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정이 이정을 찾아온 이유는 명쾌했다. 어머니의 새로운 애인이 배우라 그 산업에 투자를 좀 해 보려고 하는데, 가장 가까운 연예인이 아들이라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하셨다는 거다.
와중에 제 애인을 챙기느라 자신의 생일을 기념한 자리에도 오지 않은 아들에게 빈정이 상해 딸을 보낸 것이었다.
그래 뭐, 살가운 이유로 부른 게 아닌 줄은 알았지만 애인을 돕겠다고 자식들에게 정보를 구하는 어머니라.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럼 됐지? 이런 별거 아닌 일로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는데.”
“다른 사람 일도 아니고 어머니 일이니까. 내가 어머니에겐 유독 관심이 많잖아?”
유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이정이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겨우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예현의 얼굴도 못 보고 이러고 있다니. 타이밍도 참 거지 같네.
“넌 똑똑하긴 한데, 참 웃겨.”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바라보고 있던 이정이 유정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부분에선 영리하긴 한데, 널 보고 있자면 가끔은 머리가 너무 많이 돌아가는 것도 문제이긴 문제구나, 싶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유해진다고는 하던데, 벌써부터 강유정이 저런 실없는 소리를 할 때가 됐나. 이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난 네 생각보다 너한테 관심이 없거든. 네가 회장님 눈 밖에 난 이상 뭐……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새삼스럽게.”
“오히려 똑똑하게 알아들어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너한텐 꽤 유하게 대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박채준, 박채혁에 비해서야 그렇겠지만 그게 뭐? 이정이 유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까딱였다.
“뭐, 됐어. 그 꼴을 보고 있는 것도 꽤 재미있으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지.”
“그래.”
이정이 핸드폰 액정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가 조금 넘은 현재의 시간, 그리고 예현에게서 온 메시지 한 통이 잠금 화면 위에 떠 있었다.
[현이 형♡ : 나 지금 카페 네 뒷 자리에 있어.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자. 오후 12 : 14]
뒷자리? 이정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잠시만.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저기요.”
이정이 카운터의 직원에게 다가갔다.
“네. 고객님. 혹시 불편한 것 있으신가요?”
직원이 카페에 머무르는 내내 마스크 한 번 벗지 않고 음료에는 입도 대지 않은 고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혹시 제 뒷자리에, 목발 짚은 남자 손님이 앉아 있었나요?”
설마, 설마. 이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카운터와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테이블은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평범한 고객도 아니고, 목발을 짚은 고객이었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아, 네. 앉아 계시다가 한 10분쯤……?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혹시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 아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안색이 파리해진 이정이 카페를 뛰쳐나갔다.
유정과의 대화를 다 들었을까? 들었다면, 왜 화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나 버린 걸까.
10분 전, 10분이 아니라 20분 전에 떠났더라도 자신이 예현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두 들었을 터였다.
“헉, 허억…….”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이정은 현관문 앞에 멈춰 선 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뛰어왔는데, 정작 문을 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문을 열고 나서 마주하게 될 예현의 표정이 두려웠다.
“…….”
이정은 한참 동안 문을 열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정이 손도 대지 못한 문고리가 철컥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
덤덤한 표정의 예현이 이정과 시선을 마주했다. 운 것 같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목발을 짚은 채로 백팩 하나를 맨 예현이 집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올 때 가져온 짐에 비해서는 단출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집을 나가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리도 불편하잖아.”
차마 카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묻지도 못한 이정이 가만히 예현의 목발을 잡았다.
“우선 들어가서 좀 쉬다가……”
“왜?”
예현이 그런 이정의 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화가 난 것도,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질문 같았다.
“불쌍해서?”
예현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이정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니길 빌었는데.
“아니야. 애초에 다, 다 거짓말이었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정은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홀린 듯이 말을 이어 갔다.
“누나가, 누나가 형에게 관심을 가질까 봐. 그럼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예현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도 없었다.
“비켜. 난 할 얘기 없어.”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데, 지금까지도 그의 말을 믿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왜, 왜 없는데? 화라도 내. 차라리 때려. 왜 할 말이 없다는 건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라도 물어봐야지.”
“…….”
“왜 그랬는지, 진심인지, 그런 거라도 물어봐야지. 이렇게 그냥 가 버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
이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 화라도 내 주길 바랐다.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차갑게 구는 것이 더 보기 괴로웠다.
“궁금하지 않은데, 왜 물어봐야 하는데.”
“……왜 궁금하지 않은데?”
이정이 예현에게 물었다. 목발을 잡은 이정의 손을 떼어 낸 예현이 말했다.
“네 말, 틀린 거 하나 없으니까.”
“뭐?”
“가짜 애인인 것도 사실이고, 너랑 급도 안 맞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인데. 내가 굳이 그걸 따지고 들어야 하냐고.”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불안해진 이정이 말했다.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헛소리한 거야.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도 화를 내야지. 왜 맞는 말이라는 소리를 해.”
“지금 네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이정을 바라보던 예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울어야 할 것은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이정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다. 나름대로의 철칙을 지키던 스토커는 예현을 계기로 선을 넘었고, 덕분에 경찰과 대중의 관심이 이 사건으로 쏠렸다.
조금이라도 의심 갈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은 전수조사 대상이 되었다고 하니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엔 복수심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그에 대한 애정으로. 다리가 부러지고도 멍청하게 남부터 걱정했던 나야말로 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됐잖아. 스토커도, 내 마음도.”
“아냐.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그럼 웃어야지. 이제 같잖은 연극 할 필요도 없으니 더 즐거워야 하는 거 아냐?”
예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냐. 제발. 설명할 기회라도 주면 안 될까.”
이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두 눈 가득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예현이 울지 않는데, 자신이 그 앞에서 울어 버릴 자격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은 이정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예현의 말에, 이정은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얘기를 다 들었는데도 네가 진심인 걸까 생각하게 되는 걸 보니까 네가 왜 국민 배우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조소가 섞인 말에 눈물 한 방울이 이정의 발치에 떨어졌다. 예현은 이정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듣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나갈게. 내가 불편한 거면 내가 나갈게. 아직 스토커도 안 잡혔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위험하잖아.”
“네가 이 집에 없어도 난 여기서 나갈 거야. 네가 없다고 여기가 네 집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예현의 말에 이정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짐이라도 옮겨 주게 해 줘. 목발도 짚고 있는데, 짐까지 들고 가기는 너무 힘들잖아.”
“정 내가 불쌍하면, 남은 짐이나 택배로 보내 줄래?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냉랭한 목소리로 말한 예현이 이정을 지나쳐 갔다. 이번에는 이정도 떠나는 예현을 붙잡지 못했다.
