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건에게서 대답이 없자, 한서림은 여전히 장어를 쌓아 올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시선은 당연하게도 장어에 고정한 채였다.
“아직. 보기만 해도 벌써 질리네요.”
“그래도 같이 먹어요.”
“…….”
“아, 나랑 같이 먹는 거 불편하면 나는 들어가서 먹어도 됩니다. 주방에서 먹어도 되고요.”
“……혼자 다 먹겠다고, 다 먹을 수 있다더니.”
“그러기에는 양이 너무 많잖아요.”
강해건이 노골적으로 비아냥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서림은 접시에 양념 장어만 잔뜩 탑을 쌓아서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어디 갑니까.”
강해건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네? 아, 나는 주방에서 먹으려고요. 거기 세팅해둔 식탁에서는 강해건 씨가 편하게 먹어요. 요리 가까운 곳이 편하잖아요.”
“강 회장이 나 먹으라고 식탁까지 챙겨 보낸 것 같아요?”
“당연히 배 속의 아기 먹으라고 그러셨겠죠. 그런데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리가 먹는 건데. 먹는 사람들끼리 편한 게 우선이죠.”
“됐고. 여기서 먹어요. 불편해도 참아줄 테니까.”
한서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옅게 미소를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건이 불편함을 참는 건 살짝 마음에 걸렸으나,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며 먹는 것보다는 확실히 요리가 가까운 곳에서 먹는 게 좋았다. 양념 장어를 먼저 먹으면서 다음에는 무얼 먹을까 눈으로 먼저 고를 수도 있고.
기꺼운 마음으로 다시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해건이 뒷덜미 옷깃을 잡아채더니 한서림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를 빼앗았다.
“여기서 먹으라니까 어디 가요.”
“……셰프님한테 주문하러요.”
“진짜 가지가지 하네. 와서 주문받아요.”
강해건은 짐짓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읊조리더니, 주방에서 대기 중이던 셰프를 호출했다. 셰프가 다가오는 사이, 거실에 세팅된 테이블에 한서림의 접시를 올려두고, 앉으라는 듯이 눈짓했다. 한서림은 이유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숨기며 강해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떤 걸로 준비해드릴까요?”
“치즈 많이 넣은, 아주 느끼한 크림 파스타랑 쌀국수 부탁드립니다. 쌀국수는 청양고추 많이 넣어서 칼칼하게 해주세요. 고수는 넣지 마시고요. 아, 스테이크도 미디움 레어로 구워주세요.”
“미디움 웰던으로 준비하세요. 핏기는 아예 안 보이게. 내 거는 미디움 레어로 하고.”
남이 먹을 스테이크의 굽기를 멋대로 변경한 강해건을 불만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무참히 씹혔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는 사람이 지금은 무시한다시피 했다. 아마도 셰프들이 서정 호텔 뷔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서정 그룹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여느 재벌가처럼 서정 그룹 역시 고용인들에게 비밀 유지 계약서를 작성하게 할 것이기에, 강해건도 불편한 심기를 굳이 숨기지 않는 것일 테다.
“네.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셰프가 주방으로 돌아가고, 한서림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져 있는 양념 장어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장어를 씹느라 볼록 튀어나온 볼에도 불만이 서려 있었다.
“나 원래 스테이크 먹으면 미디움 레어로 먹습니다.”
“임신했을 때 날 거 먹고 탈 나면 약도 못 먹는다던데, 왜 기본 상식도 없는 사람처럼 굴면서 피곤하게 하지.”
아무렴 서정 그룹에서 나왔는데, 날 거 먹었다고 탈 날 만한 재료를 가져왔을까.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가장 좋은 신선한 재료를 가져왔다는 걸 알 수 있기에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한서림은 조용히 장어와 함께 씹어 삼켰다.
“일일이 신경 쓰는 거 귀찮으니까 그런 건 좀 알아서 해요, 거슬리게 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는 ‘무사 출산을 위한 최대한의 협조’에는, 페로몬 공급만 해당하니까.”
