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한서림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뺨을 맞고 자기 잘못이라고 하는 한서림이 안쓰러운 건 사실이었다. 강해건이 오메가를 집으로 들였던 날, 그 어떤 부당한 일도 전부 감수할 것처럼 굴었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한편, 한서림은 다소 냉소적인 생각을 했다. 솔직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회장은 시도 때도 없이 페로몬 학대와 함께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채 샌드백을 치듯이 따귀를 갈기는 건 예사였고, 피부가 찢기며 타들어 가는 통증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웅크린 몸을 마구잡이로 짓밟기 일쑤였는데, 뺨 한 대 때린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아버지에게 맞을 때는 어디를 맞든 넘어지거나 울면 더한 폭력과 무서운 페로몬이 날아들었기에, 맞아도 발끝에 힘을 준 채 목석처럼 버텨야 했다. 따귀를 연달아 몇 대를 맞아도 고개조차 움직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목에 단단히 힘을 주며 버틸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단련이 되었는데도 아까는 너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고작 뺨 한 대로 한서림에게 타격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부어오르는 화끈화끈한 뺨과 터진 입술보다, 한서림은 마음이 아파서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호텔로 가시죠. 주차장에서 얼른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서림은 고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중호는 한서림을 서정 호텔까지 데려다주었고, 한서림이 직접 체크인하는 모습을 옆에서 빤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서림이 룸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강해건은 주체할 수 없는 성적인 흥분에 눈이 뜨였다. 머리가 무거운 걸 보니 수면제 기운이 남아있는 듯했다. 페로몬이 제멋대로 날뛰며 용솟음치는 게 느껴졌다. 아직 페로몬 폭주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정 박사가 수면제 용량으로 실수할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그 순간 성기를 꽉 조이는 압박감에 본능적으로 허리가 들썩여졌다.
“읏…….”
하지만 강해건은 신음만 뱉어냈을 뿐 실제로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허리가 들썩여졌다고 착각한 것은, 제 허리 위에 올라타 앉은 한서림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힘겹게 손을 뻗어 한서림의 골반을 쥐었으나,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얹어놓은 꼴이 됐다. 남아있는 수면제의 효과가 강해건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시선만 돌려 LED 전자시계를 확인하자, 고작 열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짧아도 깨어났을 때 24시간이 지나있던 걸 생각하면 페로몬 폭주가 지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대체 자는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발기시켜서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건지. 말랑말랑한 곳으로 성기를 품었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하는 한서림의 몸은 무리한 걸 증명하듯 땀에 절어 있었다. 한서림이 성기를 품을 때는 여린 살결이 노골적으로 조이며 압박했고, 뱉어낼 때는 아쉬운 것처럼 꾸역꾸역 달라붙어서 딸려 나왔다. 제정신을 차리기 전인데도 흥분은 착실하게 쌓였고, 발가벗은 몸이 흔들리는 게 자극적이어서 시야가 아찔했다. 한서림이 풀어낸 농도 짙은 페로몬에 뇌까지 녹는 느낌이었다.
“아, 잠깐…….”
통제를 벗어난 몸이 사정을 하려고 했다. 강해건이 제지하려 했으나, 한서림은 앞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하으, 응! 읏, 흐읏……!”
속에서 농축되어 쌓인 탓에 뭉쳐진 페로몬이 위험하게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평상시에 아무리 페로몬을 배출해도 늘 쌓이면서 뭉쳐지고 덩어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들이 한 번에 터지는 현상이 페로몬 폭주였다. 지금도 몹시 위험한 상태였다.
“으, 읏……!”
강해건이 참지 못하고 사정하는 순간, 한서림이 작정한 듯이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한계까지 풀어낸 한서림의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았다. 각인이 시작되면서 목덜미에 통증이 느껴지며 열이 고이기 시작하자 한서림은 힘을 쭉 빼고 강해건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무너트렸다.
“다행, 이다…….”
다 쉬어버린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고, 강해건의 안에서 뭉쳐진 페로몬들이 기이하게 회전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성기를 빼내고 한서림의 페로몬에서 벗어나면 각인을 막을 수 있는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해건아, 이제 그만 아파도 돼…….”
한서림의 지친 음색은 울컥거림을 만들어냈다.
