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10화 (10/15)

계약연애의 정석 4권

#10

[아들, 정말 이럴 거니?]

그렇게 돌아온 한국, 이정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캐리어를 끌었다.

“누나는 제가 없어도 잘할 거예요. 어머니.”

[그래도, 내 소원 빤히 알잖아? 네 마음대로……. 하아.]

이정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지망하던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내지 않고 등록을 취소해 버린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보고 싶어서요.”

[됐어. 내가 널 잘못 파악하고 있었나 보다. 끊어. 머리 아프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한심하다는 목소리를 듣고 나니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유정과 대결하는 구도가 만들어지고, 그 싸움에서 밀려 EH에서 나가떨어지게 된다면…….

그땐 실패한 자식, 한심하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지.

실패한 자식보다는 도망친 자식이 되는 것이 나았다.

유정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자신이 경영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한 그녀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정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나도 크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 될래.’

‘그래,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면 매일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을 거야.’

어린 시절, 어머니 몰래 동경해 왔던 길이 있었다. 평생을 가족들 비위 맞춰 주고 사느라 연기하는 데는 도가 텄으니 그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일을 해야 유정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강이정.”

이정을 마중 나온 재련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이정의 친가 쪽 친척이었다. 재련은 그다지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없던 친척 동생이 갑자기 연락을 한 데에 아직 얼떨떨한 상태였다.

“네 어머니가 나 가만히 안 두는 거 아냐? 내가 헛바람 불어넣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존재만 아는 사이였다는 거, 어머니가 더 잘 아실 테니까.”

쓸 만한 인맥이 있는데 굳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갑자기 배우를 하겠다니. 네 어머니, 그리고 박 회장님께서 충격이 크실 것 같은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요. 그리고 누나도 있으니 저 하나쯤은.”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물론 화를 내기야 하겠지. 그러나 이미 완벽한 후계자가 있는데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멋대로 귀국해 버린 자식을 도로 잡아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정은 그렇게, 생존을 위해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

평생을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왔는데, 갑작스럽게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이정이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싸늘한 어머니의 시선, 별 한심한 짓을 한다며 혀를 차던 아버지.

사람을 잘못 봐도 아주 잘못 봤다며 화를 내던 박 회장까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냐?”

“그렇지 뭐. 대학도 안 가고, 미래도 없는 백수 자식이라고 한심해하시던걸.”

그러나 다녀올 때마다 좋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정은 꾸준히 본가로 갔다.

다른 분야에서라도, 무언가 성과를 내면 한심한 자식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런 자신을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 주는 것은 유정 하나뿐이었다.

‘잘하겠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너도 참, 동생이라고 너무 무르게 대하는 것 아니니?’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너그럽게 군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유정은 부모님의 앞에서 이정을 은근하게 두둔해 주곤 했다.

‘하하. 그러게요.’

무르게 대하기는 무슨, 이정은 언제든지 그녀의 잘 벼른 칼이 자신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너 영화 개봉한 건……. 아실 리가 없겠고.”

그날은 이정이 출연한 첫 영화가 개봉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러나 가족 중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알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는 게 목표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재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정이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다.

우성 알파, 잘난 얼굴, 뛰어난 머리. 게다가 재수 없게 연기까지도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고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재련은 제 눈앞의 완벽한 남자가 불쌍했다. 남들은 이정을 보며 다 가진 놈이라고, 부럽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바라는 것은 너무 멀고도 아득한 것이었다.

“너 잘하는 놈이잖냐. 걱정 안 해도 잘될 거니까 그냥 기다리기만 하자.”

재련이 이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 이정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조연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대박을 쳤고, 이정 역시 유명세를 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따위에 관심이 없던 종아의 귀에도 이정의 소식이 들어갔을 정도였다.

“네가 나온 드라마, 꽤 잘됐다는 이야기 들었다.”

이정이 경영을 포기하고 집을 나간 이후, 종아가 이정에게 날을 세우지 않고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전시회 갔다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엄만데, 다른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들어서야 되겠니? 정말, 센스 하고는.”

이정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듣기 싫다는 티를 낸 것은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정은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아하하.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니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경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었지만 그로 인해 어머니에게 외면받는다는 것만큼은 싫었다.

“하여든, 놀라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뭐라도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죠.”

유정이 이정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녀 역시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강이정의 근황에 대해서는 꽤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유정은 이정의 얼마 되지 않는 필모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겨울에 김지석 감독 영화 촬영 들어간다며? 잘됐으면 좋겠다.”

“고마워. 누나.”

두 사람이 비즈니스적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직 캐스팅이 기사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지 따위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하자 유정이 어머니를 달래 주었다.

“이제 화 푸세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맞는 거예요. 저도 혼자 잘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너는……. 아니다. 됐어. 내가 말한다고 들을 애들도 아니고.”

종아가 됐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그 뒤로는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배우가 된 이후 처음으로 체하지 않고 편한 속으로 식사를 마친 날이었다. 놀라운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겨울 촬영이랬지? 이거라도 하나 챙겨 가렴.”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과일을 먹던 중, 잠시 자신의 방으로 갔던 종아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이건…….”

종아가 이정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목도리였다. 포장지도 아직 뜯지 않은 것이, 선물로 주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인가 싶었다.

“몸으로 하는 일인데 잘 챙겨야지.”

“감사해요. 어머니.”

얼마 만에 받아 보는 어머니의 호의인지. 이정은 닳기라도 할세라 조심히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래. 기왕 하는 거……. 잘하기라도 해야지.”

친절하지 않은 말투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일을 인정해 주는 말에 이정이 활짝 웃었다.

그래, 뭐든 열심히 하다 보면 어머니도 알아 줄 거라는 말이 사실이구나. 회사를 포기했다고 내가 의미 없는 자식이 되는 건 아닌 거야.

21살의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뻐했다.

*****

“닳겠다, 닳겠어.”

재련이 이제 이정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목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돈도 많은 놈이 늦가을부터 저 목도리 하나만 하고 다니는 것이, 보통 목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목도리가 그렇게 좋냐?”

“그러게. 자주 하고 다니네.”

주석 역시 그 목도리 하나만을 주야장천 두르고 다니는 이정이 내심 신기했던 듯 한마디를 거들었다.

“선물받은 거거든.”

“누구, 설마 애인? 너 애인 있냐?”

“헛소리……. 어머니한테 받은 거야.”

아. 재련이 이정의 말에 상황을 대강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후계권과는 전혀 관련 없는 위치에 있지만 재련 역시 EH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박종아 여사가 권력과 후계 승계에 얼마나 극성인지야 잘 알고 있었다.

이정이 집을 나온 지 이제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걸 빤히 아는 재련이었기에 이정이 왜 그 목도리를 그리도 애지중지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 잘 하고 다녀라.”

“겨울 촬영이니까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시더라. 이제 마음이 많이 풀어지셨나 봐.”

이정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정은 그 목도리를 정말, 정말 많이 아꼈다.

집을 나오면서 가졌던 불안감도, 어머니에게 부끄러운 자식이 되었다는 죄책감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겨우 목도리 하나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정 씨는 그 목도리를 항상 하고 다니네?”

“의미 있는 물건이라서요.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달까…….”

촬영장에서도, 대본 리딩 현장에서도, 이정은 그 목도리를 늘 가지고 다녔다. 잘못 세탁했다가 물건이 상하는 것이 걱정되어 주기적으로 전문 업체에 클리닝을 맡겼다.

촬영이 막바지로 들어섰을 때쯤, 그 목도리가 이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정 씨. 그 목도리 낀 상태로 촬영 한번 해 볼래요?”

김 감독이 그 말을 한 것은 꽤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네?”

“그거, 이정 씨한테 되게 의미 있는 물건이지?”

사실 해당 장면에서 이정의 복장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 장면은 그저 배우의 연기만으로 가득 채워질 장면이었다.

극의 하이라이트,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부정하던 두 주인공은 결국 이 땅의 남쪽 끝까지 내려와서야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까지 촬영한 모든 장면들이 이 장면 하나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장면이었다.

“네.”

이정이 무의식적으로 목도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김 감독이 말했다.

“그거 하고 있을 때 이정 씨가 유독 안정적으로 보이더라고. 이정 씨 연기 원래도 좋지만, 뭐랄까……. 늘 긴장하고 있는 느낌이었거든.”

흠잡을 데 없는 연기였지만 어딘가 기계적이었다. 굉장히 잘 프로그래밍된 기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연기라고 해야 하나.

시청자의 눈에는 거슬리지 않을지 몰라도 제작자의 눈에는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가 있었다.

그건 카메라가 없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타고난 성향인가, 생각했는데 웬걸. 그 목도리를 하고 있는 이정은 늘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연기를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가 아니었다. 아마 굉장히 의미 있는 물건이라 그런 것이겠지. 김 감독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가 이 장면에 욕심이 있거든. 정말 최상의 연기, 최상의 모습을 담고 싶어.”

“네.”

“장면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정 씨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물건이라면 목도리 한 상태에서 찍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어때?”

이걸 하고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느껴질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이정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별로야?”

“……아뇨. 괜찮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편안해 보이고 최상의 연기를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면 목도리를 하고 촬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걸 두르고 촬영한 영화가 개봉하면, 어머니도 이 목도리를 알아보고 칭찬을 해 주시지 않을까. 칭찬이 아니어도 한마디 언급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정이 그닥 유쾌하지 않은 진실을 들추는 길이 되리란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21살의 이정은 그런 미래를 눈치채지 못했었다.

김 감독의 시선은 아주 정확했다. 이정은 그 목도리를 한 채로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 냈고, 김 감독은 이 장면이 그의 필모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그 자리에서 포스터의 초안까지 생각해 낸 김 감독은 본인의 온 기력을 쏟아부어 촬영을 마무리했고 그의 직감대로, 영화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는 초대박을 쳤다.

[연기에 입문한 지 3년도 되지 않은 배우의 연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하면서도 격렬한 연기였다.]

그중 가장 회자된 것은 역시 김 감독의 예상대로, 바닷가에서의 고백 신이었다. 주목받는 신인에서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오른 이정의 목도리 역시 유명세를 탔다.

[메이킹 필름 보면 진짜 저 목도리 맨날 매고 있음]

[저거 사고싶다.... 저거하고다니면 강이정이랑 커플템 개이득]

[ㄴ 저거 중고로 사도 최소 100만원 ;;]

[ㄴㄴ 강이정이랑 커플템하기 쉽지 않네…….]

이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이정 씨 하면 그 목도리가 또 빠질 수가 없죠.”

“오늘도 하고 오지, 왜 목 허전하게 그냥 왔어요.”

“저기요, 지금 밖에 기온이 30도거든요?”

기사나 영화 칼럼은 물론, 출연하는 예능에서도 농담 삼아 언급을 하곤 했다.

“소중한 분에게 선물받은 물건이라, 하고 다니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설마 애인은 아니죠?”

“아니에요. 존경하는 분에게서 받은 거예요.”

이정은 그런 관심이 싫지 않았다. 이 목도리가 유명해지면 어머니도 자신의 영화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럼 조금은 뿌듯해하실지도 모르지. 어쩌면 먼저 연락이 와서 영화 잘 봤다는 말을 해 주실지도 모른다.

“빨리 가을이 됐으면 좋겠다.”

“또 맨날 천날 그것만 하고 다니려고 그러지? 닳는다, 닳아.”

그렇게 좋을까. 재련이 이정을 바라보며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사실, 재련은 이정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좀 철없어도 될 나이인데 이정은 실수하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여유가 없어 보였다.

