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5)

#2

예현은 차에 앉은 채 매니저 주석이 사다 준 따듯한 캔 커피를 홀짝거렸다.

“여긴 왜 왔어요? 찍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급하게 이야기할 게 있어서. 일부러 찍히려고 온 것도 있고요.”

예현의 말에 이정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찍히러 왔다고요?”

“그 미친 스토커가 요즘은 좀 잠잠하긴 한데……. 그래도 언제 어디서 감시하고 있을지 안심이 안 돼서요.”

이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긴 애초에 스토커 때문에 엮인 거였었지. 예현이 커피를 홀짝거리다 말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그렇게 많이 듣진 못했어요.”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

철두철미하시긴, 이정이 좌석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7년을 사귀었는데 결혼 기대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고 했던 부분부터였던 것 같네요.”

“그 정도면 다 들었네요.”

하하, 예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기만 하다 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그걸 누가 듣기까지 했다니.

게다가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이별의 내막까지 다 들려주고 말았다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심해 보이겠네요.”

“한심해 보일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저, 그 사람 누구인지 알거든요.”

“안다고요?”

내내 멍한 눈으로 자신의 발치만 바라보고 있던 예현이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이쪽 보네요.”

“……거짓말이에요?”

예현이 고개를 들자 이정이 그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예현이 표정을 약간 찌푸리며 말하자 이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NW 삼남 박규진 씨. 이래 봬도 스무 살 전까지는 이리저리 끌려다닌 곳이 많아서요.”

아, 그러고 보니 이쪽도 재벌가의 손자라고 했었지. 규진 역시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다닐 때가 있었으니 어쩌다 마주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예현은 그제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인이 그 사람이었어요?”

“…….”

예현이 아무 말 없이 이정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며 이야기를 피했을 테지만 오늘은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랬어요. 네.”

예현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창문을 통해 골목이 다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으나, 규진은 그리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니 여태껏 골목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강이정 씨가 뭣 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냥 사실 정정하고 조용히 살려고 했었거든요.”

“참 솔직하시네요.”

본인의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발언이었으나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돌린 거였는지 알아요?”

예현이 자조하며 말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예현은 이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 미친 인간이 나보고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졌다고, 결혼은 무리지만 애인 관계는 유지해 주겠다고.”

예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전까지는 그냥, 정신없어서 생각할 틈도 없었으니까 어제 헤어졌다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그 말을 보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그 말만 듣지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확실히, 예현은 그날 규진의 문자를 보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아, 나 완전 잘 살아야겠다. 아주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그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누구는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로 다른 여자랑 노닥거리는데 나만 힘들면 그건 좀 열 받잖아요.”

이정은 ‘자기’로부터 온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이 싹 굳었던 그날의 예현을 떠올렸다.

분명 문자를 확인하라 했을 때까지만 해도 꽤나 긴장한, 그리고 기대한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분위기가 돌변했었다.

“근데 그쪽이랑 사귀는 척하면 뭔가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헤어졌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예현이 차오른 눈물을 도로 삼키려 애를 썼다. 잠시 후,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던 예현이 말했다.

“근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요. 형 앞에서 나 다른 사람이랑 사귄다고, 아주 좋아 죽겠다고 하면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뭘 바랐던 걸까. 자기가 잘못했다고 매달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예현은 자기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네요.”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착잡한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예현이 픽, 웃으며 말했다.

“한심해 보이죠? 일부러 자기니, 뭐니 하면서 관심은 다 끌어 놓고 뒤에서는 이런 멍청한 생각이나…….”

“하나도 한심하지 않은데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정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다짜고짜 자기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며 기자들 앞에서 유난을 떨었던 것이 왜였는지 내심 궁금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반가운 일이었다.

확실한 목표가 있는 사람만큼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지.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말했다.

“그 방법, 딱히 실패한 것도 아니잖아요? 헤어진 애인이 집 앞에까지 찾아오게 만든 걸 보면 형이 생각하던 대로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도 아니고, 나만 더 비참해졌는데 뭐가…….”

예현이 울컥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터져 나올 뻔한 울음을 참았다.

사실, 이정 역시 예현의 그런 선택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기로 인해 한 충동적인 결정.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박규진. 그를 엿 먹이겠다는 목표로 계약 연애를 계속해 봤자 예현은 상처만 받을 것이 뻔했다.

길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이정은 박규진이라는 인간에 대한 것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우성 알파가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떨어지는 능력, 공감 능력도 떨어지는데 그걸 숨길 지능도 없어서 NW의 수치라고 불린다는 그룹의 삼남.

그런 인간이 헤어진 열성 오메가 애인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그닥 후회를 한다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현에게는 그것을 알려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형이 비참해진 게 아니에요. 그쪽이 아직 자기 마음을 부정하는 것뿐이겠죠. 그런 게 아니면 굳이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가 없잖아요.”

이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예현을 위로했다.

그러나 사실 이정은 규진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찾아온 것도 제 딴에는 예현이 불쌍해서, 그리고 남 주기는 아까운 사람이라 건드려 본 거겠지.

아마 굳이 자극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도 않아 별 볼 일 없는 열성 오메가 애인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게 목표라면, 아주 잘하고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러나 이정은 그런 생각 따위 해 본 적도 없다는 듯, 예현의 어깨 위에 조심히 손을 올리며 예현을 위로했다.

이정이 다정한 사람의 탈을 쓰고 예현을 달랬다.

아무래도 예현이 계약 연애에 진지하게 임하려 했던 이유가 복수심인 것 같은데, 이정 자신을 위해서는 예현이 그 복수심에 오랫동안 불타는 쪽이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잘하고 있다고요?”

예현은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충동적으로 그와의 계약 연애를 받아들이지도, 이정의 말뿐인 다정함을 믿지도 않았을 터였다.

“물론이죠. 일단 형을 버리고 간 사람이 형을 다시 찾아오게 만들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왜 자꾸 자기를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그러나 최근의 예현은 너무 지쳐 있었다. 7년을 사귄 연인의 배신, 갑자기 엮여 버린 슈퍼스타, 그리고 쏟아지는 관심.

숨 돌릴 틈도 없이 며칠 새 몰아친 일들로 인해 예현의 머리는 평소보다 둔해진 상태였고, 둔해진 예현에게 이정의 만들어진 다정함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이정은 다정함을 연기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고, 예현은 아주 조그마한 다정함조차 부족해 말라 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꾸 자기 탓하지 말고, 너무 힘들어하지 마요. 잘 사는 모습 보란 듯이 보여 주면 분명 그쪽도 후회할걸요.”

“……그럴까요…….”

예현이 이정이 흘리는 거짓에 홀린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정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어차피 우리한텐 최소 3개월이란 시간이 있잖아요? 벌써부터 저러는 거면 이 관계가 끝날 때쯤엔 박규진 씨도 느끼는 바가 생길 것 같은데.”

잘생긴 얼굴이 확신에 찬 웃음을 지으며 다정한 말을 속삭였다.

“그나저나, 할 이야기라는 게 뭐에요?”

이정의 검은 위로에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기억해 낸 이정이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아, 맞다.”

“?”

전화나 문자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어차피 찾아오기로 한 거 굳이 연락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 따로 알리지 않았던 것.

“한명아 씨, 알아요?”

이정이 한 매니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잠시 후, 낯익은 이름에 잠시 머릿속을 헤집던 예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는 사람 중에 한명아라는 사람이 있긴 한데, 왜요?”

“아하, 그 사람. 이 사람 맞아요?”

이정이 핸드폰을 켜 사진 하나를 보여 주며 말했다.

사진 속에서는 이정과 화려한 얼굴의 미인 하나가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런 걸 왜 보여 주는 거지.

예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우…… 아니에요? 광고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아니, 그쪽 말고.”

그러자 이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사진의 귀퉁이 부분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것은 사진의 메인인 여배우가 아닌, 그 뒤를 지나가고 있는 그녀의 매니저였다.

“흐릿하긴 한데, 제가 한 매니저님 사진을 가진 게 없어서요.”

“…….”

예현이 이정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짐을 나르고 있는 여자는 분명 예현에게도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대학 동기네요.”

사진 속에 보이는 사람, 명아는 예현의 대학 동기였다.

한때는 꽤 친한 사이였던, 그러나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 사이의 동기.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예요?”

“아뇨. 전화번호도 삭제했을 텐데…….”

예현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번호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려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띄웠다.

“잠깐만.”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이정이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예현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이게 뭐예요?”

“뭐가요?”

예현이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 모양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그러자 이정이 예현에게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내가 분명 제대로 저장해 줬는데, 딱딱하게 ‘강이정’, 세 글자가 뭐냐고요.”

이정이 가리킨 것은 ‘강이정’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본인의 연락처였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도 저걸로 한 소리 들었었지. 예현이 이정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오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바꾸려고 했어요. 회사에서도 한 소리 들었거든요.”

