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42)

“대표님 일하시는 방식이 좋았는데, 아쉬워요.”

“일하는 시스템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 시스템을 자리 잡게 하려고 일단 내가 경영했던 거니까요. 대표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무너지는 회사라면, 애초에 설립하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죠.”

한국 지사에도 담당을 따로 두겠다고 결정한 것은 의외로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한국에 오래 있을 예정도 아니었고, 정혼이 아니었다면 론칭을 하고 몇 개월만 맡아서 경영하다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담당 경영인을 두려고 했었다. 얼떨결에 타이밍을 놓쳤을 뿐.

“저는 대표님이 출산 휴가만 가실 줄 알았어요.”

“그럼 언제부터 대표님이 바뀌는 거예요?”

“글쎄요. 일단 스케줄을 조율해 봐야겠지만 빠르면 2주 안에, 늦어도 한 달 안에는 출근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이제라도 계획을 실행하는 이유는 강해건이었다. 목에 남았던 멍 자국을 보면서, 담담하게 미래를 생각했었다. 각인 도중 다치게 되면 경영을 하기는 힘들 거고, 운이 좋아서 다치지 않게 되면 출산 후 이혼해야 하니까 뉴욕으로 돌아가서 페로몬 향수 개발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관리를 아예 안 할 수는 없겠지만, 본격적인 경영에서는 손을 뗄 생각이었다.

“대표님, 인터뷰하러 오셨다는데요.”

“새로운 대표님 후보인가 봐.”

“저 사람 잡지에서 본 적 있어요. 스타트 업 회사 대박내서 팔고 그런 걸로 능력 있다고.”

“그래도 우리 회사가 스타트 업 회사는 아니지. 엄연히 뉴욕에 본사가 있는데.”

김 팀장의 말에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한서림은 못 들은 척하며 첫 번째 후보를 회의실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한국에서 대표직을 내려놓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밀린 과제를 해치우는 것처럼 후련했다. 어쩌면 연구와 개발이 적성에 맞고 경영은 적성에 안 맞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비슷한 스펙의 세 명의 후보 중 한서림은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다. 각자의 특출 난 장점이 하나씩 있었는데, 첫 번째로 인터뷰한 사람은 사업 수완이 뛰어나서 스타트 업 회사를 여러 번 대박나게 한 전력이 있었고, 두 번째로 인터뷰한 사람은 영업에 특화된 기량을 선보이며 마케팅 쪽으로 아이디어가 뛰어났고,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사람은 페로몬 향수가 뉴욕에서 첫 론칭했을 때부터의 애정이 남달랐다.

-그럴 줄 알았어.

휴대폰 너머로 낄낄거리는 강유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결과에 대해 메시지를 보냈더니 강유건이 바로 전화를 걸어온 참이었다.

-역시 내 제품을 사랑해주는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니까. 그 정도 애정이면 마케팅 아이디어도 생길 거고, 사업 수완도 따라올 거야.

“어.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급하게 구해주지 않아도 됐었는데, 어쨌든 고맙다.”

-당연히 급하게 구해줘야지. 내 조카를 위해서 쉬겠다는데, 그 정도도 못 해줄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해건이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만, 내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마라.

너스레를 떠는 강유건의 말에 한서림은 잠깐 웃었다.

월요일의 퇴근길은 차가 많이 막혔다. 조수석에는 최 팀장이 앉아 있었고, 운전석에는 늘 최 팀장과 함께 움직이는 경호원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강유건의 배려에 감사 인사를 하려다가, 당사자들 앞에서 하는 건 멋쩍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며 말을 돌렸다.

“런던은 어때? 지낼 만해? 적응은 좀 했고?”

-사람 사는 곳이야 다 똑같지, 뭐. 일도 비슷해. 언어가 다르다는 것만 제외하면.

“근데 왜 그렇게 갑자기 가게 된 거야? 아니면 예정되어 있던 거야?”

-해건이한테 못 들었어? 하긴, 둘이 사랑하기 바쁠 텐데 내 얘기 할 시간이나 있었겠냐.

사랑하기 바쁜 적은 없지만, 오해하는 채로 두는 게 나을 듯했다. 강해건이 초반에 강유건을 졸업시키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강유건에게 걱정을 끼쳐봐야 강해건이 저를 미워하는 감정만 더 커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84.

-여기서 능력 인정받아서 가면, 이사회에서도 오메가라는 이유로 경영 계승을 반대하지는 못하겠지.

아무리 오메가 형질의 사람들이 사회지도자층에 올라서고 능력을 입증해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가진 기성세대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서림이 페로몬 향수 사업을 미국과 유럽에서 성공시켰어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한 회장처럼.

