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42)

76.

***

한서림의 예상은 정확했다. 가족 모임에서 먼저 일어섰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즈니스적인 계약 결혼 때문인지, 마주칠 때마다 위압적이고도 어렵게 굴던 강 회장은 한서림이 내미는 초음파 사진 한 장으로 쉽게 무너졌다. 야욕과 오만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환하게 풀어져서 웃는 모습은 조금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아직 성별이나 형질은 모르고?”

“예. 16주 정도에 대략적으로 알 수 있고, 20주는 되어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강 회장의 반응을 보니 첫 초음파 사진은 저대로 강 회장의 손으로 넘어갈 듯했다. 병원에 들러서 한 장 더 받는 방법도 있고, 서정 그룹 재단의 오메가 전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하고 받는 방법도 있으니 상관없었다.

“회장님.”

“회장님은 무슨,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이렇게 예쁜 우리 집안 씨를 데려왔는데.”

가족 모임에서 섣부른 질문을 할 때도 짐작하긴 했으나, 강 회장이 얼마나 강해건의 2세를 바랐는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정혼했다고는 해도 비즈니스의 일환이기 때문에 상견례나 가족 모임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으면서 임신했다는 사실 하나로 바로 호칭 정리부터 하는 꼴이 속 보이다 못해 투명했다.

“……네. 호칭은 차차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그래. 고 변호사 들어오라고 해.”

강 회장은 한서림의 부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대기하고 있던 수행비서에게 지시했다.

한서림은 강해건을 찾아달라는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강해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를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정혼으로 딜을 한 것만 봐도 강해건 역시 강 회장과의 사이가 그다지 살갑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괜히 저 때문에 그 골을 더 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서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해건의 편이어야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모든 것을 제 잘못으로 포장하려고 머릿속에서 할 말을 연습을 해도, 섬뜩한 눈동자가 모든 것을 알아차릴 것 같아서 긴장이 됐다. 만약 강해건이 저 때문에 페로몬 폭주를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강 회장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한 회장에게 받은 페로몬 학대로 인해 어른 남자 알파에게 가졌던 공포심이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심리적 공포감과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중년의 남자가 들어가 허리를 숙였다. 결혼 계약서를 작성 당시 강해건이 불렀던 고 변호사였다. 서정 그룹의 고문 변호사 중 대표 변호사라고 소개했었다. 한서림은 잠깐 눈이 마주친 고 변호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해건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봤는가?”

강 회장의 여상한 물음에 한서림이 놀란 낯을 했다. 강 회장은 또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짐짓 인자한 어른인 척하며 넌지시 설명했다.

“해건이 일거수일투족이야 늘 보고받고 있지. 하나뿐인 극우성 알파 자식이 다치거나 사고라도 치면 내가 꽤 속상할 것 같아서 말이야. 한 달 정도 됐으니 네가 찾아온 것도 별로 놀랍지 않았고. 이렇게 기특하고 어여쁜 선물을 가져올 줄은 몰랐다만.”

“네…….”

흡족한 웃음 앞에서 한서림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강해건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면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데, 어째서 이토록 마음이 불편하고 이 자리 자체가 거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바이에 있는 인공섬에서 지내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한국을 떠나면서 바로 그리로 갔더라고요.”

“두바이에 있는 인공섬? 우리 집안이 그런 것도 가지고 있었던가?”

“분양 정보가 떠돌면서 한국 재벌가에서도 꽤 이슈가 됐었는데, 그때 해건이가 조용히 따로 사두었던 모양입니다. 섬 하나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더라고요.”

“알겠네. 가서 일보게.”

고 변호사가 거실에서 사라지자, 강 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한서림에게 눈을 맞춰왔다.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으니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이.

사설탐정과 흥신소에 의뢰했던 일은 돈 낭비였다. 해외에서 찾아야 하는 탓에 비용만 엄청 비쌀 뿐 돌아오는 결과가 없었다. 뉴욕에 있는 탐정에게 의뢰한 것도 성과가 없이 돈만 날렸다.

그러나 돈 낭비라는 걸 알면서도 강해건을 찾는 일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진작 강 회장을 찾아왔더라면 조금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어디에 있는지 찾아냈으니, 제가 가서 강해건 씨를 데려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임신한 몸인 만큼 알파가 곁에 있어야지. 태교도 극우성 페로몬으로 하면 아이의 형질도 극우성일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진다고 하니 당연히 데려와야 하고말고.”

