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5)

#3

그리고 예현의 퇴근 시간, 그의 바람대로 기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본래 소원은 상세하게 빌어야 한다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전부 영원히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어야 했는데.

예현은 오늘도 회사 앞에서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우리 구면이죠?”

그래도 오늘은 그날처럼 창피한 옷차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예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애석하게도 그렇네요.”

눈앞에 있는 여자는 예현이 살면서 단 한 번 마주한 사람이자, 기억 속에 참 강렬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예현을 찾아온 여자는 규진의 새로운 여자 친구였다.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뭐예요?”

예현이 여자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됐건 그녀는 예현의 전 애인과 바람이 난 상대였다.

“하하호호 이야기나 나누자고 오신 건 아닐 테고, 굳이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지는 않아서요. 용건만 빨리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나긋나긋한 말만 들으며 살아왔을 것 같은 여자가 예현의 무뚝뚝한 언사에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집안의 공주님처럼 자란 사람이었다. 늦둥이 딸이었고, 우성 오메가였으며 HJ 그룹 전체를 통틀어서도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막내였다.

굳이 무언가를 바랄 필요도 없이 귀한 것들이 손에 떨어졌고, 그녀는 당연하게 그것들을 누리고, 안온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예현의 존재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걔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잘 해결할게.’

규진이 알아서 해결하겠다며 그녀를 어르고 달랬지만 그녀는 도통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의 굴곡도 겪어 보지 못한 그녀에게는 이 일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그런 엄청난 일이었다.

오빠는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이건 나하고도 관련된 일이니까 나도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지.

그렇게 그녀는 규진의 친구를 조르고 졸라 예현이 일하는 곳을 알아냈고,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소개부터 할게요. 전 주서연이라고 합니다. 규진 오빠 여자 친구이자 결혼할 사람이고요.”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예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면 왜인지 모르게 그녀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던 예현은 그녀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을 택했다.

“신예현이라고 합니다. 박규진 씨……랑은 7년 사귄 사이네요. 다 끝났지만.”

“7년이요……?”

서연이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기껏해야 잠깐 만난 오메가 정도일 줄 알았는데 7년이라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박규진 씨랑 알고 지낸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이제 곧 1년……이네요.”

사실 이제 겨우 반년이 조금 지난 사이였지만, 서연은 진 것 같은 기분에 괜히 규진과 만난 기간을 늘려 말했다.

“1년이요.”

서연은 예현과 규진이 만난 기간에 기가 죽은 상태였지만 예현은 그것을 알아챌 만큼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곧 1년이라. 오래도 숨겼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자기 앞에서 요즘 바쁘냐고, 괜찮냐고 걱정하는 걸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현이 입술을 자근거리며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뭐예요? 저랑 박규진 씨 완전히 헤어졌어요. 제 쪽에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생각도 없고 엮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되게 공격적으로 말하시네요. 그, 그래도 제 남자친구랑 사귀었다는 사람이라니까……. 저도 이야기 정도는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온 것뿐이에요.”

짧은 대화만으로도 예현은 서연의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인지를 알 수 있었다. 분명 그 어떤 고난도, 역경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왔겠지.

그러니까 지금 이런 상황이, 자신을 비극 속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애틋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상황을 겪으면 난 좀 더 성장할 수 있어, 뭐 이런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봐?

“제 직장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나 예현은 그녀의 성장 일기에 어울려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그런 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그럼. 예현이 싸늘하게 식은 눈을 하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제 개인 정보가 어딘가에서 샜다는 이야기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데요.”

“…….”

서연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우선 그리 떳떳하지 못한 경로로 예현의 직장을 알아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박규진 씨한테 물어보셨어요?”

“아뇨! 제가 오빠한테 그쪽 이야기를 왜 하겠어요.”

스물다섯은 넘었을까. 예현은 도통 속을 숨기질 못하는 서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그냥 아는 사람에게 들어서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에요.”

차라리 규진의 새 애인이 똑 부러지고 능력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기분이 덜 복잡했을까.

서연은 20대 초중반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머리도, 대처 능력도 떨어져 보였다.

내가 이 사람보다 모자랄 게 뭐가 있지, 예현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아니, 모자란 게 있긴 있지. 예현이 천천히 서연의 옷차림과 소지품들을 살펴보았다.

천만 원대를 호가하는 원피스, 웬만한 사람들의 연봉과 맞먹는 가격의 가방. 척 보기에도 숍에 가서 한껏 힘을 준 것이 분명한 메이크업과 헤어.

누가 봐도 귀한 집 아가씨라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사람이었다.

결국 박규진한테 필요한 건 자기 급에 맞는 예쁘고 어린 우성 오메가였던 거겠지. 능력이나, 성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고.

“바보 같네…….”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연인이 되겠다고 열심히 살아온 것이 참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 아무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건 이런저런 사실 확인도 하고, 신예현 씨가 규진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예요. 무턱대고 찾아온 것이 무례했다면 사과드릴게요.”

“무슨 사실 확인을 하신다는 건데요?”

예현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예현의 태도에 서연은 적잖이 당황을 한 상태였다.

그녀가 생각한 상황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흥분한 상태로 규진은 자기 애인이라고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럼 난 차분하고 논리적인 말로 그런 저 사람을 진정시키고, 다신 규진 오빠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당신이 넘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뭐든 대답해 드릴 테니까. 단, 앞으론 주서연 씨 행동에 어울려 줄 생각 없으니까 여기서 다 물어보고 다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7년이나 사귄 거라면 오히려 제가 둘 사이에 끼어든 내연녀나 다름없는데 예현은 흥분하기는커녕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더 우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서연이 다급하게 말했다.

“오빠가 헤어지자는 이야기도 없이 저랑 만난 건, 저도 오빠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오빠한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악감정 가지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결혼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연애 오래 했다고 무조건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서연은 자신이 무슨 논리로 말을 이어 가는지도 모른 채 말을 내뱉었다.

“7년이면……. 대학교에서 만난 것 같은데, 그때는 한창 뭣 모를 나이잖아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 할 거면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봐도 될까요?”

결국 예현은 참지 못하고 서연의 말을 끊었다. 전 애인의 바람 상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데,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 주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예현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숨기지 않은 채로 말했다. 더 이상 그녀와 이야기를 이어 갈 이유가 느껴지질 않았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횡설수설하는 어린 애한테 화내 봤자 뭐 하겠어.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챙기려 했다.

“지금 저 피하시는 거예요? 할 얘기 없어서?”

그러나 이어진 서연의 말에, 예현은 가방을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체 저랑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뭐든 말해 준다고 했잖아요. 물어보라고요. 박규진이랑 7년 동안 사귀면서 있었던 일 서류라도 작성해서 보여 주길 바라시는 거예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규진 오빠랑 사귀는 사람은 저니까, 혹시라도 그쪽이 오빠한테 미련이라도 있으면…….”

서연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그녀는 그리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멍청하고, 아직 사랑에 대한 이상한 로망이 있는 미성숙한 어른일 뿐이었다.

예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에 악의가 없다고 해서 예현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미련이 있냐고요. 미련이 있겠어요? 그날 보셨잖아요.”

서연은 예현이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이었다.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새 애인 앞에 서 있는 구질구질한 헌 애인.

그날, 규진의 앞에서 서연은 완벽한 승자였다. 그런데 그날, 자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녀는 지금 멋모르는 얼굴을 하고 예현의 속을 긁고 있었다.

“박규진 그 인간, 7년을 사귄 내가 그 구질구질한 꼴을 하고 나가는데 붙잡는 시늉도 한 적 없어요. 뭐라는지 못 들었어요? 설마 결혼까지 생각했냐잖아요.”

“그야, 오빠 약혼녀는 나니까…….”

예현이 목소리를 키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그래요. 그쪽은 약혼녀고 난 그냥 연애만 하다 말 사람이라고 박규진 씨가 친절하게 말해 줬잖아요. 남의 속 긁는 것도 정도가 있지, 꼭 여기까지 찾아왔어야 하셨을까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그렇지만 이렇게 화낼 것까진 없잖아요?”

서연이 물러나지 않으려 부러 센 척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지, 찔리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흥분하시는 거예요?”

서연이 일침이라도 놓는 것마냥 눈을 세모나게 뜨고 말했다.

분명 무슨 헛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자 하고 앉은 자리였건만, 예현은 어느새 처음의 다짐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를 바득 갈고 있었다.

자신이 비참했던 만큼, 아니.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규진에 대한 배신감을 느껴 봤으면 했다.

“제 쪽에서 박규진 씨를 먼저 찾아간 일도, 찾아갈 일도 없어요. 아, 박규진 씨가 찾아온 적은 있네요.”

“뭐라고요?”

예현의 말과 동시에 서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들어갔다.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에 예현은 말을 이어 갔다.

“그쪽 잘난 약혼자 박규진 씨가, 우리 집 앞에까지 찾아와서 헛소리한 적은 있었지만 내가 먼저 찾아간 일은 없었다고요.”

“오빠가 왜…….”

서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 그 사람하고는 다 정리했고, 흔들릴 일 없다고도 해 줬었는데.

“……거짓말이죠? 오빠 그날 핸드폰도 안 보고 내 옆에만 있었어요. 주말 내내 내 기분 풀어 주겠다고 나랑 있어 줬다고요.”

“알아요. 와서 한다는 말이 그쪽 달래 준다고 주말 동안 연락 못 했다는 거였거든요.”

“그럴 리가…….”

서연이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냐. 거짓말이죠? 제가 그런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다고 저랑 오빠 헤어질 일 없어요.”

그렇게 믿는다면서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걸까. 예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헤어지든 말든 저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내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박규진 씨보다 훨씬 잘난 애인 생겨서, 이제 그런 인간한테 아무런 미련 없거든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새 애인? 자존심 세우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에요?”

서연이 한쪽 손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일주일 사이에 제가 꽤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봐요.”

“무슨 소리예요?”

“배우 강이정 일반인 애인이 난데.”

예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사실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입을 맞추기로 한 거 이 정도 이야기는 해도 되겠지.

“그 사람이 그쪽이라고요? 하,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죠.”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금만 찾아봐도 나올 텐데, 지금 바로 검색이라도 해 보지 그래요? 동영상이라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나왔더라고요.”

예현의 말에 서연이 슬그머니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검색해 보던 서연은 예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떨어트리듯 내려놓았다.

“……뒤에서 무슨 거래라도 한 거 아니에요? 헤어지자마자 연예인이랑 연애라니, 너무 현실성이 없잖아요.”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던데,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었다.

정곡을 찔린 예현이 말했다.

“거래라니, 잘 사귀고 있는 사람들한테 무례한 소리를 하시네요.”

서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된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 지금 우리 자기랑 연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고 좋아서, 박규진 씨 같은 인간 생각할 시간이 없거든요. 제 쪽에서 그 인간한테 먼저 연락할 생각 없으니까 애인 단속이나 잘 해 주세요. 저야말로 엮이기 싫거든요.”

“…….”

예현이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테이블 아래 내려 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디야?”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주먹을 쥐고 있던 서연이 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신예현, 한심하다. 한심해…….”

