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렇게 됐어.”
“하아…….”
주석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이정을 노려보았다.
“스토커 경찰에 신고하는 건 좋아. 애초에 난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으니까, 잘됐지. 근데!”
대뜸 전화를 걸어서 스토커를 신고하겠다고 하더니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런 거라니. 폭탄도 이런 폭탄이 없다.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위약금은 내야 되면 네가 내고. 왜 그러는데? 예현 씨 그만 좀 괴롭혀.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니고 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러기로 했는데?”
이정의 말에 주석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주석이 떨어진 핸드폰을 줍지도 못하고 이정에게로 다가갔다.
“거짓말이지? 예현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기로 했는데. 정 못 믿겠으면 전화라도 시켜 줄까?”
주석이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이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아니다. 당분간은 연락 안 하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남의 눈치 많이 보는 사람인데……. 그냥 연락하지 마.”
“진짜야? 이게 현실이라고? 너 예현 씨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왜 아니라고 생각해. 좋아하는데.”
망설임 없는 대답에 주석의 입이 끝도 없이 벌어졌다. 미친놈. 강이정은 미친놈이 분명했다.
“계약서 그냥 태워 버리든가 하려고.”
이정이 어디서 찾은 것인지 모를 계약서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건 또 언제 가져온 거야. 주석이 이정에게서 계약서를 빼앗으려 했지만 키 차이로 인해 실패했다.
씩씩거리며 이정을 노려보던 주석이 크게 한숨을 쉬고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좋다고.”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 자신감 있는 것처럼 굴면서도 한 켠에는 불안을 가득 품고 있었고, 또 어느 날에는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것처럼 침울해하던 놈이었다.
한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늘 재수 없게 굴면서도 만사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굴던 인간이었는데, 지금의 이정은 재수가 없을지언정 가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응. 좋네.”
오히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아서 꼴 보기 싫달까……. 이정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주석이 말했다.
“됐다. 네가 언제는 내 말을 들었다고……. 그것보다 스토커는 갑자기 왜? 신고하기 싫다고 한 거 너였잖아.”
“내가 좋다면서 자꾸 우린 안 된다고 핑계를 대잖아. 그러니까 그 이유를 다 치워 주려고. 미적지근하게 흥신소 조사에만 맡겨 둘 바에는 경찰에 신고하고 어서 치워 버리는 게 낫겠지.”
그런 이유로 예현과 잘되어 보겠다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내버려 뒀던 스토커를 신고하겠다고.
“너 진짜 진심인 것처럼 군다.”
“진심이니까. 지금 기분 꽤 좋거든.”
그렇게 말하며 웃는 이정의 얼굴이 평소보다 해사했다.
알겠으니까 그만하라고 말하던 예현의 얼굴에는 분명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괜찮다고, 좋다고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걸 생각하면 여태 스토커에게 시달린 시간도, 주석의 짜증 난다는 시선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겠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고 기어코 계약서가 없어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나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잔소리 좀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 다 들어 줄 테니까 들어 줄 때 실컷 해.”
“미친…….”
주석이 말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정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저런 상태인데 뭐라 잔소리하기도 그렇고, 얘기해 봤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 뻔하기도 하고…….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가장 먼저 말해 줬다는 것이 이놈이 나름 나를 매니저로 생각하기는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 어쩌겠냐……. 재련 이사님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나 생각하자.”
이럴 시간에 대책이나 마련해야지. 주석이 그렇게 말하자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이미 얘기했는데.”
“……뭐?”
주석은 이정의 말에 등줄기 위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후,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강이정!”
“아이고. 이사님.”
재련이 두 사람이 있는 방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과 주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튀어나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
“그래서, 혼났어?”
“조금? 괜찮아.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다는데 뭐라고 하겠어.”
집으로 돌아온 이정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사실 예현은 그 대화 이후 아직 이정이 조금 어색한 상태였는데, 이정은 그저 평소보다 즐거운 얼굴을 하고 생글거리며 말을 붙여 올 뿐이었다.
“아무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스토커 건도 곧 기사 나갈 거야. 한번 마음먹으니까 여태 뭘 그렇게 무서워했는지도 모르겠네.”
이정이 칭찬이라도 바라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예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많이 혼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예현이 어색한 얼굴을 하고 웃었다.
만일을 대비해 계약서를 캐리어 안에 넣어 두기는 했지만 이제 계약서 때문이 아닌, 그저 함께 있고 싶어서 서로의 곁에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신경 쓸 것 없어. 내일 정리해서 신고 접수 하겠다고 했고, 공식 입장으로도 제대로 경고할 거니까……. 당분간은 그 미친놈이 날뛸 수도 있을 테니 조심해야 하긴 하겠네.”
목도리를 이유로 사진을 보내고, 이번엔 또 무엇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예현의 집까지 찾아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으니 고소까지 당하고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당분간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무리겠지. 경호원이라도 붙여 줄까?”
“무슨 그런 소리를 해.”
경호원이라니. 예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그러나 이정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태 아무것도 못한 건 그 일이 공론화되는 게 싫어서였으니까, 이젠 굳이 사릴 필요도 없지.”
“그런 소리 하지 마.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싫어.”
평범한 직장인이 경호원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예현이 식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난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져야지. 난 내 애인한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주고 싶은데.”
애인이라는 말에 예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애인, 처음 들어 보는 말도 아닌데 지금 듣는 애인이라는 단어는 여태 들어 온 것들과 느낌이 달랐다.
“…….”
예현이 얼굴을 붉힌 채로 입을 다물었다. 계약서가 없어도 이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으니 애인이 맞긴 하지만, 그렇지만…….
“일하는 건 형의 자유니까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형이 최대한 안전하게 지냈으면 좋겠는걸.”
그래도 정말 애인처럼 행동하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 분명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날에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상황이 어째 반대로 흘러갔다.
겨우 애인이라는 말 한마디 들었다고 이렇게 숙맥같이 굴어서야. 예현이 달뜬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스토커 때문이라고 하고 택시 타고 다니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론 회사 바로 앞에서 택시 타지 뭐.”
그렇지 않아도 괜한 소리 듣기 싫어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택시를 타고 내렸던 예현이었다.
돈도 많니, 로또라도 맞았니 하는 소리를 할 게 분명해 몰래 택시를 타고 다녔었지만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괜찮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다음 주엔 며칠 회사도 못 가니까…….”
당장 다음 주면 사이클 기간이니까, 최소 3일 동안은 휴가였다.
“잡힐 때까지 몸 사리면 되겠지. 경호원은 너무 유난 떠는 것 같잖아. 회사 사람들 보기도 창피하고.”
김 과장이나 리틀 김 과장이나 다름없는 박 대리, 입 싼 서 주임은 물론이고 배려 있는 이 대리마저도 놀랄 게 분명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애도 아니고…….”
“회사는 왜 못 가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정의 물음에 예현이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당장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믿기질 않는데, 다음주가 히트 사이클이라는 말을 할 정신이 없어 아직 말하질 않은 상태였다.
계속 이런저런 일들이 터지고, 내심 이정을 피하려고 하다 보니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기도 했다.
“아……. 별건 아냐. 그냥…….”
진짜 연인이 된 게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히트 이야기부터 꺼내려니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라 있던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때문에.”
예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정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뭐라고? 못 들었어.”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사이클이 찾아온 걸까. 그렇지만 어차피 같은 집에 사는 사이인데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예현이 눈을 꾹 감고 말했다.
