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추워…….”
예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분명 기온으로 따지자면 서울이 더 추울 텐데, 바닷바람이 매서운 탓에 체감되는 추위는 서울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추위 많이 타던가?”
“더위보다는 좀 타는 편…….”
예현이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막연히 더 아랫지방이니 추위가 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날씨가 이렇게 추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정이 그런 예현을 바라보다 가방을 받아 들었다.
“챙겨 온 건, 갈아입을 옷 한 벌이 전부야?”
“아니. 근데 일단 들어가서 짐 놔두고 나오자.”
예현이 벌벌 떨면서 앞장서 걸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시골 마을인데, 이런 곳에 숙소가 있긴 할까.
뭐,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온 거겠지.
이정이 작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예현을 따라 걸었다.
예현이 거리를 이리저리 살피며 길을 걸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 여긴가?”
그러다 뭔가를 찾은 예현이 한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이모.”
이모? 이정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집 안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연 것은 예현과 그리 닮지 않은 얼굴의 중년 여성이었다.
“현아. 왔나.”
키가 작은 여성이 나와 예현을 반겼다.
“얼마 만이고. 저번 기일에는 내도 바빴어 가지고, 서울에 올라가지를 못했다.”
예현의 이모가 예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온다 해 가지고 놀랐다. 뭐, 내야 언제 오든 늘 반갑다만은……. 음?”
그때, 뒤늦게 예현의 뒤에 서 있던 이정을 발견한 예현의 이모가 이정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잠시 눈을 찌푸리고 이정의 얼굴을 살펴보던 그녀가 알았다는 듯 돌연 손뼉을 쳤다.
“하이고, 딱 보니까 알겠네.”
그녀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 말했던 그 잘생긴 애인! 가 맞제? 하이고. 슬슬 결혼할라고 데려온 기가?”
잘못된 추론을 마친 그녀의 말에 예현과 이정이 동시에 굳었다.
‘내가 그 애인이랑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아직 안 했던가……?’
예현의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모가 말하는 애인은 당연히, 규진이었다.
이야기하기만 했지, 직접 소개해 준 적은 없어서 그런 것인지 얼굴을 몰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고, 이제 막 스물여덟 됐는데 뭐 벌써 결혼을 할라 그라노. 너무 급한 거 아니가?”
이모가 호들갑을 떨며 예현과 이정을 집 안으로 들였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말할 틈이 있어야지. 예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열었다.
“이모, 그게 아니라……”
“아, 아직 식 올릴 거는 아니고, 그냥 인사부터 하러 온 기가?”
이모의 얼굴이 잔뜩 들떠 있었다. 하긴, 스물여덟 살짜리 조카가 갑작스럽게 찾아올 만한 이유로 떠올릴 법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이고. 내는 니 좋은 대로만 하면 됐다.”
“이모님.”
그때, 이정이 예현의 어깨를 잡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아, 내가 인사도 안 하고 혼자 떠들기만 했네. 예현이 이모입니다. 예현이 애인 맞지예?”
이모가 뒤늦게 이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정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예현이 형 애인은 맞는데요. 아마 이모님께서 알고 계신 그 옛날 애인은 아닐 거예요.”
“……?”
이모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예현과 이정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이정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애인은 애인인데, 저는 새 애인이거든요.”
“이게 무슨 소리고……?”
예현의 이모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
“이모한테 헤어졌다는 얘기를 안 한 걸 잊고 있었어. 어차피 기사로 나가기도 했고, 어딜 가나 내 얘기를 아는 사람들뿐이라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예현이 방 안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집에 오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이곳은 예현의 이모가 사는 집이었다. 원래는 예현의 외갓집이었던 곳이기도 했다.
예현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텅 비어 있었던 곳이었지만 몇 년 전 예현의 이모가 귀농하면서 이모의 집이 된 곳. 예현은 그곳으로 이정을 데려온 것이었다.
“부산에 사실 때도 세상 소식에는 딱히 관심 없으신 분이었는데, 여기로 돌아오시면서 완전히 관심 끊으셨나 봐.”
예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름 전 국민에게 알려진 배우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자만하고 있었나 봐.”
이정이 장난스럽게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예현의 이모는 이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배우라고?’
‘이모, 요즘은 텔레비전도 안 보세요?’
‘내 드라마 많이 보는데?’
드라마를 많이 보긴 한다지만, 예현의 이모가 보는 드라마는 일일드라마나 주말연속극이었다.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 그런 거는 안 보지. 여기 사람들은 10시면 다 불 끄고 자는데. 가끔 설이나 추석 때나 늦게까지 불 켜져 있고.’
물론 그런 시골인 걸 알기에 마음 편히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데려온 거긴 했지만,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줄 걸 그랬다.
“더 노력해야겠지. 그치?”
“아냐. 아무튼……. 마스크나 모자는 굳이 쓸 필요 없어. 이모한테도 들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연예인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거든.”
예현이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역시, 혹시나 싶어 챙겨 오길 잘했지.
“어쨌든, 바다 보러 가자.”
예현이 가방 속에서 꺼낸 빨간 목도리를 목에 걸며 말했다.
“……그거, 챙겨 왔네?”
“혹시나 추울까 봐. 이렇게 추울 줄 알았으면 목도리만 가져올 게 아니라 귀마개나 장갑까지 다 챙겨올 걸 그랬나 봐.”
예현이 목도리를 단단히 매며 말했다.
이모가 귀농한 이후로 이곳을 찾은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그러나 두 번 다 겨울은 아니었고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았었기에 밤바다가 이렇게 추운 줄은 몰랐다.
“넌 괜찮아?”
이정이 가만히 목도리를 매는 예현을 바라보았다.
이정은 예현의 집에 다녀온 이후 주석을 닦달해 스토커가 보낸 사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진 위에 스크래치를 내고, 네 것도 아닌데 왜 하고 있냐는 개소리를 써 놨다고 들었는데 정작 본인은 저 목도리를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걸까.
괜히 혼자 마음 불편해한 것 같아 기분이 미묘한 이정이었다.
하필 바다, 하필 저 목도리, 하필 밤. 하필 스토커가 집착하는 물건.
이렇게까지 겹치기도 힘들 텐데, 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네 가지나 겹쳐 버린 걸까.
“난 추위 많이 안 타서 괜찮아.”
이정이 그런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 목도리 마음에 드나 봐.”
그저 눈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 선물한 것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목도리를 선물할 걸 그랬다.
아니, 진작에 버려 버릴걸. 이정이 속으로 후회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어? 어. 그렇네.”
스토커가 보냈던 사진을 생각하면 거들떠보기도 싫은 물건이어야 할 테지만, 예현은 사실 이 목도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비싼 물건이라는 걸 들은 이후로 더 그랬다. 내가 그 브랜드 물건을 언제 또 가져 보겠어. 부드럽고, 예쁘고, 따듯하기도 하고……. 아무튼 사용하지 않고 구석에 두기에는 아까운 물건이었다.
그리고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대표작이라던 영화 포스터 속 이 목도리를 하고 있는 이정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었다.
그러니 보는 눈 없는 곳에서라도 하고 다녀야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이럴 때나 마음 편하게 해 보는 거지, 뭐.”
아, 이정은 스토커를 자극한 게 이 목도리라는 걸 모르던가. 예현이 고개를 들어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정은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 예현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목도리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갈까?”
“그래. 가자.”
예현의 말에 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음 편하자고 온 거잖아. 좋게 생각하자. 얼굴 드러내고 걱정 없이 길거리를 다니는 것도 오랜만이긴 하잖아.
“모자도, 마스크도 없이 산책하는 건 오랜만이라 기대되네.”
“확실히 아무 생각도 안 들긴 한다. 추워서…….”
예현이 덜덜 떨며 말했다. 머릿속을 비우고 싶다며 감행한 밤 외출의 효과는 확실했다.
경치고 뭐고 너무 추워서 잡념이 떠오를 틈이 없었다. 매서운 바닷바람은 훌륭한 해결책이 되어 주었다.
“추위를 이렇게 많이 타면서 밤바다 산책을 가자고 한 거야?”
“그냥 충동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어.”
예현이 추위에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목도리에 부빗거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강이나 갈 걸 그랬나 봐.”
“아냐. 그럼 이렇게 다닐 수가 없잖아.”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모래사장을 약하게 발로 찼다.
카메라가 없어서 그런 건지 지나치게 조용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기는 했다.
예현이 자신을 걱정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와 줬다는 것 역시 꽤 마음에 들었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예쁘게 웃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리고 나도 마음 좀 비우고 싶었거든.”
예현이 그런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두 사람의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 속에는 서로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니까 좋다.”
예현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멈추어 섰다. 매서운 바람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릴 때도 있었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길래 집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형이 이런 변덕을 부렸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정이었다.
두 사람 중 상대가 왜 답답해하는지를 예상조차 못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듯, 혹은 입 밖으로 이야기하기가 두려운 듯 그것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건 아닌데…….”
예현은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놓인 길이 너무 또렷하게 보여서 어지러웠다.
마음이 가는 대로 걸었다가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너무 잘 아는데, 잘 아는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촬영장에 가서 이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니 괜히 기분이 나빴고 계약 기간의 절반가량이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예현은 속상해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우리는 표면상의 연인일 뿐, 정말 마음을 주고받은 연인 사이가 아니야.
이정이가 남한테 잘해 준다고 아쉬워할 필요도, 자격도 없어. 내게 남들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건 계약서 때문이야.
“…….”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그 계약서가 원망스러웠다.
계약서가 없었다면, 그렇게 만난 관계가 아니었다면 좀 더 욕심내 봐도 됐을 텐데.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야, 애초에 계약서가 아니면 만날 일도 없는 관계였잖아. 뭘 욕심내려고 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반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냥, 헤어지고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고 기사 내고 종종 만날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정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그다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예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고 부정의 답을 내놓았었다.
‘그렇긴 한데, 좀 서운하긴 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기분이 조금 들떴었다는 걸 알면 이정은 어떤 얼굴을 할까?
예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돼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
정답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빤히 보이는 오답을 고르고 싶어지는 이유, 맨정신으로는 선택할 리가 없는 길을 걷고 싶은 이유.
예현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를 애써 가라앉히며 무지의 핑계를 댔다.
“그래?”
나는 그 대답을 알 것 같은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닌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하긴, 마음이라는 게 늘 이성적으로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데, 자신이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다고.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정이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바라보다 말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뭘 하고 싶은 건지.”
