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4화 (4/15)

계약연애의 정석 2권

#4

이 사람도 여기 입주민인가. 예현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고 서연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여기 살거든요.”

썩 달갑지 않은 사이에 운동복 차림으로 피트니스 센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예현의 꼴만 우스웠던 첫 만남에 비해서는 그리 나쁠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그리 부끄러워할 만한 처지도 아니지 않은가?

“……여기 산다고요?”

서연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연은 제 애인의 전 애인인 예현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7년이나 사귄 애인이라니, 혹시 규진이 정에 이끌리기라도 해서 예현을 다시 찾아가기라도 하면?

그런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서연은 이번에도 규진의 지인들을 들들 볶아 예현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다.

그중 하나는 예현의 집안 사정에 대한 것이었다.

‘집이 그리 넉넉하진 않을거야. 거의 지가 가장이지. 학교도, 더 좋은 데 갈 수 있는데 장학금 때문에 거기 간 걸로 알아.’

분명 집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고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파트 입주민만 사용할 수 있는 곳에 드나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 하지 마요. 당신 집 여기 아닌 거 다 알거든요?”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뒷조사라도 했어요?”

예현의 물음에 서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이 이렇게 빤히 보여서야. 예현은 속으로 그런 서연을 비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내가 원래 살던 집은 여기가 아니긴 하죠.”

“그럼 여기 시설은 왜 써요? 여기 입주민 전용……”

“그런데 내 잘난 새 애인이 여기 살거든요.”

예현의 말에 서연의 입이 다물렸다. 애인이라면 배우 강이정을 말하는 건가. 강이정이 여기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긴 했지만 설마.

“……거짓말.”

“내가 왜 그런 걸로 주서연 씨한테 거짓말을 해요.”

예현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당분간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박규진 씨 때문에 자꾸 저한테 관심 가지시는 것 같은데…….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난 내 새 애인이랑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까.”

“…….”

예현의 말에 서연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긴 듯한 기분이 든 예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요. 당신 남자 친구한테 아무 관심 없으니까.”

예현의 쐐기를 박는 말에 서연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둘이 꼭 결혼까지 해요. 남자 친구 단속 잘하고.”

분명 처음 만났던 그날은 끝도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오늘은 이겼다는 생각이 들자 예현의 어깨가 조금 올라갔다.

유치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보니 역시 그 일을 완전히 털어 내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저기, 러닝 머신 안 쓰실 거면 좀 내려와 주시면 안될까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서연을 내려다보고 있자 빈자리를 찾던 입주민 하나가 예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앞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피트니스 센터 한가운데에서 무슨 대화를 한 거람.

예현이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다급히 러닝 머신 위에서 내려왔다.

“……킁.”

서연이 예현의 말에 크게 충격을 받기라도 했는지 코를 훌쩍였다. 기껏해야 20대 중반도 될까 말까 해 보이는데, 내가 너무 유치하게 굴었나.

양심의 가책을 조금 느낀 예현이 서연에게 말했다.

“그쪽은 여러모로 저보다 박규진 씨한테 잘 어울리는 사람 같으니까, 적어도 나처럼 경우 없이 차이지는 않겠죠.”

“…저……도 알거든요?”

그러자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 듯한 서연이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뭐야?”

“저 사람이 울린 거야?”

순식간에 피트니스 센터 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몰렸다.

“진짜…… 질투하거나 그런 거, 훌쩍. 아니라고요.”

예현이 당황한 채로 서연과 주변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울릴 생각도,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구경거리가 될 생각도 없었다.

“저기, 일단 울지 말고…….”

“나는 그냥…….”

“아니,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요.”

서연은 무언가 서러운 것이 많았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고 예현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공격력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예현은 우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해, 일단 서연을 데리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다 커 가지고, 사람들 다 보는 곳에서 우는 건 좀 부끄럽잖아요.”

아차, 무의식적으로 서연을 예서 대하듯 어린애 취급 해 버린 예현이 멈칫하며 서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서연은 그런 것 따위는 별 상관 없다는 듯 눈물을 겨우겨우 삼키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서연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결국 예현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한가운데 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단단히 해 주고 나서야 헬스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망 안 간다고 했잖아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예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서연을 보며 말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나오자마자 예현을 발견했던 탓에 눈물은 흘렸을지언정 땀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서연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쪽도, 저도. 우리가 서로를 믿고 말고 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서연이 여태 했던 말 중 가장 그럴듯한 말이었다. 예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전 그쪽한테 악감정 없어요. 난 이미 잘난 새 애인도 사귀었고, 내가 그쪽한테 화를 낼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왜, 혹시 애인 있는 줄 알면서 만나기라도 한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서연이 발끈하며 말했다.

“그럼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네요. 전 그쪽한테도, 박규진한테도 아무 관심 없거든요.”

아무리 어려도 설마 성인도 안 된 사람을 규진의 약혼녀로 세웠을 리는 없으니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닐 텐데, 예서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느껴질 만큼 어린애 같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져 서연을 미워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박규진이 내 존재조차 숨기고 만난 것 같은데, 그럼 이쪽도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쪽이 여기 사는 거, 정말 몰랐어요. 그냥 이정이……가 아파트 시설도 좀 써 보라고 해서 와 본 것뿐이었는데. 음……. 계속 마주쳐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으니 다음부턴 그냥 안 오죠. 뭐.”

어차피 할 줄 아는 거라곤 러닝 머신 뛰는 것밖에 없기도 하고. 예현이 전혀 아쉽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 산다고 그렇게 자주 마주치는 것도 아닐 테니, 그 정도면 괜찮겠죠.”

예현이 나름대로의 배려를 베풀며 말했다.

마주쳐서 좋을 일도 없으니,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본인도 굳이 엮이고 싶어 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서려는 순간, 서연이 예현을 붙잡았다.

“……저는 할 이야기 있어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뭔데요. 빨리 하고 끝내 줬으면 좋겠는데요.”

“……규진 오빠 어떤 사람이에요?”

서연의 질문에 예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이유가 뭐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건 본인이 직접 겪어 보면서 알아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안 좋게 헤어진 애인 입에서 나올 말이 칭찬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나한테는 잘해 주지만, 그렇지만…….”

서연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쪽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서연은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타인의 악의라고는 느껴 본 적이 없고 그저 재벌가의 사랑받는 우성 오메가 막내딸로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

규진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규진에게 7년이나 사귄 애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로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

처음엔 지금 규진의 애인은 나니까, 내가 더 좋은 사람이니까 나를 만났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옛 애인이 너무 궁금했고, 결국 다소 좋지 못한 방법을 동원해 예현을 만났지만 그는 상상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그냥 나쁜 사람, 혹은 한심한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예현은 화가 난 얼굴을 하고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열성에, 평균보다 떨어지는 집에서 자라고도 재벌가의 일원인 규진을 만났다기에 욕심 많고 주제 모르는 안하무인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예현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할수록, 규진에 대해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게에 서연은 나름대로 용기를 내 예현을 붙잡은 것이었다.

“저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몰라, 사랑싸움인가.”

서연이 나름대로의 사고를 거쳐 예현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서연을 보며 예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근데 여기서는 말고.”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사람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예현이 포기하듯 말했다.

“여기 입주민 카페 있어요.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서연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다행이다, 하는 표정이 얼굴 가득 떠오른 상태였다.

머리가 지끈거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예현이 가만히 물었다.

“근데, 그쪽 몇 살이에요?”

아무리 사랑받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고 해도 하는 행동이 지나치게 어른스럽지 못했다. 약혼 이야기까지 주고받는 거면 그렇게까지 어리진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자랐길래 이렇게 어린애 같지.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저요? 저 스물셋이요. 아, 근데 빠른이라 사실상 스물네 살이에요.”

“……스물셋?”

박규진, 진짜 미쳤구나.

빠른이라고 해 봤자 이제 겨우 1년의 첫 달. 스물셋인지 스물넷인지를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시기였다.

6살이나 어린 여자를, 결혼 상대로 만난다고.

“대학 졸업은 했어요?”

“곧 졸업하죠. 졸업하면 정식으로 약혼식 하기로 했는데…….”

서연이 커플링이 분명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집안 어른들 소개로 만난 사이지만……. 그래도 나한테 잘해 주고, 예쁘다고 말해 주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리 말하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박규진 이야기는 하나같이 욕일 거예요. 어차피 계속 사귈 거면 무시하는 게 나을……”

“근데 그쪽도 좋은 사람 같아서 이상하다고요.”

서연이 예현의 말을 잘라 버리며 말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니, 역시 이상한 여자야.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해요.”

예현이 한숨을 쉬며 서연의 손을 떼어 냈다.

그로부터 잠시 후, 둘은 커피가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퍽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미리 말하는데, 난 박규진 씨한테 그닥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한테서 그 사람에 대한 정보 같은 걸 기대하는 건……”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언제 눈물을 보였냐는 듯 말끔한 얼굴을 한 서연이 말했다.

“우, 우선 저번에 다짜고짜 화낸 건 사과할게요. 그때는 그냥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 좀 궁금해서 그랬던 것뿐이었어요.”

“박규진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나름 예의를 차리려 드는 서연의 모습을 본 예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람. 박규진 새 애인이랑 얘기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여기서 완전히 끝을 내야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예현이었다.

“물어봤죠. 근데 그냥…….”

서연이 예현의 눈치를 살폈다. 뭐, 그다지 좋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겠지.

예현은 뻔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말해요. 어차피 박규진 씨가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좋다고 쫓아다니는 귀찮은 애였다, 질리는 애였다, 별 볼 일 없는 애였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끝난 사이. 그런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현이 여태 생각하고 있던 말들보다 더욱 마음을 후벼파는 말이었다.

“…불쌍한 사람이라고…….”

