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5)

#6

“다녀왔습니다.”

불이 켜진 거실을 보고 예현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일찍 왔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정이 집에 있었다.

“집에 온다고 문자 했었잖아.”

아, 예현이 그제서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핸드폰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예현이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켜려는 순간, 이정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잠깐만.”

소파에 앉아 있던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현에게 다가왔다. 뭐지, 당황한 예현이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이정의 걸음이 더 빨랐다.

“여기, 왜 이렇게 된 거야?”

이정이 핸드폰을 든 예현의 팔목을 가볍게 잡아 들어 올렸다.

이정이 들어 올린 쪽의 손목에 파랗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옅게 붉어진 정도였는데, 그새 멍이 들어 있었다.

예현이 별거 아니라며 옷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별거 아냐. 그냥……. 부딪혔어.”

“어떻게 부딪혀야 멍이 그렇게 들어.”

이정의 말에 예현이 뻘쭘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정의 말대로 예현의 손목에는 동그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부딪혀서는 저런 모양으로 멍이 들지 않지. 예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말했다.

“그럴 일이 있었어.”

규진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에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라 말하기 싫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정이라 더 그랬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기는 어려운 거야?”

이정의 말에 예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예현의 옷소매를 바라보던 이정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아야야…….”

상처는 눈치챈 순간부터 아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멍이 든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갑자기 손목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정말 끝이다. 다시는 볼 일 없을 터였다.

‘나라고 네 소식 전해 들을 때마다 마냥 마음 편하지는 않아. 괜히 신경 쓰이고,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잊으려고 노력할게. 네 눈앞에 안 나타날게.’

아련한 척하면서 말하던 것이 같잖았지만, 자신이 눈에 보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터였다.

버리기엔 아까운, 그런 장난감이었으니 남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게 달갑지는 않겠지.

“꼴 보기 싫은 사람이 계속 보이는 기분, 지도 한번 느껴 보라지.”

예현이 작게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이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차피 2달 정도 남은 기간,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인데 부끄러운 것이 뭐가 대수라고 걱정을 해.

어차피 이 기간이 지나면 하고 싶어도 못 할 거, 지금 다 해 둬야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거기 앉아 봐.”

그때, 방에 들어간 줄 알았던 이정이 무언가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손목이라 혼자 약 바르기도 힘들 거 아냐.”

이정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구급상자였다. 예현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소파에 앉자 이정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손목을 받쳐 잡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친 건 알겠으니까.”

“내가 해도 되는데…….”

주말, 어색하게 대화가 끝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거였다. 그러나 이정은 그런 어색함 따위는 없었던 일이라는 듯 무덤덤해 보였다.

“됐어. 이렇게 다쳐선.”

얼핏 핀잔을 주는 것 같기도 한 말투에 예현이 입을 꾹 다물고 이정에게 손목을 맡겼다. 손목 위로 조심스레 약이 발라지고 붕대가 감겼다.

“붕대까지 감을 필요는 없지 않아?”

“멍든 거 보이면 다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텐데, 그래도 괜찮아?”

아니, 그건 좀 곤란하지. 예현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치료를 받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붕대가 고정되었다.

“집에 있는 줄 몰랐어. 일찍 오는 줄 알았으면 저녁거리라도 사 올 걸 그랬네.”

예현이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괜히 웃음 지었다.

그래, 어색하게 지내든 뻔뻔하게 지내든 계약 기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그동안 할 수 있는 걸 다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웃었는데, 정작 늘 생글거리던 이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괜찮아. 저녁 먹고 왔어. 핸드폰도 못 볼 만큼 바쁜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바빴다기보다는 멘탈이 나가서 그런 거였지만. 어차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생각도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일단 손목은 당분간 안 쓰는 게 좋겠다. 요리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쉬어. 내가 하든가, 시켜 먹는 게 낫겠어.”

“아, 아냐. 괜찮은데.”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예현의 손목을 바라보던 이정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고 말했다.

“아냐, 그럼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며칠만이라도 그렇게 하자.”

평소와 똑같은 웃는 얼굴인데, 왜 이렇게 달라 보이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이정은 예현의 손목에 대한 것을 캐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준 후 평소대로 돌아와 예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카풀하자던 건 잘 얘기했어?”

“아, 어. 동생 학원 때문에 안될 것 같다니까 알겠다고 하더라고.”

예현 역시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려 노력했다. 예현이 소소한 이야기들을 이어 갔다.

“진짜 네 팬이긴 한가 봐.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네가 나 데리러 오기라도 할까 봐 같이 나가려고 힐끔거리더라고.”

“그래? 감사하네. 한번 데리러 가야 할까 봐.”

이정이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럼 진짜 기절하실지도 모르겠다.”

예현이 김 주임의 반응을 상상해 보며 작게 웃었다. 전화 통화만으로도 좋아 죽으려고 했으니 실제로 만나기까지 하면 정말 기절할지도.

“스토커만 아니면, 팬분들한테는 늘 고맙지.”

이정이 붕대가 감긴 예현의 손목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안 돼. 한번 보면 그다음에는 같이 밥이라도 먹게 해 달라고 조를걸.”

예현이 이정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어차피 두 달 후면 만나게 해 주고 싶어도 못 할 텐데. 예현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웃음 지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잖아.”

“그래. 그렇지.”

이정이 예현을 따라 웃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며칠 동안의 어색함을 씻어 내리는 대화였으나, 둘 중 그 누구도 그 대화를 마음 편한 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구급상자를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은 이정이 표정을 굳혔다. 지금 이정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들킨 예현이 며칠 내내 자신을 대하는 것을 어색해하며 자신을 피해 다닐 때만 해도 이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아닌 척 대화를 피하고, 단답이나 읽씹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까지 저러나,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들어오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더니 자신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었는데, 핸드폰을 꺼내 드는 손목을 보자마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부딪히기는, 그건 누가 봐도 타인에게 손목을 꽉 붙잡힌 흔적이었다.

어찌나 세게 잡은 건지, 동그랗게 손목 전체에 멍 자국이 들었는데 되먹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기는 어려운 거야?’

그렇게 말하자 예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사이라고, 숨기고 싶은 일 정도 있을 수도 있지. 머리로는 이해가 갔는데 마음은 그렇지를 못했다.

어디서 저렇게 다쳐 온 건지, 그리고 왜 다쳤는지도 말해 줄 수 없다는 건지.

좋아한다면서, 얘기 못 할 것도 많네.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 떠올랐지만 정작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가는 손목 위에 든 멍이 못내 마음에 걸려 가만히 구급상자를 찾아온 이정이었다.

왜 다쳤는지 말도 안 해 주는 거, 그냥 모른 척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구급상자를 집어 든 후였다.

그래, 유치하게 행동할 거 없어. 약 발라 주고, 붕대 한번 감아 주는 게 뭐 별 대단한 일이라고.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예현에게로 다가갔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면 묻지 않는 것이 배려라는 것을 알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친 건 알겠으니까.’

‘내가 해도 되는데…….’

이정이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했다. 예현은 부끄러운지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이정의 담담한 말에 이내 가만히 손목을 내어 주었다.

이정은 예현의 손목에 붕대를 감아 주며 자신이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를 되짚어봤다.

다쳐 와서? 아니지. 놀라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 상처가 누가 봐도 타인이 낸 상처라서? 그건 조금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예현에게 짜증 날 일은 아니었다.

그럼, 예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지 않아서? 아니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런 것 가지고 기분이 나빠지기까지 해.

아무리 생각해도 타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뚱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뒤늦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웃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여 줬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하, 내가 언제부터 남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썼다고…….”

정이라도 들었나. 이정이 구급상자를 보관해 둔 방의 문을 닫고 나왔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인 날이었다.

*****

서연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 후로 며칠이 지나서였다.

예현의 생각보다 꽤 빠르게 온 연락이었다. 나 같으면 그런 한심한 인간의 말 따위 듣지도 않고 알아서 살라고 차단해 버렸을 텐데.

서연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애인의 전 애인을 또 만나려 드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거라도 해 주지 않으면 박규진이 영영 귀찮게 굴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편히 쉬기도 모자란 게 시간인데, 내가 왜 또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예현이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현과 마주 앉아 있지만 시선만큼은 피하고 있는 서연 역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서연 씨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요.”

예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탓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 속을 긁을 필요는 없었다.

화를 내 봤자 다 부질없는 일. 그리고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서연도, 규진도 볼 일이 없을 터였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예현이 며칠 새 살이 내린 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직접 만나서 얘기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그러던데요.”

찌질한 새끼. 끝까지 중요한 건 남한테 떠넘기는구나. 예현이 규진의 우유부단함을 비웃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박규진 씨한테 남은 미련 같은 거 없어요. 다시 만날 생각도 없고. 지금 여기 나온 것도 마무리만 해 주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길래 더 귀찮은 일 만들기 싫어서 나온 거예요.”

예현의 말에 서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본 게 뭐라고, 그새 풀이 죽은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지는 본인 스스로 선택해야 할 일이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는 만날 일 없었으면 하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다 이야기하고 끝냈으면 좋겠네요.”

“그래요.”

