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강해건을 달래고 전화를 끊은 건,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정혼하고 싶지 않았어. 아무리 내가 강해건 씨 팬이었다고 해도 인생을 걸 수는 없잖아. 그런데 만나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새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더라. 그날 정말 많이 놀라고 무섭고 충격받았는데도, 도망치는 것보다는 옆에 있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옆에 있으려고. 옆에 있고 싶어.’
‘나 강해건 씨 진심으로 좋아해.’
단호하면서도 고결했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한서림 역시 강해건을 사랑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서림과 강해건, 두 남자 중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 두 사람은 전부 피해자였다.
영양제라고 속아서 강제로 약을 먹어야 했고, 부작용으로 페로몬 폭주를 얻어 고통받아온 강해건이 이제야 겨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이 강해건을 발현시켜주고 페로몬 폭주도 멈추게 해준 구원자인데, 오해 때문에 그 관계가 무너지는 건 볼 수가 없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왜 파국을 맞아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전용기 띄워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으니까.”
비서에게 연락하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 더는 강 회장의 악행을 눈감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제가 진실을 숨긴 공범자가 되었다고 해도 더 이상의 죄를 지을 수는 없었다. 강 회장을 막기 위해서는 강유건이 한국으로 가서 강해건에게 힘을 보태야 했다.
처음부터 숨겼던 제 잘못이니 마무리도 제가 하는 게 맞았다. 강해건에게 미움받고 멸시받더라도, 어쩌면 형의 자리를 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
마취에서 풀리고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보인 얼굴은 이중호였다. 생각보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배가 나왔던 것도 아니라서 임신했다는 실감을 못 했기 때문인지 수술한 게 맞나 싶게 평소와 다름없었다. 한서림이 원래 둔했기 때문에 잘 못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다만, 페로몬을 조절하는 느낌이 사라졌다. 페로몬을 풀고 거둬들이는 것은 호흡하는 일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행하던 일이었는데, 아무리 시도해도 그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수술하시는 동안 해건이가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한서림이 유산에 대해 알린 이후, 강해건은 병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아무리 페로몬 폭주를 막기 위해서였다지만 멋대로 각인한 것에도 화가 났을 테고, 유산까지 했으니 꼴도 보기 싫을 거였다. 몇 개월만 지나면 강해건이 원하는 대로 이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가 날아갔으니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강해건이 걱정했다는 말은 잘 와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걱정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실소가 비집어 나오려고 했다.
89.
“강해ㄱ……,”
목이 탁하게 갈라져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서림의 마른기침에 이중호가 얼른 물을 건네주었다. 가뭄이 든 땅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물을 마시고서야 얼마나 갈증이 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해건이는 조금 전까지 대표님 간호하다가 나갔어요. 한 대표님이 해건이 자식 좀 설득해보세요. 애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이러다가 그 녀석까지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예요.”
“강해건 씨가 왜…….”
“서림아.”
하지만 한서림은 갑자기 들이닥친 강유건으로 인해 이중호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중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강유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실장님, 오랜만이네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서림이랑 얘기 좀 할게요.”
“네. 나가 있겠습니다.”
이중호가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 응접실로 나갔다. 강해건이 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는지는 나중에 들어야 할 듯했다.
“어떻게 온 거야? 너 런던에 있는 거 아니었어?”
“방금 도착해서 바로 온 거야.”
그제야 강유건이 왜 지금 한국에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병원으로 찾아온 것인지 예상되었다. 자각이 없을 뿐, 한서림은 강해건과 각인 중에 일어난 페로몬 폭격으로 유산하고 다쳐서 입원한 상태였다.
“얘기 들었구나.”
“어. 해건이한테 다 들었다. 너도 해건이도 이게 무슨 고생이냐. 몸은 어때, 좀 괜찮아?”
“둔해서 그런지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그나저나 강 회장님 상심이 크실 텐데, 그게 걱정이다. 손주를 그렇게 기대하셨는데…….”