한편 밖으로 나온 예현은 짙은 현실 자각 타임을 겪고 있었다.

규진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 것 같았고, 갑자기 그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받아 줄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예쁜 얼굴, 우성의 성질, 고난 한번 없이 살아온 것 같은 천진난만한 성격, 재력과 자신이 겨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던 남자까지.

모든 걸 다 가진 사람 앞에 있자니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어떤 면으로 비교해도 그녀에게 꿇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딱 하나, 능력이라면 좀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한 재력이 있다면 능력이야 없어도 되겠지.

그건 규진만 봐도 아주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대학조차도, 예현은 죽어라 공부를 해 장학금을 받고 들어온 학교였지만 규진은 기부금 입학으로 들어왔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현은 그녀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녀의 말을 맞받아치고, 결국엔 서연이 입을 다물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분은 그 전보다 더 침울했다.

“그래도 다행인가…….”

이정과 엮이게 된 것은 그닥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 앞에서 내세울 것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앞에서만큼은 당당한 척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잉-

그때, 예현의 핸드폰이 울리며 핸드폰의 화면이 밝아졌다.

예현은 쪼그려 앉은 채로 진동의 원인을 확인했다.

[♡ : 집에는 잘 들어갔어? 오후 8 : 27]

어째 이런 상황에 나를 챙겨 주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계약서로 묶인 기간제 애인인 걸까.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 : 오늘은 이상한 사람 없었고? 오후 8 : 28]

연기를 위한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이상해졌다. 힘든 순간에, 다정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싫을 수가 있을까.

[잘 들어갔어. 별일 없었고. 오후 8 : 31]

예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자판을 꾹꾹 눌렀다.

사실은 엄청나게 별일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 때문에 이래저래 현자 타임까지 겪고 있지만 이런 초라한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 : 다행이네 오후 8 : 31]

[♡ : 내일도 조심히 출근하고, 주말에 만나. 난 오늘 밤부터 새벽 컷 촬영이라 이제 촬영 들어가 오후 8 : 32]

연기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천성이 다정한 걸까. 이정은 자꾸만 예현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저 악연으로 맺어져 계약으로 유지되고 있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다정한 말에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마음이 괜히 복잡한 거야. 정신 차리자. 신예현.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멍청한 행동도 하지 말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던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래도 아직 연애밖에 모르는 여자애에게 진심으로 화를 냈다는 건 좀 부끄럽다.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춥다…….”

정신을 차리려고 뺨을 챱챱 때렸더니 어째 찬바람에 뺨이 시려 왔다.

예현은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목도리를 꺼내 둘렀다. 유명하고도 그 이름값만큼이나 비싼 빨간 목도리가 예현의 목에 둘러졌다.

“부자라서 이런 목도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는 건가.”

보드랍고 따듯한 목도리가 예현의 목을 감쌌다. 200만 원까지는 오버지만, 분명 보통의 목도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싼 물건일 텐데 이런 걸 툭툭 줘 버리다니.

역시 부자는 다른가 봐.

예현은 우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일어난 일이 누군가의 입김으로 시작한 도미노와 같은 일이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로.

*****

[박규진에 대해 좀 알아봤어. 걔, 반년쯤 전부터 HJ 주서연이랑 사귀었더라?]

시계를 받은 유정은 곧바로 규진에 대한 정보를 이정에게 전해 주었다.

[그쪽도 막내딸에, 그룹 막둥이라고 애지중지 곱게 키워서 어지간히 머릿속이 꽃밭이더라고. 수준 맞는 애들끼리 잘 맺어 준 거지.]

유정이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쨌거나, 반년 전부터 결혼 전제로 사귀었고 사실상 약혼 관계라고 봐도 돼. 졸업하는 대로 약혼식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재미있네.”

[그보다 더 재미있는 건 따로 있지.]

유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박규진이 대학 때부터 7년 동안 사귄 애인이 박규진이랑 주서연 데이트 현장을 봐 버리는 바람에 둘이 깨졌다는 이야기쯤은 되어야 재미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유정의 들뜬 목소리를 들은 이정은 유정이 그 ‘박규진의 7년 사귄 애인’이 자신과 긴밀한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애인이라는 것 정도는 돼야 재미있는 거겠지?”

[그렇지. 넌 어떻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 누나한테 꽁꽁 숨기고 있니? 정 없게.]

언제부터 남매의 정 같은 걸 따지는 사이였다고. 이정이 유정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했다.

“그것까지 알면, 형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겠네?”

[28살 신예현 씨. 네 애인……이지도 않겠지 아마?]

유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제 누나만큼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정이 말했다.

“어. 어쩌다 보니 엮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됐네.”

일반인과 엮이게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애인이 NW 박규진인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그 덕에 이정 자신은 좀 더 쉽게 예현을 파고들 수 있을 테니 그건 꽤 괜찮은 점이었다.

“나도 놀랐어.”

[뭐, 기분도 괜찮으니까 서비스해 준다고 생각하고 도와준다.]

유정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미 규진은 물론 예현의 정보까지 완벽하게 체크해 두었을 것이란 걸 아는 이정이 작게 웃었다.

“그래, 알아본 결과는?”

[뭐, 아직 정리가 덜 된 부분이 있어서 바로 이야기하기는 그렇고, 김 비서 통해서 네 집 쪽으로 정리해서 보낼 테니까 나중에 알아서 읽어 봐.]

“그래. 고마워.”

[고맙긴, 그거 가지고 시계 하나 챙긴 내가 훨씬 더 이득인데. 앞으로도 사고 좀 많이 치고 부탁 좀 자주 해 봐.]

유정의 말에 이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생각해 볼게.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께서 이번에야말로 날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고 하시겠지만.”

[언제부터 그런 걸 무서워했다고. 아, 그리고 이건 특별 서비스.]

“서비스?”

이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유정이 속삭이듯 말했다.

[주서연이 박규진 전 애인, 뭐 하는 사람이냐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면서 꽤나 들쑤시고 다녔나 보더라고?]

유정은 이정의 가짜 애인과 박규진에 대해 알아보며 꽤 재미있는 사실들을 여럿 알아낸 상태였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점이 바로 이거였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마냥 그 사람이랑 대화를 해 봐야겠다면서 박규진 친구들을 쑤시고 다닌 모양인데, 애초에 박규진도 숨긴 애인인데 걔 친구들이 그 애인 직장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서연은 그리 조심성이 철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흔적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며 예현에 대한 것을 묻고 다녔고 그것은 어느새 몇몇 사람들에게 알려져 ‘아직도 어린 애처럼 그러고 다니더라.’ 하고 놀림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슬쩍 흘려 줬거든. 아마 지금쯤이면 그 사람 회사든, 집이든 쳐들어가서 진상 짓이라도 하고 있을걸.]

유정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한없이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꽤 친근하게 대해 주지만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가차 없었다.

그런 유정에게, 예현의 안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서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을지 꽤 기대되네.]

“그럼 기분이 엉망이겠네.”

이정의 말에 유정이 조금 의외라는 말투로 물었다.

[뭐야,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러나 유정이 예현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건 이정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태라면 평소보다 좀 더 경계가 느슨해질 테니까. 이럴 때 잘해 줘야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아하하. 이래야 강이정이지.]

유정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난 시계값 했으니 이만 끊는다. 다음에도 부탁할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네 소장품 하나 걸고. 다음은…… 작년에 어머니께서 주신 차 키 정도면 좋을 것 같네.]

“고려해 볼게. 끊어.”

남매간의 전화 통화가 끝이 나고, 이정은 핸드폰 액정을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8시 25분. 아마 퇴근하자마자 주서연을 만났다면 지금쯤은 집에 돌아가는 중이겠지.

박규진이 찾아왔던 날 펑펑 울면서 악을 썼던 것을 보면 박규진에 대한 것을 아주 후련하게 날려 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분명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겠지. 그리고 모름지기 사람이란 행복할 때보다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에게 틈을 내보이는 법이었다.

이정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들어 예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는 잘 들어갔어? 오후 8 : 27]

잘 들어갔을 리가 없겠지. 이정은 그것을 빤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친절한 가면을 썼다.

[오늘은 이상한 사람 없었고? 오후 8 : 28]

뭐라고 대답을 할까. 이정은 액정을 톡톡 건드리며 예현의 답을 기다렸다.

분명 읽음 표시는 곧바로 떴는데, 답장을 하기를 망설인 것인지 답장은 조금 시간차를 두고 도착했다.

[현이 형♡ : 잘 들어갔어. 별일 없었고. 오후 8 : 31]

자존심인 걸까, 아니면 아직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는 걸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뭐든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다행이네 오후 8 : 31]

[내일도 조심히 출근하고, 주말에 만나. 난 오늘 밤부터 새벽 컷 촬영이라 이제 촬영 들어가 오후 8 : 32]

이정이 다정한 말로 예현의 틈을 파고들었다. 은근히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어 보이는 예현이라면 아마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현이 형♡ : 그래. 밤샘 촬영 힘들 텐데 몸조심하고.]

아니나 다를까, 평소보다 조금 정이 담긴 답장이 돌아왔다.

“참, 쉽다고 해야 할까.”

이정이 미련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정말 괜찮겠어요?”

주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았다.

집까지 기자가 찾아왔다는 걸 모르는 그는 그래도 인터뷰까지는 할 필요 없지 않겠냐며 예현을 걱정했다.

“물론 우리 기자님이 기사 잘 써 주실 거지만, 세상에 이상한 사람 진짜 많거든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또 갑자기 너무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별로 좋지 않고…….”

“그만해. 형. 예현이 형이 애도 아니고 본인도 다 생각하고 결정한 건데.”

이정이 그런 주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를 말렸다.

“그렇지?”

“……네. 저도 많이 생각하고 결정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굳이 ‘미친 기자가 회사 앞, 집 앞까지 찾아와서 인터뷰 한 번만 해 달라고 악을 쓰길래 보란 듯이 다른 곳이랑 인터뷰해 버리고 싶어서요.’라는 말을 하기가 껄끄러웠던 예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강이정 말이 맞아. 인터뷰해 달라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한번 얘기해 봤는데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잖아.”

재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시하는 것 같아서 좀 죄송하긴 하지만, 예현 씨가 아니라 강이정 감시하러 온 거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아, 그렇게 말하면 예현이 형이 나 오해하잖아요.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이정이 넉살 좋게 웃으며 예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치?”

“……그렇긴 하지.”

예현이 슬그머니 이정의 편을 들어 주었다.

“허, 둘이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강이정 그 반반한 껍데기에 속지는 마세요. 예현 씨.”

재련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자님 1층이시래요.”

노닥거리기도 잠시, 오늘의 모임의 목적인 인터뷰를 해야 할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기자가 거의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긴장이 된 예현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별거 아니야. 나도 옆에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너야 연예인이니까 별거 아니겠지. 일반인한테 언론사 낀 인터뷰가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니가 알기나 하겠냐?”

재련이 이정에게 핀잔을 주며 예현을 바라보았다.