싸늘한 일갈에 한서림은 방금 삼킨 장어가 목에서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강해건은 온 인내를 다해 참아주고 있을 테니까.
“미안해요.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주의할게요.”
강해건의 좁혀진 미간과 냉정한 목소리와 별개로, 그의 페로몬은 포근하고 안락했다. 형질이 좋을수록 페로몬에 드러나는 감정 컨트롤이 능숙하지만, 강해건은 완전하게 컨트롤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표정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페로몬만 감지했더라면, 강해건이 저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한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해건은 태아와 한서림에게 안정적이고도 완연한 애정의 페로몬을 쏟아부어 주고 있었다. 다른 알파나 오메가가 곁에 있었더라면 불쾌하고 숨 막힐 만큼의 짙은 페로몬이었다.
“…….”
그 순간이었다. 주방에만 있던 셰프가 갑자기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한서림은 놀라서 빠르게 눈을 깜빡였고, 강해건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저 셰프, 오메가예요?”
“아뇨. 알파입니다. 계속 숨을 못 쉬겠다면서 식은땀을 흘린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거부 반응 때문인 것 같은데……. 요리는 제가 혼자 준비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셰프는 강해건의 눈치를 보면서도 구체적으로 상황을 알렸다. 강해건은 귀찮다는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가서 요리나 하라는 듯이 셰프에게 주방을 눈짓했다. 확실히 강해건이 페로몬을 심할 정도로 풀고 있긴 했다. 섹스가 동반된 것도 아닌데, 마치 페로몬 샤워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한서림은 잠시나마 입덧을 잊을 수 있었다.
“회사는 언제까지 나가려고요.”
“신향수 출시가 다음 달 초라서 이번 달 말까지는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신향수 출시에는 신경 써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요. 그래서 열흘 정도 더 나가고 장기 휴가를 낼 생각입니다.”
“일주일 안에 정리하고 출산할 때까지 휴가 내요.”
독단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배 속의 태아를 생각하면 합리적인 요구였다. 선택사항이긴 했으나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유급휴가이기도 하고.
한서림은 머릿속으로 곰곰이 스케줄을 체크했다. 이미 공장에는 작업이 들어간 상태였고, 그저께 니콜라스와 제이든이 신향수를 들고 아예 한국으로 출장을 와준 덕분에 준비가 더욱 수월해졌다. 실상 이번 주말에 포장까지 완료되고 온라인 마케팅이 시작되는 터라, 다음 주 월요일에 최종 확인하고 컨펌을 해주면 굳이 출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월요일에만 출근하면 될 것 같아요. 나머지는 재택으로 가능합니다.”
니콜라스와 제이든이 토요일에 뉴욕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내일과 모레 출근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쉽게 됐다. 그들도 한서림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서운해하지는 않을 거였다. 만나자마자 살이 왜 이렇게 빠졌느냐며 걱정부터 앞세웠던 이들이었다. 임신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도 했고. 제이든은 임신한 반려 오메가 이야기를 하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공유해주기도 했다.
“요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탑으로 쌓았던 양념 장어를 다 먹고 다른 종류의 요리들도 조금씩 맛보고 있던 차였다. 셰프가 파스타와 쌀국수, 스테이크를 내왔다. 한서림의 눈이 반짝였다. 일단 크림과 치즈로 범벅이 되어 있는 파스타부터 포크에 돌돌 말아서 입에 넣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게 소름 끼치는 느끼함이 행복했다. 그렇게 약 40분 정도 식사를 더 했고, 한서림은 아주 오랜만에 포만감을 느꼈다.
“내 집에 타인이 오래 있는 거 싫어합니다. 10분 안에 정리해서 나가세요.”
강해건의 지시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들어왔다. 원래의 거실과 주방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서림은 음식 냄새를 환기시키기 위해 베란다 통유리 창을 열었다.