그저 예의상의 말을 했을 뿐인데 불편한 오한이 들었다. 초음파 사진을 가져갔을 때, 야욕과 오만으로 번들거리는 강 회장의 얼굴이 환하게 풀어져 기괴해 보이는 모습으로 웃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강 회장 역시 제 아버지처럼 오메가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한 모습에 소름 끼치는 혐오와 거북함을 느꼈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우리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 일단 아버지 귀에 안 들어가게 막아놓기는 했어. 네가 이만하길 다행이지. 당사자가 제일 중요해. 너랑 해건이만 괜찮으면 돼.”
“나는 괜찮은데 강해건 씨는 괜찮을 수가 없겠지. 내 멋대로 굴다가 다치고 유산까지 했으니 내가 강해건 씨여도 환멸 날 거야.”
제 욕심 때문에 불쌍한 아기가 희생되었다. 각오하고 저지른 일인데도, 세상 빛조차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된 아기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해건이가 네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누워있는 상태로 올려다봐서 그런지, 강유건의 얼굴에 그늘이 많이 드리워 보였다. 목덜미에 새겨진 각인의 흔적을 발견한 후에 이제 다 끝났다고 안심하며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오래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아팠다.
“나 침대 좀 올려주라.”
천천히 침대의 상판이 움직이며 강유건과 마주 볼 수 있는 눈높이가 되었다.
“강해건 씨는 만났어?”
“이제 만나야지. 병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주치의 만나러 갔나 봐. 수술은 잘 됐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상태부터 봐야 할 것 같아서 들어온 거야.”
“고맙다. 그……, 유건아. 강해건 씨한테 전부 들은 거야?”
“……어. 해건이가 찾던 오메가가 너라는 것부터 결혼 계약서, 그간 있었던 일들이랑 각인하다가 다친 것까지 전부. 해건이가 그렇게 우는 거 처음 봐서 당황스럽더라.”
강유건과 강해건은 워낙 애틋한 우애를 가진 형제였다. 남들이 보면 강해건이 서자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그런데 강해건은 왜 울었을까.
페로몬이 안정되었다고 감격에 젖어서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산되었기 때문에 억울해서 울었다는 것도 강해건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각인에 성공하고 후련해진 한서림과 다르게 강해건은 심경이 매우 복잡할 것이다. 그러니 제가 유추할 수 없는 이유로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가 강해건 씨 마음 추스르게 옆에서 잘 도와줘.”
“네 반려 알파를 왜 나한테 도와주래.”
“나는 아무래도 이혼……, 해야 할 것 같아서. 유산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다시 임신할 때까지 같이 살 수는 없잖아. 내가 강해건 씨라도 나랑 같이 살고 다시 또 애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하겠다. 각인해서 괜찮아지긴 했어도 내가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나 보는 거 싫을 거야. 그동안 말 못 해서 미안하다.”
강유건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서림을 응시했다. 무어라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는데 정작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한서림은 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소중한 동생인데, 강유건 역시 제가 원망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이렇게 걱정해주며 한국으로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 서림아.”
“네가 왜. 나 보는 거 불편하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돼. 나 그런 거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양심 없는 놈 아냐.”
“…….”
“유건아, 미안한데 나 좀 자야 할 것 같다. 마취에서 깬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힘드네.”
몸이 축축 늘어지는 만큼 정신도 고됐다. 각인에 성공하고 드디어 조금이나마 속죄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확 풀린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쳤다.
강유건이 다시 침대 상판을 내려주었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래. 푹 자. 자고 일어나서……, 몸이 회복된 후에는 내 얘기 좀 들어주라. 그전에 일단 해건이랑 먼저 얘기할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무슨 얘기를 할 건지는 모르겠으나, 한서림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수마가 몰려오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직 마취에서 덜 깬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밤이 된 모양이었다. 한서림은 깊은 갈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텁텁한 입안 때문에 양치도 하고 싶었고, 답답해서인지 바람도 쐬고 싶었다. 걷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으나, 아예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불을 켜자 갑자기 들이닥치는 빛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적응을 하고 링거액을 휴대용 거치대에 옮겨 달았다. 기운이 없었지만, 링거 덕분에 버티고 있는 듯했다.