-근데 서림아. 해건이 페로몬 폭주는 아직이지?

강해건의 주치의와 꾸준히 연락하고 있을 텐데 강유건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 아직. 주기가 또 짧아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일단 두 달은 지났으니까 짧아지지는 않을 것 같아. 저번처럼 두 달 반이면 아마 말일쯤일 것 같고. 일주일도 안 남았어.”

그래서 문제였다.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해건이 각인하자는 말을 안 해서.

그날 강해건의 살기 띤 회색빛 눈동자에 서린 아픔을 봤기 때문에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강해건은 어쩌면 진심으로 저를 죽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제가 어떤 방법으로든 한 회장의 몰락을 바라는 것처럼. 잠깐이나마 한 회장에 대해 생각한 저의 추악한 마음이 배 속의 아기에게 전해질까 봐 두려워서 한서림은 괜히 배를 어루만졌다. 너에게는 절대 그런 마음을 모르게 하겠다는 듯이. 절대로 제 아버지처럼 자신은 너를 이용하지 않을 거라는 걸 다시 한번 맹세하는 것처럼.

-혹시라도 전조 증상이 나타났는데 해건이가 제정신이 아니면 네가 꼭 정 박사님 호출해줘. 내가 준 번호 가지고 있지?

“어. 내일부터는 출근도 안 하니까 내가 신경 쓸게.

-고맙다. 네가 있어서 그래도 안심이야. 다른 무엇보다 너부터 그 자리에서 피하는 거 절대 잊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도망부터 쳐야 돼. 알았지? 정 박사님 호출은 자리부터 피하고 해도 되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강유건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한서림이 알았다고 대답을 해도 도망치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마도 일전에 한서림이 굳어서 벌벌 떨고 있던 모습 때문에 걱정이 큰 모양이었다.

“알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래. ……어, 해건이랑은 요즘 어때? 임신했으니 더 잘해주지? 아직도 그렇게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사냐? 내가 니들만 생각하면 부러움에 몸서리를 친다, 아주.

잠시 무거운 주제가 오간 것을 환기시키려는 듯, 강유건이 바로 화제를 돌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차들로 꽉 막힌 도로에 무감하게 시선을 두고 있던 한서림이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유건의 말을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바른말로, 강해건과 제가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강해건을 짝사랑만 해서인지, 사실무근의 이야기인데 말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

“그래서 이제 뭐 해먹고 살려고.”

강해건은 이중호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서류 안에는 한서림의 아파트 전세 해지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한서림에게 미리 위임장을 받아놨었고, 주말에 왔던 이중호에게 전달했더니 월요일이 되자마자 일을 처리해왔다. 두바이에서 돌아왔을 때 일주일 안에 집을 정리하라고 했었는데, 한서림은 알았다고 했으면서도 모주원 사건이 터진 후 그대로 두었었다. 어쨌든 모주원이 지내던 한서림의 아파트는 이제 인연이 없는 장소가 되었다.

“뭐 해먹고 살긴. 너 나한테 일 시키면서 쏴주는 돈이 얼마인지 뒤에 붙은 공 숫자 안 세고 그냥 막 찍어서 보내는 거냐? 한 달에 한 번씩만 네가 주는 일 해도 먹고 사는 건 지장 없어, 인마. 진작 매니저 때려치우고 이 일로 먹고살 걸 그랬다.”

이중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매니저 일을 꽤 좋아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강해건의 계약 해지와 동시에 이중호는 망설이지 않고 퇴사했다. 어쩌면 매니저 일을 좋아했다기보다는 강해건의 매니저 일에서 보람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이런 자잘한 일을 도와주는 걸 보면.

“그 집에 있던 물건들은 네가 말한 대로 전부 처분했고, 전세금 돌려받은 건 한 대표님 통장으로 바로 쐈어. 잘 받았다고 자기 때문에 괜히 고생했다면서 한 대표님이 메시지 보냈더라. 나도 한 대표님한테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너한테 돈 받았다는 말은 안 했다.”

“……어.”

“근데 한 대표님은? 오늘도 주무시나?”