왜 기분이 나빴던 건지. 왜 며칠 내내 애먼 사람들한테 틱틱거리며 기분 나쁜 티를 냈던 건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인정할 수가 없었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긴 한데…….”
이정이 고개를 돌려 예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이 추위로 인해 발그레해져 있었다.
코끝과 양 뺨만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꽤 귀여워 보였다.
“그럼 좀 더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나 여태 수많은 작품에서 연기해 온 것처럼 열렬하고 강렬한 감정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대본에서는, 그리고 연기 공부를 위해 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럴만한 이유들을 가지고 차근차근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거나, 강렬한 계기로 인해 첫눈에 마음을 던진다거나 하던데…….
“아무튼 이런 생각이 들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러나 지금 이정의 감정에는 강렬한 계기도, 머릿속을 울리는 종소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차라리 남의 입장에서 보면 좀 더 쉬울까? 이정이 예현의 빨갛게 물든 코를 콕 찔렀다.
“아. 뭐 하는 거야.”
“빨개졌길래.”
이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쁜 얼굴이 표정을 찌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퍽 귀여워 보였다.
“그냥, 어렵네.”
차라리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만한 일이라도 생기면 좋을 텐데. 이정이 예현을 보며 생각했다.
“고민 상담해 주기엔 내 코가 석 자네. 무리다.”
“됐어. 딱히 그런 거 바란 적도 없거든.”
예현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정을 앞질러 걸었다.
“해결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괜히 얘기했다가 마음만 더 복잡해지지.”
한참을 앞질러 간 예현이 뒤돌아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휘이잉-
그때,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빨간 목도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아, 추워!”
예현이 목도리를 단단히 고쳐매며 싫은 소리를 냈다. 목도리 하나로 매서운 바닷바람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언젠가, 이정 자신도 저런 모습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목도리 있어서 좀 낫지 않아?”
‘와, 바람 장난 아니다.’
‘그래도 목도리 있어서 좀 낫지 않아?’
그래, 내가 저것과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달갑지 않은 과거를 생각하던 이정이 조용히 물었다.
“목도리 가지고는 안돼. 중무장을 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다른 상황이잖아. 생각하지 말자.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예현에게로 다가섰다.
“이 목도리, 어떤 목도리인지 안다고 했던가?”
“어? 어. 네 대표작에 나와서 유명해진 목도리라고.”
예현이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목도리가 유명해진 장면이, 바닷가에서 촬영한 장면이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자꾸 옛날 생각이 나네.”
이정이 예현의 목도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들었어. 애장품이었다고…….”
아차.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예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애장품이라고 불리던 물건을 버려도 된다고 말하면서 안겨 준 데에는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게 될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원래 개인 소장품이었던 걸 소품으로 쓴 거라는 건 들었어.”
“아하하. 맞아. 촬영 기간 내내 하고 다녔는데, 그게 감독님 마음에 들었는지 하고 찍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셨었거든.”
그러나 정작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선물받은 거였는데, 이걸 하고 촬영하면 언젠가 그 사람이 영화를 봤을 때 그걸 기억하고 연락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겠다고 했었지.”
이정이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현이 그런 이정을 조금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이 좋은 기억을 추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 애인이라도 되는 걸까. 한참을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이정이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딱히 대단한 사연이 있는 물건은 아니야.”
이정이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냥…….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돼서 보기 싫었던 것뿐이지.”
목도리를 꺼내 준 것에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유명한 물건이니 사람들이 알아볼 테고, 이 핑계로 버리지 못한 물건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걸 보고 있으면 계속 생각이 나?”
예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하필 바다라 그런지 생각이 나네.”
이정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21살의 끝, 22살의 초입. 그 겨울 느꼈던 감정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래서야 머리를 비우러 여기까지 산책을 나온 의미가 없네. 이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이정의 말에 예현이 자신이 메고 있는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목도리가 이정에게 그리 좋은 기억을 가져다주는 물건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있지. 쓸데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입을 열었다. 괜한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별 의미 없는 위로라도 해 주고 싶었다.
“안 좋은 기억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 버리는 거래.”
그렇게 말하는 예현의 목도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오늘 여기서 보낸 시간이 즐겁다면……. 그럼 나중엔 이 목도리를 봤을 때도 좋은 생각만 나지 않을까?”
예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이정에게 별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좋은 기억 한 조각쯤은 만들어 주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좋은 기억이라.”
이정이 예현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어떻게 해야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있는데?”
“음, 그건…….”
예현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해야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있는지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그것도 어려운 일이긴 하다.”
내가 뭐라고 강이정한테,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을 덮을 정도로 좋은 기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괜히 오지랖 부렸나 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네.”
예현이 조금 머쓱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뭘 해 줄 수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한 거람. 예현이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형이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거라…….”
그러나 이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묻을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예현이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해 줄 수 있는 게 왜 없어.”
“……?”
예상치 못한 말에 예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정을 올려보았다.
아, 처음부터 생각했었지만 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다가도,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볼 때면 그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이 부는 겨울 밤바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간 목도리,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저 얼굴.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그 목도리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바뀔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형한테 바라는 게 많은데.”
그러니 부디 내가 이 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 주길.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게 뭔데?”
예현이 물었다. 이정이가 내게 바라는 거라, 그게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시는 안 볼 사이처럼 굴지 말아 달라든가. 본인 걱정도 좀 하고 산다든가.”
“그건……!”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시는 안 볼 사이 맞잖아. 그리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시 바보같이 좋아하는 티를 낼까 봐 불안한 걸 어떻게 하라고.
“그건……. 미안.”
그렇지만 면전에다 대고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 예현이 순순히 대답했다.
“좀 상처 받았어. 계약서로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가 그 정도로 삭막한 사이는 아니잖아.”
이정이 슬픈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 그 정도의 사이는 아니니 내가 서운한 거 아니겠어.
“그래. 그렇지.”
차라리 삭막한 사이면 나을 텐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서 그래.”
예현이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정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정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서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끔 연락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별로 서운할 것도 없어. 한 달만 지나도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가물가물해질걸.”
예현이 그렇게 확신하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미래를 확신할 수가 있다는 걸까.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야 그게 사실이니까.”
예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이야 눈앞에 있으니까 생각나고, 밀어내면 서운한 거지. 내가 너한테 그렇게 특별한 사람인 것도 아니고 우린 그냥 계약으로 엮인 사이일 뿐이잖아.”
맞는 말이었다. 하필이면 입을 맞추는 장면이 기자에게 찍혀서, 차마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기사를 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사귀는 사이라고 발표한 3개월짜리 계약 연인.
잘하면 미끼로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다정하게 대해 줬을 뿐인, 특별할 이유가 없는 비즈니스 상대일 뿐일 터였다.
분명 맞는 말인데 왜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걸까.
이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을 숨긴 채 예현의 말을 들었다.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 그리고 함께 지내는 게 즐겁기도 해. 네가 마음 편했으면 좋겠고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예현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들켜 버린 마음일지라도, 이 좋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그게 꼭 내 옆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네 곁에는 나 말고도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
이정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3개월짜리 애인이 아니라, 앞으로도 쭉 곁을 지켜 줄 수 있는 그런 지인들.”
예현이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를 쓰며 말했다.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이정의 곁에는 사람이 넘쳐난다.
촬영장의 스태프들도, 툴툴거리지만 사이가 좋아 보이는 주석과 재련도, 그의 수많은 팬들도 이정을 좋아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구는 사람이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관계는 그런 사람들하고 이어 가야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내 탓이다. 제멋대로 이정을 좋아하게 되어 버린 내 잘못.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여지를 주고 싶을까 봐 지레 겁을 먹은 자신의 잘못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아무 잘못 없이 딱 잘라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 그래도 서로를 위해서 이 말은 해야만 해.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
이정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표정도, 놀란 표정도 아닌 처음 보는 표정이 이정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함께 있는 동안은 즐겁게 보내자. 기껏 기분 전환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런 얘기만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거야. 잠시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던 예현이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 말을 덧붙였다.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알아.”
가만히 예현을 바라보고 있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은 나 좋아하잖아.”
이정이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오기에 차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태도였다.
“그렇지. 말했잖아. 너 좋은 사람이라고…….”
“아니, 그런 의미 말고.”
이정이 예현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말해?”
이정이 고개를 숙여 예현과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화났어? 왜 그런 소리를 해.”
여태 모른 척해 주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화라도 난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예현이 이정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나 사랑하잖아.”
이정이 예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뒤에는 도망칠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예현은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날 싫어하는 것처럼 이야기해?”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정은 예현이 선을 긋는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아 가는 것을 느꼈다.
예현이 자신을 좋아한다. 그걸 눈치챘을 때부터 가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았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되려 이정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
내가 착각했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 예현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내가 형을 싫어했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날 좋아하면,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해야지. 더 애달아하고 절절매야 하는 거 아냐?
“자꾸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
그런데 왜 내가 더 아쉬워하는 것 같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
예현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이정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이정을 좋아하는 것도, 이정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예현은 이정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게 왜 중요하지 않은데?”
“그럼 그게 왜 중요한데? 내가 어떤 마음이든, 너랑 상관있는 건 아니잖아.”
받아 주길 바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니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계약서 내용 기억 안 나?”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좋아하지 말라고, 좋아해도 티 내지 말아 달라고.”
“그건……!”
그때는 형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으니까. 이런 감정이 들지 몰랐으니까. 그렇게 반박하려던 이정이 예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난 위약금 물어 줄 돈 없어. 그럴 돈이 있었으면 스토커가 협박 편지를 두고 갔을 때 진작 계약 파기했겠지.”
바닷바람보다도 더 싸늘하고 단호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마. 한번 모른 척했으면 끝까지 모른 척해.”
이정이 왜 이런 변덕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확실했다.
주제넘는 것을 바라지 말자. 예현이 이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기 싫으면?”
그러나 이정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가온 이정이 예현의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날 좋아하는 사람이 안달 내야 하는 건데, 왜 자꾸 내가 안달이 날까.
계약 기간을 이유로 날 밀어내는 것도 싫고, 계약 기간이 끝나도 계속 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왜 그러기 싫은데?”
예현이 이정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예현 역시 이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구색 맞추자고 3개월이라는 시간을 제안한 건 네 회사 쪽이었어. 난 계약에 맞춰서 행동하려고 하는 것뿐이야.”