“히트 사이클! 때문에…….”
비장하게 외친 말이 넓은 거실을 울렸다. 아, 이런. 너무 크게 말했다. 예현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하. 그래서……. 뭐야.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길래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건 줄 알았잖아.”
짧은 정적 후 이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별것도 아닌 걸로 왜 겁을 주냐며 얄밉게 핀잔을 준 이정이 말했다.
“다음 주?”
“응. 병원은 이미 다녀와서 주말부터 약 먹고 월요일이면 시작할 것 같은데…….”
연인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하는 대화가 이런 내용이라니. 아직 이정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실감이 나지 않는 예현에게는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하. 그것 때문에 일찍 온 거였구나.”
이정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촬영이 막바지라고 했으니 이정도 바쁠 테고, 그래도 집에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건 민폐니까 여기에 있을 수는 없겠지.
“어……. 걱정하지 마. 페로몬이 강한 편도 아니고, 주말부터 나가 있을 테니까 집에 페로몬 남을 일은 없을 거야.”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니 점점 더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말도 없이 집을 비울 수는 없으니 이야기는 해야겠지.
예현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말했다.
“3일로 안 되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고…….”
“……어딜 가겠다는 건데?”
이정의 물음에 예현이 고민에 잠겼다. 원래는 집에 돌아가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스토커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이미 받은 돈을 빼앗아 가지는 않을 테니 그 돈으로 숙소를 잡아 며칠 보내면 될 것이었다.
“호텔이나……. 혼자 지낼 수 있는 곳에서 보내려고.”
“왜?”
왜라니. 당황한 예현이 고개를 들자 뭔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한 이정이 보였다.
“애인이 빤히 집에 있는데, 혼자 히트를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 아니. 넌 촬영도 있고, 그리고…….”
계약서 따위 신경 쓰지 말자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대뜸 사이클 이야기부터 꺼내. 그렇게 이야기하려던 예현이 이정의 불퉁한 입술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촬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3일 밤낮으로 촬영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페로몬이 남을 텐데 그 상태로 촬영장에 갈 수도 없을 거고.”
페로몬샘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자신의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는 알파와 오메가는 없다. 그건 열성이건, 우성이건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이클 기간만큼은 예외였다.
약을 먹고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혀도 페로몬이 새어 나가고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이상 페로몬을 여기저기에 옮겨 붙게 만드는 것이 사이클이었다.
심한 케이스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아도 거실에 있는 사람의 옷에까지 페로몬을 묻힐 정도인데,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불규칙적으로 촬영장에 나가는 이정에게 자신의 페로몬이 옮겨 붙는다면?
상상만 해도 부끄러웠다. 예현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말했다.
“안 되지. 안 돼. 그냥 내가 며칠 동안만 집을 비울게. 어차피 내일 출근해서 휴가 일정 제출할 예정이었으니까 조금 넉넉하게 잡지 뭐.”
사이클 때문에 두 번 연속으로 무급 휴가를 써야 한다는 것이 뼈아프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정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사, 사이클이 평생 한 번 있는 것도 아니고.”
예현이 용기를 끌어내 말했다. 사이클이 평생에 한 번인 것도 아니고, 이번 사이클을 함께 보내지 않는다고 끝인 건 아니니까.
“이번에는 네 일에 집중해.”
예현의 얼굴이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이정이 그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틀린 말도 아니고, 예현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 빤히 보이는데 여기서 더 떼를 쓸 수도 없고.
이정이 마지못해 말했다.
“……그래. 사이클이 평생에 한 번뿐인 건 아니니까.”
겁쟁이인 예현을 너무 몰아붙였다가는 오히려 더 도망갈지도 모르는 일. 이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걱정되는걸.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있는데 왜…….”
“괜찮아. 히트 혼자 보내는 게 처음도 아닌데 뭐.”
아, 젠장.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예현이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촬영에만 신경 써.”
그렇지만 이번 사이클만큼은 혼자 보내고 싶었다. 촬영 핑계도 있고, 예현의 가치관으로 연인이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사이클을 함께 보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말부터면 이틀밖에 안 남았네. 그동안만이라도 많이 봐 놔야겠다. 그치?”
말을 돌리는 것이 분명한 예현의 모습에 이정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애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니 사이클 이야기를 하기 싫다고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이라니.
예현다워서 아주 귀여웠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보안이나 시설 괜찮은 호텔 추천해 줄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아냐. 그 정도는 하게 해 줘. 애인 사이에 그 정도도 못 받아 줘?”
이정의 말에 예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계속 놀라니까 놀리고 싶지. 이정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예현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정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생글거리며 웃다가 핸드폰을 들어 기어코 예현을 대신해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
오래 지나지 않아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의 소속사 공식 계정에 스토커와 관련된 글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웨일즈 컴퍼니입니다. 당사는 지난 2년간 아티스트의 의견을 고려하여 당사의 아티스트인 배우 강이정을 향한 스토킹, 협박 건에 대해 내부적으로 해결을 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으나 사건의 원활한 처리를 위해 해당 건을 경찰을 통해 수사 의뢰를 넣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회사와 아티스트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스토커에게 수많은 경고를 보내 왔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고, 최근 아티스트의 연인에게까지 협박과 스토킹을 일삼는 스토커의 행적에 끝내 신고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티스트에 대한 악성댓글, 루머 생성 역시 제보를 받아 법무법인을 통해 고소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관련된 정보는 [email protected]으로 제보를 받을 예정이며 내부 검토 후 고소 절차를 밟을 예정입니다.
언제나 웨일즈 컴퍼니와 배우 강이정을 응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입장문이 올라옴과 동시에 이정에 대한 기사가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예현은 기사가 날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현이 놀라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게 뭐야. 예현 씨. 스토킹 당하고 있었어요?”
서 주임이 업무시간에 딴짓을 하고 있었는지, 기사가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 먼저 소리를 쳤다.
“뭐? 무슨 소리야.”
“서 주임. 지금 업무 시간 아니야?”
이 대리가 작게 핀잔을 줬으나 이 사무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김 과장의 말이었다.
김 과장은 대놓고 딴짓을 하던 서 주임을 혼내기는커녕 그녀의 자리까지 찾아가 서 주임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니, 연예인 애인이라는 게 대수긴 하네.”
“어머. 이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두 사람의 말에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현을 바라보았다. 예현이 어색하게 웃자, 김 과장이 쯧쯧 혀를 찼다.
“연예인한테 그 뭐냐, 사생 하나둘 정도 있는 게 뭐 대수라고 기사까지 내고 난리야. 하여튼 유난이네.”
김과장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과연. 이런 사람들 때문에 여태 신고하기를 꺼렸었다는 거였구나.
예현이 이정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며 말했다.
“하하하……. 연예인도 사람이니까요.”
“집에 들어가는 것도 위험한 거 아냐?”
“그래서 당분간 택시 타고 다니려고요. 어차피 다음 주는 휴가니까 경찰이 최대한 빨리 수사해 주길 기다려야죠.”
하긴 다음 주에 사이클 휴가였지. 서 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해. 스토커들은 제정신이 아니잖아. 웬만해선 혼자 다니지 말고, 혼자 집에 있지도 말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떼잉. 유난은.”
예현이 김 과장의 툴툴거림을 자체 필터링하고 웃었다. 자신이 비웃는 그 사람이 본인 같은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참았는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속으로는 반박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월급쟁이니 참아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내일부터 쉬어서 다행이네. 겨우 일주일이긴 하지만 잘 쉬다가 와.”