지난주에 이중호가 위임장을 받으러 왔을 때 한서림은 방에 틀어박혀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강해건은 임신하고 힘든지 잔다고 핑계를 댔었다. 일방적으로 각인을 시도하다가 모진 말을 듣고 폭력적인 행위를 당한 탓에 저와 마주치기 껄끄러워서 피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한서림이 잠들었을 때 페로몬을 한 번 더 풀어주려고 조용히 침실에 들어갔다가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서림의 하얗고 가는 목에는 희미하게나마 시퍼런 멍 자국이 나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제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당시에는 한서림이 무턱대고 각인을 시도하려는 탓에 막아야 한다는 당황감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손부터 나갔다. 아직 삽입된 상태였기에 잘못 움직이면 다칠까 봐 본능적으로 최대한 움직임이 적은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자기 몸은 걱정하지 않고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걸 봤으면서도 흉측한 멍 자국이 생길 거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완전히 정떨어졌겠지.

질렸겠지.

아마도 치를 떨면서 환멸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한서림은 주말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식사도 조용하게 혼자 따로 해결했다. 사과하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한서림을 위해서는 차라리 잘 된 거라고, 그 정도 당했으면 이제 각인 얘기는 꺼내지도 못할 거라고 위안했다.

“야, 인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냐. 한서림 회사 갔어. 이제 도착할 때 됐네.”

“회사? 야, 남자 오메가가 임신하면, 임신 확인 순간부터 출산까지 나라에서 휴가를 주는데 회사를 갔다고? 너 미쳤냐? 그냥 보내게? 남자 오메가의 임신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 네가 아무리 알파라도 그렇지 베타인 나도 아는데 너는 무슨 애가…….”

이중호가 질린 눈으로 강해건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강해건 역시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일까지 출근해야 한다는 한서림에게 일방적으로 일주일 안에 정리하고 휴가를 내라고 한 거였다. 일주일도 내키지 않았지만, 한서림이 능력을 입증한 페로몬 향수와 회사에 큰 애착을 가진 걸 알기에 최대한 타협한 거였다. 다행히도 한서림은 강해건의 요구 이상으로 흡족하게 행동했다.

“휴가 내려면 정리할 일들이 있어서 오늘만 나간 거야. 최 팀장 경호팀 대동했고.”

“어떻게 너는 안 따라갔냐? 그림자인 양 따라다니면서 집착할 것처럼 굴더니.”

“내가 언제.”

“뉴욕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에서도 나한테 한 대표님이 연락하나 안 하나 내내 감시했잖아. 말 안 한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두바이로 튀었을 때는 어떻고. 너 진철이한테 한 대표 1분 1초까지 다 보고 받았다며?”

진철은 경호 팀장인 최 팀장의 이름이었다. 최 팀장의 사설 경호팀을 소개해준 것이 이중호였다. 어떻게 해도 강 회장에게 매수될 것을 염려해서 일부러 이중호에게 믿을 만한 사람들로 소개받은 거였다. 알파와 베타를 적당하게 섞어서. 이중호의 고향 친구라는 최진철의 경호팀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강해건의 마음에 흡족했다.

“경호팀을 갈아치워야겠구만. 의뢰인의 의뢰 내용을 남한테 함부로 발설해도 되는 거야? 그럴 거면 비밀 유지 계약서는 왜 쓴 건데? 고소해야겠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앞에서는 내가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니까. 나도 너랑 한 달이나 연락이 안 되는데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진철이를 그렇게 조졌겠냐.”

“조졌든 뭐든 최 팀장이 비밀 유지 계약서를 어기고 발설한 결과가 달라지진 않지.”

“아오, 인간미 없는 새끼. 내가 너 얼굴이 그렇게 생긴 거 처음 봤을 때부터 인간미가 개미 똥만큼도 없을 줄 알았다.”

막말을 퍼붓고도 성에 안 차는지, 이중호는 기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솔직히 진철이 새끼도 끝까지 입 안 열다가 한 대표가 너 잡아 오겠다고 떠났을 때서야 얘기한 거야. 강 회장님 경호팀이랑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는 바람에 경호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막막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그때야 실토하더라. 심지어 진철이는 너 두바이에 있는 것도 몰랐잖아.”

이중호가 얼굴에 억울함을 덕지덕지 붙였다. 실제로 강해건은 최 팀장에게 자신이 있던 장소를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서림이 강 회장까지 이용해서 저를 찾아낼 줄은 몰랐다. 각인을 하기 위해서 그 정도로 미련하게 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형 봐서 고소는 안 할게.”

“아이고,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어떻게, 감사합니다, 하고 큰절이라도 올릴까?”

“그럴래?”

생긋 웃으며 보이는 반응에 이중호는 진저리를 쳤다. 이런 여우 같은 놈의 매니저를 하겠다고 바쳤던 몇 년의 인생이 아깝다며 오버를 하기도 했다. 강해건은 그저 웃으며 잠깐의 평화로움을 즐겼다. 정말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85.