“정 힘들겠다 싶으면 슬쩍 눈치 주세요. 우리 쪽하고 오래 일한 기자님이고, 괜찮은 분이니까 굳이 무리해서 질문 다 대답해 줄 필요도 없고 부담가질 필요도 없어요.”

딱딱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꽤 챙겨 주는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한 예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옆자리에 앉아 있어야겠죠?”

“그래. 사귀는 사이에 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잖아. 어색한 사이라는 거 여기저기 티 낼 일 있냐.”

이정이 예현의 옆자리 의자를 빼내 그의 옆에 앉았다.

“우리 하나도 안 어색한데. 그치.”

이정의 햇살 같은 웃음이 예현의 면전에서 빛을 발했다.

동시에 기자의 실루엣이 반투명 창을 통해 비쳐 보였다. 그래, 어색해 보이면 안 되지. 짧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예현이 돌연 이정의 팔짱을 끼고 그와 시선을 맞추어 웃으며 말했다.

“응, 당연하지.”

“안녕하세요. 밀착패치 정수연입니다. 어머.”

문을 열고 들어오던 기자가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고 입을 가리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이정 씨가 사랑꾼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예현 씨도 만만치 않으신걸요?”

인터뷰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예현도, 이정도. 기자 수연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방 안에는 유독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 정도면, 일반인이 아니라 연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재능이 있어. 재능이.”

재련은 세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주석에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같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저런 발랄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기자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변한 예현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하하. 그런가요. 그래도 이정이가 저한테 잘해 주는 거에 비하면 전 딱히 해 주는 것도 없는걸요.”

“아무것도 안 해 줘도 돼.”

열렬한 연인을 연기하는 두 사람을 죽은 눈으로 바라보는 재련을 보며 주석이 작게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되게 놀랐어요.”

“강이정은 자기 이미지라도 달려 있지, 예현 씨는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열심인 거냐?”

“그건……. 음, 개인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주석이 며칠 전 그의 집 근처 골목에서 울던 예현을 떠올렸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예현 씨, 음. 기사에는 강이정 씨의 연인, 이니셜 Y 씨로 나갈 거니까 지금 이름으로 부르는 건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수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예현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모 매체의 기사를 시작으로 두 분의 관계가 알려지고, 연예계와 전혀 연이 없던 예현 씨의 신상 정보가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었는데요. 처음 기사가 났을 때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음……. 아무래도, 처음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화질이 그닥 좋지는 않았지만 또 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영상이라 제가 기사를 접하기도 전에 지인분들이 바로 연락을 주셨어요.”

예현이 날벼락 같았던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갑작스럽게 알려지다 보니 더 당황스러운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첫날에는 정말 핸드폰을 볼 수가 없을 만큼 연락이 쏟아졌었거든요.”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려대는 바람에 진지하게 번호를 바꿔야 하나, 생각까지 했던 예현이었다.

“지인들에게서 연락은 계속 오지, 이정이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그런 걱정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이정 씨의 소속사에 방문하셨었죠. 당시 기자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이정 씨를 애칭으로 부른 것이 화제가 되었는데요.”

수연이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예현은 열심히 외워 두었던 대본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실, 여러 기사에도 언급되어 있었지만 저희가 사귄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그냥 알고 지내던,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보니까 자꾸 친구일 때처럼 행동하더라고요. 그래서 사귀는 사이라는 걸 서로 잊어버리지 말자는 의미에서 자기라고 부르자고 한 건데, 그게 기사가 나서 저도 좀 놀랐어요.”

사실은 조금 긴장돼서, 그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색한 티가 날까 봐 그런 거였지만.

“우리 자기가 부끄러움이 좀 많거든요. 그날도 너무 긴장해서,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이정이 부드러운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며 웃었다. 예현은 그런 이정과 눈을 마주하고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근데 사실 제가 애교가 많다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라 지인들이 기사 보고 놀라서 연락을 하기도 했어요. 원래는 오히려 말수도 적고, 좀 무덤덤한 성격이라서요.”

“어머, 지금 잠깐만 이야기해 봤는데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걸요?”

그거야 밥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랑에 빠진 사람인 척 연기하고 있으니까요.

“아하하. 아무래도 이정이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봐요.”

“기사가 나간 이후에도 예현 씨는 평소대로의 일상을 이어 가셨어야 했을 텐데,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거나 하는 건 못 느끼셨나요?”

“직장 동료분들이 많이 축하해 주셨어요. 첫날에는 아무래도 다들 믿지를 못해서 여기저기 이야기해 주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직장인이잖아요. 며칠 정도 지나니까 괜찮아졌어요.”

예현은 자신과 같은 사무실을 쓰는 진상들과 같은 건물을 쓰는 진상들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웃었다.

“그럼 이번에는 이정 씨에게 물어볼게요. 데뷔 8년 만의 첫 열애설이에요. 사실 이정 씨의 연애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난리가 날 텐데, 두 분의 영상이 공개가 되면서 인터넷이 완전히 뒤집어졌었죠.”

수연은 고개를 돌려 이정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정 씨에게도 이번 열애설은 굉장히 큰 사건이었을 텐데, 기사가 나갔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예현은 본인 역시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이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물론 하루아침에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일반인이 되어버린 자신보다는 덜하겠지만, 이정에게도 이 일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닐 터였다.

“저도 좀 놀라긴 했죠. 그런데 저는 제 걱정보다는 팬분들이나 형이 먼저 걱정됐어요.”

이정이 어느새 촉촉해진 눈망울을 하고 말했다.

“전 애초에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직업을 가졌고,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다는 것도 언제나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형이나 팬분들께는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을 테니까, 무슨 생각이 들기 전에 걱정부터 들었던 것 같아요.”

이정의 모범적인 답변에 예현이 속으로 감탄사를 자아냈다.

“그렇군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정 씨의 열애설은 이례적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많은 대중들에게 관심을 끌었죠.”

정말 그랬다. 보통 이성 팬이 많은 스타의 열애설은 다수의 탈덕과 온갖 폭로를 불러오는 법인데, 이정의 연애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마 드라마 같은 연애 타임라인과 이정 씨의 좋은 이미지 덕에 그런 반응이 오고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이정 씨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두 사람의 연애가 크게 지탄을 받지 않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이 교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기사가 났기 때문이었다.

무릇 열애설이 터지면 몇 주, 몇 달 전의 사진과 영상까지 다 끌려 나와 팬 기만을 했다, 연애하는 티를 냈다하며 지탄을 받는 법인데 두 사람의 교제 기간이 너무 짧았다.

정식으로 교제한 지 일주일도 안 되었다는 연인이 연애하는 티를 내 봐야 얼마나 냈겠나.

물론 둘은 실제로 사귀는 것이 아니기에 교제 기간이 얼마였어도 해당 사항은 없었을 테지만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예현이 일반인이라는 것, 그리고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영상 역시 한몫했다.

[나도 강이정 같은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ㅁㅊ 강이정 박력 실화냐]

[저 동네 벽이라도 되고 싶다]

“아무래도 팬분들께서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시고, 대중분들 역시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그런 것 같아요.”

이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자를 따라온 사진사가 이정의 눈부신 얼굴을 연신 찍어 댔다.

“그리고 우리 자기도, 좋은 사람이거든요.”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예현 씨가 일반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신상을 유포하는 것은 자정하자는 분위기가 생기긴 했지만, 레인즈 컴퍼니 측에서 일반인이란 기사를 내기 전까지는 예현 씨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이 많았어요. 알고 계셨나요?”

예현이 처음 듣는 말에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예현이 그에 대한 것을 모른다는 걸 눈치챈 수연이 말했다.

“어머, 모르셨구나. 예현 씨 영상보고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다, 무명 배우다, 아무튼 연예인이나 연예인 지망생일 것이다, 같은 이런저런 추측들이 많이 돌아다녔었거든요.”

“제가요?”

예현이 깜짝 놀라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연예인이라니,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돌았던 거지.

“대체 왜…….”

“아무래도 예현 씨의 외모 때문이 아닐까요?”

“네?”

예현이 수연의 말에 질색을 했다. 얼굴 때문이라니. 내 얼굴이 대체 어딜 봐서 연예인 같다는 걸까.

“형이 귀엽긴 하죠.”

이정이 수연의 말을 거들며 키득거렸다. 그러나 예현은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연예인 얼굴이라는 건 이정 같은 얼굴에나 붙이는 말이지, 나 같은 얼굴로 연예인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몰랐어요. 절 닮은 연예인 분이라도 계셨나 보네요.”

예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두 분은 사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갑작스럽게 기사가 나가게 돼서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많이 놀랐죠. 제가 형을 계속 기다렸었거든요. 어렵게 마음 열어 준 만큼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랐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관심을 받게 만든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어요.”

이정이 예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말했다. 예현 역시 괜찮다는 듯 반대쪽 손으로 그런 이정의 손을 토닥거렸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게 좀 부담스럽긴 하니까요. 그래도 이정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았던 것 같아요.”

이정과 예현이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겹쳐 잡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기 좋은 한 쌍의 연인이었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아주 부부 사기단 나셨구만.”

재련이 두 사람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터뷰는 그 뒤로도 순조롭게 이어져 갔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연인을 연기했고 재련의 말대로 수연은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질의응답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

인터뷰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갈 즈음, 수연이 녹음기와 수첩을 정리하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너무 편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괜찮았어요.”

“보통 인터뷰한다고 카메라 앞에 서면 어색해하시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없어서 조금 놀랐어요.”

수연이 예현을 칭찬했다. 물론 그녀는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것을 모르니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것이겠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흠칫, 놀라 잠시 멈추어 섰다.

“그랬나요? 기자님께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주셔서 그랬나 봐요.”

예현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기도 잠시, 사진 기사가 수연을 향해 눈치를 주자 수연이 예현을 보며 부탁 하나를 건넸다.

“저, 정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되는데…….”

“……?”

“괜찮으시면, 인터뷰에 삽입할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기자님, 왜 이러십니까.”

수연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예현이 아닌 재련이었다.

재련이 수연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무서운 얼굴을 한 그가 수연과 사진기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신상 노출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회사 쪽 입장은 알지만, 예현 씨 의사도 중요하잖아요. 정 걱정되시면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찍어도 되니까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제가 이정의 연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상은 털릴 대로 털렸고, 자신의 얼굴이 좀 더 알려지면 누구누구들은 내 얼굴을 보며 아니꼬워하지 않을까.

그럼 기분이 좀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예현이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때, 이정이 예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수연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 그럼요. 강요하는 건 아니고 혹시 가능하다면 부탁드리겠다는 거니까 억지로 괜찮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잠깐 같이 이야기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수연에게 양해를 구한 이정이 예현을 데리고 빈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 예현은 이정이 다시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차피 얼굴도 어느 정도 알려졌는데, 그냥 괜찮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예현의 마음은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차피 시작할 때부터 얼굴이 팔릴 것을 감안하고 결정한 것이었으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악에 받쳐 이정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며 결정을 내린 예현이 입을 열었다.