“예서 있는 방도 조만간 비우게 할게.”
감정 한 자락 담기지 않은 말을 마지막으로 예현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예현이 집을 떠난 이후로도 이정은 한참이나 제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정은 겨우 비밀번호를 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
식탁 위에는 카페 옆 편의점의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이걸 사러 왔다가 본 건가.
오는 길에 사 오라고 하지, 아니면 차라리 시켜 먹자고 하지. 몸도 불편한 사람이 날 위해 그 다리를 이끌고 거기까지 왔다가 그 꼴을 보고야 말았구나.
이정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하…….”
내가 강유정 앞에서 뭐라고 말했더라. 이정이 똑똑한 머리로 한 시간 전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예현이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목을 졸라서라도 그 입을 막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회상의 끝에는, 유정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 있었다.
‘넌 똑똑하긴 한데, 참 웃겨.’
‘어떤 부분에선 영리하긴 한데, 널 보고 있자면 가끔은 머리가 너무 많이 돌아가는 것도 문제이긴 문제구나, 싶다고.’
무슨 실없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지금은 유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박규진과 주서연을 들쑤셔서까지 예현의 상처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예현은 계약에, 이정과의 관계에 충실했을 것이다.
강유정의 앞에서 예현을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도 없었다. 강유정은 스스로 했던 말처럼, 자신이 후계 경쟁에서 나가떨어진 이후로, 어머니의 일을 제외하고는 이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현이 정말로 자신의 연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별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저 재미있는 짓을 한다며 한번 키득거리고는 잊었을지도 몰랐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자신이 겁쟁이이기 때문이었다.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그리고 누군가를 괴롭게 만드는 결정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 지킨 것, 얻은 것이 예현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던가?
차라리 멈추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라도 그게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후다. 이정은 덩그러니 놓인 비닐봉지 하나만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
“하…….”
예현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빈집털이 사건이 있었던 이후 처음으로 돌아온 집이었다.
그날, 주석과 재련의 도움을 받아 집을 대강 치우고 나오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방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어도 그 집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예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 위로 던졌다. 급한 대로 꼭 필요한 짐만 챙겨 집으로 돌아오기로 정한 것은 꽤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사귀기 전, 그렇게나 불안해했던 것과는 달리 이정과 함께 있는 것은 즐거웠다. 예현을 힘들게 하던 규진에 대한 것을 모두 잊을 수 있었고 앞으로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나 행복이 무색하게도 두 관계의 결말은 너무나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급이 맞지 않는 관계라는 것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같은 일도 두 번이면 당한 사람도 멍청한 거라던데, 얼마나 됐다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닮았네…….”
규진의 말이 그랬듯, 이번에도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규진보다도 더 급이 맞지 않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이정은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다.
외모도, 능력도, 지금까지 쌓아 온 것도. 모두 예현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게, 하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기는 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이정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현은 머릿속을 비운 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방 정리를 마친 예현이 가방 안에 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노트북, 자주 입는 옷 몇 벌, 그리고…….
“버리지 않길 잘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챙긴 계약서가 예현의 손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예서한테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예서까지 지금 데려오기는 조금 찜찜한데, 마지막 부탁이라고 예서만이라도 그쪽에 있게 해 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예현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현이라고 충격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당연한 거야. 애초에 뭘 기대한 거야?
방어기제 같은 생각이 겹겹이 쌓여 현실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이정에게 화를 내고, 이 상황에 의문을 가지게 되면 그게 더 못 견디게 힘들 것 같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예현이 그렇게 되뇌며 남은 짐을 정리했다.
그런 다음에는 거실부터 예서의 방까지 청소기를 돌리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여기저기 쌓인 먼지를 닦았다.
뭐라도 할 일이 있어야 머릿속을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할 일은 바닥나고 말았고, 예현은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자신의 집이 아닌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았는데, 겨우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떠나 있었다고 이렇게 낯설다는 것이 신기했다.
집을 떠난 지는 겨우 한 달, 그리고 이정을 만난 지는 겨우 두 달이 지났는데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가, 무서웠다가, 화가 났다가…… 또, 행복했다가.
그리고 다시 바닥이었다.
“하…….”
이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일이나 하고 싶었던 건데. 당장 내일부터도 일주일씩이나 할 일이 없는데 그럼 그동안 계속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예현이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뭐든 잘 해결될 것 같았고, 이정이 돌아오면 같이 점심을 먹으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다.
뛰어난 배우, 천의 얼굴이라는 것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얼굴에는 속았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걱정하는 것 같은,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으면서.
거칠게 다뤘다가는 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히, 다정하게 대해 줬으면서.
‘덕분에 동정 여론도 생기고, 경찰들도 더 집중해서 수사하고 있고…… 얻은 게 많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다쳤을 때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네. 자신이 대신 다쳤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말도 다 거짓말이고 연기였던 거구나.
생각이 많아지자 그제야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당장 이정의 집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시간을 죽여 왔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다 들켰으면 마지막 순간이라도 뻔뻔하게 굴었어야지. 왜 마지막까지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기를 했는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내가 나갈게. 내가 불편한 거면 내가 나갈게. 아직 스토커도 안 잡혔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위험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떨어트린 눈물방울이 마치 진심인 것 같아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정말 오해라고 믿고 싶어졌다.
눈앞에서 자신을 비웃는 것을 보고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이정이 정말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멍청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려나.
눈앞에서 본 것도 믿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그렇게 울며 나를 위하는 척을 한 건 아닐까.
“하긴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스토커가 잡힌 건 아니니까, 좀 더 이용해 먹을 구석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지.
눈물은 흐르지 못한 채로 한참이나 예현의 눈가에 머물렀다.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던 예현이 일어난 것은 해가 다 저문 시간이었다.
예서에게 연락도 해야 하고, 남은 짐이 있으니 싫어도 며칠 내로는 이정에게 연락도 해야 할 테고, 남은 일이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일주일만이라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스토커가 잡히지 않은 지금, 집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예현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일단 복잡한 건 내일 생각하자.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지잉- 지이잉-]
예현이 점심때부터 간헐적으로 울리던 핸드폰을 끝내 확인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예서 : 오빠 왜 전화 안 받아? 낮잠이라도 자는 거야? 나 심심행 오후 4 : 59]
[김재하 씨 : 예현 씨 퇴원 했어요?? 오후 7 : 18]
[김재하 씨 : 잡힐 때 까진 연락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너무 걱정 돼서....ㅠㅠ 오후 7 : 18]
[김재련 이사님 : 예현 씨. 집으로 돌아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오후 8 : 01]
[김재련 이사님 : 시간 괜찮으실 때 연락 한 번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후 8 : 01]
[김 과장님 : 신 사원. 경찰들이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 오해야. 그 놈이 내 핸드폰을 뒤져서 신 사원 정보 털어간 거라고 오후 8 : 21]
[김 과장님 :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네. 나 믿지? 내가 어디 부하 직원 정보 빼돌리고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어? 오후 8 : 22]
[김 과장님 : 푹 쉬고 와서 보자고. 내가 그 놈하고는 아주 연을 끊든가 해야지. 아주. 오후 8 : 22]
자고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여러 사람들의 연락이 핸드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몇 통의 부재중 전화와 알림창을 가득 채운 문자가 비몽사몽한 예현의 정신을 깨웠다.
