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5)

계약연애의 정석 1권

#1

“씨발, 좆같은 새끼.”

갑작스럽게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그날은 예현에게 날씨만큼이나 짓궂은 날이었다.

“7년을 사귄 게 저딴 새끼라니. 신예현 보는 눈 존나 없어 진짜…….”

예현이 펑펑 울며 중얼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사람들이 가득한 길가에서 울지 않았겠지만, 갑작스러운 눈보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기에 오늘만큼은 눈치 보지 않고 울 수 있었다.

‘너 좋은 사람이긴 해. 근데 너 열성이잖아. 게다가 그걸 커버할 만큼 배경이 받쳐 주는 것도 아니고……. 설마 진지하게 나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7년을 사귄 연인의 바람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데,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걸 변명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나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너 이렇게 순진한 애였어? 야, 이러니까 내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

차라리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나왔으면 지금 이렇게 울면서 거리를 걷고 있지는 않았을까.

예현은 7년을 사귄 연인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반박 한마디 하지 못한 채로 카페를 빠져나와야만 했다.

‘뭐야? 바람피운 거야?’

‘옷 입은 것 차이만 봐도 왜 헤어졌는지 약간 알 것 같지 않냐?’

피해자는 분명 예현인데, 카페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예현을 비웃었다. 더 억울한 것은, 그 비웃음을 거절하기에 예현의 꼴이 너무 우스웠다는 거였다.

하필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급하게 나왔었다. 그 덕에 헝클어진 머리가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머리만 엉망이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 더 끔찍한 것은 오늘의 패션이었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대충 잡히는 대로 입은 셔츠에는 어제 회식 자리에서 묻은 빨간 국물이 그대로 묻어 있었고, 바지 역시 제대로 펴지지 않고 구깃구깃한 상태였다.

겉옷은 또 어떻고. 하다못해 제대로 된 정장 재킷이라도 입고 있었다면 덜 모자라 보였을 텐데.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고 들떠 가진 옷 중 가장 따듯하지만 가장 못생긴 외투를 입고 나왔었다.

그런 예현에 비해 잘난 애인, 아니. 전 애인과 그 바람 상대의 옷은 너무나 단정했다. 꼴에 데이트라고 힘을 준 모습이 꽤 멋잇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결혼 생각이라도 했었냐고. 그래, 했었다. 아직 28살이니 당장 올해 결혼할 생각은 아니었어도 나름대로 규진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긴 했었다.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결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 그런 되지도 않는 기대를 하며 가끔 웨딩 후기나 신혼여행 꿀팁이라고 적힌 게시물들을 부러 찾아보곤 했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옆에 있던 인간은 우성이겠지…….”

예현이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구렸던 예현의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카페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억울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앞에 앉은 오메가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던 알파가 자신의 연인만 아니었다면 예현 역시 두 사람을 참 보기 좋은 커플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현을 바라보던 여자는 척 보기에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가방, n 브랜드 신상이었지. 블라우스도 비싼 거였고.”

예현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말했다. 규진의 바람 상대인 여자는 꽤나 괜찮은 집안의 사람인 것 같았다.

예현의 두 달치 월급을 쏟아부어도 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는 비싼 가방, 얼마 전 큰맘 먹고 지른 새 핸드폰 가격과 맞먹는 가격의 블라우스.

NW 그룹의 삼남인 규진이 결혼을 운운하며 만나고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웬만한 재력가의 일원일 것이었다.

“킁, 언제는 그런 거 다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개새끼.”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진 거라곤 남들보다 조금 좋은 머리 하나뿐이었던 예현에게 규진은 늘 기적 같은 사람이었다.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최상위 학교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급의 대학교에서 만난 한 살 연상의 동기.

재벌가의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경영 수업을 받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 삼남이라고, 내놓은 자식이니 딴 세상 사람처럼 보면 섭섭하다고 지껄이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잘못이었다.

‘딴 세상 사람으로 보지 않는 걸로는 부족해. 나는 예현이 네 세상의 사람이 되고 싶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들떴었는데, 결국 다 부질없는 꿈에 불과했던 거다.

“내 세상의 사람은 무슨. 재벌가 도련님의 유희에 불과했던 거겠지.”

너 열성이잖아. 게다가 그걸 커버할 만큼 배경이 받쳐 주는 것도 아니고.

억울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우성 알파에 좋은 집안,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사교성까지 갖춘 규진에 비해 예현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진 거라고는 남들보다 좀 더 뛰어난 머리와 귀염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외모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것이 예현의 연봉과 맞먹어 보이는 사랑스러운 우성 오메가 아가씨에 비하면 예현에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그래, 인정한다. 인정하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헤어지자고 말이라도 했어야지.

그랬으면 누구랑 붙어먹든 말든 깔끔하게 규진은 다른 세상 사람이니 기대하는 자신이 바보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우으…….”

예현은 울컥,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선 채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바빠 죽겠다며…….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며…….”

[자기♡ : 내일은 시간 날 거 같아. 7시에 퇴근하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자기]

갑자기 일이 바빠졌다면서 연락이 더뎌지고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 것이 두 달째에 접어들었지만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어젯밤만 해도 내일은 볼 수 있겠구나, 하고 핸드폰 액정에 입을 맞출 정도로 기뻐했었는데 돌아온 것이 겨우 이거였다.

7년을 여보, 자기 하며 사귀었는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끝날 수가 있지.

“흐어엉-.”

예현은 길거리에 멈춰선 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조차도 예현을 완전히 가려 주지 못한 듯,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현을 흘깃거리기 시작했다.

“흑, 흐윽.”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예현이 훌쩍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던 눈보라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현의 눈물샘은 멎어 들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킁.”

눈보라가 조금씩 옅어지고, 사람들이 고개를 조금씩 들기 시작하자 예현은 그제서야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든 것인지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눈물이 금방 멎을 것 같지는 않고, 아직 집까지는 거리가 꽤 남았으며 그렇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울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예현이 선택한 방법은 사람 없는 골목에서 몰래 울고, 울음이 조금 그치고 나면 그때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인적 드문 골목에 들어선 예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코를 훌쩍거렸다.

눈 다 부은 채로 돌아가면 예서가 걱정할 텐데. 어떻게 하지, 하는 뒤늦은 걱정을 하던 그때, 골목 안으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

뛰어오는 걸 보니 금방 지나쳐 가겠지. 예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정확히 예현에게로 뛰어온 남자가 갑자기 그의 턱을 잡아 올리더니 말했다.

“잠깐만 실례.”

“!!”

예현의 턱을 잡아 든 남자의 다음 행동은 더더욱 무례했다.

“읍, 으으!”

남자는 망설임 없이 예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졸지에 처음 보는 남자와 입을 맞추게 된 예현이 당황한 채로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으나 단단한 품 안에서 앙탈을 부리는 꼴이 되었을 뿐이었다.

“프하, 이게 뭐 하는…….”

“쉿, 자기야.”

예현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행동을 따지려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예현의 입술 위로 손가락 하나를 올리며 가증스럽게 굴 뿐이었다.

‘자기야아.’

그런데 하필 그 자기라는 말에 규진이 종종 애교를 떨던 장면이 기억나 버린 것은 왜였을까.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예현이 남자를 밀쳐 내려 애를 쓰며 말했다.

“이거 미친놈 아냐. 내가 왜 니 자기야? 이거 놔, 안 놔?”

“자기야, 많이 속상했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화 그만 내고 나 좀 봐주라. 응?”

그러나 남자는 아프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예현을 달래려 들었다.

처음 다가올 때 실례라는 말을 한 걸로 봐선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러는 거란 말인가.

“우리 자기, 많이 화났어?”

“그러니까 나는…….”

‘띠롱.’

그때, 어디선가 작은 효과음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예현이 남자의 품 안에 갇힌 채로 고개를 돌리자, 핸드폰을 들고 손을 파르르 떠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트, 특종이다.”

“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남자가 그대로 눈길을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특종이라니, 눈앞의 남자가 미친놈 같기는 하지만 세상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로 특종이란 말인가.

“저기요, 잠깐만요!”

“어딜.”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한 예감이 든 예현이 도망가는 남자를 쫓아가려 했으나 그 행동은 다짜고짜 입을 맞춘 남자에 의해 저지되었다.

졸지에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온 예현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화를 내려고 했다.

“뭐……!”

뭐야, 더럽게 잘생겼잖아.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 예현이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잘생겨봤자 또라이인데 무슨 소용이겠냔 생각을 한 예현이 남자를 보며 따지기 시작했다.

“당신 뭐야? 뭔데 다짜고짜 이러는 건데?”

“나 몰라요?”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러자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뭔데 내가 자기를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거람. 빈정이 상한 예현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한국에 날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네.”

재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 남자가 이마 위에 고인 땀을 닦아 내며 웃었다.

“뭔 개소리야…….”

예현이 입술을 벅벅 닦아 내며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말 나 몰라요?”

“니가 뭔데 내가 널 알아요. 신고당하기 싫어서 이러나 본데, 어림도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이런 잘생긴 얼굴을 내가 어디서 봤다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어디서 돼먹지도 않은 개수작이야.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남자 역시 예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란 걸 이제는 믿는 눈치였다.

“미안해요. 제가 스토커한테 쫓기고 있어서요.”

“스토커랑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예현이 경계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소개가 늦었네요. 배우 강이정이라고 합니다.”

“배우……?”

부모님이 남기고 간 거라고는 이제 겨우 중학생인 여동생 하나.

동생 키우랴, 돈 벌랴 바쁜 예현에게 배우라는 사람들은 참 멀게만 느껴지는 종족이었다.

“미안한데 내가 텔레비전도 안 보고 영화도 잘 안 봐서요. 그쪽이 배우인지 아닌지 믿음이 안 가는데요.”

“네. 그래 보여요. 어디 보자, 그럼 뭘로 증명을 해야 할까…….”

이정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고민하다 말했다.

“아, 여기 근처 백화점에 내 얼굴 걸려 있을 건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친 이정이 빠르게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예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기요, 저기요?”

졸지에 처음 보는 남자의 손에 끌려가게 된 예현이 이정을 애타게 불렀으나, 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예현을 기어코 백화점 앞까지 끌고 갔다.

“보이죠?”