틈 없는 스케줄이 고될 만도 한데 힘들다는 이야기 한번 한 적 없었고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요즘의 이정은 달랐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멍을 때리고 있기도 하고,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조금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사실 무슨 연락을 기다리는 건지 예상이 가서 조금 짠하긴 했지만, 그렇게 노력해서 박 여사가 노력을 알아 준다면 그것도 해피 엔딩이겠지.

그러나 세상일은 희망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

[강유정 : 곧 회장님 팔순인 거 알지? 미리 집에 들어와있어. 오후 3 : 12]

박 회장의 팔순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 이정은 오랜만에 본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똑똑한 자식인 줄 알았더니 배우인지 뭔지를 한다고 노발대발하며 뺨을 맞은 이후로 처음 보는 박 회장이었다.

‘쓸모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집안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는군. 대체 종아가 자식새끼를 어떻게 키웠길래.’

맞은 뺨보다도 그 말을 들은 어머니의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더 아팠었다. 그래도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 이제는 조금 누그러졌으려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삼촌.”

“그래. 영화 잘 봤다.”

종필이 내심 무시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이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얼굴이 평소에 이정을 대하던 표정보다 조금 더 다정하다는 것이 우스웠다.

“감사합니다.”

명백히 제 밑으로 보는 태도였지만 이정은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종필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으니까.

“건강히 지내셨습니까.”

“……쯧.”

박 회장이 이정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무언가 날아들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숨 막히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박 회장이 입을 열지 않으니 감히 그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슬슬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쯤, 박 회장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꽤나 유명해졌다지.”

“……유명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정이 겸손하게 말했다.

박 회장에게 이정은 실패작이었다. 아들의 자식들이 열성으로 태어나 못내 아쉬웠는데, 딸의 자식들은 모두 우성에 우성 중에서도 꽤 뛰어난 자질을 보이기에 꽤 마음에 들어 했었다.

능력으로 치자면 유정이 가장 뛰어난 자식인 데다 성정까지 저를 꼭 빼닮아 후계로 내세울 만했지만 계집애라는 것이 거슬렸다.

그래도 동생인 이정이 있으니 대외적으로는 이정을 세우고, 일은 유정에게 맡겨 회사를 이어 가려고 했었다.

하나 배우인지 뭔지를 하겠다고 대학 등록금을 넣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화가 치밀어올라 협박이라도 하려다 그만두었다.

지 발로 떠나겠다는 유약한 자식을 잡아서 뭣 하겠나. 한심한 놈.

그러나 지금의 이정은 자의든, 아니든 EH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가 재벌 3세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다름 아닌 박 회장이었다.

사람들에게 이미지 좋은, 그리고 인기 많은 배우 강이정. 돈 한 푼 쓰지 않고 얻어 들인 홍보 수익이 상당했다.

“그 꼴을 보이고 집을 나갔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우쭐해하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이정이 얌전히 대답했다.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어디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영화니, 드라마니 잘 봤다고 떠들어 대는 통에 얼마나 귀찮은지 몰라요.”

종아가 옆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편을 들어 주는 것 같은 모습에 이정의 입꼬리에 옅게 미소가 번졌다.

“어찌 됐든 내 핏줄이니 빌빌거리며 살지는 않는 게지.”

“호호. 당연하죠. 잘할 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버지.”

이정이 살짝 웃었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받아 보는 어머니의 온정이 너무 좋아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 이제 저희 모두 어리지 않으니.”

유정이 종필의 두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촌 형의 얼굴이 썩어 들어 가는 것을 보니 아마 지금도 저 둘은 유정의 설계 속에서 철저히 밟히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아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제 앞가림이라도 하는 것이 낫기는 하구나.”

박 회장이 채준과 채혁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흘겨보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김재련 : 식사 잘 했냐? 체하진 않았고? 어디 얻어맞은 거 아냐? 오후 8 : 12]

[걱정하지마. 잘 끝났으니까 오후 8 : 15]

식사를 마치고 홀로 정원을 거닐던 이정이 재련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실로 오랜만에 기분 좋게 끝난 식사였다. 박 회장의 노기는 이정이 아닌 채준과 채혁에게 돌아갔으며 어머니 역시 자신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역시 그 목도리를 선물해 준 순간부터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린 것이었던 걸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이정을 멈추어 세웠다.

“그러니까, 아까워 죽겠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머니, 박종아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에 있는 건가. 이정이 코너를 돌아 그녀에게로 가려는 순간 유정이 종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될 줄은 모르셨잖아요.”

“그깟 목도리가 뭐라고, 나대는 꼴이 얼마나 같잖은지.”

목도리? 이정이 그대로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네가 불쌍하니까 좀 챙겨 주라고 해서 잡히는 대로 하나 던져 주긴 했는데, 하필 그게 김 관장 선물일 게 뭐야? 아주 의기양양해 가지고 돌아다니는 꼴이…….”

종아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 걸 선물이랍시고 주길래 짜증 나서 이정이한테 줘 버린 건데. 그럴 줄 알았으면 우리 브랜드 물건이나 줄 걸 그랬다. 남 좋은 일만 시켜 주고 이게 뭐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기회는 앞으로도 있는데.”

“참나, 준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김 관장이 하도 호들갑을 떨어서 생각났네.”

유정이 짜증을 내는 종아를 달래 주었다.

“네가 잘 좀 해 주라길래 노력은 해 봤다만……. 하아. 난 모르겠다. 어차피 그 애도 내 의사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데.”

“물론 그 애가 어머니의 염원을 망쳐 놓긴 했지만…….”

유정이 이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다 굳어 있는 그를 발견했다. 잠시 이정의 멍한 표정을 보고 있던 유정이 씨익 웃음 지었다.

몸을 돌려 종아가 코너를 돌지 못하도록 길을 막은 유정이 말했다.

“불쌍하잖아요? 실패한 자식이라도, 어머니한테 잘 보이겠다고 아등바등거리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하. 됐다. 그래도 네 체면이 있으니 앞에서는 노력해 보겠지만……. 난 이제 그 애한테 아무런 기대도 안 해. 그저 창피하게 만들지나 않아 줬으면 좋겠구나.”

실패한 자식. 쐐기를 박은 유정이 종아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그 자리에 움직임 없이 못 박혀 있던 이정이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로부터 30분가량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이정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머니나 유정을 탓하지는 않았다. 강유정은 원체 성격이 좋지 못한 인간이다. 어머니의 유일한 자식이 된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겠지.

아니, 어쩌면 이번엔 정말 도와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챙겨 주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빨리 가을이 됐으면 좋겠다더니, 그 목도리 안 하고 다니네?”

그렇기에 재련은 가을이 반쯤 지나고 나서야 이정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겨울, 아니. 봄이 만연하고 나서도 며칠 동안은 하고 다니던 그 목도리를 어느샌가 멀리하기 시작한 이정을 이상하게 생각한 재련이 물었을 때, 이정은 그저 작게 웃었다.

“이제 그만두기로 했거든.”

“뭘?”

“그냥. 되지도 않는 일에 기대하는 것.”

내포된 것이 많아 보이는 말에 재련이 몸을 일으켰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대본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언제는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는 건지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니, 요즘은 그러지도 않고. 마치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처럼…….

“…….”

재련이 가만히 이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박 여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먼저 말해 줄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물어볼래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고. 우선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둘까.

“물어볼 거 있어?”

“어? 아니. 뭐 마음에 드는 대본 있냐?”

“음……. 좀 더 읽어 보고 결정해도 돼?”

“어. 그래.”

어째 하는 짓은 차분한데, 그 모습이 더 불안해 보인다고 하면 과민 반응인 걸까. 그런 불안감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슬슬 날씨가 추워질 때쯤, 이정에게 EH 그룹의 광고 제안이 들어왔다.

“여기 네 어머니가 맡고 계신 거 아니냐? EH 주얼리.”

재련의 말대로 해당 제품은 종아가 맡고 있는 주얼리 회사의 신제품이었다.

“야, 네 어머니도 이제 슬슬 널 인정하시나 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제안을 넣는데 어머니가 모르고 계실 리가 없잖아.”

“안 해.”

“어?”

이정을 띄워 주던 재련이 단호한 대답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 한다고.”

“야, 왜 그러냐.”

여태 어떤 광고가 들어와도 본인이 먼저 싫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는데. 당황한 재련이 물었다.

“왜 하기 싫다는 건데. 너, 어머니한테 인정받고 싶어 했잖아. 그 목도리, 유명해지면 어머니 눈에까지 들어갈 것 같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그땐 그랬는데, 이젠 아냐. 어쨌거나 이거 하나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으니까 치워.”

싫은 기색을 숨길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에 재련이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이제 안 되는 일에 목매는 멍청한 짓은 안 하기로 했거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한 이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여태 티를 내지 않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정말 후회 안 하겠냐? 뭐, 너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잖아.”

재련이 이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정이 여태 어머니에게 실패한 자식으로 남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알았다.

자기 얘기 하는 것 그리 좋아하지 않는 놈이 서운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어머니 이야기는 종종 털어놓곤 했었다.

왜 다 그만두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동적으로 결정했다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한 번 정도는 말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말하자 이정이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후회할 일 없어.”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굴지 않았으면 생각했지만 이건 뭐, 밑도 끝도 없이 싫다고만 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 뭐. 그러든가.”

그러나 하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붙잡고 시키기도 우스운 노릇, 재련이 어깨를 으쓱하곤 물러섰다.

애초에 소속 연예인 스케줄 관리까지 도맡을 정도로 한가한 직책도 아니었다. 재련이 들고 있던 것을 책상 구석으로 밀어냈다.

*****

[강유정]

이정이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유정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은 언제나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머니에 관한 것, 가족 모임에 관한 것.

애초에 용건 없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 전화 역시 서로 안부나 묻고 지내자는 내용은 아닐 것이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구나, 하고 용건을 포기할 강유정도 아니었기에 이정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했는지, 모르진 않지?]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는 것이 참 그녀다웠다. 왜 전화를 했는지야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름 생각해 준 거였는데,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역시 광고 제안은 어머니의 의견이 아닌, 강유정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뭐,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겠지만 그녀 스스로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덕분에 어머니 기분은 최악이고. 포기라도 한 건가?]

‘불쌍하잖아요? 실패한 자식이라도, 어머니한테 잘 보이겠다고 아등바등거리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강유정과 동정이라는 단어는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동정이라기보다는 대가에 가까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손을 쓸 일 없이, 알아서 깔끔하게 꺼져 준 것에 대한 대가.

“어. 이제 그만두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은 그만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니 꽤 섭섭한데. 나도 나름 신경 써 준 거였다고.]

유정이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정은 그 친절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머리가 비상한 그녀가, 그 친절이 이런 결말을 낳을지 정말 몰랐을까?

박 회장의 본가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씨익 웃음 짓던 그녀의 얼굴만 봐도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모를까,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으니.

“어머니도 실패한 자식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으실 텐데, 마지막으로 효도나 하려고.”

[아, 이제 알았나 보네?]

유정이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태 들어 본 그녀의 목소리 중 가장 신이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앓던 이가 빠지기라도 한 듯한, 그런 후련한 느낌도 있었다.

[뭐,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 어머니가 김 관장님한테 쌓인 게 많았거든. 그러게 왜 물건 따위한테 정을 주고 그래.]

“……그러게. 그깟 목도리가 뭐라고, 본인이 주신 것도 잊어버리고 계셨던 걸 멍청하게 끼고 다녔네.”

이정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런 것을 선물한 것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강유정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겠지.