이정을 굳이 이름으로 저장한 이유는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하트만 지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현이 아는 사람 중 이름이 정인 사람이 있었고, 실수로 ‘정’에게 ‘이정’에게 보내야 할 연락을 전송할 뻔한 일이 있었던 바람에 헷갈리지 않으려 풀네임으로 저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원래도 전화번호부를 간결하게 쓰는지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루에 두 번이나 잔소리를 들으니 바꾸긴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정이는 좀 별로예요. 아는 사람 중에 정이가 있어서 자꾸 헷갈리거든요. 기분도 좀 이상하고.”

“흠, 그럼 자기?”

이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자기, 라. 본인이 먼저 꺼낸 호칭이었지만 이정을 그 이름으로 저장하기는 영 내키지 않았다.

지난 7년간 ‘자기♡’였던 인간과의 끝이 썩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말고.”

“이름도 싫고, 자기도 싫으면 어떻게 해요. 부를 때는 잘만 부르더니.”

이정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조금 고민하던 예현이 나름대로의 대책을 내놓았다.

“……그냥 하트 하나만, 그렇게 저장해 놓는 건 괜찮아요?”

애칭도, 자기라는 호칭도 거절한 예현의 마지막 방안은 아무런 글자 없이 기호 하나로 그를 저장하는 것이었다.

“뭐, 나쁘진 않네요.”

“……그러는 자기는 뭐라고 저장해 놨길래 그래요?”

이정의 눈치를 살피다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든 예현이 이정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정이 자신은 당당하다는 듯이 핸드폰을 들어 보여 주었다.

‘현이 형♡’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기사 다 나갔는데 딱딱하게 저장해 놨다가 남들한테 보이면 곤란하잖아요.”

윽, 난데없이 양심을 찔린 예현이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명아는 왜요?”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영상 찍힌 거, 혹시 신예현 씨냐고.”

예현은 대학 시절의 명아를 떠올리며 작게 입술을 씹었다. 그리 좋게 끝난 사이는 아닌데. 하긴 예전부터 오지랖 하나는 넓은 애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나.

“아는 사이긴 한데, 친하진 않아요. 그냥 잠깐 같이 다니던 대학 동기.”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친했으면 내가 아니라 본인한테 직접 물어봤겠죠,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말했다.

“그렇구나, 물어보시길래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져서요. 그리고 혹시라도 한 매니저님이 형에 대해 물었을 때, 제가 대답을 제대로 못 하면 큰일이잖아요.”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예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긴 하겠네요.”

예현은 잠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명아가 알 만한 자신의 옛날이야기라…….

“별거 없어요. 얘기해 봤자 규진 형이랑 사귄 이야기나……. 네, 뭐 그런 이야기만 알 텐데 현 애인한테 전 애인 이야기를 할 만큼 무례한 애는 아니거든요.”

별로 달갑지 않은 과거를 떠올린 예현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말했다.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거예요.”

그런 얼굴을 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이정이 속으로 예현을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캐물어 봤자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던지라, 이정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넘겼다.

“그것보다,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제대로 하자고 해 놓고 강이정, 세글자로 저장해 놓는 게 어디 있어요?”

“……바꾸려고 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할 테니까 상관없잖아요.”

“아무래도, 기본적인 것부터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이정이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복수, 해야 되잖아요?”

“당연하죠.”

예현이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참 저돌적이란 말이야, 예현의 차분하게 타오르는 눈을 마주한 이정이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만 잘 지내는 것 가지고는 부족해요. 스토커나 사생, 기자들이 언제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사무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 가지고는 한계가 있잖아요?”

앞으로 세 달, 아마 예현 쪽에서 계약을 굳이 연장하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세 달 안에 지긋지긋한 스토커를 떼어 내야만 했다.

그러니 그의 연기는 그 누구라도 속일 수 있을 만큼 완벽해야만 했다. 다행히 상대역이 되어 줄 예현 역시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그렇겠죠. 말실수라도 한번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의무적으로라도 자주 만났으면 좋겠어요. 내 집이든, 형 집이든. 어디든 서로의 사사로운 장소에서.”

이정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물론 여기서 적은 예현이 아니라 스토커지만.

“그래야 서로 좀 편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것도 그렇네요.”

예현이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역시 걸리는 것이 하나 있는지, 예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 집엔 동생이 있을 때도 많아서, 좀 걱정인데요.”

“뭐 어때요. 애인 가족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별거라고.”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니에요. 괜찮겠죠.”

그게 아니라 강이정의 팬이라는 예서가 무슨 난리를 칠지가 걱정돼서 그런 건데, 본인이 상관없다면 괜찮겠지.

예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스케줄 더 남았어요?”

“음,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은 웬만해선 드라마에만 집중하는 편이라. 내일 새벽까지는 없어요.”

“그럼 들어가서 자는 게 낫지 않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정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애인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것 같긴 한데.

이걸 넘어가 줘, 말아. 예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도 많은데, 불편하게 차 안에서 하는 것보다는 집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정이 달콤한 목소리로 예현을 살살 꼬드겼다.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넘어가 줘서 나쁠 것도 없었다.

“그래요. 그럼. 대신 조건이 있어요.”

결국 결정을 내린 예현이 이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동생한테도 절대, 우리 관계가 계약 연애라는 건 티 내지 말 것.”

“그건 당연한 거죠.”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관계였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과 이정의 관계가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된대도 예서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규진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관계, 예서가 자신이 왜 이런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안다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들키면 안 돼요.”

그 어린아이에게 걱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예현은 예서에게만큼은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오빠이고 싶었으니까.

이정을 단단히 단속한 예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간은 8시가 되기 조금 전.

아무리 대화를 짧게 끝낸다고 해도 8시 반이면 돌아오는 예서를 피하기에는 택도 없는 시간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나 이래 봬도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배우거든요. 안 들킬 자신 있어요. 형이야말로 티 내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걸요.”

이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정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느라 그의 화려한 수상 이력까지 모조리 확인해야 했던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직업이 배우인 이정보다는 가족의 앞에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 쪽이 오히려 더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정신 똑바로 차릴 테니까, 장단이나 잘 맞춰 줘요. 그리고…….”

예현은 사귀는 사이에 왜 이리 딱딱하냐는 핀잔을 들은 것을 떠올렸다. 확실히, 연인 사이라면 사람들이 으레 기대하는 호칭이나, 말투가 있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서의 앞이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지. 예현이 이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말부터 놓을까.”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반말에 당황한 이정이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아하, 말이요.”

그러나 이내 예현의 말을 이해한 이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로를 아무렇지 않게 자기라고 부르는 애인이라면서 존댓말을 쓴다면 분명 이상해 보일 게 분명하니까.

“호칭은 뭐라고 할까요. 형? 아니면 자기?”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뭐라고 부르든지 상관없는데 예서 앞에서 자기라고 부르는 건 좀……. 분명 밤새도록 놀릴 거라.”

예현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정이……. 너도 말 놔. 지금부터 연습해야 눈앞에 있을 때 안 어색하지.”

예현이 어색하게 이정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참 나, 자기는 그렇게 쉬우면서 이름 두 글자 부르는 건 이렇게 어려워해서야.

“하긴 호칭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떻게 대하는지가 중요하지. 동생 앞에서는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요.”

“반말.”

하라니까. 예현이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이정을 바라보았다.

“화내지 마. 무섭게.”

이정이 예현의 날선 시선을 가볍게 받아쳤다.

“앞에서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예현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정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나 이정에게는 위협적이기는커녕 입안 가득 도토리를 넣은 다람쥐가 자신의 먹이를 뺏길까 한껏 맹수를 노려보는 것 같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것보단 눈가나 더 신경 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정이 자신의 눈가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제서야 규진을 상대하느라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약간 부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예현이 황급히 밴의 문을 열며 말했다.

“잠깐 냉찜질 같은 거라도 해 둬야겠어.”

“어, 예현 씨. 어디 가요?”

삭막한 분위기에 밴 바깥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주석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우리 예현이 형 집에 갈 거야. 형도 같이 갈래?”

이정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해서 온 거였잖아, 이정아.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매니저가 이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잠깐만, 잠깐만 밖에서 기다……!”

“여기가 형 집이야?”

집 안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예현이 급하게 이정을 막아섰지만 이정은 가볍게 예현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설거짓거리가 잔뜩 쌓여 있는 싱크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불. 그리고 탈피한 허물마냥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잠옷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

급한 대로 달려가 방문부터 닫아 버린 예현이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로 말했다.

자기 타령을 할 때도, 하다못해 키스를 했을 때도 얼굴이 이렇게 빨개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니까.

이정이 예현을 보며 말했다.

“뭐 어때, 다 사람 사는 집인데. 예고 없이 찾아온 건데 이 정도면 말끔하지.”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예현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옷장 안에 던져 놓고 이불 정리라도 해 놓고 나갔을 텐데.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남자한테 별의별 꼴을 다 보이는구나. 신예현…….