차라리 별 같잖은 사람이었다고, 주제도 모르고 매달리는 멍청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서연의 입으로 들은 규진이 생각하는 예현은 예상보다 더 초라했다.

예현의 표정이 굳어 버린 것을 본 서연이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냥 대학생 때 잠깐 사귀었던 애인이다. 그런 식으로 말했었어요.”

예현이 기도 안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본인한테는 인생의 4분의 1 가까이 되는 시간이 잠깐인가 보지. 아니,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건가.

“그렇군요. 불쌍한 사람.”

예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끝도 없이 깎아내렸더라면 상황에서 벗어나려 별 추한 짓을 다 하는구나, 하고 마음껏 비웃어 줬을 텐데.

불쌍하다라, 진심이 담긴 것 같은 말에 속이 씁쓸하다 못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연이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며 예현의 눈치를 살폈다. 어떤 이야기든 괜찮다기에 말한 것이었는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럼 저도 박규진 씨가 저한테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하면 되는 건가요?”

예현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휘둘릴 것 없어. 어차피 쓰레기 같은 새끼인 것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예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박규진이 어떤 사람이냐라. 그 이야기를 하려면 7년 전, 예현과 규진이 처음 만났던 대학교 2학년 1학기로 돌아가야 했다.

*****

“이야. 이제 부산 그만 와도 된다! 아직 끝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쉬자고.”

김 감독이 잔을 높게 들고 외쳤다.

내일은 드라마의 마지막 지방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오후에 섭외해 둔 장소에서 짧은 촬영을 마치면 더 이상 부산으로 내려와야 할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 지방 로케인데 오늘 하루 정도는 다 같이 식사나 한번 하자는 감독의 의견에 따라 출연진과 조연출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있었다.

“이제 촬영 반 왔습니다. 아직 갈 길이 꽤 남아 있지만, 지금 해 온 것처럼! 우리 마지막 촬영까지 잘해 봅시다. 푸른 불꽃을 위하여!”

“위하여!”

식당 하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잔을 위로 들어 올리며 김 감독의 건배사에 호응했다.

“우리 해리 씨랑, 이정 씨도 고생이 많아. 특히 이정 씨는 한창 좋을 때일 텐데, 어?”

“계속 못 만나는 것도 아닌걸요. 뭘.”

김 감독의 능글맞은 말에 이정이 생긋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현이 형♡ : 운동하러 왔어 오후 2 : 32]

이정은 예현에게 받은 마지막 문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정은 박규진의 새 약혼녀인 주서연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 그리고 아파트 시설을 종종 이용한다는 사실을 유정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마냥 사랑받고 살아서 그런지 눈치도 없고, 저돌적인 사람이라고 들었으니 자리만 마련해 주면 언제라도 달려가 속을 긁어 놓겠지.

주서연의 그런 행동들은 예현이 이 계약을 좀 더 열정적으로 이행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어차피 주말 지방 촬영도 내일로 끝이잖아요. 앞으로 잘하면 우리 자기도 그런 것 가지고 서운해할 일 없을 거예요.”

“자기라니, 하이고.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김 감독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강 배우 술 좀 하던가?”

“감독님이 주시는 술은 못해도 마셔야죠.”

“에이,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김 감독이 그렇게 말하며 이정의 잔 가득 술을 따라 주었다. 이정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잔을 받쳐 잡았다.

“해리 씨도 한잔?”

“딱 한 잔만 마실게요.”

“그럼 그럼. 억지로는 안 먹인다고.”

김 감독이 해리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고생들 했으니까 많이들 먹고, 내일은 오후 촬영이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잘 마무리하고 돌아갑시다!”

“예에~.”

한껏 들뜬 김 감독이 말했다. 배우들과 조연출들 역시 더 이상 멀리까지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조금 신이 난 것 같아 보였다.

[이제 촬영 끝. 내일 오후 늦게 올라갈 것 같아. 오후 7 : 14]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한창 달아올라 갈 때 즈음, 이정은 예현에게 늦은 답장을 보냈다.

운동하러 간다는 말을 남긴 후 한참 동안이나 답장이 없는 것을 보니 무언가 생각이 필요한 일이 생겼나 보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예현의 축 처진 어깨를 붙잡고 무슨 일 있었냐고 내숭을 떨고 싶어졌다.

그럼 순진한 예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본인도 모르게 자신에게 살짝 기대게 되겠지.

내일 오후 촬영이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잔을 들이켰다.

“애인이 그렇게 좋아? 입이 귀에 걸렸네.”

해리가 그런 이정을 흘깃 보며 말했다.

이정이 이 웃음은 그저 일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해리보다는 그녀의 매니저이자 예현의 대학 동창인 명아 쪽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이정이 해리의 시선을 미묘하게 피하며 대답했다.

이정은 해리의 어깨 너머를 통해 명아를 슬쩍 바라보았다.

남이 주는 술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은 그녀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 옆의 사람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주량이 아슬해질 정도로 술을 마신 듯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던 이정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럼 진짜 이것까지만…….”

“한 매니저님.”

마지못해 진짜의 진짜의 진짜 마지막 잔을 받아 들고 있던 명아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 찾았거든요. 시간 좀 빌 때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정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강이정 씨한테 뭘 찾아달라고 했더라. 명아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리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한 매니저님 데리고 잠시만 나갔다가 와도 될까요?”

이정이 정중하게 말했다.

“잠깐 정도면 괜찮아요.”

그제서야 이정의 의도를 알아챈 명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그게 있었죠.”

너무 마시는 것 같아서 배려해 주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 명아가 맞장구를 치자 옆자리에서 술을 먹이던 사람들이 말했다.

“그래, 뭐. 한 매니저가 우리 허락받고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고.”

“명아 씨, 술 좀 더 시켜 놓을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명아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시끄러운 식당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저, 감사해요.”

“아니에요. 바로 뒷 테이블에서 곤란스러워하고 계신데 그냥 지나치기가 좀 그래서요.”

역시 강이정, 인성도 연기도 탑이라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명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이 캐치한 대로 명아는 이미 주량을 아슬아슬하게 겉돌 정도로 술을 마신 상태였다. 조금만 더 마셨으면 사람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을지도. 명아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슬슬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거절을 잘 못 해서…….”

명아가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려 애를 쓰며 말했다.

“우리 형 친구분이시기도 한데, 잘 챙겨 드려야죠.”

“아, 친구라고 하기는 좀…….”

이정의 말에 명아가 곤란한 표정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맨정신일 때보다는 확실히 조금 경계가 풀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팀플 몇 번 같이 한 동기 정도예요.”

선을 긋는 말투였으나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오히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선을 그으려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정이 그런 명아를 보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신기해요. 부럽기도 하고.”

“뭐가요?”

“제가 모르는 형의 모습을 알고 계시는 거잖아요. 대학생 예현이 형이라, 분명 귀여웠을 텐데.”

이정이 자연스레 예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명아가 붉어진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엽다라……. 생긴 건 그렇죠. 근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이정이 되물었다. 명아는 취기가 올라서인지, 이정의 행동에 고마움을 느껴서인지 평소보다 조금 느슨한 상태였다.

“진지하게, 예의상 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하던데요.”

명아의 말에 이정이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하며 고개를 내젓는 예현의 모습을 상상했다.

“풋.”

어쩐지 너무 상상이 잘 가서,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래서 앞에서는 얘기 못 하고, 몰래몰래 얘기했어야만 했었죠.”

“대학생 때부터 인기가 많았나 봐요.”

“자기만 모르게 인기가 많았었죠. 그래서 규진 오빠랑 사귄다는 얘기 들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규진의 이야기를 꺼낸 명아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애인은 저고,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이건데, 벌써부터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면 안 되지. 이정이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며 말했다.

“그런가요…….”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그래도, 하고 입을 다물었을 명아였다. 그러나 이미 주량을 넘실거릴 정도로 들어간 술 때문인지 판단력이 조금 흐려졌다.

“오히려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했었는지 알면 저도 좀 더 예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딱히 배울 만한 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명아가 여태껏 했던 말 중 가장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오죽하면 우성 알파의 수치라고 불릴까. 이정은 규진에 대한 것을 대충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왜요?”

“사실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애가 대체 왜 규진 오빠 같은 사람이랑 사귀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일에서는 그렇게 똑 부러지면서 왜 연애에 있어서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았던 건지…….”

명아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친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 같았다.

아마 규진과의 연애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가 다투기라도 했었나 보지.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는 이제 대학생 때 있었던 일은 잘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이제라도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명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 둘은 대학 시절부터 영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다.

예현이 대체 왜 규진을 좋아했는지, 예현과의 관계가 틀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궁금증이 일어날 정도로.

*****

“이번에도 걔가 수석이라며?”

“뭐, 신예현?”

“어. 걔는 어차피 전장인 거 좀 살살 해 주면 안 된다냐?”

학생들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부럽네. 나도 전장 한 번이라도 받아 보고 싶다.”

“그렇게 치면 부러운 사람 하나 더 있지 않냐?”

남학생 하나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두 사람은 A대학 경영학과의 유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그 형이랑 조별과제 좀 해 보고 싶어. 완전 개이득 아니냐?”

“그러니까. 어차피 자기는 해 봤자 큰 도움 안 된다고, 자료조사 대신 식사에, 스터디룸 대실비에 완전 풀코스로 챙겨 준다며?”

학과의 유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예현과 규진이었다.

수석으로 입학, 쉴 시간 없이 과외를 뛰면서도 전 과목 A+를 놓치지 않는 예현. 그리고 학교 체육관 보수 공사를 해 주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한 박규진.

상반된 이미지의 두 사람은 심심찮게 학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근데 이번에 그 둘이 같이 조별과제 하던데, 랜덤 배정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걸렸더라.”