이 대리가 예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래. 지금 몇 시간만 참으면 일주일 가까이 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걸.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현 씨!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이야기를 해 줬어야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세상에,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퇴근 시간, 기사를 본 것인지 사색이 되어 달려온 옆 팀 김 주임이 서운하다는 소리를 했지만 이것 역시 휴가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부디 그 미친 스토커가 최대한 빠르게 잡히길.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나 정말 괜찮다니까요. 스토커가 예현 씨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어차피 택시 타고 돌아가고, 바로 앞에서 내리는걸요. 그리고 스토커랑 운 나쁘게 마주치기라도 하면 김 주임님까지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예현이 택시를 잡는 곳 바로 앞까지 쫓아온 김 주임을 뒤로하고 차 문을 열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김 주임님. 좋은 주말 되세요.”
“조심해요. 예현 씨…….”
예현이 김 주임을 뒤로하고 차 문을 닫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 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호텔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면 히트가 끝날 때쯤에는 뭔가 해결될지도 몰라.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택시의 뒷좌석에서 고개를 젖혔다.
지이잉- 지이잉-
그러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예현의 핸드폰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라도 온 줄 알았는데,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가 연속해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김재하 씨 : 예현 씨 기사 봤어요 ㅠㅠㅠㅠㅠㅠㅠ 오후 6 : 13]
[김재하 씨 : 이정 씨가 티 안내서 그런 미친 스토커가 있는지 우리도 몰랐어요. 예현 씨한테도 난리쳤다면서요.. 오후 6 : 13]
[김재하 씨 : 괜찮아요??? 무서웠겠다 오후 6 : 13]
[유석찬 씨 : 김재하 진정해 오후 6 : 13]
[유석찬 씨 : 얘기 들었어요 그래도 이제 경찰에 신고도 했으니 금방 잡을 수 있을 거에요. 오후 6 : 13]
[윤보람 씨 : 집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오후 6 :14]
동시에 소식을 전해 들은 건지 단체방에 불이 붙었다. 핸드폰이 마구 울리는 소리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받는 것이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명아 : 괜찮아? 오후 6 : 14]
[괜찮아요. 당분간 집에는 안 들어가고, 잡혔단 소식 들릴 때까지는 조심히 지내려고요. 오후 6 : 15]
[김재하 씨 : 예현 씨 진짜 조심해요. 나 아는 사람도 미친 스토커한테 걸려서 진짜 크게 다친 적 있다고요 ㅠㅠ 걱정되네 오후 6 : 15]
[김재하 씨 : 절대 혼자 다니지 말고!! 오후 6 : 16]
재하의 유난 떠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작 만난 적은 한 번밖에 없는데, 메시지창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그새 친밀도가 많이 올라간 재하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혼자 안 다닐게요. 오후 6 : 17]
[김재하 씨 : 이정 씨 보고 옆에서 매일매일 지켜달라구 해요!! 오후 6 : 18]
예현은 제 손으로 호텔을 예약해 주고도 정말 괜찮겠냐며 자신을 걱정하던 이정을 떠올렸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 내가 사이클 처음 보내 보는 스무 살 어린 애도 아니고.’
요즘 약이 얼마나 잘되어 있는데 현대 사회에서 히트 사이클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페로몬만 아니면 일도 해도 될 정도니까 신경 쓰지 마. 핸드폰도 있고, 연락할 수 있는 시간도 있잖아.’
예현의 담담한 말에 결국 그를 보내 준 이정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예현이 택시에서 내려 이정이 메시지로 보내 준 호텔로 향했다.
*****
“예현 씨는?”
오랜만에 이정의 집에 올라온 주석이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동안 없어.”
이정의 불퉁한 말투에 주석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만.
“스토커 때문에라도 조심해야 할 텐데. 집에 가신 건 아닐 테고.”
“호텔에 있어. 빨라도 수요일은 되어야 돌아올 거야.”
생뚱맞은 위치에 주석이 의아한 낯을 하고 물었다.
“호텔? 멀쩡한 집 두고 호텔은 왜.”
“……히트 사이클 때문에.”
이정의 말에 주석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사귄다며? 아니야?”
“아마 맞을걸.”
“근데 왜?”
애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걸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멀쩡한 애인을 두고 호텔에서 히트 사이클을 보낸단 말인가.
“페로몬 때문에 민폐 끼치는 거 싫대.”
“아, 그런 데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긴 하지.”
주석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옷에 묻은 페로몬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은근히 상대의 페로몬을 드러내고 다니기도 하는 반면 그런 부분에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예현 씨 성격엔 그쪽이 더 잘 어울리기는 한다.”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지. 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
그러다 대놓고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정을 본 주석이 입을 다물었다.
“별로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주석이 아는 강이정은 절대, 애인이 묻혀 둔 페로몬 따위에 부끄러워할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계약서 찢어 버려도 된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렇긴 했지만, 이정이 애인에게 사이클을 함께 보내는 것을 거절당했다고 이렇게까지 자존심 상해 할 줄은 몰랐다.
뭐, 다음번도 있으니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알았는데 차마 기분이 나쁘다는 말도 못 하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꼴이라니. 조금 웃긴 것 같기도 했다.
“한창 내외할 때지. 내외할 때야.”
“그런 말 할 거면 빨리 퇴근이나 해 버리지 그래.”
놀리는 대로 반응하는 강이정은 정말 보기 드문데. 주석이 건수를 잡아 신이 났는지 깐족거리며 말했다.
“뭐, 어쩌겠어. 예현 씨가 호텔까지 갔을 정도면 어지간히 그러기 싫었나 보지. 네가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퇴근이나 하라니까. 집에 가기 싫어?”
이정이 주석을 흘겨보며 말했다. 이정이 예현과 정말로 사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놈이 기어이 미쳤구나, 하고 놀랐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미있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바뀐다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연애나 하라고 해 버릴 걸 그랬나 봐. 주석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뭐, 하긴 사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애인이랑 사이클을 보내는 것도…….”
들뜬 마음에 입을 나불거리던 주석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을 말해.”
이정이 낮은 목소리로 그르릉거렸다.
그래, 뭐. 정식으로 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장 함께 사이클을 보내기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게 이해는 갔다.
단, 머리로만.
“안 그래도 화풀이할 데 없어서 짜증 나는데, 몸소 화풀이라도 받아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럼 안 말릴게.”
조금만 더 건드리면 본전도 못 찾고 며칠 내내 저 성질머리를 받아 줘야 할 것이 분명하다는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이미 늦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나가.”
이정의 싸늘한 말에 주석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젠장, 오랜만에 놀리느라고 너무 신이 났던 모양이다.
이걸 어느 정도 풀어 주지 않으면 분명 이 불똥이 내일, 그리고 모레의 나한테 튈 텐데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한 거지. 연락은 하고 있고?”
“그럼 내가 히트 중인 애인을 혼자 호텔에 보내 놓고 연락 한번 안 하는 쓰레기로 보여?”
날 선 대답에 주석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젠장, 잘못 건드렸어.
“그, 그래도 뭐……. 예현 씨라고 네가 싫어서 그러겠냐. 그게 다 상황이 안 좋아서 그런 거지. 예현 씨는 휴가 냈지만 너는 촬영도 있고 하니까…….”
“그걸 누가 몰라.”
