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7화 (7/15)

계약연애의 정석 3권

#7

이정은 그 주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날씨도 추운데, 좀 빨리빨리 다니면 안 돼?”

“오늘 머리가 좀 별로네요. 평소보다 신경 덜 써 줬나 봐요.”

“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이정이 아닌 그의 동료들이었다.

사소한 실수 하나하나에도 기분이 훅 가라앉질 않나. 평소 같았으면 나서서 괜찮다고 감싸 주려 했을 실수에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떠 버리질 않나.

“애인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 아냐?”

“저번에 촬영장 데려온 걸로 싸웠나?”

“아냐. 그러고 바로 다음 날은 기분 괜찮았는데?”

이정에게 한 마디씩 핀잔을 들은 스텝들이 한자리에 모여 도란거리기 시작했다.

여태 해 온 것이 있으니 이 정도로 이정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느니 하며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정 씨가 왜요?”

지나가던 명아가 스태프들의 수다를 듣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아니, 어제 촬영 오자마자 매니저님한테 빨리빨리 좀 다니면 안 되냐고 한마디 하는 거예요. 매니저님이 그냥 받아치길래 장난친 건 줄 알았는데…….”

“하나 언니가 머리 만져 준 거 보더니 어제보다 성의가 없는 것 아니냐고 그러는 거 있죠? 농담이라고 하긴 했는데. 표정이 완전 싸늘했다니까요.”

단발머리의 스태프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 민지 씨가 지나가다 앞을 못 봤나 봐요. 그래서 부딪혔는데 완전 대놓고 한숨 쉬더니 가 버리는 거 있죠?”

“아니,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나 싶다가도 진짜 왜 저러나 싶어서 말 걸기도 싫다니까요.”

스태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정과 친한 스태프들이니 이러다가도 이내 풀어질 것 같긴 하지만, 명아가 듣기에도 의외이긴 했다.

“이정 씨가요?”

촬영장에서 매너 좋기로 유명한 배우 중 하나인 데다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한 달이 넘도록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였다.

별거 아닌 일로 그렇게 기분 나쁜 티를 낼 만한 사람이 아닌데. 명아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애인이랑 싸운 게 분명하다니까?”

명아의 말에 누군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걔를 하루 이틀 봐? 촬영하면서 한 번도 저렇게 틱틱거린 적 없었다고. 갑자기 저럴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겠어?”

스태프가 뻔하다며 혀를 차며 말했다.

“우리니까 이해해 주고 넘어가지,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강이정 인성 폭로한다고 벌써 글 썼다.”

장난기 반, 서운함 반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나 명아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명아 역시 며칠 지나지 않아 예현의 번호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기본 프사나 풍경 사진이 올라가 있던 예현의 프로필 사진에 웬 아기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프로필 사진을 꾸준히 확인하지 않는 타입이라 여태 모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명아 자신도 작년 즈음 번호를 변경해 버려서 예현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예현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아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늘 분위기를 봐 이정에게 넌지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래서는 곤란했다.

“그럼 당분간 이정 씨 앞에서 애인 이야기 꺼내면 안 되겠네요…….”

명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예현이한테 연락해 볼걸.

괜히 고민하다가 물어볼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맞다. 둘이 대학 동기랬지?”

단발머리 스태프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있지, 이정 씨 애인은 어떤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은 얼굴 봤다던데, 난 하필 그날 다른 곳에서 촬영 보조하느라 못 봤어.”

“아이돌 연습생처럼 생겼다니까. 이정이보다 연상이라는데 얼굴은 더 어려 보였어.”

“아이, 그런 설명 말고. 사진 같은 건 없어?”

스태프가 툴툴거리자 이정과 가장 친한 스태프인 유연이 그녀의 머리에 딱밤을 날리며 말했다.

“애인인 거 들키자마자 해리 씨가 데리고 갔다니까. 그리고 연예인 친구 얼굴을 도촬하는 미친 스태프가 어디 있어?”

“이잉. 그냥 해 본 말이지.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래요. 언니.”

스태프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그녀는 다시 명아에게 물었다.

“응? 궁금하잖아. 얘기 좀 해 주라. 어떤 사람이야?”

“아, 제가 멋대로 이야기하기가 좀…….”

명아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저도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라서요. 마지막으로 대화했던 게 5년도 더 전이었어요.”

“5년? 명아 씨 28살 아냐? 대학 동기라며.”

“그 정도로 안 친한 사이였다는 거겠지. 됐어. 딴 얘기 하자. 재미없다.”

유연이 명아를 감싸 주며 말했다. 단발머리 스태프는 그 후로도 나만 재미있는 광경을 못 봤다며 툴툴댔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야기를 이어 갔다.

“휴…….”

정말 싸운 걸까.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스태프들의 말대로 그 이유가 아니고서야 이정이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긴 했다.

그럼 언제쯤 예현에 대한 걸 물어보면 되려나. 명아가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만나게 돼서 기뻤는데…….”

“누구랑요, 예현이 형이랑요?”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명아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곳에는 스태프들이 ‘오늘 하루 정도는 피해 다니는 게 좋겠어.’ 하고 신신당부를 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이정 씨.”

“안녕하세요. 한 매니저님.”

이정이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특별히 평소보다 예민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방금 얘기하던 건 예현이 형 얘기에요?”

이정이 어느새 명아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인이니 어느 정도는 얘기해도 괜찮겠지.

명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네. 사실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그렇게 좋게 헤어진 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늘 마음속의 짐처럼 남아 있었는데, 만나서 얘기를 좀 해 보니까 마음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았어요.”

명아의 말에 이정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기에 명아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싸우기라도 했었나 봐요.”

“그냥, 별거 아닌 걸로…….”

“전 애인이랑 관련된 거예요?”

이정의 말에 명아가 놀란 눈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기사도 났잖아요? 제가 형의 전 애인에 대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직접 들은 것도 있고요.”

“아……. 네. 괜히 오지랖 부리다가 그렇게 됐었죠.”

명아가 머쓱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안 봐도 뻔했다. 예현 같은 사람이 맨정신으로 박규진 같은 인간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어지간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연애를 했었을 테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래도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편해지더라고요. 예현이가 아닌 척하면서도 정이 많은 애잖아요.”

명아가 이정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싸운 것 같다더니, 먼저 예현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다들 헛다리 짚은 거였나 봐.

그럼 조금 더 얘기하다가 혹시 번호 좀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어볼까. 명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을 긋는 것 같다가도 또 못 이기는 척 다가오고, 그런 애라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명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예현을 칭찬했다. 그러나 명아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정의 입매가 다시 한번 싸늘하게 굳었다.

