휘두른 화병에 맞아 꽤 크게 다쳤다. 스무 바늘 가까이 꿰맨 살가죽은 물론이고 뇌진탕 증세를 보이더니 응급실에 도착하기 전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었다.

함께 구급차를 타고 가다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던 예현이 그날의 기억에 손을 파르르 떨었다.

“문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병문안도 못 오게 하는 걸 보면 많이 다쳤나 봐.”

“문자를 했어?”

예현이 조금 놀라며 말했다.

전화번호를 차단한 것은 풀었지만 예현은 아직 이정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였다. 괜찮냐고,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게다가 전화번호부에서 이정의 연락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이정이 떠올라 괜히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응. 근데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고 해서……. 오래는 못했어.”

예서는 아직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예서가 내심 부러운 예현이었다.

“이정 씨도 걱정되긴 하는데, 소속사 쪽에서 정보 통제 완전 철저하게 하고 있더라. 어디 입원했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명아가 흘러가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예현은 더 이상 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치료가 우선이니까. 그것보다 예서 너, 이제 시험 기간 아니야?”

“아, 아니야. 아직 시험 3주는 남았거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예서가 어깨를 흠칫하더니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이제 그만 집에 가. 명아야, 예서 잘 부탁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예서 말도 잘 듣고 할 일도 알아서 잘하던걸.”

“거봐.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계약 기간도 거의 끝난 데다가 스토커도 잡혔으니 이제 정말 이정과의 연을 끊을 수 있었다.

짐은 이미 집으로 옮겨 뒀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집에 예서를 혼자 둘 수도 없어서 당분간만 명아에게 도움을 요청한 예현이었다.

“퇴원하는 대로 데리고 갈게. 미안하고……. 고마워.”

“아니야. 나도 예서 어릴 때부터 봤잖아. 어떻게 혼자 두겠어.”

“고마워. 조심해서 들어가고.”

명아와 예서를 돌려보낸 예현이 가만히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다른 사람들은 이정이 어디에 입원해 있는지 모르고 있다지만 예현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같은 병원, 3층 위의 1인실에 이정이 머무르고 있었다.

‘자기는 혼자 있을 수 있다고, 혼자 있고 싶다지만……. 죄송합니다.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주석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해 준 이정의 병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었지만 예현은 이틀이 다 지나가도록 외면하고 있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는 다른 모습일 텐데 자꾸만 그때가 생각나 이정을 떠올리기조차 두려웠다.

‘그래야 문이라도 열어 줄 것 같아서. 그래야…….’

그다음으로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괜한 기대를 하게 되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경과 보고, 큰 문제 없으면 3일 정도 후에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의사에게 3일 후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온종일 같은 공간 3층 위의 공간에서 있을 사람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정말 마지막이니까, 그래도 날 감싸다가 다친 거니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예현이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의 저녁이었다.

*****

늦은 밤, 예현이 침대에서 일어나 목발을 짚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자고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조용히 돌아와야지. 깨어 있으면 상태만 보고, 그래도 구해 줬으니 고맙다는 말만 하고 돌아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걷기 시작한 예현이 엘리베이터 위에 올라탔다.

예현의 병실은 6층. 이정의 병실은 9층이었다. 겨우 3층을 올라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지 알 수 없을 일이었다.

912호. 주석에게 들었던 이정의 병실은 분명 912호였다. 예현은 병원 벽에 붙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딱, 딱.

목발 때문에 아무리 조심히 걸어도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사방이 조용한 시간이라 그런지 유독 바닥에 닿는 기척마저도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912호…….”

예현은 오래 지나지 않아 병실 앞에 멈추어 섰다. 호수 아래에 꽂혀있는 강*정이라는 이름이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불이 꺼져 있는데, 역시 자고 있는 거겠지? 자는 걸 깨우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으니 돌아가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틀 후면 퇴원이다. 그 이후엔 깁스를 풀 때까지 병원에 올 일도 없을 거고 온다고 한들 그때까지 이정이 입원해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결정하지 못한 채 병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예현의 어깨를 건드렸다.

“저기.”

“헉.”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더 놀랐다는 얼굴을 한 간호사 하나가 예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912호 환자분은 아닌 걸로 아는데, 병실을 잘못 찾아오신 건가요?”

간호사가 환자복을 입은 예현을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간호사는 이 병실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병실이 어디세요?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환자인 척 강이정을 감시하러 온 기자나, 스토커 정도로 생각하는 걸까. 예현이 당황한 채 말을 더듬었다.

“그게 아니라…….”

“안정이 필요한 분이라, 환자분 관계자 아니시면 따로 면회 안 되세요.”

간호사의 말에 예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태가 그 정도로 안 좋은 건가.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 거예요?”

“환자분 정보는 알려 드리면 안 돼서요. 죄송합니다.”

간호사가 예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단호한 모습에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란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은 에현이 고개를 숙였다.

“병실이 몇 호실이세요?”

“……608호요.”

“데려다드릴게요.”

그래, 어차피 자고 있으면 그냥 돌아올 생각으로 온 거였잖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드르륵 소리를 내며 912호의 문이 열렸다.

“형.”

머리에 붕대를 감은 이정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새하얗던 얼굴이 며칠 새 눈에 띄게 질려 있었다.

“환자분. 아는 분이세요?”

“네.”

당황한 얼굴을 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간호사가 물었다. 예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정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애인이에요.”

이정의 말에 당황한 간호사가 잠시 멍하니 예현을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는 분이셨군요. 음…….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화는 조용히 부탁드릴게요.”

뻘쭘한 얼굴을 한 간호사가 병실의 문을 닫았다. 며칠 만에 이정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 예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아파?”

가만히 있기가 어색해 물어본 것이었지만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화병이 깨지는 것을,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것이 예현 자신이었다.

“병원에선, 뭐래?”

예현이 가까스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만히 예현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정이 말했다.

“크게 다친 건 아니야. 그냥 일이 커지기도 했고……. 며칠 정도는 경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다음 주쯤에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

예현의 시선이 이정의 붕대를 감은 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현의 질문에 대답한 이정이 역으로 물었다.

“형은……. 괜찮아?”

이정의 시선은 예현의 다리 위를 향하고 있었다. 자기가 더 크게 다쳐 놓고 누굴 걱정하는 건지. 예현이 조금 삐뚤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 뒤면 퇴원해.”

“이틀? 너무 빨리 퇴원하는 거 아니야?”

빠르긴, 이것도 꽤 오랫동안 경과를 지켜본 것이었다.

애초에 머리를 다친 이정과 달리 예현의 상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유리 조각에 조금 베인 상처와 깁스를 새로 해야 하는 다리. 그 정도가 끝이었다.

“상처 다시 덧나기라도 하면,”

“됐어.”

예현이 조금 신경질적인 손길로 이정의 손을 쳐 내었다. 이정의 태도를 보면 볼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걱정할 것 없어. 의사 선생님이 괜찮을 거라고 하셨으니까 괜찮겠지.”

예현이 이정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정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은 맞는데, 정작 이정을 보고 나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누가 누구를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건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안해.”

이정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말했다. 잠깐의 침묵 후,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예현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걸까, 아니면 속인 것이 미안하다는 걸까.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있었어?”

“어?”

“자극하고 싶었다면서. 네가 원하는 대로 됐잖아. 스토커도 잡혔고 사람들도 다들 널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지.”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갔다. 찾아온 것은 분명 걱정이 되어서였는데, 정작 이정의 얼굴을 보자 수많은 의문점들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잃은 건 없는 건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다치긴 했지. 확실히 이건 네 계산에 없었겠다.”

이정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감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마음으로 이 관계를 시작했었는지는 당사자의 입으로 들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네가 바라던 건 다 이뤄졌잖아.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난…….”

“미안하다는 말은 실수일 때나 하는 거지. 원하는 대로 됐는데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다친 모습을 보고 나니 심장이 저릿했다. 그게 바보 같고 한심해서 더더욱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예현은 날을 세운 채로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된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웃어야지.”