“어? 실장님 오셨어요?”

퇴근한 한서림이 반갑게 인사를 했고, 그에게서 풍기는 미미한 페로몬 향에 강해건은 살짝 두통을 느꼈다. 너무 달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페로몬 샤워를 시켜주기 위해 욕구 핑계를 대며 섹스했던 날부터 한서림은 페로몬을 완전하게 갈무리하지 못했다. 주치의는 임신의 영향이라고 했다.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두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달콤하기만 했던 한서림의 페로몬에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끼는 것인지 의아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한 대표님.”

“네. 잘 지내셨어요?”

“저야 늘 똑같죠. 몸은 좀 어떠세요? 아, 임신 축하드립니다. 소식 들었어요. 그런데 이거, 빈손으로 와서 민망하네요. 애기 태어나면 양손 무겁게 올 테니까 서운해하지 마시고요.”

“아닙니다. 서운하긴요. 저야말로 주말에 오셨을 때 인사도 못 해서 죄송합니다.”

“아유, 임신하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던데. 그럴 수도 있죠. 주변에 임신했던 남자 오메가 형이 있어서 얘기만 들었는데도 고생스럽더라고요. 다 이해하니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마세요.”

확실히 여성형 오메가나 베타와 달리, 신체 구조상 남성형 오메가의 임신은 위험도 높고 고된 일이었다. 다만, 남성형 오메가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형질이 뛰어난 탓에 일부러 남성형 오메가와 결혼하려는 족속들이 있었다. 강 회장도 그런 추악한 심보로 정혼을 진행한 거였다.

“강해건 씨, 왜 그럽니까. 어디 아파요?”

한서림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지며 길게 울렸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을 뿐이었는데, 뇌가 찢어질 것 같은 두통이 들이치고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한 페로몬 폭주 전조 증상이었다.

“나가. 둘 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끔찍한 두통이었다. 이중호는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강해건을 보며 119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뇨, 119가 와도 소용없어요. 정 박사님이 전화 받으시면 지금 당장 와달라고 말씀해주세요. 강해건 씨 위급상황이라고.”

한서림이 ‘정 박사님’이라고 저장해 둔 번호에 통화 버튼을 누른 후 이중호에게 넘겨주었다. 이중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상대방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공격적으로 변한 페로몬에 인상을 찌푸린 한서림은 본능적으로 벌벌 떨리는 몸을 하고서도 강해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안 늦었어요. 지금이라도 각인하면,”

“나한테 손대지 마.”

강해건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지는 한서림의 손을 기분 나쁘게 탁 쳐냈다. 페로몬 폭주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겁 없이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당장 꺼지라고!”

한서림이 고집스럽게 버틸 것 같아서, 강해건은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도 페로몬이 폭주하기 시작하면 한서림이 다칠 텐데, 공포에 질려서도 도망가지 않는 한서림 때문에 깨질 듯한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강해건!”

“씨발,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도망치듯 거실을 벗어나는 강해건의 손목을 한서림이 잡아채자마자 난폭하게 뿌리쳤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한서림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각인하면 괜찮아지잖아!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울먹임을 듣는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강해건은 이를 악물고 손을 올렸다. 당장 한서림을 내보내야 했다. 짝,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안쓰럽게 일그러진 얼굴이 돌아갔다.

“나를 얼마나 더 개새끼로 만들려고.”

“…….”

“형, 당장 한서림 끌어내.”

정 박사와 막 통화를 끝낸 이중호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혐오를 드러냈다. 다행히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미친 새끼. 임신한 사람을…….”

한서림은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체격이 남다른 이중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쾅, 문이 닫히자마자 힘겹게 버티고 서 있던 강해건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부드러운 뺨에 상처를 낸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맞은 사람은 정작 한서림인데, 강해건은 제가 더 아파서 어쩌지를 못했다.

손까지 올렸으니 재고의 여지가 없다.

한서림과는 이제 정말로 끝이다.

***

“대표님, 괜찮으세요?”

아무리 베타라고 해도 이중호는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강해건이 한서림의 뺨을 때렸을 땐 정말로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식은땀으로 범벅인 강해건만큼이나 한서림도 몸을 벌벌 떨면서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베타인 저만 멀쩡했으니 원인은 페로몬 때문이었을 것이다.

