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2)

“이혼서류 준비해줘요.”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이혼하고 싶어서요.”

한서림의 단호한 말에 강해건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 회장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늘 까만색 렌즈를 착용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회색 눈동자를 그대로 드러내고 다녔다. 색소가 옅은 탓에 신비로워 보였으나, 그만큼 감정이 더 잘 읽혔다. 지금도 순식간에 탁하게 변하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계약서가 폼으로 있는 건 아닌데.”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는데, 바로 잡아 보겠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추 하나를 잡아 뜯고 다음 단추를 끼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얄팍한 수로는 망가진 관계를 끝끝내 회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계약서 조항을 무시하고 각인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

“각인했으니까 이제 나 필요 없잖아요. 이혼해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뇨.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어차피 강해건 씨 페로몬 폭주 원인이 나였던 것도 아닌데, 각인해서 안정됐으면 결혼 생활을 더 유지할 필요가 없죠.”

“……역시 다 들었네요. 이럴까 봐 숨기려고 했던 건데.”

강해건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미안함보다 앞선 곤란한 표정을 보자, 꾹꾹 눌러왔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럴수록 나한테는 더 얘기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미안해요. 서림 씨를 잃을까 봐 겁먹어서 그랬던 거예요. 나 때문에 페로몬 샘도 잃었는데, 진실을 알게 되면 더는 내 곁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나를 떠난다고 할까 봐…….”

“이혼은 강해건 씨가 먼저 계약서에 넣은 조항입니다. 어차피 헤어질 거였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한서림은 일부러 더 차갑고 딱딱하게 말했다. 여전히 강해건을 사랑하는데, 그런 그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페로몬 샘을 잃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내 선택이었고, 나는 강해건 씨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다쳐도 각인하고 싶었던 거니까.”

“…….”

“다 끝났으니 이혼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아직도 서림 씨를 사랑,”

“비겁한 새끼.”

잘생긴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어이가 없어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분노로 점철된 심장이 터질 것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사랑의 깊이와 배신감의 깊이가 비례했다.

“사랑? 아무것도 모른 채 죄책감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나는.”

“…….”

“내가 네 옆에서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사랑이라고? 지금 그걸 사랑이라고 한 거야? 아니, 막말로 네가 언제 나를 사랑했는데.”

알고 있다. 강해건 역시 진실을 몰랐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한서림에게 숨기려 했던 건 다른 문제였다. 사랑하고 믿었기에 배신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기만당하게 되면 목숨을 걸고 각인을 시도했던 저는 뭐가 되느냐는 말이다.

“……내가 연기를 잘하긴 하나 봐요. 모를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진짜 모를 줄은 몰랐는데…….”

허탈한 말과 함께 강해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음을 부정당한 눈동자가 어지러이 방황했다. 우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꾹 눌러내며 참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정말로 서림 씨를 증오하고 원망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사랑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젖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호소했다. 강해건과 함께했던 좋았던 날들과 아팠던 날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하지만 선명하게 잡히는 감정은 없었다. 강해건에게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랑이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 하는 연기인 걸 알면서도, 결혼 전에 했던 데이트나 신혼여행을 갔던 뉴욕에서 더 애정을 느끼며 착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강해건은 제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내가 잘못했어요. 숨기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어서…….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말아요.”

거짓말처럼 강해건이 무릎을 꿇었다. 간절한 눈동자가 호소력 있게 다가와서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그러나 강해건은 워낙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한서림이 몇 번이나 마음을 착각할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고, 지금 들은 말만으로도 강해건이 한서림의 앞에서 늘 연기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본 강해건의 모습 중 과연 몇 퍼센트나 진짜 강해건이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얼마나 더 속아야 하는 것일까.

‘저기요, 한 대표님. 듣기 싫으니까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요. 그쪽 무릎은 그렇게 싸구려인가? 왜 아무 데서나 무릎을 꿇어, 꼴사납게.’

