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42)

화면이 까맣게 암전되고, 탁한 회색의 연기 CG가 흩날렸다. 앞 장면에서 예상한 것처럼 연기는 페로몬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불규칙하게 흩날리던 연기가 뭉쳐지며 하나씩 글자를 만들어 냈다. 이윽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완성된 글자 <악마의 얼굴>, 영화의 타이틀이었다.

104.

강해건의 은퇴 작품인 영화 <악마의 얼굴>은 강해건의 자전적 이야기였다. 한서림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였지만, 강 회장과 한 회장의 아동 학대 장면과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도구처럼 이용한 내용마저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

8년 전, 한서림과의 사고 같았던 섹스, 광고 촬영으로 인한 미팅, 정혼의 배경, 페로몬 폭주, 각인, 유산과 페로몬샘의 제거, 감금, 그리고 화재를 일으켜 탈출한 내용까지. 한서림에게 향할 비난이 염려되었는지, 한서림의 독단적인 선택이었던 각인의 과정이 강해건의 강제적 행동으로 각색되어 있었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에 빽빽하게 담아낸 이야기는 한서림을 버겁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한서림을 피해자로 포장해놔서 더욱 가슴이 무거웠다.

영화가 끝나고 한서림은 잠시 멍하게 굳어 있었다. 강해건은 영화에서 강해건의 역할을 했다. 저한테만 보여주려고 만든 거겠지, 설마 저걸 영화관에서 상영하지는 않았겠지, 오만가지 걱정이 밀려오는 순간, 일전에 강해건이 은퇴 작품을 촬영하고 있다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봤던 것이 떠올랐다. 무서운 것인지 두려운 것인지 모를 감정으로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한서림은 다급하게 이중호가 두고 간 종이를 집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두컴컴한 탓에 불을 켜고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하…….”

이중호가 두고 간 것은 영화 개봉 후 보도된 뉴스 기사와 한국에서의 진행 상황 및 여론 반응을 프린트해 놓은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틀 전에 영화가 개봉했고, 강해건은 영화의 내용이 거짓 하나 없이 전부 사실이라며 따로 인터뷰 영상까지 영화사를 통해 뿌렸다. 강해건 개인 투자로 만든 이 영화의 수익은 전부 오메가 재단에 기부될 예정이고, 강해건은 이 영화에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 흔한 무대 인사조차 없이 더는 매체에서 볼 수 없었다.

이틀 만에 화제가 된 영화로 인해 대중들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강해건의 인터뷰를 보면 저 끔찍한 일이 사실일 것이다, 하며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강해건이 강 회장과 한 회장을 고소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은 불식되었다.

모주원 사건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던 강 회장과 한 회장은 강해건이 고소한 아동 학대 건으로 추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연일 하락하던 서정 그룹의 주가가 폭락하며 불매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실상 서정 그룹의 몰락이 될 뻔한 일을, 강유건은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재벌가에서는 강해건과 강유건의 행보를 패륜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강유건의 형질을 두고 오메가가 경영 계승하는 일은 획기적이며 혁신적이라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기성세대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며 서정의 참담한 미래를 예견했다.

한휘 건설은 이 타이밍에 내부고발 비리가 터지며 압수수색까지 들어갔다. 불구속 수사가 진행되던 중에 잠적했던 한 회장은 정체 모를 괴한의 페로몬 폭격을 받아 인천의 한 부둣가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발정 페로몬으로 범벅된 한 회장을 발견하고 신고한 오메가를 한 회장이 강간하려고 했다가 때마침 도착한 구급대원들에 의해 사지를 결박당한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당시 병원으로 옮겨지는 중에 한 회장은 강해건이 자신을 밀항시켜주겠다는 이유로 불러냈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하는데 증거도 없이 허무맹랑한 말을 믿어줄 이는 없었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회장의 형질이 우성 알파인데도 불구하고 페로몬을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로 내내 발정 페로몬이 새고 있다며, 범인을 극우성 형질을 가진 알파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 회장은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있으나, 끊임없이 새는 발정 페로몬으로 인해 또 다른 성범죄가 우려되어 평생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중호가 준 서류에는 이 같은 내용과 함께 페로몬 폭격을 받아 발견된 당시 사진까지 있는데, 마치 누군가 막고 있는 것처럼 인터넷 그 어디에서도 한 회장의 페로몬 습격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언젠가 한 회장이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휘 건설이 망해서 길바닥에 나앉고 그런 의미의 불행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다른 걸로 피해를 받는 게 아니라, 저와 똑같이 페로몬으로 학대를 받고 남은 생을 두려움에 떨면서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늙어 죽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다. 그런데 정작 한 회장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기쁘기는커녕 속이 더부룩하고 토기가 치밀었다.