“냉찜질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눈보다는 볼이 더 시급한 것 같다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안 그래도 빨간 얼굴이 더 빨개질 거라 생각한 이정이 입을 다물었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통 하나를 꺼낸 예현이 물통을 자신의 눈에 대고 문질렀다. 예서가 돌아오기까지는 넉넉잡아도 30분.

말 많고 오지랖 넓은 예서가 오빠의 부은 눈을 보고 조용히 넘어가 줄 리가 없으니 어떻게든 부기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동생은 어떤 애야?”

“예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설정이니 그리 많은 걸 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알아 둬야겠지.

이정이 묻자 예현이 자신의 동생이 어떤 아이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냥, 대충 얘기하기에 필요한 정보 정도만 이야기해 주면 되는데.”

“음……. 일단 나이는 열여섯 살. 나랑 띠동갑이야.”

예서는 예현의 띠동갑 동생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해에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예현이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여동생.

“그렇게 오냐오냐 키우지는 않았는데, 애가 좀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말도 많고 사고도 많이 쳐.”

“무슨 사고를 치는데?”

“뭐, 수업 시간에 핸드폰 하다가 걸리고, 아프다고 조퇴했다가 별스타에 놀러 간 사진 올려서 들키고…….”

“그 정도면 그냥 평범한 중학생이지. 그때 아니면 땡땡이 언제 또 쳐 보겠어.”

이정이 큭큭거리며 말했다.

“난 중학생 때 그런 짓 한 적 없는데.”

생수병 아래에 눌린 눈이 찌푸려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정은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열여섯이면 한창 철없을 나이인데 뭘.”

이정의 말에 예현이 자신의 열여섯을 떠올렸다. 물론 그때는 자신도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투정도 많은 아이였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예서 정도는 아니었어.”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넌 열여섯에 어떤 사람이었는데?”

“아, 나한테도 관심 가져 주는 거야?”

“당연히 관심 가져야지. 그래도 표면상으로는 애인인데.”

예현이 물통을 계속해서 굴리며 말했다. 순식간에 편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를 쓰는 예현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이정이 말했다.

“음, 16살의 나라.”

이정은 16살의 자신을 떠올렸다.

16살. 그때는 연기라는 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외조부의 손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가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을 했었다.

“난 별로 재미없는 애였는데. 옛날이야기보단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이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어렵지 않게 그의 저의를 눈치챈 예현이 물병을 굴리던 손을 멈추었다.

“보통 연예인 보면 다들 신기해하던데, 그런 건 안 궁금해?”

“연예인도 다 사람인데 다 똑같겠지.”

예현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보단 다른 게 더 중요하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그런 걸 알아 놔야 하지 않을까?”

“뭐가 제일 궁금해? 다 말해 줄게.”

이정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예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내일 스케줄?”

예현이 내놓은 질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취미나, 좋아하는 음식이나, 그런 것을 물어볼 줄 알았던 이정이 멍청히 눈을 깜빡거렸다.

“……말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일? 흠, 내일은 새벽 촬영하고, 점심때는 좀 쉬다가 해 질 때쯤부터 다시 촬영.”

예현이 이정의 스케줄을 물어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걸 알아야 그와 연락을 주고받을 시간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왜, 연락이라도 하게?”

“어.”

딱딱하게 ‘강이정’이라고 저장해 놓은 게 뭐냐며 핀잔을 들은 것을 만회해야 하기도 했고, 사람들이 ‘오늘 강이정이는 뭐 한대?’라며 말을 걸었을 때 바로 대답이 나와야 확실히 애인 같아 보일 테니까.

“당연히 해야지. 애인인데.”

예현이 어느 정도 부기가 가라앉은 눈을 거울로 비추어 보며 말했다.

“너도 사람들 앞에서 티 내고 다녀. 그래야 의심 안 살 거 아냐.”

벤 안에서 눈물을 참던 것이 채 30분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담담할 수가 있을까.

자신이 아는 사람 중 일에 있어 가장 냉철한 사람은 재련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이 다람쥐 같은 남자 역시 참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인 것 같았다.

이정은 그새 부기가 모두 사라진 예현의 눈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이 연애에서 더 간절하고, 더 아쉬운 사람은 나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이정의 눈은 진짜 연인이라도 보는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긴 하네.”

배우의 저력을 보여 주는 눈빛에 예현이 픽, 웃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촬영 때문에 좀 바쁘긴 하지만, 대신 다른 스케줄은 거의 다 빼놓은 상태니까 내일처럼 촬영 시간이 극악이지 않은 이상 웬만하면 만나러 올게요. 만나러 와 줘도 좋고.”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집,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거든. 음……. 내일은 안 되고, 모레나 글피쯤에는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즉흥적으로 계획을 짜는 이정을 바라보던 예현이 고민에 빠졌다. 평일에 예서 혼자 집에 두고 나가도 되려나.

조금 불안한데…….

“어때?”

그러나 이어진 이정의 독촉에 예현은 길게 고민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괜찮을 것 같아.”

그래, 6살도 아니고 16살인데. 그리고 정 걱정되면 친구 집에 보내서 재워도 되니까 괜찮을 거야. 어차피 평생도 아니고 겨우 세 달이잖아.

“그럼 약속한 거야.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딴말하기 없기.”

이정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남의 얼굴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예현이었으나 그런 그마저도 이정의 연이은 웃음을 보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잘생기긴 했네.”

“응?”

뜻밖의 말을 들은 이정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내뱉은 예현이 급히 그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그 말은 이정의 귀에 들어가 버린 후였다.

“아하하, 그걸 이제야?”

이정이 큰 소리로 웃었다. 여태 꽤 끼를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무안할 정도로 제 얼굴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저런 소리라니.

당황한 것은 예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건가.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한 거람.

예현은 이정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딴청을 피우려 했으나, 이정은 도망치는 예현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장난기가 치밀어 오른 이정이 예현을 쫓아가며 말했다.

“왜? 잘생긴 얼굴 더 가까이에서 봐야지.”

예현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서 매달리는 건 사절이지만,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정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뭐든 호감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장면이 나오지 않겠나. 이정이 그런 생각을 하며 예현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응?”

“이거 놓고 저리…….”

급기야 도망치려는 예현의 턱과 한쪽 손목을 잡아 예현을 자신과 벽 사이에 가둔 이정이 예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글거렸다.

발로 차서라도 떨어트려 버릴까, 그렇게 고민하던 예현은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이 집의 또 다른 주인, 예서가 집 거실에서 엉켜 있는 두 남자를 내려다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당황한 예현이 이정을 강하게 밀어내 버리고 예서를 불렀다.

“일찍 왔네?”

“민정이네 엄마가 태워 주셔서…….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교복 차림의 예서가 예현의 손길에 밀려 나간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 버렸다.

“안녕.”

이정이 몸을 일으키고 해사한 얼굴로 예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예서가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거리며 다가오더니 돌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우리 예서가 저렇게 인사성이 밝은 아이였던가. 예현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예서를 바라보았다.

*****

“저, 저기…….”

예서가 이정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정을 불렀다.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리는 예서와 달리 여유로운 얼굴을 한 이정이 대답했다.

“응. 예서야.”

“으악!”

예서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식탁에 얼굴을 묻었다.

팬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얼굴을 잔뜩 붉힌 예서는 평소의 발랄한 모습과는 달리 긴장한 티를 내며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지, 진짜 우리 오빠랑 사귀시는 거예요?”

예서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물었다. 대답 잘해, 예현이 이정에게 눈치를 주자 이정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좀 더 빨리 와서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기사가 너무 빨리 나 버려서 그러질 못했네. 미안해. 많이 놀랐겠다.”

“아니요! 전혀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놀라긴 했지만……. 어, 어른들끼리의 일인데 제가 참견할 필요도 없는 거고…….”

어른들끼리의 일이라는 게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은 아닐 텐데. 예현이 예서의 뒤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러고 있는 줄 알았으면 늦게 들어왔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서의 의미심장한 말에 예현이 황급히 예서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 와 가지고. 예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나 이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생글거리며 예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근데 진짜, 너무 신기해서요. 우리 오빠는 규……. 아니,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도 별로 없는 사람이고, 연예인한테는 더더욱 관심 없는 사람인데 오, 오빠 같은 유명한 사람이랑 사귄다고 하니까…….”

예서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하긴 당연한 반응이었다.

7년 동안 사귀어 온 연인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던 오빠가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었다.

심지어 그 이유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 중 하나인 남자와 사귄다는 것이었으니 16살 예서에게는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예현이 예서와 마주 앉아 예서가 내온 차를 마시고 있던 이정의 뒤로 다가갔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예현이 자연스럽게 걸어가 이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예서가 예현과 이정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진짜, 진짜 사귄다는 거지?”