서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무슨 사이였냐 이리저리 캐묻던 첫 만남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럼 오빠가 신예현 씨한테 해명해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연락 주고받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다 차단해 놨는데 제발 마지막으로 도와달라고 찾아와서 부탁하더라고요.”

그 부탁을 위해 애먼 사람을 붙잡아 끌고 갔다는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 없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박규진 씨는 주서연 씨 놓치기 싫어하는 것 같던데요.”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규진은 서연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몇 안 되는 진실을 말해 주자 서연이 입을 열었다.

“그렇겠죠. 오빠한테도, 나한테도 서로는 나쁠 것 없는 혼처니까.”

서연이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와 어울리는, 아니. 나이보다 더 철없이 굴던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기사 나가고, 나도 생각 많이 했어요. 신예현 씨가 했던 말도 생각났고요.”

서연은 기사를 본 날 하루 종일 이불 속에 틀어박혀 움직이질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서연이 걱정되어 본가를 찾은 오빠들까지 그를 달랬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이니, 뭐니 하더니 뒤에서는 그 사람을 찾아 회사 앞까지 갔다고. 기만도 그런 기만이 없었다.

“그래도 잘못했다고 비니까 한 번만 넘어갈까, 싶다가도 그러기 싫더라고요.”

“……헤어지기라도 하게요?”

예현이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본인을 위해서야 좋은 선택일 테지만, 찌질한 박규진이 가만히 있을까.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어떤 게 맞는 선택인지.”

서연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서연은 사업에 손을 댈 만한 깜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찍 집안싸움에 휘말릴 일 없는, 적당히 괜찮은 집안의 알파와 결혼해서 평화롭게 살 생각이었는데.

“일단 약혼식 계획은 쭉 미뤘는데, 완전히 결정하지는 못했어요. 파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서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별생각 없이 살 수 있는 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정작 이렇게 되니 생각 없이 살아온 것이 후회됐다.

졸업이 코 앞인데 가장 괜찮은 혼처를 파투 내고 나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래서 그냥 한번 참고 넘어가는 게 나은 건지, 그것도 걱정이 돼요.”

서연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누구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건지…….”

그러던 서연이 뒤늦게 예현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미안해진 듯 사과를 건넸다.

“사과하지 마요.”

예현이 사과하는 서연을 말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규진에게서 확실하게 벗어나려면 이대로 두 사람이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선일 테지만, 예현은 서연이 못내 눈에 밟혔다.

“주서연 씨한테 사과받을 일은 아니니까.”

예현은 서연이 안쓰러워 보였다. 자신만큼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도, 깊게 규진을 좋아하지도 않았겠지만 서연은 그만큼 어렸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 온 아가씨에게는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시련일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예현은 서연이 마냥 미운 남처럼 보이지 않았다.

“……박규진 씨가 좋아요?”

그래서였을까, 예현은 평소답지 않은 오지랖을 떨었다.

“네?”

이성적으로 모른 척하는 것이 맞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만히 참고 돌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솔직히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내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고, 또 앞에서는 잘해 줬고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니까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연이 고심하다 대답했다. 서연의 말을 들은 예현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결혼하지 않으면, 그럼 주서연 씨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하고 나면 엄마한테 미술관 일을 배우기로 하기는 했는데, 여유를 가지고 배우려고 했던 거라 아직은 잘 몰라요.”

그래도 든든히 뒷받침해 줄 부모님이 있구나. 예현이 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의 연애에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다는 거 아니까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예현이 커피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주서연 씨가 박규진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요. 아직 어리잖아요. 연애를 해도 몇 번을 더 할 수 있고 뭘 시작해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어요.”

“…….”

“마음 가는 대로 해요. 아니면, 부모님이 결혼을 강요하시기라도 해요?”

“아뇨. 부모님은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그럼 됐네요.”

예현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는 그렇게 못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주서연 씨까지 끝장을 볼 필요는 없겠죠.”

“……왜 이런 얘기를 해 주는 거예요?”

서연이 손도 대지 않은 커피잔을 보며 말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냐, 예현 역시 궁금했다.

괜한 오지랖이라는 거 알면서, 내버려 둬도 나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왜 굳이 전 애인의 바람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있을까.

“그러게요. 여동생이 있어서 그런가.”

별 대단한 것도 아닌 사랑에 눈이 멀어 멍청해진 채로 행복한 미래를 꿈꿔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동생이 있거든요. 주서연 씨가 그 애랑 닮아 보여서 그런가 봐요.”

얼굴은 별로 닮지 않았지만, 막무가내이면서도 옳은 소리로 혼을 내면 또 반박은 못 하는 점이 닮았달까.

예현이 그렇게 말하자 서연이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그게 뭐예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당장 내 사랑도, 내가 어떻게 해야 옳은 선택이 될지도 모르면서 남한테 이런 훈수를 둔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내가 그러라고 했다는 얘기는 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요. 이제 겨우 23살이잖아요.”

23살의 나는 어땠더라, 규진과 싸움 한번 한 적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 그때의 나도 이런 고민을 했었겠지.

“한번 실패한다고 인생 망하는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난다면 이런 말을 해 줄 텐데. 그 빌어 처먹을 놈은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쓰레기니까 그놈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상처받을 바에는 다 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참고로, 그 인간은 고쳐 쓸 수 있는 인간 아니에요.”

과거가 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말하니 속이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선택하는 건 주서연 씨예요. 아, 그리고.”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 이 말 정도는 해 줘야겠지. 예현이 말했다.

“박규진이 주서연 씨 사랑한다고 전해 달래요. 알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해 주겠다는 말은 다 해 줬으니 이만하면 됐겠지. 서연도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 같으니 규진과의 관계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해야 할 말 다 했고, 주서연 씨도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일어나도 괜찮을까요?”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잘 살아요.”

“잠시만요.”

아무 대답도 없는 서연을 두고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가 예현을 붙잡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해도 돼요? 자주는 안 할게요. 가끔, 아주 가끔 정도…….”

서연이 예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말하는 궁금한 것이 규진에 대한 것을 물어보겠다는 뜻은 아닐 터였다.

“……자주 연락하면 차단할 거예요.”

정말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다. 예현이 짧은 긍정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

“오늘 바빠?”

그리고 그 주 주말, 예현은 이정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아니. 바쁘진 않은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예현이 눈을 깜빡이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데이트할래?”

“뭐?”

“농담이야. 할 거 없으면 같이 나가자고 하려고 물어봤지.”

예현이 이정의 장난스러운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장난임을 알고 그를 흘겨보았다.

하여튼 이상한 장난 치기는,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자 이정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별거 아냐. 그냥 하루 종일 집 안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별로 안 심심해.”

오히려 나다니기가 피곤하지. 예현이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주말에는 아무 일 없으면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쉬는 게 가장 좋은 휴식이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주일 동안은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았다. 오늘만을 기다리면서 평일을 버텼는데 나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주말엔 아무것도 안 해도 심심한 줄 모르겠던걸.”

“그래?”

예현의 단호한 말에 이정이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난 심심하던데.”

“……어?”

이정이 한껏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예현이 조금 놀라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분위기를 한 이정이 말했다.

“내가 다니는 곳이라고는 촬영장이랑 집뿐이니까……. 내가 선택한 직업이긴 하지만 가끔씩은 인생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드네. 같이 나가 놀아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번아웃이라는 게 온다던데, 그런 건가.

예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이정이 그 모습을 곁눈질로 흘깃 보고는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이어 갔다.

“주말이고, 형이랑 같이 나가면 좀 편할 것 같아서……. 아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나 봐. 그냥 집에서 쉬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불편하잖아. 예현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잔뜩 실망한 것 같은 모습에 가슴이 쿡쿡 찔려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불편한 기분을 이기지 못한 예현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많이…… 힘들어?”

예현이 미끼를 물었다. 이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작업을 이어 갔다.

“아냐. 신경 쓸 정도는 아니고,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어. 별일 아냐.”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아쉬운 기색이 잔뜩 어려 있었다. 얼굴만으로 배우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냥, 같이 살긴 하지만 우린 집에 있는 시간이 안 맞아서 주말이라도 같이 시간 보내면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나 봐. 괜찮아.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서 괜찮다고 말하면 그걸 누가 믿어.

측은한 마음이 든 예현이 잠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래, 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한 번 정도는 받아 줄까.

어딜 간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언제 출발해서 언제 돌아오는데? 오래 걸려?”

“30분 뒤에 출발해서……. 언제 돌아온다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아마 저녁 시간쯤엔 돌아올 것 같은데. 늦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끝날 거야.”

다 넘어왔네. 이정이 시계를 보더니 대답했다.

이내 예현 역시 가만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녁 시간 전에 돌아올 수 있다면 괜찮을지도. 예현이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한 번쯤 같이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정말?”

예현의 대답에 이정이 눈꼬리를 한껏 휘며 웃었다. 얼핏 빛이 비쳐 보이는 것 같기까지 한 얼굴에 예현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정 피곤하면 안 가도 되는데.”

이정이 잔뜩 들뜬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말은 안 가도 된다고 가지 않겠다고 하면 다시 풀이 죽어 조금 전 같은 표정으로 날 보겠지.

저런 얼굴을 하고 좋아하는데 어떻게 도로 물려.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걸. 주말은 내일도 있으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아.”

