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42)

“내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제야 한서림이 추가로 적었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무사 출산을 위한 최대한의 협조

당시에는 이런 조항을 추가하는 한서림을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다. 속으로 비웃기도 했다. 그리고 한서림 역시 빠른 이혼을 위해 추가한 조항이라고 여겨서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조항이 한서림에게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무사 출산을 위한 최대한의 협조는, 강해건 씨가 내 옆에서 계속 페로몬을 공급해주는 겁니다.”

“…….”

“장소가 서울이든 여기든 상관없습니다. 각인부터 해요. 5개월 후에 출산하고 나서는 강해건 씨가 나를 죽이든 어쩌든 좋으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요.”

한 달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서림은 단단한 심지를 드러내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얼마나 미련하면 임신을 하고서도 자신의 인생까지 강해건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

“죽이는 거고 뭐고, 이제 더는 그쪽한테 아무 감정 없다고 하면. 그래서 단 1초도 그쪽 옆에 있는 걸 참아주기 싫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요?”

비아냥거리는 듯한 냉소적인 말에 한서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무너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어째서 제가 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저의 증오가 깊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확신을 갖고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이 애를 위해서는 안 될까요?”

한서림이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며 조용한 음성을 냈다. 아까에 비해 미묘하게 위축된 모습이었다. 고작 생각해 낸 핑계가 배 속의 아이라는 것은 한서림 스스로 느끼기에도 한심할 것이다. 저에게 먹힐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애는 죄가 없잖아요.”

“핑계가 좋네.”

“강해건 씨가 원치 않는 정혼을 한 이유는, 유건이에게서 볼 수 없는 서정 그룹의 후계자 때문이잖아요. 일주일 내내 틀어박혀서 섹스만 했던 것도, 하루빨리 내가 임신해야 이혼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요.”

그건 한서림을 사랑하게 될 줄 몰랐을 때의 이야기였다. 한서림이 제가 찾아 헤매던 8년 전의 그 오메가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정체까지 알아버린 이상, 이전과 같은 마음일 수는 없었다.

“나를 어떻게 하든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강해건 씨의 괴로웠던 인생을 보상할 수는 없겠,”

“닥쳐.”

한서림이 자책할수록 듣고 있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실만을 이야기하는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 씨발…….”

페로몬 폭주를 일으킨 장본인이 한서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힘겨웠다. 그에게로 향하는 증오가 원망스러웠다.

“원하는 대로 페로몬 줄 테니까, 내 앞에서 한마디도 하지 마. 역겨우니까.”

“…….”

한서림은 그제야 다행이라는 듯이 눈시울을 붉히며 단단한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인데 뭐가 저렇게 좋다고 감격하는 것인지, 강해건은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함께 돌아가 한서림의 곁에서 페로몬을 나눠주고 태아가 잘 자라도록 최대한 협조는 하되, 일말의 빈틈도 보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차갑고 모질게 굴어서, 여기까지 찾아와 각인하자고 하는 한서림의 생각을 바꿔놓아야 했다. 다시는 각인하자는 말조차 입에 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계약서대로 내가 이 아이를 낳으면, 이혼 후에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역겨우니까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말은 흘려들은 것인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태도에 기가 찼다. 동시에 가슴 언저리가 저려서 숨을 쉬는 게 불편했다.

“계약서 쓸 때 알고 사인한 거 아닌가?”

“나는 그럼……, 이 아이를 평생 못 보고 사는 건가요? 내가 낳았는데도? 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한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아직 강 회장에게서 어떻게 벗어나고 한서림과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 방법도 제대로 모색하지 못했는데 기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쓰레기가 되더라도 안전하고 완벽한 대비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잖아요. 이득은 한휘 건설에서 한 회장님이 보시고, 그쪽은 서정 그룹의 후계자를 낳아주는 거. 왜 이제 와서 새삼 딴소리를 하지? 임신하니까 없던 마음이라도 생겨요? 이래서 지면 계약서를 써야 한다니까. 구두 계약은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조금 더 모질고 독하게 말해서 제대로 상처를 줘야 하는데, 정작 한서림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니 마음먹은 것에 반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더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연기해야 했다.

강해건이 한서림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한서림에게 상처를 주는 것밖에 없었다. 각인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도록.

서로에게 닿지 못한 감정의 파편들은 충돌하고 엇갈리며 여전히 공중을 부유했다.

79.