그러나 매일같이 잘 잤는지, 뭐 하고 있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를 물어봐 주던 다정한 연인은 아무런 연락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하긴, 이제 공들여 연기할 필요도 없는데 굳이 연락할 것도 없지. 예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문자가 오면 또 바보같이 휘둘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
별것 아닌 기호 하나가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까. 잠시 그 화면을 바라보던 예현이 끝내 이정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예현은 천천히 쌓인 문자에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련에게는 아무런 답장도 보낼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다 알아 버렸다고? 여태 착각한 게 쪽팔려서라도 더는 못 하겠다고? 위약금이고 뭐고 알아서 하라고?
날이 선 말들이 예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예현은 한참 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한 채 망설이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 쉽게 답장을 보냈는데, 이번엔 답장을 보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예현이 답장을 망설이는 동안,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의 속이 타들어만 갔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언제까지 입만 다물고 있을 거냐고.”
재련은 속이 터져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현이 퇴원도 했겠다, 이정의 스케줄도 당분간은 널널하겠다. 축하한다고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에 당황해 이런저런 농담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침울하기만 했다.
아무 일도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일도 없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찾아왔더니 예현은 집 안에 없었고 이정은 입을 꾹 다문 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현 씨도 연락 없고, 너는 눈앞에 있어도 아무 말이 없고. 지금 나하고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예현 씨 집이라도 찾아가서 물어봐야겠……”
“안 돼.”
내내 입을 다문 채 아무 반응이 없던 이정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절대 안 돼. 연락하지 마.”
이정이 급기야 팔을 뻗어 재련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눈 깜짝할 새 핸드폰을 뺏긴 재련이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쯧, 혀를 찼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하라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뭐 어쩌자는 건데?”
“…….”
이정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재련은 저 꾹 다물린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대답을 듣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겨우겨우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말을 해. 일단 말을 해야 같이 해결을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니냐고.”
“말을 한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아니다. 아니야.”
이정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강유정이 왔었어.”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괜히 예현에게 연락 갈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정은 결국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강유정한테 내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괜히 센 척을 했어. 가짜 애인이라느니, 급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느니.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 가면서 별 지랄을 다 했는데……”
“뭐?”
유정이 찾아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정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더 놀라웠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굴더니 그런 소리를 했다고.
이정이 유정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재련마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뒤에서 다 들었더라고.”
“……진심이었어?”
재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예현을 대하는 이정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정은 몇 년을 보고도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지 않을 때가 있었기에 불안했다.
이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허탈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이정이 말했다.
“내가 형을 대하는 게, 진심이 아닌 것 같았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을 했다니까……”
보통 그런 이유로 사귀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지. 재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도 그렇게 말할 정도니까, 예현이 형이 그걸 다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이정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바닥 중의 바닥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한마디 화도 내지 않고 그대로 나가 버린 거겠지.”
“어디로 갔는데. 본인 집?”
“아마도.”
“너 설마, 그렇게 보내고 연락 안 했어?”
재련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자존심 때문이야? 그딴 게 뭐라고…….”
“자존심? 여기까지 와서 자존심 같은 게 왜 필요해. 그런 거였으면 이미 몇 번이고 붙잡았겠지. 무릎 꿇고, 몇 시간이고 울면서 붙잡았으면 됐지!”
이정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본인 스스로에게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이정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예현을 떠올렸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차마 그 앞에 엎드려 비는 것조차 바라서는 안 될 것 같은 모습에 이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현을 보냈다.
“연락을 하는 것도 미안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정을 스무 살부터 봐 온 재련도 처음 마주하는,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진정해.”
재련이 한숨을 쉬며 이정의 등을 두드렸다. 늘 기분 나쁠 정도로 여유롭던 놈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보고 있는 입장에서도 그닥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낼 건 아니잖아. 끝내더라도…… 제대로 끝내야지.”
좋은 모습은 아니더라도 최악의 모습으로 끝내지는 말아야지. 재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 전에. 이대로 끝낼 생각이야?”
평소의 이정 같았으면 미련 없이 포기하거나, 혹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매달리는 게 정상일 텐데.
재련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이정에게 물었다.
“……그건.”
그건 싫어. 이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예현에게 변명을 하는 것도, 용서를 비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예현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예현 씨도 언제까지나 연락을 무시하진 않겠지.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재련도 예현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았다. 당장은 연락이 되지 않더라도 기약 없이 상황을 회피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진정부터 해. 이러고 있는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놓치기 싫다며. 그럼 정신 차려야 할 거 아냐.”
재련이 이정을 타이르며 말했다.
지잉-
그때, 이정이 가지고 있던 재련의 핸드폰이 작게 울렸다.
“그리고 그건 이제 돌려주라. 중요한 연락 올지도 모르는데 애도 아니고 그걸 뺏어 가면 어쩌자는 거야.”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이정이 이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작게 한숨을 쉰 재련이 핸드폰 화면을 켜 조금 전 울린 알림의 정체를 확인했다.
“…….”
겨우 표정을 관리한 재련이 슬쩍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예현 씨 :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저도 잘 모르겠으니까 오전 11 : 47]
예현이 보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말투였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이 심각한 것 같았다.
“……잘될 거야. 그러니까 안 어울리게 그런 표정 하고 있지 말라고.”
재련이 이정을 달래며 말했다. 그러나 정말 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는지는 재련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현 씨 지금 몸도 불편하고, 그 미친놈도 곧 잡힐 거란 생각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혼자 두면 안 되잖아. 아니, 하다못해 그 집에 두면 안 되지.”
“차라리 내가 나가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싫다더라.”
나랑 관련된 모든 게 싫다던데. 이정이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하아…….”
산 넘어 산이다. 재련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
[김재련 이사님 : 이야기 전해 들었어요. 예현 씨 마음 이해합니다. 마음 진정되면 연락 주세요. 오후 1 : 21]
무슨 보호자도 아니고. 예현이 재련의 문자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괜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지금 자신이 남 걱정이나 하고 있을 만한 때는 아니었다.