꾸준히 자신의 근황을 관찰하면서 그 모습을 얼마나 비웃었을까. 이정은 자신의 옷방 깊숙이 처박힌 그 목도리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어머니가 네 덕 좀 보시겠다는데, 그것도 싫다라……. 이제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나 보지?]

“이미 실패한 자식인데, 아등바등거린다고 뭐가 바뀔까.”

[하긴, 그렇지? 사람은 다 본인의 실속을 위해 움직이는 거야. 가족이라고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 정도로 인정 넘치는 집안은 아니잖아?]

뼈가 있는 말에 이정이 조소를 흘렸다.

“그러게, 그걸 몰랐네. 멍청하게.”

[뭐, 나야 나쁠 것 없지. 어머니의 유일한 자식으로 남아 있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실패한 자식 주제에 제 쓸모를 다하지도 못했다고 화가 났을 법도 한데, 스스로 연락 한번 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더 기대하는 건 멍청하다 못해 애잔한 짓이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 어쨌거나……. 박채준이나 박채혁한테 밀리는 것보단 나은 인생일 수도 있잖아?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거지.]

그래, 집에서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얄팍한 배려를 건네는 강유정도 이득이라면 이득일 것이다.

[난 네가 멍청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 주면……. 뭐, 꽤 괜찮은 사이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거슬리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거겠지. 자신에게 해를 끼칠 능력이 없는 인간이 멍청한 짓을 하는 걸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을 수도 있고.

“그래. 덕분에 많이 배웠네.”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유정이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도움, 도움을 주기야 하겠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도움을 준 후 일이 어그러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겠지.

“그래. 어머니한테는 잘 말해 줘. 어차피 내 목소리 듣고 싶지도 않으실 텐데.”

[어렵지 않지.]

“더 할 얘기 없으면 끊어도 되지? 촬영 중이라.”

[그래.]

전화를 끊은 이정이 팔을 늘어트리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실패한 자식으로 남기는 싫어서 아등바등 버텨 왔는데, 처음부터 쓸모없는 노력에 불과했다는 걸 확인 사살 당하니 여러모로 착잡한 기분이었다.

“…….”

다 알고 있었는데도 왜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까.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아는데도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 차라리 지금 흘려보내고 끝내자.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교훈도 하나 얻지 않았나.

누군가가 마땅한 이유 없이 제게 애정을 줄 거라는 건 덧없는 생각이다. 낳아 준 부모마저도 그러한데 타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노력해 봤자 아무런 의미 없으니 멍청한 희망 가지지 말자.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

재련과 주석은 이정이 왜 그 목도리를 하지 않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본인에게 듣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기에 이정의 앞에서 목도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요즘 그 목도리 안 하고 다니네?”

눈치 없는 스타일리스트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던 주석이었다.

이정은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했고 이유 없는 협력 역시 없다고 생각했다.

“뭘 그렇게까지 벽을 치냐. 그냥 해 주고 싶어서 해 줬을 수도 있지.”

몇 번인가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정은 친절한 사람의 탈을 쓸 줄 알았고 사회생활을 할 줄 알았다.

들키지만 않으면 속마음 따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이정은 그렇게 이미지 좋은 호감 배우로 몇 년을 살아왔다.

어머니와는 그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애초에 이정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이 이어지는 사이도 아니었다. 영양가 없는 가족 모임도 스케줄을 이유로 나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유정과는 필요에 따라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마저도 아주 가끔, 짧은 대화로 용건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망할 가족 식사에 다시 나오라고 하지를 않나, 예현에게 관심을 가지질 않나.

영 달갑지 않은 소식에 이정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강유정…….”

강유정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불안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머니야, 유정 역시 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 이정이 혼자 멍청한 짓을 하는 걸 구경하며 즐거워했던 것이겠지만…….

이번에도 나름대로의 도움을 줘 놓고 나 혼자 놀아나는 것을 구경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이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가봤자 기뻐할 사람도 없는데, 굳이 가야하는지 모르겠는데. 오후 3 : 05]

[강유정 : 그건 아냐. 어머니가 요즘 엔터 사업 쪽에 관심이 생기셨거든. 오후 3 : 06]

그럼 그렇지. 이정이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이유가 있다니까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랑 장소 보내둬. 오후 3 : 06]

이정이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 가족 간의 정 따위를 다지는 자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한 자리라면 부담 되진 않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강유정이 예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언젠가는 들키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유정에게 자신의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이 일에 관심이 있는 동안은 말이다.

*****

“……그냥 가지 말까?”

예현이 나갈 준비를 끝낸 채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때는 이정의 섭섭함을 달래 주겠답시고 이정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충동적인 결정인 것 같았다.

하여튼 분위기, 그놈의 분위기가 문제다. 페로몬에 들떠 뭐든 다 해 주고 싶고, 다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근자감이 생겨서 말한 것이었는데, 벌써부터 후회가 됐다.

“무슨 서운한 소리야. 그럼 재하 씨도 섭섭해 죽겠다고 난리 칠걸?”

“하…….”

재하는 예현을 만나는 것이 어지간히 즐거운지, 시도 때도 없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김재하 씨 : 몇시에 와용?? 오전 8 : 12]

[김재하 씨 : 오랜만에 보겠당 >< 오전 8 : 12]

[유석찬 씨 : 누가보면 네가 예현 씨 애인인 줄 알겠다……. 호들갑 작작 떨어라.. 오전 8 : 15]

단체방의 메시지를 읽던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차피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눈 딱 감고 다녀오지 뭐.

“물론 내가 제일 슬프겠지만.”

이정이 눈물을 닦아 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말이야 농담이었지만 이정 역시 꽤 들뜬 상태였다.

예현과 함께 촬영장에 가게 되어서가 아니라, 예현이 자신을 위해 먼저 무언가를 제안해 주었다는 게 기뻤다.

“데이트도 못 하는데, 이렇게라도 같이 나가면 좋지.”

이정이 예현을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물론 지인들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차 안에만 있다가 조용히 돌아오기로 했지만, 그래도 달려가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에 예현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같이 살기까지 하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냐.”

예현이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방도 아니고, 한집에 사는 정도로는 부족한데.”

“실없는 소리.”

예현이 이정을 밀어내고 현관문을 열었다. 뒷모습만 봐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보이는데, 귀엽긴.

“가자. 매니저님이 기다리실라.”

예현이 이정을 챙기지 않고 혼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 봤자 귀엽기만 한데. 이정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예현을 따라 걸었다.

*****

“얼굴 아는 사람들 있으니까 웬만해선 차 안에서 내리지 말고, 나올 일 있으면 모자랑 마스크 잘 쓰고.”

이정이 예현의 손에 모자와 마스크를 쥐어 주며 말했다.

“누가 연예인이고 누가 일반인인지 모르겠네.”

나도 너한테 그 정도로 얼굴 가리라고 안 한다. 주석이 옆에서 이정에게 장난스레 잔소리를 하고는 말했다.

“그래도, 걱정되니까.”

“내가 애도 아니고, 다 알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주석의 핀잔에 조금 부끄러워진 예현이 이정을 밀어냈다. 이정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연락 잘 받고.”

“어차피 핸드폰밖에 할 거 없어. 가서 일이나 잘하고 와.”

걱정되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이정을 보낸 예현이 미리 모자를 눌러쓰고 핸드폰 화면을 켰다.

[저 왔어요.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보러와요. 오전 10 : 11]

단체방에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창 촬영 준비 중인 것인지 한참이나 숫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이정이도 좀 한가해지겠지. 언제 다음 작품을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 주 정도는 지금보다 한가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집에 돌아오면 늘 이정이가 있는 건가. 스토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오게 된 집이었지만 예현에게 그 집은 그새 편안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나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 그만큼 자주 찾아가면 되지. 애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하며 시작한 연애지만 시작이 어땠었는지는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이 행복하다는 게 더 중요한 거겠지.

[♩♪♬]

그렇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작스럽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뭐지, 이정인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확인하자 잊고 있던 사람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세모경찰서 유지석 경위입니다.]

지난번 빈집털이 사건 때 배정받은 사건 담당 경찰관이었다. 무언가 진행된 것이 있으니까 연락을 준 거겠지. 예현이 작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지난번 접수해 주신 사건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저희 쪽에서 사건 당일 자택 주변의 CCTV, 거리 CCTV를 확인해 봤는데요…….]

드디어 스토커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하는 걸까. 예현이 잔뜩 긴장한 채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그닥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일단 현장에서 머리카락 등의 흔적이 나오질 않아서 CCTV를 통해서 범인을 추적하려고 했습니다. 자택 주변 CCTV에는 범인이 찍혔습니다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문제요?”

[주택가의 CCTV는 확보했는데, 번화가로 나가서부터의 CCTV가 확보가 안 됐습니다. 게다가 버스 정류장 앞의 CCTV 보관 기간이 아슬하게 엇나가서…….]

아.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번화가로 가는 길목이 어디인지는 예현 역시 알고 있었다. 거기 CCTV가 장식이니 뭐니 하는 소문이 있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그래서, 못 잡는 거예요?”

[근처 CCTV를 조금 더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만, 최악의 경우에는……. 범인이 너무 흔한 체형에 흔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동선 파악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입니다.]

빈집털이에, 사실상 훔쳐 간 물건도 없으니 수사 진척이 느릴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영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으니 새로 파악되는 것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 많으십니다.”

예현이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좋은 일이 있으면 이런 일도 있는 게 인생이긴 하지.

그렇지만 빨리 스토커가 잡혀야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이정의 소속사 쪽에서도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이제 막 수사가 시작된 터라 따로 들어온 정보가 없다고 들었다.

“언제 마음 편히 우리 집에 가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싶기도 했지만 그 이유가 스토커 때문인 것은 싫었다. 게다가 언제까지나 예서를 혼자 둘 수도 없었다.

“하아…….”

그래, 아직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을 시기는 아니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똑똑-.

“예현 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을 바라보자 메신저 어플 프사로 자주 본 얼굴들이 차창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에요. 스토커 얘기 듣고 걱정했어요. 괜찮아요?”

재하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하고 말했다.

“명아 씨는 지금 해리 씨 케어 중이라 못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석찬과 보람이 뒤이어 인사를 건넸다.

붙임성이 좋은 재하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단체방에서 매일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도 마음이 편한 사람들이었다.

“기사 보고 엄청 놀랐어요. 뭐, 그만한 연예인이면 당연히 사생팬들 붙어 다니긴 하지만……. 기사 보니까 보통 미친놈이 아니던데요.”

“그러니까, 무슨 애인한테까지 협박 편지를 보내?”

이정의 소속사에서 낸 기사에는 예현에 대한 이야기도 한 줄 들어가 있었다.

집을 뒤졌다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스토커가 일반인인 그의 연인에게까지 협박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이라는 문장 뒤로 이어졌다.

연인이 되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는 그렇게 연락이 쏟아지더니, 이번엔 단체방의 인원과 예서만이 괜찮냐는 연락을 보내 왔다.

뭐, 어차피 연락 와 봤자 귀찮기만 하니 상관없으려나.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금방 잡힐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맞아요. 그런 짓까지 했는데……. 금방 잡힐 거예요.”

석찬과 보람이 예현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스토커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시고,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보람이 예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걱정 가득한 말에 예현이 되려 보람을 안심시키려 말했다.

“스토커가 잠잠해질 때까지는 이정이가 같이 있어 주기로 해서 괜찮아요.”

“아, 혹시 지금 이정 씨랑 같이 지내고 있는 거예요?”

“네. 당분간만…….”