“진짜? 야, 그 조 배정된 애들은 로또 맞은 거 아니냐? 규진 형 풀코스에, 신예현 자기 학점 깎이는 거 존나 싫어해서 지가 거의 다하잖아.”

“어. 개부럽더라. 내 조원은 그날 학교도 안 왔던데……. 감이 안 좋아. 씨발.”

명아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뒤에서 묵묵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앞 시간이 일찍 끝나서 벤치에서 시간 좀 때우려고 했을 뿐인데, 본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니 약간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경영 신예현 : 저희 발표 4월 10일이요.]

명아가 핸드폰을 들어 단톡을 확인했다. 남자들이 말하던 ‘로또 맞은 조원’은 바로 자신이었다.

과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랑 함께하는 과제라니.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그 조별과제는 여러 가지 의미로 대학 생활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다.

*****

[경영 신예현 : 저 시간 없는데요. 그 때 과외 수업 있어요.]

[경영 박규진 : 그러지말고^^]

[경영 박규진 : 고마워서 그러지. 예쁜 후배한테 밥 한번 사주고 싶을 수도 있는 거잖아.]

[경영 박규진 : 그럼 점심은 어때?]

명아가 묘하게 날 선 단톡방의 대화 내역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문대로, 예현은 대부분의 자료조사와 피피티 제작까지 맡았고, 무작위 질문을 대비해 기출 질문지까지 만들어 조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발표까지 예현이 하기로 한 덕에 떠먹여 주는 것만 처리하면 되는 로또 중의 로또 과제라고 생각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분위기가 어그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안하잖아.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빚이라고 생각 안 할 테니까 신경 끄시라고요.’

그리고 규진 역시 소문대로 과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다른 쪽으로는 도움이 되었다.

허울뿐인 역할 분담을 위해 만났던 카페에서의 음료비도, 예현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먹었던 저녁값도.

모두 당연하다는 듯 규진이 결제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일을 하는 예현은 규진의 그런 호의를 달갑지 않아 했었다.

‘과외 있어서요.’

‘동생이 어려서, 집에 일찍 가 봐야 해요.’

‘과제 하느라 바빠서요.’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모든 제안을 거절한 예현을 보며 이상한 오기가 들기라도 한 건지, 규진은 포기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베푸려 하고 있었다.

망한 조별과제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긴 하지만……. 명아는 미묘하게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숨을 쉬며 단톡방을 바라보았다.

[경영 한채혁 : 전 언제든지 시간 괜찮습니다 형님]

[경영 주천희 : 저도 수욜만 빼고 괜찮아요 ㅎㅎ]

[경영 박규진 : 그럼 명아랑 예현이는?]

아차, 단톡방을 열어 두고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에 이야기가 진행되어 버렸다.

이걸 간다고 해, 말아. 잠시 고민하던 사이 화면이 꺼졌다.

지이잉-

[경영 신예현 : 새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명아의 고민이 이어지는 동안, 검은 화면이 밝아지며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경영 신예현 : 화요일 말고 다른 날은 어려워요. 한 번이면 되죠?]

명아가 눈을 부빗거리며 화면을 확인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무슨 변덕이지.

[경영 박규진 : 진짜? 와. 드디어 예현이랑 밥 한 번 같이 먹어보네. 신난다.]

[경영 박규진 : 명아야 너는? ^^]

그러느라 단톡방의 숫자가 모두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던 명아가 뒤늦게 단톡방에 답장을 남겼다.

[화요일 점심시간 괜찮아요.]

[경영 박규진 :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 보자^^]

며칠 내내 맴돌던 싸늘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잡혀 버린 약속에 명아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말풍선을 바라보았다.

*****

“와, 진짜 여기 괜찮아요?”

그렇게 화요일, 어색하디 어색한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당연하지. 난 하는 것도 없는데 다들 고생하고 있잖아.”

“와, 자학 쩔었다.”

조원들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 안으로 선뜻 들어가지 못하자 규진이 앞장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진짜 괜찮아요? 여기 엄청 비쌀 것 같은데…….”

“나 체육관 보수 공사 해 주고 들어온 사람이야. 뭘 이런 것 가지고.”

규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놀란 것은 오히려 규진을 제외한 다른 조원들이었다.

“어…….”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5명의 조원들이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규진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뻘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원들을 발견했다.

“뭐야. 진짜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별로 쪽팔린 것도 아니고. 니들은 공부 잘해서 온 것처럼 난 다른 게 특출나서 온 거지.”

규진은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뭐, 당사자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조원들이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와, 벌써 발표가 다음 주네.”

“끝나자마자 바로 시험 기간인 거 알죠? 우리 이제 다 죽었어요.”

조원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예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기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이런 자리, 이런 장소가 퍽 낯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닌 거 같지. 명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예현을 흘깃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도 수석은 예현이가 하려나?”

채혁의 말에 예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

“아, 그…… 다른 게 아니라, 네가 입학 때부터 1학년 내내 수석이었으니까.”

말을 꺼낸 본인 역시 괜히 말했나, 하고 어색하게 뒷말을 덧붙이는데 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예현이가 수석이야?”

“……네.”

예현이 고개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대단하네. 난 재수하고도 겨우겨우 들어왔는데.”

“예현이가 수석인 거 유명한데, 모르셨던 게 더 신기하네요.”

천희가 눈치 없이 웃으며 말했다.

“수석이면 B대나 C대도 가능했던 거 아냐?”

규진이 대단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

그러자 예현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의도적으로 규진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규진이 아니었다. 그는 예현에 대한 것이 궁금하다는 듯 끈질기게 질문을 이어 갔다.

“대단하다. 공부 되게 잘하나 봐. 부럽다.”

예현이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렀다.

애초에 오늘 나온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밥 한 번이라도 먹어 주면 나가떨어지겠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발표가 끝나면 시험 기간인데, 내내 귀찮게 굴기라도 할까 봐 대충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으로 나온 건데 계속 제게만 말을 거는 꼴이라니. 귀찮았다.

“부러울 것도 없어요.”

게다가 예현은 규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규진의 말대로 예현은 A대보다 명문인 B대도, 국내 최고의 명문대라고 불리는 C대도 갈 수 있었다. 합격 통보를 받았던 날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A대로 진학한 것은 A대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B대나 C대에서는 장학금을 주지 않거나 첫 학기만 장학금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원서를 넣을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있었다. 그저 공부에 집중하고, 학교에 들어가면 과외를 하거나 알바를 하면서 근근이 용돈이나 보탤 생각이었다.

그런데 합격 통보가 나기 전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20살이 되자마자 8살짜리 여동생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B대나 C대에서도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혹시라도 일이 생겨서 장학금을 놓치기라도 하면?

8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데는 분명 많은 돈이 필요할 터, 한 번이라도 몇백 단위의 지출이 생긴다면 큰 부담일 것이다.

거기다가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하지 못한다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돈을 벌기도 힘들 텐데, 그런 위험 부담을 껴안기에는 욕심보다 현실이 더 중요했다.

“등록금 내 줄 사람은 없고, 책임져야 할 동생은 있어서 등록금 부담이라도 없는 곳으로 온 것뿐이에요.”

예현의 말에 나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이제 더 귀찮게 굴지는 않겠지. 예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규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누구는 그런 이유로 왔는데, 누구는 없는 전형을 만들어서 들어오고는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뻔뻔한 꼴이라니.

친한 관계로 지내면 무언가 떨어질 거라고 저렇게 아부를 떠나 본데, 예현은 그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예현의 의도대로 명아와 채혁, 천희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사람 만나 봤자 돈만 나가지, 동기들과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할 생각조차 없었던 예현은 전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생이 많이 어려?”

그러나 정작 떨어트리려 했던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이건 뭐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12살 차이 나요.”

얼떨결에 대답을 해 버린 예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왜요, 불쌍해 보이기라도 해요?”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우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멍청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겠지. 예현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아무튼, 저 바쁘니까 앞으로는 이런 불편한 자리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전 형이랑 다르게 졸업하자마자 좋은 곳 취직해야만 먹고 살 수가 있어서, 성적 유지 해야 하거든요.”

규진의 멀뚱한 얼굴에 빈정이 상한 예현이 말했다.

‘공짜 밥이고 뭐고 그냥 학식이나 먹을걸…….’

‘분위기 진짜 망했네…….’

조원들마저 불편한 분위기에 기가 눌려 갈 때쯤 규진이 입을 열었다.

“불쌍하긴 왜 불쌍해, 멋있는데?”

“……?”

규진은 전혀 기분이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인데 동생도 돌보고, 돈도 벌고, 그러면서 수석까지 유지하는 거잖아. 멋있는데?”

규진이 꿍꿍이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예현을 칭찬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쩔 줄을 몰라 하거나, 동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볼 뿐이었는데.

멋있다니. 예현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규진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멋있는 사람이어야 수석 하는 거구나.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었네.”

규진이 티 없이 맑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그냥 해야 할 일이라서 하는 건데요. 뭘.”

이게 뭐야,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날 세운 나만 바보 같잖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더 이상 방금 전과 같은 거슬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때는 눈치는 없지만 사람은 좋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본인이 그런 말을 했는지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렸을 인간인데.”

과거를 회상하던 명아가 바다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한마디로 경계를 풀다니, 어지간히도 기댈 곳이 필요했었나 보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럼 이번에는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서럽게도 울길래 무슨 세기의 사랑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어서 다행인가.

“박규진은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도 못 됐어요. 대체 왜…….”

“아, 여기 계셨네요.”

명아가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는 순간 누군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말을 끊었다. 촬영팀 막내였다.

“앗. 보람 씨.”

“감독님께서 이정 씨 찾으세요. 내일 촬영 관련해서 할 얘기 미리 다 하고 주무시러 간다고…….”