아니까 고집부리지도 못하고 보내 준 거잖아. 이정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아아.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나도 약간 걱정이 되네. 전화라도 해 볼까.”
“형이 예현이 형한테 전화를 왜 해.”
“그냥 안부 전화…….”
하면 안 되겠네. 말을 돌리려던 주석이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뭐, 집에 들어왔다고 전화라도 해 봐. 예현 씨도 내심 너 보고 싶을 거야.”
예현 씨한테 저 망할 놈 기분 좀 띄워 달라고 SOS라도 쳐 볼까. 주석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 한다라.”
이정이 예현에게 받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자를 떠올렸다. 오늘부터 히트가 시작됐을 텐데, 문자만으로는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지금 전화하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 하려나. 이정이 핸드폰을 들고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래. 전화라도 한번 해 봐. 원래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잖냐.”
“…….”
“그럼 난 이만 간다. 내일 보자고.”
그래도 예현의 얘기를 했다고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니 다행이다 싶었다.
나가자마자 예현에게 제발 이정이 기분 좀 풀어 달라고 문자라도 보내 놔야지.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슬금슬금 집을 빠져나갔다.
주석이 나간 이후로도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이정이 결심한 듯 핸드폰 화면을 켰다.
그래, 얼굴 못 보는 것도 억울한데 목소리라도 들어야지. 그 정도는 괜찮잖아.
고민하던 이정이 예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 소리가 유난히도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오래 지나지 않아 통화 연결음이 끊어지고 수화기 너머로 예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겨우 3일 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유독 반갑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뭐 하고 있어?”
[그냥…….]
목소리가 살짝 달뜬 것이 느껴졌다. 말끝이 늘어지다 못해 사라진 것을 보아하니 약으로도 열감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억제제는 사이클의 증상을 완화시켜 주지만, 그렇다고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평소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페로몬을 완전히 가려 주지도, 사이클로 인한 열감을 완전히 없애 주지도 못한다. 다만 속이 타는 것 같은 열감을 감기 정도로 바꿔 주는 정도일까.
그래도 이성을 유지시켜 주고, 혼자서도 사이클을 넘길 수 있게 해 주니 유용한 약이기는 했다.
[그냥, 있어.]
평소보다 늘어지는 목소리, 그리고 경계를 완전히 내린 듯한 말투의 예현이 푸스스 웃는 소리를 냈다.
“정말 혼자서도 괜찮겠어?”
[너한테 괜한 피해 입히기 싫어…….]
페로몬 좀 묻는 게 무슨 피해라고. 이정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걱정하면서, 나 혼자 있는 건 걱정 안 돼?”
이정이 투정 부리듯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당황했을 예현도 지금은 온몸이 나른한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울까.”
눈앞에 있지 않아도 예현이 침대 위에 흐물흐물 늘어져 있을 것이 빤히 보였다. 경계심을 낮춘 채 푸스스 웃는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난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 네가 나 때문에 뭐 하나라도 잃는 게 싫은걸.]
말을 받아치기는커녕 조곤조곤 대답하는 예현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사이클의 영향이겠지만, 지금이라면 어떤 것을 물어봐도 가만히 대답을 해 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응.]
망설임 없는 대답에 이정이 놀라 그대로 굳었다. 물어본 것은 자신인데도 예현보다 더 놀라서는 눈만 깜빡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도망만 다녀.”
[무서우니까…….]
“뭐가?”
[상황이…….]
하나같이 끝맺음이 없는 말이었지만 착실히 대답은 해 주는 예현이었다.
[근데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네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어지는 게…….]
예현이 대답 없는 이정을 대신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맨정신으로는 절대 못 들을 말에 이정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서워서…….]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응…….]
“괜찮아.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정말……?]
아, 이 귀여운 신예현을 실제로 볼 수가 없다니. 이정이 속으로 탄식을 했다.
“응. 스토커도, 사람들 눈치도, 형의 불안도 내가 다 해결할 거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다행이다…….]
예현이 이정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약속이고 뭐고 이대로 예현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히트가 끝난 후 예현에게 혼나려나.
조금 꼼수를 써서라도 만나고 싶은데. 머리를 굴리던 이정이 말했다.
“지금 괜찮아?”
[응……. 괜찮아.]
“나 안 가도 괜찮겠어?”
[…….]
잔뜩 늘어진 목소리로도 꼬박꼬박 대답을 내놓던 예현이 입을 다물었다. 고민이라도 하고 있나 보지. 이정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형 보고 싶은데…….”
[…….]
“형은 나 안 보고 싶어?”
[……안 돼.]
그러나 멍한 머리로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듯, 예현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거절을 말했다.
쯧, 이정이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섭섭하다. 난 많이 보고 싶은데.”
약과 히트 사이클에 몸이 단 것은 분명 예현일 텐데, 왜 자신이 더 매달리는 것 같아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안 돼.]
타이르듯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었다. 못 보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게 약 올리기나 하고.
“섭섭해. 아주.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서에 좋아하지 말라는 개소리를 쓸 게 아니라 매일매일 붙어 있어야 한다는 조항도 넣고, 나 좀 예뻐해 달라는 조항도 넣을 걸 그랬다.”
[니가 애야?]
“동생이잖아. 봐줘.”
예현이 말랑말랑해지니 이정 역시 그 장단에 맞추어 가는 것인지, 괜히 의미 없는 애교나 부리고 싶어졌다.
“형이 돼 가지고. 못됐어.”
[그러지 마…….]
예현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었는데, 정말 양심에 찔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못돼 가지고.”
그럼 그만해야 하는데, 흐물흐물해진 예현이 귀여워 멈추고 싶지가 않은 이정이었다.
“원래 집에 혼자 있는 게 당연했었는데, 이젠 겨우 며칠 혼자 집에 있었다고 기분이 이상하다.”
[벌써 둘이 있는 게 익숙해진 거야?]
예현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편이다 보니 이정이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돌아오지 않는 이상 예현은 늘 집 안에서 이정을 반겨 주곤 했다.
현관에 놓인 사이즈 작은 신발 하나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왜 이렇게 현관이 텅 비어 보이는 건지, 분명 현관에 신발 하나 두지 않은 것이 깔끔하고 좋다고 생각해 왔는데.
“응. 집이 텅 빈 것 같아.”
사람 하나, 옷 몇 벌, 신발 한 켤레가 사라졌을 뿐인데 집이 왜 이렇게 텅 비어 보이는 걸까. 이정이 그 이유를 알면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네 집이 익숙해져서 큰일이야. 이제 내 집은 너무 좁아 보여서, 돌아가면 익숙해지는 데 좀 걸릴 것 같아.]
예현이 쿡쿡거리며 말했다.
[예서가 없는 것도, 너무 익숙해져서…….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까 세상이 너무 조용한 거 있지.]
이정이 예서를 떠올렸다. 예현이 이 집에 들어온 후 몇 번 정도 더 만난 적이 있었는데, 첫 만남과는 달리 이제는 자신이 익숙해진 것인지 이정에게도 곧잘 말을 걸곤 했다.
“수다쟁이긴 하지.”
[예서는 지금 생활이 더 좋은 것 같던데. 돌아가기 싫다고 할까 봐 걱정이네.]
이정 역시 원래대로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기껍지 않았다. 사실상 계약서가 효력을 잃긴 했지만, 스토커의 폭주 건에 있어서는 이정 측이 안일했던 게 사실이기에 예서는 그대로 소속사 측의 지원을 받으며 그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계약은 사라졌어도 예서를 언제까지나 그곳에 둘 수도, 재련 측에서 예서의 월세를 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스토커 건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페로몬이 배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유난을 떠는 예현이 영원히 자신의 집에 머무를 리도 없었다.