예현은 재련의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고 그와의 채팅창에서 나가 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 하루가 지나가는 동안 예현은 명아, 재하, 보람, 석찬이 있는 단체방에 다시 초대를 받았다.
스태프들도 다 조사를 받았고, 개중 몇몇은 좀 더 집요하게 질문을 받았었다고 한다.
[김재하 씨 :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거 아니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는데 진짜 무서웠던 거 있죠? 살면서 경찰이랑 그렇게 길게 대화해본 것도 처음이라고요. 오후 6 : 12]
재하가 툴툴거리며 연락을 보냈다. 최근 예현과 가깝게 지낸 네 사람 역시 수사망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재하는 퇴원도 했는데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했고 예현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당분간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예현은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재련에게 답장을 보냈다.
[뭐가 궁금하신지 잘 모르겠는데, 남은 짐도 있으니 한 번은 만나야 될 것 같습니다. 오후 1 : 15]
[택배로 보내주시는 게 좋긴 하지만, 정 남은 이야기가 있으면 짐 받으면서 이야기 할게요. 오후 1 : 15]
문자를 보낸 예현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급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김재련 이사님 : 3시쯤 괜찮으신가요. 오후 1 : 19]
답장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예현은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이정이 직접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그의 대리인, 혹은 보모나 다름없는 재련이 대신 오겠지.
그가 오면 예서의 거처에 대한 것도 이야기해야 할 테고, 아직 일주일 남짓 남은 계약 기간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지.
예현이 한숨을 쉬곤 다시 단체방에 들어갔다.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방 시간이 흘렀고, 3시를 5분 앞둔 시간. 예현은 집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문을 향해 다가갔다.
“왔으면 왔다고 문자라도 주시지 왜……”
당연히 재련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던 예현이 문 앞에 선 사람을 보고 당황했다.
“…….”
예현이 조용히 이정을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긴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정이었다.
“짐…… 최대한 챙겨 온다고 챙겨 왔는데, 내가 빠트린 게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됐어.”
예현이 이정에게서 캐리어를 빼앗아 들다시피 하며 말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지만 이정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따위 상관없을 만큼 짜증이 나기만 했다.
예현이 캐리어를 잡아끌려고 하다 목발을 헛짚어 휘청였다.
“아!”
“괜찮아?”
이정이 빠르게 손을 뻗어 앞으로 넘어지는 예현을 붙잡았다.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눈을 깜빡이던 예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정을 밀어냈다.
“왜 네가 왔어? 이번에도 이사님이나 보내지.”
“……우리 둘의 일인데, 당연히 내가 와야지.”
이정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인지, 눈 밑 가득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괴로움의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예현은 그 모습을 믿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얼굴도, 소중하다는 태도도 얼마든지 거짓으로 지어 보일 수 있는 사람인데 겨우 저런 것이 어려울까.
“난 더 이상 너랑 할 얘기 없어.”
“난……!”
예현의 말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정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정이 말했다.
“진심으로 했던 말이 아니었어. 믿기 힘든 말이라는 거 알아. 들으면서 미친놈이라고 욕을 해도 좋고, 한 대 치고 싶으면 쳐도 좋아.”
“…….”
“그래도, 잘못 알고 있는 대로 끝내고 싶진 않아. 아니, 나는……”
끝내고 싶지 않아. 이정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없는 예현을 잠시 바라보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입장에서 내가 미친놈이라는 거, 나쁜 놈이라는 거 부정하진 않아. 난 그냥…… 무서웠어.”
이정이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뒤늦게나마 숨기고, 가장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처음엔 그랬어. 형이 이 관계를 수락한 건 박규진 때문이니까. 박규진이 형을 좀 더 자극하면, 그럼 형이 이 계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
예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그랬다고.
“내가 너한테 그렇게 믿음을 못 줬어? 계약서에, 위약금 조항까지 걸어 두고도 그런 걸 보니 어지간히 못 미더웠었나 보네.”
“아냐. 형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래서, 나중엔 그것보다 널 좋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날 좋아하는 연기까지 해 가면서 내가 계약에 충실하길 바랐던 거야?”
예현이 이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못 믿을 사람을 상대로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을 정도라니 대단하네. 하긴, 연기라고 생각하면 키스도, 포옹도 다 쉽게 할 수 있을 테니 그 정도는 일도 아니려나.”
“아니야. 그건……”
“너한테 나, 네가 작품 활동 하면서 만난 상대역 배우들과 다를 거 하나 없는 사람이었던 거잖아.”
예현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페의 창문 아래로 봤던, 저 멀리 겹쳐지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다른 점이 없는 건 아니지. 그 사람들은 적어도 네가 연기하고 있다는 건 알았잖아.”
예현이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돈은 웬만한 탑배우들 출연료 섭섭하지 않게 받았으니까 그걸로 위안이라도 삼아야 하려나?”
“아냐. 박규진 쪽을 자극한 건 맞지만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한심한 이정이었다. 그렇지만 예현이 자신과의 일을 연기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니. 그게 네 직업이잖아.”
예현이 담담하게 이정의 말을 맞받아쳤다.
“어떤 사람을 대하든 대본대로,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게 네 직업이잖아. 내가 네 직업이 뭔지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냐.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굳게 닫힌 예현의 마음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쉬운 일일 거라 생각하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랬어. 어차피 남이라고 생각했고, 사람은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이유 없이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같이 지내면서, 점점 같이 지내는 게 즐거웠어.”
이정이 밤새 정리한 말을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여태껏 만나 오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어. 그냥 형이라는 사람이 좋다는 걸.”
덤덤하면서도 이따금씩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귀여웠다. 아닌 척하면서 던지듯 건네주는 따듯한 말이 좋았다.
어른스럽게 굴면서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주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던 것이 좋았다.
예현이 이정과 만나며 규진을 잊었듯, 이정 역시 예현을 만나는 동안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를 잊었다.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예현이 말했다. 저런 얼굴로, 저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다 알면서도 또 속아넘어 갈 것 같았다.
“내가 그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네가 확실히 해 준 덕에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냐.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내 친누나인데…….”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이정이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을 헤집어 할 말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예현은 그런 이정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아. 더 듣고 싶지도 않고. 나한테 최소한의 미안한 감정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냥 나가 줘. 남은 이야기는 이사님이랑 할 테니까.”
예현이 이정을 문으로 밀어냈다.
“번호 차단했으니까 앞으로도 연락하지 말아 줘. 내가 정말 불쌍하면 이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잠깐…….”