***

강해건은 거실 소파에 무감한 얼굴로 앉아서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요즘 최대 이슈인 모주원과 그의 부친이 벌인 행각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오늘로써 한서림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불쾌지수를 높이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터라 출퇴근하는 한서림의 건강이 걱정되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오기 전까지는 출근하려고 합니다. 원래 이번 달 초에 신향수를 출시하려고 했는데 다음 달 초로 미뤄졌거든요. 그래서 이번 주는 조금 바쁠 것 같아요.’

일요일 저녁에 페로몬을 공급받으면서 한서림이 했던 말이었다. 남성형 오메가는 임신과 동시에 출산까지 법적으로 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는데, 일이 뭐라고 미련스럽게 구는지 답답했다.

‘나한테 일일이 얘기하지 말아요. 관심 없으니까.’

‘페로몬을 흡수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강해건 씨 눈앞에서 최대한 안 보일 수 있다는 걸 말한 겁니다. 그조차도 불편하다고 하면 나는 내 집에서 지내고, 약속을 정해서 페로몬 받을 때만 올게요.’

‘그 집 정리해요.’

‘네?’

‘그 범죄자 새끼가 머물렀던 집 정리하라고요. 뭘 믿고 그 집으로 다시 간다는 말을 해요?’

그때도 뉴스를 틀어놨었기에 모주원의 뉴스가 한창 나오고 있었고, 이미 그 전날 한국에 오자마자 한서림도 이미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 말도 안 된다며 놀라고 당황했던 한서림의 표정에 질투가 나서 돌아버릴 뻔했다. 그런 위험한 새끼를 곁에 두고 살아왔으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무구한 얼굴에는 놀라움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장 먼저 담겼다.

‘답답해도 이 집에 있어요. 내 옆에 있으면서 내 원망과 증오 다 받아야지. 비겁하게 어딜 도망가려고 해.’

싸늘하게 뱉어낸 말은, 한서림에게 갔다가 부메랑이 되어 강해건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다. 상처를 주려고 시도하는 만큼 강해건 역시 같은 크기의 상처를 받고 있었다.

‘도망갈 생각 없습니다. 혹시라도 강해건 씨가 불편할까 봐 한 말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집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이번 주 내에 정리하도록 해요. 필요한 물건은 여기로 다 가져와서 챙길 건 없겠지만, 이왕이면 그 집에 있던 거 내 집에 들이지 말고요.’

알았다면서 착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서림은 이후로 말이 없었다.

강해건은 혹시라도 한서림이 다시 각인 이야기를 꺼낼 경우, 어떻게 해야 오만 정을 다 떨어트릴 수 있는지 해결책을 강구하느라 한서림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내내 긴장 상태였다. 사실 페로몬으로 위협하는 게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지만, 한서림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는 이상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아니, 어쩌면 페로몬으로 위협하는 것이 한서림의 마음을 닫는 데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도무지 페로몬으로 겁박하는 것은 내키지도 않고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한서림은 두바이에서 돌아온 후부터 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서림이 비슷한 뉘앙스만 내비쳐도 강해건이 잘라낸 탓이었다. 한서림의 패기를 생각해보면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참지는 않을 성격인데, 애달픈 표정으로도 못 이기는 척하며 입을 다무는 걸 봐서는 마음이 바뀌고 있는 듯했다. 희생을 감내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현실이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최 팀장 [지금 자택으로 출발했습니다.]

강해건이 한서림에게 붙여놓은 경호 팀장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서림은 경호원의 차를 타고 출퇴근하라는 강해건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기사가 운전해주는 차가 불편하다고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오히려 편하게 출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최 팀장에게 들은 바로는, 한서림은 경호원들을 강유건이 배치해 두었다고 알고 있단다. 강해건도 그 부분에 대해 굳이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두바이에 따라왔던 강 회장의 개들은 한국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강 회장에게 전부 치우게 했다. 임신 사실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강 회장은 강해건의 무례한 요구마저도 흔쾌히 들어줄 기세였고, 임신한 오메가에게 좋다는 약들을 집으로 보내왔다. 그것들은 한서림이 발견하기도 전에 강해건이 전부 처분했다. 친아들에게도 그런 약을 먹였던 인간이라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한서림에게는 어떤 약을 먹이려 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확인해 봐요.]

최 팀장 [네. 알겠습니다.]