재하가 정말 다행이라며 예현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고마웠다.

“금방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우리나라 경찰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맞아요. 요즘 CCTV도 잘되어 있고, 그래 봤자 악질 사생인데 철저해 봤자 얼마나 철저했겠어요? 편지 지문 검사 같은 것만 해 봐도 금방 나오지 않을까요?”

“아하하. 감사해요. 맞아요. 금방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장갑을 끼고 다녔는지 남아 있던 지문도 없다고 하고, 얼마 전에 있었던 무단침입 건도 CCTV 보관 기간 때문에 날아갔는데 괜찮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경찰이 나섰는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금방 잡을 수 있겠지. 예현이 희망적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촬영 이제 끝나 간다면서요?”

“아, 네. 뭐 추가되는 거 있어도 다음 주엔 끝날 것 같아요.”

“좋겠네요. 애인 한가해지면 데이트할 시간도 많을 거고……. 기다려지겠어요.”

“에이, 이정 씨가 촬영 끝난다고 한가해질 정도는 아니지.”

“그래도 한창 촬영 있을 때보다는 한가하겠지. 트집 잡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쉬는 시간이 끝났는지 핸드폰을 바라보던 재하가 얼굴을 팍 구겼다.

“뭐야, 시간 겁나 빨리 가네.”

“왜, 돌아오래?”

“어. 현지 언니가 찾으시네. 너희도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재하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직장이잖아요. 어쩔 수 없죠.”

“그렇긴 하죠. 칫, 그럴 거면 월급이라도 많이 주든가.”

재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가 봐야겠네요. 아, 맞다.”

뒤돌아서려던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촬영 현장 근처에 오면 알아보는 스태프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좀 그렇겠지만, 멀리서 봐도 괜찮으면 저기, 저 건물 위층에서 보는 거 추천할게요.”

“저 카페 건물이요?”

“네. 아까 언니들 커피 심부름 갔다가 오는 길에 봤는데, 저 건물에서 촬영 현장 되게 잘 보이더라고요. 계속 차 안에 있으면 답답할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많이 다니는 곳도 아니니까 시간 때우기에도 좋을 것 같고.”

예현이 재하가 가리킨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차 안에 있으니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뭐라도 하나 사 와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한번 가 봐야겠네요.”

“뭘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또 올게요. 그럼 이따 봐요!”

재하가 손을 격하게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재하 일행이 사라지고 난 후, 한참 동안 차 안에 남아 핸드폰만 쳐다보던 예현이 답답함에 힐긋 차 밖을 바라보았다.

커피라도 하나 테이크아웃 해 와서 마시면서 기다릴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 문을 열었다.

간 김에 촬영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살짝 내려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지갑을 챙긴 예현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따듯한 차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니 매서운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현은 추위에 덜덜 떨며 카페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추운 날씨긴 하지만 어차피 안에서 마실 거니까 굳이 따듯한 걸로 먹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네. 바로 앞에 단체 주문이 들어와서 시간 조금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으세요?”

“아. 네. 기다릴게요.”

촬영장에서 나온 사람인가.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야겠다. 예현이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고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재하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는 촬영장이 아주 잘 보였다. 배우들의 얼굴이야 당연히 구분할 수 없었지만 대충 어떤 행동을 하는지, 촬영이 진행 중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예현은 창가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창문 너머로 이정을 찾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발견한 이정은 긴 머리의 상대 여배우와 함께 촬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아마 명아의 담당 연예인이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해리였던가? 예현이 그 장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 표정이나 세세한 움직임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구경하고 있자니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어?”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촬영장을 구경하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예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이정이 해리를 끌어안았다. 카메라도, 마이크도 두 사람을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촬영의 일부인 것은 확실했지만 예현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배우고, 지금은 촬영 중이고, 두 사람은 연인 역할이니까 저런 장면이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

그래도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도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 내려다본 것일 뿐이지만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메리카노 주문하신 손님!”

한참이나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예현이 알바생의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예현을 몇 번이나 불렀던 알바생이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커피를 건네주었다. 예현은 뻘쭘한 얼굴을 하고 커피를 받아 카페에서 나왔다.

“하아…….”

내가 이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었던가. 예현이 스스로에게 놀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찬바람 좀 쐬고 정신 차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긴 곳은 실외가 아닌 카페 건물의 3층이었다.

예현은 커피를 빨아 마시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현의 기분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일인데, 저게 직업이라 그런 것뿐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지. 괜히 보고 있었나.

예현의 시선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창 너머의 이정을 따라다녔다. 이정의 실루엣은 해리를 다시 한번 껴안기도 했고, 입을 맞추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맞대기도 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 장면이 정말 입을 맞추는 장면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현은 그 장면을 보다 애먼 플라스틱 컵을 구겨 뚜껑을 날리고야 말았다.

“차가워라.”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모습을 보느라 그새 커피를 다 마셔 버린 탓에 남은 것은 얼음뿐이었다. 옷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얼음이 튀어 나가 바닥과 예현의 손을 더럽혔다.

떨어진 얼음을 다시 컵에 주워 담은 예현은 화장실에 들어가 얼음과 컵을 버리고 손을 씻었다. 기분만 처지는데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었지. 그냥 차에나 들어가야겠다.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은 예현은 화장실에서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남자 화장실은 4층이었기에 원래 있던 곳에서 한 층 더 올라왔었기에 창밖으로 보이는 면적이 조금 더 넓어져 있었다.

“저녁까지 촬영한다고 했었지.”

이제 겨우 3시가 다 되어 가는데, 하필 그런 장면을 봐 버려서는 남은 시간 내내 어떤 장면을 촬영하고 있을지 걱정이나 하게 되어 버렸다.

배우니까, 애정 연기를 할 수도 있고 죽는 연기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건데 뭘 신경 쓰고 있어. 신예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예현이 느지막히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고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타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급한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발소리가 뚝, 멈추었다.

예현은 왜인지 모를 오싹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민 반응이야.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툭, 누군가의 손이 예현의 등을 떠밀었다.

쿠당탕,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누군가가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

“수고하셨습니다.”

“네. 내일 뵐게요.”

촬영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8시를 넘은 시간. 몇 시간 내내 핸드폰 한번 못 보고 촬영을 마무리한 이정이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본래 입고 온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이정이 액정을 켜 쌓인 연락을 확인했다.

[몇 시간 째 차에만 있는데 안 심심해? 오후 3 : 10]

[현이 형♡ : 괜찮아. 옆에 카페에서 커피 하나 사오려고. 오후 3 : 12]

[현이 형♡ : 마시면서 기다리면 시간 좀 더 빨리 가지 않을까? 오후 3 :12]

예현에게서 온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이었지만 조금 이상했다.

예현이 아무리 무던한 사람이어도, 자신이 몇 시간씩이나 연락이 되지 않는데 그동안 메시지 한 통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이정아.”

“형, 형한테 예현 형이 따로 연락 안 했어? 몇 시간 동안 답장 못 했는데 뭐 하냔 연락 한 통이 없네.”

주석한테 따로 연락해서 바쁘다는 이야기라도 전해 들은 걸까. 그래서 굳이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이라면 말이 됐다.

“어, 그게…….”

그런데 주석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촬영하는 동안도 뭔가 이상했던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성거리는 것이,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했었는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무슨 일 있어? 뭘 그렇게 눈치를 봐.”

“그게, 촬영하는 동안은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주석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어느새 코앞까지 번진 불안감이 이정에게도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

“그게……. 사고가 있었어.”

“뭐?”

이정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사고라니, 누구에게 사고가 났다는 걸까.

주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이정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연락이 없는 예현. 지나치게 제 눈치를 보는 주석.

두 가지 상황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말해.”

“일단 좀 진정해. 지금 보는 눈 많아.”

짐을 챙기던 스태프 몇몇이 주석의 어깨를 움켜쥔 이정을 힐긋거렸다. 주석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일단 차로 가자. 가면서 설명해 줄게.”

주석이 이정을 잡아끌며 말했다. 대답을 재촉하는 이정을 차에 태운 주석이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다.

“……예현 씨한테 사고가 났어.”

“뭐?”

“당황스러울 건 아는데, 나 운전 중이야. 사고 내는 수가 있다.”

주석이 급하게 주차장에서 차를 빼며 말했다.

“카페에…… 촬영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다가 그 건물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더라. 카페 손님이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겼대.”

“언제 난 사고였는데,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이정이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 3시, 3시 이후로 연락이 끊겼었지. 그때 사고가 난 거라면 자신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이나 하고 있었다는 건가.

“……미안하다.”

주석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저 흉흉한 눈빛. 사고가 나자마자 알았더라면 아마 촬영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병원으로 달려갔겠지.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요즘의 이정은 이상했다. 실없어 보이면서도 벽이란 벽은 다 치던 놈이 요즘은 그저 허허거리며,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한동안은 의기양양하다가, 또 한동안은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굴더니 예현과 애인이 된 이후로는 하루 종일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지금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예, 예현 씨도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하셔서…….”

게다가 이 결정은 주석의 독단적인 행동도 아니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예현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예현 씨 : 이정이한테 말하지마세요. 적어도 촬영 끝날 때까지는 부탁드릴게요. 오후 5 : 21]

[예현 씨 : 저 진짜 괜찮아요. 오후 5 : 21]

그래도 애인한테 사고가 났는데 말을 하긴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려던 순간 예현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

[예현 씨 : 웬만한 검사는 다 끝났고, 혹시 모르니까 며칠 정도만 입원하면 된대요. 오후 5 : 21]

촬영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으니 적어도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이정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해 달라는데 제멋대로 떠벌거리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주석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검사 다 했고, 혹시 모를 상황 대비해서 며칠 정도만 입원하자고 했다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짜 큰일이었으면 나도 너한테 이야기했지.”

주석이 이정을 달랬다. 그러나 그런 주석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예현이 의도적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닌, 누군가의 악의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

“…….”

“아. 왔어?”

병실 안에 있는 사람 중 태연한 사람은 예현 한 사람뿐이었다. 이정과 주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예현을, 예현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크게 다치진 않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계단 꼭대기에서 굴렀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죠.”

예현이 두꺼운 깁스가 덧대진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등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을 느끼고, 시야가 기울어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응급실이었다.

“정신이 드세요?”

“오빠아.”

얼굴이 눈물 콧물으로 범벅이 된 예서가 흐엉, 울며 예현의 위로 엎드렸다.

“아!”

“아, 미안. 오빠 깁스해서 조심해야 되는데…….”

예서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려 보니 정말 다리에 깁스가 덧대어 있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내가 왜 여기 있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마지막으로 전화한 사람이 나라고 나한테 연락 왔어.”

아, 그러고 보니 점심 때쯤 예서에게 전화해 밥은 먹었는지, 뭐 하고 있는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봤었지.

“미안. 놀랐지.”

“당연히 놀랐지! 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예현이 몸을 일으켜 엉엉 우는 예서를 달랬다. 다친 사람은 예현인데, 어째 예서의 꼴이 더 엉망이었다.

“계단 아래에 쓰러져 있던 것을 같은 건물 손님이 신고해 주셔서 실려 오셨고요. 자세한 설명은 이따 회진 오시면 선생님께서 해 주실 거예요.”

“아. 네…….”

“어지럽거나, 다리 외에 따로 불편한 부분은 없으세요?”

“네. 그냥 조금 얼떨떨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

아픈 것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커서 고통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예현이 조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간호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어쩌다가 계단 아래로 넘어지셨는지, 어디부터 부딪혔는지 같은 건 기억 나세요?”

“아…….”