“난 괜찮……”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그러나 이정은 예현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정말 스스로를 위한 선택이라면 말리지 않겠는데, 그 자기라는 사람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면 난 반대야.”

이정은 예현이 왜 이 계약 연애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왜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을, 얼굴을 공개하는 짓을 하려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마 박규진과 주서연을 엿 먹이고 싶어서 이러는 거겠지.

그러나 이정은 그 두 사람이 최대한 오래, 최소 3개월 이상은 예현의 심기를 거슬러 주길 바랐다.

그러려면 예현의 본격적인 공격은 늦출 수 있을 만큼 늦추는 것이 좋았다.

그 두 사람이 질기게 예현의 심기를 거슬러 주어야 예현이 이 계약 연애에 더 정성을 다할 텐데, 이렇게 쉽게 가면 안 되지.

“얼굴 공개하는 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 아니면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도촬된 저화질 동영상이랑 정식으로 기자 끼고 찍은 사진이 같은 파급력일 거라고 생각해?”

이정이 예현을 걱정하는 척을 하며 말했다.

“그거, 사람들한테 ‘앞으론 내 얼굴 마음대로 퍼 날라도 된다.’ 하고 허락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3개월 지나고 나면 형은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이정이 예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겨우 그런 사람 때문에 앞으로의 일상까지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

철저히 본인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정은 연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거짓된 말을 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정말 몇 번을 생각해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도 이해하려고 할게. 그런데 오늘은 아니야. 중요한 일이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예현은 이정의 말이 다정함을 가장한 궤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현에게 이정의 말은 그저, 자신을 걱정해 주는 다정한 가짜 애인의 친절처럼 느껴졌다.

“응?”

이정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한 번 인터넷에 사진 올라가면 되돌릴 수도 없는데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예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정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어쩌면 규진과 서연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가 위험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예현 자신이었다.

“돌아가자.”

예현이 앞장서 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초조해하지 말자.

예현은 그렇게 되뇌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예현이 거절 의사를 밝히자 수연은 예현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물러섰다. 약속대로 얼굴이 나오지 않게 손만을 찍은 기자 일행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예현 씨,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닙니까?”

재련이 독하다는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열심히 해서 이사님이 안 좋을 건 없지 않나요?”

“아니, 시비 거는 게 아니라요.”

재련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인상이 이래서 오해를 많이 받는데, 시비 거는 거 아닙니다. 정말로.”

“재련이 형이 좀 무섭게 생기긴 했죠.”

옆에서 이정이 큭큭거리자 재련이 매섭게 이정을 한번 째려보고는 말했다.

“걱정돼서 그럽니다. 걱정돼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아요. 돈도 많이 받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돈 더 많이 줄 테니까 배우 한번 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나 볼까……. 재련이 잠시 헛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강이정한테 협박당하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예현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재련은 이정이 못내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가 껍데기는 멀쩡해서, 아니. 아주 보기 좋아서 사람들이 잘 속는데 믿으면 안 될 인간입니다. 너무 정 주고 그러지 마세요.”

“너무한 거 아냐? 그래도 우리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인데.”

이정이 상처받은 척을 하며 마른 눈가를 닦아 냈다.

“그 정도는…….”

“와. 이것 봐.”

예현이 은근슬쩍 이정의 편을 들자 재련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뭐, 아무튼. 친하게 지내는 것 정도는 좋은데 너무 정 주지는 마세요. 어차피 계약 기간 끝나면 다시 볼 수도 없을 사이고 예현 씨도 얘랑 안 엮이는 게 아마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재련이 다시 한번 예현에게 경고를 남겼다.

‘하긴 연예인이고, 헤어지면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이긴 하지.’

예현은 이정이 속내가 까만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했으나 계약이 끝나면 이정과 만날 수 없으니 정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저도 알아요.”

“와, 형도 나 나쁜 사람으로 보는 거야?”

예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정이 서운하다는 듯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난 형이 좋은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잖아.”

“아니, 네가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헤어졌다고 기사 내면 어차피 다시 못 만날 테니까…….”

이정의 행동에 예현이 당황한 채 쩔쩔매며 그런 그를 달래 주려 했다.

“정말요?”

“응. 너 좋은 사람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한테는…….”

예현이 자신을 달래 주던, 그리고 챙겨 주던 이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수더분한 말이었으나 그가 이정에게 꽤나 쩔쩔맨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재련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

“주말에 외근하는 기분……. 아니지, 이천만 원을 생각하면 뭔들 못 참겠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현은 투정 아닌 투정을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일주일은 지난주와 똑같은 168시간인데, 이번 주는 하도 겪은 일이 많아서 그런지 시간이 느리게 지나간 것만 같았다.

“드디어 휴식 시간이다.”

인터뷰도 잘 마쳤겠다, 후련한 기분이 든 예현은 기지개를 켜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내일이면 기사가 뜰 테니 기자 놈은 인터뷰를 해 달라고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었고 회사 사람들도 다음 주쯤에는 예현에 대한 관심이 식을 것이 분명했다.

3개월, 3개월만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 기본급 6천만 원을 받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조금 골치가 아픈 것 정도는 참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규진을 향한 생각도, 자괴감도, 패배감도 모두 지워지겠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편지?”

습관적으로 우편함을 확인하던 예현이 발신인도, 우표도 붙어 있지 않은 봉투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우편함에 들어있는 것은 고지서나, 요금 납부서가 전부였다.

편지가 올 만한 곳이 없는데. 예현은 가만히 선 채 –신예현- 이라고 적힌 봉투의 겉면을 바라보았다.

받는 사람의 주소조차 적혀 있지 않고 오로지 받는 사람만이 적힌 편지라니, 그렇다는 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직접 여기까지 와서 이 편지를 우편함에 넣어 두고 갔다는 뜻이었다.

찌이익-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예현은 그 자리에서 편지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헉.”

그리고 편지의 내용물을 확인한 예현은 놀라 그것을 떨어트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떨리는 손으로 떨어트린 것을 다시 주워 든 예현이 그것의 내용을 확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지, 누가 이런 걸 여기 넣어 둔 거지. 분명 나갈 때까지만 해도 이런 편지 같은 건 없었는데.

[네 거 아니잖아, 왜 네가 하고 있어?]

휘갈겨 쓴 글씨가 적힌 사진 한 장이 예현의 손안에서 휘날렸다.

사진 속의 예현은 빨간 목도리를 맨 채 집의 문을 열고 있었다. 옷을 보니 목요일, 회사를 다녀오던 길의 사진인 것 같았다.

이 각도면, 어디서 찍은 거지. 예현이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붙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각도로 사진이 찍히려면 저 골목에서 찍어야 할 것 같은데. 위치를 가늠한 예현이 예서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 표정을 굳혔다.

‘어? 그냥 집 오는 길에……. 쓰레기 내놓는 골목 앞에서 카메라 확인하고 있던데?’

사진을 찍은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예서가 수상한 남자를 봤다고 했던 그 골목이었다.

분명 몇 번이나 집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수상한 사람은 못 봤는데, 내가 퇴근하는 시간을 알고 그 시간대에 맞춰서 이 사진을 찍기라도 했다는 건가?

혹시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날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헉.”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든 예현이 숨을 들이켜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뭐야, 귀신이라도 봤어? 얼굴이 왜 그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예서가 사색이 되어 들어온 예현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손에 든 건 뭐야? 사진?”

“아, 아무것도 아냐.”

예서가 이 사진을 보면 분명 나보다도 더 걱정하겠지. 어린 동생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예현이 다급하게 사진을 숨기며 말했다.

“집 앞에서……. 오는 길에 미끄러질 뻔해서 놀란 거야. 걱정하지 마.”

“아, 옆집에서 또 화분 물 주다가 물 흘렸나? 물 흐른 거 얼어 있길래 걱정되긴 했는데. 조심해서 다녀. 오빠.”

“너도 조심해서 다녀.”

애써 웃으며 예서를 안심시킨 예현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예서가 문을 열었다가 사진을 보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문을 잠근 예현이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들어 다시 바라보았다.

사진의 겉면을 만져 보니 글씨는 펜이 아니라 포스터물감 같은 것으로 써진 것 같았다.

자신의 사진 위로 붉은색의 글씨가 휘갈겨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싹한데, 밝은 곳에서 보니 사진 속 예현의 목도리와 얼굴 위에는 날카로운 것으로 박박 긁어 놓은 자국 같은 것도 보였다.

[네 거 아니잖아, 왜 네가 하고 있어?]

악의가 묻어 나오는 글씨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예현이 툭, 책상 위로 편지를 떨어트렸다.

집 앞에서 서성거린 사람은 분명 그 기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 평범한 기자라면, 예현에게 이 정도의 악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스토커…….”

예현은 무언가를 떠올려내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정에게는 스토커가 있다고 했다. 아주 지독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스토커가.

다른 것도 아닌 목도리를 언급한 거라면 이 사진을 보낸 사람의 관심사는 오직 이정일 것이 분명했다.

이정에게 말해야 하나. 예현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띄웠다.

[♡]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일단 사진을 찍어서 이런 연락이 왔다고 말부터 해야 하나? 아니면 이상한 편지가 왔다는 것부터 말할까?

어떤 것부터 해야 하지. 예현은 애먼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지이잉-

그때, 그런 예현의 마음에 응답이라도 한 듯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김재련 이사님 : 집에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오후 9 : 51]

[김재련 이사님 : 기사 초고 도착했는데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오후 9 : 51]

이정의 연락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계약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던 예현이 재련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이정이는 지금 바쁜가요? 오후 9 : 55]

[김재련 이사님 : 아마 내일 촬영 대본 외우고 있을 겁니다. 직접 물어보시지 않구요. 오후 9 : 55]

대본을 외우고 있다라, 하긴. 촬영이 한참이라고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인데, 괜히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컨디션이라도 안 좋아지면 괜히 미안할 것 같은데.

고민하던 예현이 재련에게 답장을 했다.

[급하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지금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요. 오후 10 : 02]

차라리 재련에게 먼저 말할까. 그는 이정의 소속사 이사이자 그와 각별한 사이인 사람이었다.

어색하다 못해 냉랭한 사이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를 공유할 만한 사람이기는 했다.

[김재련 이사님 : 무슨 일입니까? 오후 10 : 04]

[김재련 이사님 : 기사에 문제 있는 부분이라도 있나요? 오후 10 : 04]

재련의 문자에 잠시 망설이던 예현이 떨리는 손으로 정체불명의 편지에 대한 것을 타이핑했다.

그리고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예현은 재련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집 밖으로 향했다.

*****

“늦은 시간인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저한테 먼저 연락주신 건 정말 잘하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예현 씨.”

급하게 차를 운전해서 온 듯한 재련이 말했다.

“사진부터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예현의 문자를 받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나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급하게 온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순순히 사진을 넘겼다.

“……이 목도리, 강이정이 준 겁니까?”

“네.”

“하아…….”

재련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예현이 조용히 말했다.

“전에 말했던 그 스토커……예요?”

스토커, 라는 이야기를 듣자 재련이 잠시 어깨를 흠칫했다. 마음이 복잡하기라도 한 것인지 머리를 헝클어트린 재련이 말했다.