강해건이 지시하는 모든 일들은 경호팀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처럼 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아직까지 한서림이 먹고 싶다는 걸 말한 적은 없지만, 회사에서 점심도 대충 때우는 걸로 보고를 받았기에 신경이 쓰였다. 점심시간에 오메가 전문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는다는 최 팀장의 말에 그나마 안심했으나, 이렇게까지 못 먹는 걸 보면 걱정이 됐다. 배 속의 아이도 걱정이지만, 그보다는 한서림의 건강이 심히 걱정되었다.

한서림이 도착하기 전에 페로몬을 자욱하게 풀어낸 강해건은, 망설임 없이 한서림의 주치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서정 그룹 재단 오메가 전문 병원은 강 회장의 입김이 닿는 곳이라서, 아무리 대단한 의료진이 있다고 해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서림 역시 임신을 확인했던 병원으로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병원의 원장을 매수해뒀다. 다른 배우를 맡지 않고 일을 좀 쉬겠다는 이유로 서정 엔터테인먼트를 퇴사한 이중호는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해본다며 혀를 찼지만, 부탁한 일은 깔끔하게 처리해주었다. 이중호의 출신이 출신인지라 이쪽 일이 더 쉽다고, 강해건한테 미리 받은 축의금 1억이 있어서 올해는 먹고 놀 거니까 처리할 일 있으면 싸게 해줄 테니 연락하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강해건입니다. 오늘도 점심시간에 서림 씨가 다녀갔다고요.”

-네. 입덧이 심해서 음식을 아예 못 먹는 모양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입덧을 완화시키는 약을 처방해드리긴 했는데 한서림 씨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더군요. 다른 방법으로는 관계 시 페로몬 샤워를 받으면 어느 정도 괜찮아지는 오메가 분들이 많습니다. 무리한 체위만 피하시면 되고요. 한서림 씨께도 월요일에 전부 설명해 드렸습니다.

한서림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점점 말라가면서도, 이틀 전에 의사에게 들은 페로몬 샤워에 대한 정보를 강해건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제가 어떤 반응으로 상처를 줄지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서림이 페로몬 폭격을 받아 다칠까 봐 걱정되고 두려운데, 이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한서림이라는 게 서글펐다. 깊은 원망에 화가 들끓어서 죽이고 싶다가도, 절절한 애틋함에 사랑이 흘러넘쳐서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한서림의 비정상적인 페로몬의 발로 역시 페로몬 학대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주체되지 않았다.

엉망이 되어 버린 관계에, 강해건은 문득 울고 싶다는 약한 생각을 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한서림을 제 품에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컨트롤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한서림이 출산하기 전에, 강 회장과 한 회장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용해서 한서림과 아기의 안전을 보장해주어야 했다. 제가 곁에 없더라도 한서림과 아기의 근처에는 사소한 위협조차 얼씬하지 못하도록 무언가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모주원 사건에 한 회장을 엮으려 했으나, 한 회장은 꼬리 자르기를 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강 회장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면 좋을 텐데, 아직까지는 사돈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한 회장과 강 회장뿐만 아니라, 강유건까지 전멸할 수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최 팀장 [서정 호텔 뷔페에 가서 음식들을 보면 먹고 싶은 게 생길 것 같다고 하십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최 팀장은 맡은 일을 훌륭히 소화했다. 두루뭉술한 대답은 한서림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오늘도 생각 없다고 말하기는 미안해서 둘러댄 듯했다. 어제와 그제는 최 팀장에게 저녁 생각이 없다고 했으면서, 집에 와서는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모른 척해주었으나, 최 팀장이 매일 물어보는 탓에 제가 보고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최 팀장 [어떻게 할까요? 서정 호텔 뷔페로 모실까요?]

서정 호텔 뷔페 음식을 꼭 가서만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한서림이 불특정 다수에게 섞여서 같은 음식을 퍼다 먹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싫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한서림의 모든 행동을 제 눈앞에서 행하게 하고 싶은 기이한 소유욕이 더 컸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회사에는 어떻게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 강해건은 두어 번 정도 턱을 쓸다가 최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뇨. 집으로 와요.]

0.

최 팀장 [네. 바로 자택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답장을 확인한 후, 강해건은 잠시 고민했다. 강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 것인지, 강 회장의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 것인지. 갈등은 짧았다. 이왕이면 서정 호텔 뷔페를 통째로 옮겨오는 것이 좋을 테다. 마음껏 골라 먹으라고.