양치를 하고 물을 마신 뒤 조용히 병실에서 나왔다. 불이 꺼져있는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자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최 팀장과 경호원 세 명이 보였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요.”
“회복될 때까지 걷는 걸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최 팀장의 말에 경호원 한 명이 응접실에서 접혀 있는 휠체어를 가지고 나와 한서림 앞에 펼쳐주었다. 거절할까 하다가 걷는 게 힘들어서 조용히 휠체어에 앉았다.
“같은 층에 야외 공원처럼 꾸며진 공간이 있는데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강해건 씨와 강 전무님도 그쪽에 계십니다.”
“네.”
최 팀장이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한서림은 힘을 빼고 기댄 채 멍하니 길게 늘어선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각인을 해서 강해건의 페로몬이 안정되었으니까, 저를 조금만 덜 미워하면 안 되나, 염치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 제비 다리 부러트린 후 고쳐주는 놀부 심보도 아니고, 이기심이 끝이 없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잠깐 바람만 쐬고 금방 들어오겠습니다.”
“네. 대기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야외로 나오자마자 최 팀장을 물렸다. 조용히 바람을 쐬고 싶어서 나온 건데, 옆에 사람이 있으면 신경 쓰일 것 같아서였다. 최 팀장과 따라온 경호원 한 명은 입구에 대기했다.
공원처럼 만들어진 야외 휴게 장소는 생각보다 넓었다. 한서림은 느릿한 손길로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난간 쪽으로 향했다. 야경이 상당히 괜찮았다. 무더운 여름의 밤바람이 후덥지근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알싸한 담배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코끝에 닿았다. 담배 연기를 따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벤치에 앉아 있는 익숙한 뒤통수의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최 팀장의 말대로 강해건과 강유건이었다. 담배는 강유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강해건과 강유건이 앉아 있는 벤치 옆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서림은 화단에 가려진 상태였다. 아직 강해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정확히는 강해건이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강해건이 벌떡 일어나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격양된 음성을 냈다.
“그러니까.”
“…….”
“내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강해건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한서림은 제 얘기가 나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휠체어 바퀴를 돌리던 손을 저도 모르게 멈췄다.
“한서림의 페로몬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먹인 약 때문이었다고?”
짓씹는 것처럼 읊조리는데도 한 글자 한 글자가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제 이름이 나오긴 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순식간에 한서림을 덮쳤다.
0.
한서림이 고개를 돌려 강해건을 주시했다. 화단의 꽃들 사이로 배신감에 치를 떠는 분노한 강해건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폭주했던 게, 아버지가 십 년 동안 먹인 그 약의 부작용이었다는 거야 지금?”
“그래. 서림이는 아무 잘못 없어. 그 약 때문에 너 스무 살 되도록 발현도 안 되고 있었는데, 서림이 덕분에 발현했던 거잖아. 그래서 서림이랑 각인하면서 네 페로몬이 안정된 거야. 너는 폭주를 일으킨 사람과 각인한 게 아니라, 너를 발현시켜준 사람과 각인한 거야. 안정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어.”
믿기지 않는 사실이 귀에 박힐수록 한서림은 손이 덜덜 떨렸다. 더는 들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굳어버린 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쿵쿵거렸다.
들려오는 대화 내용만으로는 자세한 정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저라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강 회장이 강해건에게 십 년 동안 어떤 약을 먹였고, 그 약의 부작용으로 페로몬 폭주가 일어난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덕분에 강해건이 발현했다는 정보도 더해졌다. 강 회장과 한 회장은 참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족속들이었다.
결국 그들이 자식들을 학대해 왔고, 여전히 이용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
잘못된 정보로 인해 한 사람은 원망과 복수심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마음을 새카맣게 태우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페로몬 폭격으로 한서림이 다쳤어. 애까지 유산했다고. 지금까지 내가 한서림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미안하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랑 아버지 사이가 더 멀어지는 게 걱정된답시고 나만 생각하고 있었어. 용서받자고 하는 얘기 아니야. 나는 다만…….”