불현듯 제가 했던 사과에 강해건이 보였던 반응이 떠올랐다. 그건 연기였을까 진심이었을까.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지만, 치밀어 오른 배신감은 한서림의 입에 칼을 물게 했다. 그간 시달렸던 마음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기요, 강해건 씨. 듣기 싫으니까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요. 그쪽 무릎은 그렇게 싸구려인가? 왜 아무 데서나 무릎을 꿇어, 꼴사납게.”

진정 어린 사과에 돌아왔던 말을 한서림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뱉어냈다.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속이 후련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심장이 욱신거렸다. 누군가 쥐어 짜내는 것처럼 호흡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졌다. 강해건도 그랬을까. 연기였는지 진심이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당시의 강해건의 심경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지금 나 개새끼 만들고 싶어서 시위하는 거예요?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네.’

한서림을 일어서게 만들었던 말이었다. 한서림 역시 강해건이 무너져서 무릎 꿇은 모습을 보고 있는 게 힘겨웠다. 고통스럽게 발악하는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짝사랑을 하면서 아무리 강해건에게 외면받아도 이토록 심장이 난자하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무너진 강해건의 모습이 한서림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지금 나 개새끼 만들고 싶어서 시위하는 거예요?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네.”

다시 한번 강해건이 뱉었던 말을 똑같이 하면서 일어나라는 듯이 턱짓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던 한서림과 다르게 강해건은 꿇은 무릎을 펴지 않았다. 굳은 듯이 꿇어있는 강건한 남자의 어깨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말에 상처 안 받아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모진 말을 했는지 이제는 서림 씨도 아니까……. 지금 말하면서 나보다 서림 씨가 더 아프잖아요.”

강해건의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눈물을 볼 수가 없어서 한서림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배신감만 남아있었더라면 마음이 더 편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강해건의 입장을 배려할 필요도, 마음이 복잡하게 얽힐 필요도 없이 온갖 성질을 부려대며 강해건을 증오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강해건은 기어코 한서림이 마음껏 미워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92.

“착각하지 말아요. 난 강해건 씨랑 달라서 지금 진심으로 짜증 나니까. 진심으로 화내고 있는 겁니다. 각인 금지 조항을 어긴 것도, 유산한 것도, 이혼을 앞당기는 것도……. 전부 내가 원해서 파기하는 거니까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위약금 물고 손해배상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혼해요.”

싸늘하게 뱉어낸 한서림은 할 말을 끝냈다는 듯이 몸을 뉘였다. 약기운이 돌아서 다행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은 한서림의 사소한 바람을 무시하며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협의이혼은 인터넷으로도 서류를 구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것부터 진행했으면 합니다. 내 짐은 가져가고 싶지 않으니 전부 처분해줘요. 이혼절차가 끝날 때까지는 호텔에서 지낼게요.”

“…….”

퇴원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한서림은 준비한 말을 여상하게 뱉어냈다. 퇴원 수속을 밟고 와서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강해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멈칫한 손길만 봐도 제 얘기를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휴대폰은요?”

“일단 나가요. 나가서 줄게요.”

한서림이 병원에 실려 올 때는 나체였지만, 자택 감금이 풀린 강해건이 병원에 올 때 휴대폰을 챙겨다 주었다. 이중호에게 전달받으면서 들은 얘기였다. 오늘 퇴원한다는 소식에 어제 강해건이 나가서 옷도 직접 사 왔다. 편한 티셔츠와 면바지는 정확히 한서림의 사이즈였다.

병실을 나서는 한서림의 표정은 담담했다. 2주 넘게 머물렀던 곳인데도 아쉬움은 고사하고 드디어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후련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사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강해건의 지나친 다정함과 보살핌이 못마땅했었다. 진실을 숨기려 했던 잘못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강 회장의 귀에도 유산 소식이 들어갔다. 일주일 전에 한 회장이 병원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려서 알게 된 거였다. 한 회장은 자식이 페로몬 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도 걱정의 말 한마디 없이 오메가 주제에 역할도 제대로 못 한다고 역정을 냈다. 강 회장이 얼마나 진노했는지 아느냐며 손을 올리는 걸, 주치의를 만나고 온 강해건이 막았다.

