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42)

만약 강 회장이 검찰에 불려 다니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촬영조차 여의치 않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계산해서 강해건은 적절한 시기에 마약, 난교 파티 동영상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의 얼굴은 전부 모자이크 처리했으면서 강 회장의 얼굴만은 분명하게 드러내서 도주로를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언제 왔어?”

“오늘 마지막 촬영이라고 해서 시작할 때부터 와 있었어. 방해될까 봐 조용히 있었지.”

“강 회장 휠체어 타고 불려 다니느라 회사 바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강해건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1년 사이에 강유건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강해건이 원했던 대로 서로에게서 졸업을 했지만, 내색하지 않을 뿐 강유건에게 가진 애틋한 우애는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끝까지 미워할 수도 없게 강유건이 현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지지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회사야 뭐 각오한 일이니까. 어차피 경영 계승하면 한 번은 문제 삼아서 갈아엎으려고 했던 일이고. 시일만 조금 앞당겨진 거지.”

강유건의 경영 마인드는 돈과 권력만 좇은 강 회장과는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떨어지는 주가를 보고 있으면 뼈아프긴 했으나, 더 탄탄하게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여겼다. 강해건은 강유건이 폭풍처럼 밀려들 파장에 대비할 수 있도록 회사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이제 정말 준비는 다 끝났네. 후회 안 하겠어?”

이중호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된 차량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강유건이 후련한 듯이 물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어. 절대 안 해. 겨우 찾은 방법인데 어떻게 후회를 하겠어.”

“…….”

한서림이 탈출을 감행하며 불을 질렀을 때야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아무리 후회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아니,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똑같은 짓을 할 것이기에 앞으로가 중요했다. 페로몬 폭주를 막기 위해 한서림이 목숨 걸고 각인을 감행한 것처럼, 강해건도 제 인생을 걸고 한서림에게 용서라도 빌 수 있는 선택을 했다. 후회로 점철된 문드러진 심장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용서를 빌 기회라도 얻고 싶었다.

한서림이 떠난 후 6개월을 후회와 자책으로 망가져 가면서도 한서림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 마음만 앞세워서 뻔뻔하게 찾아가기에는 그동안 했던 짓들이 발목을 잡았다. 더는 한서림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형. 나는 한서림을 되찾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어. 이런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해건은 발갛게 젖은 눈으로 아픈 심장을 토해냈다.

한서림이 미치게 보고 싶어도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력한 시간을 보내왔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떠나려는 이를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한서림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제가 힘든 게 나았다. 그래서 6개월을 폐인으로 살다가 겨우 용서를 빌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형은 영화 개봉하는 날 준비해준 관련 자료 뿌려. 언론사는 다 섭외해둔 거지?”

“응. 개인적으로도 준비했고 서정 이름 걸고 공식 보도 자료도 나갈 거야. 그동안 이사회도 대부분 설득해 놨으니까 크게 문제되는 건 없을 거야.”

“그 꼰대들이야 회사가 어떻게 되든 자기가 손해만 안 보면 언제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들이잖아.”

“그 꼰대 박쥐들이 이제라도 마음 돌리고 나 지지해줘서 예정보다 빨리 경영 계승하게 된 거다. 뭐 수틀리면 언제든 물어뜯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겠지만 별수 있냐.”

“……형도 너무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어느새 차 앞에 도착한 탓에 이중호는 이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며 괜히 운전석 문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강유건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먼저 타 버렸다. 운전석에 올라서도 손으로 머리를 빗다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정리할 것도 없는 깨끗한 차 안을 정리하는 둥 산만하게 굴었다.

“난 현 검사님이랑 윤 변호사님 만나기로 해서 먼저 가볼게. 그동안 형도 수고 많았어.”

강유건이 어떤 법적인 처벌을 받거나 도의적 책임을 진 것은 아니지만, 지난 1년간의 마음고생을 생각해보면 이제 더는 강유건을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강해건은 출중한 연기력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씩 웃은 뒤 차에 올랐다. 강해건을 태운 차가 멀어지다가 코너를 돌아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도 강유건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02.