그리고 도착한 백화점 앞, 예현은 그의 말대로 백화점 벽 하나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는 이정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예. 배우가 맞긴 하나 보네요…….”

표정이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확실히 동일 인물이 맞았다. 백화점 벽에 얼굴이 통으로 걸릴 만한 연예인이라면 확실히 유명 연예인이겠지.

“근데 그거랑 저한테 뽀……. 그, 그거 하신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다시 인적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예현이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정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저한테 완전 악질 스토커 하나가 있는데 망상증이라도 있는 건지 제가 자기랑 사귄다고 우가면서 쫓아오더라고요. 최후의 수단으로 애인이 있으니까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더니 증명해 보라길래 순간적으로……. 정말 미안합니다.”

이정의 말대로, 그는 스토커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이사를 하고, 비밀리에 이동을 해도 어떻게 그렇게 냄새를 잘 맡는지 귀신같이 이정을 쫓아다니는 스토커였다.

처음엔 ‘나랑 사귀자. 널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건 나야.’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쫓아오더니 최근에는 급기야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냐며, 왜 내숭을 떠냐며 패악을 떨기 시작했다.

스토커를 떨쳐 내기 위해 사실 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동안은 행동이 좀 잠잠하다 싶었는데, 스토커는 또다시 나타나 이정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어. 거짓말이지? 이정아, 내가 너 섭섭하게 한 거 있어? 진짜 서운하다.”

“나 애인 있다니까요?”

“거짓말. 그럼 데려와 봐. 그러기 전까진 나 절대 안 믿어. 그것보다 이정아…….”

순간 소름이 끼친 이정은 그대로 스토커로부터 도망쳤고, 도망치던 중 만난 것이 골목길에 혼자 서 있던 예현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고, 차라리 여기서 애인이 있다는 걸 보여 줘 버리면 저 미친 스토커가 떨어져 나가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예현에게 입을 맞추게 된 것이었다.

“사정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정의 사과에 조금 진정이 된 예현이 고개 숙인 이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어도 제대로 없는 날인가 보다.

늦잠 자고, 거지 같은 몰골로 나온 데다가 7년 사귄 애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본 것도 모자라서 사과 한마디 못 듣고 차여 버렸다.

거기다 스토커에 쫓기던 슈퍼스타에게 걸려서 별안간 키스까지 당하다니. 하루 만에 이런 일을 모두 겪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도와주신 답례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혹시라도…….”

“아, 됐어요.”

그래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을까,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젠 짜증은 날지언정 그렇게 우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재수 없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냥 가세요.”

곱씹어 봐야 나만 기분 나쁘지. 그렇게 생각한 예현은 답례를 운운하는 이정의 말을 잘라 버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럼 혹시 모르니까…….”

주머니를 뒤적인 이정이 예현에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제 매니저 명함이에요. 혹시라도 이 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이리로 연락주세요.”

물끄러미 명함을 바라보던 예현이 명함을 받아 들며 말했다.

“뭐, 받아는 놓겠는데, 연락할 일 안 생겼으면 좋겠네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로 한껏 미안함을 담아 사과를 하자 차마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스토커에 시달리는 연예인이라고 하니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별일이 다 일어나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끝을 모르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멎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신 만날 일 없겠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

“오빠, 일어나 봐. 오빠!”

다음 날, 예현은 예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 토요일이잖아……. 오빠 잠 좀 자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불과 한 몸이 된 채로 일어나기 싫다고 웅얼거리던 예현이 예서의 등쌀에 못 이겨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역시 일어나기는 싫었는지,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예현이 예서에게 말했다.

“원래 토요일은 하루 종일 자는 거 알잖아. 왜 깨우고 그래…….”

“오빠, 강이정이랑 아는 사이야?”

강이정?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그게 누구더라. 잠에 침식된 머리로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가던 예현이 말했다.

“아, 그 배우?”

어제 만났던 그 미친놈…… 아니, 배우. 근데 예서가 걔를 어떻게 알지.

“유명한 사람이야?”

“말이라고 해? 우리나라에 강이정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구나…….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예현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끄덕거렸다.

“오빠 진짜 강이정이랑 사귀는 거야?”

“……뭐라고?”

예서의 다급한 말에 그제서야 잠이 깬 예현이 이불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와 불쾌한 해프닝이 있었다는 건 나랑 그 남자, 둘밖에 모르는 건데 예서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라는 뒤늦은 의문이 든 탓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거 오빠잖아!”

예서가 핸드폰을 예현의 얼굴 앞에다가 들이밀며 말했다.

예현은 예서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조금 부은 눈을 크게 떠 화면을 확인했다.

[21세기 신데렐라의 등장, 사귀고 싶은 남자 1위의 비밀스러운 연인은?]

“……이게 뭐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오빠. 이거 진짜야? 오빠 강이정이랑 사귀어? 규진 오빠랑은?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나도 강이정 완전 좋아한단 말이야아!”

질문으로 시작해 투정으로 끝난 말에도 예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내리자 기사에 첨부된 동영상이 보였다.

[“자기야, 많이 속상했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화 그만 내고 나 좀 봐주라. 응?”]

[“우리 자기, 많이 화났어?]

예현은 그제서야 특종이다, 를 외치며 도망갔던 남자를 기억해 내고 이마를 짚었다.

연예인과의 입맞춤, 그리고 특종을 외치며 도망간 남자라면 남자의 정체는 뻔했다. 기자겠지.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앞뒤로 욕한 건 어디다 잘라먹고 이 부분만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이 기사 내용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강이정의 소속사인 레인즈 컴퍼니 측에서는 ‘현재 사실 확인 중이다.’라며 말을 아꼈다.]

사실 확인도 안 하고 기사부터 쓰면 어쩌자는 거야. 거기다가 강이정은 이미 유명 연예인이지만 난 하루아침에 날벼락 맞은 일반인이라고.

예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이 기사, 언제 뜬 거야?”

“12시에 떴으니까 한 시간쯤……? 아니, 그것보다 오빠. 어떻게 나한테 이런 걸 비밀로 할 수가 있어? 나는…….”

“예서야. 신예서. 제발 조용히 좀 해 봐.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예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생각에 빠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자신이 비참하게 차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폰 하다가 강이정 기사 떴길래 봤는데 오빠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예현은 귀가 아플 정도로 소리를 치는 예서를 뒤로 하고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락할 일 없겠지.’

어제 집으로 돌아와서 주머니를 정리하다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 버렸던 명함. 당장 그거라도 찾아서 저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정정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만 했다.

“아, 오빠아!”

“찾았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문제의 명함을 찾아낸 예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줄게.”

예현이 입이 한참 튀어나온 예서를 방 밖으로 내보내며 말했다.

[부재중 전화 28건]

[안 읽은 메시지 43건]

기사를 본 듯한 지인들로부터 한 시간 사이 엄청난 양의 연락이 와 있었다. 주말이라고 무음으로 해 둬서 망정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멍청하게 전화를 받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했을 것이었다.

“하아.”

예현이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명함에 적힌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우선 정정 기사부터 내 달라고 하자.

그렇게 하면 며칠 정도는 시끄럽더라도 일주일 정도면 잊혀질 거야.

예현은 그렇게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예현은 지나칠 정도로 굽신거리는 매니저와 통화를 하고 이정의 소속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자는 약속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저희도 당장 아니라고 해 드리고 싶긴 한데, 이게 사안이 조금 커져서요. 진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면 오늘 저희 회사로 오셔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저희 쪽에서 사람 보내겠습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애 관리를 똑바로 못 해 가지고…….’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사과와 상황 설명을 동시에 뱉어 내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같은 직장인으로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아…….”

그렇게 급하게 약속을 잡고 출발한 택시 안, 예현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연락들을 애써 무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기는 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강이정이라는 이름을 검색하자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이정, 데뷔와 동시에 라이징 반열에 들어선 올해 최고의 슈퍼 루키]

[대세 강이정, 이효은 작가 신작 ‘너는 내가 아니다.’ 남자 주인공 발탁]

[강이정, 백호예술대상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 그의 끝은 어디인가]

나이는 27살, 뭐야. 나보다 어리잖아. 예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프로필을 읽어 나갔다.

“아, 이거 전에 규진이 형이 보러 가자고 했던 영화인데…….”

천천히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예현이 들어 본 드라마, 그리고 영화의 제목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엄청 유명한 사람이었네. 예현은 다시 기사란으로 돌아가 이정에 대한 기사들을 찬찬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꽤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보였다.

[라이징을 넘어선 ‘대세’ 강이정. 5년 연속 사귀고 싶은 남자 1위 등극.]

그러고 보니 기사 제목에도 사귀고 싶은 남자니 뭐니 하는 소리가 적혀 있었지. 예현은 헤드라인을 눌러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월화 드라마 ‘이사님의 위대한 취미 생활’에 출연 중인 대세 배우 강이정이 5년 연속 사귀고 싶은 남자 랭킹 1위를 차지하며 화제에 올랐다.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된 배우 강이정은 스무 살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연기에 입문, 이듬해인 스물한 살에 귀여운 연하남 ‘유이재’ 역을 맡으며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키 187센티미터에 우성 알파라는 타고난 형질.

뛰어난 외모와 그에 뒤지지 않는 연기력으로 어린 나이에 ‘국민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그는 외모와 연기력 외에도 다양한 매력으로 대중들을 매료시켰다.

EH 그룹 회장의 외손자로 알려진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각종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이는, 소위 ‘엄친아’로 불리는 인물이다.

2년 전 EH 그룹과의 관계가 알려지자 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배우 강이정으로 생활하고 싶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그는 실제로 가족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연기의 길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 생활에는 가족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의 뛰어난 애티튜드와 다양한 재능을 본 네티즌들은 ‘역시 엄친아’,‘재벌 그룹 손자는 말하는 것부터가 부티 난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강이정은…….]

“도착했습니다.”

기사인지, 찬양인지 알 수 없는 글을 집중해서 읽다 보니 어느새 이정의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하시면 꼭! 먼저 연락주세요!’

“아, 잠시만요. 미터기 켜 놓으셔도 되니까 이대로 서 있어 주실 수 있나요?”

뒤늦게 매니저의 간곡한 부탁이 떠오른 예현이 택시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매니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 예현 님.]

“지금 1층이에요.”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다급하게 물었다.

[설마 정문으로 온 건 아니시죠?]