낮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해가 뜨겁더니 고층의 밤은 그나마 선선했다. 이제 곧 7월이 끝나고 8월이 될 것이다. 강해건과 2월 초에 재회했는데,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최근 6개월 사이에 더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배도 부르고, 몸도 노곤하니, 이대로 침대에 누워 아침이 올 때까지 푹 자고 싶었다. 물론 내일이 되면 입덧 때문에 또 먹지 못해서 고생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풍족하게 마음껏 먹었으니 괜찮다. 강해건이 과할 정도로 진한 페로몬을 식사하는 내내 덕지덕지 발라준 덕분이었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배 채웠으면 침실로 가서 옷 벗어요.”
나른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적나라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네?”
“임신했다고 내가 욕구까지 참아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계약서에 있는 주 2회 이상 섹스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
“한 달이나 안 했더니, 아무 구멍에라도 박고 싶어서요.”
일부러 저급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강해건은 복수하는 방법을 모른다.
82.
‘섹스 중에 받는 페로몬 샤워가 혈액순환에도 도움 되고, 입덧도 완화시켜 줄 겁니다. 단, 절대 무리한 체위나 거친 동작은 안 되는 거 명심하고요.’
주치의가 했던 말이 상기되었다. 하지만 한서림은 정체를 밝힌 이후 강해건과의 섹스를 꿈도 꾸지 못했다.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섹스할 수 있을 때 각인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으면서도,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강해건에게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씻고 올게요. 오늘 땀을 좀 흘려서요.”
강해건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욕실로 들어가면서 한서림은, 강해건이 제 몸을 원한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강해건의 섹스 스타일은 몹시 거칠고 많이 자극적이었다. 강압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막 다루는 게 취향인 것처럼 난폭하고 사납게 하반신을 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말을 전달할 생각은 없었다.
한서림에게는 배 속의 아이도 너무 소중하지만, 강해건의 폭주를 멈춰주는 게 우선이었다. 타이밍을 잘 보고 있다가 강해건이 흥분과 쾌락 속에서 날뛸 때 각인을 시도할 예정이었다. 각인이 철저하게 알파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일이라고 해도, 강해건은 노팅 중에도 제 발정 페로몬에 확연한 반응을 보였으니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정 안되면 일방각인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반쪽짜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는 모르겠으나,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방각인을 해야 할 경우에 대해 찾아본 관련 논문에 의하면, 강해건이 저한테 하는 일방각인보다는 제가 강해건에게 하는 일방각인이 더 효과적이었다.
한서림은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오늘 강해건에게 각인하리라는 견고한 다짐을 했다.
“아, 으응…….”
거칠게 달려들 것처럼 욕정을 드러내던 강해건은 한서림을 엎드리게 해놓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냥, 하으, 넣어도…….”
“닥쳐요.”
위압감 서린 나른한 목소리가 관능적이었다. 강해건의 높이 솟은 코가 엉덩이 사이에 박혀 있었고 자극적인 혀는 구멍을 녹여 먹을 것처럼 핥아댔다. 한서림은 강해건의 혀가 질척하고 외설적이게 움직일 때마다 다리를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행위는 난생처음이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기이한 쾌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고, 오메가 액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발기한 채로 덜렁거리는 성기는 벌써부터 사정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강해건은 유일하게 살집이 있는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할짝할짝 핥다가도 오메가 액을 전부 빨아먹을 것처럼 강하게 흡입하기도 했다. 혼자만 발가벗은 상태로 치부를 보이고 있는 행위가 치욕스럽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한서림은 간질간질한 쾌감에 오히려 격렬한 삽입을 원하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아, 흐으, 응…….”
“왜 이렇게 보채.”
찰싹, 엉덩이에서 아슬아슬한 성감이 퍼졌다. 차라리 전처럼 세게 때리면 고통인지 쾌감인지 헷갈리기라도 할 텐데, 강해건은 한서림의 몸을 흐물흐물하게 녹일 것처럼 강도를 조절해서 흥분이 고조될 세기로만 엉덩이를 때렸다. 왜 한 번도 안 했던 짓을 지금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농염한 혀와 손길에 진심으로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흐, 읏……!”