강해건은 이중호와 함께 현 검사와 윤 변호사를 만나서 식사를 한 후에 아파트로 돌아왔다. 은퇴 작품인 만큼 강해건이 신경을 많이 썼던 터라, 기획 단계부터 달라붙어서 작업했기에 이중호는 근 6개월이나 강해건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형, 이제 진짜 뭐 해먹고 살려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병을 꺼내온 강해건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이중호에게 한 병을 건넸다. 소파 뒤에 있는 장식장에는 한서림의 회사인 퍼퓸SR에서 출시된 페로몬 향수가 한 종류도 빠짐없이 매장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에 새로 출시된 신향수도 추가되었다. 강해건이 한서림을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좇는 허망한 방법이었다.

“아니, 전부터 너는 내 걱정을 뭐 그렇게 성의 없고 무심하게 하냐? 연기도 잘하는 놈이 왜 이럴 때는 진심인 척도 안 하는데. 그딴 태도로 걱정할 거면 하지를 말든가.”

캡을 딴 이중호가 짜증 난다는 듯이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참 한결같은 모습을 보면서 강해건도 대각선에 있는 1인 소파에 앉아 맥주 캡을 땄다.

온 사방에 설치했던 CCTV는 그대로였다. 한서림이 가운만 입고 생활했을 때부터 작동을 멈춰 놓았다. 철저하게 관리하긴 했으나, 최악의 경우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탓이었다. 제가 한서림을 감금한 증거가 되는 건 상관없지만, 타인이 한서림의 벗은 몸을 보는 건 견딜 수 없어서였다.

“강 전무가 형 다시 회사로 들어오라고 했다며.”

“거절했어.”

“왜? 강 전무가 제시한 연봉이 좆같아? 돈 가지고 야박하게 굴 사람은 아닌데.”

“너 아니었으면 옛날 옛적에 이 바닥 떴어. 아주 지긋지긋하다.”

“그럼 진짜 뭐 해먹고 살려고. 내년에 혜윤이랑 결혼도 할 거라며.”

“걱정할 거면 연기라도 하라고 했지! 아오, 진짜…….”

금세 맥주 한 캔을 비워낸 이중호가 우악스럽게 캔을 움켜쥐며 구겼다. 한 캔 더 마시려는 것인지 냉장고로 향하면서도 질문에는 착실하게 대답했다.

“혜윤이가 자기 레스토랑 내고 싶어 해. 호텔에서 일하는 거 힘든가 보더라. 결혼하면 그거 같이하기로 했어.”

“가게 자리 봐둔 곳은 있고?”

“와. 주변에서 다들 장사는 아무나 하냐고 걱정인 척 무시하던데, 적극적으로 물어봐 준 건 네가 처음이다. 이제 좀 진정성 있어 보여. 아무튼 껍데기랑 연기력은 타고났다니까.”

연기한 건 아니었지만, 이중호가 낄낄거리면서 즐거워해서 굳이 변명하지는 않았다.

“혜윤이 올해까지만 출근하기로 했어. 이제 3개월 좀 넘게 남았으니까 아직 여유 좀 있어서 혜윤이 쉬는 날마다 같이 보러 다니려고.”

“골라.”

“뭐를?”

“혜윤이가 메인 셰프로 자기 가게 갖고 싶어 하는 거면 이탈리안 레스토랑일 거 아냐. 지금 생각에는 연남동이나 신사동이 괜찮을 것 같은데. 거기 계약이 얼마나 남았더라……. 형한테는 월세 싸게 받을게.”

“너 설마 그 건물들 얘기하는 거야?”

이중호가 경악한 표정을 했다. 몇 년이나 강해건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그가 소유한 건물들도 몇 채 알게 되었는데, 강해건은 그 건물들 중 레스토랑을 운영하기에 가장 입지적 지리 조건이 좋은 곳들만 골라서 말했다. 현재 다른 레스토랑이 운영되고 있는 자리라서 만약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이중호는 권리금부터 감당되지 않을 듯했다.