하여튼 도움이 안 된다. 예현의 대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정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바로 가 볼게요. 날씨도 추운데, 괜히 고생시켜 드린 거 아닌가 싶네요.”

“아, 아니에요. 그 정도 가지고…….”

보람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네요. 한 매니저님도 같이 들어가실 거죠?”

“아, 네. 들어가야죠.”

명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 들었으면 다른 이야기는 굳이 더 듣지 않아도 괜찮겠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새하얀 입김이 추운 겨울 공기 속에 흩어졌다.

*****

“예현 씨, 무슨 일 있어?”

“……네?”

이 대리가 예현을 보며 묻자 예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작년 수치랑 재작년 수치랑 거꾸로 입력해 놨던데.”

“아…….”

예현이 이 대리가 내민 서류를 보고 작게 탄식했다. 그녀의 말대로 예현이 오전 내내 붙잡고 처리한 서류는 엉망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이건 뭐 급한 것도 아니라 괜찮긴 한데. 원래 이런 실수 잘 안 하잖아? 표정도 안 좋고.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 아냐?”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마 어제 하루 종일 잠을 설쳐서일 것이었다.

불쌍한 사람. 예현이 예상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가슴을 찌르는 비수 같았던 말은 해가 저물고 날짜가 바뀌도록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예현은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 봤자 눈 밑을 가득 채운 다크서클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예현 씨,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옆을 지나가던 서 주임이 그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멈추어 섰다. 그녀는 이 대리가 들고 있는 서류와 예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어머, 잠 못 자기라도 했어요? 되게 피곤해 보이는데. 커피라도 한잔 가져다 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까 마셔서…….”

“뭐? 신 사원 얼굴이 안 좋다고?”

그때 작은 소란을 눈치챈 김 과장이 유난스러운 목소리로 예현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얼굴이 왜 그래? 주말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을 보였다고. 예현은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의례적으로 괜찮다고 답하려 했다.

“애인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그러나 역시 김 과장의 걱정은 평범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걱정을 빙자한 말을 하며 예현에게로 다가왔다.

“어? 그런 거야?”

마치 두 사람이 싸우기를 바라기라도 했다는 것 같은 얼굴에 예현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아니, 주말 다 지났는데 피곤할 게 뭐가 있어.”

김 과장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서 주임 역시 어머, 어머거리며 예현의 곁을 알짱거렸다.

“어머, 내가 너무 눈치 없었나? 미안해요.”

“아닙니다. 정말 싸운 거 아니에요. 이정이랑은 사이좋아요.”

예현이 이를 악물고 웃었다.

“한창 좋을 땐데 얼굴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세상 근심 걱정은 다 짊어진 표정인데.”

김 과장이 위하는 척을 하며 말했다.

그래, 한창 좋을 때여야 하지. 대외적으로는.

쓰레기 같은 전 애인과 헤어지고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남자와 사귀는데, 겨우 그런 말 한마디로 이렇게 멍청하게 굴 필요가 뭐가 있어.

예현이 온 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애인하고의 관계는 정말 좋아요. 너무 좋아서 문제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고 했다. 이런 모습을 남들이 보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박규진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럼 내가 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잖아.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좋을 때잖아요. 잠을 조금 못 자서요.”

“어, 어……?”

예상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김 과장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업무에는 영향 가지 않게 해야 하는데.”

“어, 아니……. 뭐. 조금만 더 신경 써 줘.”

“네. 대리님. 엑셀 다시 작업해 놓을게요.”

예현이 씩씩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할 말을 잃은 김 과장이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뭐. 그래……. 그럼 다행이지.”

아무리 몰상식한 인간이어도, 오전부터 회사에서 남의 애인과의 성생활까지 물어볼 만한 깜냥은 안 되었는지 김 과장이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

“좋겠다…….”

서 주임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사소한 소란이 끝이 났다.

*****

[“그래서, 그러니까 뭐래요?”]

“뭐라고 하긴. 아무 말도 안 하지.”

예현은 점심시간, 이제는 익숙해진 이정과의 통화를 하며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리 자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정은 뭉뚱그려진 설명만으로도 예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어. 아니,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러게. 어째 들리는 이야기마다 다 무례한 이야기밖에 없네.”]

이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이정뿐, 예현은 어느새 이정에게 마음을 꽤나 연 상태였다.

[“그런데.”]

예현이 이야기를 끝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이정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잠은 왜 못 잤어? 방이 불편했어?”]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예현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를 하고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예서 때문에 그래?”]

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정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정이 진짜 현재의 애인인 것도 아니었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부끄러웠다.

첫 만남도, 그리고 이 계약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도.

두 번이나 우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망할 전 애인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하다는 이야기를 굳이 해야만 할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핸드폰 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가서.”

예현이 별 신빙성 없는 핑계를 대며 말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로 믿어지지 않는 이유였지만, 이정은 예현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아는지 더 이상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럼 피곤하겠네.”]

“아냐. 짜증 나서 잠 오던 것도 다 깼는데 뭘.”

예현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내내 착잡한 기분이었는데, 정작 달갑지 않은 소리를 듣고 나니 정신이 훅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좋을 때, 그래.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게다가 남몰래 약혼녀까지 만들어 놨던 박규진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인생에서 가장 좋을 때가 맞지.

귀찮은 일이 생기긴 했지만 이정의 집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고, 반년 치 연봉에 달하는 돈도 받았다.

그런데 겨우 그런 말 한마디 들었다고 이렇게 축 처져 있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잠도 다 깨고, 정신도 확 들었어. 김 과장 개소리가 도움이 되는 날도 있네.”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도 아직 퇴근하려면 좀 남았는데, 올 수 있겠어?”]

이정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스토커 때문에 택시로 출퇴근을 하고 있는 예현이었다. 확실히 퇴근 시간이 되면 피곤해지기는 하겠지만, 재련의 카드로 택시를 타고 돌아갈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택시 타고 가는걸.”

[“그래도……. 그 시간에 택시도 잘 안 잡히지 않아?”]

“괜찮아. 길어 봤자 10분이면 충분히 잡힐걸.”

예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점심시간 거의 끝났네.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그래? 나 오늘 형 퇴근할 때쯤 서울 도착할 거 같아.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겠다.”]

그럼 미리 도착해서 저녁을 해 놔야겠군.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대리가…….”

“아하하. 이 대리님도 참. 엉뚱한 구석이 있으시다니까요.”

아직 전화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바로 옆 골목에서 팀원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 과장 역시 함께 걸어오는 것을 본 예현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자기, 저녁 때 봐.”

예현이 팀원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시선은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거리가 가까우니 충분히 들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하하. 그래, 자기. 나중에 봐.”]

대충 상황을 눈치챈 이정이 웃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은 예현이 팀원들을 이제 봤다는 듯 놀란 표정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 식사하고 오시나 봐요.”

“예현 씨, 애인이랑 너무 사이좋은 거 아냐?”

서 주임이 너스레를 떨며 예현을 치켜세웠다. 예현은 쑥스러운 척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주말에 지방 촬영 내려가서 제대로 못 봤거든요. 그래서 더 그런가 봐요.”

“좋겠네~.”

아주 잘 살고 있으니까, 괜한 오해 같은 거 안 해 줬으면 좋겠네요.

예현은 그런 마음을 담아 김 과장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

“퇴근이다~.”

“예현 씨는 좋겠다. 집에 가면 잘생긴 애인이 기다리고 있고.”

“서 주임도 남자친구 있으면서.”

박 대리가 서 주임을 놀리듯 말하면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서 주임 역시 저게……. 하는 눈으로 박 대리를 노려보다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예현은 사무실에 혼자 남아 마지막으로 파일을 확인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어서 집에 가야지.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오게 된 예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으로는 뭘 하지. 가면서 장을 좀 봐 갈까. 뭐가 무난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는데, 누군가 예현을 붙잡았다.

“예현아.”

“…….”

예현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표정을 굳혔다.

“우리 얘기 좀 하자.”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치우려 안간힘을 썼던 옛 연인이 예현의 눈앞에 서 있었다.

*****

“오빠. 내 얘기 듣고 있긴 해?”

“어? 당연히 듣고 있지.”

서연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규진을 불렀다. 멍을 때리던 규진이 뒤늦게 경청하는 척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짜? 그럼 나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어……. 피티 트레이너 바꾼다고 하지 않았나?”

서연이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말은 ‘이제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 못 다니겠어. 아무래도 피티 받으면서 센터 바꿀까 봐.’였다.

“피티 받고 있질 않은데 어떻게 트레이너를 바꿔? 센터 바꿀까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어?”

규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됐어. 오빠 요즘 진짜 이상해.”

서연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규진은 늘 이상했고, 서연이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뿐이었지만 서연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갑자기 센터는 왜? 거기가 관리 잘되고 좋다며.”

“그거야…….”

근데 내가 이 이야기를 규진 오빠한테 했던가? 아니, 해도 되나?

말을 하려던 서연이 입을 다물자 그 모습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 규진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뭐,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만나기라도 했어?”

뒷걸음질 치다 얻어 걸린 규진의 말에 서연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규진이 얼떨결에 대답을 해 버린 서연을 보고 말했다.

“바꾸고 싶으면 바꿔도 좋지만, 거기가 다니기도 편하고 좋다며. 그냥 없는 사람 취급 하고 다니면 안 돼?”

“내가 싫다는데도?”

“아니, 정 싫으면 바꿔야지…….”

서연이 눈을 세모나게 뜨고 말하자 규진이 꼬리를 말았다.

‘피차 어색할 테니까, 그냥 앞으로 내가 여기 안 올게요. 그게 낫겠죠? 마음 편하게 운동하러 와요.’

어째 애인보다 애인의 전 애인이 자신을 더 배려해 주는 것 같은데, 이게 맞는 걸까.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빠보단 차라리 신예현 씨가 나한테 더 신경 써 주는 것 같네.”