“하자, 각인……. 그러면 다, 끝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옅은 미소를 보인 한서림이 강해건의 입술 앞으로 목덜미를 가져다 댔다.
내가 너를 어떻게 지켰는데…….
결국 강해건은 눈을 감았다. 한서림의 목덜미를 물고 페로몬을 한껏 개방하며 각인을 시작했다. 눈꼬리를 타고 애틋한 감정이 점점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쌍방각인의 과정에서 강해건의 안에 뭉쳐져 있던 페로몬이 거칠게 소용돌이치더니 순식간에 마지막 폭주가 일어났다.
“아, 흐윽!”
페로몬의 폭격을 정통으로 받은 한서림이 토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신음을 쏟으며 정신을 잃은 것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정신을 잃은 한서림을 보고 당황해서 폭주하는 페로몬을 컨트롤하려고 죽을힘을 다했으나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컨트롤에 무력함을 느끼며 강해건은 괴롭게 포효했다.
정 박사에게 연락하고 119를 불렀으면서도, 극우성 알파의 각인 페로몬이 넘실거리고 아직 폭주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강해건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지금 막 각인을 끝냈는데 보호자도 없이 어떻게 혼자 보내라는 거야!”
“진정하세요. 극우성 형질은 이 상태로 외출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 강해건 씨의 페로몬이 많이 불안정합니다. 자택 감금에 따라주세요.”
각인이 끝났어도 몇 시간은 서로의 페로몬 안에 있어야 안정될 수 있는데. 곁에 있지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강해건은 살인 충동을 느꼈다. 미친놈처럼 날뛰다 119 구조대원들과 몸싸움이 붙었으나, 정 박사의 만류에 강해건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해건아. 네가 이럴수록 저 사람이 더 위험해져.”
강해건의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한 말이었다. 그래서 강해건은 이동식 침대에 실려 가는 한서림을 아픔에 얼룩진 눈으로 보면서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각인은 제대로 됐고, 네 페로몬 대신 안정제 맞으면 괜찮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정 박사는 간단하게 설명해준 후 강해건의 팔에도 안정제를 놔주었다.
119 구조대원이 경찰에 협조 요청을 했고, 경찰은 강해건의 페로몬이 안정되어 타인과 접촉해도 되기까지의 몇 시간을 아파트 문 앞에서 감시했다.
기어코 각인 도중에 공격적인 페로몬 폭주가 일어났고 한서림이 정신을 잃었다. 어디가 얼마나 다친 것인지 걱정이 돼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하고, 특히 아버지 귀에 안 들어가도록 신경 써야 돼. 그리고 형이 한서림 보호자 노릇 좀 해줘. 상태가 어떤지 바로바로 연락해주고. 부탁할게.”
이중호에게 연락해서 당장 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으나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정 박사에게도 일단 강 회장에게는 함구해 달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정 박사는 지금껏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 때마다 비밀리에 수면제를 놔주며 협조해준 사람인데도 오늘따라 이유 모를 불신이 피어났다.
차라리 우성 알파였다면 지금쯤 한서림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저 때문에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가는 한서림을 혼자 두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빌어먹을 극우성의 형질 때문에 러트나 각인처럼 페로몬이 과할 때는 마음대로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87.
“읏…….”
조금 전에 끝난 각인의 증표가 따끔거렸다. 한서림의 달콤한 페로몬을 흡수할 수 없는 대신 안정제가 역할을 하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는 모양이었다. 강해건의 목덜미에는 한서림과 강해건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한서림의 목덜미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쌍방각인이 제대로 완료되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강해건은 알 수가 없었다. 발현 이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몸 깊은 곳에서 페로몬이 뭉쳐지는 묵직한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싹 다 풀린 것처럼 평온했다. 발현해서 페로몬을 감지하게 된 후 이런 가뿐함과 평온함은 처음이었다. 강해건은 쌍방각인의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었다.
“하, 씨발…….”
검사를 해보지 않아도 페로몬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의 느낌마저 달랐다. 이전에도 페로몬의 컨트롤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제 몸과 약간 따로 노는 듯한 위화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하게 제 몸의 일부처럼 착 감겨왔다. 한서림의 희생으로 얻은 대가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언제 페로몬 폭주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한서림은 무모하게 몸을 내던졌다. 왜 그렇게까지 미련하고 무식하냐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제가 아무리 못되게 굴고 모질게 굴어도 한서림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로 귀결되었다.