자꾸 틀린 곳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기도 어려운데 왜 자꾸 나를 흔들지.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 있었다면 나라고 이러고 싶었을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조금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였다.
“너야말로 왜 그러는 건데?”
“왜 그러는 거냐고.”
그래, 그걸 알고 싶어서 하루 종일 멍하니 시간을 때운 거였지.
이정이 예현을 내려다보았다. 이정이 좋아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고, 아무래도 짜증이 났다. 그렇기에 이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마음으로 예현을 대하고 있다. 예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좋았고,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날 좋아하기라도 해?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예현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붉어진 얼굴이 추위 때문인지, 당황스러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그거, 그냥 아쉬움일 거야.”
예현이 아무 대답 없는 이정을 대신해 말했다.
“넌 좋은 사람이니까, 정들어서 괜히 아쉬운 거겠지. 나도 아쉬워.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잖아. 만날 때부터 결말을 정해 뒀는데,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는 거야.”
예현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정을 달래듯 말했다. 예현은 이정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나름대로의 추론을 끝낸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냥 끝까지 모른 척해 줘. 나도 더 이상 티 내지 않을 테니까.”
예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눈치가 없는 애도 아니니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에게서 돌아서려 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해?”
그때, 이정의 한마디가 예현을 발목을 붙잡았다.
“…….”
“됐어. 덕분에 나도 확실히 알겠거든.”
이정이 다시 자신을 쳐다보는 예현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겨서라도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 이유 하나밖에 없을 텐데 너무 빙빙 돌려 생각했나 보다.
내가 나답지 않게 행동하는 이유, 말마따나 3개월짜리 애인이 선을 그었다고 며칠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지 않아도, 다정한 말을 하지 않아도 예현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
자꾸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처럼 구는 이유, 예현의 말에 틀린 구석 하나 없는데도 그 말이 듣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이유는.
“이제 왜 그런 건지 알겠어. 그래서 이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확실히, 계약이고 뭐고 상관없을 정도로 마음이 확실하게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된 거지?”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고민 따위는 다 떨쳐 낸 것 같은, 후련한 얼굴이었다.
예현은 이정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선을 그었다는 이유로 서운하다며 며칠 내내 토라져 있었던 것은 알고 있지만, 갑자기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겠다니.
그건 꼭,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되긴 뭐가 됐다는 거야.”
“하루 종일 생각했거든. 내가 왜 그럴까.”
이정이 예현에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만을 사이에 둔 채로 이정이 웃었다.
“형 말대로, 3개월짜리 계약 애인일 뿐인데 왜 그런 말을 들었다고 기분이 나쁠까, 내가 원래 이렇게 쪼잔한 사람이었나 종일 고민했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이정의 얼굴이 언제 찌푸려졌었냐는 듯 말끔해 보였다.
“그냥, 그래도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예현이 이정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 주춤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서운했던 거겠지.”
“아니, 내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같이 산다는 이유로 그만한 정을 줄 사람은 아니지. 이정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본인이 그렇게 정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먼저 집에 들어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괜히 집에 들였다 정이 지겹게 들 걱정부터 해야 했을 텐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했겠는가.
“그래서 한참 생각해 봤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어.”
예현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곳에 오길 잘한 것 같았다.
확실히, 머릿속을 비우고 생각하는 게 좋긴 한가 봐.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나…….”
“잠깐만.”
이정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던 예현이 다급하게 이정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말을 들어 버린다면.
“말하지 마.”
그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혹시, 설마 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는 예현이었다.
“얘기하지 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거 착각이야.”
예현이 이정의 입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그리고 말했지. 난 위약금 낼 돈 없어. 그 말, 계약서에 적힌 추가 조항에 위반되는 거라면…… 하지 마.”
예현이 이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로 말했다.
이정이 알아낸 결론이 어떤 것이든 듣고 싶지 않았다. 예상하는 대로의 대답이라면 자꾸만 그다음을 기대하게 될 것 같아서 싫었고, 그 대답이 아니라면 실망할 것 같았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는 싫었던 예현이 고개를 내젓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위반되는 말이 아니어도 그냥 하지 마.”
“……왜?”
이정이 자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고 멈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날 좋아하니까, 내가 어떤 마음인지를 말해 주면 마냥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현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냥,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예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형, 형도 알잖아.”
이정이 그런 예현의 손을 잡았다. 바닷바람에 꽁꽁 얼어 차갑게 언 손이 이정의 크고 따듯한 손 가득 들어찼다.
“마음이 가는 걸 어떻게 내 의지대로 할 수가 있겠어.”
이정의 말에 예현이 가만히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래, 마음이 가는 것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예현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는 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잠시 아무 말 없이 이정을 바라보던 예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이 가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단속해야겠지.
“말하지 마. 모른 척하자. 그게 계약이었잖아.”
예현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계약, 그 두 글자만으로도 두 사람이 입을 다물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마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의미 없는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어.”
예현이 이정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하며 웃었다.
“부탁이야.”
이정이 그렇게 말하는 예현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이대로 밀어붙여 봤자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아직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지. 이정은 그 시간 동안 예현을 안달 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오늘 끝을 볼 필요는 없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발 물러섰다.
“말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형도 얘기했다시피.”
이정이 예현의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두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손이 내려가자 예현의 얼굴이 장애물 없이 이정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마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것까진 탓하지 않을 거지?”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웃었다. 새어 나오는 진심을 틀어막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 같은 웃음이었다.
*****
분명 머리를 비우자는 이유로 나온 밤바다 산책이었는데, 예현의 머릿속은 개운해지기는커녕 배로 복잡해졌다.
“아하하. 그래요?”
“그래. 아가 어릴 때부터 어찌나 똘똘했는지.”
그러나 예현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주범인 이정은 몇 시간 전과 달리 개운한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뭐가 되도 될 아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능력이 안 돼 가지고 지원 못 해 준 게 한이다.”
어느새 이정과 사이가 좋아진 예현의 이모가 못내 속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정과 떨어지고 싶은 예현이었지만, 이모가 있는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에요. 제 인생이잖아요. 언제까지나 도움만 받고 살 수도 없고…….”
게다가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차도 한 대뿐인데 지금 돌아가자고 해 봤자 더 착잡해지기만 할 게 뻔했다.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고 이모를 달랬다.
“그래도, 예서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있을 수 있었으면 니가 좀 나았을 낀데…….”
“아니에요. 예서는 제가 데리고 있는 게 맞죠. 그때 이모 건강도 안 좋으셨는데.”
예현의 이모는 예현, 예서 남매에게 뭔가 해 주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올 때마다 죄송해하셔서 일부러 선물만 보내곤 했었던 건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예서 챙길 정도의 능력은 있어요.”
게다가 이정과의 계약으로 들어온 돈도 있으니 적어도 예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인터뷰와, 규진의 기사가 나간 걸로 받은 추가금도 있으니 돈 걱정 할 일은 없었다.
“이모 잘 지낼 생각만 하셔야죠. 저희까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 그래도 니가 이렇게 잘 커서 애인까지 데려오니까 내가 안심이 된다.”
이모가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잘생긴 거 좋아하더니, 어데 이래 잘생긴 아를 데려왔노.”
“이모!”
이모의 말에 당황한 예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얘기는 왜 하시는 거예요. 이모.
“아하하.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래. 어릴 때도 동네 예쁜 아, 잘생긴 아만 보면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고 그랬지.”
“그게 대체 언제 적 얘기예요. 이모.”
어릴 때 얼굴 예쁘고 잘생긴 애들을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닌 건 맞지만, 그건 열 살도 되기 전의 이야기였다.
누가 들으면 내가 얼굴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네. 예현이 당황하며 이모의 말을 정정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의 이야기야. 어릴 때야 누구나 다……”
“다행이네요. 형 마음에 들 만한 얼굴이라.”
이정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넉살 좋게 웃었다.
이정의 미소 띤 얼굴을 보던 이모가 말했다.
“그래. 예쁘기도 하고, 잘생겼기도 하고……. 하긴, 배우라 했제? 티비 나오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생겨야 하는 갑다.”
이모가 이정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정이도 어디 가서 부끄러울 만한 얼굴은 아니다.”
“이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예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했다. 계약서를 운운하며 이러지 말라고 말한 것이 겨우 1시간 전의 일이다.
“다른 아들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녀도 이쁜 아가 눈도 높다고 다들 귀여워했지, 꼴값 떤다고 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모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건가요. 이모.
“그렇죠. 그래서 걱정이에요.”
그러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예현과 달리 이정은 아주 담담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 눈에도 예뻐 보이는 것 같아서. 제가 항상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데 큰일이죠.”
“하이고, 하이고.”
이정의 말이 이모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 봐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내가 뭐가 예쁘다고 그런 소리를. 예현이 머쓱함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 이정을 돌아보았다.
이모의 말대로 이정은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현마저도 움찔하게 될 만큼 열렬한 사랑을 담은 눈이었다.
‘마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것까진 탓하지 않을 거지?’
저런 눈을 하고 바라보는데, 내가 착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게 아니었는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사귀던 애인이랑 하도 오래 사귀어서 결혼까지 할 줄 알았는데, 이래 좋은 사람 만날라고 헤어졌나 보다.”
“이모, 그런 말을 왜…….”
예현이 신이 나 말하는 이모를 말렸다. 진짜 애인도 아니니 기분이 나쁘지야 않겠지만, 그냥 규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맞아요. 저 만나려고 헤어졌나 봐요.”
그리고 그 말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하는 이정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 피곤하지 않으세요? 원래 10시면 주무신다면서요.”
“니 왔는데 말도 몇 마디 못 하고 잘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
“너도, 운전 오래 했잖아. 안 피곤해?”
“난 이모님이랑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서 괜찮은데.”
대화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 모두 예현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눈을 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그래? 나는 좀 피곤해서…….”
“피곤하나? 옆 방에 자리 깔아 놨으니까 먼저 잘래?”
그럼 나라도 이 이야기에서 벗어나야지.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옆 방으로 피신한 예현이 한숨을 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마음을 들킨 것이 분명한데도 모른 척해 주는 이정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건, 자신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계약이 아니었더라도 이정은 자신과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니 꿈 깨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계약이라는 브레이크가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웃는 이정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잠깐 지나가는 감정일 뿐일 거야…….”
그래, 강이정 인생에서 나 같은 사람을 볼 일이 얼마나 있었겠어.