“그러게.”
이정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도 자주 올게.]
“……어?”
예현의 말에 이정이 고장이라도 난 듯 굳어 버렸다. 자주 오겠다니. 어딜?
[시간만 괜찮으면……. 자주 갈게. 그럼 그런 마음이 좀 덜 느껴지지 않을까.]
지금 예현이 먼저 제집에 자주 오겠다는 말을 한 건가. 이정이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
“와. 이러기야?”
한껏 삐지게 만들더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이렇게 나오면 더 이상 서운하다고 떼를 쓸 수도 없잖아.
“평소에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내가 혼자 마음 졸일 일도 없잖아.”
[……마음 졸였어?]
예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겁쟁이인 그를 밀어붙여서 결국 사귀자는 허락을 받아 낸 것도 자신인 데다 지금도 혼자가 편하다며 혼자 사이클을 보내고 있으면서.
“응. 아주 많이. 그런데 그 말 들으니까 다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정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서운한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뭐,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겠지.
“솔직하게 말해 줘. 난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니까.”
사실은 대충 다 알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것과 짐작하는 것은 다르니까. 이정이 그렇게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머뭇거리던 예현이 말했다.
[……사실 나도 보고 싶어.]
섭섭하다고 한 말을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잠시 망설이던 예현이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미안. 그냥……. 괜히 부끄러워서 말을 못 했어.]
이런 식이라면 예현의 매일이 히트 사이클이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말했다.
[보고 싶어…….]
“형?”
예현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참 동안이나 오가는 말이 없었다.
[미안. 민폐 끼치면 안 되는데 이런 말 해서.]
“그럴 필요……. 형?”
잠시 후, 그 말 한마디를 남긴 예현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 그런 말을 해 놓고 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린 거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건 애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보고 싶다잖아. 혼자 히트 사이클을 보내고 있는 애인이 보고 싶다는데, 집구석에서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알파가 어디 있는데?
이정이 겉옷을 걸치고 차 키를 찾아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멍청히 기다리기만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얼굴을, 그리고 몸을 직접 보고 싶었다.
*****
“으음…….”
예현이 호텔 방 안에서 뒹굴거렸다. 약이 맞지 않아 한참을 고생한 지난 히트 사이클과는 달리 이번엔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열감만이 예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도, 몸도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고 이성의 끈은 희미하게 존재를 지운 지 오래였다.
이정과 연락은 계속해서 주고받고 있었지만 일요일, 히트 사이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면 연락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었기에 오늘은 핸드폰이 잠잠하던 차였다.
분명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힌 것은 자신인데, 왜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이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히트를 핑계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을 했다. 보고 싶다는 말도, 집에 자주 오겠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모두 맨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말이었기에 히트 사이클의 핑계를 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실컷 한 예현이었다.
챙겨 온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업무를 조금 정리하다 머릿속이 영 정리가 되지 않아 그마저도 그만둔 것이 한 시간쯤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통화를 하니 좋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고 이정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면서도 핑계였다. 사실 상대가 개의치 않으면 딱히 거리낄 것도 없을 만한 일이란 걸 예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일부러 유난을 떨며 도망친 것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내가 혼자 마음 졸일 일도 없잖아.’
자신이 답답한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조금 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어찌 됐든 이제 정말 애인 사이가 되었으니 마냥 피하기만 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거겠지.
히트 사이클이 끝나고 나면 다시 이야기해 보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려는 순간 호텔 방의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뭐지. 예현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호텔 직원은 주로 베타를 고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페로몬을 정리한 예현이 문을 향해 다가갔다.
“누구세요?”
올 사람이 없는데. 객실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예현이 문 앞에서 묻자 말없이 노크 소리가 돌아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문 앞에 있는 사람이 정체 모를 그 스토커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불안한 생각이 들자 기껏 정리한 페로몬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문밖에 서 있는 이에게도 그것이 느껴졌는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야.”
문에 가로막혀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익숙한 목소리라는 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문 안 열어 줄 거야? 나 지금 모자도 안 쓰고 왔는데.”
“뭐?”
예현이 깜짝 놀라 문을 열자 말과 달리 모자를 잘 눌러쓴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씨익 웃음 지은 그가 객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너, 거짓말…….”
“문부터 닫아야지. 복도까지 페로몬 다 새어 나가겠어.”
자연스럽게 예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정이 객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서 은은하게 단 향기가 느껴졌다.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왔어.”
이정이 씨익 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
밀어내야 하는데, 오늘만큼은 이성보다 본능이 앞섰다.
“표정이 안 좋은데, 나 안 보고 싶었어?”
“그게 아니라…….”
이정이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뻔뻔할 거면 끝까지 뻔뻔하든가,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라고.
“그럼, 나 그냥 돌아갈까?”
이정이 정말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돌려보내야 하는 게 맞는데, 정작 눈앞에 있으니 돌려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마.”
예현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끝 글자 하나만으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지만, 확실하게 그 말을 듣고 싶었던 이정이 다시 예현을 바라보았다.
“잘 못 들었는데. 뭐라고 했어?”
“……가지 마.”
예현이 이정의 옷자락을 살짝 잡은 채로 말했다. 그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겠어.
이정이 활짝 웃으며 예현을 끌어안았다.
*****
“으음…….”
이정보다 먼저 눈을 뜬 예현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보지 않고 페로몬을 양껏 드러내서 그런지 아직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상태가 개운했다.
멍하니 벽만을 바라보기도 잠시, 대강 정신을 차린 예현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하…….”
그렇게 도망 다니려고 애를 써 놓고 정작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가지 말라고 붙잡기나 하고. 한심하기도 이렇게까지 한심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제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일어났어?”
어느새 잠에서 깬 이정이 예현의 허리 위에 팔을 둘렀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상태였으나 그 와중에도 기분이 퍽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촬영 안 가?”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내자마자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로맨스라고는 한 톨도 없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녁 촬영이라 괜찮아. 그런 거 신경 쓸 정신이 있나 봐?”
이정이 몸을 일으켜 예현의 위로 올라가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른하고도 만족감 가득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걱정되니까 그러지.”
다시 자리에 눕게 된 예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분명 밤이 새도록 본 몸인데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고 나니 새삼 다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어. 직장인이면 다 출근부터 생각하고 보는 거라고.”
실없는 말에 예현의 머리 위에서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걸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다른 걸 걱정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이정의 머리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예현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빼내려 했다.
“읏…….”
그러나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듯, 다시 페로몬을 방출하는 이정에 예현은 도망가기는커녕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이정을 끌어안았다.
머릿속이 녹아내릴 것 같을 정도로 공기를 가득 채운 이정의 페로몬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이정이 페로몬을 드러냄과 동시에 예현에게서도 단 향이 풍기기 시작했다.
“약, 먹어야…….”
“애인이 눈앞에 있는데 약을 왜 먹어.”
이정이 예현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 버리고 예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늘어진 목소리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말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으로 입을 막아 버리자 예현의 향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때에 시간 많은 애인이 눈앞에 있으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예현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본 이정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
“가지가지 하네, 진짜.”
주석이 이정을 흘겨보며 말했다. 어제의 냉랭한 분위기와는 달리 생글생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재수가 없었다.
“뭐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시구만.”