“내가 알게 된 거 아버지 모르게 해.”
강해건이 이를 갈며 강유건의 말을 잘랐다.
“어쩌려고…….”
“그냥은 못 넘어가겠어서.”
“해건아.”
“강 전무, 내가 지금 기분이 씨발 좆같거든? 형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숨겼는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형이 알면서도 숨긴 것 때문에 나랑 한서림이 얼마나 엉망이 됐는지 알기나 해?”
강해건의 분노가 한서림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말이 맞다. 만약 강유건이 처음부터 진실을 숨기지 않고 저한테만이라도 공유해줬더라면, 관계가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책감만 덜어냈더라도 어쩌면 조금 더 수월하고 마음 편히 사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해건이 저를 원망하고 증오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스스로가 하찮았다.
“그래, 각오하고 있어.”
“…….”
“…….”
“한서림한테도 이 사실은 함구해.”
제 이름이 나오는 순간, 한서림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저한테 이 엄청나고 거대한 사실을 숨기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책감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고 있으면서……. 지금이라도 진실을 알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는데, 왜…….
“해건아, 서림이는 당사자야. 누구보다 알 권리가 있어. 자기가 너 그렇게 만든 줄 알고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으면 그 위험을 무릅쓰고 너랑 각인을 했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림이한테는 말해야 돼.”
“형.”
“…….”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한서림한테는 말하지 마. 한서림이 알게 되면…….”
이어진 중얼거림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마디가 더 오갔으나 한서림의 귀에 닿는 내용은 없었다.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강해건이 알게 되었는데, 저에게 알리길 원하지 않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로 힘겹게 짊어온,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인데 어째서…….
생각과 충격에 빠진 한서림은 그들이 실내로 들어갈 때까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있었다. 떨리고 있는 손끝이 잦아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당황이 너무 크면 공포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몹시 두렵고 무서운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쿵쿵거렸다. 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강해건에게 크나큰 배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급한 발걸음이 다시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 서 있던 최 팀장과 경호원을 보고 한서림이 나온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한서림은 재빨리 휠체어 바퀴를 굴려 있던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금 당장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몰아쳤다. 덜덜거리는 손이 필사적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서림아, 왜 나와 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급하게 다가온 강유건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짐짓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옆에 서 있는 강해건의 얼굴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면 왜 나한테 숨기려는 거냐며 참지 못하고 따질 것만 같았다. 한서림은 떨림이 심해진 손을 감추기 위해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쥐며 여상하게 웃었다.
“그냥. 바람 좀 쐬려고.”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야?”
“난간 쪽에 있다가 이제 들어가려던 참인데, 왜?”
“어, 아니. 나랑 해건이도 여기 있다가 방금 들어간 거였거든.”
“그래? 못 봤는데. 어디 있었어?”
강유건과 강해건은 한서림의 얼굴에서 거짓을 찾으려고 했다. 한서림은 정말로 못 봤다는 듯이 무구한 표정을 유지했다. 감정의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 버거운지,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이 희게 질려 있었다. 너무 밝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냐, 못 봤으면 됐어. 들어가자.”
실소가 나왔다. 제가 이렇게까지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잘 대처할 줄은 몰랐다.
강유건이 휠체어를 밀어주었고, 강해건은 말없이 옆에서 걸었다. 한서림은 표정 관리를 하며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속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해건이 왜 저한테 숨기려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강 전무, 멈춰봐.”
“어?”
“서림 씨, 왜 이렇게 손을 떨어요? 아직 몸이 안 좋아요?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휠체어 손잡이를 놓는 순간부터 발작처럼 떨리는 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강해건이 걱정스럽게 물으며 무릎을 굽혀 앉아 한서림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닿아오는 게 거북해서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잡힌 손을 빼냈다. 회색빛 눈동자에 드러난 진심 어린 걱정이 불편했다.
“그냥……, 그냥 아직 회복이 안 됐는데 움직여서 그런가 봅니다. 눕고 싶어요, 누우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형, 담당 의사 좀 호출,”
“아뇨. 괜찮습니다. 병실로 빨리 돌아가서 눕고 싶어요.”