하물며 짐승도 제 새끼는 보호하는데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한서림은 강해건이 경호원들에게 한 회장을 끌어내게 한 후에야 파도처럼 휩쓸려오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 갑작스럽게 터진 울음이었다. 저런 인간도 아버지라고 학대당하고 이용당한 저 스스로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저 역시 세상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떠난 아기를 수단으로 삼아 똑같은 짓을 할 뻔했다는 죄책감이 환멸스러웠다. 복합적인 감정에 허우적대며 얼마나 오래도록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한 회장을 끌어내도록 지시했던 강해건이 경호원들과 함께 병실을 비웠었고, 이후에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한서림은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혼을 한 후에는 한 회장과도 인연을 끊을 작정이었다. 애초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병실로 돌아온 강해건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오열하는 한서림의 곁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켜주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만큼은 강해건의 존재가 든든해서 안심된 탓에 더 오래 울었던 것 같다.

퇴원 소식을 듣고 강유건이 오겠다는 걸 한서림이 거절했다. 강유건은 한서림에게 말해야 한다고 했으나, 애초에 숨겨서 일을 크게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강유건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병원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 최 팀장과 경호원들도 줄지어 서 있었다. 한서림은 직접 뒷좌석의 문을 열어준 강해건의 호의를 무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호텔에서 지낼게요. 택시타고 갈 거고. 내 휴대폰 줘요.”

“호텔까지는 무슨 돈으로 가려고요. 지갑도 없잖아요.”

“아…….”

지갑을 챙기려면 강해건의 아파트에 들러야 했다. 한서림은 하는 수 없이 강해건이 문을 열어놓은 뒷좌석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돈을 빌릴까 잠깐 고민했으나, 어차피 지갑 안에 신분증과 카드가 전부 있기 때문에 한 번은 가지러 가야 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강해건이 옆자리에 앉고, 최 팀장이 조수석에 오르자 차가 매끄럽게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한서림은 무의미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유리창에 강해건의 얼굴이 비쳤다. 정말 많이 좋아했는데, 안녕을 고해야 할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문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온 후, 강해건이 지문을 인식해서 전용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내내 병원에 있었기에 강해건이 외출한 후 이용 흔적이 없는 것처럼 바로 문이 열렸다. 어차피 사용하는 사람은 강해건과 한서림뿐이었기에 등록된 지문은 두 사람의 것밖에 없었다. 아주 가끔 이중호와 최 팀장이 사용하긴 했으나 그들은 카드를 이용했다.

2주, 정확히는 17일 만이었다. 강해건이 말없이 프랑스로 떠났을 때도, 두바이에서 숨어 있을 때도, 한서림은 이 집에서 지냈다. 그만큼 익숙했고 정이 많이 들었다. 강해건과 함께 했던 집을 떠난다는 건 조금 아쉽고 쓸쓸했다. 그 언젠가 강해건을 이 큰 집에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게 안쓰럽고 애달픈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강해건을 혼자 남겨두고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서림은 방으로 들어가서 지갑을 챙겼다. 온 김에 노트북도 챙겨가는 게 나을 듯했다. 이혼이 완료될 때까지 호텔에 있으면서 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침대 옆 협탁에 지갑은 있는데, 올려두었던 노트북이 보이지 않았다. 찾으려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백업을 일상화하는 덕분에 굳이 그 기계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호텔로 가는 길에 새 노트북을 사면 될 듯했다.

“휴대폰이요.”

거실로 나와 벽에 등을 기댄 채 저를 지켜보고 있던 강해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 강해건은 답답하다는 듯이 애원했다.

“……가지 말아요.”

“그래요. 주기 싫으면 가져요. 휴대폰이야 새로 사면 그만이니까.”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작성해서 보낼게요.”

건조한 용건만 뱉어내고 그 흔한 인사 한마디 없이 돌아섰다.

“진짜 꼭, 이래야겠어요? 그렇게 나랑 이혼하고 싶어요?”

간절하게 붙잡는 음성에 걸음이 멈췄다.

“지금은 이혼하는 방법 말고는 모르겠어서요. 결혼 계약서가 문제된다면, 전에 말했듯이 명시되어 있는 대로 내가 손해 배상하겠습니다. 위약금은 고 변호사님과 정리할게요.”