“……한동안 조용하기도 했고, 정말 애인이 있으면 물러나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길래 정말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저희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사과부터 드릴게요.”

재련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당황한 예현이 그런 재련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에요. 사과받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예현이 바라는 것은 재련의 사과 따위가 아니었다. 예현은 이 스토커라는 사람이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그동안 어떤 짓을 해온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사과는 하실 필요 없지만, 이 스토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계약서 쓸 때 스토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런 일이 생기기도 했고, 이제 저하고도 관련된 일이 된 거니까 그 정도는 물어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현의 말에 재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재련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이야기해야겠죠. 이야기가 좀 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동생 분께서 혼자 계신 걸로 아는데…….”

“집 바로 앞인데요 뭘. 그 정도는 괜찮아요.”

“……스토커가 이정이를 쫓아다닌 건 2년 정도 됐습니다.”

잠시 입술을 물고 예현을 바라보던 재련이 스토커에 대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1년은, 스토커라고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꾸준히 선물을 보내고, 팬레터를 보내고. 딱 한 가지만 빼놓고 보면 평범한 팬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겠네요.”

“그 한 가지가 뭔데요?”

“……보통 연예인의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팬들은 많지만, 일상적인 장면 하나하나까지 도촬하는 팬은 적습니다.”

소위 말하는 사생팬이었다는 건가. 예현이 가만히 재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팬도, 그렇게 드물지는 않죠. 그 스토커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그 일상적인 사진을, 인화를 해서 이정이한테 계속 보냈다는 것 때문입니다.”

재련이 예현에게서 넘겨받은 사진을 꾹 누르며 말했다.

“촬영장 근처 편의점에 나가는 사진, 지인들과 만나는 것을 찍은 사진. 그런 사진에다가 이런 식으로 물감으로 쓴 편지를 동봉했었죠. 그렇지만 엔터계에 있으면서 별별 사람들을 다 봤으니, 그 정도면 얌전한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재련이 스토커의 편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스토커는 글씨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언제나 붓으로 편지를 썼다.

기억에 남으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조금 오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니 내버려 둔 것이었다.

“스토커가 이런 식으로 과도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건 여름쯤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스토커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항상 사진을 따로 동봉하던 스토커가 사진 위에다 물감으로 글씨를 휘갈겨 편지를 가져다 놓았다.

[?????]

물감이 짓이겨 놓은 것은 다름 아닌 해리였다.

촬영을 하기 전, 주연 배우들끼리만 간소하게 만남을 가져 봤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의견에 따라 해리와 이정, 그리고 소수의 배우들이 비공식적인 만남을 가졌었는데, 사진은 그날의 사진인 것 같았다.

‘사귀는 거라고 착각하기라도 한 건가?’

‘어차피 며칠 있으면 캐스팅 기사 나갈 건데, 그냥 내버려 둬요.’

사진 속의 이정과 해리는 작품의 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다.

다른 장면은 모두 실내에서 촬영했지만, 중요한 장면이라 이 장면만큼은 정원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 때문에 딱 한 장면을 야외에서 촬영했었는데, 그 장면을 찍은 거였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의 사택은 근교의 사유지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은 건물 안에서 벽창을 통해 두 사람을 보고 있었기에 얼핏 보기에는 두 배우의 비밀연애를 찍어둔 현장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많이 충격받으셨나 보네.’

‘거긴 또 어떻게 알고 쫓아간 건지 모르겠다. 진짜 우리 회사에 연줄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네 동선을 잘 알 리가 없는데.’

‘항공편도 다 찾아서 쫓아오는데 그 정도 가지고요.

이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대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재련 역시 스토커가 그 뒤로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나 걱정하지 말라고 기사 내 준 거야? 너무 귀엽다.]

며칠 뒤, 해리와 이정의 드라마 캐스팅을 알리는 기사가 나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스토커의 편지가 또 사무실에 전달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정도, 주석도, 재련도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정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 해명을 해 준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스토커는 그 이후로 차츰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이거 뭐야? 커피 사 달래서 사 왔더니.’

‘형이 가져다 놓은 거 아니었어?’

‘아닌데. 나 지금 막 사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토커는 편지가 아닌 다른 것들을 이정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촬영장인데 이걸 어떻게 가져다 놓은 거야. 대체?’

‘CCTV 돌려 달라고 하면 안 돼요?’

‘안 돼. 사생 있는 연예인이 한둘도 아니고 무슨 유난이냐고 할걸.’

‘진짜 아무도 못 봤대요?’

‘몇 번이나 말해. 스텝들 다 잡고 물어봤는데 수상한 사람 본 적 없다더라.’

심지어는 촬영장, 또 언젠가는 아파트 우편함까지.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아파트 우편함에 무언가가 놓이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스토커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소름 끼치는 것은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체를 들킨 적도, 흔적을 남긴 적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기가 껄끄럽다 보니 CCTV를 돌려 보기도 어려웠고 그나마 회사 앞 CCTV를/ 돌려봐도 수상하다고 할 만한 사람의 체구, 성별, 나이대는 매일같이 바뀌었다.

편지를 받은 지 2년, 본격적인 스토킹을 당한 지 6개월이 다 되어 가도록 이정과 재련은 스토커의 성별, 나이, 체구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나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다 알아]

[오늘 내가 좋아하는 옷 입었더라. 역시 우리 좀 잘 통하는 것 같아.]

그래도 참았다. 사생 없는 연예인이 어디 있다고, 괜히 유난 떤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어디 내색조차 하지 않고 버텨 왔는데 한 달 전, 스토커의 행동 방식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안녕, 이정아.’

처음 들은 스토커의 목소리는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헬륨가스를 마시기라도 한 듯 평범하지 않은 톤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정은 그동안 스토커를 잡으면 한 대 치지는 못하더라도 그 대단한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다짐한 것마저도 잊어버리고 순간 굳어 버렸을 정도였다.

‘히히.’

이정이 굳어 있는 동안 스토커는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이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뒤쫓았지만 이미 스토커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날부터 한 번씩 스토커가 이정이를 찾아왔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정보를 잘 알아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쫓아다니더군요.”

“경찰에 신고는…….”

“이 정도로 신고했다가는 오히려 강이정 쪽이 유난을 떤다고 비웃을 겁니다. 아무튼 그때부터 이정이가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그날도 주석이가 잠시 편의점에 간 사이에 그 스토커가 나타난 거였다고 들었습니다.”

재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라리 애인이라도 만들면 그 미친놈이 좀 덜할까, 하는 소리를 농담처럼 한 적은 있지만 정말 대형 사고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아무튼, 열애 인정 보도가 나가고 나서부턴 스토커도 잠잠했습니다. 보통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접근해 왔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충격이라도 받고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재련이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이 목도리……말인데.”

사진 속의 목도리를 살짝 어루만진 재련이 물었다.

“이건, 어쩌다가 강이정한테 받게 되신 겁니까?”

“집에 갔다가……. 유명한 목도리니 사람들이 알아볼 거라고, 하고 다니라고 했어요.”

“미련한 놈, 버리라니까 그걸 아직도 집에 두고 있었다니…….”

재련이 이마를 짚은 채로 중얼거렸다. 예현은 이 목도리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조심히 물었다.

“무슨 의미라도 있는 물건인가요?”

“……소중히 다뤄 달라고 하던가요?”

재련이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했다. 예현은 목도리를 받은 날, 이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주겠다고 하니까 가지라고, 팔아 버려도 된다고 하던데요. 소중하게 다룬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던 것 같아요.”

예현의 대답을 들은 재련이 착잡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목도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예현이 말했다.

“……돌려드릴까요? 아직 빨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더럽게 쓰지는 않았어요. 혹시…….”

“……아닙니다. 이정이 놈이 그걸 예현 씨한테 줬다면, 그건 그냥 예현 씨 물건인 거죠. 다만…….”

재련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꾹 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재련은 한참 뒤에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당사자도 아닌 제가 말하는 건 좀 꺼려져서요.”

“아, 아니에요. 꼭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겠지만…….”

짐짓 심각해 보이는 얼굴에 예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고개를 짧게 숙인 재련이 말했다.

“목도리……. 예. 유명한 물건이기도 하죠.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물건입니다. 대표작에서 가장 회자되는 장면에 착용한 물건이기도 하고, 그 장면을 촬영하기 전까진 이정이한테 꽤 소중한 물건이었거든요.”

“그건 들었어요. 팔면 200……. 아.”

이것까지는 말할 필요 없었나. 분위기를 풀어 보려다 실수를 한 예현이 자신의 입을 슬쩍 막았다.

“예. 재고가 없는 물건이기도 하죠. 애장품이라고 유명한 물건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고 다니질 않으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팬들도 많았을 겁니다. 아마 그 스토커도 마찬가지겠죠.”

“그럼…….”

“아마 예현 씨가 그 목도리를 하고 나왔다는 게 그 스토커의 심기를 많이 거스르기라도/ 했나 봅니다.”

재련이 예현을 보며 말했다.

“그것보다, 이정이가 아니라 저한테 먼저 연락을 주신 건 정말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염치없는 것 알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먼저 연락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정이도 당사자인데…….”

“아, 스토커가 다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건 당연히 알릴 겁니다.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재련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목도리에 대한 건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정이 놈한테는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목도리에 대한 언급만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부탁이었으나 부탁하는 이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차마 왜요? 라고 묻지도 못할 정도로 비장한 말에 예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안심한 듯 한숨을 쉰 재련이 뒤늦게 예현을 걱정했다.

“제가 너무 제 이야기만 했군요. 많이 놀라진 않으셨습니까?”

“…….”

예현이 입을 다물었다. 놀랐냐고, 당연히 놀랐다. 평생 겪어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겨우 일주일 사이에 몇 개나 일어난 건지, 평생 치의 불운을 다 겪은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오랜 침묵 끝에 예현이 괜찮다는 대답을 내놓았지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것이 정말 괜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편지를 발견한 거라 다행이었죠. 동생이 그걸 보기라도 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예서가 이 편지를 봤으면 분명 본인의 일처럼 화를 내고 걱정을 냈겠지. 예현은 그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답답할 정도로 경계심이 없고 긍정적인 아이라는 걸 알지만, 가능하다면 영원히 그런 사람으로 살게 해 주고 싶었다.

걱정도, 공포도 모른 채 지금처럼 천진난만하게 일상을 누렸으면. 그게 예현이 예서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었다.

“저번에 예서가 집 앞에서 수상한 사람을 봤다고 했을 때도 정말 놀랐었는데…….”

“수상한 사람을 봤다고요?”

예현의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에 놀란 재련이 큰 소리로 물었다. 깜짝 놀란 예현이 그제서야 이 이야기를 진작 했어야 했다는 걸 기억해 내고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예현이 고개를 들고 재련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예서가 집 앞에서 웬 수상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는 걸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남자를 봤다는 곳이 이 사진이 찍혔을 만한 각도라…….”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재련이 다급하게 말했다. 내내 무뚝뚝하거나, 이정을 디스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렇게 조급하게 구니 조금 놀란 예현이 느릿하게 말했다.