‘어차피 계약 끝나면 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넌 바쁠 테니까…….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걸.’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잖아. 내가 내 집으로 돌아가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아쉬운 기분 같은 건 금방 사라질 거야.’

선을 긋는 것 같다가도 못 이기는 척 다가오기는 무슨. 선을 허물어 줘도 도로 긋던데.

이정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며칠 내내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도 모를 정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데 명아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예현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정확히는, 예현이 아주 명확하게 그어 둔 선 때문에 며칠째 기분이 진창을 구르고 있었다.

“그래요? 몰랐네요.”

20살, 21살. 그즈음부터였을까.

이정은 그 시기를 지나면서부터 기분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란 건 그때 질리도록 배웠으니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있는 그대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살아왔다.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어. 내가 너한테 잘해 주면 헤벌레 좋아할 게 아니라 그 이유부터 생각했어야지.’

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이었기에 다시 그때처럼 바보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정은 며칠 내내 싫은 티를 내고 다닌 것으로도 모자라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한테는 잘만 선을 긋길래. 그랬구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느린 명아라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 당분간 번호는 못 물어보겠구나.

명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아무래도 스태프들이 헛다리를 짚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나. 명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애도 진심으로 선을 그으려고 한 건 아닐 거예요.”

이놈의 오지랖. 이미 오지랖 때문에 친구를 한번 잃어 놓고도 명아는 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게 천성인가 보지. 명아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은근히 겁이 많거든요.”

“…….”

이정이 아무 대답 없이 명아와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러나 그 오지랖이 아주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 더 선을 긋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도 어떻게 친해지긴 했었지만, 그전까지는 정말 왜 저렇게 날을 세우나 싶을 정도로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래요?”

이정이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을 한다는 것은 곧 그 말에 관심이 있다는 것.

명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나중에 그때 왜 그렇게 굴었냐고, 친해지기 싫은 줄 알았다고 하니까 조금 놀라더라고요.”

명아가 몇 년 전 어느 날의 예현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마 자기가 그러는 줄도 모르고 틱틱거리는 걸 거예요.”

“그렇다기엔 서류 한 장으로 끝날 사이처럼 행동하던데.”

“네?”

이정이 명아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강이정, 미쳤구나.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며칠 내내 꽁해 있더니 이젠 아주 막 나가네.

속으로 스스로를 욕한 이정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연애 초반에 둘이서 쓴 연애 규칙 같은 게 있었거든요.”

“아아.”

이정이 조잡한 변명을 내놓았다. 다행히 명아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본인은 티 안 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이상한 데서 겁이 많은 애라서요. 그래서 그런 걸 거예요.”

명아가 이정을 달랬다. 달래 주려고 하는 말인 걸 아는데도 괜히 기분이 조금 나아진 이정이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을 살짝 풀었다.

“그런 거면 다행이겠네요.”

“이정 씨가 예현이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이정의 표정 변화를 본 명아가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기사 보고 규진 선배랑 예현이가 얼마 전에 헤어졌다는 걸 알았어요. 이상할 정도로 연애 앞에서는 바보가 되는 애였으니까 괜찮을까 괜히 걱정했었는데.”

명아가 이정을 보며 웃었다.

“자길 많이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진심이었다. 위태로운 연애를 하는 것 같아서 좋지 않게 연을 끊고 나서도 못내 걱정이 되었었는데, 이제는 마음 편히 친구를 응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처 받지 않게 잘 대해 주세요.”

명아의 말에 이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멍청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게 얼마 만의 일이었더라. 이정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예현을 많이 좋아하나 보다, 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는, 그러니까…….

마치 먼저 연인이라는 말을 꺼내 놓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던 날의 예현처럼,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정 씨?”

언제부터 이런 마음이 들었었지. 이정이 명아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 지었다.

“맞아요. 형은 저한테 과분할 만큼 좋은 사람이니까요.”

어느새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 예현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니까.”

그냥, 나를 올려다보는 그 눈이 조금 귀여워 보여서 그런 것뿐이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이정이었다.

*****

“하아…….”

예현이 이정의 말을 떠올리다 한숨을 쉬었다.

‘그렇긴 한데, 좀 서운하긴 하다’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쉬운 것처럼 굴긴. 자신이 아직 연애에 대한 로망이 있는 스무 살 초반의 어린애였다면, 엉뚱한 착각이라도 했을 것 같은 말이었다.

“아닌 거 아니까, 괜한 생각하지 말고 다른 거나 신경 쓰자.”

그리고 일 말고도 신경 쓸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그렇게 생각하며 타자를 치는데 누군가 예현을 불렀다.

“예현 씨, 그러고 보니 저저번 달에 휴가 내고 아직 히트 휴가 안 썼네?”

서 주임이 예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이클 테라피 받은 건 아닐 거고, 슬슬 휴가 낼 때 되지 않았어?”

열성이라도 오메가는 오메가, 예현의 히트 사이클 주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 주에 병원 한번 다녀오려고 했어요. 수치 확인하러 가려고요.”

“그래? 그럼 다녀와서 연락줘~. 일정 체크해 두게.”

우성의 사이클 주기는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의 주기로 일정하게 찾아오는 법이지만 열성의 주기는 달랐다.

두 달에 한 번일 수도, 세 달에 한 번일 수도 있었고 우성과 다르게 그 주기가 꽤나 불규칙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번 사이클이 지나간 이후 두 달, 즉 60일 이내로 사이클이 찾아오지 않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다음 주면 지난번 히트 사이클이 지나간 지 딱 두 달째가 된다. 그러니 내일이나 모레 즈음에는 병원에 들러 페로몬 수치를 확인하고 주기를 가늠해 봐야 할 것이었다.

“하아…….”

사이클 휴가는 3일까진 유급휴가로 처리되지만 그 이상 쉬려면 무급휴가를 내야만 했다. 지난 히트 때에는 규진도 없고, 억제제도 잘 듣지 않아서 무급휴가를 이틀이나 냈었다.

연차수당 받으려고 연차도 아끼고 아끼는데 무급휴가라니,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신 사원은 아무래도 애인이 바쁘니까, 히트 혼자 보내야겠네. 애인이 너무 잘나도 피곤하겠구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과장이 능구렁이 같은 말투로 말했다.

“과장님도 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서 주임이 예현의 눈치를 힐긋 보고는 과장을 말렸다.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이번엔 김 과장의 말이 무례하게 들렸나 보다.

“에이. 그렇잖아. 강이정이 정도면 사이클 테라피 받을 건데, 신 사원도 그거 해 달라고 해 봐.”