“그럼 가짜겠어.”

가짜지만. 예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이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예현이 이정과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말투도, 시선도 예서가 오기 직전과는 완전히 돌변한 모습이었다.

“아하하. 그렇지. 우리 매니저 형이랑 아는 사이라, 몇 번 보게 됐는데 형이 너무 매력적인 사람이라.”

이정이 예현의 장단에 맞추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술 더 떠 예현의 머리칼을 쓸어 주기까지 한 이정이 말했다.

“정신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돼 있더라고.”

예현은 그런 이정의 손길을 거부하기는커녕 겹쳐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싱긋 웃어 보인 예현이 말했다.

“응. 나도 정신 차려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네.”

눈앞에서 오빠와 연인의 애정행각을 목도한 예서가 손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우, 우리 오빠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요?”

예현과 이정의 뛰어난 연기력에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받아들인 예서였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점이 좋냐고?”

이정이 예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좋을 만한 점이라.

그는 열심히 외워 둔 예현과의 연애 대본과 그의 인적 사항을 떠올리며 말했다.

“귀엽잖아. 다람쥐 같고.”

“뭐?”

다람쥐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예현이 순간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이렇게 놀랄 때도 귀엽고, 할 말은 다 하는 것도 멋있고…….”

이정이 당황한 얼굴을 한 예현의 볼을 콕 찌르며 말했다.

“싫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잠시 멍청한 소리를 냈던 예현이 예서의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관리했다.

“아하하, 동생 앞에서 그런 소리 들으니까 좀 부끄럽네.”

오빠의 수줍은 웃음을 본 예서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다람쥐 같다……라, 오빠가 꽤나 귀염상이긴 하지.

그렇지만 오빠는 어른인데, 28살이나 먹은 남자를 보고 다람쥐라니. 이게 사랑의 힘이라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잔뜩 한 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구나…….”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오빠에게 이정을 소개해 달라느니, 전화라도 한번 하게 해 달라느니 난리를 쳤었건만 정작 이정이 눈앞에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잘 부탁해.”

“자, 자주 본다고요?”

예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얼굴을 또 볼 수 있다고?

“아무래도 내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 돌아다니기가 힘들 것 같아서. 아, 혹시 실례라면…….”

“아니에요! 실례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예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강이정이 우리 집에 왔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앞으로도 계속 올 거라니.

“다, 다음에 오실 때는 청소 열심히 해 놓을게요…….”

아무것도 모른 채 들뜬 예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

“잘 가.”

“배웅까지 나와 주는 거야?”

잠시 후, 예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까지 몇 장 찍어 준 이정이 예현의 집을 빠져나왔다.

“나와야지. 사진 찍히려고 왔는데 쓸쓸하게 혼자 가는 걸 보여 주려고?”

예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이정이 살짝 고개를 숙여 예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툭, 가져다 댔다.

“이건 작별 인사.”

쌩 일반인인 예현이 이렇게 열심인데 나름 직업이 배우씩이나 되는 자신이 그의 열의에 밀려서야 체면이 살질 않잖아.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살짝 웃었다.

“연락할게.”

“그래.”

“전화번호부 건드리지 말고.”

“안 건드려.”

저장명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집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매니저의 밴 위로 올라탄 이정이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생기려나.”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낸 예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적어도 일주일은 이정과의 연애를 이유로 이리저리 시달릴 게 뻔해서였다.

“월 이천 생각하면 못할 게 뭐 있겠어.”

꿀알바라고 생각하면 된다. 돈도 주고, 복수도 하게 해 주는 꿀알바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김 과장의 진상 짓도, 김 주임의 투정도 다 받아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얼굴도…….

‘왜? 잘생긴 얼굴 더 가까이에서 봐야지.’

“……연예인들은 다 그렇게 여우 같은가.”

예현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떻게 생겼든 결국 나랑은 다른 세상 사람인데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야. 정신 차리자. 신예현.

잠시 찬 바람을 쐬던 예현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예현의 집 앞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예현이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어둠 속에 숨은 누군가가 그 집의 문 앞에 누군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 매서운 눈으로 예현의 집 앞을 지켜보고 있었다.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예현 씨랑 친하게 지내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말은 하고 가야지. 잠깐 들렀다가 간다고 해 놓고 집에까지 가 버리면 어떻게 해? 내가 오늘 아무 약속이 없어서 다행이지 혹시라도…….”

“어, 누나.”

예현의 집을 떠나 이정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석이 이정에게 모아 뒀던 잔소리를 한 번에 발사했으나 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었다.

“어휴, 못 살아.”

[뭐야. 무슨 일인데?]

이정이 전화를 건 대상은 그의 친누나이자 그의 외조부가 가장 예뻐하는 손주, 강유정이었다.

이정이 용건 없이 전화를 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정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바쁘니까 용건부터 말해.]

“NW 그룹 박규진, 알지?”

[아, 그 빡대가리.]

유정이 규진에 대한 감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걔는 왜?]

“그 사람에 대한 거,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전에 갖고 싶다고 했던 S 브랜드 한정판 시계, 그거 줄게.”

[준다는 거 거절할 필요는 없다만……. 왜 걔를? 별 실속도 가치도 없는 인간인데.]

시계를 걸고 말하자 유정이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규진은 아무런 실속도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본인을 대신할 뛰어난 형제들이 있었고 그는 형제들에 비해 현격히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현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 이상, 규진에 대한 정보는 이정에게 쓸모없는 정보가 아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그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개인적으로 알아야 할 일이 생겨서.”

[너 이번에 기사 난 거랑 관련 있는 일이야?]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고. 시계 갖고 싶어 했잖아. 필요 없어?”

이정의 말에 유정이 그런 건 아니라며 입맛을 다셨다. 동생의 사생활보다는 탐을 내던 시계 쪽에 더 관심이 있었던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박규혁이나 박규성이면 모를까, 박규진 정보로 그걸 얻을 수 있으면 거저먹는 건데 내가 그걸 왜 포기하겠어? 내일까지면 돼?]

“넉넉하게 모레 아침까지만 부탁할게.”

어렵지 않게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이정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이정, 모레는 어디 갈 거면 말하고 가.”

그를 말리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한 주석이 핸들을 잡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

예현이 업무를 처리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세 번째 출근. 역시 이리저리 따라오는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첫날보다는 관심의 정도가 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현이 남몰래 한숨을 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예현 씨 개인 번호 맞습니까?]

알지 못하는 번호로부터 도착한 문자 한 통, 처음에는 당연히 무시했으나 문자를 보낸 이는 포기라는 것을 당최 하지 못하는 것인지 끈질기게 예현의 신경을 거슬렀다.

[연락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담스러운 질문 없을 겁니다.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차단을 먹이고 반쯤 잊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건지 회사 메일로 연락이 와 있었던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신예현 씨]

이런 식으로 메일 올 곳이 없는데, 의아한 마음으로 메일을 연 예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번호도 번호지만, 대체 회사 메일 주소는 어떻게 안거지.”

[010-0000-0000 번으로 연락드렸던 파화일보 송희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연락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

소름이 끼쳐 곧바로 메일함을 나가 버리긴 했으나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현은 좀처럼 집중을 못 한 채 업무를 이어 갔다.

스토커에게 쫓기고 있다는 이정이 이런 마음이려나. 어쩐지 동질감이 든 예현이 핸드폰을 들어 이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 해? 오후 3 : 57]

“예현 씨. 이거 오늘 퇴근 전까지 처리해 줄 수 있을까? 좀 빠듯할 거 같긴 한데.”

핸드폰을 내려놓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박 대리가 예현에게 서류 하나를 떠넘겼다.

“아, 애인도 있는 사람인데 칼퇴시켜 줘야 하겠지?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나?”

“아뇨. 괜찮습니다.”

예현이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위해 주는 거면 일을 주지 말든가, 그런 소리를 하지 말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

괜히 떠보는 것이 분명한 모습에 예현이 속으로 박 대리의 욕을 하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퇴근 전까지 처리해 놓을게요.”

‘띠롱’

그때, 예현의 핸드폰 액정 위로 불빛이 들어왔다.

[♡]

액정 위로 뜬 선명한 하트에 박 대리가 눈을 반짝이며 예현의 핸드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강이정한테 연락 온 거야?”

언제 봤다고 자꾸 강이정, 강이정거리는 건지. 목소리도 더럽게 큰 박 대리 덕에 순간 사무실의 시선이 예현에게로 쏠렸다.

“내용 빨리 확인 해 봐.”

박 대리가 얼굴을 들이밀며 예현을 재촉했다.

하필 이때 말을 걸게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이따가 문자할 걸. 예현이 늦은 후회를 해 보았으나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제발 별 내용 아니길. 예현은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 - 사진 오후 4 : 01]

[♡ - 서울 돌아가는 중. 이따 봐. 오후 4 : 01]

다행히 답장의 내용은 평범한 연인의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차 안에서 찍은 셀카와 다정한 멘트. 예현보다 더 설레는 표정을 한 박 대리가 말했다.