“처음엔 기자인 줄 알았어요. 아, 이것부터 말해야 하는구나. 회사 앞까지 찾아온 기자가 있었는데 쫓아 보냈거든요. 그래서 그 기자가 찾아온 줄 알았어요. 예서가 말한 그 수상한 사람의 키나 체형도 그 사람이랑 비슷했었거든요.”

재련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를 해 달라고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다른 기자를 통해서 인터뷰를 하고 입장을 내면 좀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깐, 그럼 이정이가 인터뷰를 먼저 제안한 게 아니라는 겁니까?”

“제가 이야기를 하니까 먼저 제안해 주긴 했어요.”

그 놈,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 안 하던데……. 작게 중얼거린 재련이 말했다.

“그 부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계속 이야기해 주십시오.”

예현의 이야기를 듣는 재련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의 말 중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메일,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재련의 말에 예현이 핸드폰을 켜 그에게 메일을 보여 주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메일을 보던 재련이 말했다.

“어쩌면 그 사람, 기자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재련이 액정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회사 메일이 아니라 개인 메일입니다. 보통 인터뷰 제의는 개인 메일이 아니라 회사 메일로 전송하는 걸 생각해 보면…….”

재련의 말대로 메일의 발신 주소는 회사의 도메인이 적힌 주소가 아닌, 평범한 포털 사이트의 메일이었다.

“게다가 스토커가 이정이 앞에 모습을 보인 적이 몇 번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그만한 키에 그런 체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기자가 아니라 스토커였을 수도 있다는 건가. 예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럼 그 스토커가 이미 내 집으로도 모자라서 직장, 번호까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게 아닌가. 오싹한 기분이 든 예현이 재련을 바라보았다.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이정이는 연예인이라 신고하기가 조금 껄끄러웠지만, 아무래도 예현 씨는 그런 제약이 없을 테니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경찰에다 ‘제가 유명 연예인의 애인인데, 미친 스토커가 연예인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저까지 스토킹하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하면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줄까.

순찰이나 자주 돌아 주겠다고 하면 다행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예현이 말했다.

“계약할 때도 말했지만, 저 혼자만 이 연애의 리스크를 짊어지는 건 상관없어도 제 가족한테까지 위험이 옮겨가는 건 용납 못 해요.”

“…….”

복수도,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예서였다. 스토커가 이미 자신의 집까지 알고 있는데, 예서가 집에 혼자 있다가 스토커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스토커가 예서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이 계약, 그만둘래요. 아직 인터뷰도 공개 전이고,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헤어졌다고 하면 상관없는 거잖아요.”

예현이 고개를 급하게 들고 말했다. 그러자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재련이 한숨을 쉬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왜…….”

“정 계약을 파기하고 싶으시다면 위약금을 물고 파기하시는 방법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 금액을 감당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위약금이라는 말에 예현이 행동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확실히 계약서에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스토커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이라는 걸 알기 전이었잖아. 예현이 말했다.

“예서가 다치기라도 하면요?”

“……거처를 바꾸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비용은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사는 곳을 바꿔도 어차피 제가 있으면 그 스토커는 따라오는 거잖아요.”

예현의 말에 재련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다.

“두 분의 거처를 따로 잡아 드리겠습니다. 스토커 건에 대해서는 일부러 속인 건 아니지만 저희 쪽이 안일했던 건 사실이니 변명할 말이 없네요.”

“말만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강이정 그 자식입니다. 이기적이라는 거 알지만 계약 기간까지만이라도 애인 행세는 계속 해 주셔야 합니다.”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 않는 재련의 모습에 예현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럼 그 스토커를 잡아 주기라도 하던가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면서 저한테만 다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거, 우스운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잡겠습니다.”

재련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예현 씨가 스토커의 얼굴을 봤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핸드폰 번호도, 메일 주소도 있으니 생각보다 빠르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예현이 만났던 기자가 스토커라면 예현은 이미 그의 핸드폰 번호와 메일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

맨얼굴도 확인한 상태이니 그 지긋지긋한 스토커에게서 이정을 해방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그건 다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재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부탁했다.

위약금, 그놈의 위약금만 아니었어도 당장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텐데.

발이 묶여 버린 예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얘기 들었어 오전 9 : 42]

다음날, 예현은 자는 동안 도착한 이정의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 : 괜한 일 겪게 해서 미안해 오전 9 :42]

[♡ : 시간 괜찮을 때 연락 줘 오전 9 : 43]

머리가 복잡해 밤새 뒤척였더니 12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예현이었다.

예현은 크게 한숨을 쉬고 이정의 문자에 답장을 남겼다.

[어차피 촬영 때문에 바쁜 거 아냐? 오전 11 : 55]

지이잉-

“깜짝이야.”

그리고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이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예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야기 들었어. 많이 놀랐지. 미안해.]

목소리가 잠긴 이정이 인사도 없이 말했다.

[그 스토커가 그렇게까지 할지는 몰랐어. 나도 그 기자 얘기를 들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자신을 자책하는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 제일 나쁜 놈은 스토커지.

2년이나 스토킹에 시달려 오다 겨우 벗어난 줄 알았으니 방심했던 거겠지. 예현은 그렇게 이정을 탓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됐어.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그래도…….]

이정이 여전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에 있었다면 그 넓은 어깨가 축 처지며 눈물을 글썽거리고만 있을 것 같은 목소리에 예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너한테 화 안 났어. 근데 내가 오늘 바쁠 예정이거든. 들었겠지만 일단 당분간 지낼 집부터 구해야 하고, 짐도 옮겨야 해서…….”

[아, 그거 말인데.]

이정이 예현의 말을 끊고 말했다.

[형만 괜찮으면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예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수화기 너머의 이정이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지낼래?]

“뭐?”

이정의 말에 예현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같이 살자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 다른 게 아니라……. 형도 와 봐서 알겠지만 이 아파트가 보안도 좋고, 역이랑도 가깝고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스토커 때문에 이사를 한 거라고 했었지. 분명 보안 하나는 철저하니 집에서만큼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냐. 다른 곳 찾아볼게.”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예현은 예서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다.

예서에게는 급하게 집 안 보수공사 일정이 잡혀 몇 달 정도만 집을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해 둔 상태였다. 아직 따로 지내야 한다는 건 말하지도 못했는데, 혼자만 좋은 곳에 가서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동생 때문이면, 동생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지내면 되잖아. 여기 오피스텔도 있거든.]

이정이 달콤한 말로 예서를 꼬드겼다. 그러나 예현은 여전했다.

“예서 학교 문제도 있고. 매일 택시 타고 다닐 수도 없잖아.”

[금전적인 부분은 이쪽에서 다 지원해 줄 수 있어.]

이정이 다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불안해서 그래. 그 스토커, 어딜 가나 따라붙었는데 유일하게 못 따라온 곳이 여기야. 그때 봤겠지만 우리 집엔 남는 방도 있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

[내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 부탁할게…….]

이정이 수화기 너머로 약한 소리를 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제안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아…….”

확실하게 스토커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고, 택시를 타고 다닌다면 학교까지 매일 30분씩 버스를 타고 다니는 예서의 통학 시간에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하나. 예현이 한숨을 쉬며 멍하니 짐가방을 바라보았다.

*****

[강이정♡……. 21세기 신데렐라 Y씨와의 인터뷰]

그리고 월요일, 이정과 예현의 인터뷰가 웹상에 공개되었다. 그로 인해 온갖 커뮤니티가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로맨틱…….]

[와 강이정 애인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뭔가 어른들의 연애 같은 느낌]

사람들은 이정의 연인인 예현에 대한 정보를 나노 단위로 뜯어 가며 그에 대한 추측을 해 나갔고, 또 그것을 즐겼다.

[강이정 애인 사진 푼다(고화질 최초 공개 ㅎㄷㄷ)

[ㄴ 어그로 놉]

[ㄴ 아 ** 진짠 줄 알고 헐레벌떡 들어왔는데]

[ㄴ 일반인 사진에 왜 그렇게 집착함? ㅉㅉ]

일각에서는 예현의 사진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누군가는 일반인인 예현을 걱정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의 신상을 지켜 주기도 했다.

물론, 그러든 말든 예현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예현 씨,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아, 별거 아니에요. 잠을 좀 못 자서…….”

“왜요?”

서 주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예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말대로 예현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인터뷰 공개되고 반응 때문에 그래요?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던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요~.”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급하게 할 일이 있었거든요.”

“주말인데도 일한 거예요? 넘 고생한다. 쉬엄쉬엄해요.”

서 주임이 예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위로해 주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예현의 말대로, 그는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 : 짐은 다 챙겼어? 8시에 사람 보낸다고 들었는데. 오전 11 : 04]

급하게 옮겨야 할 짐을 싸느라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예현이 피곤한 눈을 하고 이정의 문자를 바라보았다.

“강이정, 연애하더니 완전 다른 사람 됐다 너?”

해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이정을 보며 딴죽을 걸었다.

“한창 좋을 때잖아요.”

웃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을 끈 이정이 해리를 보며 웃었다. 오늘은 며칠 만에 새벽, 밤이 아닌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좋겠다. 얘. 나도 연애 좀 하고 싶어.”

“선배님 좋아하는 분들이 줄을 설 텐데, 마음에 드는 분하고 잘해 보시면 되죠.”

“아무나 골라 사귈 정도로 궁하진 않거든. 암튼, 부럽다. 부러워.”

해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이라 이런저런 파문을 일으키는 그녀이지만 해리는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애인 얘기는 오늘도 아끼는 거야?”

그렇기에 틱틱거리면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잘 넘어오지는 않는 그녀였지만 예현에 대한 것은 못내 궁금한 듯, 틈만 나면 예현에 관련된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아하하. 저보단 선배님 매니저 분께서 형에 대해 더 잘 알지도요. 저도 아직 연애 초반인 데다가 촬영하느라 거의 집데이트밖에 못 해서 자랑할 만한 이야기가 많이 없어요.”

“그거 촬영 빨리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 맞지? 사실 나도 그래. 딱 한 달, 아니. 일주일만 푹 쉬고 싶다.”

해리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명아는 자기 얘기 잘 안 해 줘. 내가 안 물어봤겠어? 별로 재미도 없는 이야기일 거라면서 입 딱 다물고 대답 안 해 주니까 너한테나 물어보는 거지.”

해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건 나르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명아를 보며 말했다.

한명아, 예현의 대학 동창.

그리 친한 사이도, 무엇도 아니기에 사적인 대화 한 번 나누어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었다.

“저도 형 대학 때 이야기 같은 거 듣고 싶은데……. 명아 씨는 늘 바쁘셔서 말 한번 걸기가 힘들더라고요.”

“저거 저거, 호구같이 착해서 그래. 그런 거 일일이 다 도와준다고 누가 알아줘? 그럴 시간에 나나 좀 돌봐 주지.”

해리가 혀를 쯔쯔 차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명아는 시간이 빌 때면 늘 촬영장에서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곤 했다.