예현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아냐.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그냥…….”

이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을 원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스토커가, 윤보람이 그 정도의 미친 인간인 줄 알았다면 다른 사람을 엮어 들일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스토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아니. 어떻게 행동하는 게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미친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닐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처음엔, 맞아. 처음에는 이렇게 된 거, 3개월 동안 스토커를 자극해서라도 잡을 생각이었어. 그러기 위해선 형이 필요했고.”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정이 작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어 갔다.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웃긴 거지. 맞아. 그때는 그랬어. 그런데…….”

그렇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오만한 이정은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나중에는 우리가 왜, 어떻게 한집에 살고 있게 되었는지는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형이 좋았어.”

“……하.”

언제부터였을까, 스토커가 제 꼬리가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패악질을 부리는 것이 전혀 기껍지 않았다. 예현과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예현과 함께 있다는 것,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만이 중요하고 소중했다.

“믿기 힘든 거 알아. 내가 꼴도 보기 싫겠지. 그렇지만 정말이야. 그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보람 씨가 그러더라, 자기는 너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예현이 이정의 말을 끊고 말했다. 보람의 말은 그냥 듣기에도 횡설수설한 데다가 망상이 가득했지만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 난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널 이해하지도 못해. 그렇지만 이제 와서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가 중요할까?”

그러나 예현은 굳이 보람이 이해한다는, 그만이 알고 있다는 이정의 옛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직접 겪은 너야. 그리고 너는.”

내게 거짓말을 했지. 처음부터,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한 이후부터, 내내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었지. 그러니 예현에게 이정은 최악이어야 했다.

“너는…….”

그러나 예현은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입을 닫았다. 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 쉽게 뱉을 수가 없었다.

최악이다. 강이정도, 지금 이 상황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이젠 거짓말할 이유도 없잖아.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이러는 건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는 건 알겠다. 그래서 당황스러웠고, 이정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이별이었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러나 그 뒤의 상황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끝났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났고 이정 역시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정말 마음이 아프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알고 있는 예현조차도 마음이 아파질 정도로 아릿한 얼굴을.

“한번 나쁜 사람이었으면 끝까지 나쁜 사람이어야지.”

이기적이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적어도 잠시라도 너를 좋아했고 지금도 완전히 그 기억을 떨치지 못한 나를 알고 있다면 너는 그런 얼굴을 하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그랬어야지.”

그랬다면 아무리 멍청한 자신이라 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한 것은 예현 자신인데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이정은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푹 숙인 채 예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침묵 속에서 예현이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초침이 수십, 수백 번을 째깍거린 후의 일이었다.

“미안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발치로 떨어진 물방울과 떨리는 목소리, 이정이 울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라는 걸 알아.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내 의지로 한 일이었지. 그런데…….”

서로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늘 예현이었다. 몇 번이나 울었고, 가식적인 위로를 받았고, 다정한 위선을 겪었었다.

“그런데, 그래도.”

“……..”

“나는 다 거짓말이었지만, 내 앞에서의 형은 늘 진실이었으니까. 나는 형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어.”

눈앞에 있는 사람은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기간 동안 지겹도록 마주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거, 믿기 싫은 거 알아. 그런데 알다시피 나는 나밖에 모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그런지 몇 번이고 똑같이 말할 수밖에 없어.”

이정은 뛰어난 배우다. 단순히 말끔한 얼굴 하나만으로 국민 배우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대본을 받느냐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수도, 세기의 사랑을 하는 연인이 될 수도, 무자비한 폭군이 될 수도 있는 연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은 예현이, 그리고 강이정의 이름을 아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좋아해.”

그러나 저런 얼굴로, 저런 목소리로, 이렇게나 떨리는 손을 하고 말하는데 누가 이 모습을 의심할 수 있을까.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만에 하나 그가 진심일지라도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데도 그의 눈물이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어느새 고개를 든 이정이 예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새 눈물로 젖은 얼굴이 애처로웠다.

“한 번만 기회를 줘. 난, 우리가 계약서로 엮인 사이가 아니라 진짜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이미 우린 그런 사이였잖아. 형은 아니었어?”

예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느 순간부터 예현에게도 계약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도 계약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잖아. 계약서대로 할 거였으면 또 위약금 들먹이면서 협박했어야지. 그 정도의 양심은 남아 있는 것 아니었어?”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연인을 연기할 수 있었다. 자기라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것도, 팔짱을 끼고 시선을 마주하고 사르르 웃는 것도 쉬웠다.

“그럼 진심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진심?”

내 진심이 뭔지 모르겠는데, 네 진심이 뭔지 알 수 있을 리가 있을까. 예현이 되물었다.

“네 진심이 뭔지 내가 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것 같아?”

“그걸 모르면, 왜 여기에 왔어?”

이정이 물었다. 왜 여기에 왔냐고. 분명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 그래도 구해 준 것은 사실이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얼마나 다쳤는지를 확인하려고 온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의미 없는 논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가 나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박규진과는 달리, 이정에 대한 것이라면 아직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화를 내도 좋아, 때려도 좋고, 욕을 해도 좋아. 내가 궁금하니까, 적어도 아직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니까 여기에 온 거잖아.”

“…….”

“내가 좋아하는 걸 아니까, 내게 남은 감정이 뭐든, 남은 게 있으니까 온 거잖아.”

차라리 뻔뻔하게 굴라고 했지만 사실 예현은 단 한 번도 이정의 뻔뻔한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우는 모습은, 잘못했다 비는 모습은 그렇게 어색하지가 않았다. 은연중에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아니까 그런 거라고.”

그러게. 난 왜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예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인정하고 나니 이 상황까지 와서도 무의식중에는 강이정이 당연히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우스웠다.

“날 사랑해?”

“응.”

이정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날 사랑한다고?”

예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밤늦은 시간, 병원에서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형은 날 사랑하지 않아?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젠 내가 싫어졌어?”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상식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지? 예현은 보람에게 목이 졸리는 순간에도,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에도 그를 떠올렸었다.

“……아니야…….”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젖은 얼굴을 보면 아릿해지는 심장이, 붕대를 감은 머리를 먼저 걱정하게 되는 사고방식이, 딱 잘라 당연히 모두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입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바보 같게도, 나는 이 사람에 대한 감정을 모두 버리지 못했노라고.

“넌 날 속였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 그 미친 스토커가 타깃을 바뀔 수 있다는 걸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어?”

아니어야 한다. 예현이 부러 날을 세웠다.

“처음부터 이익을 위한 관계였잖아. 그래,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지. 처음 해 보는 연애 놀이, 카메라 없는 곳에서 하는 연극이 재미있었던 거야. 그래서 착각하는 거라고.”

이정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멍청한 자기 자신에게 똑똑히 알려 주는 것이기도 했다. 예현이 단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건 그냥, 착각이야. 배역에 너무 집중해서 그게 진짜 너라고 믿고 있는 거라고.”

“……정말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 내가 그 정도로 형에게 아무런 믿음을 주지 못했어?”

“믿음 같은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내가 보고 들은 거야.”

“그럼 지금 보고 있는 나도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말투는 차분했으나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르고 흘러 간간이 발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그래?”

이정이 재차 물었다. 예현이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아직 다 버리지 못한 멍청한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너 배우잖아. 사람들한테 대본 속의 캐릭터를 보여 주는 게 네 직업인데, 이게 뭐가 어려운 일이겠어.”

그런데 왜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비참해지는 기분인 걸까. 어느새 예현의 눈가 가득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렇잖아. 너한텐 그게 다 쉬운…… 일이잖아.”

눈물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또 네 앞에서 이렇게 우는구나.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이 남아 있다. 그렇게 속고도, 급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마음이란 가장 내 것이면서도 가장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알고는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예현은 홀린 듯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냥 거짓말이었다고 해. 다 거짓말이었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해 달라고. 다 네 뜻대로 됐는데, 이거 하나 못 들어주는 건 좀 너무하잖아.”

어느새 예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도 스스로 이 관계를 끊어 낼 용기가 없었다.