간호사의 질문에 예현이 그대로 굳었다.

어쩌다가 계단 아래로 떨어졌는지야 기억하고 있지만 이미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뽑아낸 예서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예서가 얼마나 놀랄지 걱정된 탓이었다.

“신예서. 너 얼굴 엉망이야.”

“어, 어?”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누가 보면 어디 초상이라도 치른 줄 알겠다.”

“잔소리는…….”

킁, 코를 삼킨 예서가 부끄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화장실로 걸어갔다.

예서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본인이 기억하는 것을 설명했다.

돌아온 예서로부터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주석이 받았기에 상황을 설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현은 혹시나 싶어 주석에게 찾아오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고, 결국 이정은 병원에 도착해서야 예현에게 생긴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재련 이사님이 오셔서 입원 수속이랑, 경찰분들하고 이야기하는 것 도와주셨어.”

“아, 아니. 그런 건 저한테도 이야기를 해 주시지…….”

사고가 나서 병원에 갔다는 것까지밖에 알지 못했던 주석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그대로 멈춰선 채 예현을 보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경찰은 뭐라던데? CCTV는 확인해 봤대?”

“바로 확인해 봤다는데 계단 쪽에는 CCTV가 없었대. 게다가 사고가 난 시간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라서 용의자 확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대.”

예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에 당황한 것은 주석이었다.

“그, 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스토커의 짓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촬영장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

경찰까지 다녀왔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걸까. 주석이 이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정말 괜찮으신……”

“형.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어? 어어. 가야지. 내가 나가야지.”

이정의 말에 주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눈치 보느니 차라리 빨리 나가는 것이 백번 나았다.

“내, 내일 촬영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긴 주석이 빠르게 병원 복도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 사람만이 남은 병실, 한참 동안 입을 닫고 있던 이정이 입을 열었다.

“왜 말 안 했어?”

“너 걱정할까 봐. 일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 들으면 괜히 방해될 것 같아서…….”

“그게 중요해?”

처음엔 놀랐다. 그다음에는 코앞에서 제 연인에게 사고가 일어났는데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말했어야지. 형이랑 내가 남이야? 내가 왜 그걸 다른 사람한테 들어서 알아야 하는 건데.”

그래도 크게 다친 게 아니라니까, 예현 같은 성격에 말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진 않다고 겨우 스스로를 진정시켰는데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 다친 데다가 경찰까지 다녀왔는데, 그걸 왜 이야기를 안 한 건데.”

“……서운했을 거 알아.”

“그 스토커가 그랬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걸 왜……!”

이대로 말하다가는 정말 예현에가 화를 내게 될 것 같았다. 이정이 겨우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화를 가라앉혔다.

“미안해. 그런데, 나도 경찰분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 안 한 거였어.”

“……뭐?”

“스토커, 금방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예현이라고 그 상황이 두렵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사실 병실로 올라가자마자 찾아온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운이 좋아서 이 정도라고 했다. 다리가 아니라 머리를 크게 부딪혔더라면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범인은 잡히지도 않았고, 계단에는 CCTV마저 없어서 언제 용의자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신변 보호 요청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번에 신예현 씨 쪽으로 찾아왔다던 기자. 기억하십니까?”

“아, 네.”

공개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찾아왔던 기자. 알고 보니 진짜 기자도 아니었던 그 남자.

예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이 품에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사람이 맞습니까?”

“마, 맞아요.”

예현이 깜짝 놀라며 사진을 받아 들었다. 두 달도 다 되어 가는 일이었지만 이 남자의 얼굴을 잊었을 리가 없었다.

“파화일보의 송희찬 씨는 이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이정 쪽에서도 그 수상한 기자 건을 넘기지는 않았었다. 즉시 해당 언론사에 연락을 취해 알아봤었지만 마땅한 수익은 없었다.

파화일보에 송희찬이라는 기자가 있는 건 맞았지만 예현을 찾아왔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실제로 존재하는 기자를 사칭한 것 같다고 들었는데,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걸까.

“실제 파화일보에서 근무하는 송희찬 씨를 조사해 봤습니다. 강이정 씨의 이야기를 꺼냈더니 바로 이야기하시더군요.”

사진 속의 남자는 송희찬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전과 8범의 범죄자라고 했다.

실제 송희찬에게서 예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였다고, 그렇지만 자기가 관심을 가져 봤자 별일 있겠나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주범인지, 공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신원이 파악되었으니 금방 사건에 대한 진술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금방 잡을 수 있는 건가요?”

“현재 다른 건으로 수배 중입니다. 체포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스토커에 대한 단서가 잡혔다는 생각에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아직 체포 단계까지 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마리라도 잡혔다는 것이 어디인가. 예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스토커가 잡히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드디어 그 스토커를 잡을 단서가 생긴 거잖아. 조금만 더 참으면…….”

“누가 형보고 스토커 잡아 달라고 했어?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화내는 것 같아 보여?”

이정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스토커를 잡는 것, 스토커에 대한 실마리를 잡는 것. 모두 자신이 바라 오던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현을 계단에서 밀친 것은 스토커지만 그런 스토커의 앞에 예현을 밀어 넣은 것은 이정 자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 때문에 자책하게 되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걱정하느라고 사고가 났다는 것도 말하지 않고 이제 스토커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되려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미리 말 안 한 건 미안해. 그렇지만 이제 스토커에 대한 실마리도 잡힌 데다가 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굳이 촬영하고 있는 거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 걱정을 왜 해. 그럴 시간 있으면 형 걱정이나 해야지, 왜 날 걱정하냐고.”

화를 낼 대상은 예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이정이 손에 파인 자국이 나는 것도 모르고 주먹을 쥐었다.

“나도 무서워, 그렇지만…….”

그런 이정을 보고 있던 예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드디어 수사가 진행되는 거잖아. 이제 너도, 나도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는 거니까 당분간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어서.”

규진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때까지의 인생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분명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만한 포인트가 있었는데, 실수겠지. 하고 넘길 게 아니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만한 언행이 있었는데.

마냥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다시는 연애 같은 것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겨우 두 달 만에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마냥 좋은 일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지금처럼만 흘러간다면 뭐든 다 잘 해결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미안. 걱정했지.”

“진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 사이, 어색한 침묵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

예현은 일주일 동안 입원한 채로 경과를 살피기로 했다.

지금은 다리를 제외하고 아픈 곳이 없다지만 며칠 사이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고, 스토커 문제를 감안해서도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게 다수의 의견이었다.

“정말 괜찮은데…….”

“괜찮긴. 나 다 들었어. 혼자 미끄러진 거 아니라면서…….”

이미 스토커의 만행으로 벌어진 사고라고 결론을 내린 예서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병원에 나타나기만 해 봐.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했다. 예현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절대 맞서려고 하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도망이나 가.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당분간은 모르는 사람이 말 걸거나 하면 절대 대답해 주지 말고 도망가.”

병원에도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재련이 직접 데려오고, 집까지 태워다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에 내버려 두었다.

신예서가 오지 말라고 한다고 내 말을 들을 애도 아니고, 차라리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나 내일 학원 가지 말고 여기 있을까 봐.”

“뭐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학원 가.”

“오빠가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학원을 가!”

“너 지금 학원 가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지?”

“아니거든? 날 뭘로 보고!”

예서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그래. 걱정돼서 그런 거겠지. 그렇지만 예현은 예서가 자신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핑계 대지 말고 학원 가. 아님 내가 공부하는 거 봐줘?”

“……아니. 그건 싫어.”

예서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예현이 공부를 봐줄 때마다 거하게 혼이 난 기억이 있어서였다.

“근데 학원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진짜 아니거든? 진짜 걱정돼서 얘기한 거야.”

“그래, 그래.”

예현이 예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정 오빠라도 있어 줘야 좀 안심될 텐데.”

“어쩔 수 없지. 이정 오빠한텐 그게 일이거든.”

오늘 아침 이정도 예서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예서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게 혼나고 촬영장으로 내쫓겼다.

“촬영 끝나는 대로 온다고 했으니까 오면 같이 차 타고 집에 가.”

“알았어.”

예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를 이렇게 길게 쉬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입원하고 있는 동안은 당연히 병가고, 어쩌면 퇴원하고 나서도 잠시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대리에게 연락을 남겨 둔 예현은 그녀에게 걱정 가득한 답장을 받았다. 알아서 처리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 잘하라는 답변이었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쾌유를 빌어 주는 것이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이잉-

그때, 예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현주 주임님 : 예현 씨! 소식 들었어!! 오전 11 : 38]

[서현주 주임님 : 괜찮아??? 그 놈 진짜 미친 놈 아냐?? 오전 11 : 38]

예현은 사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문자에 당황했다. 사고 소식을 알고 있는 건 이 대리님과 이정의 관계자들, 그리고 예서가 전부인데 대체 어디서 들은 거지?

이 대리님이 말한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이 대리님도 내가 누군가에게 밀려서 다쳤다는 건 모르는데.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법.

지잉- 지이잉-

조용한 병실 안에 예현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어지는 연락에 당황한 예현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김재하 씨 : 예현 씨! ㅠㅠㅠㅠ 오전 11 : 40]

[김재하 씨 : 어떡해요 그 스토커 진짜 미친 놈 아니에요?? 오전 11 : 40]

이 사람은 또 어떻게 사고 소식을 들은 거지. 당황한 예현이 고개를 들어 예서를 바라보았다.

“어어……?”

예서 역시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핸드폰을 바라보던 예서가 고개를 들었다.

“애들이 오빠 다친 걸 어떻게 알지?”

예서의 절친한 친구 몇 명은 예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입이 무거운 친구들이라 예현의 사생활을 소문내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종종 예현과 이정에 대해 궁금해한다고는 들었다.

“오빠 다친 거, 기사 떴다는데?”

예서가 그렇게 말하곤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핸드폰을 붙잡고 이런저런 것을 확인해 보던 예서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예현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예현은 예서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고 그것을 읽어 보았다.

한 연예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으로 시작하는 기사에는 예현이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과 사건의 개요가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일부 연예계 관계자들은 사생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 오던 연예인들의 스토킹 피해 문제가 극에 달하고야 말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기들이 하는 건 뭐가 다르다고. 예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지잉- 지이잉-.

골이 아파 이마를 짚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재련이었다.

[기사 보셨습니까?]

“……네.”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기사를 봤냐고 물은 재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어디서 샌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는 사람도 몇 안 되는데…….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회사 쪽에서 말이 샌 거예요?”

하, 안심할 구석 하나 없구나. 예현이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었다.

[촬영 스태프 중에 촬영장에 구급차가 오가는 걸 본 사람들도 몇몇 있어서, 정확히 어디서 이야기가 샜는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제보자에 대해서는 제 쪽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이가 없는 것은 재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미친놈이 그걸 잽싸게 언론에 제보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강이정은 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찍었고, 웨일즈 컴퍼니는 전화 폭탄을 맞게 되었다.

[사건이 이렇게 될 때까지 회사의 대처가 미흡했다는 생각은 안 합니까?]

[아티스트 보호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이번에 다친 것은 예현이지만 다음 타깃은 이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이정의 스토킹 피해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알려지며 소속사는 이정의 팬들에게 심심찮게 항의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자세한 건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짜증 나는 연락은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전화가 끊기자마자 무섭게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다.

이 인간이 왜? 예현이 핸드폰 액정을 보며 이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여보세요.”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신 사원!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김 과장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이 인간이 부하 직원이 다쳤다고 연락을 주는 그런 섬세한 사람이던가.

예현이 어딘가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대답했다.