“쟤가 내 매니전지, 촬영장 스태프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이정에게 명아는 양날의 검 같은 사람이었다.

예현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들킬 수도 있으니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있었지만, 예현에 대한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살짝 건드려 볼 만하기도 한 그런 사람.

“사람이 좋은 거죠.”

“나한테만 좋으면 돼.”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예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았겠다, 슬슬 명아를 통해 예현의 옛날이야기를 들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디 가?”

“저도 좀 도와드리려고요.”

“다들 너무 착하네, 착해. 아주 나만 못돼 먹었지.”

해리가 툴툴거리며 손에 들린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정은 비즈니스용 미소를 얼굴에 장착한 채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저도 좀 도와드릴게요.”

“어, 아니에요. 곧 촬영이시잖아요.”

“이거 잠깐 옮겨 드릴 시간은 있어요. 선배님 촬영분이 먼저기도 하고.”

“어어, 제가 할 일인데…….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명아 역시 스태프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니 미안할 필요도 없지만, 이정이 명아가 든 박스를 빼앗아 들며 웃었다.

“정 미안하면……. 우리 현이 형 대학 동창이시라던데, 형 대학 때 이야기라도 해 주세요.”

“……걔가 절 아직 기억한다고 해요?”

명아가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말했다.

“네. 대학 동창이라고 하던데요.”

“아……. 네. 맞아요. 대학 동창.”

명아가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저랑 그렇게……. 친하게 지낸 건 아니었어서, 별로 해 드릴 수 있는 이야기도 없어요.”

“사소한 거라도 형에 대한 이야기면 다 좋은 걸요, 뭐.”

이정이 짐을 들고 명아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꼭 이야기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부담 갖지 마세요.”

“아, 아니에요. 부담은 아니지만……. 정말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래요. 규진 오…….”

무의식적으로 규진 오빠, 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명아가 입을 다물었다.

예현의 새 애인 앞에서 7년 사귄 전 애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예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1학년 때 잠깐 친하게 지내긴 했었는데, 대학 생활이 그렇잖아요. 사소한 걸로 친해졌다가, 또 사소한… 걸로 틀어질 수도 있고…….”

명아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돌리려 했다.

“그냥……. 대단하게 할 이야기도 없어요. 성실하고, 착하고…….”

“대학 다닐 때도 인기 많았죠?”

“네.”

아, 실수.

이정에게 휘말려 얼떨결에 대답을 해 버린 명아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이정이 풋,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하하. 별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긴장해요.”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현이 형이 워낙 귀엽잖아요. 누가 그런 사람을 안 좋아하겠어요.”

이정이 예현을 떠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소리를 치고, 펑펑 울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잘 해내고 말 거라고 주먹을 꾹 쥐는 모습이 인상적인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제 애인이라는 게, 전 자랑스럽거든요. 그리고 옛날 일은 옛날 일일 뿐이죠. 어차피 지금 형 옆에 있는 사람은 전데.”

이정이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명아는 그런가, 하는 생각에 이정을 빤히 바라보느라 기껏 들고 온 짐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이정이 짐을 가리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명아가 짐을 내려놓았다.

“예현이…….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명아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정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것인지 그녀는 이정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좋은 애예요. 제가 이런 말 하는 거 오지랖이지만……. 그, 전에는 되게 위태로워 보였거든요.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박규진과의 연애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나 보지. 이정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생긋 웃었다.

“당연하죠. 저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거든요. 저한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더 잘 아니까 더 조심하면서 살려고요.”

비록 그런 말을 하는 이정의 속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지만, 제 어지러운 속을 예현에게 들킬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괜찮았다.

“친구 분이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것만 봐도 형이 대학 생활 어떻게 했는지 알겠어요.”

“아, 제, 제가 이런 얘기 했다는 건 말하지 말아 주세요.”

명아가 갑자기 고개를 휙 쳐들더니 말했다.

“기분 나빠 할 거예요. 저랑 정말 안 친하거든요. 오지랖이기도 하고……. 아무튼 제가 이런 말 했다는 건 말하지 말아 주세요.”

명아는 예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게 그랬다.

참 애석하게도,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만났다고 무조건 좋은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제 존재도 완전히 까먹고 있었을 텐데, 그런 애가 이런 얘기 했다는 걸 알면 좀 뭣하지 않겠어요?”

이정은 필요 이상으로 예현에게 자신의 말을 알리지 말아 달라 신신당부하는 명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그녀를 떠보지 않았다.

이 소심하고 순한 사람한테서 이만한 반응을 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물러설 만했으니까.

“얘기 안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냥,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한 번씩 이야기해 주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뭐. 제가 한 매니저님을 탓하거나 할 리는 없잖아요.”

순한 양의 탈을 쓴 이정이 환하게 웃었다. 그의 햇살 같은 미소에 순간 넋이 나간 얼굴로 이정을 바라보던 명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해리 언니 촬영 시작할 때 다 됐는데……!”

“아, 남은 건 제가 정리할게요. 빨리 가 보세요.”

이정이 명아에게 말하자 명아는 고개를 연신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한 매니저님.”

이정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명아의 뒷모습에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사이인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들으려면 두 사람 중 누구를 건드려 봐야 하려나.

“박규진, 박규진…….”

예현을 이 잃을 것 많은 계약연애에 끌고 온 장본인, 그가 없었다면 예현은 이 관계를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무리 이정이라도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박규진의 존재에 감사해야 하는데,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괜히 짜증이 나는 건 대체 왜일까.

“마음에 안 드네.”

이정이 작게 중얼거리며 명아가 두고 간 박스를 정리했다.

*****

“등록되셨습니다.”

예현은 이정의 아파트 서버에 지문등록을 하고 관리사무소를 빠져나왔다.

‘카드는 당연히 필요한 거고, 주민 시설까지 사용하려면 지문등록도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다소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정의 등쌀에 떠밀려 반강제로 지문등록까지 마친 예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화려한 아파트 단지 내부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더니 돈값을 하긴 하는구나.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향해 걸었다.

지잉-

[♡ : 집에 왔어? 오후 7 : 01]

핸드폰이 울리자 예현은 이정의 문자를 확인하고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응. 늦어? 오후 7 : 02]

[♡ : 아니. 곧 갈거야. 같이 저녁먹자 오후 7 :02]

예현은 이정의 칼 같은 답장에 등골이 오싹거리는 것을 느꼈다. 잠깐, 저녁?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들겼다.

[사먹을거야? 오후 7 : 03]

[♡ : 아니. 냉장고에 재료 많아. 나 시켜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오후 7 : 04]

그럼 이대로 있다가는 또 그 시큼한 된장찌개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잖아. 예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서렸다.

[먹고싶은거 있어? 오후 7 : 05]

차라리 내가 요리를 하고 말지. 절대 그 요리를 다시 먹고 싶지는 않았던 예현이 급박하게 답장을 보냈다.

도대체, 입맛이 이상한 건지 요리에 대한 기준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된장찌개는 맛과 비주얼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괴식이었다.

먹고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그걸 또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입맛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난 딱히 편식 안 해 ^^ 오후 7 : 10]

답장은 예현이 이정의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돌아왔다.

그럼 일단 냉장고부터 보고 뭘 해야 할지 생각해야지. 예현은 이정에게 받은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짐 정리도 해야 하는데…….”

이정의 회사 쪽에서 보내 준 차로 옮긴 짐들이 현관 앞에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리 많은 것을 챙겨 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겨울이라 옷의 부피가 큰 탓에 실제보다 짐이 많아 보였다.

짐 정리는 나중에 해도 되지만, 저녁 식사는 때를 놓치면 늦지.

예현은 현관 앞을 채우고 있는 짐들을 애써 무시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재료들이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편식은 안 한다고 했으니 자유롭게 만들자면 뭘 해야 할까.

예현은 재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나마 가장 익숙한 요리인 된장찌개를 하자니 저번에 먹은 데다가 이정의 이상한 요리를 보아하니 그의 입맛 역시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고 다른 메뉴 역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계란말이는 정상적인 맛이었지.”

그럼 계란 요리는 괜찮지 않을까. 예현은 냉장고 한편을 채우고 있는 계란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난하게 할 수 있는 게 최고겠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몇 가지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

촬영을 마친 이정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예현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조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기분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어?”

그런 그의 변화를 눈치챈 주석이 백미러로 이정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뭐, 기분 좋을 것까지야.”

“그나저나 예현 씨가 걱정이야. 그 스토커가 설마 그렇게까지 할지는 몰랐는데…….”

주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를 운전하며 말했다.

“너도 그랬잖아. 걔가 맨날 너한테 진짜 애인이 있으면 따라다니지 않겠다느니, 거짓말인 거 다 안다느니 했었다고.”

“그랬었지.”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정은 스토커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로 자신은 이정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과시 같은 것이었다. 예현에게 입을 맞췄던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믿은 적은 없었다.

“미친놈 머릿속 이해하려고 해서 뭐 해.”

“그래도 걱정되잖아. 에휴. 그래도 이번엔 짚이는 곳이 있다니까 조사나 해 볼 수 있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예현이 스토커로 추정되는 사람의 얼굴을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일 주소도,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으니 스토커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하는 거 보면 본인 명의 메일이나, 핸드폰 번호를 썼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꼬리라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꼬리를 숨길 생각도 못 할 만큼 화가 났었나 보지.”

스토커가 허점을 드러낸 것은 이정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 3개월 안에 부디 그가 더 흥분하고, 더 조급해져서 많은 실수를 해 주길.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그러니까 예현 씨한테 더 잘해 줘. 얼마나 놀랐겠냐.”

“당연히 잘해 줘야지.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는 사람인데.”

이정이 씨익 웃었다. 누구나 넋을 놓고 바라볼 만한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주석은 그 웃음이 그닥 탐탁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고.”

“내가 뭘.”

주석은 그런 이정을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20살, 그가 연예인이 되었을 때부터 이정을 봐 왔지만 이정은 이미지와 달리 참 속이 까만 사람이었다.

사람은 절대 쉽게 믿으면 안 된다. 약점 하나 잡아 놓지 않고 사람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갓 20살의 이정을 봤을 때는 절로 한숨이 나왔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처세술과 연기력만은 뛰어난 이정이었기에 사고 한 번 치지 않고 연예계 생활을 이어 왔다. 하지만 주석은 언젠가는 저 못돼 먹은 성격이 사고를 한번 제대로 칠 거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 왔다. 내려.”

어느새 이정의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 들어선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주석은 차를 세운 채 이정을 향해 휙 돌아보며 말했다.

“너 그러다가 분명 후회하는 날 올 거야.”

“내 인생 어떻게 될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형.”

대수롭지 않게 주석의 말을 받아친 이정이 차에서 내려 주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봐.”

“어휴.”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그렇게 생각한 주석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차를 운전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가면 예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주인 없는 집이라고 아무것도 못 하고 소파에 앉은 채로 눈치만 보고 있지 않을까.

아니, 우선은 짐부터 정리하느라 바쁘려나?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삐삐삐삐-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이정의 코를 찔렀다.