한서림을 사랑해서 강해건이 각인을 거부했던 것처럼, 강해건을 사랑하기에 한서림은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들었다. 파국으로 치달은 위태로운 사랑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말 것을…….
이 모든 일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계열사에 건설을 추가하고 극우성 형질의 핏줄을 보고 싶었던 강 회장의 추잡한 탐욕과 그걸 알면서도 강유건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려고 강 회장과 딜을 한 저의 더러운 이기심이 모든 일의 발로였다.
그 결과로 한서림의 인생이 위태로워졌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강유건이 어떻게 되든 말든 애초에 정혼을 거절하고 한서림을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최악의 결과가 닥친다고 해도 한서림보다는 강유건에게 타격이 훨씬 적었을 테니까. 제가 회사를 받아서 강유건에게 주는 방법도 있고, 강유건이 정혼했다가 이혼하는 방법도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쉽게 가려고 선택했던 일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협이 되었다.
한서림을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
시체처럼 늘어졌던 몸과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고 아른거렸다. 많이 다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제발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할 텐데. 강해건은 난생처음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간절함을 담았다.
자택 감금이 풀리기까지는 약 여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나온 알파 전문 센터의 사람이 안전 상태라고 판단을 한 후에야 강해건은 아파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극우성 형질을 떠받들어 경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괴물 취급을 서슴지 않았다.
“지금 출발했어. 한서림 상태는 어때.”
거칠게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이중호에게 몇 번이나 연락했으나, 여섯 시간 내내 만족할 만한 제대로 된 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나마 한서림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는 말을 들은 게 두 시간 전이었다. 그때까지도 계속 검사 중이라는 말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그, 해건아…….
침울하게 가라앉은 이중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한서림이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쿵쿵거렸다. 이중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두렵고 무서웠다. 곡예를 하는 것처럼 최대한 빠르게 병원까지 달려가는 차 안에서 강해건은 운전에 집중하지 못했다.
“말해. 어디를 얼마만큼 다쳤다는데. 정신이 들었으니까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긴 한데…….
다행이다.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사항은 강해건 자신이 전부 채워줄 작정이었다.
-페로몬 샘이 망가졌다더라고. 임신 중이었던 상태라 자궁구는 보호가 돼서 다시 임신할 수는 있다는데…….
임신 중이 아니었더라면 한서림 또한 오메가이면서도 평생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첫 페로몬 폭주의 피해자인 강유건처럼.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 대표님 본인 페로몬을 잃었대. 남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는 있어도 자기 페로몬이 없는 거라는데, 난 베타라서 그런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페로몬 샘이 아예 아작 나 버렸나 보다. 타인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 건 페로몬 샘과 관계없이 발현한 알파나 오메가라면 누구나 가진 능력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페로몬을 풀고 거두는 일은 발현 이후부터 제 기능을 발휘하는 페로몬 샘을 통해 행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피해자인 강유건은 페로몬 샘은 완치되었지만, 자궁구의 파열로 임신이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피해자가 된 한서림은 아기가 지켜주었으나, 페로몬 샘을 잃었다. 알파나 오메가의 고유 형질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서림은 지금 어쩌고 있는데.”
-병실에서 멍하게 있어. 차라리 울고불고 화라도 내지, 너무 침착하고 담담해서 보는 내가 다 미어지더라.
어쩌면 한서림은 결과를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담담하고 침착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일 테다.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무언들 각오하지 않았겠는가.
“알았어, 지금 주차장에 도착했어. 바로 올라갈게.”
강해건은 한서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페로몬 폭주는 한서림 때문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몇 년이나 시한폭탄이 된 기분으로 긴장을 놓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폭주에 시달렸다. 미약한 두통만 와도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폭주가 일어난 횟수가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니지만,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언제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서림이 페로몬을 안정시켜주었다. 한서림은 자기가 시작했던 일을 자기가 끝냈다.
몇 번이고 상상했던 일이기에 강해건은 제가 할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너 때문에 벌어졌던 일로 다친 거니까 자업자득이라고 비웃으려고 했다. 일말의 연민조차 가질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한서림만 아니었다면.