“기사 보셨나 봅니다.”

[어, 봤지. 봤지. 아니, 할 일도 없는지 연예인 쫓아다니는 애들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미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네.]

“아하하…….”

마치 자신의 일인 것마냥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런 애들은 아주 그냥 콩밥을 먹여 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고 다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회사 걱정은 하지 말고 푹 쉬라고. 그, 미친놈 잡히면 연락 좀 주고.]

답지 않게 화를 내는 모습이 수상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이러는 거지?

뭔가 숨기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그게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거,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는데. 내가 오늘은 밖에 나와 있어서.]

“아닙니다.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주말 잘 보내세요. 과장님.”

병문안은 무슨. 오면 불편하기만 할 테니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안정에 더욱 도움이 될 터였다. 예현이 다급히 괜찮다는 말을 했다.

[아무튼.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회사 일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아주 푹 쉬란 말이야. 알겠지?]

“네.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한 예현이 전화를 끊자마자 표정을 찌푸렸다. 일이 자꾸만 커지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제발 이걸로 끝이길. 최대한 빨리 스토커가 잡히고 원래대로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예현이 길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예현의 입원 기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행히도 첫날을 제외하고는 핸드폰도 조용했고 예서 역시 더 이상 학원을 가지 않고 곁을 지키겠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갈 때 뭐 가져갈까?]

“아니. 네가 가져온 걸로 벌써 냉장고 꽉 찼어. 겨우 일주일 입원하는 건데 대체 뭘 얼마나 더 사려고.”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회사를 가지 않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틈틈이 전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냉장고 터지겠다.”

예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사실 출근도 하지 않고, 며칠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오래 쉬어 본 것도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래도 딴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신경 써 주는 이정이 있어서 괜찮았다.

‘심심할 거 같아서.’

며칠만 기다리면 촬영 끝이니 그때부턴 종일 곁에 있겠다며, 며칠만 참아 달라며 올 때마다 양손 가득 무언가를 가져온 이정이었다.

그중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온갖 OTT 어플이 결제되어 있는 태블릿PC였다. 덕분에 예현은 며칠 사이에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드라마, 영화 등을 시청했다.

이런 걸 무슨 재미로 보나, 했었는데 또 한번 보기 시작하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촬영도 끝나니까, 이제 병원에서 살아야겠다.]

“사흘만 지나면 퇴원인데 허세는.”

허세 섞인 농담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귀여워. 살짝 웃은 예현이 말했다.

“그냥 조심히만 와.”

몇 시간 전에는 담당 경찰관으로부터 가짜 송희찬 기자, 전과 8범의 김희성의 추적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방에서 목격담이 들어와 그쪽으로 이동했다고. 그 사람을 잡고 나면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질 것도 같았다.

그래, 차근차근 해결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다 해결될 거야.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따 봐.]

“응. 아무것도 사 오지 마. 얘기했다.”

이정의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얘 이래 놓고 또 이것저것 가져오는 건 아니겠지. 예현이 소소한 걱정을 하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이정 쪽에서도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짜 안 갈 거냐?”

한참 동안 이정의 눈치를 살피던 주석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분명, 이정이 본가에 가겠다고 했던 날이었다.

몇 년 만에 본가에 간다길래 이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나,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정은 돌연 그 계획을 취소해 버렸다.

물론 이유야 이해할 법했지만, 큰마음 먹고 본가에 갈 생각을 했을 텐데 이렇게 망설임 없이 취소해 버려도 괜찮은 걸까.

“그럼 가짜로 안 가게? 어차피 가 봤자 무슨 이야기 할지도 뻔한데 정 필요하시면 그쪽에서 다시 연락하시겠지.”

이정이 유정에게서 들은 이유를 떠올리며 말했다.

갑자기 왜 연예계에 관심이 생기신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정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연락을 주겠지.

가족이라고 해 봤자 이젠 남보다도 못한 사이. 체할 것이 분명한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예현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 없어.”

유정에게도 이미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촬영 때문에 제일 중요한 때에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만으로도 미안한데 그깟 일로 오늘까지 다른 곳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촬영 끝나고 나면 당분간 스케줄 없지?”

“아예 없는 건 아냐. 종방연이랑, 라디오랑……. 뭐, 지금보단 많이 한가해지겠지.”

주석의 이야기를 들은 이정이 살짝 웃었다. 미안한 만큼, 걸리는 것이 많은 만큼 더 잘해 주고 싶었다.

예현 역시 퇴원 후에도 며칠 정도는 더 쉴 의향이 있다고 하니 그동안은 정말 평온하게 지내야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생각해 둔 터였다. 그래, 예현의 말대로 이 답답한 사건도, 차근차근 해결되어 갈 터였다.

그래. 그래야만 해.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함을 억눌렀다.

*****

“뭐 사 오지 말랬잖아.”

예현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는 이정을 보고 경악했다.

“여태껏 옆에 못 있어 준 거 용서해 달라는 의미의 뇌물.”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옆에 없다고 화라도 낸 줄 알겠다.”

예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냉장고 꽉 차서 넣을 곳도 없는데.”

병원 밥도 잘 나오는데 왜 자꾸 먹을 걸 사 와. 예현이 작게 툴툴거리며 이미 꽉 찬 냉장고 안을 정리했다.

“나 이제 촬영 끝이야.”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예현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머리를 기대는 이정을 귀찮다는 듯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사실 예현 역시 이정의 촬영이 끝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지.”

“거의 백수다, 백수야.”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예현의 어깨에 기댄 이정의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이 짐짓 다정했다.

“마음 같아선 진짜 백수라도 되고 싶은데, 아직 날 찾는 곳이 많아서 그렇게는 못 해 주겠네.”

이정이 너스레를 떨며 싱긋 웃었다.

“다리는, 한 달 깁스해야 한다고 했었나?”

“어.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더라.”

예현이 두터운 석고가 입혀진 다리를 만지며 말했다. 다행히 한 달 정도 깁스를 하고, 또 한 달 정도 물리 치료를 받으면 다리는 금방 다 나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냥 한 달 내내 회사 쉬면 안 돼?”

“내가 다리를 다쳤지, 손가락이라도 다쳤어? 회사는 나가야지.”

“그래도 걱정되니까 그렇지.”

“……그럼 네가 태워 주든가.”

작은 목소리로 투정을 부린 예현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예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이정은 순간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빡였다.

“내가?”

“싫으면 말고.”

예현이 제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웠는지 손을 휘휘 저으며 얼굴을 숨겼다. 신이 난 이정이 예현의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싫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라도 좋지.”

“너 그러다 진짜 백수 된다.”

“백수 되지 뭐.”

사고가 난 첫날에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어느새 예현이 왜 다치게 되었는지보다는 당장 그가 자신을 믿어 주고, 의지한다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백수 대신 형사나 할까?”

“형사? 웬 형사?”

“내가 형사면, 밤낮 할 것 없이 CCTV든 뭐든 다 뒤져서 그 미친 스토커 새끼 당장 잡아 올 텐데.”

“네가 그렇게까지 안 해도, 진짜 경찰분들이 열심히 일해서 잡아 주실 테니까 실없는 소리 하지 마.”

반쯤은 진심이었다. 아니, 형사가 아니라 일반인 정도만 되었어도 범인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텐데 이럴 땐 얼굴이 너무 잘 알려진 유명인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경찰에서 새로 온 연락은 없었어?”

“그 가짜 기자, 수배 중이라고 했잖아. 지방에서 신고 들어와서 그쪽에서 찾아보고 있대.”

“이번엔 잡아야 할 텐데. 일주일이나 입원해 있는데 그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이정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신고를 하고 나면 금방 잡을 줄 알았는데, 온갖 매스컴의 관심이 쏠려 경찰 쪽에서도 꽤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스토커의 실마리는 그리 쉽게 잡히지 않았다.

‘사건이 터졌을 때 바로 신고하러 오셨어야죠. 몇 달이나 지난 일이라 CCTV 확보가 어렵습니다.’

‘이거, 지문이 너무 많아서……. 전부 식별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경찰의 말도 틀린 건 없었다. CCTV의 보관 날짜라고 해 봤자 다 거기서 거기,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씩이나 지난 일을 진술해 봤자 큰 성과를 얻은 것이 없었다.

그나마 들은 것이라고는 막연한 추측 몇 가지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스토커가 면식범일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지인이 아니고서야 알 수가 없는 정보를 알고 있다거나, 관계자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에까지 출입한다거나 하는 부분이 심상치가 않네요.’

‘거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관계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겠는데요.’

그 말을 들은 이정은 병문안을 오겠다는 재하와 그의 친구들의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그 사람들 중에 스토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촬영장과 관련된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정보를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스토커가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촬영장 스태프들과의 연락을 자제해 달라는 부탁에 예현은 단톡방마저 나간 상태였다.

“빨리 잡혀야 형도 마음 편히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이정이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말했다. 몸도 불편한데, 마음이라도 편해야지.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정이 아니었다.

자신이 미안해한다는 것을 알아서 부담 주지 않으려 괜히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촬영이라도 끝나서 다행이다. 하루 종일 옆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챙겨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예현이 이정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 이후로도 예현의 입원 생활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퇴원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모른 척하고 싶어서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게 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시간이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예현이 퇴원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퇴원이네.”

“그러게. 원래 평일엔 시간 엄청 느리게 갔는데, 일 안 하고 누워만 있는다고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예현이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갔고 어느새 내일이면 예현이 입원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일 안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는데, 쉬어 보니까 또 다르네.”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취직하고, 연차 수당이 아까워 꼭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조금 더 어릴 때는 쉬는 시간이 아까워서 부업이니 뭐니 하는 것도 하곤 했을 정도로 일에 집착하며 살았는데 이젠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놀기만 하는 것도 좋긴 하다.”

“그럼 계속 쉴래? 난 그것도 좋은데.”

흘러가듯 한 말에 이정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그럼 난 뭐 먹고 살고 예서는 또 어떻게 해.”

“내 돈이 곧 형 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면 되지.”

“니 앞에선 농담을 못 하겠다. 농담을.”

예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난 농담 아닌데.”

이정이 불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예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편한 옷을 입고 뒹굴거리며 입원 기간 동안 재미를 붙인 드라마의 속편을 보면 좋겠다.

그러다 현관문이 열리면 나를 마중하러 나오겠지. 시어터 룸에서 DVD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예현을 놀래켜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돼.”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긴 했지만 예현은 이정과 동등한 관계이고 싶었다.

예현 자신이 버는 돈이 이정이 버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무능력하고 가진 것 없는 주제에 이정에게 빌붙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난 내 집이 형 집이고, 형 집이 내 집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만하랬지.”

예현이 이정을 밀어 버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짐을 챙겼다.

그래, 지금 당장은 안 되지. 그렇지만 예현이라고 그런 미래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가 네 것이 되는 그런 미래.

언젠가 다른 이를 통해 간절히 바라다가 놓쳐 버렸기에 이제는 욕심내는 것조차도 두려운 그런 미래를 어느 순간부터 다시 꿈꾸고 있었다.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자주 가면 되잖아. 그러다 보면 어디가 누구 집인지 그런 게 중요해지겠어?”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빤히 보였다. 그래,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벌벌 떨던 신예현이 이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진짜 큰 발전이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예현의 등을 끌어안았다.

“잘 보이려면 내일도 내가 데리러 와야 할 텐데. 왜 하필 일정이 이렇게 잡혀 가지고.”

하필이면 몇 달 전부터 잡혀 있던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이 내일 아침부터 시작이었다.