아, 아까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더니 저녁을 하려고 물어본 거였나.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집안일은 웬만하면 내가 할 생각이었는데. 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왔어?”

벽 한편에 장식용으로 걸어 둔 앞치마를 야무지게 착용한 예현이 프라이팬을 든 채로 이정을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주방 써도 되는지부터 물어봤어야 하는데.”

“같이 사는데 그런 것 하나하나 물어볼 필요가 있겠어? 괜찮아.”

이정이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된 첫날이니까. 내가 해 주고 싶었는데.”

“……아니, 뭐. 혼자 집에 있기도 심심하고. 나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거든.”

차마 네 요리가 두 번 먹기는 싫은 맛이라 그랬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예현이 이정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뭐 하고 있었어?”

“음. 오므라이스?”

예현이 만들고 있던 것은 오므라이스였다. 계란 요리, 만들 수 있는 음식 중에서 호불호가 덜 갈리는 것이 뭘지를 생각해 봤더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이것이었다.

“맛있는 냄새 난다.”

“다 계란 냄새지. 뭐.”

예현이 어느새 자신의 뒤로 훅 다가온 이정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담.

초롱초롱한 눈을 한 이정이 예현의 뒤에서 속삭였다.

“기대되는데.”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무난한 걸로 했는데…….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

“형이 해 주는 건데 당연히 맛있겠지.”

이정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현의 등 뒤에서 한 발짝 떨어진 그가 냉장고를 열며 물었다.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어?”

“음……. 그냥 케찹이나 물 정도만 준비해 주면 될 거 같은데. 거의 다 했거든.”

예현이 마지막으로 계란을 뒤집으며 말했다. 이정은 얌전한 얼굴을 하고 예현의 말대로 식사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

“집에서 남이 해 주는 밥 먹는 거, 진짜 오랜만이야.”

이정이 식탁 위에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남이 해 주는 밥만 먹었을 것같이 생겼는데. 의외네.”

예현이 실없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그러자 이정 역시 픽,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평생 그러고 살 줄 알았는데.”

“다 됐다.”

접시 위에 예쁘게 음식을 놓는 데 성공한 예현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접시를 바라보았다.

예현은 접시를 들고 조심히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너네 집은 무슨 프라이팬 하나까지 비싸 보이냐. 접시 하나에 막 십만 원씩 하고 그런 거 아냐?”

예현이 접시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맞긴 한데. 이걸 말하면 접시 하나 만지는 것도 겁을 내려나. 이정은 예현의 앞에 물잔을 놓아 주며 말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다 똑같은 집인데.”

이제 두 사람의 동거를 기념하는, 첫 식사가 모두 준비되었다.

“아, 케찹 뿌려 먹을 거야?”

이정이 케찹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예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먹을 거라 꺼내 달라고 한 줄 알았는데.”

이정이 케찹통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예현이 아차, 싶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아……. 버릇이 돼서.”

오므라이스에 케찹을 뿌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현이 케찹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예서가 케찹 없으면 안 먹어서, 습관적으로 말했나 봐.”

예현은 예서를 떠올리며 뒷 목을 긁적거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예서가 이해를 해 줄지 엄청난 고민을 하며 말했던 따로 살기였는데 예서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었다.

‘완전 좋아! 우와. 나 거기 티비에서 봤는데. 겁나 비싸고 좋아 보이던데…….’

이유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을 보며 예현은 착잡한 얼굴을 했었다.

“동생하고 사이가 진짜 좋은가 봐.”

“사이좋지. 가족인데.”

예현의 말에 이정이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헤실거리는 얼굴로 돌아온 이정이 가만히 수저를 들었다.

“맛있다.”

“입맛에 맞아?”

“응. 완전.”

이정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예현은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매일 계란 요리를 해 줄 수도 없고 다음부터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넌 외동이야?”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식사 자리를 어색하지 않게 하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아니. 4살 차이 나는 누나 하나 있어.”

“너랑 닮았어?”

예현의 질문에 이정이 곰곰이 유정의 외모를 떠올렸다. 닮았냐라. 유정 역시 같은 유전자를 받은 우성 알파였기에 이정과 닮은 면이 꽤 많은 편이었다.

“많이는 아니고, 남매라고 하면 그렇구나, 할 정도로?”

“그럼 엄청 미인이시겠다.”

예현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강유정이 미인이기는 하지. 이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응. 그렇지.”

“누나하고 별로 안 친해?”

평소와 달리 영 시큰둥한 말투에 이상한 기분을 느낀 예현이 이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차, 강유정 생각을 했더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빴던 건가. 이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냐. 엄청 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사이 나쁜 건 아닌 정도?”

이정이 그렇게 말하자 눈치를 보던 예현이 조금 안심한 듯 말했다.

“그렇구나. 어떤 분일지 궁금하다. 너랑 닮은 여자분이라니 신기하네.”

유정은 어느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도 사진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재벌 3세이자 EH의 차기 주인이었지만 예현은 검색 같은 방법은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나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네.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어떤 사람이냐라……. 음, 아주 무서운 사람이지. 우리 누나는.”

이정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물며 말했다.

“어릴 때 많이 혼나기라도 했어?”

예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이정은 그런 예현이 신기했다. 자신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의 외손자라는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드라마 같은 것도 안 보고 사는 걸까.

이런 순진한 질문이라니. 그런 부분이 더 신예현 같기는 하지만.

“혼났다기보다는 많이 배웠지.”

이정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나이 차이가 애매하게 나서 형네처럼 그렇게 애틋한 사이는 아냐. 지금은 어른이고, 만날 일도 없으니까 더 그렇고.”

“하긴 4살 차이면 애매한 차이기는 하네.”

예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식사를 이어 갔다.

“형 동생은, 연락해 봤어?”

“부자 체험 하는 것 같아서 좋아 죽겠다고 난리던데. 하……. 아니다. 차라리 속 편해서 다행이야.”

예현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비싼 집에 산다며 좋아하던 예서를 떠올리며 말했다.

“스토커 같은 얘기는 알아 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나도 재련이 형한테 이야기 듣고 많이 놀랐어. 하필 바빴던 날이라 이야기도 늦게 전해들었었거든.”

이정이 순식간에 걱정 어린 표정을 뒤집어쓰고 말했다. 이렇게 빠르고 대담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을 뿐, 스토커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유순한 얼굴이었다.

“미안해. 정말 완전히 떨어져 나간 줄 알았는데, 괜히 형한테까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정의 속을 꿈에도 모를 예현이 당황하며 말했다.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고개 들어.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예현이 숟가락을 놓고 말했다.

“됐어. 스토커가 있다는 얘기 듣고도 제대로 확인 못 한 내 잘못도 있고……. 너도 많이 시달렸다며. 생각할 여유가 없었겠지.”

예현이 그렇게 말하며 이정을 다독였다.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지만……. 그냥, 스토커가 하루빨리 잡혀서 덜 불안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현이 서투른 위로를 건넸다.

세상에 연예인 걱정만큼 쓸데없는 걱정이 없다던데, 그래도 눈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가 있겠어.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형도 좀 안심할 수 있을 거고…….”

“됐어. 내 걱정은 하지 마. 어차피 월 2000짜리 알바인데……. 순탄한 게 이상한 거지.”

예현이 이정을 안심시키려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예서한테까지 직접적인 피해가 끼칠 위험이 있는 줄 알았으면 월 2000이 아니라 5000이어도 안 했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그보다, 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여기 엄청 좋더라. 로비도 그렇고, 다른 시설도 엄청 좋아 보이던데.”

침울해진 분위기에 예현이 말을 돌렸다.

“나 아파트에 수영장 있는 거 처음 봐.”

예현이 관리실을 찾아 헤매다 보았던 아파트 내의 시설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한 달에 관리비만 몇백 단위라더니, 역시 그만한 관리비를 받는 아파트는 달라도 뭐가 다르다는 듯 단지 내에는 수많은 시설들이 갖춰져 있었다.

“신기하더라. 아파트가 아니라 호텔 같아.”

평생을 한곳에서만 살아온 예현에게는 온통 신기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부유하게 살아온 이정에게는 달랐다. 물론 다른 곳에 비해 시설도, 보안도 좋아서 이곳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정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이정의 본가는 온갖 시설들이 딸려 있는 저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살다 온 사람에게나 이 시설들이 신기하지, 혼자 쓸 수 있는 똑같은 시설이 갖추어진 곳에서 생활해 오던 이정에게 그 시설들은 큰 메리트를 가지지 못했다.

“거주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면 사용 가능한데,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그러나 이정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아니, 딱히 가 보고 싶을 것까지는…….”

“나도 가 보고는 싶었는데, 괜히 갔다가 사람들 눈에 띄기만 할 것 같아서 못 갔거든.”

이정이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형이라도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

예현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딱히 그럴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아냐. 어차피 출퇴근 하느라 시간도 없고…….”

“있는 동안이라도 가면 좋지. 나는 못 가지만, 형은 아니니까…….”

예현은 이정의 말을 거절하려고 했으나 이정의 순한 눈망울을 보고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 나면.”

“와. 재미있겠다. 다녀와서 꼭 후기 알려 줘.”

이정이 눈꼬리를 휘며 생긋 웃었다.

*****

“어휴…….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예현은 결국 이정의 등쌀에 못 이겨 아파트 단지 내의 피트니스에 등록했다.

이정이 금액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며 예서까지 등록해 주었지만, 예서는 황금 같은 주말에 운동은 무슨 운동이냐며 도망가 버리고 결국 예현 혼자 피트니스 센터에 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최대한 챙겨 주고 싶어서. 그리고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예현을 이곳으로 보낸 장본인인 이정은 아침 일찍 추가촬영이 있다며 집을 비웠고 결국 할 일도, 아파트 단지가 아닌 곳으로 나갈 용기도 없었던 예현은 피트니스 센터에 방문했다.

이런 곳은 와 본 적도 없는데. 일단 달리기부터 하면 되는 건가?

예현이 어색한 걸음으로 러닝 머신을 향해 다가갔다.

“으음…….”

이건 어떻게 건드리는 거지. 생전 처음 써 보는 기계에 예현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 됐다.”

겨우겨우 기본 조작법을 알아낸 예현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이런 건 처음 해 봐서 그런지 어색하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뛰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다.

집 밖으로 나가면 크든 적든 지출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휴일에는 집에만 붙어 있었는데.

그리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 하게 된 거 열심히 해 볼까,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러닝 머신 위를 달렸다.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피트니스 센터에 온 사람의 첫날이 순조롭게 흘러갈 리가 없었다.

슬슬 숨은 차는데, 러닝 머신에서 내려오면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 탓에 예현은 쳇바퀴 위에 올라간 다람쥐마냥 계속해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삑.’

그런 예현을 끝나지 않는 굴레에서 끄집어 낸 사람은, 예현이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이였다.

“누구…….”

“하.”

성큼 다가와 예현의 러닝 머신을 꺼 버린 여자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여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씩씩거리며 예현에게 말을 건 것은 다름 아닌 규진의 어린 새 애인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계약연애의 정석 1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