“와, 진짜 잘생겼다. 예현 씨 좋겠어. 이런 애인도 다 있고.”

“이정이가 워낙 다정한 편이라서요.”

박 대리가 호들갑을 떨며 예현의 핸드폰 화면을 흘깃거렸다. 그나마 과장이 잠시 자리를 비워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예현은 박 대리를 말리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억지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이, 박 대리. 아까 부탁한 자료는 다 찾아 놨어?”

“어, 어?”

이번에도 예현의 구세주가 되어준 것은 이 대리였다. 이 대리의 한 마디에 박 대리는 황급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예현은 그제서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눈짓으로 감사를 전한 예현이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차 안에서 방금 찍은 듯한 사진에는 이정의 잘생긴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촬영지가 충청도라고 했던가. 새벽부터 촬영이었다고 들었으니 분명 힘들었을 텐데, 사진 속의 이정은 반짝거리는 얼굴을 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매번 포털사이트 프로필 사진, 혹은 기사 사진으로만 보던 이정이 편안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약간 새롭기도 했다.

“흠.”

사진을 빤히 바라보던 예현이 무언가를 결심하고 액정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저장]

[배경 화면으로 설정]

홈 화면

잠금 화면

홈 화면으로 할까, 잠금 화면으로 할까. 아무래도 잠금 화면 쪽이 사람들한테 더 자주 보이니 잠금 화면 쪽이 더 나으려나?

예현은 잠시 고민하다 이정이 보낸 사진을 자신의 핸드폰 잠금 화면으로 설정했다.

박 대리나 2팀의 김 주임처럼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부담스러웠지만 자신은 이 관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배경 화면으로 해 두는 건 좀. 우리가 아직 대학생인 것도 아닌데.’

진짜 연애는 아니지만 기왕 연애하는 거, 지난 연애에서 못다 이룬 로망을 다 이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오후 4 : 10]

[♡ - 내가 회사 앞으로 갈까? ㅎㅎ 오후 04 : 10]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도착한 답장에 예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시하는 걸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누군가 이정을 회사 앞에서 발견하고 소리라도 지르는 날에는?

“절대 안 되지.”

[아니, 주소 찍어 주면 그리로 갈게. 어차피 차 오래 타서 피곤할 텐데 그냥 좀 쉬고 있어. 오후 4 : 12]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장을 보낸 예현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와, 예현 씨 진짜 칼퇴하고 싶었나 봐.”

박 대리가 떠넘긴 서류 처리를 모두 마친 예현이 퇴근 시간을 조금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무리이긴 했지만 퇴근 후에 약속이 있는 만큼 스퍼트를 낸 덕에 다행히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난 야근 확정인데. 부럽다.”

“약속만 없었으면 좀 도와드렸을 텐데 죄송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퇴근이나 해.”

이 대리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입사 동기인 박 대리와는 달리 배려 넘치는 그녀의 행동에 예현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그래. 잘 가.”

이 대리님마저도 없었으면 회사 생활은 정말 지옥이었을 거야.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회사 건물을 빠져나갔다.

“저기, 잠시만요.”

그때, 누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 건물을 나오는 예현을 붙잡았다.

처음 보는 얼굴, 그리고 불길한 예감에 예현은 살짝 뒷걸음질 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저. 파화일보 송희찬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010-0000-0000 번으로 연락드렸던 파화일보 송희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연락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

익숙한 이름인데. 잠시 머릿속을 뒤지던 예현은 그 이름이 회사 메일로 도착한 메일 속에 있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할 말 없어요.”

보나 마나 인터뷰해 달라는 거겠지. 예현은 망설임 없이 남자를 무시하고 지나쳐 걸었다.

‘인터뷰 같은 건 절대 받지 마세요. 하더라도 우리랑 의논해서, 믿을 만한 사람들한테. 이정이랑 주석이, 나까지 동반해야 해요.’

예현은 계약서를 쓰던 날 재련이 신신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자라는 사람들이 참 교묘하게 사람 심리를 건드리거든.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예현 씨가 아무리 넘어가지 않으려고 그 앞에서 말실수 한 번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기자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으니 예현은 이정 측과 인터뷰에 대한 사항을 미리 합의해 두었다.

물론 그 조항이 없었더라도 저런 무례하고 소름 끼치는 사람의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저기,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진짜 가벼운 질문 몇 개만…….”

“저기요.”

예현은 포기를 모르고 자신을 쫓아오는 기자를 바라보았다.

인터뷰에 응해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 끈질긴 남자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끝도 없이 쫓아올 것만 같았다.

게다가 자신의 개인정보가 대체 어디에서 유출이 되었는지도 알아야만 했다.

“제 전화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아. 기분 나쁘셨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냐고요.”

예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그게…….”

“전화번호에 업무용 메일 주소도 알고 계시고, 게다가 회사 앞에 찾아오시기까지. 스토킹이라는 생각 안 드세요?”

“스토킹이라뇨. 업무 정신이 투철한 거라고 해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예현이 표정을 좀 더 찌푸리자 기자는 그제서야 눈치를 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놀라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불법적인 루트로 예현 씨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우연히 남의 전화번호에, 업무용 메일 주소에, 회사 위치까지 안다고요? 그것도 모자라서 퇴근 시간까지. 우연 한번 대단하네요.”

비꼬듯 말하자 기자가 쩔쩔매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지인이 여기……. 헉.”

스스로 정보의 출처를 불어 버린 남자가 자신의 입을 가렸다.

설마 이 사람에게 내 정보를 준 사람이 회사 사람이라는 건가. 예현이 기자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며 말했다.

“여기 다니는 지인이 제 개인 정보 그쪽한테 팔아 치운 거예요?”

“아니, 판 건 아닙니다. 그냥 순수한 호의…….”

영 칠칠치 못해 보이는 기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예현의 시선을 피했다.

대체 내 개인 정보가 어디에서 샌 건가 했는데, 입 싼 회사 동료가 문제였나.

예현이 단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찾아오시는 거 불쾌하고 그쪽하고 인터뷰할 마음도 없어요. 찾아오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야기라도 한 번…….”

“됐어요.”

예현이 기자를 스쳐 지나갔다.

돈이 좀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이번 달 계약금도 선불로 받았겠다. 미친놈한테서 도망가려면 택시를 타는 게 낫겠지.

“택시.”

예현은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기자에게서 도망쳤다.

제아무리 미저리 같은 집착을 자랑하는 연예부 기자, 희찬이더라도 달리는 차를 쫓아갈 능력은 없는지라 희찬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예현이 타고 간 차의 뒤꽁무니를 노려보았다.

“맹하게 생겨서, 쉽지 않네.”

예현의 앞에서는 바보 같을 정도로 쩔쩔매던 희찬이 표정을 굳힌 채 혀를 찼다.

*****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하긴 이 판에서 제정신인 사람 찾기가 더 힘들겠지만.”

이정이 소파에 기대앉은 채 말했다.

“그래…….”

예현이 어색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예현은 이 집에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찍어 준 주소대로 오긴 왔는데…….’

이정이 살고 있는 곳은 서울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명한 아파트였다. 평당 매매가가 얼마니, 연예인 누가 이 아파트를 샀니. 심심하면 기사가 나는 그런 아파트.

‘저, 여기 보안 때문에 택시는 여기 정문까지밖에 못 가거든요. 손님. 거주자십니까?’

‘아니요. 거주자는 아니고…….’

당연히 보안이 철저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예현은 머쓱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그럼 여기서 내리셔야 할 것 같은데. 정문 들어가는 것도 키가 필요하거든요. 키는 있으십니까?’

‘아, 몰랐는데……. 일단 내려 주세요.’

택시는 예현을 정문 건너편에 내려 주고 쌩하니 달려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예현은 잠시 고민하다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여기 정문 앞인데. 외부인이 혼자 안까지는 못 들어간다고 해서.’

‘키 없어도 입구에서 신원 확인하면 들어올 수 있어. 경비원 분한테 방문 호수 말해 주면 이쪽으로 연결해 줄 거야.’

확실히, 이정이 자신과 다른 세계 사람이기는 하구나. 예현은 그렇게 쭈뼛거리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문에서 신원 확인 절차는 끝난 줄 알았는데, 아파트 현관에서도 경비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을 거쳐야만 했다.

‘2401호 방문하시는 거 맞으시죠?’

엘리베이터 역시 카드가 있어야만 열리는 구조였다.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엘리베이터에 탄 예현은 신기해하며 이정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

‘왔어?’

그리고 집 안 역시 상상 이상으로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예현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재벌 집 거실 같은 내부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실성 떨어지는 이정의 생활에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낀 예현은 어색함을 이겨 내려 일부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 갔다.