“네, 괜찮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깥 공기를 흡입한 후에야 한서림의 비정상적인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이중호는 강해건의 극단적이었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미처 몰랐는데, 정 박사와의 통화가 떠오르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한서림이 연결해준 전화에서 정 박사는 10분 안에 오겠다고 했고, 다급한 목소리로 근처에 오메가가 있다면 1초라도 빨리 대피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한서림은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각인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로 벌벌 떨면서도 한서림은 강해건을 붙잡으려고 했다. 알파나 오메가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강해건이 한서림을 지키기 위해 손을 올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정 박사에게 경고를 들었음에도 한서림의 버티려는 행동 때문에 이중호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건이는…….”

“정 박사님이 10분 안에 오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럼 우선 괜찮을 겁니다.”

차마 이게 무슨 일이냐는 질문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서림의 빨개진 뺨이 부풀어 오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슬쩍만 봐도 꽤 아파 보였다. 연기를 할 때처럼 힘 조절을 하든가 적당히 위협만 할 것이지, 강해건은 진짜 뺨이 부어오르고 시뻘게지도록 세게 때렸다. 아무리 한서림을 내보내기 위함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때릴 일인가 싶어서 씁쓸했다.

“잠깐 앉아 계세요. 금방 가서 얼음이라도 사 올게요.”

어느 정도 진정한 한서림을 아파트 단지 내 벤치에 앉혔다. 뺨이 부어오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고, 잘못 맞은 것인지 입술도 터져서 피가 맺혀 있었다.

“얼음……이요?”

“많이 부어오를 것 같아서요. 여름이라 편의점에 얼음도 따로 팔 거예요. 약국도 들러야 할 것 같고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

“혹시 배는 괜찮으세요? 불편함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아예 병원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붉게 물들어 붓고 있는 뺨을 하고도 침착한 한서림에게 혀가 내둘러졌다. 침착하고 차분하다 못해서 남이 맞은 것처럼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중호는 얼떨결에 챙겼던 한서림의 휴대폰을 돌려주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파트 단지 내에 편의점과 약국이 있었다.

이중호는 약국에서 입술에 바를 약을 사고, 편의점에서 얼음을 사고, 그냥 볼에 대면 너무 차가울 것 같아서 수건도 함께 구입했다.

강해건이 식은땀을 과도하게 흘리며 극한의 두통을 호소하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재작년까지는 적어도 1년에 두어 번 정도는 어렵지 않게 봤던 모습이었다. 작년에야 활동을 많이 안 해서 붙어있는 시간이 적은 탓에 한 번밖에 못 봤으나, 그때마다 강해건은 이중호를 내쫓고 집에 틀어박혔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강해건은 주치의를 불렀다며 번번이 거절했다. 너무 걱정돼서 강유건한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극우성 알파라서 그런 거라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만 들었다.

해건이 [형 오느 한서림ㅁ 집에 못들ㄹ어오ㅗ게해]

짧은 진동이 느껴져서 확인한 휴대폰에는 오타가 난무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오늘 한서림을 집에 들여보내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아까의 상황만으로도 일단 두 사람을 만나게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서림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도 강해건의 곁에 있으려고 하고, 강해건은 폭력까지 행사해서 내쫓았으니까.

“아, 정말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주치의가 온다고 해도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던 강해건이 걱정되었다. 억지로 하게 된 정혼이라고 해도 강해건이 진심으로 한서림을 사랑하는 게 느껴져서 내심 다행이다 싶었고 보기 좋아서 뿌듯하기도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짧은 사이에 한서림이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봐 이중호는 뛰다시피 걸음을 움직였다.

86.

“아프지는 않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한서림은 휴대폰 카메라로 제 모습을 확인하며 무감한 얼굴로 입술에 약을 발랐다. 오히려 옆에 앉아 있는 이중호가 대신 아픈 것처럼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얼음 팩을 수건에 감아서 건네주자 한서림이 고맙다고 말하며 받아들어 볼에 댔다.

“오늘은 호텔 잡아드릴게요. 호텔에서 쉬세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눈동자가 이중호를 응시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기 넘치게 반짝반짝거렸던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굳이 억지로 찾아보려고 한다면 상처 혹은 체념, 죄책감, 그런 류의 감정이었다. 그마저도 한서림은 사치인 것처럼 비워내려고 했다.

“해건이한테 메시지가 왔는데, 한 대표님 들여보내지 말라고 해서요.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중호는 강해건의 행동을 이해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한서림에게 말을 꺼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괜히 강해건을 두둔했다가 한서림의 화가 깊어지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그러나 한서림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중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압니다. 실장님께서도 강해건 씨를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강해건 씨가 아까 그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 혹시라도,”

“아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세요. 제가 해건이 놈 한두 해 보나요? 해건이 데뷔 직전부터 지금까지 제일 오래 옆에 있었던 사람이 접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