강 회장의 악행을 증명할 증인으로는 정 박사와 강유건, 한 회장의 페로몬 학대를 증명할 증인으로는 옛날에 한서림에게 억제제를 처방해주던 주치의와 모주원이 자처하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카페에서 페로몬으로 짓누르려고 했던 게 미안해서 그런 건가, 모주원이 왜 증인을 자처하고 나섰는지 잠깐 신경이 쓰였으나 강해건으로 꽉 찬 머릿속은 다른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

강해건을 비난하는 여론과 한서림을 동정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폭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강해건이 한서림의 목을 조른 것과 뺨을 친 것, 감금시킨 행위에 대해 물어뜯어 죽일 것처럼 분통을 터트리며 한서림보다 더 억울해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가 부친들에 대한 비난보다 오롯이 강해건에게만 향하는 칼날들이 비교할 수 없게 많았다. 강해건 역시 학대의 피해자이며 페로몬 폭주로 인해 지옥을 감내해왔는데 알아주는 이가 전혀 없다는 게 마음 아팠다.

이 영화 하나로 강해건은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다름없었다. 고작 제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어주자고 강해건은 모든 것을 내걸어 한서림을 감싸고 혼자서만 칼과 창을 맞고 있었다. 강 회장이고 한 회장이고 고소당했든 평생 격리가 되든 관심도 가지 않았다. 동정이나 연민이 들지도 않았다. 자업자득이고 그보다 더한 일을 당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저 한서림의 머릿속은 온통 강해건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는 이상 언제까지 비난이 따라붙을지 알 수가 없는데, 강해건은 평생 욕먹을 걸 알면서도 이런 미친 짓을 저질렀다.

서로 사랑했을 뿐인데, 사랑했다는 이유로 강해건과 한서림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강해건…….”

강해건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아까 이중호에게 강해건도 같이 온 건지 물어나 볼걸, 후회가 되었다. 그러다가 저에게 영화를 보게 만드는 일을 이중호 혼자 꾸몄을 것 같지는 않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강해건도 분명히 같이 왔을 것이다. 이중호에게 강해건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결심이 서자마자 한서림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집들만 빼곡한 주택가 어디를 둘러봐도 이중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시간 삼십 분 정도가 지났으니 아직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우욱…….”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제멋대로 토해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한서림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피를 흘리며 스러졌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으면서도 전부 빠져나가 말라비틀어진 느낌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한서림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며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두기만 했던 검은 덩어리를 전부 버릴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해건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오열하다가 진정하게 된 것은 그 이상 울 힘조차 남지 않아서였다. 진이 다 빠져서 일어설 힘조차 없는 탓에 넋을 놓고 멍하게 바닥만 응시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깨끗하게 관리된 구두코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구두의 주인을 먼저 눈치챈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한서림은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지 모를 그리웠던 사람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서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쌓였던 그리움이 넘치자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졌다. 일어선 한서림은 가만히 강해건의 얼굴을 살폈다. 첫 미팅 때 재회했던 날처럼 회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영화를 보고서야 강해건의 발현이 그날의 섹스 때문임을 알았다. 이틀을 앓고 강해건이 일어났을 때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소가 옅어져 있었던 이유는 저의 비정상적인 페로몬 샤워로 발현한 탓이었다.

“…….”

“…….”

강해건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술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서로의 눈동자만 하염없이 바라보면서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만 보다가, 한서림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오늘 완성한 샘플 향수를 꺼냈다.

“내가……, 1년 내내 매달려서 만든 향수예요. 대체 어떤 향을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고생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답을 찾았습니다. 시향 해볼래요?”

