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녀왔습니다.”
이정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형?”
그러나 불이 켜져 있지도 않고, 대답이 돌아오지도 않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예현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보통 이 시간이면 집에 있던데, 이정은 오랜만에 스스로 거실 불을 켰다.
[현이 형♡ : 예서한테 다녀올게. 그렇게 늦지는 않을거야. 오후 8 : 11]
이정은 잠시 시선을 두지 않았던 핸드폰에서 예현의 행방을 찾았다. 지금 시간이 9시가 넘었으니 조금 있으면 돌아오려나.
이정이 소파에 앉아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몇 년을 혼자 살았고, 이 집에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렇게 넓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건 끔찍한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정이 소파에 기댄 채 핸드폰을 두드렸다.
[강유정 : 네 임시애인 되게 재미있더라 오후 5 : 12]
이정이 확인만 하고 답장은 하지 않은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현의 재수 없는 전 남친을 귀찮게 만들어 주는 서비스를 해 준 것까진 좋았는데,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까지 꼬여 버렸다.
[강유정 : 답지않게 안하던 짓까지 하고. 조만간 재미있는 소식 하나 더 들어오는 거 아닌가 싶네. 오후 5 : 13]
유정은 이 상황이 꽤 재미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문자에서 느껴지는 유정의 흥미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정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답지 않은 짓은 무슨, 신경 끄라는 답장을 하려다가도 그런 답장을 했다가는 오히려 더 재미있어할 유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가만히 그 문자를 노려보기만 한 이정이었다.
강유정한테 박규진에 대한 걸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정이 때늦은 후회를 하며 죄 없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강유정의 귀에 들어간 재미있는 소식이 다른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유정의 문자를 제외하고는 연락이 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와서 가족 간의 따듯한 정 따위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이정이 핸드폰을 소파 위에 엎어 버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유정에게만 연락이 올 바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게 훨씬 낫지. 이정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생각했다.
‘또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이정이 능구렁이 같은 유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은 관심일 뿐이지만, 언제 이상한 꿍꿍이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당분간은 몸을 좀 사려야 할 것 같았다.
혼자 있는 것이 훨씬 익숙한 이정이었는데, 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던 사람이 없으니 왠지 심심한 기분이 들었다.
심심한 기분은 잡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정은 며칠 전 마주한 재련의 노발대발하는 얼굴을 떠올렸다.
‘제정신이냐? 모자는 왜 벗어?’
‘모자 하나 벗었다고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조용히 다녀만 와도 될 걸 왜 굳이 사방팔방 얼굴을 팔고 다니냔 말이야!’
기사가 대대적으로 나가자마자 재련은 이정을 호출해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예현 씨 전 애인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
한참 동안 화를 내던 재련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알고 이런 거지? 너 사생활로 기사 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재련이 확신에 가득 찬 눈을 하고 말했다.
눈치도 빠르시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무슨 수로 박규진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겠어.’
‘하…….’
알고 한 거군. 재련이 자신의 추측을 확신하며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 했다가는 주석이 말고 내가 너 쫓아다니면서 감시할 줄 알아.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네. 답지 않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가.
그러고 보니 답지 않다는 말을 들은 게 두 번째였네. 이정이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걸까. 내가 뭘 했다고. 이정이 잠시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이번 일은 규진이 거슬리기도 하고, 그저 동기부여용 서비스 정도라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해 보일 일인가. 이정은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삐삐삐삐-
그때, 다급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정은 이마 위에 올려 둔 팔을 내리고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왔어?”
고개를 돌리자 양 볼이 약간 붉어진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예현이 보였다. 뛰어오기라도 한 듯 살짝 들뜬 숨을 내뱉은 예현이 소파에 앉아 있는 이정을 발견하고 말했다.
“아, 다녀왔어.”
“예서 보러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들어와.”
이정이 예현을 보며 말했다. 겨우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의 오피스텔을 다녀왔을 뿐인 데다가 급하게 들어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예현은 달려오기라도 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날씨가 추워서. 바람도 많이 불고……. 급하게 온 건 아냐.”
예현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한겨울이니 춥기야 하겠지만, 겨우 몇 분 거리를 다녀왔다고 볼이 빨갛게 에일 정도던가.
“올해 최저 기온이래. 지하로 올 걸 그랬나 봐.”
뭐, 그렇다며 그런 거겠지.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했다.
“그러게. 잠깐 나갔다 오는 걸로 이 정도면 출근할 때는 목도리에, 귀마개에 다 갖춰 입고 나가야겠는데.”
“하긴 아침엔 더 추우니까. 내일부터는 그래야겠다.”
예현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목도리 챙겨 온 건 있어? 내 거라도 빌려줄까?”
“아니. 전에 받은 거 그대로 가져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예현이 그대로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 스토커. 요즘은 아무런 연락도 없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 그거.”
목도리가 스토커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정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비싼 거니까, 따듯하기는 하겠다.”
마치 남의 물건에 대해 말하듯 무감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 같은 건 기분 탓인 걸까.
“왜, 마음에 안 들어?”
예현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있던 이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목도리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냐, 스토커가 그 목도리를 보고 어떤 반응이었는지 아느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예현은 그러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목도리에 대한 건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정이 놈한테는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목도리에 대한 언급만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정에게 목도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간절하게 신신당부하던 재련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그건 아니야. 그냥……. 저번에 다른 직원들이 어떤 목도린지 알아보고 귀찮게 말 걸었던 게 기억나서…….”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일 하나쯤은 있겠지. 이정에게는 이게 그런 일인 거일 수도 있고.
예현이 정말 궁금한 것을 묻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래? 뭐, 그래도 여러 번 하고 다니다 보면 다들 익숙해지지 않을까.”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긴 하겠다.”
예현이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스토커가 또 그런 사진을 보내오진 않겠지, 정말 괜찮은 걸까.
한 사람만이 아는 불안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결국, 이정의 앞에서 이 목도리를 하고 나가기 꺼려진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예현이 문제의 빨간 목도리를 다시 꺼냈다.
목도리를 볼 때마다 얼굴에 하얗게 선이 그어진 사진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후우.”
예현이 현관 거울 앞에 선 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그래도 내일이면 주말이니까. 주말에는 정말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쉬기만 해야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뗐다.
예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향했다.
올해 들어 최고로 추운 날이 될 거라던 일기예보의 말대로, 택시를 잡느라 아주 잠시 바깥 공기를 쐬었을 뿐인데도 양 볼이 시큰거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추워.”
예현이 목도리를 동여매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목도리를 하고 나와 다행이었다.
“좋은 아침, 어우. 추워.”
들어오는 팀원마다 춥다는 이야기를 하며 들어올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다. 예현은 실내로 들어와서도 한참이나 목도리를 벗지 않고 있었다.
매일같이 택시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팀원들 눈에 보이면 귀찮은 소리를 들을까 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제부터 보일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온도가 일정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보일러 직원은 오후에나 온다고 했으니 그전까지는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무실 안에서 버텨야만 했다.
‘오늘은 그냥 앞에서 내릴걸.’
예현이 코를 훌쩍이며 생각했다.
“예현 씨, 그렇게 추워요?”
서 주임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히터가 풀로 가동되고 있지 않을 뿐, 아예 꺼져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팀원들은 덜덜 떨다가도 하나둘씩 겉옷을 벗었다.
그러나 예현은 출근한 지 20분이 넘어가도록 겉옷은커녕 목도리도 벗지 못한 채였다.
“아, 네. 오늘 진짜 춥네요.”
“목도리도 못 벗고. 핫팩이라도 줄까요?”
서 주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현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서 주임이 예현에게 핫팩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렇게 추위 많이 타면 오늘만이라도 택시 타고 오지 그랬어요.”
“에이, 아니에요. 돈 아깝게…….”
예현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예현 씨가 세모동 쪽에 살던가?”
“네? 네.”
“김 주임도 세모동 근처 살잖아요. 태워 달라고 해요. 저번에 강이정이랑 통화도 시켜 줬겠다. 그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요?”
서 주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내가 말해 줄까요?”
예현이 받을 수 있는 호의는 딱 이 핫팩 정도의 호의였다. 안 그래도 어색한 사람과 같은 차를 타고 가라니.
예현은 서 주임의 악의 없는 오지랖을 거절했다.
“아니에요. 원래 다니는 대로 다니면 되는걸요. 뭘. 김 주임님도 불편하실 거고…….”
“어머,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래요.”