눅진한 혀가 지나간 자리에는 손가락이 자리했다. 강해건이 얼굴을 떼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이제 삽입하겠구나, 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강해건은 길고 곧은 손가락 두 개를 넣고 한서림의 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뒤틀리며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하아, 손, 안 해도 되니까…….”
찰싹, 또 한 번 엉덩이에 가해지는 아찔하고 음험한 손길에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피부와 내벽에서 소용돌이치는 상냥한 자극에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닥치라고 했는데. 그렇게 내 자지가 먹고 싶어요?”
“으, 흐응…….”
“왜 좆에 환장한 사람처럼 굴어.”
은밀한 치부를 침범한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나 있었고, 내벽을 꼼꼼하게 더듬으며 민감도를 높이고 있었다. 난폭하고 사납게 몰아붙이는 것도 아닌데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몽롱해서 현기증이 났다.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짙은 페로몬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병원에는 분명히 혼자 갔었으니 강해건이 진료 내용을 알 리가 없는데, 환자의 진료 내용을 타인에게 발설하는 것은 불법인데, 어째서 강해건이 주치의의 말을 함께 듣고 행동을 조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거야말로 명백한 착각이었다. 주치의의 말을 함께 들었다고 해도 강해건이 저를 배려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쌓인 성욕만 해결하면 될 일이다. 어쩌면 그 성욕을 저한테 풀어야 하는 것마저 불쾌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행위가 당황스러웠다.
“손장난으로는 만족이 안 되나 봐요? 딴생각하네.”
“하읏…….”
느릿한 손길로 내벽을 매만지던 손가락들이 단번에 쑥 빠져나갔다. 상실감이 차오르며 아쉽다는 듯이 눅진하게 풀린 구멍이 뻐끔거렸다.
“아으……!”
순식간에 한서림의 몸을 바른 자세로 뒤집은 강해건이 쭉 올라와 한서림의 머리 양쪽으로 다리를 벌리고 무릎으로 지탱했다. 그는 옷을 벗는 대신, 바지와 속옷을 살짝 내리고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한서림의 입술에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비벼졌다.
“적셔요. 찢어지기 싫으면.”
은밀한 곳을 혀로 핥고 입으로 빨고 손가락까지 넣었으면서 강해건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거대한 성기를 보자 정말로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느껴졌다. 한서림은 기꺼이 입을 벌려 귀두를 빨아서 적시고, 혀를 내어 정성스럽게 기둥을 핥았다. 어떻게 해서든 저보다 강해건을 더 흥분하게 만들어서 이성을 잃은 틈을 노려야 했다. 절정에 다다르기 직전에 발정 페로몬을 터트리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가소롭다는 말과 함께 비웃음이 날아왔다. 한서림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구한 얼굴로 강해건의 성기를 입에 문 채 시선을 들었다. 색소가 옅은 회색빛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성감이 확 고조되는 기분이었다.
“다리 벌리고 허벅지 잡아요.”
평소에 펠라티오를 할 때는 강압적으로 목구멍 끝까지 처넣고 허리를 흔들던 사람이, 말 그대로 이제 막 적시기만 했는데 성기를 물렸다. 또 딴생각을 하다가 걸리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아서 한서림은 강해건이 시킨 대로 다리를 벌린 후 오금을 잡았다. 강해건의 적나라한 시선이 가장 은밀하고도 사적인 곳에 닿았다.
“하, 으응…….”