별일이야 있겠어.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예현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게 해서 오늘은 예현이 형도 같이 가기로 했어.”

이정이 해사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이정을 데리러 왔을 뿐인 주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정을 바라보았다.

“괜찮지? 형. 먼저 타.”

“잠깐만,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건데?”

이정이 생글거리며 예현을 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예현의 당황한 얼굴을 본 주석이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저 미친놈이, 제대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애먼 사람을 끌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예현 씨, 강이정이 마음대로 데려온 거죠? 그냥 올라가셔도 돼요.”

“아…….”

주석이 말하자 이정이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가증스러운 놈. 자기가 언제부터 그렇게 섬세한 영혼이었다고!

그의 실체를 아는 주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정을 바라보았지만 예현은 그렇지 못했다.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나름 노력하는 것 같은데 한번 간다고 말해 놓고 딱 잘라 다시 거절하기도 불편했다.

“……아니에요. 제가 같이 가겠다고 했어요.”

예현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주석이 이를 꽉 깨물었다.

내가 예현 씨한테 싫은 얘기 못 하는 걸 알고 저러는 거야. 주석이 생글거리는 이정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촬영장에 지인을 데려가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닌데, 여기까지 내려온 사람을 도로 올려 보내는 것은 너무한 처사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이정이 괘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내려오자마자 자신을 보고 놀란 것을 보니 제대로 설명도 해 주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정아. 강이정…….”

주석이 이정을 바라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정이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하고 주석을 돌아봤다.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둘만 남아 봐라. 내가 저놈의 자식 진짜 가만 안 둔다.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가면, 다들 나만 쳐다보는 거 아냐? 민폐라고…….”

이쯤 되니 목적지가 어디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현이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자 이정이 그런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걱정 하지 마. 보통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는걸. 스태프도 한두 명이 아니고,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조금 신기해할 수도 있지만, 뭐.”

그건 예현 씨가 평범한 일반인일 때의 얘기지. 주석이 백미러를 통해 이정을 흘겨보았지만, 이정은 못 본 체를 할 뿐이었다.

“신입 스타일리스트라고 거짓말이라도 할까? 희주 지금 휴가 중이잖아.”

“금방 걸릴 거짓말은 하지도 마. 차라리 내 지인이라고 할 테니까.”

주석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괜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서 말하는 편이 훨씬 나을 터였다.

게다가 촬영장의 사람들이 이정의 진짜 스타일리스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소리를 했다가 일주일 휴가를 낸 스타일리스트가 돌아오자마자 소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정 마음에 걸리면 그냥 밴에만 있어도 괜찮아. 내가 찾아오면 되니까.”

주석이 마냥 친절하기만 한 이정을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놈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절한 사람이었지. 물론 비즈니스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더없이 예의 바른 인간이었지만...

“목도리 삐뚤어졌다. 어차피 도착하기까지는 좀 걸리는데, 그냥 벗어 둬.”

사석에서 사람을 저렇게 챙기는 건 본 적이 없는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예현 씨가 보살의 현신이라 저 망나니를 길들이기라도 한 걸까.

어느 쪽이든 감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런데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예현이 형이 나 좋아하더라?’

그때, 주석의 머릿속에 이정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걸 이용해서 무슨 꿍꿍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가.

주석이 불안한 시선으로 이정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정은 다정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목도리를 풀어 주고 있었다.

‘예현 씨한테 조심하라는 말을 해 줘야 하나. 아니, 괜히 그랬다가 분위기만 더 이상해지지.’

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운전을 이어 갔다. 그래도 강이정에게는 제발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한마디 해 줘야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정의 웃는 옆얼굴이 주석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머, 누구야?”

차에서 내려 쭈뼛거리며 이동하던 예현이 이정을 따라 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심심할 때 검색해 봤던 이정의 드라마 포스터에서 본 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키우는 새 배우?”

“아뇨. 그게 아니라…….”

“친구예요.”

주석이 이정의 말을 잘라 버리고 선수를 쳤다. 이정의 지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자신의 지인이라고 둘러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제 친한 동생인데, 드라마 쪽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구경이나 시켜 줄 겸 데려왔어요. 이정이하고도 아는 사이라. 하하.”

“그래요? 뭐, 상관은 없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이정 차에서 내리길래 신기해서.”

해리가 예쁘게 웃으며 한쪽 손을 건넸다. 얼결에 해리와 악수하게 된 예현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네. 신예현이라고 합니다.”

“이정이가 촬영장에 누굴 데려온 게 처음이라, 후배라도 데려온 줄 알았어요. 얼굴도 미인이셔서.”

“네?”

당황한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미인이라뇨. 이해리 씨가 훨씬 미인이신데요.”

“어머.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감사합니다.”

해리가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저렇게 예쁜 사람이 누굴 보고 미인이라는 건지. 예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며 뒷 목을 긁적였다.

“이정 씨,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기저기에서 스태프들이 이정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이정 역시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예현은 새삼, 내가 정말 이정의 일터에 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후, 오늘 너무 춥지 않아요?”

“그러게요. 폭설 온다는 얘기도 있어서 촬영 취소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네요.”

“아니지. 폭설 왔으면 오늘 쉬었을 텐데.”

사람들이 편하게 농담을 나누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 예현은 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정의 곁을 서성거렸다.

“역시 괜히 왔나 봐. 아니, 너는 아는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 그냥 다른 사람들이랑 놀지…….”

“무슨 소리야. 이제 온 지 겨우 5분 지났어.”

이정이 예현의 목도리를 여며 주며 말했다. 5분밖에 안 지났다고. 체감상 5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이정. 그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메이크업이랑 세팅 받으러 가야지.”

주석이 작은 목소리로 이정을 타박했다. 일단 이 자식을 예현 씨 앞에서 치우고 다시 얘기하든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것이었으나 이정은 순순히 따라 주지 않았다.

“가자.”

“예현 씨도?”

“그럼 모르는 사람밖에 없는 곳에 내버려 두고 나 혼자 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주석이 이정을 족치는 것을 미루고 한숨을 쉬었다.

세 사람은 세팅을 위해 준비된 대기실로 이동했다.

“이정이 안녕~.”

“안녕하세요. 현정 누나.”

이정이 메이크업 스태프에게 인사를 건네고 거울 앞에 앉았다. 스태프 여럿이 익숙하다는 듯 이정에게 달라붙어 그의 머리를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오늘 해리가 중요한 장면이라고 신경 써 달라던데, 너도 그렇게 해 줘?”

“아하하. 선배님이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저도 당연히 그래야죠. 혼자 퀭한 얼굴일 수는 없잖아요.”

“사실 이정이는 얼굴이 이미 완성형이라, 신경 안 써도 멋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예현이 뻘쭘하게 빈 의자에 앉아 이정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이정의 얼굴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시간 잘만 보내는 것 같은데, 심심하기는 무슨…….’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스태프들도 하나같이 이정을 좋아하는 것 같고, 대기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은데.

“근데, 저기 저분은 누구야?”

나는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스태프 하나가 예현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친, 친구예요. 주석이… 형 따라온…….”

예현이 이정이 애인이라는 말을 꺼낼세라 빠르게 선수를 쳤다. 어색하게 주석이 형이라고 말하자 이정이 그 모습을 우습다는 듯 바라보다 말했다.

“제 친구기도 하고요. 촬영장에 관심 있다고 해서.”

“친구? 별일이네. 이정이가 촬영장에 친구를 다 데려오고.”

분명 주석과 이정의 친구라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어느새 예현을 ‘이정이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특별한 친구라서요.”

“신인 배우야?”

스태프가 예현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아, 웨일즈에서 아이돌 준비한다는 얘기 있던데. 연습생이야?”

“아니에요. 그냥 직장인이에요.”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어딜 봐서 연예인 같다는 건지. 예현이 거울을 통해 이정을 흘깃 쳐다봤다.

연예인 할 만한 얼굴이라는 건 저런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냥 좀 어려 보이는 정도로 연예인은 무슨.

“직장인? 어머, 그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좋겠다.”

“좀 섭섭한데요. 누나. 저 정도로는 모자란 거예요?”

“얘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정의 농담에 스태프가 깔깔거리며 이정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농담이야. 네가 외부인 데려온 건 처음이니까 궁금해서 그렇지.”

“낯 많이 가리는 형이니까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어머, 형이야?”

스태프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이정이 27살이니 최소 28살이라는 건데, 거울에 비친 예현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너보다 동생인 줄 알았어.”

“나 노안이라는 말 돌려서 하는 거예요?”

이정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어 왔기에 예현은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노안이라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저분보고 너 보니까 좀 노안 같기도 하고?”

스태프가 깔깔거리며 이정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너무하네.”

이정이 짐짓 삐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얼굴에 힘주지 마.”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스태프 하나가 이정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여튼 까다로운 손님이라니까.”

스태프의 농담에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까르르 웃음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섞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예현뿐이었다.

“예현 씨. 어색하죠?”

그런 예현에게 다가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주석이었다.

“원래 저래요. 변덕도 심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아하하…….”