당황한 채 뒤로 살짝 밀린 이정이 예현의 팔을 붙잡았다.
“하나만, 하나만 알아 줘. 그날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미친놈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평생 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아.”
“…….”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말해야만 했다. 밤새 다듬었던 변명도, 상황을 정리하는 말도 다 쓸모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더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말해야만 했다. 이정이 예현의 손을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형은 절대, 불쌍한 사람이 아니야. 급이 떨어지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아니. 급이 떨어지는 건 나야.”
예현이 규진의 어떤 점 때문에 힘들어했는지 빤히 알고 있는데 그런 말을 했다.
“형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멋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리고,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뒷말을 잇지 못한 이정이 억지로 웃었다.
“내가 미친놈인 거니까 그 말은 그냥 잊어버려.”
다른 건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되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진심이야.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서 집은, 일 다 정리될 때까지 그대로 둬도 돼. 카드키도 그때 돌려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는데, 정작 예현의 앞에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안해.”
이정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예현의 집을 떠난 이정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예현이 길게 한숨을 쉬며 현관 앞에 앉았다.
이정이 싫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럼 영원히 나쁜 사람으로 있어야지, 왜 자신이 더 상처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걸까.
“차라리 박규진이 양반이라는 생각을 하는 날이 오네.”
피식, 헛웃음을 짓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끝이다.
더 이상 이정의 넓은 집, 그 집에서 그나마 좁은 편인 제 방으로 돌아갈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정의 괴상한 요리를 먹지 않기 위해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어 주방으로 향할 일도 없을 테고, 주말 늦은 아침 방에서 나와 이정의 신발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일도 없을 거다.
언젠가 다시 사람 없는 바닷가에서 모자나 마스크 없이 바람이나 실컷 쐬고 오자던 약속도, 이따금씩 상상해 보곤 하던 덧없는 미래도 끝이다.
“…….”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른 눈이 어색했다. 예현은 현관에 다리를 뻗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틱-
예현의 움직임에 불이 켜진 현관 센서등이 예현의 눈가를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
이정이 인생에서 이토록 큰 절망감을 느껴 본 것은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처음으로 느낀 절망감이,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던 허무함이 너무 싫었기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겹겹이 벽을 쌓았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믿으면 안 돼. 확실한 약점을 쥐고 있거나, 아니면 서로 주고받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해.
똑똑한 머리와 뛰어난 연기력을 타고난 이정에게 세상은 쉬웠다. 이렇게 하면 날 좀 더 믿겠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면 내게 더 의지하겠지. 보험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해 두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었고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 따위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행동해서 결국 일이 어떻게 됐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심했다.
자신은 똑똑한 게 아니라, 그저 겁쟁이였을 뿐이었다. 강유정과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직도 그 상황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정의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함께 내보였던 강한 척이 예현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스웠다.
“…….”
이정은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예현의 집까지 갔었지만 결국 준비했던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만 했다.
굳은 얼굴, 낯선 목소리의 예현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 행동에 따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생각해 봤던 모든 상황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이 공기를 통해서 느껴졌다.
차를 운전하며 막연하게 생각했던 끝과 지금은 너무나도 달렸다.
전화를 걸면 ‘문자로 하지.’라고 말하며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던 다정한 목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을 것이었다.
심심할 때면 소파에 앉아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리고, 요리는 자신이 하는 게 편하다며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흔적이라고는 건드리지 못한 편의점 비닐 봉투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현관에서부터 자신을 반겨 주는 사이즈가 다른 신발 한 쌍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왔어?’ 하고 물어봐 주던 작은 머리도 이젠 없었다.
한 사람이 없어졌을 뿐인데,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인데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집이 어색했다.
매일 거실, 부엌, 제 방 세 군데만 돌아다니는 거냐고 핀잔을 준 것이 무색하게도 집 안 곳곳에 예현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끝이란 그런 거였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익숙한 순간들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로 사라져 버리는 것.
지이잉- 지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전화기가 울린 것이 몇 번째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화가 올 사람이라고는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굳이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젠 뭐가 뭔지 구분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정은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쓸려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정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예현의 방이었다. 이 방에서 예현의 짐을 하나하나 챙겨 캐리어에 넣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이 캐리어를 가지고 예현이 다시 이 집으로 들어오는 날을 상상해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어떻게 그런 상상을 했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정은 무언가에 홀린 듯 예현의 방이었던 방을 뒤엎기 시작했다. 무언가 하나라도 찾으면, 미처 챙기지 못했던 물건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핑계로 예현을 찾아가고 싶었다.
예현을 찾아갈 이유가 필요했다. 이정은 침대 아래, 책상 서랍 하나하나까지 전부 뒤져 가며 예현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짐을 챙길 땐 무언가 남겨 둬야 예현을 찾아갈 핑계가 생긴다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멍했었다.
그 와중에도 어지간히 꼼꼼히도 챙겼는지, 예현의 방 안에는 남아 있는 예현의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이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절망감과 허무함이 다시 이정을 덮쳤다.
“하하하…….”
이정이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갈 때까지만 해도 무릎 꿇고 울며 빌어 보기라도 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는데 정작 사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온 이정이었다.
그 앞에서 울면서 빌었으면, 그럼 예현이 그걸 믿어 주기는 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카페 안에서, 예현에게 이정이 낯선 사람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예현은 이정에게 낯설었다.
띠띠띠띠-
멀리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정은 엉망이 된 예현의 방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전화는 왜 안 받아?”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렇게 사색이 된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이정이 아무렇지 않게 거실 테이블 위로 걸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 재련 형(7)]
[부재중 전화 : 주석 형(15)]
“많이도 했네.”
“그게 할 말이냐?”
주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남은 짐을 가져다주러 가겠다더니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도 안 되고, 그럴 놈은 아니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집까지 달려왔더니 생각보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한 듯 눈 아래가 퀭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나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정리하고 오기라도 한 건가? 주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괜찮냐?”
“……글쎄.”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내가 예현 씨한테 연락해 볼까? 스토커 관련해서 들은 얘기도 있고…….”
“뭐?”
주석의 말에 이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스토커, 그래. 스토커가 있었지.
그 미친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뭔데. 대단한 건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까 뭔지부터 말해.”
“그, 그러니까.”
주석이 당황한 채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정이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자 무서웠다.