눈이 마주치면 흔들릴 것 같아서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뱉어냈다. 윤성아가 아꼈다던 그림들이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 현관을 나설 때까지, 한서림은 단 한 번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야 이제 정말 끝났다는 생각에 큰 숨을 뱉어낼 수 있었다.

“…….”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최 팀장과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최 팀장뿐만 아니라 늘 동행하던 경호원들도 각자의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경호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들이 대체 언제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아, 최 팀장의 경호팀은 강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들이니 호텔까지 경호하려는 모양이었다. 한서림은 혼자 납득하고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기 위해 지문을 인식했다.

“음?”

하지만 지문이 인식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손가락을 대봐도 엘리베이터에 문이 열리지도, 불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 번 지문을 등록해두면 따로 삭제하기 전까지는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왜 인식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계 자체가 고장 난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최 팀장님, 엘리베이터 카드 가지고 있죠? 내 지문이 삭제된 것 같은데 카드 좀 찍어줘요.”

“죄송합니다. 협조해드릴 수 없습니다.”

호텔까지 경호해야 할 최 팀장이 왜 거절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만약 최 팀장의 경호팀이 강유건이 아닌 강해건이 붙여놓은 사람들이라면…….

최 팀장의 경호팀과 출퇴근까지 함께 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강유건보다는 강해건의 사람들이라는 가설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그럼 처음에는 왜 서정 그룹에서 나왔다고 한 건지 잠깐 의문이 들었으나, 강해건 역시 서정 그룹의 사람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파악된 정보에 헛웃음이 흘렀다.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이렇게나 둔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강해건이 나 여기서 내보내지 말라고 했습니까.”

“…….”

최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림은 대답하지 않은 게 최 팀장이 하는 긍정의 대답이라고 여겼다. 그 말은, 등록되어 있던 제 지문도 강해건이 일부러 삭제했다는 뜻이 된다.

“여기가 몇 층이더라…….”

최상층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전용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뿐이었다. 한서림은 몇 층이든 상관없이 계단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비상구도 잠겨 있었다. 비상계단을 이용한 적이 없는 탓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지 새로 설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상구의 문에 도어 록이 달려 있었다. 당연히 비밀번호는 알 수 없었다.

93.

한서림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득 복도에 CCTV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강해건이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팔짱을 낀 채 눈 감고 있었다. 그제야 집안에도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게 보였다. 기가 막혔다.

이건 마치…….

“뭐 하자는 겁니까.”

“이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하겠어요.”

지금 고작 이혼하지 않으려고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실소가 비집어 나왔다. 이건 한서림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집 밖으로 나갈 수는 있지만 건물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최상층에 갇힌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를 여기에 가둬놓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상황 파악이 빠르네요.”

“미쳤어요?”

“이혼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나요?”

“…….”

“나는 이거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어서.”

저에게 진실을 숨기려 했던 강해건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꼈다면, 지금 강해건이 보이는 비인간적인 행동에는 실망감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강해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협의이혼은 물 건너간 것 같으니 변호사를 알아봐야 할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서 빠져나갔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그제야 한서림은 왜 강해건이 끝까지 제 휴대폰을 돌려주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노트북이 왜 사라졌는지도.

한서림은 연락수단을 전부 빼앗긴 채 감금당할 위기에 놓였다.

“나를 가둬서 강해건 씨가 얻는 게 뭔데요. 그때처럼 임신할 때까지 또 섹스만 하려고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허망하게 뱉어낸 말에는 일종의 체념이 섞여 있었다.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상처를 품고 아프게 다가왔다.

지금 저런 눈빛을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한서림은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것처럼 처참한 기분이었다. 정작 가둬두려는 결심을 실행에 옮겼으면서도 어째서 강해건이 더 괴로워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해주고 싶지 않았다.

“강해건 씨.”

“…….”

“정말 나를 사랑해요?”

사랑한다면 이렇게 가둬서는 안 된다.

“사랑해요.”