김 과장이 눈치 없이 입을 놀렸다. 예민할 만한 사생활을 건드리는 질문에 다른 팀원들 역시 조금 놀랐는지 예현의 눈치를 살폈다.

하긴 이정이는 사이클 테라피를 받겠구나. 예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이클 테라피란, 사이클 주기를 최대 2년까지 미룰 수 있는 시술이었다.

작정하고 미룬다면 2년 이상도 미룰 수 있겠지만 그 이상 미루면 건강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져 병원에서 시술을 해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말인즉슨, 2년까지는 별 부작용 없이 히트도, 러트도 미룰 수 있다는 말이었다. 수많은 사회인 알파, 오메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시술 1위에 꼽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편의에는 그만한 부담이 딸려 오는 법.

사이클 테라피는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받아야 하는 데다가 한 번에 몇백이라는 금액이 깨지는 시술이었기에 예현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이 마음 편히 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하하…….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 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요. 병원 다녀와서 최대한 빨리 휴가 일정 잡을게요.”

“그래. 기왕이면 한창 바쁠 때 안 터지길 기도하고 있을게.”

서 주임이 김 과장을 대신해 대답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김 과장이 머쓱한 표정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저런 질문을 하면 자신이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기라도 하는 걸까. 하여튼 이해할 수가 없네. 예현이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저번 약이 영 안 맞았으니 이번에는 약을 바꿔 달라고 해야 하려나.

고민하고 있는데, 책상 위에 놓아 둔 핸드폰 화면이 반짝거렸다.

[♡ : 퇴근할 시간 다 되어가네. 오후 5 : 30]

[♡ : 데리러 갈까? ㅎㅎ 오후 5 : 30]

예현이 이정의 서운하다는 말에 아직도 휘둘리는 반면, 이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며칠 만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연락을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정의 변덕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예현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무시해야 한다고,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메시지가 몇 개씩 쌓일 때쯤에는 버티지 못하고 답장을 해 주곤 했다.

[집에 들렀다 갈거야. 거기 차 들어오기도 힘들어. 오후 5 : 35]

예현이 이정에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원래 다니던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 갈 수도 있으니 전에 먹었던 약 봉투를 챙겨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서 약 봉투 챙기고, 집 비운 지 오래됐으니까 청소도 좀 하고 와야겠다.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곤 타자를 치며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

“이번엔 가져와야 할 거 없어?”

[응. 딱히 필요한 거 없어. 그냥 오빠 필요한 거만 가지고 나와.]

예현이 집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쓰레기봉투 샀고, 혹시 몰라 물티슈도 좀 샀고. 이만하면 청소를 말끔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학원 잘 다녀오고. 조심해서 다니고.”

[알겠네요. 오빠도 잘 다녀와.]

할 말을 마친 예현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 달도 넘게 집을 비웠으니 쌓인 먼지를 깔끔하게 치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조금 긴장하며 확인한 우편함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광고지와 카드사에서 보낸 청구서를 미리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은 예현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열쇠가 어디 있더라…….”

주머니를 뒤적거린 예현이 잠깐의 헛손짓 끝에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한동안 카드키나 비밀번호로 문을 열었더니 그새 열쇠를 쓰는 것이 어색해졌다.

“……?”

그렇게 들어간 집 안, 예현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거실을 둘러보았다.

내가 저번에 집에 들렀을 때, 창문을 열어 두고 나갔던가?

실외와 다를 것 없이 느껴지는 한기에 예현이 몸을 살짝 떨었다. 게다가 묘하게 가구들의 배치가 삐뚤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탓이겠지. 기분 탓……..”

예현이 불안한 마음에 중얼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열어 뒀으니 열려 있는 거겠지. 바람 때문에 가벼운 물건들이 좀 흐트러져 있어서 이상해 보이는 거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집 안으로 들어간 예현이 자신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꿀꺽.’

예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감이 안 좋지. 우선 약부터 챙기고 청소를 최대한 빨리 끝내야 집에 돌아가 쉴 수 있을 텐데.

불안한 마음에 쉽사리 문고리에 손이 가질 않았다.

“후우.”

잠시 후, 깊게 심호흡을 한 예현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래. 내가 환기시킨다고 창문을 열었다가 잊고 그대로 돌아간 거였겠지.

‘끼이익’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문틈 사이 드러난 방의 모습에, 예현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떨어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게 무슨…….”

방 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엉망이었다. 책상 서랍이 하나도 빠짐없이 열려 있었고 옷장 역시 활짝 열린 채 옷을 토해 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아 방을 뒤진 것이 역력한 몰골에 예현은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치 보란 듯이 방을 뒤진 흔적을 남겨 둔 것 같은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한참 동안 굳어 있던 예현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없어진 것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딱히 귀중품이랄 만한 물건도 없었으나 혹시 모르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예현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려 애를 쓰며 서랍 안을 확인했다.

통장이 들어 있는 서랍은 멀쩡했다. 요즘 시대에 통장 하나 훔쳐 가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당연한 일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했다.

다른 서랍보다 통장들이 들어 있는 서랍이 묘하게 덜 어지럽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금전적인 것은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평범한 빈집털이라면, 통장이 있는 서랍을 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을까?

보통 사람들은 서랍별로 물건을 정리해 놓으니까, 통장이 있는 서랍에 다른 귀중품이 있으리라 생각할 법도 한데…….

“설마, 설마…….”

예현이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닫아 갔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정과 처음 만났던 날에 받았던 주석의 명함. 번호를 저장한 후 대수롭지 않게 서랍에 던져 뒀던 그 명함이 갈기갈기 찢긴 채 책상 안에 들어 있었다.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 애를 써도 이 정도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스토커가,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예현의 집을 찾아왔었다.

[♩♪♬]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예현을 현실로 끌어온 것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였다.

그러나 몸을 짓누르는 공포 때문에 쉽사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예현은 전화가 끊기기 직전까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겨우겨우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찌나 정신없이 받았는지, 빤히 액정 위에 떠 있는 발신인조차 확인하지 못한 예현이었다. 넋이 나간 채로 겨우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자 상대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엔 잘 갔어? 왜 이렇게 답장이 없어. 걱정되게.]

발신인은 이정이었다. 퇴근하기 전 집에 다녀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이후 예서에게 전화한 것을 제외하고는 핸드폰을 보지 않았더니 다른 메시지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데리러 안 가도 괜찮아? 퇴근 시간 겹치는 거 오랜만에 있는 일이잖아.]

“…….”