강해건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빛 눈동자가 진한 물기를 머금어 흑색으로 빛났다. 한서림은 강해건이 내민 손목에 샘플 향수를 분사해주었다. 익숙한 향이 번지는 것과 동시에 강해건의 볼을 타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향수의 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페로몬이 팍 터져 나오며 한서림을 강하게 옥죄었다. 다시는 그 어디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격렬하게 몸을 감싸왔다. 그리웠던 향을 흡수하며 눈을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흐릿하게 뿌옇던 한서림의 시야가 선명해졌다. 건조했던 뺨이 축축하게 젖었다.

“…….”

허망함과 상실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이토록 안정감이 느껴지는데, 저는 강해건에게 줄 수 있는 페로몬이 없었다. 앞으로도 페로몬만큼은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각인 상대와의 섹스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인 후 이혼한 사람들은 파트너가 없을 경우 주기적으로 만나서 몸을 섞기도 했고, 새로운 인연이 생긴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억지로 페로몬만 교환해 왔다.

하지만 그동안 강해건이 섹스도 페로몬도 없이 금단현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걱정이 단어가 되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찰나였다.

“한서림.”

힘겹게 용기를 낸 것처럼 먹먹하게 이름만 불렸을 뿐인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요동쳤다. 욱신거리고 저릿해서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1년 만에 듣는 목소리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깊게 잠겨 있어서 낯설었다.

“보고 싶었어.”

“…….”

“내가 잘못,”

“해건아.”

강해건의 말을 자르며 한서림이 말간 미소를 보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응, 나도 모르게 계속 보고 싶었나 봐.”

어색하게 내뱉는 말에 강해건의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크게 떨렸다. 더는 죄책감이나 죄의식, 사과, 용서, 그런 것들이 강해건과의 사이에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회복할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 전부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차마 강해건이 먼저 할 수 없었던 제안이 한서림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강해건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서 하늘을 보며 몇 번이나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핼쑥한 모습인데도 그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다.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한 고아한 남자가 한서림과 눈을 마주치고 근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해건입니다. 한 대표님이 만든 페로몬 향수를 좋아해요. 집에 지금까지 출시된 페로몬 향수 전부 모아놨어요. 지금은 백수가 됐지만, 서림 씨랑 평생 먹고 놀아도 남을 만큼 돈이 많아요.”

당당하게 말하는 우아한 자태와 달리 강해건의 눈빛은 필사적이었다.

“서림 씨를 속이는 일 없을 거고, 매 순간 진심으로 대할 자신 있어요.”

“…….”

“이제 한국에서 살긴 힘들겠지만 5개 국어를 할 줄 알아서 어딜 가든 서림 씨 불편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돈이 정말 많아요. 아, 이건 말했죠?”

“…….”

“그럼……, 운전도 잘하고, 성격도 엄청 다정해요. 그리고…….”

“…….”

“……뭐를 더 어필하면, 나한테 넘어올래요?”

어쩔 줄 몰라 하는 필사적인 눈빛을 통해 간절함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지금 내숭 떨어요? 어차피 서로 다 아는 처지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첫 미팅에서 들었던 무례한 발언을 다른 의미로 되돌려주며 한서림이 웃었다.

“어리고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고 돈도 많다는데 무슨 어필이 더 필요해요? 강해건 씨 놓치면 내가 손해인데.”

“내가 지금,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못 참을 것 같은데…….”

“…….”

“……사랑해, 한서림.”

진심 어린 절절한 고백에 한서림의 시야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흐려졌다. 더는 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다시금 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해건 씨가, 워낙 연기를……, 잘해야 말이죠.”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애정이 섞였다. 한 걸음 다가온 강해건이 그대로 한서림의 몸을 끌어안았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 같은 강한 포옹이었다.

강해건과 한서림은 함께였을 때 위태로웠으나, 함께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너무 오랜 길을 돌아온 후에야 깨달았다.

“잘못했어요.”

“…….”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은 강해건이 젖은 음성으로 몇 번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심해 깊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것이 먹먹했다.

“내가 정말 잘할게. 내 옆에만 있어 줘. 다시는 후회할 짓 안 할게…….”

시린 겨울이기만 했던 삭막하고 건조한 인생에 따사로운 햇살이 드리우며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봄이 찾아왔다.

서림아, 평생 아껴주고 사랑할게.

귓가에 속삭이는 담백한 고백이 다정하고 달콤했다. 충돌하고 엇갈렸던 감정의 파편들이 이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공존(共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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