드라마의 주연들과 함께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아침 일찍 시작해 다음 날이나 되어야 끝나는 촬영 시간이 긴 프로그램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프로그램은 안 나간다고 할걸.”

“책임감 없는 소리.”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책임감 없었으면 그냥 안 나가고 말았을 거라고.”

이정이 예현의 잔소리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자신을 변호했다.

“잘 다녀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예현이 그런 이정을 보며 웃었다. 잔소리 한 번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제 눈치를 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모레 아침에 온다며. 그럼 그날은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날이 내일 하루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예현의 말에 이정이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래. 우리에겐 내일도, 모레도, 또 그다음 날도 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두 사람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곤,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

다음 날, 예현은 주석과 함께 퇴원 절차를 밟았다.

“이정이는 그럼 혼자 간 거예요?”

“원래 재련 이사님이 오시기로 했었는데, 이정이가 예현 씨 애인이 자기냐고, 재련 이사님이냐고 은근히 짜증을 내서요.”

그놈이 질투하는 꼴을 다 보고.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주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요즘 자주 만나긴 했지만 뭐……. 잠깐 보기만 하고 헤어졌는데 그런 걸 가지고 그런대요.”

“그러니까요. 입원할 때도 이사님이 도와줬는데 퇴원까지 이사님이 도와주시냐면서 입이 툭 튀어나와 가지고……. 스무 살 때도 안 하던 짓을 해요. 아주.”

주석이 이정의 삐진 얼굴을 흉내 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 큭큭거리며 웃은 예현이 이내 미리 챙겨 둔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나요?”

“아, 네. 수납은 다 끝냈으니까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갈까요?”

“네.”

예현이 목발을 짚고 일주일 동안 익숙해진 병실을 떠났다. 병실에 있는 동안은 일부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휴식하는 데만 집중했는데,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집에만 있을 건데요. 뭘.”

예현을 집에 데려다준 주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겨우 하루 혼자 있는 것뿐인데 걱정할 것까지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려고요. 회사도 다음 주까지는 쉬기로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휴. 이제 정말 끝이 나야 할 텐데…….”

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스토커가 미친놈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람을 다치게 할 정도라니, 더 이상 단순한 스토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며칠 전에는 촬영 스태프들까지 싹 다 조사받았잖아요. 이렇게나 털었는데, 그놈이 인간이라면 뭐라도 밟히는 게 있겠죠.”

“그 가짜 기자 위치도 거의 다 파악했다고 들었어요. 그쪽이라도 잡히면 뭔가 나오는 게 있겠죠.”

예현이 애써 웃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전, 그놈의 행적을 발견했다는 문자를 받은 이후로 예현은 내내 담당 수사관의 다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가 보세요. 매니저님 없어서 이정이 외롭겠어요.”

“자유라고 아주 좋아하고 있을걸요.”

주석이 툴툴거리면서도 도로 문을 열었다. 하도 거슬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길래 대신 나오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이정을 혼자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신입 매니저 하나를 교육이랍시고 붙여 두긴 했지만 아직 첫 정식 출근도 못 한 햇병아리 중의 햇병아리. 사고 칠까 무서워서라도 빨리 가야만 했다.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잘 쉬시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다른 사람한테 연락하면 강이정 삐지니까 꼭 그쪽에 먼저 연락하시고요.”

주석이 농담 한마디를 덧붙이고 나갔다.

[♡ : 퇴원 했어? 오전 10 : 11]

[♡ : 혼자 있기 힘들면 예서 불러서 같이 있어. 집에 먹을 거라도 만들어 놓고 나올 걸. 깜빡했어. 오전 10 : 12]

그건 다행이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집에 왔는데 그 괴식까지 먹어야 했으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예현이 몰려오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저 없는 동안 대체 뭘 먹고 산 건지, 일주일 만에 비어 버린 냉장고가 낯설었다.

“뭐라도 있어야 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핸드폰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온 예서가 초인종을 눌렀다.

“오빠!”

그 짧은 새에 이것저것 사 온 예서가 식탁 위에 장 봐 온 것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집주인도 없는데 들어와도 돼?”

“이미 들어와 놓고. 집주인이 너 부르라고 했어.”

“이 집은 언제 와도 엄청나다. 진짜.”

스토커 잡히면 나도, 오빠도 원래 집으로 가야 하는 거지? 예서가 내심 아쉬운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예서 역시 스토커가 잡히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아직 애는 애였다.

뭐, 나도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니까 할 말 없나.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할게. 재료 정리만 해 줘.”

“뭐래. 오빠 그 다리로 어떻게 서 있어?”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얻어먹어야겠어? 나와.”

“나 애 아니거든?”

예서가 기어코 자신이 하겠다며 예현을 밀어내고 팔을 걷어붙였다. 급기야 예현의 목발까지 숨겨 버린 예서가 자신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요즘 인터넷이 얼마나 잘되어 있는데. 나도 요리해 보고 싶었거든.”

들뜬 얼굴의 예서가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예서의 등쌀에 못 이긴 예현이 예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예서가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예현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연락이 울렸다.

“오빠. 나 그럼 간다?”

“어? 어어. 잘 가.”

문이 닫히자마자 예현이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잡혔다고요?”

[예. 그 가짜 기자. 박건호 씨가 오늘 오후 경상도에서 체포됐습니다. 이번 건으로 체포된 것은 아니고, 다른 사기 및 횡령 건으로 수배되어 있던 상황이었던 것은 말씀드렸죠.]

“네.”

예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드디어 스토커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는 건가.

[사기 건으로 진술받고, 이번 사건에 대한 것도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사람은 스토킹 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예현이 당황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상관이 없다니. 그럼 대체 왜 기자까지 사칭해 가며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실제 파화일보 송희찬 기자가 박건호 씨를 만나면서 농담식으로 예현 씨와의 인터뷰를 따 오면 돈을 주겠다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실제 기자와 기자를 사칭한 사기꾼은 절친한 사이였고, 그날도 서로 술을 마시며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온 이야기가 최근 가장 큰 이슈였던 예현과 이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송희찬 기자가 말을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아, 그 애인 인터뷰라도 하나 따면 보너스로 최소 백은 들어올 텐데……. 나 사실 그 사람 어디서 일하는지까지 다 알거든? 근데 선배들이 다 말리는 거야.’

‘백?’

‘그래. 따 오기만 하면 조회수에, 보너스에……. 이것저것 챙겨 받을 건데. 아이씨. 이럴 거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걸 괜히 알아 가지고 상상하게 되네.’

박건호는 술에 취한 송희찬을 들들 볶아 예현의 정보와, 그 인터뷰로 들어온 금액의 반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고 한다.

“잠깐……. 잠깐만요. 그럼 그 사람은 제가 일하는 곳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데요?”

[송희찬 씨께서도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은데, 강이정 씨의 회사 동료로부터 들었다더군요.]

회사 동료? 누구? 예현은 급히 머릿속을 뒤집었다. 그러나 결론이 나오기도 전, 수사관은 친절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회사에 김주환 과장님이라고 계십니까?]

수사관의 말에 사고가 난 것을 알게 되자마자 부리나케 전화를 해 호들갑을 떨던 김 과장이 떠올랐다.

그래, 언제부터 그렇게 부하 직원을 챙기는 사람이었다고 연락을 하나 했는데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네.”

[그분과 아는 사이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하시더군요. 어쨌거나, 여러 가지로 교차 검증 해 봤는데 박건호 씨의 진술에 모순되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겨우 잡았다고 생각했던 스토커의 실마리가 사실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었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스토커 건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연예계 관계자들 위주로 용의자를 좁혀 나가고 있는 중이니까,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좋은 연락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예현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잡히면 뭐라도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는 다시 원점이었다.

“하아…….”

새삼스럽게 김 과장에 대해 또 실망을 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야 그의 기묘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갔다.

어쩐지, 스토커 이야기만 나와도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유난이라는 식으로 굴더니 자신이 뿌려 둔 정보가 있어서 불편했나 보지.

[♡ : 예서는 집에 갔어? 뭐 불편한 일은 없고? 오후 8 : 18]

[♡ : 내일 10시에 쯤에 출발해. 점심 때면 도착 할거야. 오후 8 : 18]

예현이 이정의 문자를 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짜 기자 사건과 스토커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는 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예현은 결국 어렵게 답장을 보냈다.

[예서 갔어.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다. 내일 봐. 오후 8 : 27]

답장을 보낸 예현이 핸드폰 화면을 끄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만나면 다시 말해야 할 거, 올라오는 길이라도 고민 없이 올라오게 두자.

그래. 내일 점심, 이정이 돌아오고 나면 이야기하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수고하셨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이 끝났다. 이정은 환히 웃으며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차에 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는 데 2시간 정도 걸리던가?”

“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러지?”

주석이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다. 이정이 굳이 대답하지 않고 백시트에 몸을 기댔다.

당연히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리도 불편한 사람이 집에 혼자 있으면 많이 힘들 텐데, 기껏 촬영을 끝내 놓고도 집에 가질 못하는 신세라니.

지잉-

멍하니 창밖을 보며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정의 손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예현이 일어난 건가.

이정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나 액정 위에 떠 있는 이름은 이정이 기다리던 것이 아니었다.

[강유정 : 요즘 바쁜가 봐? 오전 10 : 02]

안부를 묻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분명 용건이 있어 연락을 한 것일 텐데, 유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참이나 다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용건이나 말해. 오전 10 : 05]

[강유정 : 잠깐 만나지. 내가 네 집으로 갈테니까. 오전 10 : 06]

집이 어디인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당당히 그리로 오겠다는 말을 하는 것에 기가 찬 이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잠깐, 집으로 오겠다고?

이정은 곧바로 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자는 거야.”

[나라고 네 얼굴 보고 싶어서 가는 줄 알아?]

“아닌 거 아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가벼운 목소리에 불길한 느낌이 든 이정이 말했다.

“시킬 일이 있으면 그냥 전화로 해.”

[어머니가 아들한테 관심이 많으셔서 말이야.]

“뭐?”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박종아 여사가 버린 자식 강이정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차라리 유정이 자신의 안부가 궁금해서 연락을 했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을 정도로 우스운 소리였다.

“글쎄, 아들은 없는 셈 치기로 하신 것 아니었나?”

[그건 쓸모가 없을 때의 이야기고. 말했잖아? 요즘은 관심이 있으시다고.]

“직접 오시기도 싫어서 널 보낼 정돈데,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믿건, 말건. 어떻게 사는지 확인이나 하고 오라시는데 내가 뭐 어쩌겠어.]

이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온 것은 이정 혼자만이 아니었다.

천하의 강유정마저도 어머니 앞에서는 순한 양이 따로 없었으니, 사실상 이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박종아 여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정이 어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설득을 해 결국 귀찮은 짓. 하지 않고 넘길 수도 있었을 터였다.

종아는 이정을 모를지언정 이정은 종아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쁜 딸에게 스케줄을 빼서 아들의 안위를 직접 확인하고 오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핑계 대지 말고 솔직히 말하지 그래?”

이정은 예현의 일에 관심을 보이던 유정을 떠올렸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걸 보니 요즘 좀 한가한가 봐.”

[어머니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바쁜 건 아니라서.]

유정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숨기고 싶은 거라도 있나 봐? 답지 않게 유난을 떠네.]

“……하. 내가?”

숨기고 싶은 것. 순간 이정의 머릿속에 예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요즘 시끄럽던데, 이야기라도 하지 그랬어.]