VIP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응접실에 서성이는 이중호가 보였다. 문밖에는 최 팀장의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중호는 얼른 들어가 보라는 듯이 병실 문을 열어주었다. 작게 심호흡을 한 강해건이 병실로 들어섰다.
“…….”
“페로몬은, 어때요? 안정됐어요?”
지금 그게 할 말인가.
한서림은 자기 몸이 다쳐서 병실에 누워있는 상태로도 강해건의 안위부터 살폈다. 강해건이 말없이 빤히 바라만 보자, 잠깐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금 올곧게 눈을 맞춰왔다. 이중호의 말처럼 몹시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 미안해요. 아기가……, 숨을 안 쉰대요.”
억지로 감정을 감추려는 듯이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였다.
“유산……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지키지를 못했어요.”
“…….”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조금씩 떨리던 목소리에는 어느새 물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강해건은 한서림의 말을 더 듣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더니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도무지 자책하는 한서림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야, 해건아. 어디 가.”
거의 들어가자마자 나온 강해건이 밖으로 향하는 걸 보며 이중호가 잡았지만, 강해건은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자택감금이 풀리고 병원으로 달려올 때까지만 해도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한서림을 보는 순간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감정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바로 한서림의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다친 정도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게 들었다. 페로몬 샘은 뇌와 직결되어 있기에 페로몬 샘을 다쳤다면 뇌 쪽도 안심할 수 없었다. 한서림의 상태를 봐서 뇌는 괜찮은 것 같았지만, 확실한 진단을 들어야 긴장을 풀 수 있을 듯했다.
“이 정도면 기적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페로몬 샘이 아예 쓸 수 없게 망가졌는데 뇌는 멀쩡하니까요.”
“확실한 건가요? 다른데 다친 곳은 전혀 없는 거고요?”
“네. 네 시간 넘게 정밀검사를 진행한 터라 오차 없이 확실합니다. 일단 아기가 유산되었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때 페로몬 샘 제거 수술도 함께 진행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꼭……제거해야 하는 겁니까.”
알파와 오메가에게 있어 페로몬은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되는 것이자, 자존감이나 다름없었다. 한서림이 잃게 된 것은 하나쯤 없어도 괜찮은 장기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냥 두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으니까요. 확인된 사례는 없지만, 가설이 많습니다. 망가진 페로몬 샘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뇌에 영향이 미쳐서 언어 장애나 시력 장애, 청력 장애, 심할 경우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작정하고 페로몬 공격을 하는 것과 달리, 애초에 페로몬 폭주로 다치는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확인된 사례가 없는 것도 이해가 됐다. 차후에 생길지 모를 장애에 대비한다면 당연히 페로몬 샘을 제거하는 게 맞는 일인데, 알파와 오메가에게 페로몬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문제에서 결정권을 가진 건 강해건이 아닌 한서림이라는 것이었다.
88.
“환자 본인에게는 이야기하셨습니까.”
“네. 환자 본인의 몸이 다친 것보다는 유산에 대한 상실감이 큰 듯합니다. 페로몬 샘 제거 수술은 상관없다고 바로 진행해달라면서도, 유산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은 모습이었거든요. 가족이 옆에서 많이 위로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서림을 닮았으면 정말로 어여쁘고 귀여운 아기였을 텐데…….
심장이 꽉 조여지며 가슴이 뻐근해졌다. 버거운 반응에 강해건은 손으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입원은 얼마나 해야 합니까.”
“베타라면 수술까지는 필요 없는 시기이긴 한데 남성형 오메가라서 수술이 필요한 케이스입니다. 수면 마취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틀 이내로 수술 날짜를 잡을 계획이고, 수술 후에는 열흘에서 2주 정도 입원 치료를 받으시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망한 이 기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강해건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정 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 몸은 좀 어때. 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겠지만, 감지되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안정적이구나.”
그제야 강해건은 타인의 페로몬을 의식했다. 한서림의 달콤한 페로몬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페로몬에도 빠짐없이 느껴졌던 거부반응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정 박사나 복도를 지나다니는 의사, 간호사의 페로몬이 감지되는데도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하아…….”