“뭐?”

서연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신예현’이라는 이름 하나만큼은 제대로 알아들은 규진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말했다.

“거기서 만난 게 예현이야?”

규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서 뭐 하게.”

서연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나 규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걔가 거기 살 리가 없는데, 아. 설마 강이정이 거기 사나? 근데 아무리 그래도…….”

“오빠.”

서연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지금 내 앞에서, 전 애인 얘기 하는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면 지금 당장 만나러 가. 이러고 있지 말고.”

“아니, 서연아 그런 게 아니고……. 알잖아.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나한테 너 말고 누가 있어? 말했잖아. 걔는 그냥 불쌍한 애라서 마음이 갔던 것뿐이라고.”

뒤늦게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서연을 달래려 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서연은 규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그 사람 말이 맞았어. 오빠만 그 사람한테 관심 있는 거네.”

“……너 걔랑 따로 만났어?”

규진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아차, 비밀로 하려고 했었는데. 됐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서연이 규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만났어. 오빠가 하도 별거 아니란 사람이라기에, 별거 없는데 어떻게 7년이나 사귀었나 싶어서 만났다.”

“7년…….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규진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내 화를 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얼굴을 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걔는 당연히…….”

“그래, 그 사람도 그러더라. 오빠가 자기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다고.”

서연이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현이 규진의 말대로 불쌍하고 모자란 사람에 불과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서연보다 훨씬 어른 같은 모습에 부끄러워진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렇게 화내지 말고……. 무슨 이야기 했어?”

규진이 서연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번호를 차단하고 매몰차게 떠나 버린 예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종종 궁금했다.

아무리 그래도 7년을 사귀었는데, 생각 정도는 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예현이가 더 이상하지.

나 없이는 못 살 거면서,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무시하고 갈 수가 있어.

잊혀질만 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규진이었다.

“걔가 내 얘기 해?”

“관심 없으니까 제발 얘기하지 말아 달라던데.”

서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규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애써 웃었다.

“그래. 나도 걔 얘기 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야. 서연아. 네가 불안해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규진이 서연을 살살 구슬렸다.

“얼굴은 좀 반반하지. 근데 걔 열성이야. 그리고 우성이었어도, 그런 애랑 우리 같은 사람이랑 급이 맞아? 아니잖아.”

“그래도, 7년이나 사귀었다며? 좋으니까 사귀었을 거 아냐?”

“그냥, 익숙해져서 그런 거였지. 어차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어.”

규진이 서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응? 기분 풀어.”

“……알았어.”

“센터는 바꾸자. 나랑 같이 운동할까? 너한테 좀 멀긴 하겠지만……. 그래도 같이 하면 좋잖아.”

“생각해 볼게.”

규진의 부정에 마음이 조금 풀린 서연이 토라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단순해서 편하다니까. 규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늘 약속 있다고 했지? 태워 줄까?”

“……그래 주면 좋지.”

예현의 퇴근 시간이 그쯤이었지. 역시 이대로 끝내기엔 조금 찜찜한데, 회사 앞에서 잠깐 기다리기라도 해 볼까.

겉으로만 툴툴거리지, 걘 나 없이 못 살아. 지금도 내가 나타나 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규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서연과 눈을 마주하고 웃었다.

*****

“놔.”

예현이 규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을 찌푸리고 팔을 뿌리쳐 냈다. 더러운 것이 몸에 닿기라도 했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팔을 툭툭 털어 낸 예현이 말했다.

“여긴 왜 온 거야? 내가 반겨 주기라도 할 것 같아?”

“말 좀 예쁘게 해. 너 이런 애 아니잖아.”

규진이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자기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잘 알았다고, 예현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사귀는 사람 아닌 사람한텐 이런 사람 맞아. 처음에도 이랬었잖아? 기억력이 모자란 건가……. 벌써 잊어버렸나 봐.”

“그래도, 내가 너한테 다른 사람이랑 똑같은 취급 당할 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저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 자리를 발로 차고 가 버린 게 누군데.

예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규진의 말을 받아쳤다.

“왜 아닌데? 헤어지자는 말이라도 하든가, 속이고 다른 사람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했을 거 아냐. 아니면 그 정도도 예상 못 할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

규진이 예현의 처음 보는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 말을 잃었다.

“나 불쌍하다며, 불쌍해서 계속 만나 준 거면 그딴 동정 필요 없고 더 이상 원망도 안 할 테니까 신경 끄고 새 애인한테나 잘하지 그래.”

“너 왜 이래?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아무리 그 일이 충격적이었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화내는 건…….”

규진의 말에 예현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 멍청한 인간은 자신이 아직 예현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했잖아. 결혼은 안 되지만 애인으로는 남을 수 있다고. 나라고 마음 편하기만 할 것 같아?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 그렇지만 너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거 아냐?”

“몰랐어. 네가 이렇게까지 제정신 아닌 줄 알았으면 진작 도망쳤을 텐데.”

예현이 규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날이 선 말을 할수록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향해 칼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 숨어 살아야 하는 네 뒷방 애인 같은 건 할 생각 없어. 그리고 이제 네 배우자 자리 같은 것도 안 바래. 너한테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

“예현아…….”

“내 인생에서 꺼져 주는 거.”

예현이 씹어 뱉듯 말했다.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이었다는 게, 그리고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난 할 얘기 다 했어.”

“잠깐만. 난 얘기 다 안 했어. 아무래도 서연이한테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뒤돌아 가려는 순간 규진이 예현을 도로 붙잡았다.

“불쌍하다는 건……. 그건 그냥 처음에 그렇게 느꼈다는 얘기였어.”

결국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맞다는 거네.

예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예현이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유일하게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예현, 그 이름 하나만으로 봐 주는 게 좋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는 게 좋았다.

일찍 철이 들어야 했지만 규진의 앞에서는 가끔 힘들다는 소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투정도 부릴 수 있었기에 그가 특별했고 그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도, 과하게 칭찬하지도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건 그저 착각이었던 거구나.

울적한 기분이 든 예현이 잡힌 손을 뿌리칠 의지조차 잃은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안 돼, 적어도 이 앞에서는 울면 안 돼. 그럼 박규진 때문에 우는 거라고 생각할 거 아냐.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런 예현의 모습을 눈치챈 규진이 이내 예현의 얼굴을 들어 올리려 들었다.

“너 울……”

“실례.”

그때, 누군가 규진의 손에서 예현의 팔목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누구신데 남의 자기한테 함부로 손을 대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향이 예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모자를 눌러쓴 상태였지만 예현은 어렵지 않게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너 뭔데.”

“말했잖아요. 이 사람 애인이라고.”

이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인? 아……. 그 연예인.”

규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규진이라고 예현의 새 애인에 대한 것을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 배우에 EH 그룹의 외손자라던가. 확실히 능력적으로나 집안으로나 찍어 내릴 수는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규진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예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것은 자신이었다.

신예현이 어떤 앤데, 헤어진 지 24시간도 안 돼서 새 애인을 만들었다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분명 둘이 짜고 연극이라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규진이 말했다.

“아하. 애인이시구나. 나랑 헤어지자마자 사귀게 되었다는 그…… 애인.”

넌 내 대체품이야. 규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한쪽으로 끌어 올렸다. 이정은 그 모습을 보며 규진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티 내지 않고 살짝 웃었다.

“네. 잘 알고 계신 것 같으니까 소개는 안 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이정이 한심하다는 표정이 잠시라도 비칠까 모자챙을 눌러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예현은 그런 이정의 가슴팍을 마주한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놀란 탓에 눈물은 쏙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무슨 일로 잘 살고 있는 사람 회사 앞까지 찾아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형은 그쪽이랑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은데요.”

예현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이런 짓 하는 거……. 좀 그렇잖아요. 그것도 길거리에서.”

이정이 주변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이정의 말대로 주변 사람들이 세 사람을 흘깃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에서 언쟁이 조금 더 커지면 흘깃거리는 정도 아니라, 곁으로 다가와 구경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쪽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잠깐만.”

이정이 멍하니 굳어 버린 예현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얌전히 보고만 있을 규진이 아니었다.

“난 그쪽이랑 대화하려고 온 게 아닌데, 당사자 의사도 없이 이딴 식으로 가는 게 예의라고 배웠나 봐.”

규진이 이정이 아닌 예현의 팔을 낚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믿을지 모르겠는데, 난 안 믿어. 7년이나 만났는데 신예현이 나랑 끝낸 지 하루도 안 돼서, 아니.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새 애인을 만들었다는 걸 믿을 것 같아?”

“지금 뭐 하는……”

“강이정 씨가 예현이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신예현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거든요.”

규진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예현은 멍한 머리 위로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날 잘 안다고?”

이정의 품에서 나온 예현이 규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잘 아는데, 내가 널 용서할 거라고 생각해?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냐고.”

네가 나를 잘 안다고, 어떻게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예현이 기도 차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도 그날 전까지는 내가 널 잘 안다고 생각했어.”

“예현아.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진정하고…….”

규진이 어쭙잖게 어른스러운 척을 하며 예현을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예현은 그런 규진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네가 뻔뻔하게 다른 여자 옆에 앉은 채로, 설마 결혼까지 생각했냐는 소리를 하기 전까진 나도 널 잘 안다고 생각했다고.”

예현의 머릿속에 규진과 함께 지냈던 7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름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던 그날들이, 그가 나를 안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네가 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 시간들은 다 착각이었다. 그는 예현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결혼은 무리인, 연애나 하다 헤어지면 그만인 그런 불쌍한 애.

저를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때까지는 나도 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틀렸었잖아.”

“예현아.”

규진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예현의 이름을 불렀다.