한서림은 얼른 강해건의 말을 잘랐다. 의사가 하는 질문에 답하고 검사를 하고,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버거웠다. 마구잡이로 뒤엉켜서 엉망이 되어 버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강해건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강유건이 먼저 성큼성큼 멀어졌고, 강해건이 천천히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강해건의 온화하고 다정한 페로몬을 흡수해도 덜덜거리는 손이 멈추지를 않아서 한서림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아니, 내가…….”
강해건은 한서림이 만류할 틈도 주지 않고 휠체어에 앉아 있던 몸을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겨주었다. 실소가 터질 뻔해서 한서림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얼굴을 감췄다.
숨기고 싶으면 행동이라도 일관되게 하던가.
지금 강해건의 행동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했더라도 의심스러웠다. 뜨겁게 용솟음치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 어쩌면 강해건의 페로몬이 안정돼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에 변덕을 부린다고 생각하면 그럴싸하긴 했다. 유산은 안타깝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한서림이 페로몬 샘을 제거했으나 그건 자업자득이다. 그러면 강해건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다정하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 똑똑한 인간이니 숨겨야 하는 진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계산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솔직히 진실을 들었을 때,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안도가 먼저였다. 강해건을 그렇게 만들었던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것에 너무 안도한 나머지 울컥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제 다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강해건이 임신을 원하면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러서 계약 내용을 핑계로 제 욕심을 채우고 싶었고, 페로몬이 안정됐으니 필요 없다고 이혼하자고 하면 힘들고 괴롭긴 하겠지만 조용히 이혼해주고 뉴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실 페로몬 샘의 제거로 이제는 절대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선택하려고 했다. 강해건에게 평화로운 일상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한서림은 모든 보상을 다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저에게 함구하라는 강해건의 말에 분노와 배신감, 허탈함, 허망함이 뒤이어 따라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강해건이 제 걱정을 많이 했다는 주변인들의 말과 달리, 강해건은 제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애초에 한서림에게는 필요 없는 죄책감이었는데도.
갖지 않았어도 될 죄의식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너무 많은 감정 노동을 한 탓에,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절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팽배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한 달 내내 잠만 자고 싶었다. 뇌가 없는 무생물이 되고 싶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종내에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
***
“약 먹어요. 여기 물.”
밥을 다 먹자 강해건이 식판을 물리며 약과 함께 물을 챙겨주었다. 한서림은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약과 물을 받아 바로 삼켰다. 하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더니 감정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입원한 지 열흘이 되도록 강해건은 한서림의 곁에 붙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하게 챙겨주었다. 쌍방각인 후 페로몬이 안정되었으니 옛일을 묻고 너그러운 포용력으로 감싸주는 설정인 모양이었다. 우습고 같잖았다.
“이렇게 잘해줄 필요 없습니다. 페로몬이 안정된 건 다행이지만, 어차피 그 원인도 나였잖아요. 전처럼 막말을 하든 목을 조르든 따귀를 때리든, 억지로 참지 말고 강해건 씨 내키는 대로 해요.”
“……내가 내키는 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몇 번을 떠봐도 강해건은 한서림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진짜 끝까지 한서림에게 진실을 은폐할 생각인 것이다. 만약 제가 진실을 엿듣지 못했더라면 달라진 강해건의 태도에 다행이라고 여기며 절절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서림은 괜찮은 듯싶다가도 중간중간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이 감당되지 않았다.
“강해건 씨.”
“네.”
“이혼했으면 합니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눈동자가 날아왔다. 그래도 한서림은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열흘 내내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머리가 터질 만큼 같은 고민만 반복했다.
결론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못을 빼도 못이 박혀 있던 자리에는 자국이 남는 것처럼, 엉켜서 엉망이 된 관계를 푼다고 해도 흔적은 남을 것이다. 어쩌면 더 심하게 엉킬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애초에 처음부터 잘못 끼웠던 단추를 전부 다 풀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끼우는 게 현명한 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