“접니다. 아버지 손주가 서정 호텔 뷔페 요리가 먹고 싶다고 하네요. 임신한 몸이 아니면 데이트 겸 나가서 먹고 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내켜서 말이에요. 괜히 번잡한 곳에 데려갔다가 아버지 손주가 스트레스만 받을까 봐 걱정도 되고요.”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주체를 강 회장의 손주로 잡은 순간부터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강해건은 일부러 한서림의 이름은 한 번도 꺼내지 않고, 강 회장에게 자극적일 만한 손주라는 말만 반복했다. 예상했던 대로, 강 회장은 30분 정도면 될 거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강해건이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강 회장과 이토록 문제없이 수월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건 처음이었다.

***

-경호업체 ‘동행’의 비리가 연일 끊이지 않고 드러나는 중에, 상습적인 성상납에 원정 성매매 의혹을 받던 연예인 A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A씨가 남긴 유서에는 자신이 페로몬에 지배를 받는 오메가인 것을 저주한다고, 강요와 협박에 의한 지옥 같은 삶을 더는 살아낼 자신이 없다는 심경과 함께, 이 같은 일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동행의 부사장 B씨를 지목했는데요. B씨는 현재…….

“라디오 좀 꺼주시겠어요?”

한서림의 부탁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최 팀장이 조용히 라디오를 껐다.

매일같이 뉴스가 업데이트될수록 그간 저질렀던 모주원의 악행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서림은 이 뉴스들이 전부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주원이 그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기업의 돈세탁과 마약 브로커, 연예인 스폰서 알선에 성상납과 성매매까지. 그런데 오늘 뉴스에서는 오메가 연예인의 자살로까지 이어졌다는 소식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왔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서림이었다. 어쩌면 모주원에 대해 가장 모르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8년 전 스물네 살에 뉴욕으로 떠난 이후부터는 서로의 사정을 세세하게까지 알기는 어려웠다. 얼굴을 봐도 1년에 서너 번이었고, 짧은 만남은 즐거운 이야기만 하기에도 부족했으니까.

8년 동안 모주원이 바뀌었던 것일까 생각해 봐도 한서림이 아는 모주원은 악행을 저지를만한 심성이 못 되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어쩌다가 저런 일에까지 휘말리게 된 것인지.

‘걔는 홍콩으로 보내. 계산 잘하고.’

‘김 회장님한테 보낼 애는 따로 있어. 걔는 홍콩이랑 싱가포르로 돌려. 적당한 애 붙여서 보내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서림아,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문득 가족 모임과 임신 사실을 알았던 날 모주원이 통화하면서 했던 말이 상기되었다. 순간적으로 한기가 들이치며 소름이 돋았다. 회사 경호원의 해외 출장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카페에서의 페로몬 압박을 생각해 보면, 모주원이 페로몬을 이용해서 오메가를 다루기는 몹시 쉬웠을 테다. 그 행위에는 강제성이 동반되었을 것이고. 이는 명백한 범죄였다. 어떻게 모주원이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다가도, 제가 몰랐을 뿐 그럴 만한 인간이니까 그랬겠지 싶어졌다. 너무도 손쉽게 바뀌는 마음이 간사했다.

역시 인간은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타인에 대해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저 보여주는 대로만 믿는 걸로도 모자라 개인의 잣대와 기준까지 덧씌워 실제와는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이 보여주는 대로만 알 수 있는 거라고, 그 사실을 이번 모주원 사건을 통해 사무치게 깨달았다.

그렇다면 강해건은 어떨까…….

한서림은 제가 아는 강해건의 모습과 실제 강해건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그 간극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워낙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 짐작하는 게 불가능했다. 강해건은 까칠하고 차갑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다정했다. 입을 험하게 놀리는 순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상냥한 편이었다. 배신감과 증오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끝끝내 여린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심할 정도로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강해건의 마음이 얼마나 썩어서 문드러졌으면, 방패 하나 들고 있지 않은 한서림에게 날카로운 칼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제 죄를 알기에 맨몸으로 칼을 받으면서도 한서림은 상처받을지언정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많이 아플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아…….”