그러다 오늘 겪었던, 미저리처럼 쫓아오는 기자와 있었던 일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회사 동료 중에 한 사람이 내 개인정보를 기자한테 넘겼다는 건데…….”

“예상 가는 사람도 없어?”

없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있어. 한 사람이 아니라 문제지. 아무튼 전화번호만으로도 소름 끼치는데 회사 메일에 회사 위치까지……. 제정신이 아니야.”

예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겨우 인터뷰 하나 따겠다고 사람을 그렇게 쫓아다녀.”

“그러게. 보통 내 쪽으로 오지. 일반인인 형을 쫓아다닐 줄은 몰랐는데.”

이정이 기자의 스토킹 정도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일반인이자 당장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던 예현에게는 낯선 일이겠지만 이정에게 기자의 들이댐은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이 바닥에도 나름대로 선이라는 게 있으니까……. 문자나 전화 한두 번 정도는 있을 법하지만 겨우 연애 정도로 일반인을 찾아가지는 않거든.”

이정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인터뷰라.”

이정은 그 기자의 정체가 정말 기자는 맞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경우 없는 기자일 수도 있지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터뷰 하고 싶다고 하면, 인터뷰 한 번 하면 되겠네.”

“뭐?”

“독점, 최초. 이런 타이틀 걸고 인터뷰 따고 싶어서 저러는 거 같은데, 우리 회사 끼고 인터뷰 한번 하면 신경 끄지 않을까?”

이정이 생글거리며 대책을 내놓았다.

확실히 기자가 예현을 쫓아다니는 건 기사를 내기 위해서일 테고,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 최초 인터뷰 타이틀을 가져가 버리면 흥미가 조금 식을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그쪽 동의 없이 인터뷰 같은 건 안 하는 조건으로 계약했던 거니까. 뭐. 괜찮겠네.”

한참을 고민하던 예현이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인터뷰 끝에 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장 발표는 없을 거라고 쐐기를 박아 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재련이 형한테 말해서 날짜 잡아 둘게. 아무래도 직장인이니까, 평일보단 주말이 낫겠지?”

“그래.”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먹고 왔고?”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니. 기자 따돌리느라 회사 나오자마자 바로 택시 타서…….”

밥 먹을 시간 같은 게 어디 있어. 예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이정이 부엌으로 향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나 요리 잘하는데.”

“그냥……. 아무거나 상관없어.”

“싫어하는 거나, 알레르기 있는 음식도 없어?”

알레르기라. 그러고 보니 규진과의 연애 초반. 규진이 사 온 도시락에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 들어 있어 응급실에 실려 갔던 적이 있었지.

그땐 그냥 연애 초반이니까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보통은 이렇게 물어보는 거구나.

예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갑각류만 없으면 돼. 새우나 게 같은 거.”

“그럼 이건 안 되겠네.”

이정이 냉장고에서 칵테일 새우 한 봉지를 꺼내 흔들거리더니 봉지를 도로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한식이나 양식 중에 뭐가 더 좋아?”

“한식.”

짧게 대답하자 이정이 알았다며 냉장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참,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컸을 것 같이 생겼는데 요리를 잘한다니 의외라고 해야 할까.

예현이 익숙하게 재료를 꺼내는 이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심심하면 집 구경하고 있어도 돼. 수납장 같은 것만 함부로 열어보지 않으면 상관없어.”

이정의 말에 예현이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집의 내부가 조금 궁금하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상투적인 거절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예현을 본 이정이 몰래 큭큭거리며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무슨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넓냐.”

이정의 집은 예현이 어릴 적부터 이상향으로 삼던, ‘크면 꼭 이런 집에 살아야지!’ 하고 바라던 집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뷰의 거실. 집이 아니라 모델 하우스 같은 느낌으로 연결된 각각의 방들.

하다못해 화장실마저도 예현이나 예서의 방보다 훨씬 넓어 보일 정도였다.

“와.”

이 방은 또 무슨 방일까. 예현은 탐험이라도 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방이 아니라 매장 아닌가. 예현의 집 거실만 한 크기의 방을 드레스룸으로 개조해 놓은 공간을 본 예현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연예인이라는 것, 그것도 전 국민이 아는 배우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재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영화도, 텔레비전도 잘 보질 않았다. 일하고 동생 뒷바라지하느라 바쁜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

예서는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예현은 예서를 혼자 영화관에 보내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이거 셔츠 한 벌에 200만 원……. 그거 아닌가?”

그나마 관심이 있는 것은 패션 브랜드. 살 엄두는 내지도 않고 구경하는 것만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던 예현이었다.

그렇기에 이정의 드레스룸은 예현에게 노다지,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여태 그저 잘생긴 연예인, 정도로 기억되고 있던 이정의 인상이 확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형? 한참 찾았네.”

옷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방을 둘러보고 있던 예현이 이정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옷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따져 가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예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거 본다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예현은 그동안 이정이 본 얼굴 중 가장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이쪽에 관심이 좀 있어서…….”

예현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개는 이정 쪽으로 돌아갔지만 그 와중에도 보고 있던 옷의 소매는 꼭 쥐고 있는 채였다.

“그래 보이네. 밥 다 됐어. 먹으러 와.”

이정이 예현에게로 다가와 그의 손을 살며시 옷에서 떼어 놓으며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제서야 본인이 옷의 소매를 꼭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예현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와.”

넓은 식탁 위에 맛있어 보이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된장찌개에 계란말이. 그리고 간단한 반찬들까지.

화려한 이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담스러운, 그러나 먹음직스러운 밥상이었다.

“생각보다 본격적이네.”

“집에만 있다 보니까, 가질만한 취미가 이런 것뿐이더라고. 다음엔 다른 것도 많이 해 줄게.”

이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 이후에 먹은 게 커피 한 잔뿐이었지. 먹은 것 없는 상태에서 갓 만든 음식 냄새까지 맡고 있자니 슬슬 배가 고파 오는 것도 같았다.

“옷 좋아하는 것 같던데. 다 먹고 나면 다른 것도 보여 줄까?”

이정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기자들 앞, 사람들 앞이 아니고서야 매번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예현의 들뜬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아끼는 컬렉션을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뭐, 보여 주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예현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물론, 그런다고 이정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잘 먹을게.”

일단 밥부터 먹자. 예현은 애써 그것을 모른 체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

예현은 국을 한 입 떠먹자마자 입 안에 숟가락을 넣은 채로 굳어 버렸다. 아니, 된장국에서 왜 이런 맛이 나는 거지.

“어때, 맛있지?”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뿌듯한 얼굴을 한 이정이었다.

요리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굴더니, 맛이 왜 이 모양이야. 예현은 냉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 숟가락을 입에서 꺼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그러나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차마 저 헤실거리는 잘생긴 얼굴에다 ‘네 요리는 쓰레기야.’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예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어…….”

좀 시큼한 맛이 나긴 하는데, 또 못 먹을 정도는 아니고……. 물론 된장국에서 이런 맛이 난다는 게 이해가 가진 않지만 맛 자체가 없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예현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며 국을 한 숟갈 더 떠먹었다. 첫맛이 충격적이라 그렇지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된장국에서 왜 시큼한, 상큼한 맛이 나는지 뇌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계란말이도 맛이 없지는 않겠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음. 맛있다.”

다행히 계란말이는 상식적인 맛이었다. 하긴 계란말이를 맛없게 하기도 힘들겠지. 예현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계란말이 맛있다.”

“그치? 다들 계란말이 해 주면 좋아하더라고.”

그건 아마 국이 쓰레기…… 아니, 맛이 이상하니까 무난하게 칭찬할 게 계란말이밖에 없어서 그런 걸 거야…….

마음의 소리를 애써 목 너머로 삼킨 예현이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요리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것만큼은 사실인지, 이정은 말끝마다 맛있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래, 차라리 계속 옆에서 말을 걸면서 관심을 분산시켜 주니 맛에는 집중이 덜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숟가락질을 이어 갔다.

*****

길고 긴 식사를 끝낸 예현은 이정으로부터 집을 안내받았다.

드레스룸에 정신이 팔려 다른 곳은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이정의 집은 둘러볼수록 대단했다.

혼자 사는 집에 방이 왜 몇 개씩이나 필요한가 했더니 드레스룸에, 홈 시어터에, 대본을 읽고 연습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방음 설비가 된 연습실까지.

톱 배우에다가 재벌 손자이기까지 한 이정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너, 생각보다 엄청난 사람이었구나…….”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이정이 부정할 생각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이정은 예현이 이제야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보통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고, 다른 세상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집과 드레스룸을 보고 나서야 이런 반응이라니. 참…….

“형 되게 속물적인 사람이었네.”

“……눈에 보이는 게 그것뿐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예현이 조금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밥을 먹고 집 내부를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꽤 빠르게 지나갔다. 9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본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래다줄게.”