“도와달라고 부탁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그런 것치고는 꽤 진심 같아 보이던데. 왜, 내가 네 가짜 애인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정곡을 찔린 이정이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진짜 애인도 아니고, 스토커를 끌어내려고 만난 애인 따위를 왜 걱정해.”

[그래?]

“이제 막 촬영 끝나고 올라가던 중이라 짜증 나서 그런 것뿐이야. 그래. 뭐……. 정 만나야겠으면 오든가.”

계속 불안해할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끝을 내자.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여유로움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 촬영도 끝이거든. 잠깐 이야기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결국 유정과 만날 약속을 잡은 이정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예현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으니 밖에서 조용히 만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네 연애까지 신경 쓰진 않을 거 아냐.”

가짜 애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마음이 상한 주석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네 누님이 아무리 무서운 분이라도 그렇지……. 예현 씨 들으면 섭섭하게.”

“형이 강유정에 대해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지.”

사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주석의 말이 맞았다. 강유정은 어머니에게만 유달리 관심을 받았을 뿐, 집을 나간 남동생의 애인에게까지 일일이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이정의 처음 보는 모습이 정말 우스워서 잠시 관심을 가진 것일 뿐, 돌아서면 잊고 신경 쓰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러나 그걸 다 알면서도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다시는…….”

괜한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됐다.

“됐어. 신경 꺼.”

이정이 입술을 연신 물어뜯으며 말했다. 예현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더 먼 미래를 꿈꾸게 된다면 언젠가는 알려야 할 사이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이정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기다리지 않는 서울이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

예현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점심께가 다 된 시간이었다.

[♡ : 일어났어? 난 이제 출발해. 2시간 정도 걸릴거야. 오전 9 : 48]

[♡ : 점심은 같이 먹자. 내가 해줄게 ㅎㅎ 오전 9 : 48]

얘는 대체 왜 자신의 요리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걸까. 이 정도면 정말 미각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아니, 그런 것치고는 멀쩡한 요리도 먹기는 잘 먹던데…….

멍한 머리로 이정의 미각에 대한 걱정을 하던 예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간이면 30분 내로 도착하겠네. 예현이 침대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 어제 요리를 하고 남은 재료를 확인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으려나.”

뭘 하기에도 애매한 양의 재료만이 남아 있었다. 분명 어제 예서가 이것저것 사 온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됐지.

‘나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는 내 방에 가져가서 써야겠다.’

그래. 과정 없는 결과가 어디에 있겠나. 예현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사 온 대신 그만큼 도로 가져갔으니 남은 게 없지.

“……편의점이라도 다녀올까?”

아파트 단지 내에는 온갖 편의 시설이 있었고 편의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편의점이라고 하기엔 조금 크고, 마트라고 하기엔 조금 좁은 크기의 가게가 지하 1층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잠깐 다녀오면 되겠지. 미리 준비를 해 놔야 이정의 손에서 만들어진 괴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예현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언제 도착해? 오전 11 : 38]

[♡ :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은데. 한시쯤? ㅠㅠ 오전 11 : 40]

아. 그럼 조금 느긋하게 나가도 되겠다. 빨리 준비할 필요까지는 없겠네.

예현이 서두르던 것을 멈추고 다시 냉장고를 열어 천천히 사 올 것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계란이랑, 두부도 있어야 할 것 같고……. 한 손밖에 못 쓰니까 많이는 못 사겠네.”

핸드폰 메모장에 필요한 것을 쓴 예현이 모자를 쓰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다녀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녀오면 12시 조금 넘은 시간일 테고, 넉넉잡아 12시 반부터 요리를 시작하면 이정이 돌아올 때쯤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알았어. 조심해서 와. 오전 11 : 51]

이정에게 답장을 보낸 예현이 목발을 짚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힘드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된 것은 집을 나선 지 5분이 채 되지도 않아서였다.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문제였다. 한 손으로도 어렵지 않게 이것저것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손으로 목발을 짚은 채로는 물건 하나를 잡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저, 좀 도와드릴까요?”

결국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파트 주민의 선의 덕에 겨우겨우 물건을 산 예현은 한쪽 팔에 비닐봉지를 걸친 채로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어?”

그렇게 편의점을 빠져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편의점 옆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사람의 옆얼굴이 보였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상태였지만 예현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들를 곳이 있다더니, 바로 여기에서 만나는 거였나 보네.”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겼다던 이정이 누군가와 마주 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같이 들어갈까?”

짐도 무겁고, 바로 옆에 있는데 혼자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카페의 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하고 대화 중에 알은체를 했다가는 이정도, 상대도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음료를 주문한 후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 당연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예현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몰래 기다리자니 짐이 있는 데다가 나가는 이정을 붙잡을 타이밍을 잡기도 애매했다.

“아. 문자 보내 놓고 기다리면 되겠다.”

[나 지금 카페 네 뒷 자리에 있어.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자. 오후 12 : 14]

문자를 보낸 예현이 이정의 뒷자리에 앉았다.

지잉-

바로 뒤에 앉은 이정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정은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해 보지 그래. 네 애인한테서 온 연락 아니야?”

이정의 약속 상대인 듯한 여자가 그의 핸드폰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남의 이야기를 엿들으면 안 되겠지. 예현이 의식적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애를 쓰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애인은 무슨.”

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필 노래가 바뀌는 구간이라 카페의 배경 음악 소리가 끊겨 들린 것뿐이었다.

그러니 돌아온 것이 평범한 대답이었다면 다시 핸드폰에 집중했을 텐데, 이정의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알 거 다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새삼스럽네.”

“듣기야 들었었지만, 들리는 얘기가 마냥 그런 것 같아 보이진 않아서.”

이정과 마주 앉은 여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사이좋아 보이던데?”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예현은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한 채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그래야 더 자극이 되지.”

“그 애인한테?”

“아니. 그 미친 새끼한테. 눈이 돌아갈수록 꼬리를 늘어트릴 거 아냐.”

미친 새끼. 그 미친 새끼가 누구인데. 설마 스토커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예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 한 건 하긴 했더라? 뉴스에도 나오던데.”

“덕분에 동정 여론도 생기고, 경찰들도 더 집중해서 수사하고 있고…… 얻은 게 많지.”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로 강하게 울려 퍼지던 심장 박동이 이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강이정이 맞나? 내가 뭔가 잘못 듣고 있는 건 아닐까?

다친 다리를 볼 때마다 자신이 더 아픈 얼굴을 하고 미안해하던 사람이었는데.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말투가 낯설었다.

“얘기라도 하지 그랬어? 좀 도와줬을지도 모르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나 봐?”

“주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지. 그걸 모를 나이는 지났지 않나?”

유정이 이정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도움받은 게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뭘.”

“도움? 아. 박규진? 그거랑도 관련 있는 거였나?”

박규진이라니. 그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 건데? 예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직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이 이야기를 꼭 듣고 있어야 할까? 혹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짓인 건 아닐까?

그냥 일어나 버릴까. 듣지 말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예현이 고민하는 동안 이정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덕분에 그쪽도 자극이 돼서 시키지도 않은 인터뷰까지 하는 열의를 보이더라고. 그러니까 그 스토커 놈도 눈이 돌 수밖에 없었지.”

이정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박규진의 멍청한 약혼녀가 찾아온 덕분에 일이 재미있어졌더라고. 시계 하나 값치고는 후하게 받았어.”

“뭐, 나야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지? 그런 거래라면 앞으로도 환영이니까 필요하면 연락해.”

유정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예현이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동안,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박규진이 멍청해서 다행이지. 아무리 제 집안이 근본 없는 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결혼도 하기 전에 첩부터 둘 생각을 하더라고?”

“뭐, 너한테는 다행인 거 아냐?”

“그렇지. 박규진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더라면 그 연극에 동참해 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

박규진. 연극. 결혼. 여러 가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저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은데, 알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지 않고 예현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기사까지 났을 땐 좀 놀랐어. 아, 약혼녀 앞에서 헤어지지도 않은 애인을 들켜 놓고도 그 회사 앞에 찾아간 박규진의 멍청함도 놀랍고, 가짜 애인 일에 네가 나선 것도 놀랍더라고?”

이정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지만 예현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이정의 표정이 보일 리가 없었다. 찰나의 표정을 본 것은 유정뿐이었다.

“뭐,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글쎄, 가만히만 있어도 잘 돌아가고 있었지 않았던가?”

“누나 네가 가르쳐 준 거였잖아?”

이정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말했다.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예현의 얼굴이 점점 새하얘져 갔다.

“사람 쉽게 믿는 거 아니라고. 가족이어도 이유 없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 잘 배웠으니 잘 써먹어야지. 그렇지 않겠어?”

“아하. 그렇긴 하지. 뭐…… 멍청하진 않으니 다행이야? 박채준이나 박채혁이 네 반만 됐어도 지금 같은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유정이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떠올리듯 킬킬거리며 말했다.

집을 나온 이후로는 일부러 EH에 관심을 끄고 살았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뻔했다.

아마 이정 자신이 두려워했던, 그래서 집을 빠져나왔던 그런 상황이 그 두 형제에게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러게. 그 둘이 머리가 좀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뭐, 지금 내 꼴도 우습기는 하지만. 이정이 부러 강한 척을 하며 말했다.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는 게 좀 더 편할 것 같아서. 복수심보다는 날 좋아하는 쪽이 그쪽한테도 더 유익한 이유이지 않겠어?”

“그래? 난 조만간 네가 그 사람을 집에 데려오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내가?”

헛웃음과 함께 튀어 나간 말은 진심이었다. 아직 너무 이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예현과의 미래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집에 데려가다니. 농담으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소리였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소개를 입에 올리는 유정에 어이가 없어 조소를 흘린 이정이 말했다.

“뭐, 그런 사람이어도 연애 정도는 할 수도 있겠지. 근데 소개까지 필요할 정도로 진지한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좀 웃기네.”

그러나 헛웃음의 이유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정은 이내 어렵지 않게 거짓을 말하기 시작했다.

“가족들한테 소개하려면 뭐, 결혼까지 생각한다는 건데…… 그럼 급이 맞아야 할 텐데, 조사해 봤으면 알지 않아? 진짜 사귀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는 뭐,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일어날 수도 있다고 쳐. 근데 적당히 해야 웃고 넘기지.”

진실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이정에게 중요한 것은 유정이 두 사람의 일에 관심을 끄고 사라져 주는 것이었다.

“그런 실없는 소리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그래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데.”

“송주호. 알아?”

그 뒤로도 두 남매의 대화는 이어졌지만 예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에, 가슴에 날아와 막히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차라리 듣고 싶지 않았을 때에는 그렇게 잘 들리더니. 어느 때보다 간절한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예현은 멍한 머리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인 걸까. 아니, 그냥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던 걸까?

2달, 이제 3달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강이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그를 잡아채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펑펑 울면서 그게 네 진심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예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새하얘진 머리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예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차라리 화라도 내고 싶은데, 울기라도 하고 싶은데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네 가짜 애인도 불쌍하네. 뭐, 그쪽도 얻은 게 있긴 한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예현의 귀가 천천히 열렸다. 카페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앞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이만한 직업이 어디 있겠어?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만한 조건이지.”

이정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불쌍하긴 하지.”

이정의 말에 예현의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엔 이정과 보낸 시간도 있었지만, 이정 덕에 잊고 있었던 다른 이의 목소리도 있었다.

‘너 좋은 사람이긴 해. 근데 너 열성이잖아. 게다가 그걸 커버할 만큼 배경이 받쳐 주는 것도 아니고…… 설마 진지하게 나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필 장소마저도 카페네. 헛웃음을 지은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 그리고 딱, 딱 하고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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