어느새 지하 주차장에 들어선 차량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입구 앞에 정차되어 있었다. 서정 호텔 뷔페에 가고 싶다고 말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입맛이 없는 탓에 많은 종류의 음식을 보면 하나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둘러댄 말에 가까웠다. 그래도 들를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봤는지 성질은 조금 나려고 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그런데, 앞으로는 나한테 뭐 먹고 싶은지 안 물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기대를 하면 실망이 더 큰 법이거든요.”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최 팀장이 허리 숙여 사죄하는 모습에 한서림은 그냥 조용히 들어갈 걸, 후회했다. 괜히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한 꼴 같아서 미안해졌다.

“……서정 호텔 뷔페에 꼭 가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러니까 마치 꼭 가고 싶었던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정말 그 많은 음식들을 보다 보면 먹고 싶은 걸 하나 정도는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에 미련이 남았다.

경호 팀장인 최 팀장은 전용 엘리베이터에 한서림이 타는 것까지 본 후에 허리 숙여 다시 인사했다. 최상층까지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서림은 멍하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강해건을 데려온 후부터 잠은 잘 자고 있지만, 여전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육안으로도 확연히 티가 날 만큼 살이 빠졌다. 대식가에다가 식탐도 많았었는데 이 정도로 식욕이 완전하게 사라진 걸 보면 입덧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서정 호텔 뷔페에 있는 양념 장어가 진짜 맛있는데…….”

중얼거리면서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마자 강해건의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온몸에 휘감기는 페로몬은 온화하고 다정하고 안온했다. 강해건은 저에게 가진 복수심과 다르게 아기를 위해 꽤 열심히 노력해주고 있었다. 마음과 행동을 불일치하게 지내는 게 얼마나 피곤할까 싶었다.

한서림은 강해건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크게 숨을 들이켜며 페로몬을 흡수했다.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서 일었던 현기증과 두통이 순간적으로나마 싹 가시는 듯했다.

“이게……, 다 뭐예요?”

현관을 들어서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한서림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실 한쪽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강해건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아버지가 보내셨더라고요. 할아버지 되는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무식한 걸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이걸 누구한테 다 먹으라는 건지.”

강해건은 혀를 끌끌 차면서 쓸데없이 구체적인 말을 덧붙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거실에는 못 보던 긴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서정 호텔 뷔페를 통째로 옮겨온 것처럼 단 하나의 메뉴도 빠짐없이 차려져 있었다.

“오늘도 저녁 먹고 왔어요? 그럼 이건 다 버리라고 하고.”

“아뇨. 안 먹고 왔습니다. 배고파요, 내가 다 먹을게요.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양을 절대로 다 먹을 수 없겠지만, 강해건이 정말로 버릴까 봐 한서림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보다 더 농도 짙고 밀도 높은 강해건의 페로몬 때문인지, 없던 식욕이 생기며 갑작스러운 허기가 몰려왔다.

“파스타나 스테이크, 쌀국수, 마라탕 등 즉석에서 조리해서 드셔야 맛있는 요리는 저희한테 말씀해주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테이블을 세팅했던 셰프가 정중하게 알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다른 셰프가 한 명 더 있었다.

‘서정 호텔 뷔페에 가서 음식들을 보면 먹고 싶은 게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서림은 최 팀장의 물음에 제가 했던 대답이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역시 최 팀장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다.

최 팀장의 경호팀은 강유건이 붙여준 건 줄 알았는데, 서정 호텔 뷔페를 통째로 옮겨오도록 지시한 사람이 강 회장이라고 했으니, 경호팀이 사실은 강 회장 쪽 사람들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강해건은 강 회장의 경호팀을 일컬어 ‘아버지 개들’ 혹은 ‘좆같은 개들’이라고 했는데, 최 팀장의 경호팀에게는 별말 하지 않았다. 그건 최 팀장의 경호팀이 강 회장과 관련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면 아까 최 팀장이 강유건에게 얘기하고, 강유건이 강 회장에게 연락한 건가, 하는 추측으로 뻗어 나갔다.

아니, 누가 붙여놓은 경호팀이면 어떤가. 거실에 잔뜩 차려진 각종 요리에 군침이 돌고 오랜만에 식욕이 넘치는데.

“강해건 씨는 저녁 먹었어요?”

한서림은 접시에 양념 장어부터 올리며 물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잠깐 서정 호텔 뷔페의 양념 장어가 맛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도, 실물로 영접하니 때깔부터 남달랐다. 장어에 시선을 전부 빼앗긴 한서림은, 강해건의 입가가 느른하게 풀려서 슬쩍 올라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81.

“저녁 먹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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