“별건 아냐. 스, 스태프들 대부분이 그 사건 관련해서 조사를 받았는데……. 몇 명은 여러 번 불려 갔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끝인 줄 알았는데……. 어제 세 사람만 또 따로 불려 가서 조사를 받았다길래. 정말 스태프들 중에 범인이 있다면 수사에 진척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주석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경찰을 통해 들은 것이 아닌, 자신의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직 예현에게도 들어가지 못했을 정보였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
이정이 무서운 기세로 주석을 다그치며 말했다. 그 기세에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주석이 급하게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주석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정말 그 사람들이 세 번이나 불려 갔다고?”
“그래.”
뜻밖의 이름을 들은 이정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 한 매니저랑 보람 씨, 그리고 찬우 씨. 이렇게 세 명이 또 불려 갔대잖아. 촬영장 분위기 뒤숭숭해서 진짜…….”
주석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찬우 씨라면 보조감독 중에 머리 색 특이한 사람 말하는 거지. 그 사람은 왜?”
“다들 쉬쉬하고 있기는 했는데, 찬우 씨가 돈 문제로 여기저기 얽힌 게 많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뭔가 얽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 같더라. 보람 씨나 한 매니저는 뭐…… 최근에 친하게 지내서 그런 것 같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이정이 표정을 찌푸렸다. 정말 그 두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면 예현에게 하루라도 빨리 그 사실을 전해야 했다.
“……내가 말하면, 믿을까?”
“믿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선 알려야지. 만에 하나라도 그 사람들 중에 진짜 범인이 있기라도 하면 예현 씨한테도 큰 충격일 텐데.”
주석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차라리 돈 때문에 정보를 판 거라면 좋겠지만, 가깝게 지낸 사람이 이런 사건과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일이라도 남아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정이 쓰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자업자득이니까 어쩔 수 없네.”
장난스럽게 이정의 등을 다독이려던 주석이 그의 표정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스물둘, 어머니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침울해했던 적은 없었는데.
“……남은 일이라도 잘 처리해야지. 어쩌겠냐.”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넨 주석이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
[명아 : 혼자 지내는 거, 안 불편해? 오후 1 : 27]
혼자 가만히 있으면 잡생각이 너무 많아져 예현은 내내 손에서 무언가를 놓지 않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응. 괜찮아. 오후 1 : 28]
[명아 : 다리도 불편한데, 혼자면 더 힘들 것 같아서 걱정된다. 오후 1 : 28]
[명아 : 아직 스토커도 안 잡혔잖아. 누구라도 불러서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오후 1 : 28]
혼자 있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토커는 이미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고 창문을 이중으로 잠가 두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문을 닫아 놓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환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 둘 때면 바로 그 앞에 앉은 채로 언제라도 신고할 수 있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순찰도 강화해준다고 하셨고... 최대한 조심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오후 1 : 30]
[명아 :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재하 씨도 그렇고 다들 병문안 한 번쯤은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계속 말하더라. 오후 1 : 32]
차라리 집에 다른 사람을 불러서 함께 있으면 무서운 것도 조금 덜하고, 딴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정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이야기는 해야 하겠지만,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였다.
[그렇지만 다들 시간 맞추기도 힘들 거고. 어차피 나도 다음주면 다시 출근해야 하는 걸. 오후 1 : 34]
[명아 : 그래도 촬영 하나 마무리 된 지 얼마 안돼서 다들 한동안은 여유로울걸? 아마 내가 제일 바쁘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쉴 거야. 오후 1 : 34]
그럼 하루 정도는 다른 사람을 초대해서 함께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래. 그럼 다들 시간 맞으면 그렇게 하자. 오후 1 : 40]
고민 끝에 답장을 보낸 예현이 후우, 한숨을 쉬었다. 그 후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명아에게서 단체방 멤버들과 맞춘 날짜와 시간이 날아왔다.
모레 오후 점심시간 때 즈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 언제 와도 상관은 없었다. 예현이 명아에게 자신에 집 주소를 보내 주었다.
“예서한테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예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미루다 보니 아직도 예서에게 이정과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예서의 방과 관련된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정말 며칠 내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겠지. 예현이 마른침을 삼키고 핸드폰을 들었다.
[예서가 지내는 방, 언제까지 빼면 되나요? 오후 1 : 57]
이제 와서 계약이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더 이상 이정 측에서 예서와 예현을 보호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죄책감인 건지, 그저 먼저 연락을 하기가 껄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재련이나 주석 쪽에서도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원히 예서를 그 방에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먼저 연락을 한 것은 예현이었다.
며칠이나 미루고 미루다 한 연락이었으나 답이 돌아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김재련 이사님 : 편하실대로 하셔도 됩니다. 방 빼실 때 연락만 해주세요. 오후 1 : 59]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돌아온 답장에 오히려 놀란 것은 예현이었다.
그리고 놀라움이 사라지기도 전, 빠르게 다음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김재련 이사님 : 그보다, 혹시 최근에도 이전에 친하게 지내던 현장 스텝들과 연락하고 계십니까? 오후 1 : 59]
엉뚱한 것을 물어본 탓에 예현의 고개가 살짝 갸웃했다.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예현이 답장을 보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오후 2 : 03]
그리고 잠시 후, 의외의 답장을 받은 예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촬영장 스태프 몇 명이 다시 조사를 받았으니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연락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누구인지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당장 어제도 불려 간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나니 몇몇 얼굴들이 떠올랐다.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선의라는 것이 꼭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당장 며칠 전에도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조금 전 닫은 대화창을 다시 열었다.
[단체방에 얘기 했어? 오후 2 : 12]
[명아 : 아니 아직. 무슨 일 있어? 오후 2 : 31]
답장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다행이다. 작게 한숨을 쉰 예현이 핸드폰 액정을 두들겼다.
[그 날 만나기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일 좀 정리되고 나면 내가 다시 연락할게. 이랬다 저랬다 해서 미안. 오후 2 : 33]
[명아 : 아냐. 어쩔 수 없지.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 없이 연락 줘.]
명아는 예현에게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 왔다.
그래, 그냥 집에서 드라마나 봐야겠다. 예현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예현에게 거실 텔레비전이란 장식용, 혹은 아주 가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단한 행사가 있을 때나 가끔 켜곤 하는 친하지 않은 가전이었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 건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달아 놓은 통신사 텔레비전 서비스를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던 예현이었다.
홈 버튼을 누르자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포스터가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웠다. 3주가 지난 방영분은 무료로 볼 수 있다고 했던가. 예현이 리모컨을 꾹꾹 눌렀다.
“……아.”
멍하니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던 예현이 무언가를 보고 손을 멈추었다. 예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며칠 전 촬영이 끝난 이정의 드라마였다.
포스터 속에서 해리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어느 날 예현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며 웃던 그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아, 하긴 그때나 저거나 연기인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당연한 건가.”