“너 연기 잘하잖아. 그냥 그렇게 해 주면 안 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 연기였을 뿐이니까 그만하자고. 차라리 이정 쪽에서 말해 주길 바랐다.

나쁜 사람일 거면 차라리 끝까지 나쁜 사람이어야지,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얼굴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멍청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의심하냐고, 아니. 몇 번을 속아도 저 얼굴 앞에서는 똑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이정은 신예현을, 신예현은 강이정을 좋아한다. 그것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두 사람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똑딱, 똑딱. 조용한 병실 안에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약서로 시작한 관계잖아. 그냥 여기서 끝내자. 진심이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현실이야. 너도 알잖아.”

예현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진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예현은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사랑하면 여기서 끝내자.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금방 잊을 거야.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거고.”

네 급에 맞는, 너와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이정과 자신은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주제를 모르고 극에 참여했던 관객은 무대의 아래로 내려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그게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맞는 거야. 계약 기간도 이제 끝이잖아.”

“……계약 기간.”

이정이 작게 말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이정이 예현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그 기간,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어.”

“……뭐?”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아직 조금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우 일주일, 어쩌면 일주일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기간이었다.

“계약서로 끝날 관계라면, 계약서만큼의 시간이라도 허락해 줘. 정리,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이정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계약 없이는 만날 수 없는 관계라면,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만큼이라도 허락해 주길 바랐다.

계약서로 맺어진 사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웠지만 매달릴 것이 이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정이 예현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말했다.

“일주일만이라도 좋아. 계약으로 끝낼 관계라고 했잖아. 그럼 정말 계약으로라도 끝내자…….”

힘없이 그러쥔 손목, 차마 잡지 못한 손. 금방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예현은 한참 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이틀 후, 예현은 예정대로 퇴원할 수 있었다.

“이번엔 진짜 돌아올 일 없었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 올 일 없을 거야. 인생에 입원은 두 번이면 충분하지.”

사실 평생 입원할 일은 없을 줄 알고 살았으니 두 번만으로도 충분히 이변이기는 했다. 예현이 목발을 짚고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예서 맡아 줘서 고마워.”

“아니야. 예서가 완전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다 잘하던걸. 나도 동생 생긴 기분이라 좋았어.”

“거봐. 내가 완전 얌전히 있었다고 했잖아.”

예서가 툴툴거리며 가방을 똑바로 멨다.

“집에 진짜 오랜만에 간다. 혼자 지내는 것도 좋긴 했는데, 그래도 익숙한 곳이 최고지.”

“짐은 다 옮겼어?”

“응. 이정 오빠 매니저라는 아저씨가 도와줬어.”

어떻게 알고 찾아갔대. 명아를 바라보자 명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내가 차가 없으니까……. 지나가는 이야기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러고 보니 이정 오빠는 언제 퇴원한대?”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이 동시에 예현을 바라보았다. 예현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내일 퇴원한대.”

예현은 결국 이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를 매정하게 끊어 낼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벌써? 어제 보니까 얼굴이 완전 엉망이던데.”

뭐, 그래도 여전히 잘생겼긴 하지만. 예서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게 일찍 퇴원해도 되는 것인지는 예현 역시 걱정이 되었다.

남은 시간이 일주일이라는 것 때문에 괜히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완전히 떨칠 수가 없었다.

“괜찮으니까 퇴원하는 거겠지.”

일주일의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지만 이정과 예현은 이틀 동안 거의 만나지 않았다. 당연히, 대화도 거의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병원을 나섰다. 이정이 퇴원하게 되는 것은 내일. 내일이 되면 이제 그가 말한 유예 기간은 겨우 4일을 남기게 된다.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됐어. 신경 쓰지 마.”

예현이 예서의 툴툴거리는 입을 꾸욱 누르고는 택시에 올라탔다. 예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니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끝이 났다는 실감이 났다.

“이게 얼마만의 집이냐.”

예서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가며 말했다. 지내는 곳이 좋다느니, 나도 크면 이런 곳에서 자취하고 싶다느니 말은 했었지만 역시 평생을 살아온 제집이 편한 모양이었다.

“이제 택시 못 타고 다니는 건 좀 슬프지만, 그래도 집이 좋지.”

“그래?”

“응. 거기도 좋긴 했는데……. 그래도 내 집이 아니니까 뭔가 늘 불편한 느낌이었달까.”

예서가 그렇게 말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둥 혼잣말을 하며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이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이 집에 들어올 때 저렇게 신나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현이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 집, 처음 갔을 때는 이게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서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그곳이 익숙해진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지금 당장 아무렇지 않게 그 집으로 돌아가도 전혀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정의 집이 익숙했다.

이런 걸 막 건드려도 되나, 괜히 건드렸다가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전전긍긍하던 물건들을 어느 순간부터 익숙하게 사용하게 되었었다.

“그런가…….”

분명 평생을 살아온 집인데도 이렇게 낯선데, 예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 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빠 퇴원도 했는데, 오늘은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네가?”

자신이 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예현은 지난 2주일간 목발을 짚은 채로 집안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톡톡히 배운 상태였다.

“……그래. 뭐.”

“뭐야. 냉장고에 재료 하나도 없네? 오빠 한동안 집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

배달 음식 시켜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던 것은 늘 예현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예현이 예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냥, 뭐……. 그렇게 됐네.”

“뭐야. 미리 말하지!”

예서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비닐 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오늘의 메뉴는~ 뭘로 하는 게 좋을까요~.”

티 없이 해맑은 예서가 보기 좋으면서도 부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재료를 정리하는 예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예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 명아 언니한테 요리하는 거 좀 배웠거든. 기대해.”

“그래? 무슨 대단한 걸 하려고 그러는지 기대가 되네.”

“계란말이 예쁘게 마는 법 배웠어. 여태 계란 프라이밖에 할 줄 몰랐는데 이제 할 줄 아는 게 하나 늘었다고. 엄청 맛있을걸?”

예서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계란말이를 맛없게 만들기도 힘들지.”

큭큭거리며 대답하던 예현이 묘한 기시감에 멈칫했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치? 다들 계란말이 해 주면 좋아하더라고.”

기묘한 맛의 된장찌개와 멀쩡한 맛의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자신만만하게 웃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사랑과 정성이 담긴 거라고.”

예서가 두고 보라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예현은 멍하니 예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 맛있게 먹자!”

예서가 요리를 끝내고 예쁘게 잘린 계란말이가 식탁 위에 올라왔을 때도 예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멍하니 수저를 잡을 뿐이었다.

어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벗어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 : 내일 바빠? 오후 8 : 12]

그러나 인생이란 언제나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예현은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기호 하나를 액정 위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네 뒷자리에 있으니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던 문자 아래 자리한 새로운 문자 하나.

[♡ : 바쁘지 않으면 오후 8 : 13]

[♡ : 내일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오후 8 : 19]

[♡ : 데이트 오후 8 : 21]

시간 차가 조금 있는 메시지들이 하나둘 액정 위에 떠올랐다.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라도 할 생각인 건가?

“하아.”

예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는 오래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아침에는 자니까 연락 하지마. 오후 지나서 연락하면 받을게. 오후 8 : 32]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이행할 시간이다.

*****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예현이 미칠 듯한 어색함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아침에 퇴원했을 텐데, 아직 점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걱정이 됐다.

“그냥 쉬지…….”

“괜찮아.”

이정이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남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연인으로 지내자는 것을 제안한 것은 이정이었지만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한동안 장기 휴식 해도 될 텐데, 쉬는 건 나중에도 많이 쉴 수 있으니까.”

이정의 말에 예현이 나오기 전 봤던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사건이 터진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지만 아직 이번 사건은 세간의 뜨거운 감자였다.

하루가 멀다 하며 나오는 새로운 기사들을 보고 있자면 사건 담당자로 배정된 경찰관의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방송 조연출이라는 이름의 영상에는 의미 없는 블러 처리로 대충 가려진 보람의 얼굴이 떠 있었다.