서 주임이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거절하자 서 주임 역시 별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래도, 마음 바뀌면 이야기해요. 김 주임이 예현 씨가 자기 일생일대의 은인이니, 뭐니 하던데 그 정도는 도와주겠죠.”
“네, 꼭 그럴게요.”
예현이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예현은 결국 퇴근 시간 김 주임과 함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
‘예현 씨, 동네 친구 좋다는 게 뭐예요. 태워 줄게요.’
점심시간,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꽤나 들떠 보이는 얼굴의 김 주임이 예현의 자리를 찾아왔다.
‘아뇨. 정말 괜찮은데요. 저 혼자서도…….’
‘밖을 보니까 눈 오던데, 퇴근 시간쯤 되면 눈 쌓여서 버스 타기 힘들걸요? 그냥 타고 가요.’
어차피 지금은 세모동에 살고 있지도 않은데, 그 집에 갈 필요도 없다고.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 집이 차가 들어가기 좀 힘든 곳이기도 하고…….’
‘예현 씨, 이렇게라도 은혜 갚게 해 줘요. 네?’
김 주임이 제발 태워 주게 해 달라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물론 김 주임에게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그녀는 예현과 친해지고, 매일 집에 데려다주다 보면 한 번쯤은 강이정을 만날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짜 카풀 한다고 생각하면 좋잖아요.’
그러니까, 애초에 목적지가 같지 않은데 어떻게 카풀을 해요.
그렇지만 이 타이밍에 강이정과 함께 살고 있어서 세모동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가는 괜히 김 주임을 더 흥분시킬 것 같았다.
‘……그럼 오늘만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한 번쯤 집에 들러서 고지서 확인을 해야 했긴 하니까. 일단 오늘은 타고, 주말 동안 어떻게 핑계를 생각해서 다음부터는 거절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2팀으로 와요.’
목적을 달성한 김 주임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두 사람이 회사 지하 주차장에 함께 내려가게 된 것이었다.
“나 예현 씨랑 계속 친해지고 싶었는데, 팀도 다르고 해서 항상 아쉬웠거든요. 근데 어떻게, 집이 이렇게 가까웠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김 주임은 들뜬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니, 꼭 내가 강이정 팬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원래 예현 씨가 똑 부러지기로 유명하잖아. 그래서 좀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예현이 그런 그녀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이었으나 어쩌겠는가, 그게 사회생활인 것을.
“아무튼, 눈여겨보고 있었던 사원인데 갑자기 강이정이랑 사귄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예현 씨가 별로라는 게 아니라, 그렇잖아요. 보통 연예인은 연예인끼리 사귈 것 같은데.”
“그렇죠.”
예현이 영혼 없는 대답을 이어 갔다.
“일반인이랑 사귄다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니. 기사 보고 진짜 기절할 뻔했어요.”
“저도 신기하긴 해요. 연예인이랑 사귀는 건, 아니. 연예인이랑 알고 지내는 것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예현이 거짓과 진실을 약간 섞어 말했다.
“그런데 이정이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사귀게 되니까……. 게다가 그게 기사까지 나니까 처음에는 정말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어우, 당연하죠. 나라도 그랬을 거야.”
김 주임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정과 사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 것인지 잠시 헤벌레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지금은 좋죠? 강이정 팬들도 연애한다고 뭐라 안 하잖아요. 아, 물론 가끔 이상한 애들도 있긴 하지만……. 혹시 그런 거 찾아보고 그러진 않죠?”
김 주임이 무언가 떠오른 듯 예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인터넷에서 몇몇 팬들이 내 욕이라도 하고 있나 보지. 예현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딱히 찾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는가 봐요.”
“에이, 극소수예요. 극소수! 보통 다 응원해 주지.”
김 주임이 한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사람들 있으면 정상적인 팬들이 말린다고요. 그래도 아예 안 찾아본다니까 다행이다.”
인터넷에서 글 몇 줄 써 내리는 것보다 더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예현이 하하 웃으며 목도리를 살짝 움켜쥐었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돼요?”
“아, 네. 그런데 여기부터는 차가 들어가기가 정말 어려운 구간이라……. 그냥 저 앞 골목에서 내려 주셔도 괜찮아요.”
어느새 김 주임의 차가 예현의 집 근처까지 들어섰다.
좁은 골목, 그마저도 길거리 여기저기에 차가 대어져 있곤 한 곳이라 차가 들어가기에는 꽤나 불편한 도로였다.
“어떻게 들어는 가도, 다시 나가기가 힘들 거예요. 그냥 저기서 내려 주세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끝까지 태워 주는 게 낫지 않아요?”
김 주임이 골목의 너비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예현이 거듭 괜찮다고 말하며 거절하자 김 주임도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면 저기 편의점 앞에서 세워 주면 되는 거죠?”
“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임님.”
예현이 안전벨트를 풀며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와 보니까 우리 집이랑도 별로 안 머네요. 괜찮으면 다음 주부터는 그냥 같이 출퇴근하는 건 어때요? 5분, 아니. 3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라 별로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자 김 주임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조금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아직 마땅한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 예현이 시간을 벌기 위해 대화를 마무리하려 하자 김 주임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난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편할 때 연락주세요!”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현이 김 주임의 차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긍정적인 대답을 할 일은 없겠지만. 주말 동안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나 잘 생각해 둬야겠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스토커의 편지를 받고 나서 집을 옮기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집이었다.
고지서 때문에라도 한 번은 왔어야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게 되니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휴…….”
집 앞, 우편함 앞에 멈춰선 예현이 봉투들이 삐져나온 우편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건 전기요금 고지서 같고, 저건 핸드폰 요금 고지서이려나. 그럼 저건 뭐지?
괜한 불안감이 든 예현이 우편함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눈으로 봉투들의 정체를 추측해 나갔다.
저 두 개는 뭔지 예상이 안 가는데.
한참 동안 봉투들의 정체를 가늠해 보았지만, 아무리 올 만한 우편물을 생각해 봐도 무엇인지 예상이 가지 않는 봉투가 두 개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어 확인해 보았을 우편물들이지만 이번에는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휴.”
예현이 짧게 심호흡을 하고 봉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들을 집어 든 예현이 봉투의 겉면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그렇게 들어온 집 안, 봉투의 발신처를 모두 확인한 예현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지서처럼 만든 광고, 그리고 동창회 초대장.
봉투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봉투들을 내려놓았다.
고지서는 챙겨 가고, 집에 왔으니 챙길 게 있으면 챙겨 가야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어. 예서야.”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나 집인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 있으면 챙겨 가게.”
예현이 자신의 방문을 열며 말했다.
우선 날씨가 더 추워졌으니 장갑이랑 귀마개도 챙기고, 옷도 좀 더 챙겨 가는 게 나으려나.
[“음……. 아. 내 방 책상 위에 분홍색 파우치 있는데, 그거 가져와 주라. 그 안에 민정이한테 빌린 틴트 있는 거 깜빡하고 안 챙겨 왔어.”]
“그래. 그거 말고는 딱히 필요한 거 없고?”
예현이 큰 가방 하나를 찾아 짐을 챙기며 물었다.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그것만 가져와 줘. 필요하면 내가 다시 집 가서 챙겨 가지 뭐.”]
“그래. 그럼 이건 조금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가져다줄게.”
예현이 짧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이 목도리를 다시 봐서 그런가, 혹시라도 스토커가 우편함에 달갑지 않은 편지를 넣어 두었을까 봐 긴장한 상태였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하긴 스토커라면 내가 몇 주 가까이 이 집을 비웠다는 것도 알 테고, 이정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도 알 텐데 아직 이 집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겠지.
마음이 놓인 예현이 자신의 방에서 짐을 모두 챙긴 후 예서의 방으로 향했다.
예서가 말한 파우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 예현은 마지막으로 파우치를 가방에 넣은 후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오랜만에 들른 집,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머무르지 않은 공간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서늘함이 감도는 것 같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챙겨 가는 게 좋으려나. 예현이 다시 자신의 방문을 열고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예현이 찾으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 연애의 계약서였다.
어차피 여기 둔다고 해서 누군가 훔쳐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바로 찾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예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약서를 접어 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
돌아온 집에는 집주인이 없었다.
오늘도 늦게까지 촬영이 있는 건가. 예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방을 자신의 방에 옮겨 두고는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갔다가, 예서의 방에까지 들렀다 오니 밥때를 한참 넘긴 시간이라 배가 조금 고팠다.