숨겨야 할 필요라도 있나?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말했다. 향이 짙게 배진 않았지만, 저 만족스러운 표정과 옆에 꽃이라도 날아다닐 것 같은 분위기.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됐다. 내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한 것도 아니고, 성인끼리의 사생활에 내가 뭐라고 하겠어. 결론적으로 생각하면 나한테도 이득이긴 하니까…….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 보닛에서 탈취제를 꺼내 뿌렸다.
“그보다, 촬영도 이제 진짜 막바지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본인의 생계였다. 주석이 차를 운전하며 말했다.
“다음 주면 촬영 끝이고, 촬영 끝나고 나면 이제 미뤄 뒀던 활동들 해야지. 예능 섭외 들어온 거 정리해 놨으니까 다른 출연진들이랑 일정 한번 맞춰 보고……. 뭐, 그래도 영화 촬영까지는 좀 남았으니까, 그렇게 힘들지는 않겠다.”
예현을 만났던 것이 촬영이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었는데, 벌써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구나.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는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드라마 이후의 일정까지 끝이 나면 예현과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빨리 촬영이 끝나고 예현과 마음 편히 노닥거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빤한 얼굴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촬영이 끝나면 잠시 휴식, 가끔은 작품 홍보를 위해 예능이나 라디오 같은 것에도 출연하고 다시 대본을 읽고 촬영에 들어가는 일상.
지루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는 날들이 지겹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촬영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신기했다.
“이정 씨!”
촬영장에 도착하자 이정을 반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얼굴은 알고 있지만, 딱히 대화를 나눈 적은 없는 스태프였다.
“안녕하세요.”
“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단발머리의 스태프가 이정을 바라보며 우물쭈물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거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익숙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한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정 씨.”
명아가 재하의 뒤에 서더니 속삭였다.
“재하 씨, 정말 얘기하려고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는 거지.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하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저, 예현 씨는 잘 지내고 있나요?”
“……형이요?”
스태프가 형을 알 일이 뭐가 있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묻자 재하가 빠르게 대답했다.
“저번에 왔을 때, 명아 씨 번호 알려 주면서 좀 친해졌거든요. 기사 보고 걱정이 돼서……. 괜찮다고는 하는데, 어제는 연락에 답장도 없구…….”
전에 잠깐 데려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 멀리서 보기만 하겠다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어느새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나 보네.
“그래서 이정 씨한테라도 물어보려고요. 실례라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제는 몸이 좀 안 좋아서 연락 못 받은 거예요.”
“어디 아파요?”
이정이 대답 대신 가만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웃음의 의미를 눈치챈 듯한 명아가 재하를 잡아끌었다.
“왜, 왜요?”
“걱정해 주셨다고 전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명아가 재하를 끌고 어디론가 떠났다. 멀리서 명아가 무언가 설명해 주자 재하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이나 왔다고, 그새 친구를 사귀었네.”
이정이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계약 기간 동안 변한 것은 이정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날을 잔뜩 세우고 있던 예현 역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재하 씨가 워낙 붙임성이 좋아서 그래. 뭐, 좀 특이 케이스긴 하지만.”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주석이 말했다.
“명아 씨랑도 친하니까, 신기해서 더 치대다 친해진 거지 뭐. 나한테도 맨날 촬영 끝나기 전에 예현 씨 한 번만 데리고 오면 안 되냐고 물어본다고.”
“흐음.”
친구라. 이정이 가만히 명아와 재하를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뭐, 본인이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은은한 단내를 풍기는 이정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아. 재하 씨가…….”
예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굳이 호텔에서 돈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일어나서 핸드폰 보니까 연락 많이 와 있긴 하더라고.”
게다가 약보다 더 확실한 처방을 받았으니, 사이클로 인한 페로몬 역시 거의 진정이 된 상태였다.
아마 내일, 늦어도 모레면 사이클이 끝날 것 같았다.
“휴가 넉넉하게 잡아 놨는데, 목요일에는 복귀한다고 연락드려야…….”
“회사 가려고?”
이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날 버리고 가겠다고?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어쩔 수 없어. 직장인이잖아.”
예현이 이정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큰마음 먹고 무급 휴가까지 감수하기로 한 것이었는데, 지금 상태라면 굳이 하루를 더 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이정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어제부터 저 예쁜 얼굴에 몇 번이나 넘어가고 말았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이번엔 진짜 안 돼. 나도 내 일이 있는 거잖아. 넌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촬영하러 안 갈 거야?”
“갈 필요 없는데 나가지는 않지.”
“갈 필요 없는 게 어디 있어. 단체 생활인데, 가라면 가야지.”
예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안 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싫어.”
이정이 예현을 뒤에서 끌어안고 말했다.
“매일이 히트 사이클이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냉정해져서야. 마음 아프잖아.”
“실없는 소리.”
예현이 이정을 타박했다. 그러나 끌어안은 품이 싫지는 않은지, 예현은 가만히 이정의 투정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틀만 지나면 다시 주말이잖아.”
“주말이면 뭐 해. 난 주말이 일하는 날인데.”
이번 주말은 거의 풀로 촬영하는 거라고. 이정이 툴툴거렸다.
“평일엔 오후 촬영이고, 주말엔 인터뷰까지 껴서 거의 종일 촬영이니까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겠다.”
이정이 자신의 일정을 되짚어 보며 말했다. 다음 주면 모든 촬영이 끝나긴 하지만, 한창 분위기 좋을 때 며칠씩이나 얼굴 보기도 힘들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예현이라고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걱정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달콤한 일이었다.
예현 역시 이정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했다.
더 이상 이정을 피하지 않고, 그의 애정을 거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았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합리화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차라리 나도 직장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정이 예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같이 출퇴근하면,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는 거잖아? 일하는 신예현 사원님 얼굴도 더 자주 볼 수 있고.”
그러게, 그럼 정장 입은 이정이 모습도 볼 수 있는 건가.
“신입사원으로 들어가서 선배님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선배라는 소리에 괜히 부끄러워진 예현이 이정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신입사원 강이정, 배우 강이정. 어느 쪽이든 좋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맞는 일일 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촬영장에서의 이정은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 일에 아무런 애정이 없다면 그렇게 빛날 수도 없는 거겠지.
“왜? 지금 회사 마음에 안 들어? 나한테 추천해 주기 싫을 만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물론 꼴도 보기 싫은 김 과장과 차세대 김 과장인 박 대리,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입이 깃털처럼 가벼운 서 주임, 거기다가 이정의 열혈팬인 2팀 김 주임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직장 자체는 좋은 곳이었다.
“회사는 좋아. 애초에 안 좋은 곳이었으면 휴가 3일도 마음 편히 못 다녀왔지.”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야 해서 급하게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그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좋은 곳이었다.
알파, 오메가에 대한 복지도 좋은 편인 데다 야근이나 외근이 필수인 직종도 아니고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것도 많았다.
“웬만하면 이직하지 않고 쭉 다니고 싶을 만큼 좋지.”
물론 야근이나 외근이 필수가 아닌 거지, 승진에 반영되는 요소가 아닌 건 아니라 여태 사원이긴 하지만 예서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이니 이제 실적도 좀 더 챙겨야 할 테지만.
“그럼 나도 연예인 때려치우고 형 옆자리에나 들어갈래.”
“뭐래. 취직이 그렇게 쉬워 보여?”
“특별 전형 같은 거 안 되나? 회사 광고 모델 전형 같은 걸로.”