예현이 뭐라 대답할지 몰라 그저 조용히 웃음 지었다. 예현의 옆자리에 앉은 주석이 한창 메이크업을 받는 이정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래도 기왕 왔으니까 잘 구경하고 가요. 보고 싶었던 연예인이나, 궁금한 거 없어요?”

“아……. 제가 연예인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예현이 어색하게 말했다. 강이정도 이 사달이 나고 나서야 알았는데, 보고 싶었던 연예인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진짜요? 여기 이해리 씨도 있고. 강해찬 씨도 나오고, 그. 요즘 유명한 아이돌 수아랑, 한창 뜨는 신인인 차영현도…….”

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이어 갔지만, 예현이 아는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축 처져, 딱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저 저번 달까지만 해도 강이정도 몰랐거든요. 진짜 아는 연예인이 없어요.”

“그래요? 와, 그래도 나름 유명 연예인 매니저 부심 있었는데……. 더 노력해야겠네요.”

주석이 실없는 농담을 하며 허허 웃었다.

“이정이랑 같이 지낸다고 고생이 많으시죠. 저희가 어떻게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늦어져서 죄송해요.”

“……고생하기 싫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예현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렇죠. 예현 씨도 하루빨리 마음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셔야 할 텐데…….”

주석이 예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똑 부러져 보이는 사람이 대체 왜 강이정 같은 놈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해야 할 게 한 가지 있었다.

“그래야 보기 싫은 얼굴도 좀 덜 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이정의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어서 예현이 이정을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것.

무슨 이유인지 말해 주지도 않고 대뜸 예현을 이리 데려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뭐? 사귀자고 하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어떤 꼴이 될지 뻔히 예상이 가는데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살아 봤으니까 아시겠지만, 얼굴 잘난 거 말고는 좋은 거 하나 없는 놈이잖아요.”

주석이 호들갑을 떨며 이정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오늘도 분명 예현 씨한테 떼를 써서 데리고 왔겠죠. 안 봐도 뻔해요. 너무 받아 주지 마세요. 예현 씨.”

“그러게요. 그냥 오지 말 걸 그랬어요.”

예현이 입술을 살짝 물고 거울 속에 비친 이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스태프들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색을 더하고 있었다.

“아하하. 진짜요?”

이정이 낮게 웃으며 스태프들의 농담을 받아쳤다.

장난기 있으면서도 친절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는데, 딱히 나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었구나.

그냥 매니저님이랑 이사님한테만 틱틱거리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똑같은 태도였구나. 예현이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그냥 집에서 쉬기나 할걸.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생각 중이에요.”

“예?”

예현의 말에 주석이 놀라 예현을 바라보았다.

“농담이에요. 심심하다고 같이 가자더니, 혼자 잘 노는 것 같길래 해 본 말이에요.”

예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반쯤은 진심이었지만, 말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긴 하죠.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아주 괘씸한 놈이에요. 저놈이.”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괜히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다 됐다.”

“이거 완전 회심의 역작이야.”

잠시 후, 세팅을 마친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정아, 어디 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정이 망설임 없이 돌아서 예현에게로 걸어왔다.

“어때, 괜찮아 보여?”

이정이 평소보다 색이 짙은 얼굴을 하고 씨익 웃어 보였다. 그의 얼굴을 지겹도록 많이 봐 온 주석에게는 그저 꿍꿍이 가득한 모습으로만 보였지만 예현에게는 조금 달랐다.

“얼굴 답답하겠네.”

예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언뜻 듣기에는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이정은 예현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답답해도 화면에 예쁘게 나오려면 어쩔 수 없지.”

“……안 해도 똑같은데 뭐.”

예현이 눈에 띄게 이정을 피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보이냐고, 당연하지. 지금의 이정은 평소보다도 더 잘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난 얼굴도, 일그러진 얼굴도 잘생겼는데 전문가들이 붙어 한껏 힘을 낸 얼굴이 멋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 해도 똑같다니요. 우리가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서 세팅해 줬는데.”

자리를 정리하던 스태프 하나가 툴툴거렸다. 농담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예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버버거렸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평소에도 잘생겼으니까 더 잘생겨졌어도 똑같이 잘생겼다는, 그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예현이 하던 말을 멈추고 스태프의 눈치를 살폈다.

“농담이에요. 이정이 원래 잘생긴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친구분이 수줍음이 많으시네~.”

스태프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었구나, 다행이다. 예현이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잘생겼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예요. 이정이 얼굴 진짜 좋아하나 봐요.”

“아니, 그런 게…….”

예현이 당황한 채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재킷을 걸치고 있는 이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안 그런 사람이 더 드물긴 하지만.”

정작 말을 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예현은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이, 얼굴만 보면 강이정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주석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몇 번을 당하고도 얼굴 들이밀면서 부탁하면 들어줄까, 고민하게 만드는 얼굴이잖아.”

“어머, 이정이가 사고 많이 치나 봐요?”

“많이 치죠. 그것도 대형 사고로만 골라서 빵빵.”

스태프의 말에 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기사 나는 건 하나같이 미담뿐이던데?”

자리를 거의 정리한 스태프가 이정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냐. 최근에 사고 치긴 했잖아.”

“아, 그거? 근데 그건 사고까진 아니지.”

그때, 상대적으로 어린 스태프들이 입을 열었다.

“연애하는 게 무슨 사고야.”

“그래도 매니저님 입장에서는 곤란했을 수도 있지. 안 그래요?”

당장 이 자리에 그 연애의 대상이 있다는 걸 모르는 스태프들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어, 그건……. 그렇지. 놀라긴 했죠.”

주석이 이정과 예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도 다 놀랐어. 아니, 어떻게 우리한테도 비밀로 하고 애인을 사귈 수가 있어?”

“야, 네가 뭐라고 이정이가 연애하는 얘기까지 해.”

“그래도, 기사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어느새 대기실 안이 이정의 연애 얘기로 가득 찼다. 실상을 알고 있는 주석과 당사자인 예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데뷔부터 유명했는데, 7년 차에 열애설 하나 난 정도면 속 썩이는 것도 아니지.”

“에이, 잘 모르셔서 그렇지 뒤에서 사고 엄청나게 쳐요. 내가 유능해서 망정이지. 어리바리한 매니저였으면 강이정 맨날 검색어 1위 하고 그랬을걸?”

주석이 예현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말을 돌렸다.

“나나 회사 이사님한테 하는 거 보면 다들 놀랄걸요? 이거 다 가식이에요. 가식. 괜히 명배우가 아니라고요.”

“너무하네. 나도 상처받는다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이정이 입을 열었다.

“서운해서라도 진짜 사고 한번 쳐 줘야겠는데.”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주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마음이 가는 걸 어떻게 하겠어.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열애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 말에 스태프 여럿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저게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주석이 불안한 마음에 이정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열애설 난 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기사에서 보셨다시피……. 다른 사람들 눈에도 매력적인 사람이라.”

“오오~.”

이정의 말에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남의 연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법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좋은 사람인가 봐.”

“좋은 사람이죠. 당연히. 저한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예현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만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인데? 얘기 좀 해 줘. 맨날 못 들은 척하기만 하고.”

“아, 이제 슬슬 나가 봐야 하지 않나?”

“보람 씨, 이정이 지금 나가 봐야 해?”

스태프 하나가 떼쓰듯 말했다.

이게 아닌데, 주석이 다시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타이밍 나쁘게 들어온 촬영팀 막내 보람이 주석의 입을 막았다.

“아뇨. 앞으로 최소 30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젠장. 망했다. 주석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보람을 바라보았다.

“시간도 있는데 이야기 좀 해 줘.”

“음…….”

잠시 망설이는 척을 하던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귀여워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되게 예뻐요.”

까아,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책임감 있고, 어른스러운 부분도 있고. 근데 또 가끔은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뭐야. 콩깍지 제대로 쓰였네!”

내 어디가 그렇다는 건지. 예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고 있는 것이라고는 무릎 위에 놓인 제 두 손뿐일 텐데, 고개를 들면 자신에게 이정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리도 잘하고……. 제 걱정도 많이 해 주고. 좋은 점 많죠.”

“싫은 점은 없어?”

“뭘 그런 걸 물어봐요. 쟤 말하는 눈 좀 봐. 완전 꿀 떨어지는데.”

고개를 들까, 이정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예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했다.

어차피 사람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의례적으로 하는 말일 게 분명한데 왜 이렇게 휘둘리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말 한마디에 순진하게 들떴다가, 실망할 만한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안 되나 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음……. 싫은 점은 없고, 서운한 점 정도는 있어요.”

“뭔데, 뭔데?”

이정의 말에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대답을 독촉했다.

서운한 점이라니, 내가 언제 그럴 짓을 했지.

조금 궁금증이 인 예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좀 더 많은 걸 알고 싶은데, 비밀이 많더라고요.”

고개를 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이 말하는 ‘꿀이 떨어지는’ 눈이 예현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다쳐 왔는데, 왜 다쳤는지 이야기를 안 해 주더라고요.”

“엥, 왜?”

“그러게요. 말하기 싫다는데 캐묻는 것도 예의는 아닐 것 같아서 더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좀 서운했어요.”

이정이 예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손목의 상처를 말하는 거겠지. 예현이 보호대를 찬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애인 사이에 왜 다쳤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러니까. 딴 것도 아니고 다쳐 왔는데 왜 다쳤는지를 말 안 해 주면 서운할 만한데?”