이정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으나 예현은 멍하니 찢어진 명함 조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이정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예현을 불렀다. 그러나 예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핸드폰을 들고만 있었다.

“집에 왔는데, 집이…….”

예현이 상황을 설명하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집이 엉망이야. 아무래도 스토커가 집을 뒤진 것 같아. 매니저님의 명함이 찢어진 채로 놓여 있었어.

마치 나 보란 듯이, 언제든지 널 지켜보고 있다는 것처럼 집을 뒤진 흔적을 보란 듯이 남겨 두고…….

“헉.”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 가던 예현이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내 집에 들어와 이렇게 뒤집어 엎어 뒀을 정도라면, 지금 이 집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예현은 자신이 통화 중이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나가자. 스토커가 찾아올 수 없을 곳으로 가서 생각하자.

[형, 형?]

손에 쥔 핸드폰에서 이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현은 가져온 쓰레기봉투를 그대로 내팽개쳐 둔 채로 집을 나가려 했다.

“아!”

그렇게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예현은 집 앞 복도에서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정신이 없어 누군가 앞에 있는 줄도 몰랐다. 예현은 부딪힌 상대의 얼굴조차 올려다보지 않고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가려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때, 부딪힌 상대가 예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형.”

예현은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부딪힌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조금 안심함과 동시에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강이정.”

이정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정이 당황한 채로 예현을 내려다보았다. 예현의 집에 찾아온 것은, 꽤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데리러 갈까 물었더니 무뚝뚝한 말투로 거절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집에 간다는 건 뭔가 필요한 것이 있어서일 텐데, 짐도 있으면서 알아서 오겠다니.

기껏 화 풀고 먼저 연락해 줬더니 도망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짐 있는 거 아냐? 오후 5 : 41]

[나 운전 잘 해. 금방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데. 오후 5 : 41]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장이 없었다. 잠시 꿍한 얼굴로 답장을 기다리던 이정은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밑에 차를 대놓고, 돌아올 때 데리러 왔다고 함께 돌아가자고 하면 한숨을 쉬면서 알겠다고 하겠지.

찰나의 놀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뭐, 잠깐 고생하는 것 따위는 별것도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예현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세모동으로 출발한 이정은 예현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조금 더 일찍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혀 예상보다 늦게 예현의 집 앞에 다다른 이정은 도착하자마자 예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할 정도로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전화 연결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그러나 예현은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는 것에 이상한 것을 느낀 이정은 모자를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형, 형?”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서 예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

그렇게 주택 2층, 예현의 집이 있는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예현이었다.

“아!”

이정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달려온 예현은 부딪히고 나서도 이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도 몸을 일으켜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모습에 당황한 이정이 예현을 부르고 나서야 두 사람의 시선이 제대로 마주했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이정이 새하얗게 질린 예현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정의 목소리를 듣고 난 이후로 호흡이 조금 안정된 것 같기는 했으나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채였다.

“형?”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로 이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에 적잖이 놀란 것 같은 모습에 이정은 우선 예현을 가볍게 안아 다독였다.

“뭐 때문에 이렇게 놀란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

이정이 품에 안은 예현의 등을 다독거렸다. 작은 몸이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충격을 받은 듯 덜덜 떨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예현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좀 진정이 됐어?”

이정이 예현을 안은 채로 물었다. 조금 진정되고 나자 그제서야 이정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진 예현이 이정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어…….”

다짜고짜 달려 나오더니, 부딪히고 나서도 정신 못 차리고 떨고만 있었으니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예현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집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왜 이렇게 놀랐어.”

아, 그래. 집에서 뛰쳐나온 이유가 있었지. 예현이 고개를 확 들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집이, 집이…….”

그런데 뭐부터 말해야 하지.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아 말문이 막혔다.

“집?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그런 예현을 보고 있던 이정이 예현을 일으켜 세우며 그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도 둘이 가면 좀 낫겠지. 집에서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대응할 수도 있을 거고……. 혼자 가는 것보다는 백번 나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빈집털이라도 든 건가?”

예현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상황을 대강 파악한 이정이 눈가를 찌푸렸다.

하긴 한 달도 넘게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으니 빈집털이의 타깃이 될 만도 한가. 아니지, 단순 빈집털이라고 생각하기엔 겁을 너무 먹었던데.

경찰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떨고 있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중요한 게 없어지기라도 했어? 우선 경찰에 신고부터……”

“명함.”

예현이 이정의 말을 끊어 버리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명함? 뜬금없는 말에 이정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예현이 다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매니저님 명함……. 서랍 안에 넣어 뒀었는데 그게 찢긴 채로 서랍 안에 들어 있었어. 귀중품에는 손도 안 대고 그것만 그렇게 찢어서 보란 듯이 넣어 뒀다고.”

예현의 말에 이정이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보통의 빈집털이라면 연예인 매니저의 명함 따위를 찢어 서랍 안에 넣어 둘 필요가 없지.

“스토커……인 것 같아.”

예현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정의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한동안 잠잠한 줄만 알았던 스토커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하아…….”

이정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주석이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방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석과 이정 역시 스토커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는 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질리도록 기상천외한 짓을 하는 인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사진 위에다가 엑스자를 치는 정도였는데, 이건 확실히 위험한 신호였다.

“집 주소를 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쳐들어오기까지 할 줄은…….”

예현이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막연히 집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건 경찰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경찰에 신고하면…….”

연예인이면서 그런 것도 감수 못 하냐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현이 걱정이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건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그러자 이정이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태 참아 왔는데 내가 망쳐 버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러니까 그딴 걸 왜 신경 쓰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정해. 예현 씨. 그런 이유로 신고하기 망설여지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주거 침입으로 신고하면 굳이 이정이 이야기 꺼내지 않고 신고할 수 있거든요.”

주석이 이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예현이 아, 하고 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철회했으나 이정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련 이사님한테도 연락했어. 바쁘셔서 오진 못하셨지만……. 이번 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시더라.”

“지금 바로 신고하자. 그 미친놈이 언제 또 올 줄 알고.”

이정이 지금 당장 예현을 경찰서로 데려가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이 와중에 누가 누굴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 걱정할 수도 있지 왜 그렇게 화를 내.”

예현이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걸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이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일단 진정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주석이 당장이라도 예현을 데리고 나갈 듯 그의 손목을 움켜쥔 이정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

“그렇지만 예현 씨, 지금 바로 신고해야 한다는 말에는 찬성이에요. 마침 차도 두 대니까 이정이 너는 집에 먼저 돌아가 있고. 예현 씨는 저랑 신고 넣고 집에 돌아가면 될 것 같아요.”