이정의 농담에 예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실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재미있긴 했다.
“아니면 지금 당장 대학 입시 준비라도 할까? 머리가 좀 굳긴 했지만, 그래도 고등학생 때는 나름 공부 잘했는데.”
“공부 좀 잘하는 수준으로는 어렵거든. 취직을 쉽게 보지 말라고.”
예현이 이정에게 밉지 않게 핀잔을 주며 말했다.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부심도 있었다.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을 갔어도, 4년 내내 과 수석을 했어도 자격증이나 기타 스펙이 없으니 서류전형부터 탈락한 경험이 다수였다.
“그리고 공부만 잘하는 걸로는 안 돼. 별의별 걸 다 요구한다고.”
“갑자기 면접관처럼 구네. 신 사원님.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아도 알거든요.”
이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뭐, 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외조부의 회사 낙하산이 되었을 테니 어차피 취업난 따위는 이정과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건 잘 알면서, 우리 신 사원님 옆에 꼭 붙어 있고 싶은 내 마음은 왜 몰라주실까?”
“……촬영 막바지라고 했지? 그럼 촬영 끝나고 나면 여유 생기겠네.”
예현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그런다고 빨개진 뺨이 숨겨지는 것도 아닌데, 하여튼 알기 쉬운 얼굴.
“그래도 아직 일주일은 남았는걸.”
이정이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리 긴 시간도, 짧은 시간도 아닌 시간이지만 이 타이밍에 일주일은 너무 길었다.
“……그럼 주말에 내가 너 있는 곳에 있을게.”
“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이정이 되묻자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뭐……. 재하 씨도 계속 촬영 끝나기 전에 놀러 오라고 하고, 마지막이니까. 조용히 차에만 있다가 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이정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한 건 예현이 자신을 위해 먼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뿐이었다.
“나야 좋지. 그런데 괜찮겠어? 주말에 나가는 거 피곤해했잖아.”
이정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예현을 떠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현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 정도도 못 참을 만큼 너 안 좋아하지는 않아. 애인인데, 겨우 그런 것 가지고 신경 쓰고 그래.”
귀여운 소리. 이정이 예현을 품에 안고는 환하게 웃었다.
*****
[김재하 씨 : 내일 예현 씨 온당 >< 오후 2 : 45]
[김재하 씨 : 다른 언니들이 예현 씨 얼굴 알고 있으니까 마스크 잘 쓰고 와용 오후 2 : 25]
예현이 잔뜩 들뜬 재하의 메시지를 보다 피식 웃었다.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된 사람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절친처럼 구는 건지 신기했다.
그것보다 더 신기한 건, 얼마 전이었다면 부담스럽고 짜증 났을 이 행동이 싫기는커녕 기다려지기까지 한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귀찮게 구는 것도 싫어하던 자신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정을 만난 날, 그리고 그의 연인이라는 기사가 났던 날에는 이정이 자신의 평탄한 인생에 찾아온 재난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 문제 없이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왜 이런 일에 끌어들이는 건지 짜증도 났고, 하루빨리 3개월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는데…….
‘잘 다녀와.’
예현이 출근하기 전,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준 이정을 떠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겨우 몇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최근 예현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되찾은 친구, 새로 사귄 친구들.
인연을 유지하는 것은 귀찮기만 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태 인생을 손해 보고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이따 봐. 퇴근 하고 나서 얼굴 정도는 보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오후 2 : 58]
문자 한 통에도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 것이, 확실히 연애 초기이긴 한가 봐.
예현이 이정의 문자를 보며 웃는 동안, 이정 역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현과는 달리,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이정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있었다.
*****
[강유정 : 곧 어머니 생신인거 알지? 식사 자리 잡았으니까 참석해. 오후 2 : 59]
예현에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도착한 문자 한 통이 이정의 심기를 건드렸다.
[강유정 : 네 스케쥴 확인하고 하는 말이니까 이번엔 같잖은 핑계 댈 생각 하지 말고. 오후 3 : 00]
어머니의 생일이 한 달 정도 남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 사이좋은 가족도 아닌데, 대체 왜 생일마다 자리를 마련해서 귀찮은 일을 만드는 건지.
하긴, 어머니도 아버지도 유정에겐 언제나 신뢰가 가득하시니 본인은 상관없으려나. 그럼 셋이서 화목한 가족 놀음이나 할 것이지 왜 자신까지 그 촌극에 끼우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에 차지 않는 자식,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라져 주겠다는데 굳이 자신을 불러다 서열 관리라도 하고 싶은 걸까.
이정은 유정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꼬리를 말고 도망간 지가 옛날 옛적의 일.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은 유정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노는 것마냥 심심하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기분을 잡치게 만들곤 했다.
[강유정 : 요즘 하는 일이 참 재미있던데, 심경의 변화라도 있나보지. 가족끼리 모인 자리에서 고민 같은거라도 얘기하면 좋잖아? 오후 3 : 01]
연이어 도착한 유정의 메시지에 이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전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유정과 자신의 거리는 멀수록 좋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이정의 인생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한동안은 별 관심 없이 각자 잘 지내길래 안심하고 있었는데, 유정이 보기에도 최근 이정의 행보가 꽤 이상해 보이긴 했나 보다.
아마 예현에 관련된 일을 말하는 거겠지. 지난번 도움을 받았을 때는 자신이 예현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었고, 그저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예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성격 나쁜 유정이 그걸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미끼를 뿌려야 잡히는 게 있지 않겠어? 오후 3 : 02]
이정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답장을 보냈다. 이걸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어 주겠지.
“하아…….”
집을 떠나고,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나가떨어진 패배자에게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건지.
이정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유정의 문자 때문일까. 그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
이정의 인생은 20살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세간에는 재벌 3세로 살아가다가 20세에 연기에 입문, 21세에 인기 있는 드라마 조연으로 눈도장을 찍고 승승장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닥 평탄하기만 한 인생은 아니었다.
“이정 씨는 고등학생 시절,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시다가 연기에 흥미를 느끼고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불안함을 느끼거나 하셨던 적은 없나요?”
한 토크 프로그램에서 받았던 질문. 이정은 그 질문에 이상적인 대답을 남겼었지만 퇴근하는 길, 차 안에서 한참이나 그 질문을 곱씹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불안하지 않았냐라, 이정이라고 갑작스럽게 평생 걸어오던 길을 떠나는 것이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길을 걷는 것이 더 불안했었기에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했을 뿐이었다.
“종필이네 자식들이 유정이 이정이 반만 닮았어도 내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이정의 외조부, 박주혁 회장이 농담조로 뱉은 말에 가족 식사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다음 학기면 유학 끝내고 돌아오는 게냐?”
“네. 조부님. 논문 통과되는 대로 바로 귀국할 것 같습니다.”
21살의 유정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박 회장이 가장 아끼는 외손녀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두뇌를 자랑하는 이였다.
뛰어난 머리와 박 회장을 닮은 성정, 우성 알파라는 타고난 형질까지.
“이미 회사 일을 하고 계신 오빠들에 비하면 부끄러운 정도죠.”
딸의 자식이라는 사실이나, 박 회장의 장손들이 그녀보다 몇 년이나 빨리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박 회장의 후계자였다.
“원, 겸손하기는.”
박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의 장손들을 흘겨보았다.