간단한 거라도 하나 해 먹어야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식탁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예현이 의아해하며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식탁 위에 놓인 물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샌드위치였다.
[잠깐 집에 들렀다가 만들었는데, 너무 많이 만들어서. 새벽에 들어올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마.]
그 위에는 이정의 글씨체로 적힌 메모가 하나 붙어 있었다.
이게 뭐야. 진짜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예현이 작게 웃고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설마 샌드위치도 맛이 없진 않겠지.”
예현이 샌드위치를 작게 베어 물었다. 다행히 일전에 맛보았던 된장찌개처럼 충격적인 맛은 아니었다.
집에 잠깐 들러 이걸 만들었을 이정을 생각하니 조금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 같으면 그냥 좀 쉬다 나갔을 텐데. 성실하기도 하지.
한참 동안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예현이 이정에게 문자 한 통을 남겼다.
[샌드위치 잘 먹었어. 맛있더라. 오후 8 : 13]
그래도 감사 인사 정도는 보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보낸 문자였는데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답장이 날아왔다.
[♡ : 다행이네. 왜 이렇게 늦게 먹었어? 오후 8 : 14]
대기하면서 핸드폰이라도 하고 있었나. 예현이 빠른 답장 속도에 속으로 조금 놀란 채 답장을 보냈다.
[집에 잠깐 들렀다가 오느라고. 오후 8 :14]
[♡ :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지. 태워줬을 텐데. 오후 8 :15]
[어차피 네가 태워주는 것도 아니잖아 ㅋㅋ 매니저님이 태워주시는 건데 오후 8 : 15]
예현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타자를 치고 있었다. 이 생활이 익숙해져서인지, 이정에게 마음을 많이 열어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이런 사소한 대화가 즐거웠다.
[♡ : 그렇긴 하지만 ㅎㅎ 오후 8 : 16]
이정의 빠른 인정에 예현이 큭큭거리며 웃음 지었다.
[♡ : 내일은 새벽에 가서 저녁에 다시 나가. 오후 8 : 16]
[♡ : 지방 촬영 끝난 건 좋은데 어째 촬영 일정은 더 빡쎄진 것 같아 오후 8 : 16]
그러고 보니 그렇네. 예현이 이정의 이번 일주일 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지방 촬영이 끝났다기에 조금 한가해질 줄 알았는데, 한가해지기는커녕 어째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더 줄어든 것 같았다.
[힘들겠다. 안 피곤해? 오후 8 : 17]
[♡ : 피곤하긴 한데, 이거 말고는 할 일도 없는걸. 오후 8 :17]
이정이 무던한 대답을 보내 왔다. 하긴, 어떤 직업이든 안 힘들어서 하는 건 아니지.
게다가 유명 연예인이면 돈도 그만큼 많이 벌 텐데, 내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거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 그래도 내일 집 들어가면 잠깐 쉴 수 있으니까. 형이랑 같이 집에서 놀기나 해야겠다 ㅎㅎ 오후 8 : 17]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자니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예현이 잠깐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강이정은 그냥 별생각 없이 하는 말일 텐데, 괜히 들뜰 필요 없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답장을 보냈다.
[그래. 심심하다는데 놀아줘야지. 오후 8 : 18]
이 정도면 충분히 무던한 답장이었겠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기대하고 있을게 오후 8 : 19]
얘는 왜 말을 이렇게 가볍게 하는 거람. 괜히 이상한 기분 들게…….
예현이 이정의 마지막 문자에 답장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규진의 일로 한참 마음고생을 하면서 만난 사람이라 그런가, 이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예현의 경계를 허물고 들어왔다.
그렇지만, 둘은 3개월 후면 친구로도 지내기 힘든 사이였다. 그러니 정 붙일 필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 어째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함께 떠들고 싶고,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하고, 또 아주 가끔은…….
“정신 차리자. 신예현.”
예현이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짝 쳐올렸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 주지 않는 일이 그렇게 쉬웠는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
예현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 입고 나갔던 옷을 찾아 안주머니를 뒤진 예현이 방에서 챙겨 온 계약서를 꺼내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추가 조항
레인즈 컴퍼니는 신예현의 가족(신예서)의 신변과 신상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신예현과 강이정은 서로의 가족, 지인 앞에서도 애인의 모습을 연기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신예현과 강이정은 해당 계약이 효력을 가지는 동안 각자의 애인을 만들지 않을 의무를 가진다.
신예현과 강이정은 서로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을 명시한다.
예현의 시선이 멈춘 곳은 계약서 끝자락에 적힌 추가 조항이었다.
예현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 1번과 2번, 그리고 이정이 제시한 조건이 3번과 4번에 위치해 있었다.
‘나 좋아하지 말 것. 아니, 좋아하게 되더라도 절대 티 내지 말 것. 이렇게 두 개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이 계약서의 조항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마음 한쪽이 조금 욱신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자신감이 대단하다고 했었던가?
“뭐, 자신감 있을 만했네.”
그때는 별 시답잖은 것까지 조항에 넣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조항을 넣길 잘한 것 같았다.
이런 조항이라도 없었으면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드러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차피 드러낼 생각도 없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접는 게 나았다.
그냥 이정이가 친절하게 구니까, 그리고 규진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니까 잠시 마음이 흔들릴 뿐일 거야.
예현이 스스로에게 되뇌며 계약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내렸다.
예현이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읽어 보며 마음을 다잡는 사이, 정작 그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한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
주석이 핸드폰을 보며 살짝 입매가 올라간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 종일 빠듯한 일정에 시달렸으니 피곤할 법도 한데, 이정은 꽤나 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겨울에 야외 촬영 하는 거 싫어하잖아. 맨날 입이 이만큼 나와서 기분 나쁜 티를 내더니.”
주석이 이정의 불퉁한 얼굴을 흉내 내며 말했다.
이정이 자신이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쨌거나, 컨디션 좋으면 좋은 거지. 뭐 좋은 연락이라도 왔어?”
“어?”
뜬금없는 말에 이정이 되묻자 주석이 핸드폰을 흘긋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냐? 핸드폰만 붙잡고 있길래 그런 건 줄 알았네. 누가 보면 너 진짜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다.”
주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이정이 짐짓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말조심해. 여기 우리만 있는 곳 아니야.”
“아.”
주석이 뒤늦게 자신의 입을 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스태프는 없었다.
“뭐, 흠흠……. 그만큼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거지.”
주석의 말에 이정이 방금 전까지 문자를 보낸 대화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애 같아 보인다라, 남들이 보기에도 그런 걸까.
이정은 최근 예현에 대해 꽤 만족스러운 평가를 하고 있었다.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두 눈 가득 독기가 들어찬 모습이 이 일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몇 번의 자극을 받고 나서는 더욱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정은 사람을 잘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이유 없이 사람을 믿는 것은 아주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부러 예현을 자극하고, 그가 이 관계에 매달리게 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 이정의 계획대로, 예현은 그가 원하는 대로 변해 가고 있었다.
경계 가득하던 모습이 조금씩 풀어지고,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일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규진에 대한 것을 전혀 놓지도, 잊지도 못하고 ‘규진에게 잘사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라는 강박을 가져가는 것이 보일 때에도 그랬다.
예현은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토커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전해 듣고 나서도 나를 지금 같은 태도로 대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겠지.
지금 같은 관계가 좋았다. 아니, 조금 더 내게 마음을 열고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도 마음에 들 것 같기도 하고.
이정이 그런 마음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내가 기분 좋을 만한 이유가 별달리 있겠어. 음……. 요즘 스토커가 좀 조용한 것 같아서 그런 거지 뭐”
“그렇네. 역시 집 옮기길 잘한 것 같아. 어떻게 그렇게 네 일정을 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옮긴 집만큼은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잖냐.”
주석이 다행이라며 말했다.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다는 게 어디야. 일단, 제련 이사님이 사람 써서 어떻게든 추적은 하고 있다니까…… 예현 씨 더 피해 보기 전에 잡을 수 있도록 해야지.”
“주제에 꽤 꼼꼼해서, 흔적도 잘 안 남기잖아? 경찰 도움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
주석이 희망적인 생각을 하라며 이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경찰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니까.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분명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스토커가 자신이 이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듯, 이정도 2년간 이어진 스토킹 덕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스토커는 절대, 스스로의 의지로 떨어져 나갈 만한 인간이 아니다.
경찰이든, 재련이 썼다는 사람이든 누군가의 손에 잡히고 나서나 이 짓을 그만두겠지.