얼굴은 물론 보람의 신상과 사건 조사의 진행 정도까지 인터넷을 통해 속속들이 알려지고 있었다.

아침에 본 기사는 이정의 보호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을 그가, 범인이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조연출이었다는 것까지 알게 된 채로 촬영 현장에 아무렇지 않게 나올 수 있겠냐는 내용도 있었다.

하긴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보던 김 과장이 기자 지인에게 제 정보를 팔아넘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평소 김 과장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충격이었었다.

보람과 이정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역으로 관계가 아주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 충격을 받았을 것 같았다.

“당분간은 쉬기만 하려고. 차기작 들어가려던 쪽에서도 몇 달 정도는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뭐, 촬영 환경 이미지 메이킹하려는 걸 수도 있지만 나쁠 것도 없지. 이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왜 나오라고 했어?”

예현이 돌려 말하지 않고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르진 않았을 테고, 용건이 있어 부른 것이라면 어서 그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남은 일주일을 연인으로 보내자는 말에 동의를 한 것은 예현 자신이었으나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을 마주하기는 힘들었다.

차라리 무슨 이야기라도 하면 어색함이 덜해지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퇴원하자마자 오래 나와 있는 것 힘들 텐데, 너무 오래 밖에 있지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이정이 예현의 말을 끊고 말했다. 가고 싶은 곳? 예현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차도 그래서 가져온 건데.”

“……멀리 갈 건 아니지?”

퇴원하자마자 어딜 가겠다고. 예현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바다.”

서울 한복판에서 바다를 찾는 이정의 말에 예현이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가까운 곳으로 간다고 한들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할 텐데.

“전에 갔던 곳.”

“뭐?”

전에 갔던 곳이라면 예현의 이모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두세 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인데. 예현이 고개를 들어 이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긴 왜? 차라리 가까운 곳으로 가. 너 퇴원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렇게 오래 운전을 하겠다고 그래.”

“목발 짚은 사람한테 대신 운전해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해야지.”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괜찮아. 이정이 예현과 눈을 마주한 채로 싱긋 웃었다.

“의사 선생님도 바로 일상생활 해도 괜찮다고 하셨는걸.”

“그래도…….”

예현이 일주일 새 조금 살이 내린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러나 이정은 생각을 꺾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괜찮아.”

어느새 출발한 차가 도로를 질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

차가 내비게이션에 찍힌 위치를 따라 달렸다. 예현이 이모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하자 이정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해 질 때쯤에 다시 돌아올 거니까 그럴 필요 없어. 따로 만나고 싶은 거면 연락드리고.’

왜 하필 그곳으로 가는 걸까. 예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한 차 안에서 이정의 옆모습만을 힐긋거리며 살폈다.

“…….”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낸 적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촬영장, 바다, 그리고 사이클을 보냈던 호텔. 기억을 쥐어짜 내 봐도 떠오르는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닷가뿐이었다.

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을 하며 웃던 이정은 분명 반짝거리고, 즐거워 보였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밤에는 사람 별로 없었는데, 낮엔 좀 다르려나?”

“그렇진 않을걸. 근처에 관광지도 없고, 애초에 사람들이 잘 다니는 곳도 아니니까.”

예현이 이정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차창 너머로 휙휙 바뀌는 풍경이 낯설었다.

“다 왔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차는 어느새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 캄캄한 밤바다가 아닌 한낮의 시원한 바다가 두 사람을 반기고 있었다.

“바다는 낮이든, 밤이든 똑같을 텐데 왜 이렇게 다른 기분이 드는 걸까.”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이어서 예현이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 그는 이내 예현과 속도를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바다 좋아해?”

정작 바다까지 데려온 것은 자신이면서, 이정이 예현에게 물었다. 좋아하던가.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대답했다.

“싫어하진 않아. 바다엔 좋은 기억도 있고……. 그냥,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라 한 번씩 오고 싶어지는 정도인 것 같은데.”

어린 시절 왔었던 가족 여행. 바다에 관련된 기억은 그것 하나뿐이었지만 짧은 기억 하나로도 감상에 빠지기는 충분했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네.”

이제는 함께 올 수 없는 사람들과의 기억이라는 것이 조금, 아주 조금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다가 싫지는 않았다.

“그래?”

이정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참 동안 침묵한 채 바닷가를 걸었다.

먼저 얘기를 꺼내 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파도 소리만이 가득한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예현이 물었다.

“넌?”

예현의 물음에 이정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꽤나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바다……. 난.”

잠시 고민하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사실 바다가 싫어. 특히 겨울 바다라면 딱 질색이고.”

“뭐?”

예현이 당황해 되물었다. 바다를 싫어한다니.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아 몰랐다.

“그럼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 그랬어.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아냐. 말한 적 없으니까 모르는 건 당연한 거지. 굳이 이렇다저렇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었고, 그 기억에 휘둘리는 것도 싫었어. 그래서 갔던 거야.”

이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한낮의 봄 바다는 아직 조금 서늘한 감이 있었지만 두꺼운 겉옷이 없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포근했다.

“입김을 불면 공기가 하얗게 보일 만한 날씨라면 더더욱, 거기다가 그 빨간 목도리와 함께라면, 끔찍하지.”

그러나 이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가 여전히 한겨울의 어둑한 밤바다에 혼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래서 더 부정하고 싶었던 것. 그러나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일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고 정말 괜찮아지지도 않는 것.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더 이상 그것에 붙잡혀 멍청한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보람 씨가 나에 대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이야기를 엿들었을 거야.”

“…….”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그래도 괜찮으면 시간 때우기용으로 들어 볼래?”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조금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하고 싶으면 해.”

핑계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듣는다고 해서,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의문점 하나는 풀 수 있겠지.

“……듣는 것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니까.”

“그래? 그럼…….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피식 웃은 이정이 먼 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입원 치료로 인해 아직 제대로 된 피해자 진술을 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들은 것이 있었다.

“실패한 자식.”

조사를 받는 동안 보람이 가장 많이 한 말은 다름 아닌 실패한 자식이라는 이야기를 이정도, 예현도 들었다.

예현은 그것이 단지 부모가 원하는 대로의 모습이 되지 못한 보람의 피해 의식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정은 달랐다.

그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가장 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자,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어.”

그러나 그는 부모님에게 언제나 실패한 자식이다.

“그리고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이정이 옅게 웃었다.

‘실패한 자식이라는 게 싫어서 꺼내지도 못하던 걸 저게 가져갔어. 주제도 모르고, 급도 안 되는 게. 지 주제도 모르고…….’

이야기가 꽤 진행됐을 무렵, 예현은 보람이 악에 받친 채 중얼거렸던 말 하나를 떠올렸다.

너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들었던 말이라 반쯤 잊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다시 그 말이 떠올랐다.

버려도 된다고 한 것도 그래서였을까. 예현이 목도리 없이 훤히 드러난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 뒤로는 뭐, 나도 기대하는 건 포기했으니까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고 그냥 있는 대로 살았지.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고 살았어.”

차마 버리지 못한 목도리를 옷장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유정과 연락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불안해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정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가 예현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정이 예현을 속였다는 것, 그리고 떨치지 못한 불안감에 예현을 다른 사람 앞에서 깎아내렸다는 사실이었다.

이정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는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웃었다.

“그런데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해.”

영화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는 명작으로 뽑히는 히트작이었고 이정의 대표작이기도 했지만 그는 당시의 사건을 기점으로 의도적으로 그 작품을 피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그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필름 속의 자신은 영원히 그 시간에 갇혀 있겠지만 현실 속 강이정의 시간은 움직인다.

조금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손에 쥔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정작 잃고 나니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보람 씨가 뭐라고 진술을 했던지, 형한테 무슨 악담을 퍼부었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지.”

그보다 더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겨서일까.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었나 싶었다.

“……그래.”

예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가 이정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행동에 공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여전히 그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마음에 진 응어리가 한 번에 풀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던 시절의 강이정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였다.

“전에 왔을 때 형이 말했었던 거 기억나?”

“뭘 얘기했었는데?”