스텝 여럿이 이정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가. 그렇지만 그건 진짜 애인 사이일 때의 이야기지, 우린 진짜 애인도 아닌데.

그게 정말 서운했던 걸까. 예현이 이정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죠. 그런데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잖아요. 그래서 그냥 안 물어보려고요.”

이정이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예현 씨. 어디 가게요?”

“화, 화장실 가려고요.”

잠깐이라도 저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예현이 화장실 핑계를 대자 주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길 모르죠? 내가 데려다줄게요.”

“형이 애도 아니고 무슨 길 안내를 해 줘.”

“아니, 나도 가려던 참이었어. 마침 마음이 통했네. 너 준비 다 했지? 가서 대기하고 있어. 금방 따라갈게.”

주석이 가방을 챙겨 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준비는 거의 끝났고, 미리 촬영 장소로 가서 대기하고 있는 편이 나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뭐.”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갑시다. 예현 씨.”

예현이 주석을 따라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주석이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돌연 문이 열렸다.

“아, 깜짝이야.”

“어. 앞에 계신지 몰랐어요. 해리 언니가 대기실에 뭘 놔두고 오셨다고 해……”

대기실로 들어오려던 사람이 문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예현이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바깥에 서 있는 얼굴을 확인했다.

“……?”

그리고 눈앞에 있는 예상치 못한 얼굴에, 예현은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굳어 버렸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얼굴은, 예현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네가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됐어. 규진 형한테서 신경 꺼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한테도. 다시 연락하지 마. 받을 생각도 없지만.’

마지막 대화가 그거였던가. 그 뒤로 학교에서 몇 번이고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아마 서로 시선을 피하기 바빴던 것 같다.

“……오랜만이네.”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예현이었다. 마지막 말을 한 것이 자신이었으니 첫인사도 자신이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 어. 어어. 오랜만이야. 예현아.”

명아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스태프들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뭐야, 명아 씨랑 아는 사이에요?”

“세상 진짜 좁다.”

두 사람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현 씨! 내가 화장실이 급해서 그런데 우리 얼른 나갈까?”

그 상황에서 두 사람을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주석이었다. 주석이 어색한 목소리로 예현을 잡아끌었다.

“아. 네. 나 가 봐야겠다. 안녕.”

“아, 잘 가…….”

명아가 어색하게 인사하며 예현을 보냈다.

“뭐야. 명아 씨. 이정이 친구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 저……. 해리 언니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인 명아가 우물쭈물하다 해리의 물건을 집어 들고 대기실을 뛰쳐나갔다. 사람들에게 궁금증만 남긴 만남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궁금증이 금방 사그라들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

“이렇게 보니까 되게 신기하죠?”

주석이 예현에게 촬영장 곳곳을 안내해 주며 말했다.

주석의 말대로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촬영 한번 하는데 이렇게 많은 카메라와 사람들이 동원되는 거구나.

예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장비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막연히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되겠지, 생각한 것이 무색하도록 촬영 현장에는 많은 장비들이 있었다.

이래서 작품 하나 만드는 데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게 든다는 거구나.

“아, 근데 명아 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대학 동기예요.”

숨길 필요는 없겠지. 예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분명 이정이 아는 사람이냐고 사진을 보여 주기까지 했었는데,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서, 저도 되게 당황했어요.”

“그러게요. 아니, 그럼 명아 씨는 경영학과 나와서 매니저를 하고 있는 거야? 왜?”

주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예현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명아를 찾아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다른 일을 하는 거겠지.

“모르겠어요. 따로 연락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졸업하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되게 신기한 기분이지 않아요? 반갑기도 하고.”

예현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명아와는 달랐다.

규진 때문에 놓아 버렸던, 아니. 내팽개쳐 버렸던 인간관계에 대해 자책했던 것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 주인공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신기하긴 해요.”

물론, 멍청했던 과거의 산증인을 마주하는 기분이라 반가운 기분보다는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예현이 아무 말 없이 촬영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현이 명아에 대한 것을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주석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꼭 그래야만 했어?”

예현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이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카메라가 저렇게 가까이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집중할 수가 있지. 나 같으면 부담스러워서 신경 쓰일 것 같은데.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잖아. 왜…….”

이정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해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해리 역시 인사를 나눌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얘기하면? 네가 그걸 이해해 줄 수 있어?”

와, 저런 사람들이 배우 하는 거구나. 예현이 감탄하며 두 사람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이해 못 하잖아.”

“이해할 수 있어. 네가 하는 말이면 다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정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기 잘하죠?”

“네. 솔직히 놀랐어요. 드라마 같은 것도……. 안 봐서 연기하는 거 지금 처음 보거든요.”

연기하는 걸 좀 찾아보려고 하긴 했었는데, 스토커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어져서 잊고 있었다.

예현이 조금 이정의 눈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히 유명한 배우는 아니네요. 그냥 잘생겨서 유명한 건 줄 알았는데.”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 죽어라고 연습하거든요.”

주석이 웬일로 이정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매니저라고, 담당 연예인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시작할 때부터 독하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재벌 집 아들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래요?”

평생 어떤 것에도 조바심 내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왔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의외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한 테이크가 끝나고 이정이 눈물 때문에 무너진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눈가가 젖어 있는데도 언제 울었냐는 듯 가볍게 웃으며 메이크업을 수정받는 모습이 새삼 신기해 보였다.

“보통 잃을 거 없고 가진 거 많은 애는 저렇게 열심히 안 하거든요. 그래서 놀랐었어요. 처음 집에 데리러 갔을 때는 뭐랄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니까요.”

주석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냥 연기가 적성에 맞는 걸까, 아니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걸까.

“다음 컷 갈게요~.”

수정을 마치자마자 촬영이 재개되었다. 얼결에 직업 탐방 비스무리한 것을 하게 된 예현이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 이정이 친구분 여기 있었네?”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고 옆으로 빠지던 스태프 하나가 예현을 알아보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정이 연기하는 거 되게 멋있지 않아요?”

“그러게요. 연기하는 거 처음 봐서 되게 신기해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스태프가 깔깔거리며 웃다가 이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요? 아니, 그러기도 어려울 텐데…….”

“그러게요. 그래서 되게 신기해요. 장난치고 웃는 얼굴만 봤거든요.”

우는 얼굴도, 진지한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현이 다른 각도로 같은 장면을 촬영하는 이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난기 많긴 하죠. 그래도 진지할 땐 진지해요. 그런 차이 때문에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확실히 그럴 것 같았다. 예현이 보기에도 이정은 평소보다 멋있어 보였다.

“그렇겠네요.”

“아, 명아 씨랑 아는 사이라면서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스태프가 지나가던 명아를 보더니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대학 동기였어요.”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아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지?”

스태프가 끝도 없이 재잘거렸다. 한참을 시달리는 사이 컷이 완전히 마무리된 듯, 해리가 겉옷을 걸쳐 입었다.

“언니, 촬영 끝났어요?”

“끝난 건 아니고, 다음 컷 촬영할 때까지 잠시 휴식.”

해리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내며 말했다.

“아, 맞아. 언니. 이분 봤어요?”

스태프가 예현과 해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예현의 얼굴을 본 해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 강이정 친구분이라면서? 아까 들어오면서 인사했어.”

“그럼 그것도 들었어요?”

예현이 불길한 예감에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저…….”

“언니 매니저, 명아 씨랑 이분이랑 아는 사이래요. 대학 동기라던데?”

스태프의 말에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언니, 핫팩 가져왔……”

“너 강이정 친구분이랑 아는 사이야?”

해리가 핫팩을 들고 달려오는 명아에에 대뜸 질문을 던졌다. 당황한 채 발걸음을 멈춘 명아가 곤란한 얼굴의 예현과 들뜬 얼굴의 스태프를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아…….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에요.”

명아가 예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우연히 만나서 저도 놀랐어요.”

해리가 무언가 생각이 날락 말락 한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네 대학 동기……. 강이정…….”

뭔가 들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해리가 머리를 쥐어짜며 명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다 무언가 떠올린 듯한 해리가 손뼉을 치더니 소리쳤다.

“언……!”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명아가 뒤늦게 해리의 말을 막아 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너 강이정 애인이랑 대학 동기라고 했었잖아!”

해리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예현에게로 몰렸다. 명아가 늦게나마 해리의 입을 막아 보려 했지만 가물가물하던 것을 기억해 냈다는 것에 신이 난 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와, 강이정이 촬영장에 누구를 데려왔다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거였어? 이제야 이해가 가네.”

해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래?”

“이정 씨가 데려온 친구가 애인……이라는 것 같은데?”

“뭐? 진짜?”

망했다. 예현이 입술을 깨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이정만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예현에게로 몰려들었다.

“진짜예요?”

“명아 씨, 진짜야?”

사람들이 몰려들고 나서야 해리가 실수한 것을 깨닫고 입을 살며시 가렸다. 그러나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예현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선뜻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예현을 본 사람들은 이내 해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뭐야. 강이정 애인 그렇게 꽁꽁 숨기더니!”

이정이 뒤늦게 소란을 깨닫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무슨 일이라도 났나?”