아니, 어쩌면 그러고도 정신 못 차릴 수도 있고.
“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지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집 한 군데뿐인 것도 꽤 서럽잖아?”
그러니 부디 지금 이 연극이 스토커를 잘 자극해 그놈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어야 할 텐데.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그래야 예현 씨 보기도 덜 미안하지. 나한테 화를 내거나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미안해 죽겠어. 괜한 일에 끌어들인 것 같아서.”
주석이 이정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언제까지나 네 집에서 사실 수도 없는 거고, 헤어졌다고 스토커가 예현 씨한테 완전히 관심을 끈다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그렇네.”
해리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헤어지고 난 후에도 그쪽에 매달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정은 굳이 설명해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너도 참 성격에 문제 있는 놈이라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주석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너도, 예현 씨도 불만 없이 잘 지내는 거 보면 예현 씨가 많이 착한가 봐. 아니면, 잘 맞는 건가?”
주석의 말에 이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잘 맞느냐라.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적어도 지내면서 불편하다는 생각 해 본 적은 없는 거잖아?”
확실히 크게 불편해 본 적이 없었다. 시끄럽지도, 지나치게 참견하지도 않고, 선을 지킬 줄 아는 느낌이지.
오히려 이제는 예현이 없는 집이 더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천생연분이네, 천생연분이야. 이렇게 만난 것만 아니었어도 잘 좀 지내 달라고 했을 텐데.”
주석이 의미 없는 가정을 하며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드물잖아. 생각할수록 아쉽다. 야.”
“내가 예현 형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여?”
무의식적인 질문이 이정의 입술을 비집고 나갔다. 생뚱맞은 질문에 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 너답지 않게.”
답지 않다는 말을 듣는 게 이걸로 몇 번째였더라.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냥, 다들 그렇게 보인다길래.”
“네 마음, 네가 제일 잘 알겠다마는…… 아무래도 그래 보이지.”
“어떤 점이?”
예현이 꽤나 마음에 드는 인간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정은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자신을 보고 너답지 않다는 소리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딱히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건지.
이정이 대답을 기다리며 주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음……. 어떤 점이 그렇냐라…….”
주석이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제일 큰 건 그거지. 불만이 없는 거.”
주석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티 안 내려고 해도 나한테는 다 보이거든. 딴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모르겠냐?”
주석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 분위기라는 게 있잖냐. 근데 예현 씨랑 같이 있을 때는 늘 그 싸한 분위기가 안 느껴지더라고. 그것도 그렇고, 너. 절대 너한테 이득 없는 짓은 안 하잖아?”
“…….”
“네가 길거리에서 모자 벗었을 때의 파장을 생각 못 했을 리도 없고. 재련 이사님은 널 이해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서 그렇지……. 너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주석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날은 당장 저 사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강이정이 생각을 안 하는 놈이지, 못 하는 놈은 아닌데 괜히 모자를 벗었을까?
“예현 씨 기 살려 주려고 그런 거 아냐?”
“뭘 또 그렇게까지 해석해.”
기를 살려 주기는, 이정이 확대 해석이라 생각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별 잘나지도 않은 얼굴로 내 얼굴 보고 싶지 않겠느냐는 개소리를 하길래, 입 좀 다물라고 벗어 준 게 다인데.
“아무튼, 그런 걸 보니까 꽤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싶었던 거지.”
주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연인처럼 지내야 하는 거, 잘 지내면 좋지. 아무리 배우라도 일상생활에서까지 연기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그냥 편하게 살면 더 좋잖아.”
“그렇긴 하지.”
이정이 씨익 웃음 지었다.
잘 지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지내기 불편한 사람도 아니니까. 굳이 좋은 관계를 마다할 이유는 없는 거지.
“형 말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꽤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거든.”
“아하하. 그래. 네가 누구 마음에 들어 하는 거 흔한 일도 아니고……. 기왕 지내는 거 3개월 동안 잘 지내 봐. 진짜 사귀지만 않으면 뭘 해도 괜찮은 거잖냐.”
주석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덕분에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조항이 있었지.”
이정은 본인이 계약서에 그런 조항을 추가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귀찮게 굴기라도 할까 봐 추가한 조항이었는데, 예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니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딱히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뭐, 내 쪽에서 문제 삼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이정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주석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또 이상한 짓 꾸미고 그러는 건 아니지……?”
“설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에 주석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정은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내가 사람 마음을 어떻게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지.”
이정이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너, 진짜 그렇게 살지 마라.”
“내가 뭘.”
주석이 이정을 가만히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의 마음이 항상 이정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은 다른 사람 앞에서 다정한 척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저 얼굴만 다정한 놈한테 예현 씨가 넘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주석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너, 진짜 그렇게 살다가 제대로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
“내가 뭘 했다고.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정이 뻔뻔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예현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사근사근하게 굴어 온 것은 맞지만, 작정하고 넘어오게 만들려고 한 적은 없었다.
“아직이라니. 앞으로도 안 되거든?”
주석이 기겁하며 말했다. 이정이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일부러 그럴 일 없어. 그렇지만 뭐……. 형 쪽에서 날 먼저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이정의 말은 진심이었다.
예현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말릴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좋아한다는데, 싫어하라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계약서 조항을 모른 척해 주는 것 정도지.”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 얌전한 얼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붉어지는 것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긴 하네.
이정이 사랑에 빠진 예현을 상상해 보며 쿡쿡 웃음 지었다.
“잘 지내는 건 좋은데, 네 실수랑 계약서로 엮인 사이라는 거 잊지 말고. 단기 계약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이정아.”
주석이 그런 이정을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형이 보기엔 예현 형, 어때? 좋은 사람 같아?”
“어, 어? 좋은 분이지.”
“그럼 형. 예현 형 좋아해? 예현 형이 형 좋아했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생뚱맞은 질문에 주석이 기겁을 하며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주석의 식겁한 얼굴을 바라보던 이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좋은 사람인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다르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적어도 내가 예현 형을 좋아할 일은 없으니까. 유난 떨 필요 없어. 형 말대로 3개월, 길어 봤자 거기서 몇 달 더 늘어날 기간이잖아?”
계약 기간은 3개월, 그리고 예현이 원하면 1달 단위로 늘릴 수 있지만, 예현이 그럴 리도 없고 그마저도 최대 기간을 6개월로 잡아 둔 상태였다.
“그 정도의 인연이라는 거, 나도 형도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이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짧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예현은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택도 없는 것을 욕심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잖아.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고.”
게다가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너를 믿겠냐? 주석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복권도 당첨될 가능성은 있으니까.”
“아, 이정 씨. 다음 신 대기하러 이동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때, 두꺼운 안경을 쓴 촬영팀 막내가 이정을 불렀다.
오늘은 세 장면 정도만 더 촬영하면 끝이던가. 이정이 촬영팀 막내를 보며 생긋 웃었다.
“미리 가 있어야 했는데, 괜한 수고를 끼쳐 드렸네요.”
“아, 아닙니다.”
이정이 주석을 내버려 두고 막내의 안내를 받아 촬영 장소로 사라졌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주석이 이정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말리겠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저렇게 살다가 분명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올 거다. 주석이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이정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아하하.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말해도 상관없는데.”
주말 오후, 늦잠에서 깨어난 이정이 삐죽삐죽한 머리를 하고 식탁에 앉아 예현을 보며 웃었다.
“딱히 비밀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더 귀찮을 것 같아서.”
이정과 마주 앉은 예현이 체리 한 알을 입 안에 넣으며 말했다.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할지 고민 중이야. 다른 사람하고 카풀한다고 하기엔……. 한번 차를 얻어 타자마자 그러면 도망치는 티가 너무 나잖아.”
“으음. 그럼……,”
이정이 나른한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데리러 가서 그럴 필요 없다고 해.”
“그랬다가는 나한테도 스토커가 하나 생길 것 같은데.”
이정의 농담에 예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혹시라도 이정을 마주칠까 봐 자신에게 붙어 다니려고 하는 김 주임인데, 그런 소리를 들었다가는 정말 스토킹이라도 할지도…….
“그럼, 일이 생겨서 당분간 동생 학원 데려다주러 가야 해서 힘들 것 같다고 해. 원래 집이랑 다른 방향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오.”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예현이 눈을 반짝였다.
“외고 입시 같은 거 준비한다고 할까? 그래서 학원 데려다준다고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예서 공부 잘해?”
“아니. 외고는 무슨.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라.”