재벌 3세에, 유명 배우. 그리고 쓰레기 같은 전 애인을 둔 평범한 직장인.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러니 잠시 관심이 가는 거겠지. 특이한 사람을 보면 괜히 시선이 가고 재미있어 보이는 그런 느낌으로 관심을 가진 거겠지.
기대하면 안 돼, 뭔갈 바라면 안 돼.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예현의 이모에게서 아침을 얻어먹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온 여행이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예현은 잠을 설친 것인지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 아파? 진통제 줄까?”
“아니, 괜찮아…….”
이정은 바닷가에서의 일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 것처럼 멀쩡하게 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며칠 전 예현이 이정의 제안을 거절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냥 집에 가서 푹 자면 괜찮아질 것 같아.”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일어나면 하려고 한 말이 있었는데.”
이정이 차를 운전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오늘까지는 휴식이었는데, 파일 문제로 다시 찍어야 하는 장면이 하나 생겼대. 그래서 저녁에 잠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저녁에?”
예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응. 대체 파일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장면 하나를 날려 먹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필 당장 며칠 뒤 방영분인 장면을 날려 먹어서 급하게 재촬영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차라리 다른 스케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이정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예현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래? 그럼 평소보다 스태프들도 적겠네?”
“뭐, 정식 스케줄도 아니고 날린 장면이 그렇게 길지는 않대서…….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촬영해야 할 것 같다던데.”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재촬영이라니, 그럼 좀 숨어 다니다가 사람이 적을 때 슬쩍 가서 명아에게 바뀐 전화번호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저번에, 촬영장 갔을 때.”
예현이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조금 재미있어 보였는데……. 내가 네 애인인 게 들키는 바람에 별로 구경 못 해서 조금 아쉬웠었어.”
예현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정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그래? 어떤 점이 재미있었는데?”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지 않고 물었다. 어떤 점이 재미있었냐라. 그냥 거짓말한 건데,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조금 고민하던 예현이 말했다.
“그냥, 드라마가 그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네 연기하는 모습 보니까 네가 연예인인 게 새삼 실감 나기도 하고…….”
예현이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젠장, 그렇다고 전화번호 하나 알고 싶어서 가고 싶은 거라고 하기엔 창피한데…….
“사람들도 다 열심히 사는 것 같고, 아무튼 조금밖에 못 봐서 아쉬웠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예현이 급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냥 그랬다고…….”
그래서, 촬영장에 다시 한번 갈 기회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머리 좀 비우고 넌지시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말이나 꺼내 볼 수 있겠냐고. 예현이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럼 한 번 더 가 볼래?”
“……어?”
그때, 이정이 예현이 바라던 말을 먼저 꺼냈다.
“아, 아니다. 스태프들이 이제 형 얼굴 알아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네.”
“아냐. 급하게 잡힌 촬영이라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안 온다며.”
예현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사람 없을 때 조용히 구경하다 오면 괜찮지 않을까?”
예현이 이정의 마음이 바뀔세라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기회 있을 때 한 번 더 구경하고 싶었어.”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평소와 다른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예현이 조급함을 숨기지도 못하고 빠르게 말했다.
“그래? 그런데 괜찮겠어? 지금 되게 피곤해 보이는데.”
“저녁이라며. 잠깐 쉬고 나가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예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대답했다.
“오래 걸려?”
“뭐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지만…….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
토요일도 아니고 일요일 저녁에 외출이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찔하기는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재미있을 것 같아.”
예현이 카시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래, 그래도 친구와 다시 연결되는 거니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어.
주말은 매주 돌아오는데,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분명 그랬었는데, 예현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혼자 촬영하는 장면인 줄 알았으면 안 왔지…….”
예현이 차 안에서 중얼거렸다. 물론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기는 했지만 뭔가 억울한 기분이었다.
“자기가 운전해서 갈 테니까 오지 말라고는 했지만 영 걱정이 돼서 왔는데……. 예현 씨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다른 차를 타고 온 주석이 예현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그러게요.”
“끌려온 거예요?”
이 자식을 그냥. 주석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예현 씨가요?”
주석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뭘 숨기겠어.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실, 촬영장에 따라오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는데 막상 와 보니까 그 이유가 없어져서 좀 후회하는 중이에요.”
“뭐 때문에 오고 싶었던 건데요?”
주석이 예현의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정이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이 나무 사이로 얼핏 보였다.
“명아……랑 저랑 대학 동기라는 건 들으셨죠.”
예현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예. 들었죠.”
“사실 원래 친한 친구였는데……. 어쩌다 보니 멀어져서 연락도 안 하고 지내게 됐었거든요. 늘 아쉬웠는데 저번에 만나서 이야기하고 다시 연락하면서 지내기로 했는데, 연락 안 하고 지내는 동안 전화번호가 바뀌었더라고요.”
명아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실망한 예현은 스태프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이정은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려고 했는데……. 없네요.”
“아, 재촬영분에는 해리 씨 분량이 없어서…….”
주석이 예현의 옆에 앉아 촬영 장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거였으면 나한테라도 물어보지 그랬어요. 촬영장 와서 물어보고 문자해 줬으면 됐는데.”
“괜히 부끄러워서요. 그런데 괜히 그런 것 같아요. 엇갈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물어볼걸…….”
예현이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원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명아 씨 번호 모르긴 하는데……. 스태프들 중에는 번호 아는 사람 있을 거예요. 내가 물어보고 올까요?”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주석의 말에 예현이 미리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주석이 자리에서 일어서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명아 씨 번호요? 나 아는데.”
단발머리의 스태프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현은 촬영 현장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주석은 그녀를 아는 눈치였다.
“매니저님, 근데 이분은 누구예요? 이정 씨 새 스타일리스트?”
단발머리의 스태프가 예현을 보며 물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해, 말아야 돼. 주석이 잠깐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에엑, 이분이 그…….?”
단발머리의 스태프, 재하가 깜짝 놀라며 예현을 가리켰다. 주석이 조용히 좀 해 달라며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대자 헙 하고 입을 다문 재하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김재하라고 합니다.”
재하가 고개를 숙이며 예현을 흘깃거렸다. 아, 나름 숨어 있던 거였는데 망했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예현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와, 듣던 것보다 더…….”
“재하 씨, 안 바빠?”
주석이 애써 웃으며 재하에게 얼른 다른 곳으로 가 버리라고 눈치를 줬다. 그러나 재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오래서 왔는데, 정작 제가 할 일은 많이 없네요.”
재하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었다. 주석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그래? 근데 재하 씨가 자리 비운 사이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에이, 아니에요. 피디님이 정 할 거 없으면 그냥 퇴근해도 된다고 하셨을 정도라고요.”
눈치가 없는 건지 고단수인 건지 모를 재하가 말했다.
“퇴근 안 하길 잘했네요. 한번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저를요?”
재하의 말에 예현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강이정의 애인이 된 이후로 오만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고 있지 않은가.
만나 보고 싶었다, 라고 말할 정도인 줄은 몰랐으나 관심을 가지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일 터였다.
“아, 명아 씨 핸드폰 번호 얘기하고 있었죠? 명아 씨 번호는 왜요?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오늘 명아 씨 안 왔는데?”
예현이 쏟아지는 질문 폭탄에 조금 당황한 채 어버버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대학 동기고 우연히 촬영장 구경 왔다가 다시 만나게 됐는데, 연락하고 지내자 하고 집에 돌아가 보니 번호가 바뀐 상태더라고요. 촬영장 온 김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없다네요.”
예현이 차근차근 대답해주자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그런 거구나.”
납득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재하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잠시 후, 잠깐 액정을 톡톡 건드리던 그녀가 예현에게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명아 씨 번호 이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재하가 예현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자연스럽게 예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정이한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몰라도 금방 알아다 드렸을 텐데.”
“아하하. 괜히 신경 쓰게 만들기 싫어서요. 그리고 구경 올 일이 한 번쯤은 더 생길 것 같아서…….”
예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거나,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밀어냈겠지만 신세를 져 놓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내 직장이 아니라 이정의 직장이니까, 섣부르게 행동하다 이정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하필 명아 씨 없는 날에 오신 거네요. 아, 명아 씨가 오늘 있었어야 재미있었을 텐데.”
재하가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저, 명아 씨랑 꽤 친하거든요.”
“명아랑요?”
대학 때도 낯을 좀 가리는 편이었고, 저번에 봤을 때도 스태프들과 그리 살갑게 지내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명아 씨가 낯을 좀 가리기는 하는데~ 제가 또 한 친화력 하거든요. 몇 달씩 같이 촬영하는데 친하면 좋잖아요.”
재하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친구 먹었죠. 뭐. 명아 씨랑, 촬영 팀에 보람 씨랑, 음향 팀에 석찬 오빠. 이렇게 친해요.”
“하하. 그렇구나.”
예현이 영혼 없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다들 왔는데 명아 씨만 안 와서 섭섭하다는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하. 이렇게 나비효과가 일어날 줄이야.”
“재하야.”
그때, 남자 두 사람이 예현과 재하에게로 다가왔다.
“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화장실 다녀온다 해 놓고 한참을 안 와서 찾으러 왔는데……. 왜 이 매니저님이랑 같이 있어?”
남자 하나가 재하와 주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
그때,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가 예현을 알아본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가 옆에 선 남자에게 속닥거렸다.
“아, 그분?”
목에 헤드폰을 낀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예현을 바라보았다.
“명아 씨랑 친하다는 이정 씨 애인.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쳐서 얘기 좀 하고 있었어. 마친 명아 씨 얘기 하고 있더라고.”
“명아? 아. 둘이 대학 동기라고 했었지.”
어째 촬영장에 우리 둘이 동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네. 예현이 멋쩍게 웃었다.
“보람 씨, 석찬 씨. 안 바빠요?”
자포자기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석이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번갈아 보다 멋쩍게 주석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답을 내놓았다.
“촬영 다 끝나 가요. 아마 30분……. 길어져야 1시간이면 끝날 것 같은데.”
“네?”
석찬의 말을 들은 주석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현 씨, 저 촬영 끝나기 전에 해야 할 게 있어서……. 잠시 다녀올게요.”
“저…….”
그렇게 가 버리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예현이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주석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아무튼, 이분이 명아 씨 바뀐 번호를 모른다길래 내가 가르쳐 주고 얘기 좀 하고 있었지.”