삽입하는 순간의 쾌감이 몹시 강하다는 걸 한서림도 강해건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한서림은 강해건이 강하게 퍽 박아 넣는 순간 사정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강해건은 귀두로 입구를 비비더니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주어 꾹 눌렀다. 잔뜩 풀어진 구멍은 주름을 넓히며 강해건의 귀두를 손쉽게 삼켰다. 강해건의 눈은 오로지 연결되는 부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성기가 조금 더 밀려들어 왔다가 살짝 나가고, 조금 더 많이 밀려들어 왔다가 살짝 나가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아아, 흐, 읏…….”
“후우…….”
단번에 뿌리 끝까지 확 처박는 삽입만 쾌감이 강한 줄 알았는데, 공간을 확보하며 느릿하게 밀려오는 삽입도 만만치 않았다. 강해건의 성기 모양대로 내벽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의 성기가 들어오면 민감하게 달라붙어서 자리를 만들고, 다시 빠져나갈 때는 못 나가게 붙잡는 것처럼 달라붙었다. 채워질 듯 채워지지 않는 애타는 흥분은, 강해건이 반복된 움직임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 뿌리 끝까지 넣고 나서야 충만하게 채워졌다.
“아, 흣! 흐, 으응……!”
오늘의 섹스는 전반적으로 관능을 닮아 있었다. 강해건은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한서림을 천천히 절정의 나락으로 떠밀고 있었다. 느리게 들어온 성기가 극점을 꾹 찌른 후에는 허리를 원으로 돌리며 뭉갰다.
난폭하고 폭력적인 움직임이 없었는데도 한서림은 평소와 같은 쾌락을 느끼며 허우적거렸다. 강해건의 성기를 감싸고 놔주지 않는 내벽의 여린 점막뿐만 아니라, 그가 손대지도 않은 온몸이 성감대가 된 듯이 예민하게 퍼덕거렸다. 언제나 사납고 격렬한 몸짓만 받아낸 탓에, 강해건이 이렇게 부드럽게 섹스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아아, 읏, 흣, 아, 아!”
한껏 달아올라 민감해져 있는 상태에서 강해건이 속도를 높였다. 갑작스럽게 빨라진 속도에 한서림이 자지러지는 신음을 뱉어내며 강해건의 목을 끌어안았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강해건이 깊이 삽입하는 게 아니라서 한서림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았다. 대신 안달이 났다.
“후으, 후…….”
흐트러져서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쏟아졌다. 섹스하는 내내 한서림에게 달라붙어 있는 페로몬은 페로몬 샤워를 시켜주다 못해서 페로몬에 질식해 죽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온몸이 강해건의 페로몬으로 범벅이었다. 알파의 페로몬 샤워를 받으면서 제 페로몬도 개방해 서로의 페로몬이 융합되면 훨씬 안정적이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탓에 본능적으로 페로몬 샘이 열리려고 했다.
“하아……, 페로몬 풀어요.”
정통으로 귀에 꽂히는 낮은 음성에 소름이 돋았다. 기회는 지금이다.
내내 참고 가둬두었던 발정 페로몬을 확 터트리자, 강해건이 오싹한 신음을 뱉어내며 한서림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뿌리 끝까지 처박힌 성기에서 정액이 쏟아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한서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해건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아니, 깨물려고 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입술이 목덜미에 닿기도 전에, 큼지막한 손이 가는 목을 틀어쥐고 숨통을 막았다.
83.
“각인, 안 하면…….”
숨통이 조여진 상태라 힘겨워하면서도 한서림은 할 말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이었다.
“각인해야, 폭주를, 멈출, 수 있…….”
“누가 그걸 몰라요?”
웃음을 머금은 다정한 말투와 목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서슬 퍼런 눈동자가 한서림을 잡아먹을 듯이 위협했다.
“근데 어쩌지, 너무 좆같아서 너 따위랑은 죽어도 각인하고 싶지 않은데.”
짓씹는 말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목을 조르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이 가해졌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발작 같았던 비정기적 발정기에 시달릴 때, 만약 저한테 한 회장과 무언가를 할 경우 치료된다고 해도 고민됐을 테니까. 그대로 살면서 괴로워하는 게, 끔찍한 인간과 무언가를 해서 치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하물며 강해건은 각인인데 오죽할까.