예현이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조금 지나서는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은 기억나지만 정확히 뭐라고 말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야 한다고.”

‘안 좋은 기억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 버리는 거래.’

듣고 나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예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이 말했다.

“다른 기억으로 덮어 버리면 되니까 괜찮아.”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예현의 생각은 달랐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이 과연 두 사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힘들진 않아?”

어느새 출발한 곳에서 꽤 멀리 걸어온 두 사람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못해도 2-30분은 걸어온 것 같았다.

“괜찮아.”

“그래도 오래 걷기 편하진 않을 테니까 슬슬 되돌아가자.”

예현이 이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를 들으며 동행한 길은 아무 대화 없이 되짚어가기는 조금 먼 길이었다.

“왜 여기로 온 거야?”

“응?”

“바다는 여기가 아니어도 많잖아. 네가 촬영한 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정말 안 좋은 기억을 덮어 버리고 싶어서라면 그쪽으로 가도 될 거고…….”

예현이 언젠가 보았던 포스터 속의 이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굳이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으로 직접 운전까지 해서 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도 이 연극이 끝나기까지 겨우 4일이 남은 시점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꼭 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 같았다.

“……맞아. 사실 나쁜 기억을 덮어 버리고 싶어서 온 것만은 아냐. 그냥, 형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또……. 여긴 나한테도 의미 있는 장소니까.”

이곳은 멍청하던 강이정이 아무것도 모르고 촬영을 했었던 그 바다가 아니다. 오히려 예현과 함께 바다에 온 것은 이정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시작이 여기였으니까.”

기분이 나쁘던 이유를 알았던 곳. 그 보기 싫던 빨간 목도리와 입김이 훤히 보일 정도로 추운 겨울 밤바다가 이렇게 두근거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곳.

“……꼭 다시 한번 와 보고 싶었어.”

머리가 답답할 때는 산책만큼 좋은 것도 없지 않냐며 무작정 이곳에 들렀던 그날의 기분을 다시 느껴 보고 싶었다.

“형이랑 같이.”

혼자 다시 올 수도 있는 곳이지만 둘이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조금 무리해서라도 데려오고 싶었다.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은 채 대답하자 예현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그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려고 했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던 예현은 이정의 입을 막았었다. 그러나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벗어났지만 예현은 이정에게 고백의 말을 들었고 결국 다가오는 이정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연인이 되었었다.

그렇게 진짜 연인이 되었지만 결국 진실을 알게 되고 어색하게 이 바닷가를 다시 걷고 있다는 것까지, 정말 예현이 바라거나 예상했던 일은 단 하나도 일어나질 않았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았다는 것 역시 그랬지만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예현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회돼.”

“여기에 온 게?”

“아니. 여기에 이런 마음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언젠가 우리 그때 그랬었지, 하고 웃으면서 돌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이게 최선이라는 게.”

이정은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자신을, 불안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멍청해 보여도, 구질구질해 보여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끝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게 싫어.”

“그렇게 말해도 바뀌는 건 없어.”

부러 모질게 말하자 이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 그냥 마지막까지 솔직하지 못하면 더 후회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그냥 알 게 뭐냐고 웃어넘겨도 괜찮아.”

“그럼 이다음엔 뭘 할 거야?”

바다에서 돌아가고 나면 뭘 할 거냐는 말에 이정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우선 집에 데려다주고, 내일은 진술하러 가야 하는데, 형은 이미 했어?”

“아니. 나도 내일.”

“그럼 내일도 데려다줄게.”

운전기사로 재취업하기라도 한 건지, 데려다주겠다는 말만 반복한 이정이 계속해서 걸었다.

“목도리 돌려줄게.”

“어?”

예현의 말에 당황한 이정이 옆을 돌아봤다.

“너한테 의미 있는 물건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 아니야. 그냥 가져. 가지고 있는 게 부담스러우면 버려도 괜찮은데.”

“버릴 거여도 네가 직접 버려야지.”

그것이 떠올리는 것조차도 괴로운 과거이자 떨치고 싶은 일이라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맞았다.

자신의 손에 주고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처리해야 했다.

더 이상 그 목도리를 보는 게 괴롭지 않더라도, 방에 처박아 놓든 버리든 그건 이정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괜찮든, 괜찮지 않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그것은 예현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끊는 것이 힘들어도 그건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일 데리러 올 거야?”

“응. 가도 돼?”

“데리러 올 거면 그때 돌려줄게. 버려도 되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떻게 해도 상관없지만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돌리지는 마.”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던, 뭐든지 아는 것처럼 굴던 이정이 지금은 한없이 어리고 어리숙하게만 보였다.

남은 계약 기간은 4일. 짧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기에 더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시간이 두 사람에게 남아 있었다.

*****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수사에 관한 것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들은 상태였지만 수사관에게 직접 들어야 하는 것도 있을 터였다.

조사는 따로 받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들어갔다.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들어간 것은 예현이었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네.”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조사 중인 사항은 거의 없어요. 잡히고 나서 윤보람 씨가 무용담이라도 풀어 놓는 것처럼 줄줄이 말하더라고요.”

경찰관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보람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자마자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혹은 완전히 미쳐 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물어본 것은 물론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줄줄 털어놓았다. 대부분은 망상이었지만 경찰은 거짓말이 아닌 부분 몇 가지를 찾아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우연히 전화 내용을 엿들은 적이 있었나 봐요. 거기서 자신과 강이정 씨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과 강이정 씨를 동일시하면서 망상을 키워 온 것 같아요.”

“여기저기 쫓아올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 거였겠네요.”

“그렇죠. 일부러 강이정 씨가 있는 촬영만 따라다니기도 했다고 하고, 업계가 좁다 보니 쉽게 알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애초에 최종 용의자로 지목된 것도 이상할 정도로 강이정 씨가 출연했던 방송에서만 일해서였거든요.”

뭐, 스토킹도 스토킹이지만……. 조사관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거침입, 스토킹, 폭행, 살인 미수……. 살인 미수는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머지는 유죄 판결 받을 겁니다. 집이 꽤 좋은 집안이던데, 거의 내놓은 자식이라고 변호에 큰 공을 들일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국선 변호사 쓸 것으로 예상됩니다.”

“재판은 언제 열리나요?”

“증거도 명확하고 현행범이니 길어도 올해 안에는 판결이 날 것 같네요. 항소한다면 조금 더 길어지겠지만요.”

이어서 재판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 준 조사관이 예현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윤보람 씨와 친분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윤보람 씨 쪽에서 먼저 접근한 거였나요?”

“아뇨. 윤보람 씨랑 친한 다른 조연출분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만난 건 우연이었고요.”

예현이 재하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건 정말 우연이었고 재하와 보람이 친한 사이인 것도 우연이었다.

만약 그날 촬영장에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우연도 참 얄궂다 싶어진 예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뒤로 윤보람 씨가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글쎄요.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냥 얌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함께 있는 단체방이 있긴 했지만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도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재하가 하는 말에 한 마디씩 핀잔을 주거나 농담을 하는 것 정도가 다일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차라리 한순간이라도 보람이 자신을 혐오한다는 것이 느껴졌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텐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 사람은 뭐라고 주장하고 있나요?”

“자기변호라고 할 만한 말은 죄다 망상에 기반한 말일 뿐이라, 주장하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 뒤로도 예현은 조사관을 통해 보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진술하기도 했다. 진술은 한 시간이 되기 전에 끝이 났고 예현은 사건의 진척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보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예현이 이정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범행이 조금 더 앞당겨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

“재판 담당 배정되면 연락 갈 겁니다.”

“네.”

눈치채지 못한 채 꽤 많은 순간을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자 등골이 오싹했다.

조사도 끝났고 목도리도 전달해 줬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말도 없이 가 버리는 건 좀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벤치 위에 앉았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교통비도 아낄 겸 그냥 기다렸다가 가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 화면을 켰다.

“가자.”

킬링타임용으로 깔아 둔 블록깨기 게임에 집중해 있기를 한참, 진술을 마치고 나온 이정이 예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점심은 먹었어?”