재하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아까 얘기한 촬영팀 보람 씨, 그리고 석찬 오빠예요.”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가 오가고, 재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뻘쭘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오늘 명아 씨가 왔어야 했는데! 그래야 더 재미있었을 텐데.”
재하가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여기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재하 혼자뿐인 것 같은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 저번에 오셨을 때 잠깐 봤어요.”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 보람이 예현에게 알은체를 하며 말했다.
“그때 많이 당황하신 것 같아서, 다시 오실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 촬영장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어서요. 겸사겸사 데리고 와 달라고 했어요.”
예현이 대답하자 재하가 들뜬 목소리를 하고 말했다.
“촬영장이 재미있다니, 뭘 좀 아는 분이시네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어……. 그냥, 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거랑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요. 촬영이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지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과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걸 보게 되니까 신기하더라고요.”
예현이 진심 반, 갖다 붙인 말 반이 섞인 대답을 했다.
“와. 완전 제대로 보셨네. 사람들이 드라마 촬영 별거 아닌 줄 아는데, 이게 은근 많은 인력. 그것도 고급 인력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재하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석찬과 보람 역시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그게 매력적이어서 카메라 잡기 시작했죠.”
“나도. 사람들은 음향 팀이면 카메라 위에서 마이크만 잡고 있는 줄 아는데, 이게 사실 되게 섬세한 작업이거든요.”
내성적인 것 같아 보이던 두 사람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특히 어떤 점이 신기했어요?”
“음…….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끊어서 촬영하는 건 줄 몰랐는데, 여러 각도로 촬영하는 거더라고요. 울고 나서 바로 메이크업 수정 받고 다른 각도로 촬영하는 거 보니까 되게 신기했어요.”
예현이 이정의 눈물 연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재하가 벤치를 팡팡 치며 공감했다.
“아, 맞아. 진짜, 사람들이 우리가 촬영 전에 세팅해 주고 싹 퇴근하는 줄 아는데요, 촬영장에 남아서 계속 메이크업 수정해 주고 신경 많이 쓰고 있거든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좋은 작품이 완성되는 거겠죠.”
예현이 의례적인 칭찬을 건넸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걸 예의상 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어느새 감동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정 씨랑 사귀는 사람은 대체 무슨 복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까 이정 씨가 운이 좋은 사람이네.”
“맞아요. 되게 속 깊으시고, 좋은 분 같아요.”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까지 감동받는 거람. 예현이 당황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인데…….”
“예현 씨, 세상에는 그 당연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은근 없답니다?”
재하가 손가락을 양옆으로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칭찬받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라구요.”
세 사람은 그 뒤로도 예현에게 자꾸만 질문을 하고, 예현의 대답에 감동받아 호들갑을 떨며 시간을 보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석이 예현을 데리러 왔을 때 세 사람은 이미 예현을 10년 지기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예현 씨, 연락 받아요. 차단하면 안 돼요~!”
눈 깜짝할 새 세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교환당한 예현이 핸드폰을 꼭 쥔 채로 주석을 따라 걸었다.
“피곤했죠? 재하 씨가 촬영장에서 제일 왈가닥인 걸로 유명해요. 그냥 도망가 버리지 그랬어요.”
“아, 아니에요. 그럼 이정이도 곤란해지고…….”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주석이 그럼 다행이라며 차에 시동을 걸고 예현을 먼저 태웠다.
그리고, 나중에는 얘기하는 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
[명아 : 그래서 갑자기 단체방이 생긴 거구나……. 오후 5: 12]
예현은 재하로부터 전해 받은 번호로 명아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예현의 연락창에 생긴 변화가 있었다.
[김재하 씨 : 오늘도 예현 씨 남친은 잘생겼다. 피부 너무 좋아서 베이스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오후 5 : 10]
[유석찬 씨 : 헛소리하지말고 네 본분을 다해라.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재하. 오후 5 : 13]
바로, 쉬지 않고 알림이 울리는 단체방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재하는 어마어마한 친화력으로 예현에게 다가오더니 급기야 명아, 보람, 석찬, 예현, 자신을 포함한 다섯 멤버로 이루어진 단체방을 하나 만들었다.
[명아 : 괜찮겠어? 너 원래 연락 많이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었잖아. 오후 5 : 14]
명아가 걱정이 된 건지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그도 그럴 듯이, 대학 시절의 예현은 몇 안 되는 친구들과 규진을 제외한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단체방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고, 그 방의 친구들과 관계가 틀어진 후에는 규진 하나와만 연락을 하고 지냈었다.
[괜찮아. 이정이 체면도 있는데 계속 만날 사람들한테 무안주기도 그렇고. 오후 5 : 17]
[걱정해줘서 고마워 오후 5 : 17]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답장을 보냈다. 그래, 확실히 그때는 친구 따위 필요 없고 연락도 귀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정의 체면 문제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굳이 벽을 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명아와 다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속에 겹겹이 세워 두었던 벽 하나가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규진만 있으며 된다고 세워 두었던 벽이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굳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예현이 단체방을 열어 답장했다.
[일 열심히 해야 좋은 작품 만들죠. 오후 5 : 20]
[김재하 씨 : 예현 씨 ㅠㅠ 오후 5 : 21]
[김재하 씨 : 촬영장 또 놀러와요 유석찬이 저 괴롭혀요 ㅠㅠ 오후 5 : 21]
[다음에 기회되면 꼭 갈게요. 오후 5 : 22]
예현이 재하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다시 채팅 어플을 껐다. 새로운 관계도 좋지만, 그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하아…….”
차라리 어색했던 때가 나았어.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현은 여태 이정의 모든 행동을, 그저 한순간의 장난 같은 감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세상 사람이니까,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만날 일이 없었을 테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시면 지나갈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설렐 나이는 지났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의 마음을 무시해 왔는데 지금은 달랐다.
‘마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것까진 탓하지 않을 거지?’
그렇게 말하며 웃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탓에 더 이상 이정의 마음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착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마음 한편이 간질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예현이 아무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 : 사진 오후 12 : 18]
[♡ : 점심은 먹었어? 이건 내 점심 오후 12 : 18]
정작 이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런 문자나 보내고 있는데, 나는 왜 저 의미 없는 하트에 자꾸 눈이 가는 걸까.
“예현 씨, 오늘 반차 냈지?”
“네. 병원 때문에…….”
난리 통 속에서 잊지 않고 챙겨 온 약 봉투가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그래. 잘 들어가고 내일 봐.”
“네. 내일 뵐게요.”
예현이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건 오랜만이네.”
지난번 사이클 휴가 전에 냈던 반차가 마지막 반차였으니 이 시간에 퇴근하는 것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래도 알파, 오메가에 대한 복지가 좋은 회사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마음 편하게 나오지도 못했을 터였다.
“신예현 환자분, 들어오실게요.”
예현이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채혈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예현은 의사에게 약 봉투를 보여 주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이 약을 처방받았었는데, 평소보다 효과가 더 떨어졌었어요.”
“아, 이거……. 지난달에 새로 나온 건데 안 맞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럼 원래는 이거 말고 어떤 걸 드셨어요?”
“아, 이름은 모르는데……. 이 빨간 캡슐 대신 타원형으로 생긴 흰색 약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의사가 약 봉투를 살펴보다 말했다.
“으음, 뭐였는지 알겠네요. 여태 복용하시면서는 별 이상 없으셨고요?”
“네.”
“사이클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의사의 질문에 예현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이클 때마다 받는 질문이고, 약의 처방을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연인이나, 사이클 파트너 같은…….”
의사가 사무적으로 차트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연인이라면 있긴 하지. 사이클을 함께 보낼 수는 없지만……. 만약 함께 보낸다면…….
“환자분?”
잠시 헛된 망상을 하던 예현이 황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아, 없어요. 이번 사이클은 혼자 보낼 예정이에요.”
“그럼 넉넉하게 일주일치 처방해 드릴게요. 복용해 보시고 별 탈 없으면 다음 사이클 때도 쓰셔도 되고요. 다만 반년 이상 지난 약은 섭취하시면 안 됩니다.”
의사가 약에 대해 짧게 설명해 주고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수치 나왔네요. 보자……. 아마 이 기간 중에 사이클이 올 거예요. 이날부터 이틀 정도는 위험 구간이니까 미리 사이클 지연제 복용하시고요. 지연제 복용한 채로 이틀 지나면 바로 사이클 시작되는 거 아시죠?”
“네.”
예현이 의사의 손에 들린 달력을 보며 날짜를 가늠했다. 다행히 위험 구간이 주말이니 월요일부터 휴가를 쓰면 될 것 같았다.
“네. 그럼 그렇게 처방해 드릴게요.”
예현이 짧은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간만의 조기 퇴근이니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다가도, 혹시 이정이 집에 있을까 봐 돌아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잠깐 시간이나 때우고 들어갈까…….”
마주칠 때마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최대한 덜 마주치고 싶은데 정작 눈앞에 있으면 밀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돌아다니면서 할 것도 없는데. 예현이 버스 정류장에 앉은 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김재하 씨 : 촬영 이제 진짜 막바지당 ㅠㅠ 오후 1 : 45]
[김재하 씨 : 우리 4명 볼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안남았움 오후 1 : 45]
[김재하 씨 : 앗 아니다 5명이지!! 예현 씨 촬영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놀러와용 오후 1 : 46]
자신을 찾는 사람이라고는 매일같이 심심하다고 노래를 불러 대는 재하뿐. 그러나 이정을 피하고 싶은데 촬영장에 간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 좀 사귀어 둘걸…….
예현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잉-.’
그때, 예현의 손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정이나, 재하나, 스팸 문자겠지.
어느 쪽이든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연락은 아닐 게 분명했다.
“하아…….”
늘어지게 한숨을 내뱉은 예현이 두 번째 버스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
그러나 예현의 생각과는 달리, 문자를 보낸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주서연 씨 : 나 완전히 끝냈어요. 오후 2 : 10]
[주서연 씨 : 후련한 기분이에요. 예현 씨 덕분도 좀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는 해야할 것 같았어요. 오후 2 : 10]
결국 선택했구나. 예현은 서연의 문자를 보며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서연 씨 :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는데,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요. 오후 2 : 12]
그때,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예현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잘됐다고 답장을 해 주고 넘겼을 텐데, 집에 돌아가지 않고 싶어서 그런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
[결국 그렇게 됐]
[시간 괜찮으면]
예현이 몇 번이고 답장을 썼다 지우며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네 번째 버스가 예현을 지나쳐갔을 때쯤, 예현은 드디어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수수한 모습의 서연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는 몇 주 전 내내 침울한 표정이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스트레스가 만악의 근원이라더니 스트레스 덩어리랑 헤어진 것만으로 저렇게 안색이 바뀌는구나.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헤어졌다고요.”