이정이 겉옷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데려다줄 필요는 없는데. 예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기 보안도 좋은 거 같은데, 어차피 찍힐 일도 없는 거 그냥 쉬는 게 낫지 않아?”

“모르는 소리. 보안이 이중 삼중인 개인 공간에서만 생활해도 귀신같이 들어와서 사진 찍는 게 연예부 기자들이거든.”

이정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기자들 눈만 눈은 아니잖아?”

“하긴.”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의 모습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수록 좋은 것이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다고 알려 줘야지.”

그래야 가장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의 눈에까지, 귀에까지 들어갈 테니까.

예현은 이정의 배웅을 받으며 1층으로 내려왔다. 들어올 때에는 이런저런 절차와 신원 확인을 거쳐야 했지만, 나올 때에는 그런 절차 없이 조용히 나올 수 있었다.

“아,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것 같으니까.”

이정이 자신의 지갑에서 아파트의 카드키를 하나 꺼내 주며 말했다.

“올 때마다 방명록 적고, 신원 확인하는 거 귀찮잖아.”

그렇게 말한 이정이 손에 들고 있던 목도리를 예현에게 둘러매어 주었다.

“날씨도 추운데, 목 따듯하게 하고 다녀야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목도리를 단단히 매어 주는 이정의 뒤로 아파트의 주민 하나가 지나갔다.

연예인이야 매번 보는 얼굴이니 그리 신기하지 않았지만, 연예인이 아파트 1층에서 보란 듯이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신기한지 주민은 두 사람을 힐긋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조심해서 가.”

“너도.”

시선을 의식한 예현이 발뒤꿈치를 들어 이정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두 사람이 버드 키스를 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헉.”

예상치 못한 과감한 행동에 놀라 급하게 숨을 들이킨 주민이 부끄러웠는지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조심히 들어가.”

예현이 이정의 눈웃음을 따라 하려 애를 쓰며 살풋 웃음 지었다.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도록,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도록 최선을 다한 웃음이었다.

“응. 들어가면 연락하고. 자기.”

이정이 지지 않고 예현의 허리를 살짝 감싸 안으며 말했다.

“응. 연락할게.”

예현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이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 꿈 꿔. 자기.”

아무렇지 않게 카운터펀치를 날린 예현이 돌아서서 이정의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정이 빨간 목도리를 맨 채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예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

“오빠, 어디 다녀와?”

예서는 예현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예현을 닦달했다. 매일 집, 회사, 집, 회사를 반복하는 예현이 말도 없이 집을 비우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이정 만나고 오지?”

“넌 만나서는 한마디도 못 하면서 왜 내 앞에서만 이렇게 강이정한테 관심이 많냐.”

예현의 말에 예서가 어깨를 움찔 떨며 말했다.

“그, 그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평소랑 똑같이 행동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오빠도 평소에는 완전 잔소리 대마왕이면서 강이정 앞에서는…….”

“강이정 앞에서는, 뭐.”

“……뭐. 아무튼. 내 앞에서 행동하는 거랑은 다르잖아.”

예서가 툴툴거리며 투정하기 시작했다. 예서라고 해서 그날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만나면 완전 말 잘하고……. 완전 신나게 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실물을 눈앞에서 보니 말문이 턱 막혀 버린 걸 어떡하라고. 예서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말했다.

“강이정 우리 집에 또 와? 온대?”

“글쎄. 이정이 스케줄을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다음에 오면 이번엔 진짜 절대, 절대 말도 안 더듬고 멍청한 소리도 안 낼 거야.”

예서가 나름대로의 리벤지를 다짐하며 주먹을 꾹 쥐어 보였다.

“아, 근데 오빠가 유명해져서 그런지 우리 집 근처에 이상한 사람도 다니더라?”

“뭐?”

예서의 말에 겉옷을 정리하던 예현이 깜짝 놀라 옷을 떨어트렸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설마 그 기자가 우리 집까지 알고 있는 건가?

“이상한 사람이라니?”

“모자에, 마스크에……. 완전 꽁꽁 싸맨 사람이 카메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던데?”

예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예현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예현은 겉옷만을 대충 벗어 의자에 걸어 놓고는 예서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 사람 어디서 봤는데?”

“어? 그냥 집 오는 길에……. 쓰레기 내놓는 골목 앞에서 카메라 확인하고 있던데?”

얘는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예현이 답답한 속을 겨우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걸 보고도 그냥 들어왔어?”

“아니…….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 거기서 저기요, 지금 우리 집 앞에서 카메라 들고 뭐 하세요? 이런 거 물어볼 수도 없잖아.”

“그래도. 바로 나한테 전화하거나 했어야지.”

예서가 그런가. 하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근데 그냥, 나랑 눈 마주치니까 바로 도망가길래 강이정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고 돌아다니는 기자인가~ 했지.”

“강이정 사진 찍으러 얼쩡거리는 기자면, 그건 괜찮고?”

“연예인이잖아. 그런 사람 없었으면 오빠랑 강이정이랑 사귀는 거 기사도 안 났을 텐데 뭐. 새삼스럽게.”

연예인이면 그런 게 당연한 건가. 예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는 예서가 마주쳤다는 그 카메라를 든 남자의 정체가 더 중요했다. 예현은 예서를 다그치듯 물었다.

“그 사람. 머리 색은 봤어? 키는 얼마만 했는지 기억나? 체형은? 옷은 어떤 거 입고 있었는데?”

“잘 기억 안 나는데……. 모자 써서 머리는 안 보였고 키는 그냥 보통 남자 키 정도? 살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형이었어.”

예서가 기억을 더듬어 나름대로 기억나는 것들을 예현에게 전해 주었다.

겨우 이 정도의 정보로 그 남자가 그 기자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예서가 말한 것이 예현이 만났던 그 기자와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직장으로도 모자라서 집까지…….”

기자들이 자신의 집을 영영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정만 쫓아다녀도 알 수 있을 것이었고 본인 역시 보란 듯이 집 앞에서 이정과 이마를 맞대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전화번호, 회사 메일, 집 주소를 아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인터뷰를 해 달라느니 헛소리를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미친놈. 신고해 버리든가 해야지.”

이를 바득 갈며 기자의 얼굴을 떠올린 예현은 잠시 그를 어떻게 떼어 내야 할지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걱정 없는 여중생이자 연예인 덕질 2년 차의 예서에게 집 앞을 알짱거리는 기자 따위는 그리 대단한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예서의 관심사는 예현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오빠. 근데 이 목도리는 뭐야? 못 보던 건데.”

예서가 낯선 목도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빨간 목도리였지만 예현의 목에 감겨 있기에는 꽤나 이질감이 드는 물건이었다.

빨간색 목도리라니. 화려한 색은 싫다며 회색, 검은색, 밤색 등 어두운색만 골라서 입고 다니는 제 오빠가 선택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설마 이거…….”

“이정이 꺼야. 날씨 춥다고……. 빌려주길래 하고 왔어.”

“진짜?”

예서가 들뜬 얼굴을 하고 예현의 목도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겁먹지 않은 게 다행인 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스토킹에 대한 경각심이 생길 수 있도록 급하게 교육을 해야 할지.

예현은 착잡한 얼굴을 하고 목도리를 마구 만지는 예서를 바라보았다.

지잉-

[♡ : 집에는 잘 들어갔어? 오후 10 : 07]

저거 돌려줘야 하는데. 저렇게 마구 만진 상태로 돌려줘도 되나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이정의 문자가 도착했다.

목도리를 자신의 목에 둘러보며 기뻐하는 예서를 보고 있자니 저 목도리를 집에 오래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잘 들어왔어. 오후 10 : 08]

[목도리 세탁해서 다시 돌려줄게. 오후 10 : 08]

빨리 치워 버려야지. 집에 놔뒀다가는 신예서 저 철없는 것이 목도리를 껴안고 자기라도 할 것 같았다.

[♡ : 안 돌려줘도 되는데 오후 10 : 10]

[♡ : 계속하고 다녀. 그거 좋은 거야. 오후 10 : 10]

좋은 물건 같기는 했다. 보들보들한 감촉이며, 깔끔한 마감이며.

예현 본인이 직접 짜 겨울 내내 매고 다니는 목도리와는 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헤헤. 강이정 목도리…….”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목도리는 목만 데워 주면 그만이고 어차피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저 목도리는 내가 하고 다니기도 전에 신예서가 몰래 하고 다닐 것 같은데.

게다가 예현은 눈에 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빨간 목도리를 하고 다니라니. 돈을 주고 하고 다니라고 해도 그닥 그러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 사진 오후 10 : 14]

[♡ : 커플템 ㅎㅎ 오후 10 :14]

거절을 하려는 찰나, 이정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 속의 이정은 예서가 두른 채로 기뻐하고 있는 목도리를 한 채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인이 찍은 사진은 아니고, 머리 스타일을 보니 최근에 찍은 사진도 아닌 것 같았다.