“미친놈아, 아무리 월세를 싸게 해줘도 우리 형편이 거기 들어갈 정도로 여유롭진 않거든?”

“……형은 그동안 번 돈 다 어디에 썼냐.”

“어디에 쓰긴. 착실하게 쌓아놨지. 근데 혜윤이 가게에 다 꼴아박을 수는 없잖아. 가게 자리 잡으면 3년 후에는 아기도 갖기로 했는데. 일단 나 살고 있는 빌라에서 전세로 시작할 거라 집 좁아서 애 낳으면 이사도 가야 돼. 애한테 드는 돈은 한두 푼인 줄 아냐?”

“나 같으면 그냥 강 전무랑 연봉협상을 빡세게 해서 복직하겠다.”

“야, 인마. 이 바닥은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없잖냐. 난 혜윤이한테 충실한 남편이 되고 싶다고.”

“무능한 남편이 되겠지.”

망설임 없이 받아치는 강해건의 말에 와락 인상을 구겼던 이중호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경제 형편 비슷한 아는 동생이 아니라, 몸값 어마어마한 톱스타에다가 서정 그룹의 서자라는 게 생각난 탓이었다.

“……백날 입 아프게 떠들어봤자 공기보다 돈이 더 많은 네가 소시민의 가계 구조와 미래 계획에 대해 뭘 알겠냐.”

“알아야 될 필요성도 못 느껴. 죽을 때까지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고.”

“아오, 재수 없는 놈.”

“영화 개봉한 후라 결혼식 못 갈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난 미리 축의금 했다는 것만 잊지 마.”

“퇴직금보다 많아서 잊고 싶어도 못 잊는다, 돈지랄 하는 미친놈아.”

시원스럽게 욕을 한 이중호가 맥주 캔을 내밀었다. 강해건이 팔을 뻗어 제 캔을 부딪쳐주었다.

한서림이 떠난 후 강해건은 매일 자기 전에 맥주 두세 캔을 마시는 게 버릇이 됐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탓에 술기운에라도 잠들고 싶은 것이었지만, 실상 알코올을 금세 분해시키는 극우성 형질에게는 큰 효과가 없었다.

한서림을 품에 안고 잠들고 싶었다. 한서림 없이 잠드는 게 몹시 힘겨웠다.

“형, 저거 사기야.”

강해건이 이중호를 소파에서 밀어내고 드러누우며 테이블을 턱짓했다. 한서림이 불면증에 시달릴 때 이중호의 조언을 받아 샀던 향초와 같은 향초들이 테이블 위에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왜?”

“아무리 켜놔도 잠이 안 와.”

“저게 수면제냐? 어느 정도 도움만 주는 거지, 왜 향초한테 수면제 능력까지 기대를 해.”

“한서림도 그랬을까?”

“…….”

“향초 켜주면 잘 자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한서림이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아. 말로는 잘 잤다고 하면서 다음 날 보면 눈이 항상 빨갰거든. 실핏줄이 터진 날도 있었고.”

강해건의 입에서 한서림의 이름이 나오면 이중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그리움에 젖은 목소리일 때는 더 그랬다. 이중호는 강해건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가족만큼 소중히 여기지만, 아직까지도 한서림을 감금했던 것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강해건이 시선을 돌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인 예전 게스트룸의 닫힌 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안에는 불에 탄 침대가 그대로 있었다. 한서림이 사용하던 방조차 전부 강해건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으나, 새카맣게 변한 침대만이 한서림이 만들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야, 해건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돼서 그러는데, 너 진짜 괜찮겠냐?”

“한서림만 괜찮으면 돼. 그러려고 하는 거니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뭐……. 한서림이 이제라도 날 고소하면 어쩔 수 없고. 성실히 조사받아야지.”