“그러게요. 저건…….”

그리고 잠시 후, 감독과 이정이 소란의 중심에 예현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가 데려온 지인인데, 무슨 실수라도 했나 보네요. 잠깐 가 봐도 괜찮을까요?”

“어, 뭐……. 할 얘기 다 했으니까 가 봐도 괜찮아.”

이정이 감독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사람들을 향해 걸었다.

“무슨 일 있어요?”

“강이정!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냐?”

최고참 스타일리스트가 이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애인을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주는 게 어디 있어? 진짜 치사하다 너.”

곤란한 얼굴의 예현, 함께 서 있는 명아와 해리.

명아나 예현이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니 범인이 누구인지는 대충 예상이 가는군.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한 이정이 예현의 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조용히 다녀가고 싶었는데, 어쩌다 들켰어. 자기야.”

까아. 여기저기서 들뜬 비명이 들렸다.

이정이 예현에게로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옆에서 주석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그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게. 숨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예현이 살짝 웃으며 이정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이럴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지만, 우물쭈물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진짜 애인이야? 와. 진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럼 명아 씨랑 이정 씨 애인이랑 아는 사이인 거예요? 와.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좁냐.”

촬영장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메이크업 스태프, 촬영 스태프 할 것 없이 모여 이정과 예현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뭐야. 다음 컷 따야 하는데 다들 어디 갔어?”

소란을 조금 진정시킨 것은 김 감독의 목소리였다.

“강이정, 너 가 봐야겠다.”

해리가 이정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우리 자기 괴롭히지 말고 잘 대해 줘요.”

개인 컷 촬영이 남아 있던 이정이 예현을 가볍게 포옹했다가 떨어져 나가며 말했다.

아니, 이렇게 말했으면 같이 수습해 줘야지. 그냥 가 버리면 어떻게 해.

예현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예현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고 떠나가 버렸다.

“저기, 이야기한 건 미안해요.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해리가 미안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미 말한 거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조용히 있다 가고 싶긴 했지만, 이정의 선배고 상대역이니 화내지 않는 게 낫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손이 비는 스태프들이 예현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 둘이 친구라고 했죠.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할 얘기가 되게 많을 것 같은데.”

그때, 해리가 명아와 예현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네?”

“사람 많고 복잡한 데서 이럴 게 아니라, 둘이 어디 가서 이야기라도 좀 하고 와요.”

“제가 나가면 언니는 어떻게 하고요.”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소연이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해리가 자신의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가자. 일단 차까지 가야 어디라도 가겠지?”

해리가 두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끌어내 어디론가 데려갔다.

“어, 우리도 궁금한 거 많은데…….”

뒤에서 스태프들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사라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해리가 두 사람을 자신의 차 안에 밀어 놓고는 연신 사과를 했다.

“진짜 미안해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일단 데리고 나오긴 했는데……. 이렇게 된 거 그냥 둘이 얘기나 좀 하다 강이정 오면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니, 저 없이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니까. 강이정한테는 내가 말해 놓을게요.”

어색한 사람 한 명과 함께 있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질문 폭탄을 받는 게 나을까.

예현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해리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예현 씨라고 했죠. 진짜 미안해요. 다음에 촬영장 말고 한번 만나요. 사과의 의미로 한 턱 쏠게요.”

“아니, 괜찮……”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이따 강이정이 찾으러 올 거예요!”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해리가 급하게 차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

“…….”

숨 막히는 침묵이 차 안을 채웠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한참을 망설이는데 명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한껏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관계가 틀어진 것이 3학년 2학기쯤이었나. 무려 5년의 공백을 깨는 대화였다.

“응.”

단답 이후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 열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불편하지? 그냥 내가 나가 있을게. 사람들 눈에만 안 띄면 그냥 둘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명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좀 반가웠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예현이 망설이는 사이 명아가 차 문에 손을 댔다.

“아니, 괜찮아. 추운데 굳이 뭘 나가려고 그래.”

예현이 그런 명아를 말린 것은 굉장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는 예현을 잠시 바라보던 명아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너도 잘 지냈어?”

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별로 놀라지도 않네. 알고 있었나 봐.”

“영상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이정 씨한테 물어보고 너인 거 확신했어.”

그래, 그랬다고 했었지. 그 이야기를 듣자 이정이 명아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놀랐겠네. 너도.”

그 난리를 떨었으니 내가 박규진이랑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을 텐데. 예현이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 놀라긴 했는데……. 좋은 사람 만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명아가 예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대학 시절, 명아는 예현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규진과의 조별과제를 계기로 친해진 무리.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는데, 어느 사건을 계기로 대화는커녕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 사이가 되어 버렸었다.

‘규진 오빠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닌데, 너 없을 때 이야기하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명아가 그 말을 해 준 것은 제 나름대로 엄청난 용기를 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규진 오빠가 뒤에서 너에 대해 이상하게 말하고 다닌다고. 악의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현은 마냥 화를 냈었다.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우리랑 생각하는 게, 행동하는 게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예현의 스위치를 누른 것은 그 한마디였다.

나름대로 규진을 감싸 주는 말이었을 텐데, 그때는 기분이 그렇게도 나빴었다.

아마 자신의 숨겨진 자격지심을 건드리는 말이어서 그런 것이었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음 지었다.

“그러게. 그걸 너무 늦게 알았네.”

동정받지 않는다는 기분, 나와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고 인정해 준다는 기분. 그리고 나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이젠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아는데, 그걸 붙잡겠다고 놓쳐 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게 뼈아프게 느껴졌다.

“바보 같지?”

예현이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그럴 것이다. 큰소리치고, 화내고 헤어졌는데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우스워 보이겠지.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야.”

그러나 명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도, 지금도 네가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럴 리가.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데? 박규진 같은 거한테 절절맨 것도, 그런 걸로 너희한테 화냈던 것도.”

예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 시절의 자신은 한심했다. 그러니 멍청하단 소리를 들어도 그닥 서운하게 느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냥……. 걱정됐어.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네 생각 나더라.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

명아가 멋쩍은 듯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기사에서 봤을 때 신기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이정 씨 좋은 사람이니까. 너 잘 챙겨 주겠다 싶기도 했고.”

명아의 무릎 위에 올라와 있는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겨우 밀어낸 명아가 말을 이어 갔다.

“너도, 어떻게든 잘 살 애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어떻게 지내는지 봐서 좋았어.”

“…….”

그닥 심금을 울릴 만한 말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질까.

분명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어째 요즘은 눈가가 젖을 만한 일만 생기는 것 같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관계의 끝이 어땠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똑똑.’

예현과 명아가 시간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갑작스레 들린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창밖에는 이정이 한쪽 손을 든 채로 생긋 웃고 있었다. 선팅이 짙어 차 안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이정은 창 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촬영 끝났나 봐.”

“어. 가 봐야겠다.”

예현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차 문에 손을 댔다.

“연락해.”

“……그래. 연락할게.”

그래, 핸드폰도 있고, 번호도 있으니까 따로 연락하면 되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차 문을 열었다.

“촬영 잘 끝냈어?”

“응. 형도 잘 있었어?”

이정이 예현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애인 연기 하는 건 오랜만이었지, 그래서 평소보다 더 살갑게 구는 건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을 올려다보았다.

“응. 해리 씨가 둘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내 멋진 모습 보여 주고 싶어서 데려온 건데, 남 좋은 일만 했네.”

이정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말했다.

“좀 더 조심할 걸 그랬어.”

“이미 들킨 걸 어쩌겠어.”

예현이 이정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명아가 보고 있으니 지금은 달달한 연인을 연기해야만 했다.

“가자.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해.”

“한 매니저님. 저희 형이랑 놀아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놀아 주긴 뭘요.”

이정이 예현의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집에 가서 쉬어.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심해서 가야겠다.”

이정이 예현의 옷에 달린 모자를 씌워 주며 웃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던 모습을 본 이후라 그런지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래, 어차피 다 연기잖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과 발을 맞추어 걸었다.

*****

“재미있는 구경 시켜 주려고 데려간 거였는데, 완전 망했네.”

이정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시트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러게 네가 입조심했어야지.”

주석이 그런 이정에게 잔소리를 하자 이정이 귀찮다는 듯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오자는 얘기 안 했어.”

“그럼 어떻게 될 줄 알고 데려왔는데?”

예현이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정말 무심결에 받아친 것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 왜 그렇게 쳐다봐.”

예현이 당황해 묻자 이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냥, 같이 살면서도 별로 친해지질 못한 것 같아서 좀 친해질 생각으로.”

“웃기시네. 언제는 많이 친해졌다고 자랑하더니.”

주석이 이정의 말을 받아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어투였다.

“우리,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현 역시 이정의 말을 반박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아니면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아서 괜히 그러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이정이 말했다.

“그래도, 더 친해지고 싶어서.”

이때까진 그런 말 없었으면서,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내가 형을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촬영장밖에 없잖아. 다른 데 나갔다가는…….”

“절대 안 되지.”

주석이 이정의 말을 댕강 잘라 버렸다.

기사 나간 게 얼마나 지났다고 나가긴 어딜 나가. 큰일 날 소리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무리겠지.”