“뭐?”

이정이 놀라 주석을 돌아보았다.

“뭐는 무슨. 네가 여기 남아 있으면 경찰들이 너한테 관심 끄고 있을 것 같아? 기사 나는 거 시간 문제야.”

주석의 말에 이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돌아가.”

“……같이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에 예현이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이정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괜찮아. 매니저님도 같이 있어 준다고 하셨고…….”

사실 함께 있어 줬으면 하지만, 그럼 너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 예현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숨기고 애써 웃었다.

“지금까지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너도 쉬다가 온 걸 텐데 먼저 들어가 있어. 금방 돌아갈게.”

힘들다고 한번 어리광 부렸다가는 끝도 없이 약해질지도 모르니까.

예현이 괜찮다며 기어코 이정을 돌려보냈다. 주석과 예현을 남겨 두고 복도로 쫓겨난 이정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말했다.

“내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형 걱정만 해.”

그렇게 말한 이정이 발걸음을 돌려 복도를 걸어나갔다. 모자를 다시 눌러 쓰고 걸어가는 이정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이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이는 것만 같았다.

*****

예현과 주석을 두고 먼저 집으로 돌아온 이정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집어 던졌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 한번 부르는데 기자들에게 사생활 팔릴 걱정부터 해야 하는 인생에 이렇게 짜증이 치밀어오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마따나, 연예인이니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번만큼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재련 형 : 소식 들었다. 이번에는 경찰에 신고까지 했으니까 제발 그 미친 놈 면상이나 확인 할 수 있으면 좋겠네. 오후 7 : 01]

핸드폰을 들어 예현에게 온 연락이 없나 확인했지만 이정을 반기는 것은 재련에게서 온 메시지 한 통뿐이었다.

그래, 분명 일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토커 놈이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어 대서 꼬리를 내밀어 주는 것. 그게 바로 일반인과의 공개 연애를 시작하며 기대한 것이지 않았나.

분명 목표가 이루어졌는데, 기분이 좋기는커녕 진창에 처박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지 않으면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 데 성공했다.

단순 주거 침입에 불과하니 빠릿한 일 처리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CCTV를 확인하고 범인의 동선을 파악하는 데에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는데, 드디어 그 망할 미친놈의 정체를 알아낼 방법에 한 발자국 다가섰는데 그 따위 것보다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손을 벌벌 떨면서도 자신에게는 기대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 자체가, 예현이 겁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씨발…….”

이정이 작게 읊조렸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가벼운 짜증 이상의 격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

그때,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예현이 형인가, 이정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전화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젠장, 아니잖아.”

그러나 전화의 발신인은 예현이 아니었다. 잇새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정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뭐야.”

[뭐야는 무슨 뭐야, 집이냐?]

발신인은 재련이었다. 바빠서 오지도 못한다더니,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겼나 보지.

“그럼 집이지 어디겠어.”

이정의 날 선 답변에 재련이 수화기 너머로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경찰 신고했다고 들었다. 단순 주거 침입이라고 생각할 테니 수사가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뭐, 그래도 우리끼리 잡으려고 설치는 것보다야 낫겠지.]

나한테는 아무 연락도 없었으면서, 와중에 김재련한테는 연락을 했단 말이지.

“그래? 다행이네. 여태 잡는다, 잡는다 말만 하고 일이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어서 좀 짜증 났었거든.”

[……지금 나한테 눈치 주는 거냐?]

재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뭐라던데?”

[뭐라고 하긴……. 일단 주석이가 집 정리하는 것 좀 도와주고 네 집까지 데려다주겠단다. 그 방만 엉망으로 뒤집어 놨다고 하더라고.]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엉망으로 뒤집어져 있는 방과 달리 거실은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꽤 멀쩡했었지.

잠시 그 장면을 생각해 보던 이정이 말했다.

“……그 방만?”

[그래. 다른 방에도 들어간 흔적은 있는데, 예현 씨 방만 엉망이라고 하더라고.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너도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나 보지?]

재련의 말에 이정이 엉망이던 방을 떠올렸다. 예현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방은 분명…….

“뭔갈 찾기라도 했던 걸까?”

무언가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책상 서랍부터 옷장, 작은 수납장까지 열어 둔 것이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정말 뭔가를 찾으려 했던 거라면?

“스토커가 예현이 형 집에서 찾을 만한 물건이 뭐가 있지?”

[뭐? 잠시만.]

이정의 말에 대강 상황을 파악한 재련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목도리……라도 찾으려고 했던 걸까. 네 목도리에 관심을 보이던 것 같았는데.]

“목도리?”

갑자기 목도리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이정의 되물음에 재련이 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 목도리 이야기 하는 거 싫어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지난번 예현 씨가 받은 협박 편지에 그 목도리를 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어. 그래서 그 혹시 그 목도리를 찾으러 온 건가 싶어서.]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해.”

그럼 난 그것도 모르고 형한테 그 목도리를 하고 다니라고 한 건가. 이정이 이마를 짚은 채 입술을 물었다.

[네가……. 아니다. 어쨌든. 그걸 찾으려고 한 거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그렇다고 하기엔 책상 서랍까지 열어 볼 필요가 있었을까? 목도리를 책상 서랍에 넣지는 않을 텐데.”

[뒤지다 보니 화가 나기라도 했나 보지.]

그런가. 그렇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책상 서랍에 들어갈 만한, 스토커가 찾을 만한 물건…….

“잠시만.”

마치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이정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계약서.”

그 세 글자가 이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계약서. 계약서가 있잖아.

[……뭐?]

이정의 말에 재련이 당황해 말했다.

[잠시만. 그래, 계약서가 있었지. 아냐. 그렇지만 그 새끼가 계약서의 존재를 알 리가 없잖아.]

“존재를 알고 말고보다, 스토커가 그걸 봤느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니야?”

누구의 손에 들어가도 안 될 문서였지만 스토커에게 그 문서를 들키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터였다.

“목도리……. 그래, 애초에 목도리를 노리고 그 집에 찾아갔다는 건 말이 안 돼.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훔쳐보고 있다가 튀어나오는 새끼인데 형이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걸 못 봤을 리가 없어.”

아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정과 예현이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테니 증거를 찾겠다고 집을 뒤진 것일 수도 있겠지.

“여태 뭐 하느라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그게 내 탓이냐? 신고하지 말자는 말에 동의한 건 너였……. 아니다. 지금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하겠어.]

이정의 말을 받아치려던 재련이 됐다는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일단 계약서 없어졌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네. 주석이한테 내가 연락해 볼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왜. 나도…….”