한때는 저 얼굴이 정말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현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때나 가끔 화를 낼 때면 규진은 저런 얼굴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규진은 꽤나 자주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아끼던 시계의 유리가 깨졌을 때, 제법 자주 입고 나오던 정장 재킷에 더러운 것이 튀었을 때.

규진 나름대로 아끼던 물건에 흠집이 가거나 당분간 사용하기가 어려워졌을 때, 그는 종종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고, 난 이제라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끝이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난 이해가 안 돼.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여태 예현이 한 말을 듣기는 한 건지, 규진이 멍청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네 이해가 필요해?”

예현이 그런 규진을 비웃으며 말했다.

“너는 나랑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 잘만 만났는데, 나는 헤어지자마자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되냐고.”

어느새 길을 지나가는 사람 몇몇이 발걸음을 멈춘 채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헤어졌겠다. 너보다 어리고, 잘생기고, 잘난 사람 놓치기 아까워서 잡았는데.”

예현이 이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게 네 이해까지나 필요한 일이야?”

이정이 객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누가 봐도 잘난, 무시하기 힘든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하…….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지금 너 정상 아니라고. 대체할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럼 그럴 필요 없이 내가 해 줄 수 있다고 하잖아.”

“대체?”

예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습게도 규진은 진지하게 자신이 아직도 예현에게 애틋한 사랑으로 남아 있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썩은 부품을 갈아치우는 걸 대체라고 하나? 그런 건 교체라고 하는 거야.”

예현이 어느 때보다도 더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이정을 바라보았다. 모자의 캡 아래 어두운 색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안 그래, 정아?”

“그렇지.”

모자 아래 반은 가려진 얼굴이 해사하게 웃음 지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정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모자로 가려지지 않은 턱선과 입술, 그리고 지나가다가도 한 번쯤은 돌아볼 수밖에 없을 만큼 뛰어난 피지컬.

얼굴이 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평범하게 보일 수는 없는 특징들이 있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던 자리를 차 버리고 간 사람이 있다는데……. 그 자리를 비워 두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지.”

예현을 내려다보며 말했지만 분명 규진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정은 결코 규진 쪽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본인의 의사로 헤어진 것도 아닌데, 헤어지자마자 새 애인을 만드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겠어. 애초에 놓아주질 말았어야지.”

이정이 모자 아래로 예현과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예현 역시 세상 행복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형이 그런 사람인 걸 그날 알게 된 게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

예현이 그렇게 말하며 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훨씬 좋은 사람 만나게 됐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네.”

“……너 진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규진이 예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예현은 사람에게 벽을 치는 편이지만 한번 벽 안에 들인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했다.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동기들과 싸운 이후에도 한참이나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분명 이번에도 후회할 것이었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근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할게.”

“……?”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예현이 얼굴을 조금 굳히고 그의 말을 들었다.

“너 분명 멀쩡하게 못 지내. 정말 영영 내 얼굴 안 떠올리고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확신에 찬 말에 예현이 혀를 찼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사랑이 남아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당장 오늘도 그 생각 때문에 밤을 샜다.

저 짜증 나는 얼굴을 떠올리지 않고, 휘둘리지 않게 되는데 3개월이면 충분할까?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때, 이정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헉, 강이정이다.”

“미친, 뭐야?”

사람들이 이정을 향해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머리를 한번 흐트러트렸다가 다시 쓸어 넘기며 잘생긴 얼굴을 드러낼 뿐이었다.

“새로운 얼굴로 잊으면 되니까요. 그럼 하실 얘기 다 하신 것 같으니 이만 가 볼게요. 새 애인으로서,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이정이 다시 모자를 쓰고 예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자.”

그의 말에 예현이 고개를 들어 익숙한 밴을 찾았다. 그래, 표정이 더 일그러지기 전에 가자.

예현이 빠른 걸음으로 밴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이정이 규진을 지나쳐 밴을 향해 갔다.

“진서연 씨한테나 잘하시지. 그분이 들으면 꽤 곤란해지시겠어요.”

“!!”

규진이 놀란 얼굴을 하고 굳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가 몸을 돌렸으나 이미 이정은 빠르게 그를 지나쳐 차의 문을 닫은 후였다.

촬영을 마치고 올라오는 대로 예현을 데리러 온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저 좋은 사람인 척을 하려 했던 것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트렸다.

“……훌쩍.”

차 안에 먼저 올라탔던 예현이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출발하자. 형.”

이정이 그런 예현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으며 주석에게 말했다. 그러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주석이 한숨을 내쉬더니 핸들을 잡았다.

“……그 새끼를 좋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예현이 변명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예현은 더 이상 규진을 사랑하지 않았다. 예현은 카페에서 서연과 규진을 마주했던 그 순간에 이미 꿈에서 깨어났었다.

사랑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질기다는 정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심해.”

예현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말했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콩깍지가 벗겨진다던가. 타인의 눈으로 본 규진이 한심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예현은 스스로가 애처로워졌다.

“멍청해도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여태 내가 좋아하던 건 대체 뭐였던 건지도 모르겠어.”

예현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 내며 말했다.

예현은 자신이 한심했다. 애초에 대인관계에 큰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규진 때문에 스스로 잘라 냈던 몇 안 되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근데 그 오빠……. 좀 그래.’

‘네 애인 뒷담 까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말하는 게 좀…….’

예현은 그때 규진에게 눈이 멀어 있었다. 20살이 되자마자 가장이 되었으므로 예현은 평범한 20살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오늘 편하게 지내겠다고 긴장을 놓았다가는 몇 달 후 예서의 저녁을 굶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고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모두가 그런 그를 동정하거나 대견해했다.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예현은 늘 자신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읽었다.

그러나 규진만이 그런 시선을 하지 않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예현의 사정을 듣고 ‘멋지다.’라고 말해 준 사람도 처음이었다.

‘너에 대해 말하는 게…….’

‘네가 규진이 형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아는데?’

동기들이 규진에 대한 경고를 해 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었지. 걱정해 주는 친구와 대판 싸우고 집에 돌아와 울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날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울었던 날이었다.

화가 나고, 뭘 안다고 저러는 건지 주제넘다고 생각하면서도 친구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는 게 서운했었다.

‘난 괜찮았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었어. 진짜.’

규진이 괜찮다는 말을 했을 때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더 분한 건 뭔지 알아?”

예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저 새끼 말대로야. 그 짜증 나는 얼굴이 쉽게 잊혀질 것 같지가 않아. 언젠간 괜찮아지겠지. 근데 그게 언제일까?”

분명 언젠가는 잊히겠지. 그러나 지금으로선 아무 기약이 없었다.

“3달 후엔 완벽하게 잊을까? 아니, 어차피 3달 후면 우리가 끝났다는 기사가 나갈 텐데. 그때 다시 연락이 오기라도 하면?”

예현이 떠올리기 싫은 상황을 가정하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비웃으면, 그 얼굴은 또 언제 잊힐까?”

예현의 바지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이정이 그런 예현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알게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실 꽤 잘 알고 있지만. 이정은 뛰어난 배우였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 순수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행동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형이 그렇게 오래 기억해 줄 만큼의 가치는 없는 것 같은데. 좀 멍청해 보여.”

“멍청…….”

남의 입으로 규진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자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물 젖은 얼굴로 픽, 웃는 소리를 내자 이정이 예현과 눈을 마주하고 웃었다.

“멍청하긴 하지.”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고 하잖아.”

이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이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은 거지. 이 관계는 나한테도 분명 도움이 되니까.”

이정은 이 관계를 통해 스토커를 떨쳐 내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이정이 생각하는 방식과, 예현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생각했던 방식은 굉장히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정은 예현이 처음 자기, 라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예현이 목적만 뚜렷하다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예현의 ‘목적’이 뚜렷해지면 뚜렷해질수록 이정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 관계를 마음껏 이용해 줘도 좋아.”

예현이 그런 이정의 속마음을 모르는 채 이정의 해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지내는 척, 행복한 척을 하면서도 종종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규진에게 휘둘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비참한 기분이 든 적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정은 그런 행동들이 옳다고, 기꺼이 자신을 이용해 달라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옆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최고의 복수인 거잖아. 그렇지?”

이정의 말에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규진은 자신이 잘 지내지 못할수록 기꺼워할 것이었다.

분명 ‘역시 넌 나 없이 안 돼.’,‘너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같은 개소리를 지껄이며 예현의 속을 긁어내릴 것이 뻔했다.

“……그래.”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자. 누구라도 내가 아주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기왕이면, 누구라도 ‘요즘 힘들어 보여.’라는 소리를 빈말으로라도 못 할 정도로.

“그래야겠지.”

예현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

“예현 씨, 이정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먼저 올라가 주실 수 있을까요?”

주석이 착잡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것을 혼내려는 거겠지.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올라가 볼게요.”

“네. 다음에 봬요.”

주석과 예현이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예현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주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이정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자고 했잖아. 모자 쓰고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니 길거리에서 싸우질 않나, 사진은 다 찍히고…….”

주석이 이마를 부여잡고 말했다. 얌전히 태우고 오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싸움으로도 모자라 얼굴까지 내비쳤으니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재련 이사님한테 나 작살 나는 꼴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오해야.”

이정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인간이 하필 오늘 예현이 형 회사 앞에 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못 믿겠는데.”

언제라도 와서 자극해 주면 고맙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만난 것은 확실히 우연이었다.

이정은 그럼 믿지 말든가, 하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그건 우연이라고 쳐. 그럼 가서 얌전히 예현 씨나 데리고 올 것이지 싸움에는 왜 끼어드는데? 아니지. 그것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하자. 모자는 대체 왜 벗은 건데?”