“네. 정확히 말하자면 헤어지기는 좀 더 전에 헤어졌고, 오늘에서야 남아 있던 엮인 일정을 마무리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난리 치지는 않던가요?”
예현이 픽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새끼. 능력이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으니 이제 완전히 끝이겠네.
혼자 울상이나 짓고 있으려나. 규진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아버지 하나만큼은 무서워하던데, 한마디 반박도 못 하고 제 아버지에게 호통을 들었을 규진을 생각하자 조금 우스운 것 같기도 했다.
“난리…… 쳤죠. 자기가 잘못한 건 있지만, 그래도 사귀면서 서운하게 한 적은 없지 않느냐.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달라면서 울던데요.”
미친놈, 어째 레파토리가 변하질 않네.
“솔직히, 반년 동안 정이 들긴 들었는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우는 얼굴 보고 있으니까 괜히 좋았을 때도 생각나고.”
서연이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약혼식 올리고, 곧 결혼할 거라는 게 이미 기정사실이었어서 아는 사람들도 꽤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망설여지긴 했어요.”
아, 확실히 그럴 것 같았다. 보는 사람들마다 그 이야기를 꺼낼 텐데, 분명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좀 고민해 봤어요. 그런데, 저희 가족들이 그러더라고요.”
서연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 인생이니 너 하고 싶은 대로,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요.”
“…….”
예현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웃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전 내내 상황만 생각하고 있었더라고요. 제일 중요한 건 제 마음인데, 그건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하면 상황이 이렇게 될 건데. 또 저렇게 하면 다른 게 문젠데. 하고 있었어요.”
어딘가 공감이 가는 말에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제 마음이 어떤지. 음……. 화도 나고, 슬프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더는 규진 오빠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거였던 것 같아요.”
깔끔한 답변에 예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렇잖아요. 또 언제 어디서 다른 애인을 만들어 놓고 사랑한다느니, 너밖에 없다느니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서연이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맞는 말이지. 예현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이미 싫어진 걸 어떻게 하겠어요. 뭐, 그런 걸 다 감수할 정도로 절절한 사랑은 아니었으니까요.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는 건 그냥, 미운 정 같은 거였나 봐요.”
서연이 타는 속을 가라앉히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마음 가는 대로,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마음 가는 대로, 그래. 그게 제일 중요한 거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인 거고.
예현이 서연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젠 예현 씨가 부러워요.”
한참 규진에 대한 짜증을 털어놓던 서연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요? 왜요?”
나는 주서연 씨 인생이 훨씬 더 부러운데……. 나한테 저 부잣집 아가씨가 부러워할 만한 점이 있던가?
예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연하죠. 우선 저보다 먼저 규진 오빠랑 헤어졌다는 거.”
“쿨럭.”
예상치 못한 말에 예현이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뱉었다. 그러나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헤어지고 사귀는 사람이 강이정이잖아요.”
서연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젠장, 이정을 피해 어디로 도망쳐도 강이정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예현이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서연 씨도 그만큼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텐데요. 뭘.”
“강이정만큼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얼굴 잘생겼지, 집안 잘났지, 능력 있지, 돈 잘 벌지. 세상에 그렇게 불공평한 사람이 없다고요.”
뭐, 그렇긴 하지. 예현이 이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거기다가 덧붙이자면 키도 크고, 피지컬도 좋고. 요리를 기상천외하게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말 완벽……
“규진 오빠 다음이 강이정이라니. 완전 똥차 가고 벤츠 온 거잖아요.”
5분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함께 있어서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서연의 신랄한 발언에 예현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예현 씨를 보면 확실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좀 더 기다리면 강이정만큼은 아니어도, 규진 오빠보단 나은 사람 만날 수 있겠죠. 서연이 그렇게 말하며 턱을 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한테도 낙이 와야 할 텐데. 지금으로선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예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부럽다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는 거 알아요?”
잠시 서연을 바라보던 예현이 말했다.
“왜요?”
“그렇잖아요. 내가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면 끝이 좋지 않을 게 분명할 때도 있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편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약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이정이 연예인이라는 것이나 그에게 제정신이 아닌 스토커가 딸려 있다는 것도 모두 모른 체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저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부러워서요.”
예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째 서연 앞에서는 계속 한심한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여태껏 보인 모습이야 박규진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기에 괜한 화풀이를 한 것이라 쳐도, 이번에는 왜 그렇게 한심한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여러 번 바닥을 보인 사람이라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뒷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건 좋은 거죠. 솔직히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제겐 결혼하지 않아도 절 변함없이 봐 줄 가족들이 있고, 잘난 척 같지만 집안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서연이 내숭 떨지 않고 말했다. 규진 때문에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서 그럴까, 예현에게 은근한 친밀감이 들었기에 딱히 겸손 떤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뒷일이 두려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생각날 것 같은 일도 있는 거잖아요.”
서연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뭔가 고민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죠? 제가 예현 씨한테 조언을 하는 게 맞는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저는 앞으로 고민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려고요.”
“어떻게……?”
예현의 말에 서연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가 될 것 같고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고, 몇 달 정도 생각하다 잊어버릴 것 같으면 안 한다!”
서연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다운, 명쾌한 결론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물어보면 안 되겠죠?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제가 예현 씨를 그렇게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예현 씨는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어, 어른스러우니까…….”
서연이 예현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했다.
“뭐든 잘 해결될 거예요.”
두고 두고 후회가 될 것 같으면 하고, 몇 달짜리 후회일 것 같으면 하지 말자.
예현이 서연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알 것 같았다.
“고마워요.”
“……네?”
예현의 말에 서연이 당황한 듯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거지. 서연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뒤로하고, 예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
예현은 서연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정리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마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
처음 이 관계를 시작하면서는 규진에 대한 복수심만이 가득했었다. 그 망할 놈에게 내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걸 보여 줘야 해.
보란 듯이 잘 살아야만 해. 그렇게 생각하며 시작한 계약연애였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규진에 대한 복수심 따위는 멀게만 느껴졌다. 사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이후 오늘 서연에게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그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차피 끝난 인연, 더 생각해 봤자 열만 받지.
규진을 떠올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럼 나는 왜 아직 이 계약 연애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은 걸까. 왜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이정의 연인으로 소개되는 것이 좋고, 내심 이 관계가 끝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는 걸까.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부정하려고 하고,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뻔했다.
그 얼굴이, 목소리가, 다정한 말투가, 가끔 닿는 손의 온기가 좋다.
이제는 그 목소리가 다정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미 애정은 중증에 다다른 듯하다.
그렇지만, 이미 들킨 감정일지라도 더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보답받아서는 안 되는 마음이니까.
이정의 그 눈빛이 착각이 아니더라도 그다음을 바라서는 안 됐다.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가 될 것 같고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고, 몇 달 정도 생각하다 잊어버릴 것 같으면 안 한다!’
예현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이 마음을 고백한다면 이정은, 어쩌면 활짝 웃으며 제 손을 잡을지도 모르지만, 계약서로 엮인 사이가 아닌, 감정으로 엮인 사이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신과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예현은 재벌 3세와의 달콤한 로맨스 따위는 드라마 속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길을 선택하면 분명 후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회하더라도 지금의 감정에 솔직해져 보자는 생각을 하기에 예현은 조금 지쳐 있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평생 일어날 거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몇 가지나 일어난 것인지 꼽아 보기도 두려웠다.
이정과의 관계가 잘 풀리더라도, 예현은 언제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고작 몇 달 정도가 지난다고 해서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면, 서로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 거겠지.
“그래도 좋아한다는 말 정도는 한번 해 볼까.”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론은 내렸다. 그저 입 밖으로 한번 내 보지도 못하고 접어야만 할 마음이 안타까워 다른 것을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다.
예현이 가만히 소파 위에 앉아 이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래, 언제까지고 모른 척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예현이 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시계의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정이 말한 오늘의 퇴근 시간은 오후 4시 반쯤, 지금은 4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떨지 않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보다 쉽게 이정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예현은 수많은 장면을 시뮬레이션 해 보았다. 그 상상 속의 이정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며칠 전 그랬듯, 화가 난 얼굴로 예현을 다그치기도 했다.
어떤 모습을 상상해도,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 동안 예현의 기분은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철컥.’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깜짝이야.”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든 이정이 예현을 발견하고 놀라 흠칫했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오늘 평일인데, 이 시간에 집에 있네.”
“아……. 병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병원?”
이정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예현에게로 다가왔다.
“어디 아파?”
“아니. 사이클 때문에 약 처방받을 게 있어서.”
아아. 예현의 담담한 말에 이정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심각한 표정이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이정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누가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예현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하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야기해야 해. 더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잠깐 시간 괜찮아?”
예현이 이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할 말?”
이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저런 얼굴로 할 이야기가 딱히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였다.
이런 부분에는 꽤나 우유부단한 부분이 있으니,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은 있지.”
이정이 그렇게 대답하며 예현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
이정이 예현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니 예현이 담담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네가……. 좋아.”
한참을 망설이던 예현이 내놓은 말에 이정이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알고는 있었지만, 예현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줄은 몰랐다. 아니, 최소한 이렇게 허무하게 말해 버릴 줄은 몰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만.”
예현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저 말을 하는 데에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할 말이 있어.”
예현이 호기롭게 꺼낸 첫마디보다 확연히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이정이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뭐야,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서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지.
“뭔데?”
아, 너무 긴장해서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건가. 이정이 꽤나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예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현은 고개를 들지도, 이정의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뱉었을 뿐이었다.
“우린 어울리지 않아.”
“…….”
예현의 말에 이정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애초에 좋게 만난 것도 아니었잖아. 내가 하필 그날, 그 골목으로 들어서지만 않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엮일 일은 없었겠지”
눈발이 거세게 흩날리던 날, 사람들 눈을 피하지 않고 울면서 거리를 걷지 않았었더라면.
하필 그 길을 지날 때 눈발이 잦아들어 골목에 몸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있어야 할 곳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니, 사실 어떤 이유로 만나게 되었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예현이 고개를 들어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착각하지 마.”