[애처럼 굴지마. 네가 지금 거기 가서 좋을 일이 뭐가 있는데? 너 멍청한 놈 아니잖아. 왜 자꾸 답지 않게 안 하던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예현 씨가 진짜 네 애인이라도 돼?]

재련의 말에 이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간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없지.

[일단 좀 진정하고 기다려. 끊는다.]

재련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주저앉은 이정이 몸을 뒤로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 계약서가 스토커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놈이 그걸 얌전히 가지고만 있을 리가 없다.

예현의 신상과 계약서의 내용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하려 들겠지. 그렇게 되면…….

여태껏 쌓아 온 것들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예현을 영영 만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이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만나지 못하는 것도 싫지만 예현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 싫었다.

분명 처음 이 관계를 시작할 때는 미움받는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는데, 지금은 예현이 저를 원망한다고 상상하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여태 참아 왔는데 내가 망쳐 버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제 걱정이나 할 것이지, 벌벌 떨면서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 싫었다. 예현이 자신을 걱정해 주면 마냥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도 아니었다.

내 걱정을 할 여유가 있으면 자기 자신이나 추스를 것이지. 왜 그 와중에 그런 소리를 해서 기분 착잡해지게 만드는 건지.

“하…….”

이정이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들었다. 제발, 스토커가 계약서를 찾지 못했어야 할 텐데.

한 달 반,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예현의 입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말겠다고 생각한 게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 망할 스토커가 짜증 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이미지고 뭐고, 당장 뛰쳐나가 스토커를 찾아내 족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계약서 내용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본인이 대중에게 지탄받는 상황이 생겨도 형이 내 곁에 있어 줄까.

이정이 별 희망 없는 생각에 입술을 꾹 물고는 눈을 감았다.

*****

“여기 있어요.”

주석과 함께 돌아온 예현이 자신의 방, 캐리어 속에서 계약서를 찾아 주석과 이정에게 보여 주었다.

“지난번에 집에 갔을 때,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가져왔었거든요.”

“진짜 다행이네요. 계약서가 있는 걸 알고 방을 뒤진 건 아니었겠지만……. 혹시라도 이걸 봤으면, 어휴.”

주석이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약서가 이정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기어코 확인을 하겠다며 이정의 집에 올라왔던 주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계약서 얘기 듣고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요.”

긴장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은 주석이 계약서가 사라지기라도 할세라 움켜쥐었다.

“그래도 이번엔 경찰에 신고까지 했으니까, 분명 좀 나아지는 게 있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예현이 아직까지 소름이 돋아 있는 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단 계약서는 앞으로도 이 집에 보관해 두는 게 좋겠어요.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우선 푹 쉬세요. 경찰에서 연락 오면 바로 저나 재련 이사님에게 연락주시고요.”

“네.”

주석의 말에 예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안 나와 보셔도 괜찮아요. 잘 쉬시고 다음에 뵐게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일 보자, 이정아.”

예현과 이정에게 인사를 건넨 주석이 이내 문을 열고 나갔다. 두 사람만이 남은 집 안, 적막한 공기가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너도 꽤 놀란 것 같던데, 괜찮아?”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예현이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날 데리러 집 앞까지 왔다가 그 광경을 본 것 같았지.

“데리러 와 준 거였지? 고마워. 근데……”

“집엔 왜 간 거였어?”

이정이 예현의 말을 끊고 물었다. 당황도 잠시,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예현이 대답했다.

“아, 집에…… 가져와야 할 것도 있고, 집 비운 지 오래됐으니까 청소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집에 갈 일 있으면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었잖아. 왜 말도 없이 갔어.”

함께 갔다고 해도 스토커가 집을 헤집어 놓은 후라는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 별다를 것 없었겠지만, 이정은 괜한 트집을 잡았다.

“내가 애도 아니고, 집 청소하는 동안 넌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할 수도 없잖아.”

예현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기에 이정은 딱히 반박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경찰은, 뭐래?”

“일단 빈집털이인 것 같다고 신고했고, 없어진 건 없지만 방 하나만 뒤진 데다가 물건을 찢어 놓고 간 게 이상하다고 했더니 그쪽에서도 이상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

예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경찰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보통 빈집털이랑은 수법이 좀 다른데?’

‘이거, 이쪽 방은 건드리지도 않았네.’

엉망이 된 예현의 방과 달리 예서의 방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깔끔한 상태였다. 그 이상한 광경을 지켜보던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단순 빈집털이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어디 원한 산 곳이 있다거나, 회사 기밀과 관련된 문서를 갖고 계시기라도 하신 건가요?’

‘아뇨. 그런 건…….’

‘흠. 일단 알겠습니다.’

차마 스토커나 이정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기에 가만히 손사래를 치자 경찰은 수첩에 무언가를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스토커나 네 이야기는 안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것 같아 보여?”

이정이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예현은 이정이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걱정해야지. 여태 스토커한테 시달리면서도 신고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 데에는 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내가 그걸 마음대로 말해 버릴 순 없잖아.”

“그래도, 형은 형 걱정은 안 돼?”

이정의 말에 예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내 걱정이라.

“……너도 네 걱정 안 하잖아.”

잠시 망설이던 예현이 내놓은 답은 그것이었다. 자기도 자기 걱정 안 하면서, 누가 누구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람.

“그럼 넌 왜 내 걱정부터 하는데.”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물어?”

이정이 예현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했다. 한 뼘 가까워진 거리에 예현이 조금 당황했으나 이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난…….”

그렇게 말하는 이정의 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걱정, 짜증,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아니다. 됐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감정까지.

“그러니까 내가 나보다 형을 더 걱정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

수많은 감정을 담은 눈으로 예현을 응시하던 이정이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형한테 화내는 건 아냐.”

이정이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잠시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이정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걱정했어.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답답하고, 그 와중에 형은 내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까 화가 나서…….”

변명하듯 내뱉은 전혀 부드럽지 않은 말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서 애정이 느껴진다면 이상한 걸까.

“일단 쉬어. 쉬고,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많이 놀랐을 텐데 괜히 계속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지.”

말없이 이정을 바라보던 예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이정이 예현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 너도 쉬어.”

예현이 이정에게 들리지 않을 인사를 건넸다.

화가 난 이정과는 달리, 이정이 걱정해 줘 기뻤다는 사실은 예현 스스로도 모르는 채로 밤이 지나갔다.