“정문인데요.”

예현이 인파가 몰린 레인즈 컴퍼니의 정문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인파가 몰려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정문이 아니고 어디로 가겠냔 말이다.

[택시세요?]

“네.”

[그럼 저희가 지금 사람 보낼 테니까, 회사 뒤쪽에 있는 미즈렐라 카페 앞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아, 혹시 얼굴 가릴 만한 거 있으세요?]

“마스크 가져왔어요. 알겠어요. 기사님, 여기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 미즈렐라 카페 앞으로 가 주세요.”

“예에~.”

목적지를 수정한 예현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마스크를 착용하며 말했다.

“건물 한번 으리으리하네.”

살면서 이런 곳에 올 일이 있으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예현이 레인즈 컴퍼니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국내 최고의 기획사 중에 하나라더니, 그 말이 괜한 말은 아니었나 보다.

“안녕히 가세요-.”

예현이 택시 기사의 인사를 받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가 갑자기 마스크를 꺼내 쓰는 예현을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카페 앞에서 내려 잠시 기다리고 있자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예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신예현 씨 맞으시죠.”

“네.”

“아,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따라오세요. 강이정 씨랑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과 인사부터 건넨 남자가 예현을 회사 건물까지 안내했다. 첩보물이라도 한 편 찍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건물 안에 들어온 예현은 그제서야 마스크를 벗고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일단 올라가서 다시 제대로 설명해 드리겠지만……. 아무래도 스토커를 피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기자까지는 신경을 못 쓴 것 같더라고요.”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연신 사과를 건넸다.

그래, 사고 친 사람이 잘못인 거지 뒤처리하는 사람들에게 화내 봐야 뭐 하겠어.

예현은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입을 다물었다.

“아, 따라오세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예현은 남자의 뒤를 따라 레인즈 컴퍼니의 회의실로 들어섰다.

“모셔왔습니다. 이쪽은 다들 아시다시피 신예현 씨고요, 예현 씨, 이쪽은 저희 이사님이신 김재련 이사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전화 나눴던 이정이 매니저 이주석입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예현 씨.”

이정의 매니저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제일 중요한 사람이 없네요.”

예현이 회의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매니저에 회사 이사까지 불러 놓고 정작 당사자인 이정이 회의실 안에 없었다.

“아, 급한 스케줄이 있어서……. 지금 오고 있으니까 금방 도착할 겁니다. 아마 한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에요.”

매니저가 예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말씀드렸듯이, 레인즈 컴퍼니 이사 김재련이라고 합니다. 강이정하고는 어릴 때부터 연이 있었던 지라 보호자…… 같은 느낌으로 자리하게 됐습니다.”

“신예현입니다.”

짧게 자기소개를 한 예현이 자리에 앉았다.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왔으면 뭔가 대책을 세워 놨다는 거겠지. 예현이 삐딱한 시선으로 재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서부터 듣고 싶은데요. 제가 지금 급하게 나온 거라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 해서요.”

“아, 예. 우선 이정이가 스토커 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예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하자 매니저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하아, 들으셨다시피 이정이가 악질 스토커한테 시달리는 중인데 스토커만 생각하느라 기자 생각을 못 했나 봐요.”

“영상 찍고 나서 대놓고 특종이라는 얘기를 하고 도망갔었는데도요?”

사실 예현 본인도 얼떨떨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자신은 그렇다 쳐도 직업이 연예인인 사람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매니저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랬었다고요? 저희에겐 그런 이야기 안 하던데……. 저희도 오늘 아침에 언론사 쪽에서 연락받고 안 거라서요.”

작은 목소리기는 했으니 못 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영상이 찍혔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텐데.

“뭐, 못 들은 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전 지금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없거든요. 이거 보이시죠.”

예현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지치지 않고 울리는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그쪽에서 유예 기간도 안 주고 바로 터트려 버려서요.”

매니저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는데…….”

매니저가 예현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빨리 이야기 끝내고 돌아가서 예서 달래 줘야 하는데. 조금 답답해진 예현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저…….”

“이 매니저, 그냥 내가 이야기할게.”

급기야 손까지 벌벌 떠는 매니저를 보다 못한 재련이 나섰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재련이 예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예현 씨,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뭔데요?”

불길한 예감을 느낀 예현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포옹도 아니고, 키스하는 영상이 나가 버려서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이정이 이미지에 타격이 큽니다. 게다가 영상에서 자기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까요.”

확실히 그렇긴 했다. 사진이면 각도 탓이라고 우겨 보기라도 할 텐데, 하필 영상인 탓에 빼도 박도 못하고 연인인 것처럼 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그건 강이정 씨의 문제고, 저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 같은데요. 전 그냥 길 가다 봉변당한 것뿐인데…….”

“충분한 보상은 하겠습니다. 세 달, 딱 세 달만 이정이의 연인인 것처럼 지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재련의 말에, 예현은 어이를 상실한 채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뭐라고요?”

“부탁드립니다. 세 달이면 되니까, 아니. 정 안 되면 한 달이라도 괜찮으니까 이정이의 연인인 척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릴게요. 예현 씨. 진짜 사람 하나, 아니 둘, 아니 여럿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이정의 매니저까지 가세해 사정하기 시작하자 예현은 당황한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이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자 따위로는 가려지지 않는 아우라와 큰 키, 뛰어난 피지컬. 예현은 그가 모자를 벗기도 전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자들이 길을 완전히 꽉 막고 있어서요.”

예현이 한껏 날이 선 눈을 하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기자들이 길을 완전히 꽉 막고 있어서요.”

이정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제의 일은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고, 내 인생에 연예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일이 오늘 말고 또 언제 있겠냐고 생각한 것이 부질없도록 빠르게 다시 이정을 마주하게 된 예현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또 보네요.”

“아, 신예현 씨……였죠. 이름은 주석이 형한테 들었어요.”

이정이 안절부절못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 매니저를 힐긋 보며 말했다.

“야, 강이정. 어제 너 찍어 간 기자가 특종이라고 말하면서 도망쳤다던데, 왜 말 안 했어?”

“그런 말을 했다고요? 못 들었는데.”

이정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아 꽤나 곤란한 입장이 된 예현과는 달리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수 없을 정도로 말끔한 잘생긴 얼굴을 보며 예현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말은 못 들었다고 쳐도, 영상을 찍은 것까지 못 봤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스토커랑 한패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전에도 사람까지 써서 화장실까지 쫓아왔었거든요.”

이정이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기자인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달려가서 잡았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예현 씨.”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예현이 이정의 반짝거리는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됐고, 내가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정정 기사 내고 정식으로 사과문 발표하는 거. 보상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난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고요.”

“예, 예현 씨.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요. 적당한 때에 일반인 애인이 과도한 관심을 버티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기사 내면 금방 사람들도 잊어버릴 거에요.”

“전 지금도 과도한 관심을 버틸 수가 없거든요?”

매니저가 울상을 하고 매달렸지만 예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대답했다.

매니저나 이 망할 연예인 때문에 고생할 스태프들은 좀 불쌍하지만, 남이 불쌍하다고 남의 사정 하나하나 다 들어줬다가는 자신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는 법이다.

회사에서 날아오는 연락들을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도 없고,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채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예서에게도 어서 해명을 해야만 했다.

“한 달에 이천, 기사 한 번 크게 날 때마다 성과급 천.”

그때, 재련이 비장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기타 이 연애에 드는 부대 비용은 우리 쪽에서 다 대겠습니다. 단기 알바라고 생각하고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무시해 버리기엔 너무 큰 액수에 예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세 달만 해도 육천에 성과급까지 생각하면 그 짧은 시간 만에 자신의 연봉보다도 큰 돈이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팬들은 반반이지만, 사실 대중 쪽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거든요. 오히려 설렌다, 대리 만족 된다. 뭐 그런 반응도 있고…….”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키스했다고 정정 보도를 했다가는 강이정 이미지에도 타격이 크고, 이래저래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예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얼굴 팔고 거짓말하는 일을 3개월 하고 육천 플러스알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예현에게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가족도, 친구들도, 직장 동료들도 다 속여 가면서 사람들 앞에서 강이정 씨 애인인 척하라고요? 육천이 아니라 육억을 줘도 못 해요.”

예서의 등쌀과 떠드는 것 좋아하는 만년 과장 김 과장의 오지랖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평생직장이라면 또 모를까, 내가 3개월만 먹고살 것도 아니고 겨우 그 금액 때문에 앞으로의 사회생활까지 죄다 포기해 버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예현 씨,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진짜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 드릴게요.”

“저 애인으로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잘해 줄게요.”

남 일을 관람하는 것처럼 가만히 옆에 앉아 있던 이정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잘해 주긴 무슨, 예현은 마침 타이밍 좋게 메시지 알림이 뜬 액정을 세 사람 쪽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 봐요. 기사 뜨고 나서부터 지인한테 미친 듯이 연락이 오고 있다고요. 이 많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일일이 해명을 해요? 연예인이면 다예요? 일반인 사정도 좀 생각을 해 줘야……”

“저, 자기…… 님한테서 메시지가 왔는데, 예현 씨 애인 있으신 거예요?”

그럼 그것부터 말씀을 해 주셨어야지……. 예현이 매니저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으며 황급히 핸드폰을 자신 쪽으로 가져왔다.

어제 돌아오고 핸드폰을 내던져 버리고 방에서 몰래 울다 잠들어 버린 탓에 아직 규진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헤어졌어요. 전화번호 삭제하는 걸 깜빡한 것뿐이에요.”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예현이 급하게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기사를 본 거겠지.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도 연락 한 통 없더니 갑자기 연락 온 걸 보면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 그래도 7년인데. 그동안 쌓아 온 추억이 얼만데. 다른 사람 옆에 있는 날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지 않았을까.

그런 거라면 한 번쯤은, 한 번쯤은 넘어가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은 바보 같다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규진과 사귀는 7년 동안, 예현에겐 규진이 전부였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헤어지기엔 그동안 쌓아 온 감정이 너무 컸다.

잠깐 만나자고 하면,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그냥 그러자고 해야지. 미안하다고 하면 잠깐 화를 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못 이기는 척 받아 줘야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규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자기♡ : 그렇게까지 해서 내 마음 돌리고 싶었어? 내가 졌어. 결혼은 무리지만 애인으로라면 계속 옆에 있어 줄게.]