“아니. 아직.”

출발 시간이 조금 애매해 점심을 먹지 않고 나온 예현이었다. 어차피 지금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니 집에 돌아가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이 먹을래?”

“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정이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 왔다.

“오늘 평일이니까 예서도 집에 없을 거고, 혼자 이것저것 하기 불편할 거 아냐. 내가 도와줄게.”

이정이 예현을 보며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을 보는 예현의 마음은 편안하지 못했다.

단순히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여태 이정의 요리를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몰랐겠지만 예현은 이정의 요리 실력을 알고 있었다.

“응?”

이정이 대답을 재촉했다. 식사 한번 하는 것쯤이야 괜찮지만, 이정이 한 요리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이정의 표정에 초조함이 서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야 뻔했다.

이걸 정정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현이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같이 밥 먹는 거야 괜찮아. 상관없는데.”

“응.”

“뭘 먹는지는 좀 중요해.”

“응?”

이정이 예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예현은 반찬 투정 같은 것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늘 ‘그래, 그거 먹자.’, ‘상관없어.’ 정도의 말만 하던 예현이 새삼스레 메뉴에 관해 단호히 말하자 당황한 이정이 다시 물었다.

“따로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예현이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함께 지낼 때야 자신이 요리를 잘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이정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내가 먼저 일어나서 이정이 요리를 할 일이 없게 만들면 되겠지, 하고 넘겼었다.

어차피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 줄 일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까.

아니지. 이정이 요리사인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한 요리는, 먹고 싶지 않아.”

“…….”

그리고 이정의 표정을 살핀 예현은 이정이 또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한 요리라서 싫다는 게 아니라, 그 요리가…….”

“요리가?”

“맛이 좀……. 그래서.”

이정이 예현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들은 이정에게 예현이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같이 식사하는 건 괜찮아. 근데 직접 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이정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맛이 없었어?”

“없었다기보다는……. 좀, 그 비주얼에서 나서는 안 될 맛이 났다고 할까.”

예현이 이정의 괴식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생긴 것은 꽤 멀쩡했는데, 왜 그런 맛이 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음식들.

“네가 한 거라서 먹기 싫다는 건 아니니까 이상하게 이해하지 마.”

그러나 제대로 이해해도 상처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정이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다들 괜찮다고 하던데…….”

“누가 그랬었는데?”

“예전에, 팬미팅에서.”

그야 그 사람들은 네 팬이니까. 간단한 답을 삼킨 예현이 애써 이정을 위로해 주었다.

“……그 사람들한테는 정성이 느껴져서 맛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한텐 그랬다고.”

그러나 별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예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 말을 듣자 왜 예현이 늘 식사는 자신이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맛이 없어서 그랬던 거구나. 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풀이 잔뜩 죽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든 예현이 이정을 위로했다.

“그래도 계란말이……는 괜찮았는데. 샌드위치 같은 것도 괜찮았고.”

맛없게 만들기가 힘든 음식들이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위로가 되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같이 식사하기 싫은 건 아니니까. 점심 먹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아.”

“…….”

“재료 사 놨으면……. 내가 해 줄 수도 있고. 네가 도와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예현이 어떻게든 이정의 축 처진 어깨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말했다.

“……그럼 가르쳐 줄래?”

이정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 버린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은 시간을 헛되게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처음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익숙한 그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요리하는 거, 원래 좋아해?”

“바쁘니까 자주 하지는 못하고, 한 번씩 하는 걸 좋아하지.”

다른 음식을 먹는 걸 보면 입맛이 이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결과물이 이상하게 나오는 걸까.

요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뭐 만들려고 했어?”

“된장찌개랑……. 불고기. 말고도 이것저것…….”

그의 말대로 냉장고 안에는 요리를 위한 재료들이 들어가 있었다. 재료는 딱히 이상할 게 없는데. 밖에서 사 온 재료로 만드는데 왜 맛이 이상한 거지.

“한번 해 볼까?”

“내가 하는 건 싫다고…….”

“그래도 한번 해 봐. 내가 도와줄게.”

예현이 풀이 죽은 이정을 다독였다. 그리고 잠시 후, 예현은 이정의 요리가 왜 문제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걸 왜 강불에다가 해?”

“어? 얼어 있으니까 빨리 녹여야지.”

냉동실에서 꺼낸 양념 불고기를 그대로 강불에 올리는 것을 본 예현이 식겁을 하고 불을 껐다.

“천천히 녹여야지. 냉장실도 아니고 냉동실에서 방금 꺼낸 걸 바로 강불에 올리면 어떻게 해.”

“그게 더 빨리 끝나지 않아? 강불이니까…….”

“그렇게 치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게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 빠른데 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겠어? 빠르다고 다 좋은 게 아니잖아.”

예현의 말에 이정의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일단 이정은 요리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했으면 다 탔을 건데. 항상 강불로 했어?”

“탄다 싶으면 잠깐 껐다가 다시 켜고……. 이건 처음 해 보긴 하는데, 어차피 구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말에 예현이 이마를 짚었다.

“요리마다 달라. 약불, 중불, 강불 다 다르고 해동하고 팬에 올려야 하는 것도 있고……. 정 빨리 하고 싶으면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해동하고 구워야지.”

“그렇구나.”

“계란은 멀쩡하게 구웠잖아.”

“그건 배운 적이 있어서…….”

약불이 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배운 적이 있으면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예현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된장찌개에서 나는 시큼한 맛의 정체를 알게 된 예현이 물었다.

“……그건 뭐야?”

“이거 주석이 형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매실청. 요리에 넣으면 맛있어진대.”

“아니, 맛있어지……”

맛있어지려면 적당히 넣어야지 대체 얼마를 넣으려는 거야. 숟가락도 없이 매실청을 그대로 국에 넣으려던 이정을 말린 예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넣어야지. 이렇게 많이 넣으면 누가 좋아해.”

“주석 형은 괜찮다고 하던데.”

“어머니가 주신 매실청 넣었다고 말했어?”

“말했지.”

예현이 이 괴상망측한 요리를 먹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맛있다고 말했을 주석에게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정말 그렇게 말했는데…….”

그야 제 어머니가 주신 매실청을 넣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 앞에서 맛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지.

“어쨌거나 모든 요리의 요리법이 다 똑같은 건 아니야. 넣어서 맛있어지는 게 있고 안 어울리는 게 있는 거라고. 양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라질 거고…….”

예현이 이것저것 알려 주다 이정을 돌아보았다. 꽤나 집중한 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린 예현이 고개를 숙였다.

“아, 이게 뭐라고 이러고 있냐.”

이 상황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겼다. 자신보다도 더 큰 남자를 붙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고 있는 것도,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이정도.

“아, 진짜 웃겨.”

당장 일주일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더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화가 나지도, 어색하지도, 답답하지도 않고 순수하게 즐거웠다.

“이건 이렇게 하는 것보다 좀 더 기다렸다가 넣는 게 더 좋아.”

아직 예현에게도 익숙한 집에서 두 사람은 약간의 고생 끝에 멀쩡한 식사를 만들어 냈고 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걱정도 없는 것처럼 평범한 이야기를 하던 중 이정이 예현에게 물었다.

“바로 갈 거야? 데려다줄까?”

예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에 가 봤자 할 일도 없는 데다 지금의 이 분위기를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할 것도 없는데 뭐.”

이정의 집에서 나온 후 조금 아쉬운 점 한 가지가 있었다.

그새 취미를 붙여 버린 영화, 드라마 감상. 모르고 있었다면 아무 생각 없었을 테지만 좋은 장비로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 버린 지금은 한 번씩 시어터룸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같이 영화나 볼래?”

예현이 이정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이정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이내 시어터룸으로 향했다.

시어터룸은 예현이 이 집을 떠나기 전과 다를 것 없이 유지되어 있었다. 단 한 가지, 예현이 시어터룸 소파에 걸쳐 두었던 실내용 가디건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태블릿만 잡고 있더니.”

“한번 보니까 계속 보게 되더라고.”