*****

제 방으로 돌아온 이정이 다음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대본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대본의 글자가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장면에 대한 분석은커녕, 대사를 외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하.”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이정이 대본을 던지듯 내려놓고 몸을 뒤로 기댔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 걸까.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일정에 쫓겨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을 때도 대본이 이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대사 하나하나가 아니꼬워 보이고, 인물의 감정선 따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심사가 뒤틀려도 보통 뒤틀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이정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대본에 집중을 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 봤지만 자꾸만 짜증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탓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예현의 집을 헤집어 놓은 것은 스토커일 것이 분명했다. 보란 듯 주석의 명함을 찢어 놓은 음침함이 딱 그다운 행동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스토커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꼬리를 드러내, 경찰에 신고까지 할 수 있었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이정이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제 걱정을 하던 예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놓고 뭐, 너도 네 걱정 안 하지 않냐고?

토끼가 호랑이를 걱정하는 꼴이 우스워서 한마디 했더니 호랑이보고 네 걱정이나 하란다. 아주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예현의 앞에서는 화내는 것이 아니라고, 들어가 쉬라고 말하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도 진정이 되지 않는 걸 보니 화가 난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정 씨가 예현이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이 타이밍에 명아의 그 말이 떠오르는 건 대체 왜 그런 걸까. 이정이 표정을 찌푸린 채로 한숨을 쉬었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3개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복수심에 불타는 일반인 하나를 이용해 스토커를 잡을 생각을 했을 때가 이제 한 달 반을 지났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필 그 골목에서 영상을 찍힌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사람을 이용해 스토커를 끌어내자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기왕이면 확실한 동기가 있는 쪽이 이용하기도 편하고 믿음도 가니까, 조금 더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고 싶어 친절한 척을 했었다.

내심 그의 전 애인인 규진이 예현을 조금 더 괴롭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예현이 조금 더 복수심에 불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잠시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규진이 날뛰어 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겨우 지난달의 일인데, 이젠 그가 예현의 인생에서 영원히 꺼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

“웃기는 소리를…….”

이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날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계속 보이니, 측은한 마음이라도 드는 거겠지.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으나, 그런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예현의 손목에 새파란 멍이 든 것을 봤을 때, 왜 그렇게 놀랐는지. 예현이 손목의 멍을 달고 들어오게 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은 것이 왜 못내 서운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정이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허공에 연신 뱉었다. 그러나 아니라는 말을 하면 할수록, 요즘의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만 점점 더 확실해져 갈 뿐이었다.

“…….”

예현이 힐긋거리며 이정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묘하게 이정의 분위기가 변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정하지만 어딘가 달라진 모습에 조금 섭섭하기도 하면서도 이게 맞는 일이라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예현이었다.

그렇게 어딘가 싸한 분위기의 이정에게 인사를 건네고,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오늘의 이정은 유난히도 멍해 보였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멍하니 시간을 때우는 이정은 낯설었다.

결국 먼저 말을 건 것은 예현이었다.

“오늘은 촬영 안 가?”

이정은 아침, 예현이 눈을 떴던 순간부터 집 안에 있었지만 예현이 이정에게 말을 건 것은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 시간이었다.

이정이 나가고 나면 이 어색한 침묵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방 안에 박혀 있었건만, 이정은 나가지 않았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은 아우성을 쳤다.

그 덕에 결국 예현이 어색함을 무릅쓰고 부엌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아, 오늘은 안 가.”

예현의 말에 한참 동안이나 멍을 때리고 있던 이정이 입을 열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안 가는지, 다음 촬영은 언제인지를 주절주절 늘어놓았을 텐데 이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녁은…… 안 먹어?”

예현이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오랜만의 휴일이라 그런지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아.”

이정이 부엌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이정은 어느새 하루 종일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답지 않게 또렷한 눈을 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쉰 거야?”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이정이 예현의 뒤에 자리 잡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정 때문에 조금 긴장한 예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스토커 사건이라면, 경찰에서 조사 시작했다고 들었어.”

“아, 그것도 있었지.”

이정이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했다. 그거 말고 생각할 만한 일이 뭐가 있다는 걸까. 예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정이 대답했다.

“거슬리는 게 있어서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쉽게 답이 나오지는 않네.”

이정이 예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엌에 왔으면 요리를 하든, 물을 마시든 해야 할 텐데 이정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예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것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면 쉽게 풀릴 일도 안 풀린다잖아.”

예현이 이정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예현이라고 이정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날 걱정할 시간에 자신이나 걱정하라며 화난 것처럼 굴던 이정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지만 의미 없는 착각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는 법. 정신 차리자. 예현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것도 그렇긴 하네. 이러고 있는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니까.”

이정이 그렇게 말하더니 정수기로 다가갔다. 시원한 물 한 잔을 집어 들더니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오늘은 휴무고, 내일은 나가?”

“아니. 내일까지 쉬어. 마지막 파트 촬영 앞두고 리프레시 하라는 의미에서 촬영 전부 스탑이거든.”

이정이 식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마지막 파트를 앞두고 있다니. 예현이 조금 놀라 물었다.

“벌써?”

“다섯 편 분량 정도 남았는데, 장소 때문에 미리 찍어 둔 장면들도 있으니까 해 봤자 3주 정도면 끝날 것 같아.”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생각보다 빠르네…….”

예현이 그런 이정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말했다.

잠깐, 그럼 명아의 전화번호를 얻을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아닌가?

이 분위기에서 명아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촬영장 구경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빠르게 전화번호만 받아 오려고 했었는데.

어색하다며 망설이다 기회를 놓치게 생겼다.

“조금 빠르게 끝나는 것 같긴 하네. 봄은 되어야 끝날 줄 알았는데 겨울 다 가기도 전에 끝나는 거니까.”

이정이 말했다. 이 드라마가 끝나도 일주일 정도 쉬다 다음 작품 촬영에 들어갈 테니 일상에 큰 변화는 없을 터였다.

다음 작품 촬영을 들어갈 때 즈음에는 예현이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 하나를 빼고는 말이다.

“시간이 천천히 가면 좋겠어.”

“왜?”

“그래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원하는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이정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이정은 명아와의 대화 이후 자신이 왜 며칠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예현이 자신에게 선을 긋는 것이 싫었다. 어느 정도의 선이 필요한 관계를 아는데도 그랬다. 예현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좋았고 예현이 그걸 숨기는 게 싫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호와 불호의 이유는 분명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제는, 이정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분명 신예현도 나를 좋아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내가 아니라 형이 더 티 내고,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왜 내가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 거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도 지나갔다.

“모르겠다.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

이정이 예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휴일의 절반을 멍청히 보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얼굴 가릴 필요 없이 밤바람 맞으면서 맘 편히 산책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좀 나을 텐데. 무리겠지.”