그리고 규진의 메시지를 읽은 순간, 예현은 이 핸드폰이 약정 23개월 남은, 큰맘 먹고 새로 장만한 핸드폰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손에 든 것을 창문 밖으로 내던질 뻔했다.

“하, 하하…….”

이 개새끼. 뭐? 결혼은 무리지만 애인으로라면 옆에 있어 준다고? 무려 있어 주시겠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7년 동안 사귄 사람은 대체 뭐였을까. 조금 잘난 체를 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할 급이 아니라는 이유로 몰래 바람을 피우고, 들키고도 뻔뻔하게 굴더니 이젠 뭐? 결혼은 무리지만 애인?

지금 나보고 내연남 역할이라도 하라는 건가? 예현은 자신의 앞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아하하!”

얼굴이 빨개졌다가, 새하얗게 질렸다가, 갑자기 다시 웃음을 터트린 예현을 보던 세 사람이 일제히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저기, 예현 씨. 사귀는 분이 있는 거라면 저희도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부터 확인했어야 하는데 저희가 마음만 급해서 잊고 있었네요.”

예현의 눈치를 살피던 매니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귀는 분이라, 예현은 다시 한번 규진의 메시지를 곱씹어 보다 말했다.

“아뇨. 사귀는 사람 없어요. 어제까진 있었는데, 마침 헤어지고 집에 가던 길에 강이정 씨가 저한테 냅다 입술부터 들이댄 거였거든요.”

“그……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해. 강이정. 빨리 사과드려.”

예현의 말에 매니저가 어쩔 줄 몰라하며 이정의 뒷머리를 잡아 눌렀다. 그러자 이정이 머리를 눌린 채로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됐어요.”

예현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메시지를 내려다보았다. 망할 놈, 개새끼. 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규진에게 거하게 엿을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아니, 하다못해 쪽팔리지 않을 수준은 되어야 이 짜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았다.

“여, 역시 무리겠죠…….”

예현의 냉랭한 얼굴을 보며 매니저가 재련을 향해 울먹거리며 말했다. 무슨 연락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좋은 연락은 아닌 것 같았다.

“하, 강이정……. 진짜 내가 너 언젠가는 사고 한번 칠 줄 알았다.”

“알았으면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랬어요. 그럼 좀 조심했을 텐데.”

“이게 진짜 한 마디도 안 지지.”

재련이 이정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내려놓았다.

[무리할 필요 없어. 난 내 새 애인이랑 잘 살 테니까 형도 그분이랑 잘 살아. 차단한다.]

“할게요.”

문자를 전송하고 규진의 연락처를 차단한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네?”

“해요, 합시다. 대신, 할 거면 똑바로 해요. 누가 봐도 연인으로 보이게.”

예현이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말했다.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라고 했던가. 구질구질하게 규진에게 매달릴 마음도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최대한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난 너 같은 거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하나도 힘들지 않고 슬프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계약 연애, 그거 해 주겠다고요.”

“지, 진짜요?”

매니저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놀란 것은 재련과 이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 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잠깐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란 말인가.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얼굴 팔리든 말든 상관없어요. 나랑 저기 강이정 씨랑 죽고 못 사는 사이라는 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어요.”

“네?”

당황한 매니저가 재련과 예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그러나 예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요구 사항을 말할 뿐이었다.

“누가 봐도 연애하느라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연기해 줄 테니까, 그쪽도 똑같이 해 달라는 말이에요.”

예현이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거래 조건에 당황한 매니저와 재련과 달리, 이정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예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문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기♡라는 사람이 어지간히 불을 붙여 놨나 본데 자신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 계약 성사네요.”

이정이 예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난 다람쥐마냥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적어도 답답하게 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신예현 씨. 아, 아니지. 자기라고 불러야 할까요?”

“뭐라고 부르든 알아서 해요. 중간에 마음 바꾸지나 말고.”

예현이 이정이 내민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렇게,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한 계약 연애가 성사되었다.

“그럼 일단 기사를 내기 전에 설정을 맞춰 놔야 하니까, 기본 설정부터 짜 봅시다.”

“강이정 오늘 스케줄 더 없어?”

“오늘은 저녁에 라디오만 가면 끝이에요. 다섯 시간 정도 남았네요.”

넓은 회의실에서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사기극의 극본을 짜기 시작했다.

“어제 헤어졌다고요?”

“네.”

“그럼 오래 사귀었다는 말은 하면 안 되겠네요.”

매니저가 볼펜을 살짝 문 채로 고민을 했다.

“어차피 지가 바람피워서 헤어진 거라, 양심이 있다면 조용히 있을걸요.”

“아…….”

덤덤한 발언에 매니저 주석이 더 놀라 예현의 눈치를 봤다. 침묵을 깬 것은 재련의 한마디였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일단 설정은 예현 씨를 내심 좋아하고 있던 강이정이 두 사람이 헤어진 틈을 타 냅다 고백한 걸로 갑시다.”

“만난 계기는 어떤 게 좋을까요?”

“사귄 첫날부터 딥키스라, 화끈하네요.”

“이게.”

남 일 이야기하는 것마냥 추임새를 넣던 이정이 결국 재련에게 머리를 한 대 쥐어박혔다.

예현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설정에 살을 붙여 나갔다.

“그럼 사귀기로 하고, 울고 있는 걸 달래 주던 장면이라고 보도하시면 되겠네요.”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얘야 원래 유명인이고,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까지 기사로 나가는 사람이니 큰 문제 없겠지만 예현 씨는…….”

매니저가 뒤늦은 걱정을 하며 예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알아볼 사람은 다 알아봤고, 제 지인 중에 입 싼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신상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그냥 내 손으로 풀어 버리는 게 나아요.”

예현의 무덤덤한 말에 이정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물어보는 것도 조금 우습긴 한데, 정말 괜찮겠어요?”

“꼭 봤으면 하는 인간이 있어서 이러는 거거든요. 왜요, 혹시 못 하겠어요?”

“그럴 리가요.”

예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대가 어리숙한 것보다야 저돌적인 게 낫지.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요.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 직업은 회사원. 중학생인 여동생 하나 있고 부모님은 없어요. 그쪽 정보는 오면서 대충 봤어요. 스물일곱 살이고 미국 유학하다가 오셨다고요.”

예현이 자신의 신상을 줄줄 읊었다.

“그 정도는 제 팬이 아니라 그냥 길 가던 사람도 아는 정보인데요, 아직 많이 공부하셔야겠어요. 예현이 형.”

얼마나 봤다고 친한 척이야. 예현은 나이를 듣자마자 친한 척을 하며 형이라고 부르는 이정을 잠시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연인 행세를 해야 하는 사이인데 이런 것 가지고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그건 주말 동안 열심히 공부해 놓을게요. 됐죠?”

“서로에 대한 공부는 두 사람끼리 알아서 하시고, 그것보다 일단 기사로 낼 입장부터 정리하시죠.”

재련이 쓸데없는 대화를 중단시키며 말했다.

“일단 예현 씨가 일반인이고,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조금 조심스럽다는 쪽으로 입장 내 볼게요.”

“예현 씨 말대로, 어차피 신상이 퍼지는 걸 완전히 차단 할 수는 없을 테니 자연스럽게 연애 장면을 흘리는 식으로 가는 것도 괜찮겠네요.”

주석과 재련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넌 팬카페에 올릴 입장문이나 빨리 써. 써서 컨펌 받고 올려.”

“네.”

재련이 이정을 보며 핀잔을 주자 이정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펜을 꺼내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예현이 이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난 이제 뭘 해야 해요?”

“음……. 일단 나에 대한 공부부터? 제 나이나 유학 경험 같은 건 연인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대부분 알 만한 거거든요.”

이정이 예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아, 그 전에 우리 번호 교환부터 할까요?”

“네, 뭐.”

예현이 이정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 11자리를 예현의 핸드폰에 입력한 이정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뭘로 저장하는 게 좋을까요?”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지 않아요?”

“요즘 대포 카메라 성능이 얼마나 좋은데요. 딱딱하게 강이정, 세 글자만 저장해 놓으면 정 없는 사이인 거 다 들켜요.”

예현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어 보인 이정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자판을 몇 번 두들기고는 예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정이♡]

“이 정도는 되어야 의심 안 받죠.”

이정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연예인은 보통 사람들과 종족부터가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담담한 모습이라니.

예현은 이정을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

“방금 전화한 거 내 번호예요. 이름은 알아서 하시고, 꼭 필요할 때만 연락해요.”

“사람들한테 여기저기 알리고 싶다면서요? 그럼 자주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자주 연락하든가요.”

“설정은 이 정도면 될 거 같고. 그럼 이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주석과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재련이 이정과 예현을 보며 말했다.

“예현 씨를 못 믿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고, 아무래도 이런 일은 문서로 남겨 두는 게 확실하니까요.”

재련이 노트북을 펼치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의 요구 조건을 다 말하고 확실하게 계약서를 쓰고 가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외부에 유출될 일은 없는 거겠죠?”

“그랬다가는 저희 쪽이 더 손해인걸요.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주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일단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계약의 최소 유지 기간은 세 달, 세 달이 지나서부터는 예현 씨의 의사에 따라 한 달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걸로 할 겁니다.”

재련이 타자를 치며 말했다.

“한 달마다 이천만 원의 보수가 입금될 거고요, 예현 씨의 사생활이 크게 보도가 될 때마다 천만 원씩 추가로 입금될 겁니다. 대신 양쪽 다 계약에 대해서는 어디에 가서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절대 말 안 해요.”

예현이 핸드폰을 꽉 쥐며 대답했다. 사실 이제 와서는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박규진, 그 새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기본적인 계약 조건은 이렇고……. 이제 세부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나중에 가서 서로 의견이 안 맞는 부분이 있으면 피곤해질 테니까요.”

재련이 계약서의 틀을 정리하는 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말했다.

계약서에 꼭 넣어야 할 부분이라, 예현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제 신상은 퍼지든 말든 상관없지만, 가족 신상은 철저히 보호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대한 힘써 보겠습니다. 다른 요구 사항은 없으신가요?”

“계약 기간에는 카메라 앞에서뿐만 아니라, 정말 제 애인인 것처럼 행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지인들이나 가족…… 앞에서도요.”