예현의 단호한 말에 이정이 큭큭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자는 동안 뻗친 머리카락이 몽글몽글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늘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만 마주해 왔는데,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의 이정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리해 주고 싶기도 하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현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이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두 사람이 동시에 굳어 버렸다.
“……!!”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예현이었다.
“머, 머리가 뻗쳐서.”
예현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황급히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졸지에 머리를 쓰다듬어진 것은 이정인데, 마치 자신이 몹쓸 짓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리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예서 머리 만져 주던 게 버릇이 됐나 봐. 미안.”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생각하던 이정이 한 박자 느리게 파악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하하!”
이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예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은데, 그래도 다시 사과해야겠지?
“미안. 잠이 덜 깼나 봐…….”
“아냐. 사과할 필요 없어.”
이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머리를 만져 주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쓰다듬어 주는 사람은 처음이라 좀 놀란 것뿐이야.”
놀리는 것이 명백한 말투에 예현이 얼굴을 붉혔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을까.
예현이 뒤늦은 후회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렇게 놀라.”
이정이 예쁜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우리 사이가 뭐 대단한 거라고.”
예현이 그 예쁜 얼굴에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나름 연인 사이잖아? 기간제지만.”
“연인……. 남들 앞에서나 그런 거지. 둘이 있을 때 그런 얘기를 왜 해.”
예현이 방금 전보다 더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정은 예현의 당황한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둘이 있을 때 편해야 남들 앞에서도 편하게 있을 수 있지. 형도 그렇게 말했었으면서.”
“그거랑은 다르지…….”
예현이 식탁 위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당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굴이 붉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조언 고마워. 그렇게 얘기하면 주임님도 억지 부리지는 않으실 것 같다.”
예현이 이정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얼굴이 식을 때까지만이라도 이정의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예현의 그런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이정이 제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 그 전 애인한테서는 아무 연락 없어?”
“……어?”
예현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지.
“기사도 크게 났는데, 그 사람 성격상 형한테 아무 연락도 안 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아…….”
그런 거였구나. 예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연락 없어. 본인도 창피라는 걸 알면 더 이상 연락 안 하겠지. 아니, 그 전에 이제 새 핸드폰 만들 명의도 부족할걸?”
예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번호란 번호는 다 차단을 했으니 남의 핸드폰이라도 훔쳐서 연락하지 않는 이상 규진이 예현에게 연락을 할 방법은 없을 터였다.
“그래?”
이정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예의 예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되게 구질구질해 보여서 다시 연락하지나 않았을까 걱정됐었거든.”
“애초에 바람피운 것도 남 부럽지 않은 오메가랑 결혼하겠다고 그런 거였고 다시 찾아온 것도 몰래 만나자고 온 거였는데, 사방팔방 알려진 지금에야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지.”
예현이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로 말했다.
양심이 있고 부끄러움이 뭔지 안다면 다시는 내 앞에 얼쩡거리지 않겠지.
“차라리 기사가 나가서 다행이야. 그 머저리도 아버지만큼은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그 아버지 귀에도 들어갔을 테니 제대로 쓴맛 좀 봤겠지.”
예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해 가는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하나 아쉬운 건, 그 멍청이랑 사귄 적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알아 버렸다는 것 정도려나.”
그렇기에 예현은 더더욱, 자신이 그런 남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고 싶었다.
기사가 나간 후, 규진에 관한 기사가 여기저기 나가면서 예현을 향한 추측 역시 극에 달했다.
[와 전 남친 현 남친 화려하네 나 영상 막히기 전에 봤는데;; 연생 같이 생기긴 했더라]
[연생 그거 찐 아니었음?]
[ㄴㄴ 아님 걍 일반인이래]
역시 강이정을 반하게 할 만한 사람이었니 마니 하는 낯뜨거워지는 이야기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 정도 반응도 예상하지 못하고 시작한 연애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예현이 입술에서 피가 날 때까지 제 입술을 물어뜯게 만드는 반응이 있었다.
[재벌만 골라 사귀네 ㅋㅋ 알만하다]
[학교 다닐 때도 평범한 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박규진하고만 죽어라고 붙어 다녔다고 인증글 올라왔던데 강이정도 위험한 거 아님??]
[나 그 학교 다녔는데 ㅋㅋ 유명했음. 공부 잘하는데 돈 없는 애랑 공부 못 하는데 돈은 넘치는 애랑 사귄다고 속 보인다고 뒤에서 말 꽤 나왔었는데.]
자신을 속물이라고 물어뜯는 것까지도 참을 수 있었다. 정말 같은 학교에 다녔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것도 넘길 수 있었다.
[근데 쟤는 그렇다 치고 박규진은 왜 쟤랑 사귐?? 재벌 3세라며.]
[어차피 저런 거 다 서로 얻을 게 있으니까 사귀는 거임. 쟤는 옆에 있으면 떨어지는 게 있으니까 사귀었을 거고 NW 쟤도 영원히 사귈 것도 아닌데 얼굴 반반한 애랑 다니면 가오 사니까 그런 거겠지.]
[걍 불쌍해서 자선사업 한 거 아님?]
불쌍해서. 서연에게 처음 들은 이후로 계속해서 예현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그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
다른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게 비웃고 넘어갈 수 있는데, 깨끗하게 부정할 수가 없는 말이라 그런 걸까.
이 단어 하나만큼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긴 하겠다.”
예현의 그런 속을 알 턱이 없는 이정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보여 줘야지. 헤어지든 말든 아주 잘 살고 있다고. 그게 알려져서 걸릴 게 있는 사람은 형이 아니잖아. 그렇지?”
“그래야지.”
예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불쌍하다는 말 자체로도 스트레스였지만 그 말에 자꾸 신경 쓰게 되는 자신이 더 싫었다.
7년 동안이나 휘둘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더더욱 잠식되기 전에 어서 이 생각을 떨쳐 버려야만 했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후련해야 할 시기인데, 그 새끼 생각에 시간 쓰는 건 너무 아깝지.”
예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맞아.”
“그것보단……. 그 상대가 좀 불쌍하네.”
예현이 규진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다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서연 역시 그 기사를 봤을 텐데,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 했었으니 분명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지.
내가 처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봤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일까. 아니, 만난 기간이 짧으니 그 정도는 아니려나.
예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서연을 떠올렸다.
“응? 상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정한테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예현이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 상대.”
그러나 이정도 어렵지 않게 그 ‘상대’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약혼자인 주서연을 말하는 거겠지. 와중에 남 걱정까지 하고 있다니, 참 상냥하기도 하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형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아?”
이정이 서연에 대해 잘 모르는 척을 하며 말했다.
“어차피 비슷한 사람이겠지.”
“사귀었다고 해서 꼭 똑같은 사람인 건 아니지. 그냥……. 아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같은 아파트 단지라고 해 봤자 여기가 얼마나 넓은데, 설마 또 마주칠 일이 있지는 않겠지.
자신도 모르게 서연의 편을 들어주려던 예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고,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살 사람인데 누가 누굴 걱정해.
“그런 이야기 하지 말고, 다른 얘기나 하자. 나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이정이 자연스럽게 소재를 돌렸다. 예현 역시 규진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집에 오랜만에 갔더니 되게 낯선 기분이더라. 거의 평생을 산 집인데. 이렇게 오래 비워 본 게 처음이라 그런가 봐.”
“이제 2주일쯤 됐나?”
이정이 예현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기간을 대충 가늠해 보고 말했다. 2주라,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길게 비우면 2주가 아니라 두 달씩도 비울 수 있지 않아? 여행이나, 일 때문에 집 비울 수도 있고.”
“그렇긴 한데……. 난 딱히 여행도 안 가고, 어린 동생이 있다 보니까 출장도 하루 이상 가 본 적이 없거든.”
여행을 가려면 그 기간 동안 일은 못 하는데, 돈은 또 평소의 몇 배로 들어가다 보니 감히 가려는 시도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친척이라고는 이모 하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지방에 살아 예서를 맡길 곳이 없었기에 출장 역시 갈 수 없었다.
친구 집에서 하루 정도는 재울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스무 살 넘어서는 3일 이상 집 비워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뭔가…….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았달까.”
예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냥 생각나는 짐만 몇 개 챙겨 왔는데, 되게 낯설게 느껴지더라고.”
“다음에 또 갈 일 있으면 그때는 미리 말해 줘. 차 가지고 가는 게 짐 가져오기 편하기도 하고, 혹시 모르니까.”