“네가 한 짓이 고소감이라는 건 아냐? 그리고 한 대표 성격에 고소할 거면 진작했지, 아직도 조용하겠냐? 고소를 떠나서 알려지는 순간 너 진짜 완전 매장이라고.”

“매장당해서라도 한서림한테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도망갈 생각 없어.”

“…….”

“죽을 때까지 나를 안 볼까 봐, 그게 무서운 거지…….”

어떤 감정이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흐려져야 정상이거늘, 한서림의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깊어지기만 했다.

***

「한, 좀비 같아.」

나흘 전에 출산 휴가를 내고도 집에 혼자 있는 게 심심하다며 연구실에 놀러온 에드워드가 턱을 괴고 말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제조실 안에서 한서림이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몰두하고 있었다.

「거의 2주째 저러는 거 같은데? 어제도 밤새웠을걸?」

「어. 나 혼자 집에 갔어.」

제이든의 추측에 니콜라스가 긍정했다.

금방 완성할 것 같았던 한서림의 신향수는 2주나 더 난항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떤 향을 만들려고 저렇게 무리하는 것인지, 한서림은 동료들의 도움조차 마다하며 혼자 제조실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내가 한이었다면 코가 마비됐을 거야. 이미 후각을 잃었을 거라고.」

턱에 괴고 있던 손을 떼어낸 후 팔을 교차해서 자기 몸을 감싸 안은 에드워드가 몸서리쳤다.

「한이 2주 동안 쓴 소취제만 일곱 병이다.」

평소에는 보통 소취제를 일주일에 반 병, 신향수 개발 시기에는 일주일에 두 병 정도 사용하는데, 한서림과 니콜라스, 에드워드, 제이든, 네 명이 함께 사용하는 양이었다. 그러니 한서림 혼자 2주 동안 일곱 병을 썼다는 건 대단한 양이긴 했다. 그만큼 한서림은 아주 미묘하게 다른 향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소취제로 제거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서운 집념이었다.

「안 되겠어. 오늘은 점심시간에 한 데리고 나가서 제대로 된 걸 먹여야겠어. 저러다가 내 보스가 정말로 좀비가 될지도 몰…….」

「됐어! 성공했어!」

에드워드가 굳은 다짐을 다 뱉어내기도 전에 제조실 문이 벌컥 열리며 수척해진 한서림이 달려 나왔다. 연구실 안에 있던 동료들의 시선이 전부 한서림에게로 몰렸다. 좀비를 방불케 하는 몰골과 다르게 붉게 충혈된 한서림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완성한 거야?」

「어! 시향해 봐. 어때?」

얼마나 기쁜지 한서림은 시향지에 뿌려야 한다는 기본적인 절차도 잊고 샘플 향수를 공중으로 분사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향이 번졌다.

「한, 이거…….」

니콜라스는 향을 맡는 순간 단박에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에 말끝을 흐렸다.

103.

어떻게 사람의 진짜 페로몬 향을 향수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대단하다 싶어서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동시에 소유욕을 드러내며 경계했던 고아하고 압도적인 향이 떠오르자 괜히 오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반려 오메가가 임신해서 곁에 있어 주기 위해 먼저 퇴근했던 제이든만 처음 맡는 향이었다.

「드디어 성공했네. 축하해, 한.」

먼저 정신을 차린 니콜라스가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에드워드가 할 말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니콜라스는 무언의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막았다.

「축하해. 오늘은 한도 퇴근하고 집에 가서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잘 수 있겠다. 1년 내내 매달리더니 결국 해냈네. 며칠 푹 쉬어, 한. 이제 좀비는 그만 보고 싶어.」

결국 에드워드 역시 너스레를 떨며 축하인사를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니콜라스와 에드워드가 아는 척한다고 해도 한서림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없었다.

「어때? 향 되게 좋지? 다음 신향수 출시 때는 이게 무조건 메인이야. 이름은 뭐로 하지? 이건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름에도 공들이고 싶은데.」

향수 샘플을 손에 꼭 쥐고 기뻐하는 한서림의 눈에는 에드워드와 니콜라스의 안타까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1년간 노력의 결실이 손안에 있었다. 한서림은 페로몬 향수 사업을 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뿌듯하고 감격스럽고 만족스러웠다.