예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화를 낼까. 아직 규진에게 차였다는 것도 말하지 못했는데 계약 연애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분명 난리를 칠 것이다.

“그건 당연한 거죠. 남들한테 알려져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일이니까.”

“그럼 강이정 씨 쪽에서는 바라는 요구 사항…… 없습니까?”

예현이 이정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요구 사항이라……. 음, 적어도 이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은 서로 다른 애인을 사귀지 말 것. 그리고…….”

“그리고?”

예현과 이정이 말하던 대로 타자를 치던 재련이 되물었다. 그러자 이정이 화사할 정도로 산뜻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나 좋아하지 말 것. 아니, 좋아하게 되더라도 절대 티 내지 말 것. 이렇게 두 개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하, 자신감 한번 대단하시네요.”

예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이정이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에 재벌가의 외손자, 거기다 우성 알파라는 형질까지 완벽한 조건을 가진 인간이기는 했지만 예현은 이미 그런 사람에게 크게 덴 직후였다.

미쳤다고 똑같은 짓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해. 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내용 정리해서 내일까지 계약서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네.”

“그럼 내일 변호사 불러서 공증받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인들에게 해명도 해야 하실 거고.”

재련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아, 예현 씨. 이건 대충 정리해 본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에요. 이정아, 사진 찍어 놨으니까 너한테도 이따 보여 줄게. 외워 놓고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만 말해요.”

예현이 주석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종이에는 주석이 머리를 싸매며 작성한 이정과 예현의 운명적인 만남과 서로를 좋아하게 된 계기 등이 적혀 있었다.

“네. 알겠어요.”

“뒷문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정이 배웅하겠다며 따라 일어섰다.

“그럴 필요 없는데요.”

“오늘부터 연인인 거잖아요? 집까지는 못 데려다드려도 택시 타는 것까진 보고 보내야죠.”

이정이 진짜 연인을 대하기라도 하듯 예현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국민 배우라더니, 몰입력 끝내주네. 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맘대로 해요.”

“예현 씨, 늦기 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조심히 가세요.”

예현과 이정은 주석의 인사를 받으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예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난 이거 어쭙잖은 마음으로 할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그쪽도 제대로 협조해 줘야 할 거예요.”

“제안한 쪽은 이쪽인데, 누가 보면 형이 나보고 사귀자고 한 줄 알겠네요.”

규진의 문자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예현은 고민할 것도 없이 이정 쪽의 제안을 거절해 버릴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지 않나. 그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든지 예현의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규진의 문자를 본 순간부터, 예현은 분노와 복수심에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라도 해서 자신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규진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아, 이런.”

입술을 꾹 물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예현이 이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분명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별로 없었던 쪽문이었는데, 어느새 쪽문 앞은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들어가야……”

“어, 강이정이다!”

이정이 예현을 데리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한 기자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몰렸다.

찰칵, 찰칵.

“강이정 씨! 옆에 계신 분이 애인이신가요?”

“아직 소속사 측에서는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고 있는데, 열애 보도 사실인가요?”

“강이정 씨!”

순식간에 두 사람 앞으로 달려온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대며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아무리 기사 거리가 궁해도 그렇지, 범죄자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 사람한테 죽어라 달려드는군. 이정이 속으로 한숨을 쉬고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소속사 공식 입장 나갈 거고요. 이분은…….”

그때, 멍하니 카메라 플래시를 바라보던 예현이 이정의 옷자락을 잡더니 뒤로 숨으며 말했다.

“자기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마이크를 이정의 면전까지 들이대고 있는 기자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정은 조금 당황했지만, 예현은 조금 겁에 질린 것 같은 목소리로 이정을 올려다보며 말할 뿐이었다.

“나 조금 무서운데…….”

“허.”

이 형 진짜 보통 사람 아니네, 이정이 자신의 앞에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헛웃음을 지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아니 굳이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러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직업인 자신조차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카메라가 튀어나오면 당황할 때가 있는데,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러운 이 행동은 대체 뭐란 말인가.

찰칵, 찰칵.

특종을 잡은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녹음용 마이크를 들고 있던 기자가 마이크를 고쳐 잡으며 물었다.

“강이정 씨, 한마디만 해 주세요!”

“야, 더 물어볼 게 어딨어. 자기라잖아.”

먹잇감을 문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앞으로 내밀며 예현과 이정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예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만히 이정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 예현을 바라보았다. 예현은 회의실 안에서 보였던 분노에 가득 찬 눈은 어디론가 치워 버리고 천진난만한 눈으로 이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왕 같은 길을 걷기로 했는데, 나도 어느 정도 장단은 맞춰 줘야겠지.

이정이 예현의 모자를 고쳐 씌워 주며 다정하게 예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갑작스러운 손짓에 놀란 예현이 이정을 올려다보자, 이정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예현을 내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이정이 그렇게 말하며 예현의 얼굴을 약하게 쓸어내렸다. 그러자 예현 역시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괜찮아.”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놀란 기자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해 왔지만 이미 보여 줄 것도 다 보여 줬겠다, 예현은 더 이상 기자들 앞에서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

아무 말 없이 이정을 올려다보자 이정이 어렵지 않게 그의 뜻을 알아채고 나섰다.

“곧 공식 입장 나갈 예정이니 기사 통해서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분이 일반인이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해 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이정이 예현을 감싸 안다시피 한 채로 인파를 뚫고 나갔다.

기자들은 더 이상의 인터뷰는 바라지도 않는 듯 열심히 두 사람의 뒷모습만을 찍어 댈 뿐이었다.

“앞에 보이는 검은색 차, 아까 회의실까지 데려다주신 분이니까 저 차 타고 가면 돼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정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이정의 옷을 놓지 붙잡고 있던 예현이 말했다.

“어울려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제 일이기도 한데.”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말투로 돌아온 예현이 이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근데 옷은 언제 놔줄 거예요?”

“기자들 보는 데까지는. 목소리는 안 들려도 사진은 아직 찍고 있을 테니까요.”

이정이 차 문을 열어 주자 예현이 그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표정을 굳힌 채로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다시 연락하죠.”

표정과 다르게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한 예현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출발한 차의 뒷모습을 보며, 이정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웃었다.

*****

그리고 돌아온 월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한 예현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몰아친 연락 세례에 주말 내내 편히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술자리 한 번 나와라 ㅋㅋ 새 애인 이야기 좀 해 줘]

[오빠 우리 전에 한 번 밥 먹기로 했던 거, 그거 다음 주로 할까요?]

[예현아 ㅋㅋ 강이정이랑 기사 난 거 너 맞지?]

연락처만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부터, 연락처조차 공유하고 있지 않던 사람들까지 다양한 연락이 쏟아져 나왔고 예현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아주 간단한 것밖에 없었다.

[미안, 사람들 많은 데서 이야기하기가 좀 그래서]

[일이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

[ㅎㅎ]

기껏 기자들 앞에서 재롱까지 떨어 줬으면 당연히 사귀는 거라고 알면 되지, 왜 자꾸 연락하는 거야. 귀찮아 죽겠네.

1년에 한 번 연락을 주고받을까 말까 한 사람들뿐이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정과 이정의 소속사 쪽에서 오는 연락까지 무시할 수는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인파를 피해, 그리고 예서를 피해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한 예현은 핸드폰을 켜 자신과 관련된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강이정, 열애 인정. 상대는 한 살 연상의 일반인.]

[강이정 애인 착용 모자, 기사 보도 후 2시간 만에 완판]

“맞다. 모자, 그거 강이정 매니저분 거였지. 돌려줘야 하는데.”

소속사와의 합의,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재롱을 떨어 준 결과 예현은 하루아침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반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완판남이니, 21세기 신데렐라니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가장 부끄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강이정과 그의 애인, 애칭은 ‘자기야’]

대체 뭐 이런 것까지 기사를 내는 거야.

예현은 차마 기사에 첨부된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기자들 앞에서 강이정을 자기야, 라고 부르며 돼먹지도 않은 약한 척까지 한 것은 꽤나 충동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전부 기사로 나갈 거, 난 아주 잘 산다고. 아주 행복해 죽겠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기도 했고 기왕 하는 거 확실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저지른 일이었다.

[강이정 ♡, 기자들 앞에서도 멈출 수 없는 애정 표현]

그러나 차에 올라탄 직후 찍힌 사진이 미묘하게 버드 키스를 나누는 것처럼 찍혀 버려서 화끈하다느니,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당당한 연인이라느니 기사가 난 건 조금 창피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사귀는 걸로 됐으니, 이 정도는 해야 사람들이 믿겠지.”

예현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소속사의 말대로, 열애 기사의 반응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강이정의 팬카페에서는 탈덕 선언문이니, 굿즈 화형식이니 하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것마저도 극소수의 반응이었고 대중들의 반응은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요즘 세상에 연애가 잘못도 아니고 오히려 안 숨기고 인정한 게 더 나음]

[강이정 다음 일반인 애인은 나임]

[ㄴ 개소리 작작. 나임.]

사귀고 싶은 남자 1위의 ‘찐’ 연애 소식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다.

강이정의 다정한 눈빛, 목소리를 보며 ‘대리만족 쌉가능!’을 외치며 좋아하는 팬들도 있었고, 모자를 고쳐 씌워 주는 모습이 설렌다며 예현이 썼던 모자를 완판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이정의 이미지가 워낙 좋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긴 하지만, 예현에게는 하나같이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연애를 하는 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니.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어, 예현 씨. 일찍 출근했네?”

한참을 기사를 찾아보고 있자 어느새 다른 팀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예현이 고개를 들자 팀원인 이 대리가 커피를 마시며 인사를 건넸다.

“주말 동안 난리 났던데. 난 어차피 월요일이면 만날 거니까 굳이 연락 안 했어.”

“하하. 그러셨구나. 감사해요.”

팀에서 그나마 말수가 적은 이 대리는 팀원 중 유일하게 예현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팀장이나 입 싸기로 유명한 서 주임은 이미 한바탕 문자로 난리를 쳤었지. 이따 얼굴 마주할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네.

예현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귀는 사람을 그렇게 꽁꽁 숨기길래 무슨 신줏단지라도 모셔 놨나 했더니, 강이정이면 숨길만 하네.”