사실 짐보다는 스토커의 일이 더 문제였다.
스토커가 무슨 수로 예현이 집에 가는 것을 알겠냐마는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너는……. 별일 없어?”
예현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주어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스토커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응. 괜찮아. 그 일 이후로 아직까진 잠잠해.”
이정의 말대로 스토커는 예현에게 사진을 보낸 후 이상하리만치 잠잠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정은 그가 무언가 다른 일을 꾸미느라 조용한 것일 뿐, 스토킹을 그만둔 것은 아닐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애설 난 이후로도 한동안 잠잠하다가 편지를 보냈으니까, 이번에도 또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계속 신경 쓰고 있긴 해.”
“빨리 잡혀야 할 텐데.”
예현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그래야 집에 빨리 돌아갈 수 있어서?”
이정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당황한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잡혀야 너도, 나도 마음 편할 테니까.”
“아, 그럼 집에 돌아가기 싫은 거야?”
“그……. 너.”
뒤늦게 이정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예현이 이정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경찰에 도움받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재련 형이 따로 사람 써서 알아보고 있다고 하더라고.”
“이사님이?”
예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나한테 얘기할 정도면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들한테 맡겼다는 소리겠지.”
“다행이네. 최대한 빨리 잡아야 할 텐데.”
예현이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재련 역시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잡을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계약 기간 끝나기 전에 못 잡을 수도 있어.”
계약 기간 내에 잡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 실마리라도 잡히면 다행이지.
이리저리 미끼가 뿌려져 있으니 빠르게 입질이 올 것 같긴 하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중요해? 꼭 계약 기간 안에 못 잡아도 잡는 게 중요한 거지.”
그렇게 말하면 침울해져서 한숨이라도 쉴 줄 알았는데, 예현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일찍 잡으면 좋지만……. 시간이 좀 걸려도 잡기만 하면 되지. 그 사람이 노리는 건 넌데, 내가 사라진다고 다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예상외의 반응에 이정이 가만히 예현을 바라보았다.
정작 협박 편지를 받은 건 본인인데, 본인보다 내 걱정을 먼저 해 주다니. 이정은 예현이 착한 것인지, 바보 같은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이정이 손을 들어 턱을 괴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닌데, 오늘따라 예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정의 얼굴이 유독 잘나 보였다.
조금 전 괜한 일로 잠시 분위기가 이상해졌던 탓일까. 나른한 아침, 햇빛이 찾아든 식탁 위에 앉은 이정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예현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했다.
“……뭐, 걱정하면 안 돼? 기간제…… 애인인데. 그 정도 걱정이야 할 수도 있지.”
예현이 이정이 그랬듯 뻔뻔하게 말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달아오른 뺨은 감추려 한다고 감춰지지 않는 법이다.
찬바람 한 점 없이 따듯한 실내에서 보란 듯이 달아오른 뺨이 이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분명 처음 자기니, 뭐니 할 때는 이렇게 부끄러움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얼굴을 붉힌다라.
아무렇지 않게 대하던 사람 앞에서 뻔뻔하게 굴기 어려워지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이정은 눈치가 그리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애인인데.”
이정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아무래도 주석의 말대로, 이번에도 자신은 나쁜 놈이 된 것 같았다.
예현의 귓가에 자신의 것이 분명한 심장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렘에서 오는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3. 신예현과 강이정은 서로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을 명시한다.
예현은 계약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얼굴에 열이 올랐는데 이정의 눈에 그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분명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추위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당황했다고 하기에도 별것 아닌 대화였다. 겨우 그 단어 하나로 얼굴이 붉어질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정도 계약서의 그 구절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뭐라고 대답할까. 계약 조항을 되짚어 줄까? 아니면 표정을 굳히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예현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며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정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까 고마워서.”
“……?”
이정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예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현이 알기로 이정은 눈치가 그리 느린 편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예현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에 반해 이정의 반응은 너무나 담담했다.
“내 생각 해 준다니까 좋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분명한 태도에 예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히…….”
예현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이정이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라면 자신에게도 나쁠 건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예현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차피 뭔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계약서 내용을 들먹이지 않고 넘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꼭 사귀는 사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지낼 수 있는 거니까. 잘 지내면 좋잖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예현이 둘 중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변명을 하며 온 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형 말대로, 내가 나쁜 놈이긴 한가 봐.”
“……무슨 소리냐. 그거?”
주석이 불길한 눈으로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너 사고 친 얘기를 꼭 나 운전하고 있을 때 해야 해?”
“뭘 사고까지야.”
이정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며 말했다.
“사고 친 거 아니면 그런 말은 왜 해? 나 방금 사고 낼 뻔했잖아.”
주석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네가 너 나쁜 놈인 걸 인정해?”
“예현이 형이 나 좋아하더라?”
끼익-.
그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탄 차가 큰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아무리 주차장이어도 그렇지. 너무 막 다니는 거 아냐? 안전 운전 해야지.”
“너, 너……. 아니다.”
주석이 경악한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핸들을 잡았다. 일단 주차부터 하고 족치자는 분위기였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다급하게 주차를 마친 주석이 안전벨트를 풀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농담이지?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아니.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야!”
주석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망할 놈이 그걸 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 게 며칠이나 지났다고?”
“말했잖아.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근데 그쪽에서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어떻게 하라고.”
이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하긴 뭘 아무것도 안 해. 그럼 예현 씨같이 멀쩡한 사람이 널 왜 좋아하는데?”
“면전에다 대고 너무하는 거 아냐?”
이정이 상처받은 척을 하며 메마른 눈가를 찍어 내렸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정 역시 제법 놀랐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꽤 공을 들이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게, 내 어디가 좋았을까.”
얼굴이라기엔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한 번도 이정의 얼굴에 동요한 적이 없었다. 성격 때문이라기엔…….
“아니, 예현 씨처럼 멀쩡하고 성실한 사람이 대체 왜 너 같은 인성에 문제 있는 놈을…….”
“면전에다 대고 말이 심하다니까. 형 내 매니저 아냐?”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말하는 걸 보니 성격을 보고 반했다기에도 좀, 이정이 자기 자신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예현이 형한테는 잘해 주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니. 어떻게 저런 놈을…….”
예현 씨, 똑 부러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주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하긴. 그냥 모른 척해 줬지.”
이정은 그런 조항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을 정도로 계약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예현이 계약서를 일일이 들여다보며 트집을 잡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애초에 귀찮게 구는 것을 피하려 넣은 조항이었다.
“본인도 일부러 티 낸 건 아닌데, 그런 것까지 지적하기엔 정이 좀 들었나 봐.”
이정이 예현의 굳은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굳어 버린 그 동그란 얼굴을.
“어차피 내가 걸고넘어지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잖아.”
한껏 긴장해 당황한 티를 내던 표정이 꽤 귀여워 보여서 굳이 그 얼굴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계약서 조항을 다시 읽어 주거나, 아는 체를 했더라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그전보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떨어트렸을까, 아니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 눈물이라도 떨어트렸을까.
“모른 척해 주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그래, 그게 낫긴 하지. 그래도, 하아…….”
주석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재련 이사님한테는 말하지 마. 아니다, 그냥 아무 데도 말하지 마.”
주석이 이정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그냥 끝까지 모르는 척하다가 계약 기간 끝나면 조용히 보내 줘. 앞으로도 영원히 아는 척하지 말고.”
뒷좌석으로 넘어오기라도 할 기세로 몸을 내민 주석이 말했다.
“그렇다고 진짜 사귈 것도 아니잖아? 괜히 사람 상처 주지 말고 조용히 끝내자.”
“진짜 사귄다라.”
주석의 말에 이정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정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주석의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야, 너 무슨 생각해?”
“별생각 안 했어. 그냥…….”
이정이 씨익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형이 먼저 그러자고 말하면……. 그것도 괜찮겠다.”
“강이정!”
선팅이 짙은 차창 너머로 주석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예현 씨, 예현 씨!”
“네?”
예현이 다급히 고개를 들고 박 대리의 부름에 응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부르는 것도 못 들어? A사 파일 정리 끝났어?”
“네. 지금 보내 드릴까요?”
“어. 지금 보내 줘.”
예현이 머릿속을 비우려 애를 쓰며 대답했다.
예현의 사고는 주말에 멈춰 있었다. 정확히는 주말, 이정이 예현의 붉어진 얼굴을 모른 체해 줬던 그 순간 말이다.
어떤 의미인 걸까, 모를 리가 없는데. 그냥 배려해 준 걸까.