장남의 두 아들 역시 일반인들과 비교했을 때 뒤처지지는 않는 수준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내 후계자가 겨우 일반인들과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박 회장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돌아오는 대로 네 자리 마련해 두마. 아니지, 돌아오자마자 일부터 시키는 건 좀 그렇겠나? 몇 달 쉬고 들어오련?”
“이미 몇 년이나 뒤처졌는데, 몇 달이나 더 쉴 필요는 없지요.”
유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조기 졸업했지만 그래도 8년, 1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내가 삼촌의 자식이었다면, 남자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5년만 더 빠르게 태어났더라면 저 멍청이들은 내 상대도 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귀국 하루 뒤라도 할아버지께서 부르시면 가야죠.”
“껄껄. 그래야 내 손녀지. 알겠다. 준비해 두마.”
박 회장의 티 나는 편애에 그의 장남, 종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졸업 축하한다. 완전히 돌아오면 식사라도 한번 하자.”
겨우 얼굴에 힘을 풀고 사람 좋은 척 미소 지은 종필이 말했다.
아무리 뛰어나 봤자 자신의 아들들보다 8살, 10살이나 어린 계집애다. EH 후계 자리를 눈 뜨고 뺏길 수는 없지.
“실무는 처음이니 오빠들한테 많이 배워야 할 텐데, 그러려면 미리 잘 보여 두는 게 좋지 않겠니?”
“하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촌.”
유정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도 참, 우리 유정이가 어떤 앤데, 굳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잘할 거야. 채준이 채혁이도 바쁠 텐데, 자기 일 해야지.”
그때, 박 회장의 장녀이자 남매의 어머니인 종아가 그의 말을 받아쳤다.
“남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더 빨리 성장하지 않겠어? 난 유정이가 알아서 하도록 뒤에서 지켜만 보려고.”
제 오빠의 속을 살살 긁는 소리에 종필이 하하, 겨우 웃음 지었다.
“그래.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싸늘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박 회장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
“이정이가 고등학생이던가?”
“네. 아버지. 유정이 다녔던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박 회장의 질문에 대신 대답한 종아가 제 아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유정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들었다.”
어머니의 칭찬에 이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종아가 자식들 교육을 참 잘 시켰어. 잘 시켰고 말고.”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아버지 손자 손녀들이잖아요.”
종아가 기분 좋게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후로도 박 회장은 이정과 유정을 번갈아 칭찬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결국 종필과 그의 아들들은 들러리처럼 억지로 웃으며 대꾸만 해 주다 식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아하하. 그 일그러진 표정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탄 종아가 통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톤 높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역시 우리 딸, 그리고 우리 아들이 최고다. 예뻐 죽겠어. 아주.”
종아는 권력욕이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여자, 그리고 우성 오메가라는 것. 그리고 우성 알파인 오빠를 뒀다는 것.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하고 성과를 내도 그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결국 종아는 아버지가 정해 준 남자와 결혼하며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타고난 능력이 부족했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텐데, 뛰어난 머리만큼 큰 욕심을 가진 그녀였기에 더욱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못 하면, 내 자식들이라도 해야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다행히 그녀의 자식들은 태생부터가 종필의 아들들보다 앞섰다. 열성 알파인 그의 두 아들과 달리 종아의 자식들은 우성 알파였다. 그중 딸은 천재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인재였다.
이 애들이 내 꿈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거야. 오빠의 잘난 두 아들보다 더 잘난 내 자식들이 EH를 삼킬 거라고.
종아의 두 자식은 그런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며 자라났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며 까다로운 박 회장의 눈에 차는 자식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는 가족 식사 자리가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종아가 만족스러운 듯 시트에 몸을 기대자 유정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누구 딸인데.”
유정의 말에 종아가 활짝 웃음 지었다.
“그래. 이 엄마 소원 알지? 엄마 소원은 너희가 삼촌 보란 듯이 잘나가는 거야. 이 박종아 아들딸이 얼마나 뛰어난지, 누가 차기 회장 자리에 더 잘 어울리는지 제대로 보여 주라고.”
종아는 유정이 차기 후계자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정 역시 뛰어난 아이이기는 하지만, 유정만큼의 수재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아들이 누나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 반푼이 형제들보다야 제가 낳은 남매들이 훨씬 뛰어났으니 나이 차이 따위는 큰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정이 네가 대학 졸업할 때쯤에는 네 누나가 자리 잡고 있을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누나만 잘 따라가면 돼. 알지?”
“네. 엄마.”
이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정 역시 유정과 맞붙을 생각 따위는 해 본 적도 없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지. 질 싸움에는 응하지 않는 것 역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우리 아들이 박채준, 박채혁 같은 멍청이는 아니니까.”
종아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정은 멍청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딸 쪽이었다.
*****
“다음 학기면 졸업이던가?”
이정이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둔 시점에 유정은 이미 그룹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이나 성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고 냉정했다. 3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제 사촌오빠 하나를 재기불능으로 만든 그녀가 이정을 보고 물었다.
“어. 어머니는 누나랑 같은 대학 가기를 바라고 계신 것 같더라.”
방학을 맞이해 집으로 돌아온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정은 제 어머니가 원하는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학 입시 정도야 무난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터였고, 얌전히 대학 생활을 하다 졸업하는 대로 회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유정처럼 특별 대우를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반 사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회장님도 네게 기대하시는 바가 크신 것 같더라.”
유정의 말에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회장이 유정을 특출나게 아낀다는 것은 임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게는 별 관심도 주지 않으시는 분인데, 기대하는 바가 크다니.
“……회장님이?”
“어. 나보고 네가 돌아오면 잘 가르쳐 주라고 하던데.”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으나 이정은 위험함을 감지했다.
“네게 기대하시는 바가 큰가 봐.”
“……크게 기대하실 것 없는데.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잖아? 나는 누나 옆에서 같이 일하기만 하면 된다고.”
유정은 확실히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역대 EH 그룹 회장 자리에 여성이 올라간 적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무리 박 전무님 자제분들이 열성이어도 그렇지. 손녀, 그것도 외손녀가 후계 자리를 꿰찬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열성이라는 것이 정 걸리면 그 동생인 아들을…….’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임원들은 꾸준히 여자인 유정이 탐탁지 않다는 소리를 했다.
물론 그런 소리가 나올 때마다 유정은 보란 듯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분명 그녀 역시 그 소리를 지긋지긋하다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들을 필요 없어. 그 멍청한 영감탱이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지.’
종아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별 같잖은 소리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도 없는 거 알지?’
유정은 그 말에 대답하는 것이 지겹기라도 했다는 듯 채혁을 궁지로 몰아넣어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아직 종필의 장남, 채준이 남아 있지만 이정은 그가 나가떨어지는 것 역시 시간문제일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유정의 어딘가 싸늘한 말을 듣는 순간, 나가떨어지는 것이 채준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난 회장 자리 같은 데에 관심 없어. 누나도 알잖아?”
“확실히 지금의 너는 그럴 깜냥이 있는 인간이 아니지.”
유정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이정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이정은 그 말 한마디에 상황을 파악했다. 유정은 자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어머니한테 싫은 소리 듣기는 싫거든…….”
남매간의 정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닐 테고, 아마 상대하기도 귀찮으니 미리 선택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멍청한 놈은 가족으로 두느니 그냥 잘라 버리는 게 낫지. 너는 박채준, 박채혁 같은 멍청이는 아니니까…….”
유정이 이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을게?”
유정이 그렇게 말하고 이정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졸업까지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 이정은 그렇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다음 권에 계속.]
계약연애의 정석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