머뭇거림 없는 대답이 올곧았다. 젖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강해건이 소파 아래로 내려가 한서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 수 있겠어. 서림 씨가 페로몬 폭주로 다칠까 봐 각인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 정말 모르겠어요?”

이제는 안다. 믿기 싫어도 모든 정황이 강해건의 진심을 증명하고 있었다. 못되게 굴었던 게 진심이 아니라 저를 지키기 위한 연기라는 것도 믿을 수 있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갇힌 채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강해건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믿지만, 이런 방식으로 함께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래요. 강해건 씨가 나 사랑한다는 거 알겠으니까,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내보내 줘요.”

“서림아…….”

“강해건. 이거 범죄야. 너 지금 나 감금한 거라고. 네 마음 다 알았으니까, 나랑 같은 마음이라서 그랬다는 거 이해하니까, 그러니까 제발 내보내 달라고.”

“그럼……, 헤어지는 거잖아. 제발 부탁이야. 내 옆에 있어. 내가 다 잘못했어. 나는 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울먹임 속에서 전해져 오는 진심이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한서림은 이곳에 감금당할 생각이 없었다. 사랑을 하더라도 올바르게 하고 싶었다.

“사랑해……. 사랑해, 한서림.”

한서림의 다리를 끌어안은 남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차라리 못되게 굴고 상처를 주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무너져서 매달리는 모습은 보고 있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보내줘요.”

“그건……, 안 돼.”

강해건의 눈빛이 단호했다.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되는데! 강해건. 내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네 곁에 있었는지 알아?”

억울함이 차올랐다. 상대가 알아줄 의무는 없는데, 알아주길 바라면서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간의 죄책감과 죄의식이 못내 서럽기까지 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사랑해서든 뭐든 이유를 막론하고, 정말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 이제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됐는데…….”

마음이 흔들리다가도 치솟아 오르는 억울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됐다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럼 그동안 내가 감내해야 했던 상처는. 그건 묻어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너 소시오패스야? 공감 능력 없어?”

“미안해요. 미안해, 진심으로……. 내가 평생 사죄할게. 그러니까 서림아, 제발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

엄연히 따지고 보면 강해건도 피해자였다. 이렇게 무릎 꿇고 울며불며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전부 깔끔하게 끝내고, 시간을 둬서 지친 마음과 정신을 회복시킨 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나을 것이다.

그러나 강해건이 아예 잘못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건 억지로라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연락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빼앗고 집에 가두려는 비인간적인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한서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강해건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이 집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일까.

머릿속에서 가능성이 떠오르자 지체 없이 행동으로 이어졌다. 말이 안 통하니 행동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한서림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냈다. 당황한 강해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개의치 않고 바지도 벗었다. 바닥에서 꿇고 있던 강해건의 눈가에 물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섹스해. 그러려고 가둔 거잖아.”

“…….”

“하다 하다 질리면 버리겠지. 부탁인데 최대한 빨리 질려줬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강해건에게 상처 주는 방법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서림의 평소 성격과 다르게 태세전환이 몹시 빨랐다. 상처 내고 할퀴고 찢다 보면 강해건도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저를 놓게 되겠지. 아무리 강해건을 사랑해도 이런 방식을 따라줄 수는 없었다. 이미 엉망으로 일그러진 관계인데 아무렴 어떤가. 체념은 빨랐다.

집에 들어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한서림은 그저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저의 자유의지로 머무는 게 아니라 강제로 감금당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반발심이 치솟고 안락했던 집이 순식간에 감옥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탈출하려면, 강해건이 저를 놓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흐, 으응……!”

다시 한번 성기가 강하게 흡착되었다. 피할 수 없는 등골이 저릿한 쾌감에 한서림이 허리를 뒤틀었다. 온몸을 녹일 것처럼 혀와 입술, 손으로 애무하는 걸로도 모자라, 강해건은 한서림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흥분이 고여 있는 단단한 성기가 축축하고 부드러운 입안에 갇혔다 빠져나오는 것에 맞춰서 강해건의 손가락이 구멍 안을 오가고 있었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들이치는 환락에 한서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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