그럼 나는 앞으로 강이정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모른 척해 준 건 거절이나 마찬가지니까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면 되는 건가?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그 상황에서 왜 애인 같은 얘기를 꺼내서 티 내기나 하고.
그 뒤로도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예현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곤 했지만, 예현은 이정의 모든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니, 애초에 한쪽 귀를 타고 들어오기는 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하아…….”
아직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던 마음이었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고, 인정한 적 없는 마음이기도 했다.
이정이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를 보면 처음과 달리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예현이 정신을 차리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에 집중하자. 다른 일에 집중하면 금방 잊히겠지.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어차피 3개월, 아니지. 이제 2개월 정도만 지나면 다신 만날 일 없는 사람이잖아.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정을 향한 생각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했다. 결국, 예현은 퇴근할 때까지도 이정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어야 했다.
심심할 때마다 주고받던 문자창도 오늘은 조용했다. 예현이 이정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아서였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
당장 오늘 집에 들어가면 보게 될 얼굴인데, 이렇게 마음 정리가 안 되어서야 곤란했다.
예현이 차라리 사고라도 당해서 이정의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을 미루고 싶다고 생각하며 느릿느릿 퇴근을 위해 짐을 챙겼다.
김 주임에게는 동생의 학원 픽업 때문에 카풀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해 뒀다.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붙잡지는 않았기에 예현은 혼자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오늘까지만 태워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예현이 소소한 후회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죄송한데요. 여기 ○○컴퍼니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세요?”
그때, 어리바리하게 생긴 행인 하나가 예현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귀찮았겠지만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미루고 싶은 오늘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 여기요. 모셔다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예현이 전에 없던 친절을 베풀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컴퍼니라면 조금 돌아가야 하긴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쁘게 안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선 골목, 예현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차 안에 몸을 들여야만 했다.
스토커인가? 아냐, 하지만 스토커로 추정되는 사람이랑은 체형이 많이 달랐는데.
아니, 그 전에 얼굴도 목소리도 전에 봤던 기자라는 사람이랑은 달랐잖아.
예현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입이 막혀 있지도, 손이 묶여 있지도 않았지만, 예현은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이대로 운전수의 목을 잡아채 당장 차를 멈추라고 협박을 한다거나 할 깡은 없었다.
“이렇게 데리고 와서 미안하긴 한데, 너무 긴장하지는 마요.”
어수룩해 보이던 남자가 손을 탈탈 털며 예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를 감시하기라도 하는지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예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러나 그의 말을 예현을 전혀 진정시켜 주지 못했다. 예현이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그런 예현을 보고 킥킥거리더니 농담이라며 예현의 어깨를 쳤다.
“아, 농담이에요.”
“누…구…….”
누구냐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예현은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예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눈을 치켜뜨고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쪽이…… 스토커예요?”
“스토커? 너무하네.”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그냥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인데.”
역시 스토커와 한패인 걸까. 예현이 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그쪽이 아무리 강이정, 아니. 이정이한테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스토킹하고, 사람을 납치까지 하는 건…….”
“엥?”
남자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말을 끊었다. 예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이정? 스토커?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난 그 배우랑은 아무 상관 없어.”
“네?”
당황한 것은 예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토커가 아니라고? 그럼 날 이런 식으로 데려갈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이야.
“어차피 가면 금방 알게 될 텐데, 너무 놀라지 마. 그쪽도 딱히 해 끼칠 생각은 없을 거야.”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예현이 불신 가득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창밖을 힐긋 바라보더니 다시 예현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금방 가는데 가서 확인해. 누군지 말해 주지 않고 무사히 데려오는 것까지가 계약이거든.”
그러나 역시 말해 주기는 어렵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남자가 말했다.
“아무튼, 너무 떨지는 마. 그쪽한테도 익숙한 얼굴일 테니까.”
나한테 익숙한 얼굴, 나한테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
새하얘진 머리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예현은 그저 애먼 손톱만을 물어뜯으며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할 뿐이었다.
그리고 차가 목적지에 다다르고, 남자의 손에 이끌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만든 사람의 형태가 보이자마자 예현의 손 떨림이 뚝, 멎어 들었다.
예현이 차에서 내리려 차 문에 손을 댔다. 그러나 굳게 잠긴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도망가려는 거 아니니까 당장 열어요.”
“눈빛 한번 살벌하네…….”
예현이 차창 너머로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 분명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예현을 차에 태운 남자 역시 그의 눈에서 분노를 읽었는지 운전사에게 문을 열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차 문을 거칠게 연 예현이 망설임 없이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거친 방법을 사용해 예현을 여기까지 오게 한 남자가 답지 않게 순한 눈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짜악-
조용한 공터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의 앞에 서자마자 입도 열지 않고 대뜸 그의 뺨부터 후려친 예현이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심호흡을 했다.
“너 미쳤어? 이제 진짜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예현이 규진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아무래도 박규진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한 건 사과할게.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널 만날 방법이 없어서 그랬어. 연락처는 다 차단했지, 다른 번호를 써도 바로 차단할 거지, 회사 앞에 찾아갔다가 또 기사라도 나면…….”
규진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 뺨을 맞은 것에 대한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변명하기에 급급해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난 진짜 끝이라고.”
“그게 끝인 건 알면서 너랑 나랑 끝났다는 건 왜 모르는데? 내가 오면서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아?”
스토커인가,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하며 한참을 마음 졸인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간다. 잡지 마.”
됐다. 화내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예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규진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
그러나 규진은 예현을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그렇게 쉽게 보내 줄 것이었으면 이런 방법까지 써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얘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잖아. 어? 무리한 이야기 할 거 아냐. 그냥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규진이 예현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예현이 그 손을 털어 내려 했지만, 꽉 붙잡힌 손목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싶은 생각 안 들어? 들어 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건 너무하잖아.”
“너는 나한테 너무한 적 없었던 것처럼 말하네.”
예현이 규진의 말에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들어 볼 것도 없이 너 좋은 일 시키려고 불렀겠지. 내가 미쳤다고 널 도와줘?”
“너…….”
규진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불편했겠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통쾌했다.
“알아서 잘 해결해.”
뭐라고 떠들든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예현은 박규진이 어떤 인간인지 짜증 날 정도로 잘 알았다.
징징거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지. 납치까지 감행한 것은 놀라웠지만 협박까지 할 깜냥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가 나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텐데, 저런 한심한 인간이 해 봤자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서연이가!”
무시하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규진이 눈을 꾹 감고 외쳤다.
“서연이가 너 찾아갔다고 들었는데, 그때 무슨 이야기 했는지만이라도 말해 주면 안 돼? 내 연락은 받지도 않고……. 사장님도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만 하셔서 답답해 죽겠다고.”
“……뭐?”
기껏 데려와서 한다는 말이 저거라니. 어이가 없는 예현이 규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솔직히 이야기할게. 기사 나간 거 봤지. 그거 때문에 서연이도 그렇고 주 사장님하고도 분위기가 안 좋아.”
“근데 나보고 어쩌라고.”
진지한 척하면서 이야기해 봤자 쓰레기 같은 내용이었다. 예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쏘아붙였으나 규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이미 나간 기사를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아니지, 그냥 네가 서연이한테 해명 좀 해 주면 안 될까?”
“무슨 해명? 그쪽 남자친구, 예비 약혼자가 내 회사 앞까지 찾아왔을 뿐이고 나는 너 꼴 보기도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면 될까? 그런 거라면 할게.”
“그런 이야기 아닌 거 알잖아.”
규진이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냥……. 거짓말 한번 해 주면 안 돼? 별 얘기 안 했다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런 그림이 된 거라고….”
“내가 왜?”
예현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 미친놈은 자기 혼자 머릿속에서 영화라도 한 편 찍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다 자기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내가 왜 널 위해서 거짓말씩이나 해 줘야 하는데.”
“……보상은 할게.”
잠시 눈알을 굴리던 규진이 입을 열었다.
“돈……이라면 어느 정도 지불할 수 있으니까.”
보상이랍시고 꺼낸 말에 예현의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났다. 예현이 억지로 차 안으로 끌려갔을 때보다 더 새하얘진 얼굴로 규진을 바라보았다.
“예서도 내년이면 고등학교 올라가고, 맨날 급전 쓸 일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었잖아.”
그건 그냥 연인일 때 했던 푸념에 불과했다. 규진에게 돈을 받을 생각으로, 돈이 없다는 티를 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도 공부하면서 과외 뛴다고 늘 피곤해하고……. 그냥 성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어?”