이 대리의 말에 예현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가 말하는 ‘사귀는 사람’은 이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일 바쁘기도 하고, 우리 이제 대학생 아니잖아. 굳이 사귀는 거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예현아. 내 말 이해하지?’

후계 경쟁에 포함되지 않는 자식이라도 재벌 3세는 재벌 3세. 규진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많다 보니 일반인 애인이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고 했다.

사귀는 것을 티 내지 말아 달라는 규진의 당부에 예현 역시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말을 아끼게 되었다.

어쩌다 애인이 있는 건 들켜 버렸지만,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규진에 대한 것을 숨기곤 했었지.

그때는 그게 예현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들킨 게 처음인 건지도 모르겠네…….”

“응? 뭐라고?”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들킨 것만 처음이고, 이전에도 꾸준히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예현은 씁쓸한 생각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따 팀장님이나 다른 팀원들 오면 시끄러워질 테니까 난 굳이 캐묻지 않을게요.”

가벼운 친절을 베푼 이 대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이 대리님이면 몰라도 다른 팀원들까지 이런 배려를 베풀어 줄 리가 없으니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지.

예현은 주말 내내 외워 둔 이정과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강이정의 매니저의 친한 동네 동생이다. 강이정을 처음 만난 건 매니저 형의 부탁으로 인해 물건 하나를 전달해 주려고 레인즈 컴퍼니에 갔다가 마주쳤고, 매니저 형이 아파서 일을 잠시 쉬게 되면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다가 강이정이랑 친해지게 됐고…….’

시험공부라도 하듯 달달 외운 내용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정말 내 이야기처럼,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행동해야 수상해 보이지 않을 테니까.

‘나는 원래 애인이 있어서 강이정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쪽이었는데 애인과 헤어지게 되면서 그 마음의 틈을…….’

“여, 이게 누구야! 우리 완판남 신예현 사원!”

한참 외운 내용을 복기하고 있는데, 예현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 내가 우리 신 사원이 언젠가 큰일 낼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김 과장이 예현에게로 다가와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이러는 건지, 미간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예현은 자신의 작고 소중한 월급을 생각하며 겨우 웃음을 띠었다.

“갑자기 유명인이 된 것 같아서 얼떨떨하네요.”

“내가 어, 그 누구냐.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 쫙 돌렸잖아. 그 신데렐란가 뭔가 하는 사람이 우리 사원이라고.”

누구 맘대로 남의 신상 정보를 그렇게 알리고 다니는지. 예현은 과장 몰래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신 사원. 그래서 어쩌다 강이정이 하고 사귀게 된 거야? 이거이거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 올라간다더니, 애인 얘기만 하면 꽁꽁 숨기던 이유가 있었구만?”

“에이 과장님. 그 애인하고는 헤어졌다잖아요.”

어느새 출근한 박 대리가 아는 체를 하며 예현에게로 다가왔다.

“그 애인하고는 헤어졌고, 강이정이랑 사귄 건 최근이라잖아요.”

“그래? 박 대리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공식 입장으로 다 떴어요. 사귄 지 얼마 안 됐다던데, 좋을 때네. 신 사원.”

“하하…….”

예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리 이렇게 된 거, 신 사원 애인 찬스 좀 쓰면 안 되나?”

김 과장이 예현에게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은 아니었기에 예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워낙 바쁜 사람이기도 하고, 계약 관계도 복잡해서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에잉. 그런 게 어디 있어?”

김 과장이 혀를 끌끌 차며 표정을 찌푸렸다.

진짜 애인인 것도 아니고, 진짜 애인이라도 그런 걸 부탁하는 게 말이 되냐.

예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정이가 하도 바쁜 사람이다 보니까, 시간 좀 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조금 미안해서요.”

“그래도…….”

김 과장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예현의 단호한 태도가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김 과장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뭐, 그래도 말은 해 봐. 혹시 모르잖아?”

“네. 노력해 볼게요.”

예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짝짝-.

“이제 일합시다. 일.”

상황을 정리한 것은 이 대리의 박수 소리였다. 예현에게는 구세주 같은 그녀의 박수 소리와 함께, 조금 늦은 직장에서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

“예현 씨, 진짜 한 번만. 응?”

출근하자마자 시달린 것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위기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다시 예현을 찾아왔다.

“이정이가 많이 바빠서요. 연락하기가 좀…….”

“아니, 애인인데 연락 한번 하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그래?”

팀원들에게 시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다른 부서의 동료들까지 예현을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예현 씨. 내가 예현 씨 입사했을 때 음료수도 사 주고, 자료도 대신 뽑아 주고……. 뭘 바라고 도와준 건 아니지만 잘해 줬었잖아? 섭섭하게 이런 부탁 하나도 못 들어줘?”

옆 부서의 김 주임이 예현을 잡고 우는소리를 한 지가 벌써 10분째였다. 주변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마저 질리는지 예현에게 그냥 한번 전화해 주라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그냥 전화 한 통 해 주고 밥 먹으러 가자. 김 주임 말대로 그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질질 끌어?”

진짜 애인이었어도 미안해서 연락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정은 예현의 진짜 애인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전화를 했다가는 사무적인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말투를 회사 사람들이 들었다가는 괜한 참견으로 예현을 귀찮게 할 것 역시 분명했다.

“미안하잖아요.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고, 혹시 촬영 중이거나 하면 전화 받기도 힘들 테니까…….”

“아, 강이정 이번에 이해리랑 새 드라마 촬영 들어갔다던데. 그거 찍고 있으려나? 예현 씨. 애인이니까 강이정 스케줄도 다 알고 있겠네?”

김 주임이 눈을 반짝이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나 강이정 진짜 팬이거든. 전에 팬미팅도 갔다 왔고. 아, 이 나이 먹고 연예인 좋아한다니까 조금 부끄럽긴 한데……. 진짜 나 강이정 목소리 한 번만 들어 보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서 쪽팔린 거 감수하고 말하는 거야.”

내 피 같은 점심시간……. 예현이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으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예현을 제외한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냥 한번 해 줘.”

“그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차라리 핸드폰이 고장 났다고 해 버릴까. 예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죄 없는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까지 찾아와 한 번만 전화를 하게 해 달라며 떼를 쓰는 김 주임의 팬심.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달갑지는 않은 일이었다.

‘아아! 한 번만, 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오빠 말도 잘 들을게. 어? 영통 한 번만 시켜 주라-.’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공부나 해.’

집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으나, 예서는 자신이 타이를 수 있는 존재였고 이런 일로 관계가 틀어질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타 부서의 주임을 동생 대하듯 혼낼 수도 없고, 좋게 거절하자니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예현은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 속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김 주임님. 제가 나중에 이정이 시간 될 때 한번 전화해 달라고 할 테니까 오늘은…….”

띠리링-

다음을 언급하며 김 주임을 쫓아내려는 순간, 사무실 안에 핸드폰의 기본 수신음이 울려 퍼졌다.

“누구 전화야?”

“기본 벨 소리니까 과장님 거 아니에요?”

“엥, 내 핸드폰은 여기 있는데?”

과장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무실에 기본 벨 소리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은 딱 두 명이 있었다.

하나는 과장.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강이정]

“…….”

예현이었다.

*****

“강이정. 완전 화끈하더라?”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선배님.”

촬영장, 이정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애인에 대해 한마디씩 듣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정의 상대역을 맡은 해리가 이정을 보며 깔깔거렸다.

“나 진짜 놀랐잖아. 사실 열애 인정하고 타격 좀 받을 줄 알았는데, 끄떡없더라?”

“작품에 민폐 끼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죠.”

이정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참, 놀리질 못하겠다니깐.”

해리가 얄밉다는 듯 이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스케줄도 제일 빡빡할 텐데, 연애하랴, 작품 하랴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아주. 그래도 카메라 앞에선 티 내지 마라.”

“당연히 그래야죠. 노력하겠습니다.”

“저, 저기…….”

해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의 매니저가 주춤거리며 이정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하세요. 한 매니저님.”

“아, 그. 별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요…….”

매니저가 얼굴을 붉히며 이정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타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일이지. 이정이 웃는 눈으로 매니저를 보며 물었다.

“어떤 건데요?”

“그, 사귀는 분 이름이 혹시 신예현인가요?”

“……네?”

해리의 매니저는 해리의 등쌀에 못 이겨 이정의 열애 영상을 접하자마자 놀라 그대로 핸드폰을 떨어트렸었다.

‘아, 내 폰!’

‘죄, 죄송해요.’

그도 그럴 것이, 액정 속에서 이정과 찐하게 입맞춤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씨, 액정 깨졌잖아.’

‘허억. 어떻게 해요. 이거 제가……. 제가 물어내야…….’

‘하이고, 울겠다, 울겠어. 됐어. 나 그 정도 돈은 있거든.’

영상을 접하자마자 해리의 핸드폰 액정을 깨 버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져서 금방 잊어버렸지만, 이정의 얼굴을 보자 다시 예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어볼까, 모르는 체할까를 한참 망설이며 이정의 눈치를 살피던 매니저는 결국 예현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정에게 물었다.

“아, 제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지만……. 제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았길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정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현의 신상이 조금 퍼지긴 했지만, 영상에 찍힌 사람이 예현이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했다면 이런 식으로 물어보진 않았겠지.

오히려 그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니 매니저는 영상을 보고 예현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었다.

만약 예현과 친한 사이였다면 예현을 통해 사실을 확인했을 텐데. 굳이 편한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 물어본 것을 보아하니 그저 얼굴 정도만 알고 지내는 사이일 것 같았다.

“맞아요. 한 매니저님, 형이랑 아는 사이에요?”

“역시, 맞았구나…….!”

“뭐야, 너 얘 애인이랑 아는 사이야?”

짧은 시간 내에 상황 파악을 마친 이정이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해리가 호들갑을 떨며 매니저를 낚아챘다.

“뭐야. 그런 재미있는 얘기를 왜 미리 안 했어? 나 강이정 애인 얘기 좀 해 주라.”

“아, 이정 씨한테 물어볼게…….”

“그건 나중에 물어봐.”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의 촬영 신을 모두 마무리한 해리가 매니저를 끌고 자신의 밴으로 돌아갔고 남겨진 이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고,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매니저는 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예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말했다가 수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채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형. 나 다음 신 촬영까지 얼마나 남았지?”

“어, 어? 아마 한 한 시간 정도는 여유 있지 않은가 싶은데 왜?”