가벼운 농담에 예현이 작게 웃었다. DVD가 꽂혀 있는 책장 앞에 멈춰 선 예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이건 빼놓고 생각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이정이 팔을 뻗어 예현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던 곳을 건드렸다.

“이거 볼까? 나도 오랜만에 한번 보고 싶었는데.”

“……괜찮겠어?”

예현이 의아한 낯으로 이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날 그의 손으로 제자리에 꽂아 두었던 DVD였다.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

네 손으로 버리라고 안겨 주었던, 아직 이정의 가방 안에 들어 있을 그 목도리를 두른 그가 DVD 케이스에 자리하고 있었다.

“응. 이제 괜찮을 것 같아. 부정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찍은 작품인데 외면하는 것도 이제 그만두려고.”

이정이 담담하게 말하며 DVD를 플레이어 안에 넣었다. 방의 불이 꺼지고 기계가 돌아가는 작은 소리와 함께 스크린 위에 화면이 떠올랐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게 의무니까. 얻을 게 없어도, 잃을 것뿐이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게 사람이니까!]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그는 확실히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고 조금 더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

코앞에서 본 27살의 강이정의 연기보다는 조금 미숙한 모습이었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내가 그걸 꼭 알아야 해? 꼭 네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영화가 중반부로 접어들 무렵, 뻐근한 목을 돌리던 예현이 옆자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정이 집중한 채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아 했던 것을 빤히 알고 있는데, 그런 것치고 이정은 꽤 담담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오히려 한껏 집중한 채로 영화를, 자신의 연기를 분석하는 것 같아 보였다.

영화는 알려진 대로 명작이었다. 단순히 이정의 연기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장면 간의 전환, 복선, 연출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영화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한 영화였다.

“어땠어?”

“음.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무겁고……. 재미있네. 너는?”

이야기하고 나서야 이 영화에 출연한 사람에게 영화가 어땠는지를 물어보았다는 것을 깨달은 예현이 멋쩍게 웃었다.

나야 처음 보는 거지만 얘는 아닐 텐데. 이상한 걸 물어봤네. 그렇게 생각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리는데 생각보다 진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좀 아쉽네. 지금 하면 저것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했던 것이, 어머니에게는 그저 싫은 사람의 선물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회의감을 느꼈었다.

화면 속에서 어떻게든 잘해 보려 아등바등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피하던 영화였는데 정작 그 모습을 마주하고 난 감상은 허무할 정도로 담담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기엔 미숙한 모습일 뿐이었다. 겨우 저 정도 노력을 보는 것이 두려워서 여태 피했나 싶을 정도로 별것 아니었다.

“그땐 지금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나 봐.”

이정이 텅 빈 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여태 두려워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까, 그동안 많이 발전한 거겠지.”

이정이 예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가둬 두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 영화를 촬영할 때보다 더 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연기도 이제는 저 영상 속의 모습이 아쉬울 정도로 발전해 있었고 영화 장면 하나만 봐도 두근거리던 가슴도 이제 잠잠했다.

“다 변하는 거구나.”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 목도리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예현은 이정을 만났다.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연기했다.

그걸로 정말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결국 시간은 빠르게 흘러 계약서에 명시된 마지막 날이 되었고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나흘 내내 마주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늘 여유로움을 연기하던 이정의 얼굴이 어두웠다.

“결국 오늘이 왔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마지막 날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예현이라고 어젯밤을 아무렇지 않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밤새 이런저런 생각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쏜살같이 지나간 3개월의 시간을, 그동안 느꼈던 수많은 감정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정리되기는커녕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했다.

어쨌거나 오늘로 계약 기간이 끝난다. 예현이 이정을 보며 말했다.

“3개월 동안 되게 많은 일이 있었네.”

오랜 연인이었던 규진은 미운 마음조차 남지 않은 남이 되었고 평생 살아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좋은 집에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살았다.

이정과 진짜 연인이 되었었고 그의 스토커 때문에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기간이 끝나기 전에 스토커를, 보람을 잡았다는 것이다.

“재판 넘어가면 몇 번 더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계약은 여기서 끝이야.”

예현이 가져온 계약서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계약서에 적힌 오늘 날짜가 정말 끝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됐어. 이제 와서 이야기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울었던 날도 많았지만 더 이상 탓하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낸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만 더 괴로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담담하게 끝내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은 일일 것이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예현의 목소리와 달리 이정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차라리 화라도 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정말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끝을 고하는 예현에게는 한 줌의 감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서면 모두 잊어버릴 사람 같은 모습에 이정이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며칠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정말 모두 잊고 싶은 마음에 담담한 척 연기했지만 사실은 지금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욕심 가득한 제안을 받아들여 준 예현이었기에, 며칠 내내 아무것도 모를 때와 다를 것 없이 평화롭게 지냈었기에 내심 기대를 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 예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끝이라는 걸 기뻐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끝이라는 게 정말 후련하기만 해?”

“너는 어떤데?”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그가 이정에게 말했다.

“나도 궁금했어.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남은 기간 동안 연인을 연기하자고 했을까. 네가 바라는 것이 뭘까…….”

거의 3개월 동안 알고 지낸 이정과 지난 며칠 간의 이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알아줬으면 한다면 네가 직접 말해.”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정이 스스로 말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직접 말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너는 남은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데?”

예현의 질문에 이정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일주일이 어땠냐고. 이정이 그동안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드라마 속 계약 연애의 끝은 다 똑같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땐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솔직히 자신 있었거든. 날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기도 했고 내 마음에 확신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라마처럼, 당연한 해피 엔딩을 맞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카메라 속 주인공으로의 삶에 너무 익숙해졌던 걸까. 거만한 생각을 했었다.

“당연히 우리의 끝도 그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인생에는 대본이 없더라.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어.”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엉망인 사람인 줄도 몰랐다. 겁은 많은데 단지 자신이 겁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상황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로 남 앞에서 강한 척을 했다. 어떻게든 상처받지 않으려 이런저런 장치들을 설치해 놓았다가 걸려 넘어졌다.

“아니지, 이런 건 다 상관없는 것 같아.”

이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그걸 말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지금 예현이 물어본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더 오래 끌고 싶었어. 그것 말고는 붙잡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자존심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그 순간의 두려움을 이기지는 못했다. 이대로 보내면 끝이라는 것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냥 평범하게, 계약도, 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싶었어.”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자신이 티 내지 않으면 예현도 이 연극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괜찮은 척을 해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까, 그렇게라도 알고 싶었어.”

엉망인 요리 실력을 보고 경악을 하던 예현도, 요리에 대한 것들을 알려 주다 이게 뭐냐고 웃던 예현도 좋았다. 1주일 새 휘몰아친 일들 때문에 내내 웃지 못하던 그가 이정의 앞에서 환하게 웃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나를 더 괜찮게 봐 줬으면 했어. 잠깐이라도 나와 함께 있는 게 즐거우면, 그럼 조금이라도 이 관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예현의 말대로, 자신은 배우였다. 그리고 꽤 운이 좋게도 어느 정도의 재능을 타고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것까진 할 수 있겠는데, 부담이 될 걸 알아도 좋아하지 않는 척은 못 하겠더라. 그건 정말 어려웠어.”

그렇게 지내면서 내심, 이대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예현 쪽에서 계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해 봤지만 지금 이 상황은 확실히 이정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망설이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했었다.

“계약 연애의 끝은 다 똑같은 거라고,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던 마음이 남아 있었나 봐. 일주일이 지나면, 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

일주일 내내 밤마다 이정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이름 모를 감정의 정체는 헛된 기대였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이정이 옅게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모르고 있었어. 연애라는 건 나 혼자 숨기고,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거라는 거. 애초에 연애가 되려면 연애의 틀을 갖춰야 하는데 계약에만 매달려서 뭘 할 수 있겠어.”

계약 관계, 그 계약이 성립하게 된 과정에만 급급해서는 계약이지 연애가 될 수 없었다. 이리저리 재는 것은 비즈니스지, 연애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연애를 하고 싶었어. 내가 다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훨씬 행복하더라. 내 지난 일주일은 불안하면서도 행복했어.”