이정이 답답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밖에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발 닿는 대로 걷기라도 하면 마음이 조금 차분해질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에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기분을 완전히 망친 채로 돌아와야 할 테니.

예현이 그런 이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정이 무슨 생각 때문에 하루 종일 멍을 때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며칠째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데 자신의 책임이 조금은 있다는 것은 알았다.

조금이라도 서운함을 풀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예현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 차 있어?”

예현의 뜬금없는 말에 이정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

“어. 차.”

마시는 차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이정이 조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있긴 한데, 안 탄 지 좀 오래됐어.”

지하 주차장에는 이정의 차가 두 대 있었다. 광고 모델로 있는 곳에서 계약 기간 동안 홍보용으로 사용해 달라고 뽑아 준 차 한 대. 그리고 주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스스로 출근하려고 샀던 차 한 대.

매일같이 주석이 운전하는 밴을 타고 다니느라 몇 달 동안 손도 대지 않은 차가 두 대나 있긴 있었다.

“갑자기 차는 왜?”

“산책하고 싶다며.”

예현이 이정에게 유의미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촬영장이 아니고서야 나가는 것조차 힘들다는 이정에게 사람 없고 경치 좋은 곳을 알려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걸어 다니는 사람 얼굴을 구경하는 사람은 있지만, 달리는 차에 탄 사람 얼굴을 일일이 보려고 애쓰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그것도 그렇고, 바람 쐬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예현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가끔 밖으로 나가 목적지 없이 걸어 다니곤 했다.

“사람 없고 경치 좋은 곳, 아는 곳이 있거든. 내일도 쉬는 거면 하루 정도 바람 쐬고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예현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낸 말이었다.

“아니다, 혼자 있고 싶으면 그냥 장소만 알려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

아니지, 나 때문에 기분 상한 것 같던데 괜히 나랑 나가면 더 답답해지려나. 아차 싶었던 예현이 방향을 바꿔 이정에게 생각하고 있는 곳의 주소를 알려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정의 생각은 달랐다.

“아냐. 나 혼자 가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밤 운전도 서툰데, 혼자 가는 길에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

뭐든 직접 부딪혀 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혼자 걷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고민의 원흉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편이 고민 해결에 조금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정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사람 같지 않은 모습에 예현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네.”

하늘의 절반이 어두운색으로 물든 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 채 30분도 되지 않아 해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럼, 같이 나갈까?”

어쩔 수 없겠네. 예현이 이정을 보고 말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정이 차 키를 든 채로 자신의 차를 찾아 헤맸다.

“너무 오랜만에 타는 거라, 어디에 대 놨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이정이 한참을 돌고 돌아 자신의 차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차를 주차해 놓은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

주석이 가끔 세차 좀 하라며 차 키를 가져가 차를 끌고 나갔다 오곤 했으니, 차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여기 있다.”

이정이 평범한 중형차의 문을 열었다. 삐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형이 운전할래?”

“그래.”

예현이 떨리는 손으로 차 키를 건네받았다.

밤 운전이 서툴다며 차 키를 넘길 정도면 내가 운전하는 게 맞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예상외로 긴장하는 모습에 이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

“나도 운전해 보는 건 오랜만이라…….”

예현이 어깨를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서 불길함을 감지한 이정이 물었다.

“……얼마 만에 하는 건데.”

“……2년 반?”

예현의 말에 이정이 망설임 없이 그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빼앗았다.

무슨 자신감으로 운전을 한다고 한 거지. 이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근데 운전하겠다고 한 거야?”

“네가 밤 운전 하기 무섭다며.”

밤 운전이 무서워 봤자 장롱면허보다 무서울까. 이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내가 운전할게.”

“괜찮겠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이정이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괜찮아. 촬영 때문에라도 운전 꾸준히 하거든. 오래 운전해 본 적은 없지만 운전대 잡는 게 무서울 정도는 아니야.”

사실 밤 운전이 서툴다는 것은 내숭이었다. 이정은 살면서 운전 따위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었다.

대역을 쓰지 않고 촬영을 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괴짜 감독의 말에 위험천만한 운전을 해 본 적도 있는데 겨우 밤 운전 따위가 무서울 리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이내 예현이 조수석에 올라탔고, 차는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말을 걸었다.

예현이 찍은 주소는 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이정은 숙소가 어디든 상관없다면 자신이 아는 곳에서 하루 자고 와도 괜찮겠냐는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네, 여행 한번 와 본 적 없다면서 어딜 가자는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는데.”

“그냥. 머리 비우기에 좋은 곳이라 갑자기 생각이 났어.”

예현이 머쓱한 듯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며칠 내내 묘하게 선을 긋다가 또 하루 종일 멍 때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짓을 했다.

황금 같은 주말에 1박 2일로 집을 비운다니, 예서의 생일 즈음에나 있는 일이었다. 그마저도 예현이 먼저 나가자는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에 좋은 곳이거든.”

예현은 밖에 나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을 가 행복했던 추억이 한 번 정도는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19살의 여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변덕에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출발해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도착했던 바다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바다는 무슨 바다냐고 가기 싫다고 떼를 썼었지만 정작 가 보니 마음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지.

“나도 바다는 되게 오랜만에 가 봐.”

예현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그리고 하루 종일 멍하니 있는 이정이 보기 안쓰럽다는 핑계를 댄 외출이었지만 사실 예현이라고 마음이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 생각해야만 하는 것들.

겨우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끝내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잔뜩 남아 있었기에 남의 핑계라도 대고 밖으로 나가 머리를 비우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 난 지방 촬영 때문에 지난달에도 다녀왔는데.”

이정이 차를 운전하며 말했다.

사실 이정은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직업 때문에 가고 싶은 곳, 가기 싫은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편이 아니라 입 다물고 가는 편이긴 했지만 이정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바다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렇지만 이정은 예현이 적어 준 장소가 바다임을 알고 나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래도 누구랑 가는지가 중요한 거니까. 안 그래?”

이정이 예현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자신의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걸, 신예현은 알까?

아,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대로 예현은 아닌 척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니까, 자신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다고 생각해 먼저 손을 뻗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신예현은 날 좋아하니까. 내가 복잡해하는 걸 두고 보기만 하고 싶지 않겠지.

이런 걸 보면 날 좋아하는 게 맞는데, 대체 왜 어쭙잖게 선을 긋고 다 들킨 걸 아닌 척하려고 하는 걸까.

그걸 확인하려면 바다가 아니라 어딘가의 산간 오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가…….”

예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 탄 차가 밤을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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