“그냥, 치료라, 고 생……, 각하고…….”
시야가 점점 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강해건이 너무 걱정되는 탓에 그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각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페로몬 폭격을 받는 것도, 평생 증오와 원망을 받으며 사는 것도, 전부 다 괜찮으니까 그저 강해건에게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
“…….”
“내 애를 임신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죽여 버렸을 거니까.”
성기를 빼낸 강해건이 한서림을 내팽개치듯이 틀어쥐었던 목을 놔주었다. 갑작스럽게 산소가 들이치는 탓에 한서림은 힘겹게 기침을 토해냈다. 얼마나 감정을 담아서 세게 쥐었으면 목의 살갗이 따갑고 얼얼했다.
“내 방에서 나가요.”
산소가 차단되었던 뇌는 몇 번이고 기침을 하고 크게 호흡을 반복한 후에야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점멸되던 시야도 선명하게 돌아왔다. 강해건에게 졸려졌던 목에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안 나가면 내가 나가죠.”
옷을 추스른 강해건이 아예 아파트 밖으로 나가려는 기색에 한서림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인 현기증으로 휘청거렸으나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만약 이번에도 강해건이 사라지게 된다면, 다시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한 번 더 그가 떠난다면, 이제는 그를 데려올 명분도 없었다.
“내가, 나갈게요. 그리고 각인은 다시 한번 생각,”
“한서림 씨.”
얼마나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그저 이름만 불러졌을 뿐인데 강해건의 진심 어린 분노가 심장 깊은 곳까지 박혀왔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각인 얘기 꺼내면.”
짓씹는 듯한 말이 난자했다.
“그땐 정말 죽여 버린다.”
살기를 띤 회색빛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내가 각인하자고 할 때까지.”
“…….”
“닥치고 기다려.”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분노를 참아낸 강해건이 한서림을 방 밖으로 쫓아냈다. 강해건이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지금 이 순간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쾅 소리 나게 닫히는 문에 한서림은 문득 서러워졌다. 한서림이 저 좋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미안함이 너무 커서 죄책감에 제가 사죄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러는 건데. 몇 년이나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구원해준 감사함에 저도 그걸 주고 싶을 뿐인데. 사랑하니까 그의 것이 아니었던 지옥에서 꺼내주려는 것인데.
그런데 왜…….
아무리 증오가 깊어서 저를 저주한다고 해도 필요에 따른 이용조차 하지 않으려는 강해건을 이해할 수 없어서 심장이 저렸다.
***
강해건이 일 때문에 이중호를 집으로 불렀지만, 한서림은 방에 틀어박혀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목에 희미한 멍 자국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중호가 멍 자국을 보게 되면 강해건을 의심하게 될 텐데, 저 때문에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제가 예의 없고 경우 없는 사람이 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월요일에만 회사에 가려고 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출근은 불가능할 뻔했다. 한여름에 목 티를 입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 멍 자국은 월요일, 출근할 때가 돼서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혹시 눈썰미 좋은 사람이 있을까 봐 한서림은 깃이 높게 올라오는 디자인의 셔츠를 골라 입었다.
“그럼 대표가 바뀌는 거예요?”
불안해하는 직원들 중 김 팀장이 총대를 메고 물었다.
“그렇다기보다는 한국 지사 담당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 뉴욕 본사를 니콜라스가 맡아주고 있는 것처럼, 유럽 지사에도 전부 경영 담당이 따로 있습니다.”
한서림은 출산 전까지 장기 휴가를 내는 대신, 한국 지사를 담당할 전문 경영인을 구하기로 했다. 주말에 강유건에게 연락해서 부탁했는데, 강유건은 임신 소식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이틀 만에 그럴싸한 후보 세 명의 이력서를 받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강유건의 추천인만큼 보장된 이들이겠지만, 오늘 인터뷰를 하기로 했으니 직접 만나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