그 말을 들은 이정이 지은 표정은 예현의 수십 가지 상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화를 내거나, 가만히 바라보다 알았다며 한 발자국 물러난다거나,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되묻거나…….
꽤 많은 장면을 상상해 봤는데, 이정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착각?”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은 건 둘째치더라도, 저런 표정은…….
“뭐가 착각이라는 건데.”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돼. 예현이 이정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다음이 있을 거라는 생각. 내가 너한테 휘둘릴 거라는 착각.”
혹여나 목소리에 망설임이 담겨 있지는 않았을까. 예현이 조금 걱정하며 이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정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이 형이 또, 하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알겠다고.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겠다고.”
저 작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야 빤히 보였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나도 모르는 내 미래를 아는 것처럼 굴 시간에, 다른 생각이나 좀 해 보지 그랬어.”
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고 따질 게 많은 건지. 그럴 거면 좋아하는 티라도 내지 말든가.
“나는 형이 말하지 말라기에,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는데…….”
밀어내면서도 몰래 쳐다보고 있고,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도 정작 눈이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착하게 기다린 대가가 이런 거라는 건 좀 섭섭하네.”
저 예쁜 입에서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 입으로 내가 널 좋아하고,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는데.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기쁘지가 않은 이정이었다.
“네가 기다렸다고, 내가 꼭 대가를 줘야만 해?”
“하…….”
돌아온 예현의 대답 역시 참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이정이 길게 한숨을 쉬는 사이 예현이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난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 네가 기다린다고 해서,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도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시키겠어.”
예현이 냉정하게 말했다. 보답받고 싶어서 이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었듯이, 이정에게 줄 수 있는 보답 따위는 없었다.
“네가 날 바꿀 수 있다는 것처럼 구니까 확실하게 말하려는 거야.”
어떤 것을 바라든, 예현이 이정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헛된 희망조차 품지 않게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나았다.
이정이 자신과 같은 마음인 것처럼 구는 것이 내심 기뻤기에 모른 척해 오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한다는 건……. 어차피 알고 있는 거, 굳이 거짓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까 말한 것뿐이야.”
예현이 입술을 살짝 물어뜯고 말했다. 사실 그 말을 한 것이 자신의 한 톨 남은 용기라는 것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그게 내 약점인 것처럼 구니까, 그게 싫어서 말한 것뿐이라고.”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숨길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생글거리는 얼굴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어차피 나는 곧 내 자리로 돌아가야만 해. 그러니까 더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일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어.”
더 이상 그의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지더라도, 잠시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게 맞는 선택이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맞아.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니다. 이해할 필요도 없어.”
그래도 한 달을 더 봐야 하는 얼굴이니 그 기간 동안만큼이라도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욕심인 거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우린 한 달 뒤면 다신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거고 그걸로 끝인 관계야.”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후회하게 된다면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지. 예현이 이정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의미 없는 짓 그만해. 처음 이 관계를 시작할 때, 네가 분명 말했었지. 너 좋아하지 말라고. 좋아해도 티 내지 말라고.”
예현이 이정을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다시 읽은 계약서의 조항을 떠올렸다.
처음 이정이 계약서에 그 조항을 넣을 때는 별 의미 없는 조항을 추가한다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조항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위약금 몇 천만 원이 걸린 계약서의 조항만큼 완벽한 이유가 또 있을까.
“너한테 그 계약서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위약금 물어 줄 돈도 없고 네 소속사 사람들에게 불편한 시선 받고 싶지도 않아.”
“누가 그렇게 본다고.”
“넌 그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난 아냐.”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넌 신경 쓰이는 게 없다지만 나는 신경 쓸 게 너무 많거든. 이제 장난 같은 연애 할 나이도 아니고…….”
당분간 연애 같은 건 생각도 못 할 것 같지만, 결혼까지 생각하던 애인과의 관계도 완전히 끝났으니 다음 연애는 조금 더 신중하게 해야겠지.
‘너 좋은 사람이긴 해. 근데 너 열성이잖아. 게다가 그걸 커버할 만큼 배경이 받쳐 주는 것도 아니고……. 설마 진지하게 나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직전의 연애를 끝내며 들은 말이 그따위였다. 그러나 더 화나는 건. 예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거다.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게 맞아. 그게 우린 아니고.”
예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규진에 대한 감정이라고는 분노도, 원망도, 애증도 남지 않았지만 그가 했던 말만큼은 아직도 예현의 무의식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어차피 계약 내용은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네 연인인 것처럼 구는 거지, 우리끼리 있을 때 연인 놀이를 하는 것까지 포함된 건 아니었잖아.”
“연인 놀이.”
이정의 예현의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할 말이 없어서인지, 할 말이 너무 많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그냥 처음으로 돌아가자. 비즈니스 관계, 그냥 직장 동료 같은 사이로.”
예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정이 픽, 웃음을 흘렀다.
이정의 웃는 얼굴은 분명 예현이 남몰래 좋아해 마지않았던 것이었는데, 지금 이 웃는 얼굴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내가 직장을 다녀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직장 동료랑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제한적인 줄은 몰랐네.”
이정이 예현을 비꼬듯 말했다.
“직장 동료랑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뭐. 안부 인사, 업무 이야기……. 아. 식사까지는 할 수 있나?”
“적어도 이런 소리 들었다고 화내지는 않지.”
예현이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그러자 이정이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까지 화가 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날 잘 모르고 있었나 봐.”
이정이 다시 한번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이 예쁘게 휘어지는 것을 보다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졌던 예현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형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내가 이야기할 차례인가?”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속도에 맞추어, 조금 천천히 다가가 보려던 계획은 이 시간부로 완전히 철회였다.
스스로 말할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려고 했더니, 기다리다가는 예현이 도망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말하는 방식이 틀렸어. 그런 말을 할 거면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하질 말았어야지. 그럼 나도 나 싫다는 사람한테 보기 싫게 질척거리고 싶지는 않으니 한 발짝 물러나 줬을 수도 있었잖아?”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어떤 핑계를 들어도 그러지 않았을 것 같지만. 이정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예현이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하려는 말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어. 충분히 알겠다고.”
이정이 예현의 말을 끊어 버리고는 말했다.
“뭐가 그렇게 무섭다는 건지 모르겠어.”
조금 화가 났다. 이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다 식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하. 이거 읽으면서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종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계약서였다.
이정은 바다를 다녀오며 예현이 자신에게 조금 더 빠져들었다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짜증 났겠지만, 예현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7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사랑을 연기해 왔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대충 그런 감정이겠지, 라는 생각 정도는 했지만 그게 뭐길래 저렇게까지 바보가 될까.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길래 저럴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이정이라고 평생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멍청한 짓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유난히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 사람에게 꼭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이 행동이 내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할까. 이걸 보면서 대체 왜 한심한 감정이 아니라 설레는 마음이 느껴진다는 걸까.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온 이정이었는데, 지금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왜 자꾸 이렇게 유치하게 굴고 싶어지지.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입은 이성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감동적이네. 감동적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네.”
비꼬는 것 같은 말에 예현이 조금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싫어. 형이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대체 뭐가 문젠데.”
이정이 계약서를 책상 위에 도로 내려놓고 말했다.
“계약서가 문제야?”
“아니.”
계약서는 가장 쓸모 있는 핑계였지만 지금 이 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계약서가 아니었어도, 이런 급이 맞지 않는 연애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걸 배웠으니까.
“말했잖아.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는 사이야. 네가 왜 이렇게 화내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데?”
예현의 날카로운 말투에 이정이 입술을 작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라.
“네가 생각하는 옳은 선택이 뭐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건데?”
내가 바라는 것. 이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예현이 날 좋아하고 나도 그런 그가 싫지 않으니 언젠가 그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게 만들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서 내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이 뭘까.
“그냥, 네 마음대로 안 된다고 떼쓰는 거잖아. 애도 아니고.”
명백한 어린 애 취급에 이정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러나 예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저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나중에 상처받느니 지금 이야기하고 끝내는 것이 백번 나았다.
“네가 기분 나빠할 이유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마냥 화만 내면 다인 건 아니잖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마쳤다.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냥, 무난한 관계로 지내자. 그게 어려우면 차라리 무시하는 게 좋겠어.”
이게 맞는 거야.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할 말 없으면 먼저 일어날게.”
“……기다려.”
한참을 예현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정이 입을 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예현의 말이 맞았다. 계약서도 있고, 스토커 때문에라도 3개월이 끝나면 헤어졌다는 기사를 내야 한다.
몰래 만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재련과 주석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역시 분명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도 싫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석을 찾고 반박할 핑계를 찾아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 형 말이 맞아. 계약서도 있고, 앞으로의 문제도 있을 테고. 망할 스토커가 언제 잡히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정말 끝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정이 말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싫다면?”
수많은 이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능이 이성을 이긴다면, 어떤 걸 감수하게 된다고 해도 좋으니 그걸 손에 넣고 싶다면.
“잠깐 생각해 봤는데, 지금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생각날 것 같아서.”
그게 정말 원한다는 감정이 아닐까. 이정이 예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예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있잖아. 이게 좋아한다는 마음인 건가 봐.”
“무슨…….”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거창한 것 같았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대단한 감정이라기엔 아직 미미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예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리고 언젠가 그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먼저 꺼내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좋아해.”
이정의 말에 예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금 전의 냉정한 말투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깜짝 놀라 동그랗게 뜬 눈만이 이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도 날 좋아하고, 나도 형을 좋아하는데. 그걸로는 안 돼?”
이정이 물었다.
예현과 자신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들자면 정말 많은 이유가 있었다.
예현의 말대로,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이 끝났는데 두 사람이 친분 관계를 이어 갈 필요도 없었고 두 사람은 그저 비즈니스 상대에 불구한 관계였다.
헤어졌다는 기사를 냈다고 해서 스토커가 미친 짓을 그만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게다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와 달리 예현에겐 이 관계를 이어 가야 할 동기가 없었다.
규진에게 자신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제까짓 인간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했었는데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인간에게 복수하겠다고 열을 내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게다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인간이 파혼까지 당했으니 이제 정말 남은 일이 없을 터였다.
“……말했잖아. 난 위약금을 물어 줄 만한 돈도 없고, 언제까지 우리가 같이 살 수도 없는 일인데…….”
예현이 다시 이유를 끌어왔다. 그러나 이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싫어서라는 말은 안 하네.”
이정의 말에 예현의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조금의 분노가 섞인 열기였다.
“……재미있어?”