이 와중에도 자신을 위하는 척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자신 좋으려고 하는 일이면서, 예서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꼴이라니.
“그렇게 하면 서로한테 좋은 거잖아. 그러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라.”
처음부터 남은 정 따위는 없었지만 최소한의 인류애마저도 사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규진.”
예현이 조용히 규진의 이름을 불렀다. 내내 날카로운 말로 규진의 말을 반박하던 예현이 얌전해지자 규진이 조금 마음을 놓은 듯 웃음 지었다.
“역시 네가 생각해도 그게 괜찮을 것 같지?”
규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색을 띄웠다. 한때는 저 얼굴을 보고 행복할 때도 있었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다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넌 진짜 쓰레기 새끼야. 머리 치면 텅 소리 날 것처럼 멍청한 건 덤이고.”
화사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말에 규진이 벙찐 얼굴을 하고 굳었다.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으니 그거라도 써 보려고 하는 노력은 가상한데, 그럴 거면 네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두는 성의도 있어야지.”
“너, 너 지금 뭐라고…….”
평생을 멍청하게 살았지만, 면전에다 대고 멍청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 규진이 놀란 얼굴을 하고 말을 더듬었다.
“돈이 필요했으면 내가 너랑 조용히 헤어지지도 않았겠지. 주서연 씨가 나 찾아오기 전부터 너부터 찾아가서 협박했을 거라고.”
예현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규진의 일그러진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가만히 있었던 건 너랑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어. 너한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생각도 하기 싫어서 그런 거였다고.”
“너 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아니, 나 흥분 안 했어. 이제 화도 안 나.”
예현이 규진을 보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 화도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이 돈 줄 테니 현재 애인과 화해할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해 달라는 거라니. 멍청한 것도 도가 지나쳤다.
“그럼 원하는 게 뭔데. 정말 나한테 원하는 게 하나도 없어? 뭐라도 있을 거 아냐. 다 해 줄 테니까 나 한 번만 도와주라. 응?”
“자의식 과잉이 심하네. 내가 너한테 바랄 게 뭐가 있겠어.”
이딴 소리를 하면 자신이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니, 화가 나기는커녕 어이가 없었다.
네가 나랑 헤어지자마자 다른 사람을 사귈 사람이냐, 내가 너를 모르냐고 말할 때는 그래도 규진이 자신에 대해 알긴 아는구나, 싶었다.
확신에 찬 말투에 그래, 7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 아니다. 하나는 있네.”
돈을 줄 테니 거짓말을 해 달라고. 7년 동안 네가 봐 온 나는 정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었구나.
그냥, 어느 인터넷 사이트 댓글에서 본 것처럼 자선사업 하듯 만난 심심풀이용 애인에 불과했구나.
“뭔데? 말해 봐. 뭐든지 해 줄게.”
몇 번이고 사실을 마주하니 이제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예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가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 그거 하나밖에 없어.”
“너…….”
조금 안심한 얼굴을 했던 규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예현을 달래려는 듯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말고, 아니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장소부터 좀 옮기자. 날씨도 추운데 바깥에 오래 서 있으니까 괜히 더 기분 안 좋아지는 것 같아.”
내 기분이 안 좋은 건 날씨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너 때문이야. 예현이 말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저녁 시간인데,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너 뭐 좋아했었지?”
하는 꼴을 보니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 같지만, 예현은 가끔씩 규진이 비싼 밥을 사려고 하는 것도 미안하게 느껴져서 직접 해 먹는 게 좋다는 핑계로 규진의 집에서 요리를 해 주곤 했었다.
밖에서 먹는 걸 꺼렸으니 아마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가물가물할 텐데. 예현이 아무 말 없이 규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 압구정에 괜찮은 레스토랑 있는데, 거기 갈까? 저번에 가 봤는데 감바스 맛있더라.”
“하.”
너무나도 당당한 말에 예현이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감바스라, 그게 자신이 아는 요리가 맞다면.
“새우 요리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냥 괜찮았던 기억이 나서…….”
“되게 맛있었나 봐? 좋았겠네.”
예현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학습 능력이 없는 규진이 그 웃음을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했는지 예현을 마주하며 헤실거리며 웃었다.
“너도 한번 먹어 보면…….”
“난 초등학생 때 새우 먹고 쓰러졌던 게 마지막 기억이라 그게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데. 형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되게 맛있긴 한가 봐.”
예현의 말에 규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그냥 관심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거겠지.
“좋겠네. 근데 그건 너 혼자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아.”
“예현아, 그게 아니라……. 실수한 거야.”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실수라니. 규진이 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말고, 네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었더라.”
“됐어. 너랑 마주하고 먹으면 뭘 먹든 다 비슷하겠지.”
예현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차가워질수록 규진은 다급해져 갔다.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은 능력으로 그룹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성 알파라는 형질, 꽤나 반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는 있었다.
다행히 우성 알파 형들을 둔 셋째로 태어나 후계 수업을 받을 필요도 없고, 그저 조용히 살다가 괜찮은 집안의 오메가와 결혼이나 하면 되는 평탄한 인생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서연은 괜찮은 혼처였다. 가문도, 이해관계도, 외관도.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의 오메가를 찾기는 힘들 터였다.
그러니 이런 일로 주서연을 놓칠 수는 없었다. 예현 역시 버리기는 아까운 사람이었지만, 보장된 미래를 버릴 정도로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무릎이라도 꿇을까?”
“네 무릎이 뭐 대단한 거라도 돼? 그런다고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예현이 고개 숙인 규진을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예현아. 내가 너한테 정말 잘못한 거 알아…….”
규진이 예현의 손을 잡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네 연애 응원할게. 네가 말하는 대로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너도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고 딱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웃기고 있네. 예현이 눈가를 찌푸리고 규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게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면 그렇게 할게. 그냥 멀리서 너 응원하기만 할게.”
아직도 자기가 비련의 영화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은 태도가 꼴 보기 싫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규진이 유순한 얼굴을 하고 말을 이어 갔다.
“나라고 네 소식 전해 들을 때마다 마냥 마음 편하지는 않아. 괜히 신경 쓰이고,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잊으려고 노력할게. 네 눈앞에 안 나타날게.”
이 장면만 본다면 누가 이 인간이 바람을 피우고, 그걸로도 모자라 뻔뻔하게 기대했냐는 말 따위를 했다고 생각할까. 예현이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우리가 세기의 사랑이라도 한 줄 알겠네. 예현이 잡힌 손을 빼내려 애를 썼다. 그렇지만 유순한 얼굴과 달리 손에 들어간 힘은 조금도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주라. 서연이 만나서 이야기 잠깐만 해 줘. 그럼 진짜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역겨워. 예현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규진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규진은 아닌 것 같지만 예현은 그를 꽤 잘 알았다. 콩깍지가 쓰이기라도 했던 건지, 이렇게 구제 불능인 인간이라는 건 몰랐지만 그래도 좋아했던 만큼 많이 봐 왔기에 규진을 잘 알았다.
계속 거절해 봤자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는 꺼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은 못 해. 그래도 괜찮다면 한 번 정도는 만나서 이야기해 볼게.”
“정말?”
규진이 고개를 팍 들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너랑 만나고 싶지도 않고, 다시 만날 일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괜찮으면…….”
“괜찮아. 예현아, 진짜 고마워. 너라면 역시 그렇게 해 줄 줄 알았어.”
사실 이미 서연에게 했던 말이라 저 말이 그렇게 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예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 손 놔.”
예현의 말에 규진이 그제서야 예현의 손을 놓아주었다. 큰 손이 사라지자 처음 잡혔던 손목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내가 먼저 연락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주서연 씨한테 내 번호 알려 주든가. 알아서 해.”
“알겠어.”
규진이 고개를 붕붕거리며 대답했다. 예현이 그런 규진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그럼 이제 가도 괜찮지? 약속 지켜.”
“무슨 약……. 아.”
무슨 약속이냐고 되물으려던 규진이 뒤늦게 예현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이제 네 눈에 안 띌게. 연락하는 일도 없을 거야.”
“그래.”
이제 이 악연은 정말 끝이다. 더는 볼 일도, 소식 들을 일도 없기를 바라며 예현이 돌아섰다.
“그래도, 언제나 응원할게. 잘 지내.”
끝까지 착한 척은. 예현이 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대로로 나와 택시를 탄 예현이 오래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했다. 당장 집에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