차라리 얼굴이라도 내비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어이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힐긋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일반인들 간의 사소한 말다툼. 정체를 들키지 않고 데려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정은 보란 듯이 모자를 벗고 그 잘난 얼굴을 당당히 내비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정이 모자에 손을 대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한 주석이었다.

“사진 찍힐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 리도 없고. 대체 왜 그런 거야?”

“……재수 없는 소리를 하길래?”

이정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확실히 모자를 벗을 생각은 없었다. 그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너 분명 멀쩡하게 못 지내. 정말 영영 내 얼굴 안 떠올리고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이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던 규진을 떠올렸다. 내 얼굴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냐라. 이정은 자신이 있었다.

7년을 사귀고도 개념도, 예의도 없이 이별을 고한 전 애인의 얼굴보다야 가짜 애인이라도 어리고 잘생긴 자신의 얼굴이 더 많이 떠오르지 않으려나.

“형도 매일 말하잖아. 내가 가진 것 중에 착한 건 얼굴 하나밖에 없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네가 진짜 예현 씨 새 애인이라도 돼?”

주석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뭐, 진짜 새 애인이라면 애인의 구남친 앞에서 자신의 잘난 얼굴을 들이미는 게 이해라도 가겠는데, 둘은 진짜 애인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기 살려 주고 싶어서?”

“하, 참나.”

이정의 말에 주석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다고.

“예현 씨가 꽤 마음에 드나 봐.”

주석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른 채로 말했다.

마음에 드냐라. 이정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몇 번이고 눈물을 보이면서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 재미있기는 했다.

확실히, 선을 넘으려 들지도 않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기를 살려 주다니, 그럼 내 기도 좀 살려 주면 안 되냐? 나 지금 재련 이사님한테 깨지게 생겼다고. 요즘 인터넷 소식이 얼마나 빠른 줄 알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석이 우는소리를 내며 이정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지났으니까 앞으로 30분 정도……. 아니지, 이미 인터넷에 다 퍼진 거 아냐?”

주석이 다급히 핸드폰을 들어 무언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이것 봐.”

무언가를 찾아낸 주석이 이정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상단에 ‘강이정’이라는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검색창 아래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게시글들이 보였다.

[나 오늘 강이정 봄..... 피지컬 대박 얼굴 대박]

[뭐 촬영하러 간 거 아님?]

[ㄴ 아님;; 길거리에 웬 남자들이 사랑싸움? 같은 거 하는데 얼굴들이 심상치 않아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모자 벗으니까 강이정이었음 근처에 카메라 같은 거 없던데]

이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손가락을 놀려 사람들의 반응을 읽어 나갔다.

[와 나 여기 지나갔었는데 저거 강이정이었음?? ㅋㅋㅋ 나도 봄 저 반대쪽 키큰 남자가 강이정 애인 구남친 같던데??]

[ㄴ ㄹㅇ??]

[ㄴㄴ 자세히는 못들었는데 대충 사귀는 사람 아닌 사람한테는 원래 이렇다 이런 얘기 하는 거보니까 아마.... 아 강이정인 줄 알았으면 계속 구경할걸 아]

이정이 사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정의 몸에 가려 예현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정과 규진의 얼굴은 두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사진이었다.

“야, 웃음이 나와?”

주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며 이정의 손에서 핸드폰을 앗아 갔다.

“그러게, 좀 미안하긴 하네.”

“……뭐?”

이정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주석이 당황한 채 어버버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니, 내가 얘한테 마지막으로 사과를 들어 본 게 언제더라.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예전이지만, 웬만한 일로 사과를 받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주석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거 아니지?”

“아니. 맞는데?”

무슨 사고를 쳤길래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는 거지. 주석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너, 너 뭐 더 사고 친 거 있어?”

“아니, 그냥 본 게 다야.”

“근데 갑자기 왜 사과야?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주석이 운전석에서 빠져나오다시피 몸을 내밀며 말했다. 이정이 애처롭기까지 한 그 모습을 보다 말했다.

“예현이 형 전 애인.”

이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애인이 뭐, 주석이 눈을 껌뻑거리며 이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NW 차기 회장 삼남이거든.”

“……뭐?”

이정의 말에 주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 내가 아는 NW 그룹 아니지? 그냥 동네 음식점 이름…… 같은 게 하필 NW랑 같은 거지?”

“아니. 형이 아는 그 NW 맞을걸.”

이정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낸 것 하나만으로도 수십 개의 기사들이 업로드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강이정의 치정 상대가 NW 그룹의 차기 회장 삼남이라니, 이건 그냥 기사감 정도가 아니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능가하는 가설들이 온갖 사이트에 도배되리라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아니지. 그……. 언론 노출이 안 됐을 수도 있잖아? 누가 설마 재벌 3세 얼굴까지 줄줄이 꿰고 있겠어.”

“기자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하루도 안 돼서 기사 나온다에 이번 회차 출연료 걸게.”

이정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언론팀에서 이걸 알면 날 가만히 안 둘 거라고……. 회사 전화선부터 다 끊어 놔야 하나.”

아무래도 일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에 주석이 한숨을 푹푹 쉬며 자신의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아니지. 일단 내 전화기부터…….”

[띠리리리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석의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제발.”

주석이 제발 재련만 아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고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실눈을 떠 액정을 마주하자마자 보인 것은 재련의 이름이었다.

“안 받으면 안 되겠지……? 아니, 근데 재련 이사님도 그 사람 누군지 알아?”

“아니. 모를걸? 형이 지금 전해 주면 되겠네.”

이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올라가 볼게. 형도 많이 놀랐을 텐데, 혼자 기다리게 둘 수는 없을 것 같아서. 형. 그럼 수고해.”

이정이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주석은 그런 이정을 붙잡으려 했지만, 요란하게 울려 대는 전화벨 소리가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여보세……”

[“강이정 그 미친놈은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재련의 벼락같은 고함이 주석의 귀를 찔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사님,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이럴 때는 절대 자극하면 안 된다. 주석이 한없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재련을 진정시켰다.

잠시 후 자신이 전할 소식에 재련이 2차로 폭발할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채로.

*****

[강이정의 라이벌은 재벌 3세?]

[연애조차도 국민 드라마, 강이정의 경쟁자는 NW 박규진 ]

[공식입장 無……. 베일에 싸인 세 사람의 관계는?]

쏟아지는 기사들로 인해 뒤집힌 것은 레인즈 컴퍼니뿐만이 아니었다.

공식석상에 이따금 얼굴을 드러내 왔던 규진의 정체가 기사를 통해 보도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로 인해 날벼락을 맞은 두 회사가 있었다.

“네가 제정신이야?”

쨍그랑-

규진의 아버지가 규진을 향해 재떨이를 던졌다. 애초부터 맞히려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는 듯 재떨이는 규진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깨졌지만 그를 겁먹게 하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내가 주 사장한테 연락받고 할 말이 없더라, 할 말이!”

순조롭게 약혼식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박 이사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아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언제 너한테 대단한 것 바란 적 있어? 어? 네 형들처럼 지내는 것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버지…….”

규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래, 정 다녀올 거면 조용히 다녀오든가!”

박 이사가 다시 한번 소리를 쳤다.

규진이 대학 시절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큰 기대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첫째나 둘째였어도 대학 시절 연애 따위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공공연히 알려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심지어, 그 사람이 꽤나 유명한 일반인이고 자신의 아들에게 약혼녀가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주 사장 쪽하고는 내가 이야기했다. 식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 보자더구나.”

규진이 입술을 꾹 물었다. HJ 건설 주 사장이 애지중지하는 오메가 막내딸인 서연과 약혼, 그리고 결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그저 예현이 자신과 헤어진 지 하루 만에 다른 사람을 만났을 리가 없으니까. 분명 자신을 잊지 못해 쇼를 벌이는 것일 테니까.

그런 행동까지 할 필요 없다고, 자신이 받아 주겠노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는데 그 배우라는 놈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는 바람에 여기저기 소문이 나고야 말았다.

“네 약혼녀하고는 이야기해 봤고?”

“연락은 하고 있는데 아직 확인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냥 빌어. 너한테 많은 것 안 바란다. 그냥 그 집 딸과 결혼해서 괜한 분쟁에 휘말릴 일 없이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더냐?”

박 이사가 규진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게 주어진 혼처 중 이만한 혼처가 어디 있다고, 결혼해서 조용히 출근만 하고 살라는 게 그리 힘든 일이냔 말이다.

“그쪽에서 너와 파혼하고 싶다고 하기라도 하면 더 이상 너에게 줄 만한 기회라는 건 없다. 아무리 모자라도 그 정도는 알겠지.”

박 이사가 규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규진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예.”

“긴말 안 한다. 무릎 꿇고 빌든, 선물을 한 다발 안기든 네 약혼녀 마음은 네가 풀어 줘라. 무슨 일을 하고 다니든지 들키지는 말아야지.”

박 이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기사에서 네 이름 보는 일이 있었다가는 지금 있는 자리도 정리하고 내려가야 할 거라는 거, 잘 생각하고 행동해라.”

박 이사가 규진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반면, 이 기사를 접하자마자 세상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는 듯 한참을 웃었던 사람도 있었다.

“하여튼, 우리 동생은 날 실망시키지를 않는다니까.”

이정의 누나, 유정이 기사에 나온 익숙한 얼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쿡쿡거렸다.

“하여튼, 갑자기 연예인인지 뭔지를 한다고 나갔을 때부터 웃긴다고는 생각했지만.”

유정이 이정에게서 받아 낸 시계를 불빛에 비추어 보며 중얼거렸다.

“관심 표현도 참 재미있게 한단 말이지.”

유정이 시계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고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기사가 나가고, 예상했던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현을 들들 볶았다.

“예현 씨 진짜 죄 많은 남자다. 강이정에, 전 애인도 재벌 3세야? 무슨 드라마 주인공보다 설정이 과하네.”