사람들이 모를 때야 상관없지만 예현이 이정의 연인인 것이 알려졌는데도 예현을 데리고 촬영장에 나갔다가는 질문 세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정이야 별로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예현이었다.

“사람들 무섭더라.”

예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을 많이 걸지. 예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멋있는 모습 좀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했네. 보지도 못했을 거 아냐.”

이정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예현이 자신의 촬영하는 모습을 본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모르는 거 보면 내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도 안 봤을 것이고. 아, 홈시어터 사용하는 법 알려 줄까? 거기 보면…….”

“아냐. 봤어. 너 연기하는 거.”

짧은 장면이었지만 분명히 봤지. 예현이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멋있더라. 네 진지한 모습 처음 보기도 하고……. 여러모로 신기했어.”

드라마나 영화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정의 직접 연기를 보니 그의 연기가 궁금해졌다.

“홈시어터 사용하는 법 알려 주면 네가 찍은 영화나 봐야겠다.”

아직 주말이 하루 남았으니 내일은 이정이 출연한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자 이정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래. 내일은 저녁 촬영이니까 낮에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줄게.”

쟤는 대체 무슨 변덕으로 저러는 걸까. 주석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핸들을 돌렸다.

*****

“아, 예현 씨. 미안한데, 일 관련해서 이정이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요. 먼저 올라가셔도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아요.”

주석의 부탁에 예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집에 올라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불편하게 차에서.”

“아냐. 그리 오래 걸릴 것도 아닌데. 예현 씨. 다음에 봬요.”

주석이 예현을 보내려는 듯 인사를 했다. 예현은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정은 주석이 일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야, 타.”

이정의 예상대로 예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주석이 도로 차에 올라탔다. 물어볼 것이 많은 얼굴이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예현 씨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주석이 차 문이 닫히자마자 이정에게로 달려들었다.

“말도 안 하고 데려오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냐?”

“말했으면 안 된다고 했을 거 아냐.”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했겠지. 데려갈 이유도 없고, 얘기해 보니까 본인이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주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석은 이정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폭탄선언을 던진 게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피하기는커녕 더 끼고 다니는 꼴이라니.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이었다.

“집에서 쉬겠다는 사람을 굳이 거기까지 데려간 이유가 뭐냐고.”

“그냥, 멋있는 모습 보여 주고 싶어서?”

이정의 말에 주석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람. 주석이 겨우 입을 다물고 말했다.

“장난해? 예현 씨가 너 좋아하면 어떻게 해서든 마음 접도록 도와줘야지. 네 멋있는 모습을 보여 줘서 뭐 어쩌자는 건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예현이 이정을 좋아하는 것, 그게 사실이어서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 그렇게 생각 없는 애 아니잖아, 어?”

“웬일로 후한 평가를 해 주네.”

이정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죽어도 이정을 믿지 않는 주석을 비꼬는 말투였다.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

이정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를 듣지 않고 얼굴만 본다면 혹할 만한 모습이었지만 주석은 이정의 예쁘게 웃는 얼굴이야말로 무엇보다 더 위험한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긴 뭐가 나쁘지 않아. 아니, 예현 씨가 너한테 뭐 잘못하기라도 했어?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안 이랬잖아.”

주석이 이정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대며 말했다. 잘못한 게 있냐라. 이정이 주석의 손에 순순히 흔들려 주며 생각했다.

“잘못했다기보단, 그냥 서운한 정도?”

오늘쯤이면 멍은 거의 가라앉았으려나. 이정이 보호대 낀 예현의 손목을 떠올렸다.

“서운한 거? 뭔데.”

“비밀이야. 그리고 나 좋다는 사람한테 굳이 매몰차게 굴 필요는 없잖아? 당장 안 볼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네가 언제부터 너 좋다는 사람한테 그렇게 친절했는데. 주석이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네가 언제는 필요에 의해서만 행동했냐? 야. 예현 씨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냥 내버려 둬.”

주석이 인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석은 예현이 조금 불쌍했다.

멀쩡히, 그리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이상한 일에 엮인 거나 힘들다는 이야기 한번 못 하고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점이 그랬다.

“형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불쌍하지 그럼. 너랑 엮여. 스토커랑 엮여. 그렇다고 남들한테 힘들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뭐가 서운한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도 있잖냐. 그냥 적당히 해.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게 제일 못돼 먹은 짓이야.”

이정은 예현을 꼬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정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주석이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불쌍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맘 받아 주지 못할 거면 차라리 매몰차게 굴어. 애매하게 행동하는 것보단 그게 백번 나아.”

주석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석은 이정의 말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받아 줄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해도 괜찮나?”

이정이 입꼬리만을 올려 웃으며 물었다.

“너, 너 이 미친 새끼…….”

주석이 급기야 뒷 목을 잡고 말을 더듬었다. 혼자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재련 이사님한테 전화부터 해야 하나. 주석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농담이야.”

“야!”

이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왜 예현을 데려갔느냐. 그닥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그날 말고는 티를 낸 적도, 먼저 다가온 적도 없단 말이지.

게다가 묘하게 선을 긋기까지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예현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말했잖아.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야. 예상하곤 좀 달랐지만.”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어떻게 행동하고 싶은지만은 명확했다. 예현을 좀 더 가까이 두고 관찰하고 싶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더 궁금한 것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이 정체 모를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예현을 자신의 영역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아니었거든. 한 매니저님이 있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어.”

이정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주석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필 예현 씨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친해지고 싶어진 이유는 또 뭔데.”

게다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에는 아직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주석은 이정이 예현에게, 그리고 예현이 이정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랐다.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좋지만, 어차피 끝이 정해진 사이에 뭐하러 필요 이상의 관계를 만들려 한단 말인가.

“날 좋아해 주는 사람한테 관심 가지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그건 아니지만, 넌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잖냐.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을 노려보았다.

“어쨌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정이 끝끝내 시원한 답을 내려 주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 주석이 그런 이정을 붙잡으려다 붙잡아 봤자 별다를 것도 없을 거란 생각에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갈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불쌍한 사람 너무 괴롭히지 않으면 좋겠는데.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

“이렇게 쓰면 돼.”

다음 날, 이정은 예현에게 홈시어터 룸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신기하다. 집에 자주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이런 건 어떻게 준비해 놓은 거야?”

“지금은 활동기니까 자주 안 들어오는 거지. 나도 쉴 땐 쉬어.”

이정이 리모컨을 들어 기계를 조작하며 말했다.

처음 집 구경을 했던 날 이후 처음 들어와 본 방 안에는 각종 DVD와 대본집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 중에서 본 거, 있어?”

이정의 질문에 예현이 책장에서 아는 제목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생활과는 영 동떨어져 살아온 예현에게 영화란 너무 먼 이야기였다.

“이거랑……. 이건 제목은 들어 본 것 같은데, 본 적은 없어.”

“둘 다 천만 영화네. 한번 볼래?”

“아니. 별로 내 취향은 아닐 것 같아.”

예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 중, 예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

책장 가장 낮은 곳에 있는 DVD, 그 영화의 제목은 익숙했다.

이정이 선물한 목도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던 그 영화였다.

“이거 재미있을 것 같은데.”

분명 이정의 대표작이며 명작이기도 하다고 했었지. 기왕 볼 거라면 이걸 보고 싶었다. 예현이 DVD를 책장에서 꺼냈다.

“뭔데?”

“너 나온 거로 하나 보고 싶기도 했고, 유명한 작품인 걸로 아……”

예현이 하던 말을 멈추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

이정이 미간을 찌푸린 채 DVD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었는데 순식간에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기억하기도 싫은 것을 마주하는 얼굴. 최소한의 표정 관리조차도 하지 않은 채 혐오감을 드러내던 이정이 뒤늦게 표정을 거뒀다.

“아, 이거.”

“……싫어?”

예현이 이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대표작이라고 들었는데,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라도 있었던 건가.

예현의 손에 들린 DVD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네 대표작이라고 들었는데.”

“칭찬 많이 받을수록 욕심이 생겨서 그런가, 내가 보기엔 부족한 점이 많은데 다들 칭찬해 주니까 좀 부끄럽더라고.”

이정이 예현의 손에서 부드럽게 DVD를 가져가며 말했다.

“이거 말고, 다른 거 보자. 내가 나오는 거로 보고 싶었어?”

이정이 책장에 DVD를 꽂고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이정이 다른 것을 꺼내 들었다.

“이건 어때? 이게 내 스크린 데뷔작이거든.”

처음 보는 제목의 영화 DVD가 이정의 손 위에서 달랑거렸다.

“20살에, 드라마 하나 찍고 바로 찍었던 거야. 사실 망해서 오래된 팬들 말고는 알지도 못하는 거긴 하지만.”

이정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걸로 보자.”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면 어느 걸 보든 상관없었다.

사용법은 대강 알았으니 저건 혼자 있을 때 보든가 하면 되겠지.

“앉아. 내가 할게.”

이정이 DVD의 상자를 열며 말했다.

영화관도 몇 번 가 본 적이 없는데, 이런 곳에서 영화를 볼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

“재미있었어?”

영화는 생각보다 이정의 분량이 적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아무 기반 없는 신인이 데뷔부터 주역을 맡는 일이 더 드물 것이다.