예현이 픽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목도리를 둘러 주고, 그를 마주 올려다보며 웃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바라보고 웃을 수 있었을 때가 오히려 나았던 것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일지도 모르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드라마 탭에서 빠져나온 리모컨의 다음 정착지는 영화 탭이었다. 무료 영화. 예현은 그 카테고리를 향해 열심히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이건 언젠가 명작이라고 얘기가 많던 영화였지. 이건 포스터가 재미있어 보이네. 외국 영화는 아직 본 적 없는데, 이번 기회에 좀 더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볼까.
멍하니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던 예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시 눈가를 찌푸렸다.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
빨간 목도리를 두른 앳된 얼굴의 이정이 포스터 속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현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고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목도리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강이정이 유명 연예인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실감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결국 텔레비전을 끈 예현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퇴원하고 나면 시어터룸에서 가장 먼저 보려고 내정해 두었던 영화였는데 이제는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별것도 아닌 일에 널뛰는 감정선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보다도 더 기분이 나쁜 것은 이렇게 휘둘리는 것이 자신 한 사람뿐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네가 아주 힘들면 좋을 텐데, 나와 같은 정도는 바라지도 않으니 적어도 불편하게 지내고 있으면 좋을 텐데.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한 예현이 피식 웃고는 몸을 완전히 뒤로 기댔다.
*****
“내가 말했는데.”
“…….”
재련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주석을 바라보았다. 큰일 났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석을 본 재련이 다시 이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모른 채로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재련이 예현에게 몇몇 스태프가 재조사를 받고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핑계라도 있어야 예현의 얼굴을 볼 낯이 있을 텐데, 이정에게는 그 간단한 핑계마저도 허락되지가 않았다.
“내가 뭐 잘못한 거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재련이 억울한 얼굴을 하고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주석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재련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니, 나는…… 그런 줄은 몰랐지. 아, 누군지는 몰라서 말 안 했는데 그거라도 말하면 되지 않겠냐.”
저놈이 언제부터 저렇게 소심한 놈이었지. 낯설면서도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정은 며칠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건가, 싶다가도 또 그것이 틀린 선택일까 두려웠다.
연락처를 차단했다는 말은 사실인지 용기 내어 전화를 걸어 봐도 수신이 되질 않았다.
얼굴조차 보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괜히 연락을 하는 것이 방해될 것 같다가도 이대로 끝내기는 싫다는 생각이 수십 번씩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뭐가 맞는 건지, 그리고 뭐가 틀린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됐어.”
결국 이번에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이정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나다운 게 뭔데.”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재련의 말에 이정이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답지 않다라, 처음 예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도 답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정은 자신다운 것이 도대체 뭐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리하다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나다운 것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런 인간을 영리하다고 말할 수가 있나?
“적어도 이렇게 죽상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 차라리 재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일 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재련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 너,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여유로운 놈이잖아. 맨날 이렇게 웃으면서.”
“그랬었나.”
이정이 자신의 미소를 따라 하는 재련을 보고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렇게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표정 좀 펴라. 예현 씨 일은……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일단 스토커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고, 서로 신경 쓰는 일이 해결되고 나면 진득하게 얘기할 기회 한 번쯤은 오지 않겠냐.”
재련이 이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재련이 이정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스케줄도 없겠다.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재련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가다시피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주인을 잃은 사무실에 잠시 남아 있던 이정 역시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주말이 되는 동안 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 나만 여기에 있는 거야?’
우선 예서에게 한동안 집에 돌아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자세한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빈약한 변명에도 예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혼자 있을 수 있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어보던 예서를 밉지 않게 쥐어박은 예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나온 티 없는 웃음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집에 명아와 재하, 보람과 석찬을 초대하기로 했었는데 혹시 모를 위험성 때문에 결국 혼자 집 청소나 하게 됐다.
시켜 먹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다리 때문에 며칠째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있었다.
최대한 요리를 해 먹어야지 하면서도 결국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시켜 먹은 것이 세 번째였다.
그러나 요리를 직접 하지 않아도 쓰레기는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 예현은 주섬주섬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대낮인 데다 이 시간에는 골목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꽤 있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전봇대 앞에 분리수거 쓰레기를 내놓았다.
이제 두꺼운 겉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날씨가 풀어진 것이 느껴졌다. 다음 주쯤이면 완전히 봄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파릇파릇한 잎이 돋아난 나무를 바라보았다.
겨울은 참 춥고도 험난했다. 비단 날씨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겨울을 잘 버티고 봄이 다가오려는 순간에, 아니. 이미 찾아왔다고 생각한 순간에 예현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봄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거짓된 봄 속에 머무르는 것과 현실로 돌아오는 것, 그중 어느 것이 제게 필요한 일인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아.”
이제 후, 날숨을 뱉어도 입김이 하얗게 올라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 가는데, 난 왜 아직도 이렇게 추운 걸까.
예현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주말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일이나 해야지. 예현은 제 뺨을 찹찹 때리고는 이 대리에게 부탁해 받은 문서를 살펴보았다.
이 주일이나 쉬었으니 돌아가서 어버버거릴 게 아니라면 미리 준비해 놔야지. 예현은 그런 생각으로 한참 동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똑똑-
그때, 누군가 예현의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순간 놀라 흠칫한 예현이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훤한 대낮에 스토커가 쳐들어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쥔 예현이 떨리는 손으로 긴급전화창을 켜 두려는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계세요?”
아는 목소리였지만, 왜 여기서 들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인물의 목소리였다. 예현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보람 씨?”
“아. 계셨구나.”
갑작스럽게 집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보람이었다.
“이 근처에 지나갈 일이 생겼는데, 원래 오늘 만나기로 했었던 게 생각나서요. 명아 씨한테 주소까지 들었는데 미리 만나서 갈지, 따로 갈지 얘기하다가 갑자기 취소돼서……. 주소는 메시지창에 남아 있더라고요.”
보람이 음료 세트를 내밀며 말했다.
“아, 그냥 오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어차피 저도 볼일 있어서 오래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보람이 얼른 받아 달라며 손짓했다. 얼떨결에 선물을 받은 예현이 당황한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근처에서 촬영할 일이 생겨서 사전 답사 겸 왔는데 전에 봤던 주소랑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들렀어요.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출발해야 해요. 참, 주말이 없는 직종이죠.”
보람이 수더분하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바로 출발하시는 거예요?”
“아뇨. 세 시에 촬영팀 선배님이 데리러 오시기로 했어요. 차 얻어 타고 가려고요.”
“그럼 그동안은요?”