예현이 입술을 꾹 물고 이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네가 말한 대로야. 말했잖아. 좋아한다고. 그런데 어떻게 네가 싫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겠어?”
“형.”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한테는 이게 다 별거 아니고, 재미있는 상황 같아 보일지 몰라도 나한텐 아냐.”
분명히 다 끝내겠다고 마음먹고 한참 동안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깔끔하게 끝을 맺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는데 정작 이정의 말 한마디에 휘둘리는 것이 짜증 났다.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거. 그게 진짜여도 안돼. 우리 이제 세상에 감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넘친다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잖아.”
이정이 좋아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 줄 몰랐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먼저 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당황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난 분명히 말했어. 그러니……”
“위약금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했지. 그럼 그 위약금 내가 낼게.”
“……뭐?”
이정의 말에 예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추가 조항 3번. 신예현과 강이정은 서로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을 명시한다.”
이정이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예현이 몇 번이고 읽었던 그 구절을 읊었다.
“‘서로에게’라면 이건 나한테도 해당되는 조항이고, 난 앞으로 많이 드러내고 싶으니 이 위약금은 내가 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예현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하는 이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재련 형이랑 주석 형 눈치……. 이것도 내가 해결할 수 있을 테고. 그다음은 뭐였지.”
“뭐 하자는 거야.”
이정은 예현이 말했던 이유를 하나하나 꼽아 가고 있었다.
“안 되는 이유를 다 없애 버리면 다시 생각해 줄 수 있을까 싶어서. 일단 다 정리하고 다시 물어보려고.”
그렇게 말하는 이정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예현이 그런 이정을 잠시 바라보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뭐, 다른 세상 사람이라서 안 된다고 했던가.”
이정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중인데.”
“이게 뭐가 이성적이라는 건데.”
예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스토커.”
이정이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현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굳은 채로 그런 이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주석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 타이밍에 왜 매니저님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의아해하기도 잠시. 이정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스토커 건, 그냥 경찰에 신고해. 협박에, 주거 침입에, 업무 방해에 뭐든 할 수 있는 거 다 걸어서 신고하려고.”
[뭐? 갑자기 왜?]
“강이정!”
예현이 식겁하며 이정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이정은 쉽게 핸드폰을 빼앗기지 않았다.
“아무튼, 난 말했어.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해.”
여유롭게 다음 말까지 마친 이정이 핸드폰을 든 팔을 내렸다. 예현이 뒤늦게 이정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지만 이미 전화가 끊어진 이후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장난하는 거 아냐.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예현이 허망한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외쳤다. 그러나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을 받아칠 뿐이었다.
“왜 이러는 건데. 넌 이게 재미있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널 기다렸는지, 어떤 식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는지 아무 관심도 없지?”
예현이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이성적인 대화로 일을 해결하기에는 이미 상황이 많이 틀어져 버린 후였다.
그리고 사실,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쉽지? 그러니까 이러는 거겠지. 돈도, 사람들 눈치도, 스토커도 다 쉬우니까…….”
“그럼 형은 뭐가 그렇게 어렵고 무서운데.”
이정이 예현의 말을 끊어 버리곤 말했다.
“쉽지 않아. 사소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아.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아니까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뿐이야.”
어떤 대가를 감수해도 좋을 것 같았다.
돈을 쓰는 것도, 주석과 재련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도, 별 같잖은 인간들이 연예인이, 공인이 되어서 유난을 떤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도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예현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은 싫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무언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싫은 것은 이정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왜 무섭지 않은데? 네가 쌓아 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거야. 내가 뭐라고 그걸 감수하겠다는 건데? 스토커 사건을 공론화하는 게 정말 괜찮았으면 진작에 신고했었겠지.”
예현은 이정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가 자신의 평판에는 꽤나 신경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버틸 것이 아니라, 멀쩡한 집을 옮길 것이 아니라 스토커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신고를 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이유로 댔다는 것만으로 그걸 무너트리겠다고.
“내가 언제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아니면 지금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한 걸로 보여? 그럼 내가 기뻐하기라도 할 것 같아 보이냐고.”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다는 건데, 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이라고 그런다는 건데. 예현은 이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이유를 인정하는 순간 그 마음이 진지한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안 돼.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절대 아니야. 오히려 끔찍하다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인데 그럼 어떻게 할까.”
그러나 그런다고 물러날 이정도 아니었다. 이정이 예현을 보며 말했다.
“마음은 이미 가졌는데도 안 된다는데, 그럼 안 되는 이유를 다 없애 버려야지. 나한테도 그 일들이 별거 아닌 건 아냐.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게 뭔지 아니까.”
이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예현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이런 얼굴을 하고, 날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서 하는 행동은 그와 정반대였다.
“더 중요하고 더 갖고 싶은 걸 가지려는 게 나쁜 일이야?”
예현은 그 마음을 숨기려 들었고, 드러내고도 도망치려 들었지만 이정은 달랐다. 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그칠 수 없었다.
도망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건 멍청한 짓이지. 이정은 같은 마음을 하고도 잔뜩 겁을 먹은 예현을 어르고 달래 자신의 곁에 남아 있게 만들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하는 건데.”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내 자리를 찾아가겠다는 것뿐이야. 난 너한테 바라는 것 없어. 그냥…….”
“나는 바라는 게 많은데. 그걸론 부족해?”
이정의 말에 예현이 하던 말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말하는 이유들은 다 타당해. 그런데 내 힘으로 해결하라고 하면 해결하지 못할 건 없지. 위약금도, 눈치도, 스토커도 다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어.”
“그걸 어떻게…….”
“그런데 이거 하나만큼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 스스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 모르겠어.”
위약금은 물어 주면 그만, 눈치는 주석과 재련에게 역으로 눈치를 줘 버리면 그만, 스토커 역시 공권력의 힘을 빌린다면 이내 잡을 수 있을 터였지만 마음에는 해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그걸로는 안 되는 거야?”
“하.”
예현이 기어코 눈물방울을 떨어트렸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기어코 이정의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뻤다. 동시에 분했다.
자신이 한참 동안 고민하고, 이게 맞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마련해 온 방안이 그의 말 몇 마디에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 분했다.
그런데 분한 마음도, 현실도 다 무시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냉정하게 받아쳐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밀어낸대도, 이정이 지금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계속 떼를 쓰면 내가 과연 그 말을 끝내 거절할 수 있을까?
“하아…….”
받아쳐야 하는데,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혼자 이정을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상황을 상상해 봤고, 상상 속 이정의 말을 몇 번이고 받아쳤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애초에, 그의 고백을 거절하는 자신의 모습은 가정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십 개의 상황을 상상하면서도,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면서도 그런 장면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인정해 버리면 그땐 정말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예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훔쳤다. 잠시 그런 예현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되는 이유가 있으면 내가 그 이유를 해결할게. 그리고 괜찮을 이유를 만들게.”
이정이 조금 초조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도 지금 상황은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상황을 납득하고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예현이 끝내 자신을 잔인하게 밀어내더라도, 원하는 대로의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가 될 것 같고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고, 몇 달 정도 생각하다 잊어버릴 것 같으면 안 한다!’
왜 이 상황에서 그 말이 다시 떠오르는 걸까. 예현이 피식 웃었다.
예현이 왜 웃은 것인지 알 턱이 없는 이정이 잠시 입술을 물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음…….”
이정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예현의 말을 듣고 화가 난 것도 잠시, 화를 내는 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무서운 것들을 다 치워 주면 되는 게 아닐까.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됐지만 최선을 다해 예현을 달래고 안심시켜 준다면 언젠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겠지.
“계약서가 없어도, 스토커가 잡히고 더 이상 내게 계약 연인이 필요하지 않게 되더라도 형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미래를 생각하면 굽히고 들어가는 것 따위 전혀 상관없었다. 이보다 더 낮은 자세라도 괜찮았다.
“사랑해.”
대본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 문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드라마 속 계약 연애의 결말은 늘 똑같잖아.”
“드라마랑 현실이 같아?”
예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드라마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클리셰 가득한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드라마는 언제나 기분 나쁠 정도로 해피 엔딩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해피 엔딩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가끔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할 때도 있지.”
헛웃음 섞인 대답에도 이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해. 그건 지금까지 우리한테 일어난 일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매일 정해진 대로만 흘러가는 게 현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일도 없었겠지.”
뭐라고 말해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정이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예현의 뺨을 닦아 주며 말했다.
“원한다면 계약서 당장 가져와서 찢어 버릴 수도 있어. 재련 형이 계약서 어느 서랍에 숨겨 뒀는지도 알고, 그 서랍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거든.”
재련이 들으면 뒷 목을 잡고 넘어갈 만한 말이었지만 이정은 진심이었다. 분명 작성할 때에는 아무 불만 없이 작성했는데, 지금은 그 종이 몇 장이 인생의 장애물로 느껴졌다.
“그것 말고도 신경 쓰이는 일은 내가 다 처리할게. 그러니까 형은 마음 편히 지금 그대로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어차피 날 사랑할 거, 마음 편히 사랑하기만 하면 돼. 간단하고 좋잖아.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어찌됐든 예현이 자신을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어떤 이유를 가져와도,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이유를 없애 버리면 그만이니까.
우리 둘 사이에 남은 것이 스스로의 감정밖에 없을 때까지 이 짓을 이어 가다 보면 그땐 마지못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이겠지.
“내가 연예인인 게 부담스러워서라면, 나……”
“그만.”
차마 이정의 다음 말을 듣기 두려웠던 예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농담이겠지,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던지는 말이겠지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그간 쌓아 온 모든 것을 내던지겠다는 말은 듣기 두려웠다.
모든 이유를 해결해 주겠다는 말은 달콤하고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마냥 싫지만은 않은 자신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차라리 여기에서 끝을 내는 게 나에게도, 이정이에게도 좋은 거 아닐까.
“그만해.”
이 정도 했으면 나도 최선을 다한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런 생각들이 예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결국 항복 선언을 한 것은 예현이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지쳐 보이기도, 기뻐 보이기도 했다.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야. 예현이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알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은데. 정확하게 말해 주면 안 돼?”
이정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겨우 끄덕거리는 예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직접 들어야만 이 마음이, 이 불안감이 완전히 정리될 것 같았다.
“계약서가 없어도 네 애인으로 있을게. 그러니까 나 때문에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한참을 기다리자 예현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예현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이정이 그 소리를 놓쳤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