“아, 나도 그런 인생 한 번만 살아 보고 싶다. 새 애인이 전 애인 앞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와서 도와주는 인생……. 그리고 그게 강이정 얼굴인 인생…….”

애인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 잠을 못 잔 거냐는 말이 무색하게도 하루 만에 다시 연예면 대문을 장식하자 이번에는 부럽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러니까 괜한 걱정 할 시간에 서류나 다시 검토해 보라고 했잖아.”

“그래도, 연예인이랑 사귀는데 신기하잖아.”

그래도 이번에는 처음처럼 하루 종일 질문 세례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저 부럽다, 좋겠다는 이야기만 종종 들은 정도였다.

“내가 그날 그 시간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야 강이정 실물을 봤을 텐데…….”

옆 팀에서 김 주임까지 찾아와 예현과 함께 퇴근해야 했다며 징징거리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김 주임은 혹시 이정이 한 번이라도 더 회사 앞으로 올까, 예현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어차피 보통 택시를 타는 데다, 데리러 온다고 해도 차 안에서 내리지 않을 텐데. 예현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해 주지는 않고 부끄러운 척 웃음 지을 뿐이었다.

“규진 오빠랑 무슨 일 있었던 건지……. 물어보면 안 되겠지?”

게다가 매일같이 찾아가는 예서의 방에서도 질문 세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7년이나 사귄 연인이니만큼 예서 역시 규진을 꽤 잘 알았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종종 선물을 주고 밥을 사 주는 정도는 되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르는 예서는 규진이 왜 예현의 회사 앞까지 찾아갔는지가 퍽 궁금한 것 같았다.

“어. 안 돼. 가서 빨래나 널어.”

예현이 예서의 말을 냉정히 잘라 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굳이 예서에게까지 규진을 나쁜 사람으로 남길 필요는 없었다. 그를 감싸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규진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예서가 분하다며 한참을 씩씩거릴 것을 알아서였다.

아마 며칠 내내 ‘그 오빠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며 화를 내다 급기야는 규진의 핸드폰으로 온갖 문자테러를 할지도 모르지.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래도, 이정 오빠 멋지더라.”

예서 역시 굳이 캐묻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더 이상 이야기해 달라 떼를 쓰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참 나, 몇 번이나 봤다고 ‘이정 오빠’가 된 건지. 예현이 작게 웃고는 말했다.

“어떤 점이?”

“둘이 왜 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규진 오빠가 잘못했겠지. 근데 이정 오빠가 그걸 멋지게 물리쳐 준 거잖아.”

물리쳐 주다니, 지극히 솔직한 표현에 예현이 다시 쿡쿡거리며 웃었다.

눈물이 그리 많은 편도 아닌데, 어째 이정 앞에서는 자꾸만 눈물을 보일 일이 생겨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확실히 그날은 그랬다.

규진의 앞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울 바에는 이정의 앞에서 우는 것이 훨씬 나았으니, 예현이 생각하기에도 그날의 이정은 타이밍 맞춰 자신을 구해 주러 온 사람 같았다.

“어차피 택시 타고 오는데 회사 앞까지 데리러 오고, 진짜 완전 찐사다.”

“찐사?”

예현이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예서가 무슨 그런 단어도 모르냐는 듯 핀잔을 주며 말했다.

“그런 것도 몰라? 아직 20댄데 왜 그렇게 아는 게 없어. 누가 보면 아저씬 줄 알겠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난 너튜브 같은 것도 잘 안 보고 인터넷도 잘……”

“찐사! 진짜 사랑! 완전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예서가 예현의 초라한 변명을 잘라 버리고 말했다.

아하, 찐사가 그런 뜻이구나. 잠시 멍하니 있던 예현이 뒤늦게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얼굴을 살짝 돌렸다.

“뭐 그 정도까지야……. 그냥 내가 그날 잠을 못 자서 피곤하다니까, 올라오는 길에 잠깐 들러서 데리고 와 준 거야.”

어차피 진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것 가지고 의미 부여 하긴. 맨날 영화에 드라마만 보니까 그러지, 현실의 연애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다고.

물론 평소보다 조금 더 멋있게 보이긴 했었지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열이 오른 것 같은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더 그런 거지! 그냥 택시 타고 와도 되는데, 조금이라도 편하게 오라고 데리러 간 거잖아. 연예인이랑 사귄대서 걱정했는데, 이정 오빠가 우리 오빠 진짜 좋아하나 보다.”

연예인이랑 사귄다고 해서, 그 말에 예현의 정신이 훅 돌아왔다. 두 사람의 시작이 어땠는지 새삼 떠올라서였다.

정신 차려, 신예현. 힘들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별것도 아닌 일, 예서가 하는 의미 없는 말에 왜 이렇게 휘둘리고 있어.

그냥 친절일 뿐이야, 의미 부여 하지 말자. 예현이 가볍게 자신의 얼굴을 두드리고 말했다.

“이게 뭘 안다고.”

“아야!”

예현이 예서에게로 다가가 코를 약하게 비틀었다.

“너도 나중에 커서 연애해 보면 알 거야. 그 정도는 그냥 친한 친구한테도 해 줄 수 있는 거라고. 찐사니 뭐니 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거든?”

“그래도, 그렇게 데려다줄 수 있는 친구면 엄청 좋아하는 친구겠지! 아무한테나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예서가 살짝 빨개진 코를 부여잡고 툴툴거렸다.

“그리고 애인이 그렇게 해 주면 기분 좋은 게 보통 아니야? 이정 오빠가 뭐 맘에 안 드는 짓이라도 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 소리 해서 그런 거잖아.”

예현이 예서의 탓을 하자 예서가 입술에 꾸욱, 힘을 주고 예현을 노려보았다.

코를 꼬집힌 것이 꽤나 억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흥, 어쨌거나 좋겠다. 오빠는 잘난 애인 있어서. 나도 나중에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예서가 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이정 오빠처럼 멋진 사람은 아니어도……. 그래도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되는 사람이랑 사귀고 싶다.”

예서가 드라마 같은 연애를 꿈꾸는 듯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예현이 절대 소리 내어 하지 못할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좋은 사람이지.”

“그러고 보니 오빠는 이정 오빠 어떤 점이 좋아서 사귀게 된 거야?”

예서가 벌떡 일어나더니 예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말했잖아. 매니저 형이랑 아는 사이였는데…….”

“그건 만나게 된 계기고, 왜 좋아하게 된 거냐구.”

예서는 이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언제 코를 꼬집혔냐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응? 어떤 점이 좋은데?”

물어봤자, 내가 정말 이정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예현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런 게 왜 궁금해. 그냥……. 지내다 보니 좋아하게 된 거지.”

“아, 그래도 딱 반하게 되는 포인트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응?”

예서가 어깨를 들썩이며 물었다. 아무래도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없는 이유라도 만들어서 이야기해 줘야 하나.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냥……. 잘생겼잖아.”

“그런 성의 없는 대답 말고!”

예서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이며 말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예현이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갔다.

그래, 애인은 아니지만 이정이는 좋은 사람이지. 어떤 점이 가장 좋은지 생각해 보자면…….

“……다정해서?”

예현이 이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를 하고 예현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골목에서 만났을 때에도, 멍청하게 우는 모습을 보였던 날들에도. 그는 늘 다정한 목소리로 예현을 위로해 주었다.

안심이 되는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참 듣기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또?”

“그리고……. 나한테 너무 많은 걸 물어보지 않는 것도 좋고.”

이정은 예현이 곤란해할 만한 질문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예현이 꽤나 예민한 편이라, 거슬려하는 것이 꽤 많은데도 그랬다.

알게 된 지, 그리고 같이 살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꽤 자주 마주치고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직 불편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또, 뭐든 자신 있어 보이는 것도 가끔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괜찮은 점이 꽤 많았다. 예현은 예서가 또 어떤 거?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생각보다 내 생각을 많이 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 안 통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같이 지낼수록 꽤 진중한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해서.”

“와, 오빠.”

가만히 예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예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서는 예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본인이 설레기라도 했다는 듯 양 볼을 붉히고 있었다.

“오빠도 이정 오빠 정말 좋아하나 봐.”

예서가 조금 들뜬 얼굴을 하고 말했다.

예현은 스스로의 표정을 볼 수 없었겠지만 예서는 예현이 말을 하는 내내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언제나 담담하고, 똑 부러지는 구석이 있는 오빠가 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꽤나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서가 당황해 굳어 버린 예현을 보며 말했다.

“이러다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는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예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두 사람은 그저 계약관계일 뿐이었다. 물론 평범한 비즈니스 상대보다야 조금 더 끈끈한 유대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리고, 박규진 때문에 이래저래 지치고 힘들었던 내내 곁에 있어 준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조금 빠르게 마음을 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예현이 이정을 향해 열렬한 연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왜? 사귀다 보면 결혼할 수도 있지. 당장은 아니어도, 나 스무 살 될 때쯤이면…….”

“아직 4년이나 남은 얘기를 왜 벌써부터 해. 쓸데없는 소리 하긴. 나 가야겠다.”

당장 4개월만 지나도 헤어질 사이인데, 결혼은 무슨.

결혼은커녕 정말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예현이 급하게 말을 돌렸다.

“오빠 연애 얘기 궁금해할 시간에 공부나 열심히 해. 너 이제 3학년이야. 지금 펑펑 놀면 고등학교 가서 진도 못 따라간다.”

예서가 오빠의 잔소리에 뚱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도 아직 방학이잖아. 진짜 3학년 되려면 아직 1달도 넘게 남았다고.”

“어쨌든. 오빠 간다.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예현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알겠어. 오빠도 잘 자.”

등 뒤에서 예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예현은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하긴, 그런 거 아닌데. 정말 아닌데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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