“날씨도 많이 풀렸는데 산책이라도 좀 하죠, 뭐.”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20분. 애매한 시간인 데다가 날이 많이 풀렸다지만 40분이나 밖에서 기다리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찾아와 준 사람을 바로 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말했다.
“그럼 잠깐이라도 들어와서 쉬다 가세요. 그래도 아직 밖에 오래 서 있기엔 좀 춥잖아요.”
“그래도 돼요?”
두꺼운 안경 아래 숨겨진 눈이 반짝거렸다. 고개를 끄덕이자 보람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게 없어서 어떻게 하죠.”
“제가 사 온 거 있잖아요. 그냥 이거 하나 마시죠, 뭐.”
보람이 넉살 좋게 자신이 가져온 음료 세트를 열더니 음료 두 개를 꺼냈다.
“예현 씨도 드세요.”
“아, 네.”
얌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하이 텐션이시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보람을 거실로 안내했다.
“주말인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고생은요. 다 저 좋자고 하는 일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보람은 평소와 달리 조금 들떠 보였다. 늘 재하의 텐션에 맞춰 주느라 쩔쩔매는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리도 불편하신데, 혼자 지내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이제 좀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2주씩이나 하고 있었더니 이제 깁스도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예현이 단단한 석고 깁스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지잉-, 지잉-.
그때, 예현의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문자가 온 것 같았다.
“아, 저 신경 쓰지 말고 확인해 보세요.”
사람을 앞에 두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예현이 핸드폰을 뒤집어 놓으려는 순간 보람이 저는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아, 그럼 확인만 하고 내려놓을게요.”
괜찮다는데 싫다고 고집부리기도 그렇지.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문자를 확인했다.
[명아 : 재하 씨가 스토커 잡히면 시간 안 맞아도 한 번쯤은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꾸 주소 알려주면 안되냐고 난리야. 오후 2 : 29]
[명아 : 조만간 너한테도 직접 물어 볼 기세더라. 미리 거절멘트 준비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오후 2 : 30]
“누구예요?”
“아, 명아요. 근데…….”
문자 내용을 읽은 예현이 이상한 위화감에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소를 알려 주면 안 되냐고 했다고. 그런데 방금 보람은 명아가 이미 단체방에 주소를 올려 둔 상태였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아. 명아 씨구나.”
그럼, 보람 씨는 어떻게 여기를 찾아온 거지?
오싹한 기분이 예현의 등골을 스쳤다.
“음료 안 마시세요?”
보람이 뚜껑까지 딴 음료수 병을 예현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예현은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명아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예현 씨?”
“아……!”
예현은 보람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놀라 몸을 크게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음료를 든 보람의 손과 부딪혔다.
“괜찮아요?”
핸드폰 위로 음료가 쏟아졌다. 옷 위로도 음료가 조금 쏟아졌지만 예현은 찝찝하다는 생각도 못 한 채 손을 떨고 있었다.
“아, 아까워라.”
“괜찮아요. 조금 놀라서…….”
예현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며 물티슈를 뽑아 들었다.
“아, 이거 핸드폰에 다 쏟았네요.”
“괜찮아요. 닦으면 돼요.”
뭐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 하나. 예현이 혼란스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는 보람에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늘 되게……. 들떠 보이시네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예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여태 골머리 썩이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오늘 끝을 낼 생각이거든요. 티가 날 정도였나요?”
보람이 뒷 목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골머리를 썩이던 일이요?”
“네. 여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역시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쿵쿵거리는 소리가 예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것은 위험하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계속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는 잃는 게 있더라도 치워 버리는 게 낫잖아요. 예현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오래 지나지 않아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들어오라고 해 놓고 죄송한데, 잠깐 전화 좀 하고 와야 할 것 같아요. 급하게 전달해야 하는 게 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요.”
예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핸드폰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나가서 다시 상황을 되짚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전 괜찮은데……. 사적인 전화인가 봐요?”
“네? 아.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예현이 대강 대답하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우선 나가면 누구에게라도 집으로 와 달라고 부탁을 하자. 가장 먼저 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아냐, 일단 나가고 나서 생각해야 해.
철컥, 문의 잠금쇠를 연 예현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강이정한테 전화라도 하려고?”
예현이 악의에 찬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억센 손이 예현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글거리며 살갑게 말을 붙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선 목소리가 예현의 귓가를 두들겼다.
“주제도 모르는 게 제 발로 집에 기어들어 왔길래 늦게라도 정신을 차렸나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봐?”
“놔, 뭐 하는 짓…… 악!”
예현이 팔을 휘두르며 보람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내 깁스를 한 다리를 발로 차인 탓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별 같잖은 게, 주제도 모르고…….”
중얼거리면서 예현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보람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전 주석의 말 한마디가 예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스태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특히…….’
예서의 일로 잠시 전화를 했을 때 뭔가 말하려고 했었는데, 이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라도 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됐다며 전화를 끊었었다.
그때 하려던 말이 이것과 관련 있는 것이었을까. 이제 와서 하기에는 늦은 생각이 아른거렸다.
“보람 씨가……. 스토커예요?”
예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현이 휘두른 팔에 안경이 날아가 맨얼굴이 된 보람이 예현을 내려다보며 그를 비웃었다.
“스토커? 웃기는 소리.”
“싫다는 사람 쫓아다니고, 이런 짓까지 하는 게 스토커가 아니면 뭔데요.”
예현이 자신의 다리를 깔고 앉은 보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를 밀치고 도망치기라도 해야 하는데, 어느새 메고 있던 넥타이로 손이 묶인 채였다.
핸드폰 역시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탓에 너무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일단 보람에게 말을 시켜 주의라도 분산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네가 강이정에 대해 뭘 알아. 뭘 안다고 이렇게 자신만만하냐고.”
보람이 예현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난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이정에 대해서 잘 알아. 강이정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고, 강이정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도 나야.”
“그게 무슨…….”
내내 안경 아래 가려져 있던 눈이 소름 돋게 희번덕거렸다.
“네가 강이정에 대해 뭘 아는데. 강이정이 어머니 때문에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게 어떤 감정일지 알기나 해?”
“아악!”
보람이 예현의 다리를 깔고 앉은 하체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밀려오는 고통에 소리를 친 예현이 바둥거렸으나 보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하필 그날 그 촬영장에 간 것도,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다 내가 강이정과 운명으로 맺어져 있어서야. 너처럼 굴러들어 온 돌이 넘볼 자리가 아니라고.”
“대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촬영장이니, 어머니니, 상처니 하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예현은 그저 아픔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칠 뿐이었다.
“강이정 앞에 나가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냈는데, 너 같은 게. 씨발. 너 같은 게…….”
보람이 강이정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