화장실을 다녀온 듯한 주석에게 일정을 묻자 한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매니저가 갑자기 예현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예현에게 연락을 해 말을 맞춰 놓는 게 좋겠지.

“그럼 나 잠시만 밴에 가 있을게.”

“어? 뭐……. 그래. 피곤하냐? 커피라도 하나 사다 줄까?”

“아니. 그냥 아무도 밴 근처에 못 오게만 해 줘.”

매니저에게 부탁을 남긴 이정이 차 안으로 올라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전화번호부 최상단에 자리한 기호 하나를 찾아 발신 버튼을 누르자 오래 지나지 않아 연결음이 끊겼다.

한 매니저님 이름이 한명아였나. 일단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이정이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꺄악! 강이정!]

핸드폰 너머로 들린 목소리는 예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젯밤까지도 문자를 주고받았으니 번호는 맞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지.

[이정……아. 내가 지금 회사라…….]

[예현 씨.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지금 점심시간이잖아요! 스피커폰 해 주면 안 돼요?]

반말을 하는 예현, 그리고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여자의 목소리. 이정은 액정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보통 이 시간쯤이면 점심시간이겠지.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이정은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 별안간 씨익 웃음 지었다.

[김 주임님. 잠시만…….]

“자기야. 점심 식사는 했어?”

[……]

이정의 말에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스피커폰 해도 돼. 자기 회사 동료분들인데, 인사 한번 하는 게 뭐 대수라고.”

기자들 앞에서는 아주 당돌하던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걸.

이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예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기라니. 세상에. 너무 로맨틱하다…….”

이미 혼이 반쯤 나간 것 같은 김 주임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혼이 나간 것은 예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딱하게 ‘신예현 씨.’만 하지 않아 주기를 바랐는데 다짜고짜 자기라니.

[응? 스피커폰 해 줘. 자기.]

“예현 씨. 빨리 스피커폰 해 줘요. 네?”

김 주임이 예현의 핸드폰을 뺏을 기세로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결국 그녀의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스피커 모드를 설정한 예현이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했어. 스피커폰.”

[안녕하세요. 배우 강이정입니다. 우리 예현이 형 잘 부탁드려요.]

사무실 안에 노이즈 낀 이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진짜 강이정이야.”

“우리 와이프가 그 뭐냐, ‘나는 니가 아니다’? 그거 엄청 재미있게 봤는데.”

“과장님, ‘나는 니가 아니다’가 아니라 ‘너는 내가 아니다’거든요?”

흥분한 팀원들이 한마디씩 거드는 동안 예현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자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이런 돌발 행동에 자신이 당황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바쁠 줄 알고 하고 싶어도 전화 안 했는데, 우리 마음이 통했나 봐. 어떻게 지금 딱 전화를 해 주네. 우리 자기.”

이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시작한 줄 아나. 예현은 속으로 이정을 비웃으며 말했다.

“오오오-.”

예현의 애정 어린 목소리를 들은 팀원들이 탄성을 지르며 예현을 놀리기 시작했다.

“자기라니, 너무 달달한 거 아냐?”

“이야, 좋을 때다.”

마음대로들 떠드세요. 난 한 달에 이천만 원 받는 꿀알바 중이니까.

예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생긋 웃었다.

“너는 밥 먹었어?”

[나는 촬영 시간이 좀 드문드문이라, 그냥 저녁에 몰아서 먹으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조금이라도 챙겨 먹어. 건강 상할라.”

예현이 속상해 죽겠다는 목소리를 하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갓 만남을 시작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연애 초기의 연인처럼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난 괜찮아. 피티 쌤도 있고, 회사에서 내 건강 얼마나 챙기는데. 우리 자기야말로 잘 챙겨 먹어야지. 자기는 피티 쌤도 없잖아.]

“나 챙겨 주는 사람 있어서 괜찮아. 너 있잖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낯간지러운 멘트를 뱉은 예현이 김 주임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임 님. 기왕 전화 온 거, 이정이랑 전화해 보실래요?”

“네, 네? 그래도 돼요?”

거의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한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김 주임이 예현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자기 직장 동료분이면 저한테도 중요한 분들이죠.]

“나, 나 진짜 팬이에요. 데뷔작부터……. 아니지, 나 전에 팬 미팅도 갔거든요. 이 나이 먹고 부끄럽게 연예인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나, 나잇값도 못 하고…….”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사람 좋아하는 데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저한테는 몇 살이든 다 소중한 분들이에요.]

이정의 말에 김 주임이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뒤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꿈 아니지…….”

[이정아, 뭐 좀 사 왔는데…….]

[아, 매니저 형 왔다. 시간 날 때 다시 연락할게. 오후 일도 힘내서 하고. 끊을게.]

털썩, 비틀거리던 김 주임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그와 동시에 이정에게서 온 전화도 끊겼다.

빨리 끊어서 다행이다. 예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바쁜 애라 전화는 피하려는 편인데, 오늘은 어떻게 먼저 연락이 왔네요.”

“예현 씨. 진짜 고마워. 나 진짜 일생일대의 운을 다 쓴 기분이야…….”

흐물흐물해진 김 주임이 예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점심 뭐 먹을래? 사내 식당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 내가 살게. 뭐든지 말만 해.”

“어허, 김 주임. 1팀은 1팀끼리 식사하는 거 몰라?”

그때, 김 과장이 근엄한 시늉을 하며 김 주임을 말렸다. 1팀은 1팀끼리 식사는 무슨. 언제부터 그렇게 몰려다녔다고.

“신 사원. 가자고. 물어볼 게 한두 개가 아니야.”

김 과장이 속이 빤히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예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분명 밥은 핑계고, 이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네. 과장님.”

그러나 이정의 팬으로 보이는 김 주임보다는 그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신기해하는 김 과장 쪽이 더 상대하기 편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예현이 김 주임을 보며 말했다.

“별것도 아니었는데요. 뭐. 정 그러시면 그냥 다음에 커피나 한잔 사 주세요.”

“가자! 가자!”

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신예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월급 이천만 원짜리 업무잖아.

‘나는 원래 애인이 있어서 강이정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쪽이었는데 애인과 헤어지게 되면서 그 마음의 틈을……’

예현은 다시 한번 자신과 이정이 사귀게 된 배경을 복기하며 비장하게 식당을 향해 걸어 나갔다.

*****

“이야, 어떻게 그렇게 만나냐. 인연이라는 게 진짜 신기하긴 해.”

김 과장이 입안 가득 문 밥알을 제대로 삼키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호기롭게 앞장서길래 점심을 사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김 과장이 팀원들을 데리고 간 곳은 고작 사내 식당이었다.

덕분에 예현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점심을 먹어야만 했다.

“이야. 만날 사람은 어떻게 해도 만난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닌가 봐?”

“그런가 봐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예현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애인한테 차이고, 하루아침에 슈퍼스타와 엮여 버리기까지.

현실보다는 오히려 이 가짜 설정이 더 현실성이 있으니 세상일이라는 것은 참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사귄 지 얼마 안 됐어도 그렇지, 너무 딱딱하게 구는 거 아냐?”

과장의 옆에서 맞장구를 쳐 주며 종알거리던 박 대리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제가요?”

있는 애교, 없는 애교 총동원해서 그 난리를 쳤는데 딱딱하게 군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황한 예현이 묻자 박 대리가 말했다.

“아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이름은 [강이정], 딱 이름 석 자만 저장해 놓는 게 어디 있어? 애인 서운하게.”

그건 또 언제 본 거래. 예현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바꿔야 하는데 잊고 있었어요. 주말 내내 하도 연락이 많이 와서…….”

“그래. 사귀는 사이에 딱딱하게 이름 석 자 저장해 놓는 게 어딨어. 섭섭하겠구만.”

김 과장이 입안 가득 들어찬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거, 몇 년 뒤에는 우리 회사에서 연예인이랑 결혼하는 사람 나오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요.”

무례한 발언이 한 차례 지나가자,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중 신이 난 것은 김 과장과 그의 따까리 박 대리밖에 없었다.

입이 싸기로 유명한 서 주임마저도 이번만큼은 예현의 눈치를 슬쩍 봤을 정도였다.

“그럴 리가요.”

재벌가의 자식인,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우성 알파와 부모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열성 오메가의 끝이 어떤지는 예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계약 연애, 거래처 직원이나 마찬가지인 이정과의 결혼 따위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하필 이정은 규진과 비슷한 부분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김 과장의 말은 예현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연애랑 결혼은 별개의 문제잖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내 마음 돌리고 싶었어? 내가 졌어. 결혼은 무리지만 애인으로라면 계속 옆에 있어 줄게.]

그건 예현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괜히 기분이 울적해진 예현이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

“고생했어. 신 사원.”

“아니에요. 고생은요.”

점심을 먹은 이후로도 김 과장과 박 대리는 심심하면 예현에게 연애 얘기를 해 달라며 딴지를 걸었다.

했던 이야기를 해 주고, 해 주고 또 해 주느라 기력이 다 빨린 예현이 출근할 때보다 핼쑥해진 얼굴을 하고 이 대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일주일 정도면 시들해질 테니까 조금만 참고. 들어가서 푹 쉬어.”

“감사합니다. 대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회사 앞에서 이 대리와 헤어진 예현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탔다.

퇴근 시간이라 발 디딜 틈 없이 꽉꽉 찬 버스 안에서 반쯤 쥐포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시달린 것에 비하면 오히려 안락한 수준이었다.

“에휴.”

버스에서 내린 예현이 한숨을 쉬며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면 이번엔 예서가 자신을 들들 볶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월 이천만 원이 어디 공으로 벌어지는 돈이던가?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축 늘어트렸던 어깨를 바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지잉-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내용을 확인한 예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진짜 차단하기라도 한 거야?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서 온 문자. 처음 보는 숫자 배열이었으나 예현은 어렵지 않게 문자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문자의 주인은 분명 규진일 터였다.

분명 알고 있던 번호 하나, 그리고 주말 동안 보낸 문자의 번호 하나를 차단했는데 핸드폰이 세 개씩이나 되는 건지, 아니면 이제 남의 핸드폰까지 동원하는 건지 또 다른 번호로 문자가 왔다.