***

퇴근을 두 시간 정도 앞두고 연구실 밖으로 나온 한서림은 멍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1년을 매달려 기어코 완성시킨 페로몬 향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공허했다.

‘「향이 엄청 야성적인데 매력적이고 사람 홀리는 향이야. 되게 좋다. 근데 한, 이거 너무 노골적으로 알파 향이지 않아? 뭐, 알파 향, 오메가 향,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건 어떻게 해도 ‘나 알파야!’라고 록펠러 센터 꼭대기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같잖아.」’

출근한 제이든의 말을 들었을 때야 한서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눈빛이 탁하게 흐려졌다. 전혀 예상도 못 했다는 것처럼 한서림이 몹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정말로 몰랐다. 어제는 완성의 기쁨에 취해서 집에 가자마자 곯아떨어졌고, 오늘 눈을 뜬 순간부터는 향수 이름을 생각하며 즐거움을 만끽했으니까.

표정이 무너진 한서림을 보며 니콜라스는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고, 에드워드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렸으며, 이 향을 처음 맡아본 제이든만이 진지하게 샘플 향수를 시향하며 의견을 냈다.

“……미친 건가.”

어쩌자고 이걸 만들었을까.

1년 내내 매달렸던 일의 실체를 깨닫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그러니 다 괜찮다고 여겼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자리로 돌아온 건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한서림의 일상은 뉴욕을 떠나기 전과 다름없는데, 소중한 무언가를 송두리째 도려낸 것처럼 허한 먹먹함이 시시때때로 찾아왔었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건 아닐까, 억지로 누르며 참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한서림은 제 마음에서 외치는 솔직한 진심을 더는 외면할 수가 없음을 인지했다.

“와, 여기 찾기 엄청 힘드네요.”

불현듯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멍하니 샘플 향수를 바라보고 있던 한서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보다 당황스러운 반가움이 앞섰다. 한국에 있는 줄 알았던 사람과 어떻게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실장님?”

“택시를 탈 걸,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해서 왔다가 엄청 헤맸어요.”

한서림의 앞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가 사람 좋게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떨떨했다.

“잘 지내셨어요, 한 대표님? 1년 만인가? 넘었나? 아무튼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근데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이거야 원,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이시잖아요. 맘 아프게.”

“아, 요즘 계속 야근을 해서요.”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이중호가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를 리드해서 한서림도 얼떨결에 휘말려 버렸다. 한서림은 얼른 샘플 향수를 재킷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서 뒤늦게 이중호를 맞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여행 오셨어요?”

“한 대표님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평일이니까 연구실에 계실까 싶어서요. 제가 또 행동력이 기가 막히거든요.”

“네? 그게 무슨……. 아니, 연구실 위치는 어떻게 아셨어요?”

“아유, 다 아는 방법이 있죠. 그런 거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에요. 식사는 하셨어요?”

“……진짜 저 보러 오신 거예요?”

“그렇다니까요. 아니면 제가 이런 현지인들만 다닐 것 같은 골목까지 뭐하러 들어와서 기웃거리고 있었겠어요. 간판도 없어서 한 대표님이 나와 계시지 않았으면 이 근처만 뱅글뱅글 돌다가 허탕 칠 뻔했다니까요.”

오랜만에 만나도 이중호의 넉살은 여전했다.

“한 대표님. 일단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세요. 대표님한테 꼭 보여드려야 하는 게 있거든요.”

“네? 어딜…….”

한서림은 질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힘에 이끌려 걸음을 옮겨야 했다. 힘의 차이가 월등해서 흡사 납치를 당하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도 어쩐지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뿐, 가지 않겠다고 버틸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이중호가 나쁜 의도를 가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근처에 강해건도 있지 않을까 해서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강해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어둔 샘플 향수와 비슷한 향기조차 주변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실망감이 번졌다.