정말 페로몬이 안정된 것이다. 그러나 강해건이 가장 달콤하다 느꼈던 한서림의 페로몬을 다시는 흡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슬프고 아팠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침대 위에 잠들어 있던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더듬었다. 발신인은 강해건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시각을 확인하자, 한국은 오후 1시가 조금 넘었고, 런던은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시차를 무시하고 전화할 녀석이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이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어, 해건아.”
-형…….
강해건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듣는 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 반갑고 뭉클한 마음과 달리 어쩐지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한기가 몰려왔다.
“해건아, 너 목소리가 왜 그래. 혹시 울어?”
-형. 내가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이렇게 무너진 강해건의 목소리는 모친인 윤성아의 장례식 이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힘겹게 울음을 참는 숨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강유건은 잠이 싹 달아나고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 그래, 해건아. 진정하고 얘기해 봐. 형이 알아야 도와주든가 하지.”
-한서림이, 나 때문에…….
강해건이 흐느끼며 쏟아낸 이야기는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말만으로도 강유건은 모든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강해건을 발현시켰던 오메가가 한서림이고, 쌍방각인을 하다가 한서림의 페로몬 샘이 망가졌고, 유산을 했다. 요약하자면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강해건은 짓무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울음과 함께 힘겹게 토해냈다. 늘 혼자 끌어안고 삭이는 녀석이 얼마나 괴롭고 아팠으면 시차 계산도 못 하고 전화해서 이렇게 울어댈까 싶었다.
“그래도 서림이 뇌에는 이상이 없다니 천만다행이다. 해건아, 페로몬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어. 더 크게 안 다친 걸 감사하고 서림이 잘 위로해줘. 페로몬이 없다는 거 느낄 틈도 없이 네가 더 잘하면 돼.”
-내가……,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럴 자격이 왜 없어. 너 서림이의 반려 알파야. 너 아니면 누가 서림이를 챙겨.”
휴대폰 너머로 울음을 삼켜내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강해건은 강유건의 동생이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쉬운 소리나 우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도 어린애답지 않게 어른스러웠고, 극우성이라는 형질로 강 회장의 기대를 지나치게 받은 탓에 무언가를 감내하고 참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부터 배웠다. 그깟 극우성 알파라는 형질이 뭐라고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다울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성장했다.
강해건이 없었더라면 제가 그렇게 살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강해건의 존재가 고마워서 더 잘해주고 챙겨주었다. 형, 형, 하면서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동생이 언제부턴가 진심으로 소중해졌고, 오히려 든든한 형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 정도로 어른스럽고 혼자 꾹꾹 눌러 담는 일에 능숙했으며 약한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답답하고 오죽 못 견디겠으면 전화를 해서 이토록 울어댈까 싶어서 강유건도 마음이 쓰렸다. 급하게 들이닥친 정보들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지만, 강해건의 진심이 전해져올수록 불편한 죄책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건아. 너는 검사해봤어? 그럼 네 페로몬은 안정된 거야?”
발현시킨 상대와 각인하면 74%의 확률로, 페로몬 폭주를 일으킨 상대와 각인하면 68%의 확률로 페로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한서림은 강해건을 발현시킨 상대였으니 74%의 확률이었다. 만약 강해건의 페로몬이 안정되지 않고 한서림이 다치기만 했다면 끔찍한 재앙일 것이다.
-가능성이 68%라고 했는데, 100% 완전하게 안정됐대.
“왜 68%…….”
되물으려던 강유건이 말끝을 흐렸다. 강해건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순간적으로 기억해낸 탓이었다. 강해건은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강 회장이라는 걸 모른다. 발현시켜준 상대와 폭주를 일으킨 상대가 같다고 알고 있었다.
-형, 내가 너무 큰 죄를 지었어. 한서림한테 상처를 너무 많이 줘서……. 그런데 한서림 때문에 페로몬 폭주로 고생한 걸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분노가 끓고……. 그러다가도 사랑하니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했던 짓들이 전부 다 너무 후회돼……. 어떻게 한서림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무슨 짓을 했다고 후회를 해. 해건아, 진정하고 서림이부터 챙겨.”
하지만 강해건은 횡설수설하면서 그간의 일들을 풀어놓았다. 분명히 한서림이 다칠 것이 걱정되어 일부러 그랬을 텐데, 강해건은 주관적인 감정을 전부 배제하고 자기가 했던 짓의 사실만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