지이잉-

번호를 차단하려는 순간, 문자를 보낸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받으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무슨 소리를 하든 결국 난 또 상처받고, 그에게 실망하게 되겠지.

차라리 안 받는 게 나아. 그렇게 생각한 예현은 전화를 곧장 끊어 버리고 미련 없이 차단 버튼을 눌렀다.

“이건 진짜 서운한데. 예현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예현을 멈춰 세웠다.

“……형이 왜 여기…….”

“예상은 했지만, 진짜 내 번호 차단해 버리는 거 보니까 마음이 좀 아프다. 너 그렇게 매정한 애 아니잖아. 예현아.”

예현이 7년 동안 온 힘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가, 그리고 그런 예현을 비참하게 차 버렸던 남자가.

“응?”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규진이 예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봤는데 왜 그런 표정이냐는 얼굴이었다.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내가 너 아니면 이런 동네까지 올 일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규진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예현에게로 다가와 그를 안으려 들었다.

가증스러운 새끼. 예현은 단호하게 규진의 손을 쳐 내고 말했다.

“그 이유 때문이면 더더욱 오면 안 되지. 우리 헤어졌잖아?”

예현이 규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규진을 이렇게 대하는 것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예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한심했고, 자신을 이렇게 한심하게 만든 규진이 미웠다.

“헤어졌다니, 누구 맘대로?”

그러나 규진은 며칠 전의 일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뻔뻔하게 행동했다.

“난 너랑 헤어지겠다고 한 적 없어. 너도 나랑 헤어지겠다고 한 적 없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예현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그제서야 이곳이 길거리라는 걸 자각한 예현이 규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딴 데 가서 얘기해. 예서가 듣기라도 하면…….”

“그러고 보니 예서 본 지도 오래됐네. 오랜만에 인사라도 할까?”

“미쳤어?”

예현은 실없는 소리를 하는 규진의 팔을 잡아끌어 그를 골목 안으로 내던졌다.

관리 잘 된 우성 알파의 몸이 업무에 찌든 열성 오메가의 손에 휘둘릴 리는 없으니, 규진이 휘둘려 준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예현이 쓰게 웃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안 하고 나 보냈잖아. 그럼 거기서 끝인 거지. 굳이 헤어지자는 말까지 해야 알아들어?”

“그러니까, 난 니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지도 모르겠어. 너 우리 집 어떤 곳인지 모르고 나 만난 거 아니잖아. 그럼 이런 상황은 당연히 감수하고 있었던 거 아냐?”

예현은 뻔뻔한 말을 하는 규진을 한 대 후려쳐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NW 그룹 삼남이라 후계자 수업도 못 듣는다고, 경영이나 회사랑은 크게 연도 없다며? 그렇게 징징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감수하라고.”

“그래, 그러니까 결혼이라도 생산성 있게 해서 가족들한테 도움 줘야지. 이 바닥에서는 결혼도 다 비즈니스야. 너 똑똑한 애잖아.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애라는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이 상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머저리가 누구보고 멍청하다는 거야. 예현은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난 형 NW 그룹 삼남이 아니라 그냥 인간 박규진으로 봤어. 결혼 같은 걸 기대하기라도 했냐고? 그래. 했어. 7년을 사귀었는데 그 정도 생각도 못 해?”

“예현아.”

“형은 결혼도 비즈니스로 해야 하는 대단한 사람이라 모르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7년 사귄 애인이랑 결혼 생각하는 게 정상이야. 그러는 형이야말로 나 열성에 가진 거 없는 앤 거 모르고 만났어? 다 알고 만났잖아.”

예현이 눈치도 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려 애를 쓰며 말했다.

“그렇게 보내 놓고는 밤새도록 연락 한번 없더니 이제 와서 애인으로는 받아 주겠다고?”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규진이 예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거잖아. 안 그래?”

규진이 예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허.”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예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날 아직 좋아해?”

“당연하지. 예현아, 네가 말했잖아. 우리 7년이나 만났어. 근데 어떻게 아무 감정이 없을 수가 있겠어?”

부드러운 목소리와 어깨를 쓸어 주는 손길. 마치 몇 달 전의 규진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그날, 왜 연락 안 했어?”

“아아. 그날.”

예현은 한 자락의 기대를 품고 물었다. 갑작스럽게 집 앞에 찾아와 내게 서운하다는 말을 지껄이는 거면 적어도, 적어도 뭔가 변명할 거리 하나쯤은 들고 왔겠지.

들어나 보자, 그래. 듣고 나서 결정해도 괜찮을 거야.

7개월도 아니고 7년인데, 내가 다른 사람 옆에 있는 걸 보고 본인도 마음이 마냥 편하기만 했을 리는 없잖아.

“서연이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다른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그러나 돌아온 대답에, 예현은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서연이가 같이 있던 그 여자분이야?”

“어. 어떻게 쪽팔리게 사람들 앞에서 그런……. 아무튼. 난리를 치는 바람에 달래 주느라고.”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예현이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여린 손바닥이 손톱에 패여 비명을 질렀지만, 마음이 시린 것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아아, HJ건설 사장 딸. 아버지가 건설 사업에 욕심이 생기셔서.”

어떻게 저걸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앞에서 주절거릴 수가 있지? 예현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말했다.

“건설사 따님 달래 주느라 다른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구나. 근데 이제 좀 진정되셨나 봐. 다른 거 찾아와서 달래 줄 시간도 생기고. 3일이면 꽤 빨리 와 준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비아냥을 가득 담아 말하자 규진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애도 아니고, 그런 것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잖아.”

“그럼 여기까지는 대체 왜 온 거야? 내 속이라도 긁으러 왔어? 형이랑 나랑 사귄 거 대학 동창들이 다 아는데 갑자기 얼굴 팔리니까 사람들이 둘이 헤어졌냐고 연락이라도 오디?”

예현이 목소리 조절에 실패한 채로 소리를 쳤다. 입을 뗄 때까지만 해도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 서연인가 뭔가 하는 여자랑 결혼할 거 아냐? 그 때쯤 되면 어차피 신예현은 열성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새끼라 헤어졌다고 말해야 할 건데, 뭐 하러 이딴 귀찮은 짓을 해?”

“신예현, 말 예쁘게 안 해?”

악에 받쳐 소리를 치자 규진이 표정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은 그가 말했다.

“왜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여? 나 너 걱정돼서 온 거야. 사람들 관심받는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애가 별 이상한 짓까지 해 가면서 자기 정상 아니라는 티를 내는데, 내가 그 정도 걱정도 못 해?”

관심받는 거 싫어하는 거 빤히 알면서, 이런 말을 들으면 더 비참해진다는 건 대체 왜 모르는 건데.

예현이 멍청하게 흘러내린 눈물을 벅벅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불쌍하니까 결혼은 무리고 연애는 계속 해 주겠다고? 그 말은 좋아할 거 같았어?”

“결혼은 그냥 제도일 뿐이야. 꼭 결혼하지 않아도…….”

“됐어. 더 설명하기도 싫어.”

예현이 규진의 말을 잘라 버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헤어지자. 나도 주제 파악하고 살 테니까 형도 형 사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살아. 이러고 있는 거, 그 여자분한테 걸리면 또 ‘다른 거’ 신경 못 쓰고 달래 주느라 바쁠 거잖아?”

“신예현.”

“난 그런 거 싫어.”

너무 허탈해 화를 낼 기력조차도 없었다. 보통 사람들과 상식의 기준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헤어지지 않은 거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나와의 만남은 피하던 애인이, 다른 여자와 하하호호 웃고 있는 걸 보고 나서도. 심지어 그따위 말들로 자존심을 그렇게 뭉개 놓고도.

그런 짓을 해 놓고도 내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래,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예현은 그 말에 곧바로 자신 있는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7년, 7년이다.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했던 연인이었고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던 사람이었다. 예현은 그를 많이 사랑했었다.

분명 차라리 몰랐더라면 나았을까, 그냥 모른 체하고 한 번만 용서해 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날이 있을지도 몰랐다.

“후회하든지 말든지. 이제 형이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그리고 기사 봤으면 알 거 아냐. 나도 다른 사람 있어.”

“하. 네가 강이정이랑 사귄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고?”

규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우나 고우나 몇 년을 본 사람이고,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규진은 예현이 정말 이정과 사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예현 역시 규진이 그 말을 순순히 믿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 나 같은 사람은 강이정이랑 사귀면 안 돼?”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규진이 예현의 양어깨를 움켜쥐고 말했다.

“나한테 관심 좀 끌겠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이정이랑 사귀는 시늉을 한다는 게 말이 돼? 신상 털리고, 귀찮게 하는 사람들도 다 버텨 가면서?”

“…….”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해. 그냥 나랑 잘 지내면 되잖아.”

“놔.”

예현이 규진의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늉 아닌데? 진짜 사귀는 거야. 형처럼 바람피우지도 않고, 나만 바라봐 준다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었겠어?”

“너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연상만 7년 만났더니 존나 질리더라. 그래서 이번엔 나 좋다는 연하 한번 만나 보려고.”

예현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규진을 바라보았다. 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예현이 규진에게서 벗어났다.

“우리 진짜 끝이야. 더는 집 앞에 찾아오지도 말고, 다른 번호 써서 연락하지도 마.”

“예현아.”

“애인 있는 사람한테, 예의 지켜야지.”

그렇게 말한 예현이 규진을 남겨 두고 돌아섰다.

“윽.”

규진을 두고 나오자 그제야 두 눈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끝이다. 예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

그런데,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 예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박규진은 내 뒤에 있었는데. 달려오는 소리도 안 들렸……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부를 타이밍을 못 잡아서.”

익숙한 목소리가 예현의 눈물을 멈추게 만들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부를 타이밍을 못 잡아서.”

사람이 너무 놀라면 눈물이 쏙 들어간다던가, 그 말이 맞았다.

예현은 눈을 끔뻑거리며 이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이 남자가 대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그, 급하게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왔는데…….”

그때, 이정의 뒤에서 매니저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너무 당황한지라 뒤에 매니저가 서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깨달은 예현이 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다.

“저 사람한테 우리가 무슨 얘기 하는지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이정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확실히 아직 규진의 시야에서 자유로울 만큼 멀리 걸어오지 못한 참이었다.

“일단 타요.”

이정이 예현의 손목을 조심히 잡아끌어 그를 밴에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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