“응. 영화는 되게 오랜만에 보는데……. 재미있다. 너도 되게 어려 보이고.”

스무 살의 강이정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단순히 얼굴이 어려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보통 잃을 거 없고 가진 거 많은 애는 저렇게 열심히 안 하거든요. 그래서 놀랐었어요. 처음 집에 데리러 갔을 때는 뭐랄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니까요.’

예현이 주석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연기력 자체는 지금이 더 뛰어날지라도 화면 속의 이정에게는 지금의 이정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되게, 풋풋하기도 하고…….”

생동감이 더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스크린 속 이정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안 풋풋하다는 얘기야? 너무하네. 아직 한창때인데.”

이정이 한 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신인의 열의? 그런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예현이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이정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야. 나도 오랜만에 보니까 기분 이상하네.”

이정이 DVD를 정리하며 말했다.

“나만 어린 시절을 보여 준 것 같아서 좀 억울하기도 하고.”

“억울하긴 또 뭐가 억울해.”

예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이라고 해 봤자 스무 살이잖아. 열 살 정도는 되어야 어린 시절이라고 할 만하지.”

“그런가?”

이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27년 인생에서 7년 전이면 충분히 예전이지.”

“그렇긴 하네.”

이정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시간은 4시. 해가 지는 시간부터 촬영을 시작하니 슬슬 준비하고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른 것도 좀 추천해 줄까?”

이정이 책장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예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사용법 아까 다 가르쳐 줬잖아. 내가 찾아서 볼게.”

사실 이정이 나가면 영화고 뭐고 침대로 다시 들어갈 예정이었다. 영화를 그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게 더 좋았으니까.

그러나 정작 자리를 마련해 놓고 보니 꽤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DVD 하나 더 꽂으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예현이 농담 한마디를 던졌다.

“아하하. 그렇네. 열심히 해야겠다.”

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현과 집에서 함께하는 주말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자.”

“응. 잘 다녀와.”

두 사람이 어느새 익숙해진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정이 홈시어터 룸의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예현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현의 발걸음이 멈춰 선 것은 조금 전 이정이 다 본 DVD를 꽂아 둔 책장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던 예현이 이내 무언가를 빼내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나……?”

분명 조금 전에 배웠는데, 긴가민가하네. 예현이 DVD 플레이어를 이리저리 건드렸다.

“됐다.”

시행착오 끝에 사용법을 확실히 알아낸 예현이 전등을 끄고 소파로 가 앉았다.

잠시 후, 스크린 위에 떠 오른 영화의 제목은 조금 전 두 사람이 본 것과 같은 제목이었다.

스무 살의 이정이 다시 한번 방의 한편에 떠올랐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영화를 다시 돌려 보고 난 후, 홈시어터 룸을 정리하고 나온 예현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분명 핸드폰에 명아의 번호가 남아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메신저의 프로필이 이상했다.

[20XX.10.25 천정봉 정복.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산 정상에 올라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의 사진. 아무리 봐도 명아의 프로필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상태 메시지도, 프로필 사진도 다른 사람인 것 같은데. 연락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한명아 씨 핸드폰 맞나요? 오후 8:58]

예현이 메시지를 보내두고 답장을 기다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인은 해 두고 싶었다.

[경영 한명아 : 아닌데요. 번호 잘못 누르신듯합니다. 오후 9:04]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창에서 1이 사라지고 답장이 도착했다. 예상대로 번호의 주인이 바뀐 상태였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오후 9:05]

예현이 바뀐 번호의 주인에게 사과 인사를 보내곤 채팅 어플을 종료했다. 하긴 5년 만에 연락한 것이니 그동안 번호가 바뀌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명아 역시 예현과 오랜만에 만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으니, 웬만하면 명아가 다시 연락을 주기를 기다리면 될 텐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번호 바꾼 게 5년 전이었던가, 6년 전이었던가…….”

그 시간 동안 예현도 번호를 바꾼 적이 있다는 것. 두 사람 다 번호가 바뀐 채로 시간이 지나 버린 거라면 당연히 연락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예현이 스무 살이 지나 사귀어 본 친구라고는 다섯 명 남짓. 여유 없는 삶을 핑계로 사람을 곁에 두는 것 자체를 포기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규진 때문에 모두 밀어내 버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한 이후로는 그 누구도 곁에 두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다시 만난 명아는 예현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확인하고 헤어져야 했는데.”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더라면 이런 마음이 들진 않았을 텐데.

다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이정이한테 물어보면 알려나……?”

예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정이가 명아 번호를 알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지만 상대 배우도 아니고, 상대 배우의 매니저 번호까지 알까? 예현이 잠시 생각해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 동기들에게 연락할 용기도 없고,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하나 가능성이 있는 것역시 쉬운 방법은 아니었다.

명아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알긴 하지만, 가자마자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받을 게 뻔한데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아쉬움과 귀찮음. 둘 중 어느 것을 감수해야 할지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살면서 드라마 촬영장에 갈 일이 생길 거란 생각도 못 해 봤는데, 거기서 의외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정이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예현이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기는 하지만 이정은 분명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아챘을 터였다.

모른 척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도 아니고 자신을 촬영장에 데리고 간 것은 뭐라 해석해야 할까.

만약 평범하게 만나 평범하게 만남을 이어 오던 관계라면 좋은 징조로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모른 척해 준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해 주느라 일부러 더 살갑게 구는 걸까. 하긴 나도 그러고 있으니.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데려가 준 거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정의 애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았으면 이정이 먼저 촬영장에 다시 가고 싶지 않냐고 물어봐 줬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되어서야 다음 만남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포기해야 하려나. 예현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드라마 촬영은 보통 기간이 얼마나 돼?”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촬영에 대한 것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던 예현이 생뚱맞은 것을 묻자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그냥. 촬영장 한번 다녀오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괜히 궁금하더라고.”

예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사실 예현은 아직까지도 명아의 번호를 다시 알아봐야 할까, 그냥 잊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촬영 기간이 좀 남은 거라면, 아직 만날 기회가 남아 있을 테니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분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3~4달 정도 걸리는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절반 정도 촬영한 거야?”

예현이 물었다. 이 계약을 시작했을 때부터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2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겠구나 싶었다.

“이제 끝나기까지 한 달도 안 남았지.”

그러나 이정이 말한 일정은 예현의 예상보다 조금 더 빨랐다.

“……그래? 그럼 우리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촬영이 마무리되는 거네.”

예현이 어정쩡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계약 기간. 처음 계약서에 명시한 3개월의 절반가량이 이미 흘러간 상태였다.

3개월을 어떻게 버티나 걱정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됐다니, 시간이 참 빠르게 느껴졌다.

“왜,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워?”

이정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별 의미 없는 말인 것이 분명한데, 예현은 그 말에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계약 기간이 절반 남았다는 건 이정을 볼 수 있는 기간이 이제 겨우 한 달 반 남았다는 말이었다.

기간을 늘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바뀔 리도 없고, 사실상 남은 기간이 전부일 텐데.

“끝나면 시원섭섭한 기분이긴 하겠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왜 헤어짐을 미루고 싶어지는 걸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 난 좀 아쉬울 것 같은데.”

이정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꽤 진지하게 하는 말이었다.

이정이라고 이 계약을 시작하며 마냥 즐거운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친놈 때문에 별짓을 다 한다는 생각 반, 그리고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생각 반으로 시작한 계약이었지만 예현만큼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냥, 헤어지고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고 기사 내고 종종 만날까?”

봄이 되고부터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엔 조금 아쉬운 면이 있었다.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석이나 재련이 들으면 넌 정말 미친놈이라고 길길이 뛸 것이 분명하지만, 제가 언제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고.

예현은 자신을 좋아하니 이 제안을 싫어하진 않겠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예쁘게 휘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러나 잠시 후, 이정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예현이라고 이정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좋은 건 아니었다. 제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더 그랬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눈에서 멀리 떨어트리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돌려받을 수 있는 마음도 아닌데, 강제적인 장치라도 있어야 헛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계약 끝나면 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넌 바쁠 테니까…….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걸.”

예현이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그래, 그게 맞는 거지.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고, 이정도 자신의 인생을 살다 보면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 거야.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뒤늦게 단호한 말에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

고개를 들어 마주한 이정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한 것 같은 얼굴.

아니, 또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기도 하고, 다시 보면 서운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 그리고 그러다가 스토커가 다시 꼬리라도 밟으면 어떻게 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던 예현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평소대로의 얼굴로 돌아왔다.

“하긴, 그렇긴 하겠다.”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잖아. 나 집으로 돌아가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아쉬운 기분 같은 건 금방 사라질 거야.”

예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그런 예현을 바라보던 이정이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조금 전까지의 미묘한 표정은 사라졌는데, 어째 분위기만큼은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정이 예현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비밀이 되게 많은 사람이네. 형은.”

“……누구나 그렇지. 너도 그렇잖아.”

농담 같은 말에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새 예현의 코앞까지 다가온 이정이 그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그렇긴 한데, 좀 서운하긴 하다.”

속삭이듯 말한 이정이 예현을 지나쳐 복도로 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예현은 이정에게 묻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다음 권에 계속.]

계약연애의 정석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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