이정이 내내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예현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는 예현이 보였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였으나 예현은 그의 말을 끊지도, 반박하지도 않고 이정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계약 연애는, 계약은 그만두고 싶어.”

이정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종이 가득 지켜야 할 조항들이 적혀 있는 종이가 너무 답답했다.

“그냥 연애를 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계약이 끝나면, 다 끝나는 거니까, 그게 싫어서 지금도 어떻게든 끝을 늘려 보려 애를 쓰고 있는 거야.”

이정이 예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말했다. 이제 무언가를 숨기려고, 강한 척을 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 그래서 그래.”

자신감 넘치던 첫 고백과는 달리 불안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멋있다고 할 만한 모습도,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솔직해 보였다.

대답 없이 이정과 눈을 마주한 예현이 한참이나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예현은 이정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야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긴장이 풀렸다는 듯 환하게 짓는 미소, 그러면서도 웃음이 사라질 때마다 다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태도.

이정이 아직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은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여태 두렵다는 이유로 현실에서 도망치기만 하던 그가 상황을 제대로 마주하기를 바랐다.

그걸 바라게 된 이유는, 예현 역시 이 관계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았다. 언젠가, 어쩌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속고도 또 기회를 주고 싶었냐고,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다며 자신을 탓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규진 때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현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해 보고 후회하고 싶었다. 과거에, 불안감에 사로잡혀 미래를 겁내고 싶지 않았다.

급이 맞지 않는 연애, 기한이 끝난 계약, 이미 한번 파국을 맞이했던 관계. 어려운 조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움직임에 이정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예현은 멈추지 않고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이정이 계약서에 적힌 오늘 날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현의 시선은 그 부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1. 레인즈 컴퍼니는 신예현의 가족(신예서)의 신변과 신상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2. 신예현과 강이정은 서로의 가족, 지인 앞에서도 애인의 모습을 연기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3. 신예현과 강이정은 해당 계약이 효력을 가지는 동안 각자의 애인을 만들지 않을 의무를 가진다.

4. 신예현과 강이정은 서로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을 명시한다.

잠시 그 부분에 머물렀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예현이 찾고 있는 것은 다른 조항이었다.

“계약 연장은 전적으로 내 의사에 맡기겠다고 했었지.”

예현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때 몇 번이고 읽었던 추가 조항이 아닌 그 위에 적힌 계약의 연장에 관한 조항이었다.

처음 이 계약서를 쓸 때, 그들은 이 계약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예현을 알았기에 계약의 끝을 예현에게 맡겼었다.

그때는 절대 이 조항을 눈여겨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세상일이란 참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정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예현이 그런 이정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한 달.”

짧은 말에 이정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예현을 바라보았다. 분명 끝을 고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예현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한 달 연장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이어진 말에 예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챈 뒤에도 이정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대신 조항은 다 지우고 한 가지만 추가했으면 좋겠어.”

예현이 검지를 펴 금액이 적힌 부분과 추가 조항이라고 적힌 곳에다 차례로 엑스를 그렸다. 이번 계약에는 이런 조항이 필요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 것. 무서워도, 걱정돼도 혼자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줘.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순서가 조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현은 이정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싶었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이번 한 달이 끝나고 나면 다시 꺼내자.”

예현이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접힌 자국 그대로 접어 계약서를 봉투 안에 넣은 예현이 이정을 바라보았다.

한 달이 지나고 나면 계약서 따위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 계약은 끝을 맺을 테지만 예현은 왠지 모르게 그 끝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방향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

이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예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고장 난 듯 멈추어 있던 그가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은 이정이 웃었다. 웃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언젠가는 또 다른 끝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그런 것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할게. 정말, 절대 거짓말도 안 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정이 예현에게로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예현을 품에 안은 이정이 말했다.

“계약이 아니라 연애가 될 수 있도록, 계약이 끝날 수 있게.”

계약이 끝나면, 이 이야기는 정석을 향해 갈 것이다. 아직은 그 결말을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지만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더 잘할게.”

이정이 예현을 꽉 끌어안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예현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 예현을 끌어안고 있던 이정이 그를 놓아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예현도, 이정도 울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약서를 뒤로한 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그래서, 오늘은 병원 가려고?]

“어. 이번 주까지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었나?”

이정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말했다. 긴 휴가도 이제 슬슬 끝이 날 때가 왔다. 이정의 상태로 인해 밀린 대본 리딩 날짜가 새로 잡혔고 텅 비어 있던 스케줄란이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다음 주부터는 지금보다 바빠지겠지만 분명 이번 주까지는 별 스케줄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세웠다.

[그렇긴 한데……. 뭐 좀 부탁하려고 했지. 급한 건 아니니까 일 있으면 됐어.]

“뭐 시킬 거면 미리 말 좀 하고 시켜. 어쨌거나, 나 바빠. 끊는다.”

[그래. 예현 씨 잘 데려다드리고.]

차를 자리에 주차한 이정이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예현이 깁스를 푸는 날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피지컬에 병원 안의 사람들이 이정을 힐긋거렸다. 신경이 쓰일 법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현이 있을 정형외과로 향했다.

“왔어?”

“드디어 깁스 풀었네.”

반바지를 입은 예현이 이정을 반겼다. 오랜만에 빛을 보게 된 오른쪽 다리가 유독 새하얘 보였다.

“경과도 괜찮다고 하고, 당분간 무리하지만 않으면 일상생활 하는 데 문제없을 거래. 날씨도 슬슬 더워지는데, 완전히 더워지기 전에 풀어서 다행이지.”

예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도 해가 쨍쨍한 날이면 땀이 살짝 맺힐 정도로 더운데, 한여름에 깁스를 하게 됐다면 분명 더 끔찍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맨다리라 그런가, 좀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추워? 빨리 집에 가야겠네.”

“농담이야.”

예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잠시 후, 수납을 마친 예현이 이정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두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단지 깁스를 풀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한 달간의 연장 기간이 끝나는 날. 즉, 두 사람의 계약이 완전히 끝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차피 공개 연애인데 뭐 어떠냐며 모자 하나로 얼굴을 숨기고 밖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는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이정을 알아본 팬들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순간도 있었지만 스토커 사건 이후로 그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자는 의견이 주류가 된 덕에 크게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어느새 계약의 존재가 희미해졌으나 아직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두 사람이 탄 차가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금방 돌아갈 수 있겠지?”

“응. 이번엔 거기까지 가는 게 아니니까.”

두 사람의 목적지는 바다였다.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의 바다. 원래는 예현의 이모가 있는 그 바다로 가려 했었지만 예현의 내일 출근을 생각해 포기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에게 바다는 의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둘은 이 계약을 끝내는 장소를 바다로 정했다.

“날씨 좋네.”

“그러게. 비라도 오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예현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불안해하지 않네.”

예현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살짝 흠칫했던 이정이 피식 웃었다.

“놀리지 마.”

두 사람이 걸음을 나란히 하며 바닷가를 걸었다. 한참을 걸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을 만한 부둣가에 도착한 두 사람이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늘로 계약은 끝이야.”

예현이 봉투 속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이어서 이정의 계약서를 건네받은 예현이 이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할 건지, 안 물어봐?”

“무서워서 물어보기 싫은데.”

이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예현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보는 것은 아직도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불안해도 지켜보는 수밖에.”

“그래?”

피식 웃은 예현이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불을 붙인 예현이 계약서가 타들어 가는 것을 보다 그것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이제 계약은 없는 거야.”

계약 연애에서 계약을 깔끔하게 지워 버린 예현이 이정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정에게 더 이상 바다는 기억하기 싫은 곳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바다에 올 때마다 예현의 웃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예현은 더 이상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이정이 자신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계약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 과정 같은 것도 아닌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일 뿐이었다.

완벽한 연애는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화를 내며 싸우는 날이 찾아오게 될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연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계약연애의 정석> 본편 完.

계약연애의 정석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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