무의식중에도 그를 찾을 만큼, 어쩌면 강해건이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중호가 데려간 곳은 미국의 전형적인 가정집이었다. 사방의 창문을 암막 커튼으로 막아둔 게 조금 으스스하고 기괴해 보였다.

“여긴 누구 집이에요? 이렇게 막 들어와도 돼요?”

한서림을 데리고 들어간 이중호는 의아해하며 묻는 한서림의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고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우선 여기 앉아 보세요.”

한서림은 당황해하면서도 이중호가 시키는 대로 일단 거실 소파에 앉자, 이중호는 리모컨처럼 생긴 걸 들고 이것저것 누르고 있었다.

“겉모습이 어른이라고 해서 다 어른은 아니더라고요. 어른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나 워낙 집안이 조용한 탓에 한서림의 귀에는 정확히 박혀 들었다.

“내가 가진 상식과 다르게 행동해도, 남들이 다 욕하고 돌 던져도, 저는 못 그러겠더라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냥……, 제3자가 보기에는 많이 안타까웠다고요. 무조건 울고 떼쓰면 다 되는 어린아이들처럼, 방법을 몰라서 막무가내로 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껍데기가 훌륭하다고 해서 알맹이까지 훌륭한 건 아니니까요.”

“…….”

이제야 이중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껍데기는 훌륭하지만 알맹이는 미성숙하고 서투르던 한 사람이 그려졌다.

“그런데요, 대표님. 저는 성장할 수 있다면 그거로도 괜찮은 것 같아요.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들 결함 하나씩은 갖고 살면서 채워가는 거지.”

“…….”

“이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지랖에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네요. 사실 고의지만요.”

사람 좋게 씩 웃은 이중호가 이것저것 누르는 척하던 손길을 멈추고 리모컨 버튼 하나를 제대로 눌렀다. 곧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에 빛이 번지며 동영상 플레이어가 떴다. 이중호는 일시 정지를 시킨 후, 가방에서 서류로 보이는 종이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뒤집어 올려놓았다. 무슨 서류인지 궁금했지만 뒤집어놓은 탓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종이만 보였다.

“이거 켜드리고 저는 나가 있을 거니까, 다 보시고 나면 읽어보세요.”

“네? 이게 뭔데요? 갑자기 무슨…….”

“대표님께 꼭 보여드려야 하는 게 있다고 했잖아요. 힘드시더라도 꼭 끝까지 다 보시고 이것도 읽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이중호는 머리까지 숙이며 부탁하고는 영상을 플레이시키고 불을 끈 후, 잡을 새도 없이 나가버렸다. 캄캄한 집 안에 빛이라고는 벽에 반사되는 영상이 전부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던 한서림은 이내 스크린 벽에 7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등장하자 시선을 고정했다. 영화 인트로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은 아빠인 걸로 추정되는 어른 남자가 주는 약을 의심 없이 무구하고 해맑은 얼굴로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아빠는 아들에게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웃고 있는 아빠의 얼굴이 어쩐지 소름 끼친다고 생각되는 순간, 장면이 전환되었다.

10세, 11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으리으리한 저택 거실 바닥에 엎드려 웅크리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어른 남자는 표독한 얼굴로 아이를 다그쳤다. 오메가를 괄시하고 폄하하는 발언들이 남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곧 어른 남자의 주변으로 검붉은 빛의 연기가 피어나는 CG효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검붉은 빛은 공격적으로 삽시에 아이를 덮쳤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엉엉 울면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

한서림의 심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낯설지 않은 내용이었다. 떠올리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파 팔걸이를 꽉 쥔 채 버티려고 애썼다. 이제는 어린 시절 학대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중호가 머리까지 숙이며 끝까지 다 봐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거부감과 불쾌감을 이기지 못한 탓에 소파 팔걸이를 쥐고 있는 한서림의 손이 뼈마디가 튀어나올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호흡이 불안정하게 변했다. 숨을 쉬는 게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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