[♡ : 그거 좀 유명한 목도리라 하고 다녀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오후 10 : 15]

목도리가 유명해 봤자지. 기껏해야 명품 브랜드 물건일 텐데 뭐.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하지 않고 다닐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예현이 목도리를 두른 채로 거울을 살펴보는 예서를 향해 말했다.

“그거 매고 학교 가지 마.”

“뭐래. 내가 애야? 딴 것도 아니고 오빠가 애인한테 받아 온 걸 뺏겠냐?”

네가 애지 그럼.

“그냥 신기하니까 한번 해 본 거지. 내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것도 모를 리가 없잖아.”

예서가 툴툴거리며 목도리를 풀어 조심스럽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련이 가득한 표정이긴 했지만 본인의 말대로 목도리를 탐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정이 시간 나면 올 수도 있고. 나도 확실하게는 몰라서 언제 오는지는 얘기 못 해 주겠어.”

“다음에 올 때는 꼭 먼저 이야기해 줘. 그래야 미리 준비를 해 놓지.”

“무슨 준비?”

“뭐……. 집 청소라든가. 그런 거.”

예서가 이정과의 다음 만남을 한껏 기대하며 말했다.

“그래.”

동생이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영화배우, 그것도 강이정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별로 달갑지 않은 인연으로 엮인 사이였지만 어부지리로 동생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현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약속한 거다?”

예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역시 아직 애라니까. 예현이 가볍게 웃으며 예서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

“예현 씨. 목도리 예쁘네?”

“어머, 이거 작년에 M사에서 특별 한정판으로 내놓았던 그거 아냐? 강이정이 하고 나와서 난리 났던 그거.”

다음 날, ‘좀 유명한 목도리’라는 이정의 말대로 예현의 목도리는 출근과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거 300개 한정판이라 다시 구하기도 힘든 건데. 이걸 대체 어디서 구했대요?”

사내에서 입이 싸기로 유명한 서 주임이 호들갑을 떨며 나타나 예현의 목도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거 지금 프리미엄 붙어서 평화나라에 올리면……. 진짜 100만 원, 아니 200만 원에 올려도 1초 만에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걸요?”

목도리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다고? 예현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아,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이정 애인인데……. 아니, 잠깐만. 이거 혹시 강이정이 했던 그 목도리예요?”

목도리가 유명해 봤자라고 생각했던 예현은 자신의 안이한 생각을 반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옷도 프리미엄 붙으면 원래 가격보다 몇 배는 더 뛰기도 하지.

취향이 확고한 편이라 좋아하는 브랜드가 아니면 찾아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M 브랜드라면 예현도 잘 알 만큼 유명한 브랜드이기도 했다.

“세상에. 강이정 완전 스윗하다. 신 사원 맨날 목 춥게 목도리도 안 하고 다니니까 자기 목도리까지 둘러 주고……. 나도 그런 남자 친구 있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네.”

서 주임이 목도리를 둘러 주는 이정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 황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 비싼 물건인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되게 보드랍더라고요.”

이 정도로만 말해도 입 싼 서 주임이 회사는 물론이고 인터넷까지 빠짐없이 소문을 내 주겠지. 예현이 목도리에 얼굴을 살짝 묻으며 부끄러운 척을 했다.

“당연히 보드랍지. 그게 얼마짜리 목도리인데. 아무튼 예현 씨 부럽다. 그거 안 잃어버리게 조심해요.”

서 주임이 목도리를 손가락 끝으로 슬쩍 건드려 보며 말했다.

서 주임은 입은 싸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어디서 강이정 같은 남자, 아니. 강이정 발가락이라도 닮은 남자나 만날 수 있음 좋겠네.”

아침 시간의 작은 소란은 그렇게 끝이 났다. 예현은 조심히 목도리를 풀어 자리 옆에 걸어 놓고는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지잉-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진동 소리와 함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이정의 셀카 위로 뜬 알림창은 기호 하나를 띄우고 있었다.

[♡ : 목도리 매고 갔어? 오전 11 : 28]

갑자기 연락 와서 한다는 말이 목도리는 하고 갔냐는 거라니. 예현이 작게 웃으며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엄청 유명한 목도리더라 이거 오전 11 : 29]

[비싸게 팔 수도 있다던데 오전 11 : 29]

이제 이정이 조금 편해진 예현이 농담 섞인 멘트를 날려 보냈다.

이게 진짜 200만 원에 팔릴 만한 물건인가. 예현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월급루팡 짓을 하기 시작했다.

M사 강이정 목도리. 이렇게 치면 나오려나.

호기심 반, 물욕 반을 담아 검색해 보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게시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강이정 픽 M사 한정판 목도리 판매 가격은?

#배우 #강이정 이 촬영 시간 내내 착용하고 있던 #M사목도리 #한정판

여러 게시물 중 그나마 해시태그가 적은 게시글을 클릭하자 목도리의 정보가 보였다.

M사에서 300개 한정판으로 내놓았다는 고급 목도리. 고가 브랜드로 유명한 M사에서 내놓은 그나마 살 만한 가격대의 물건이라는 이유로 원래 해당 브랜드를 사용하지 않는 고객층에서도 구매를 희망했던 물건이라고 한다.

M사의 기존 고객층에서도 탐을 냈던 것은 마찬가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유명세를 탔던 제품이었는데 프리미엄이 치솟을 만큼 유명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배우 강이정 씨의 대표작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에서 착용하고 있던 그 목도리. 모두가 기억하는 애절한 바닷가 고백 장면에서 등장했던 바로 그 목도리입니다.^^]

강이정의 첫 천만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알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하여.’

그 작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장면에 이 목도리를 착용한 강이정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제품의 프리미엄이 확 뛴 것은 물론이고 한동안 빨간 목도리가 유행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 인터뷰에서 언급하길, 해당 목도리는 실제 강이정 배우님의 애장품이었다고 하네요.]

애장품이라. 하긴 질도 좋고, 비싸기도 하고……. 여러모로 싫어할 이유는 없는 물건이었다.

지잉-

멍하니 목도리를 착용한 이정을 바라보던 예현이 진동 소리에 놀라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깜짝이야. 이게 뭐라고 한참이나 보고 있었네. 예현은 검색을 하던 창을 끄고 다시 엑셀 파일을 화면에 띄운 후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 : 가져. 팔아 버려도 상관없어. 오전 11 : 51]

묘하게 냉랭함이 묻어 나오는 대답에 예현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뭐, 기분 탓이겠지.

[진짜? 이거 팔면 200은 그냥 나온다던데 오전 11 : 51]

[♡ : 진짜 팔아도 상관없어.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계약 기간 끝난 후이기만 하면 형 하고 싶은대로 해도 돼 오전 11 : 52]

두 번째 답장에서도 목도리에 대한 미련 따위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장품이라더니, 방송용 멘트였나. 뭐, 상관은 없겠지.

[그래. 그럼 내 마음대로 한다. 오전 11 : 54]

예현이 대수롭지 않게 답장을 하고 다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터뷰 일정은 이때쯤이면 괜찮을 것 같아?]

“응. 어차피 주말엔 따로 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기자만 떼 놓을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아.”

점심시간, 예현은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가 이정과 통화를 했다.

[파화 일보라고 했던가?]

“어.”

[별로 유명한 곳도 아니더라고. 조회 수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최초 타이틀 뺏기면 좀 사그라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약속대로 빠르게 인터뷰 일정을 잡아 준 이정 덕에 예현은 그제서야 한시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다음 날에는 회사 앞에도, 집 앞에도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쪽은 믿을 만한 사람이야?”

[응. 회사랑 연이 있는 곳이라 무례한 질문 들을 걱정은 할 필요 없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될 것 같아. 자기.]

요컨대, 두 사람의 연애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은 모르지만 최대한 편의를 봐주기는 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 뒤로는 이상한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고?]

“어제 퇴근하자마자 집 근처 순찰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 딱히 수상한 사람은 못 본 것 같아.”

예현은 전날 퇴근을 하자마자 대충 옷을 갈아입고 몇 번이나 집 근처를 돌아다녔다. 예서는 유난이라며 예현을 말렸지만, 도무지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신상이야 이미 털릴 대로 털렸으니까 상관없는데, 인터뷰 딴다고 예서한테 괜한 얘기하는 건 절대 용납 못 하거든.”

[보통 그 정도로 상도덕 없는 사람은 잘 없긴 한데……. 어쨌거나, 내일 보내 준 주소로 오면 돼.]

“……고마워.”

예현이 빠르게 인터뷰 일정을 잡아 준 이정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긴. 우리 공범이잖아. 뭘 이 정도 가지고.]

이정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정아, 슬슬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아, 갈게. 형. 나중에 연락할게.]

“어, 그래.”

수화기 너머로 매니저 주석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그 미친놈, 앞으로도 영원히 볼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예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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