사람 좋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강해건을 찾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강해건을 찾아내서 각인하고 곧 있을 폭주를 막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전용기를 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오늘 저를 경호했던 경호원들도 데려가고 싶고요.”

“전용기 내주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경호원은 더 능력 있는 애들로 새로 내주겠네. 홀몸도 아닌데 먼 길 보내면서 내가 믿을 만한 녀석들로 보내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네.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 부탁드립니다.”

“김 비서.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주게. 내 아들의 씨를 담고 있는 몸이니 정중히 모시고.”

중후한 명령에 소름 끼치는 혐오가 한서림의 척추를 기어올랐다. 강 회장 역시 제 아버지처럼 오메가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한서림은 오한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잠깐 어깨를 떨었다. 1분 1초라도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강해건이 한 달째 머물고 있는 곳은 두바이에서 섬 단지를 통째로 분양받은 인공섬이었다. 반포지구만 한 크기의 섬이 300여 개인데, 어마어마한 금액에도 불구하고 강해건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섬을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모래와 바위로 만든 인공섬이자, 인간이 만든 지상 최대 규모의 휴양지라는 타이틀답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각인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 와서 혼자 지내는 것은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기만 했다.

‘해건아,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일 하나도 없는 거 알잖아.’

이중호가 했던 말은 틀리지 않다.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강해건이 도망침으로 인해 한서림은 위험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한서림이 원망스러워서 그의 인생을 망쳐놓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그리움에 허덕이며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증오든 사랑이든, 한 달 내내 강해건은 한서림의 생각만 했다.

“…….”

해안가 모래사장에 앉아서 물끄러미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한서림이 보낸 초음파 사진이었다. 초음파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얼떨떨하고 울컥하더니, 보면 볼수록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

지금은 형태도 불분명하지만, 한서림을 닮았으면 분명 예쁘겠지.

태어날 아기가 한서림을 닮았으면 좋겠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평생 예뻐해 주고 사랑만 해줄 수 있을 거다.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좋은 아빠가 되어주고 싶은데,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어주고 싶은데,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행복한 생각을 하다가 한기가 확 끼쳐왔다. 이대로 주기가 계속 짧아지다가 미치게 되면 아기를 품에 안아볼 수조차 없게 될 텐데, 물 흐르듯 이어진 작은 소망이 초라하고 애틋했다.

“좆같네…….”

강해건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한서림의 임신 전까지는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초음파 사진을 보니 갑작스럽게 부성애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책임감 때문인지, 아이를 볼모로 계약한 스스로가 역겨웠다. 스스로가 이렇게 양심 없는 새끼였나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한심했다.

아니,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어이가 없었다. 가볍게 생각만 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끌어올 수 있는지, 그것도 강 회장이 했던 경멸스러운 짓을 똑같이 반복할 뻔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토록 당해놓고도 병신처럼 악습을 되풀이할 뻔했다.

“…….”

어떻게 해서는 아기를 한서림의 품에 안겨주고 강 회장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강 회장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하려면 대책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희생양이 되는 건 저에서 끝내야 했다. 아마도 이 부분은 한서림 역시 동의하고 전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한서림 역시 똑같이 이용당한 입장이기에, 표현한 적은 없더라도 누구보다 아이에 대한 생각이 다를 것이다. 혹여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협박을 해서라도 아기를 지키고 싶었다.

“이혼할 때 친권이나 양육권, 뭐 그런 걸 포기하면 되려나…….”

그럴 경우 강 회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다양한 경우의 수를 대비해야 했다. 고 변호사는 강 회장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좋더라도 자문받을 수가 없다. 그러면 일단 변호사 군단부터 꾸려서 작업을 미리 시작해둬야 할 텐데, 여기에서는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강 회장의 호적에서 나오면 일이 더 쉬워지려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막상 지리멸렬한 판을 벌이게 되면 꽤 골치 아프고 지겨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제가 한서림의 곁에서 마지막까지 강 회장과 싸워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초음파 사진 한 장으로 갑작스럽게 덮쳐진 생각 속에서 강해건은 정신없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77.

“후우…….”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에 한숨을 내쉬며 하루에 한 번씩 휴대폰을 켜서 한서림에게 붙여놓은 경호원이 보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한서림의 메시지는 그 과정에서 확인한 것이었다. 일전에 마주쳤던 모주원이 신경 쓰이고 한 회장이 혹시나 또 페로몬 학대를 할까 봐, 이중호에게 전문 인력을 소개받고 엄선해서 뽑은 알파 경호원들과 베타 경호원을 적당하게 섞어서 배치해 두고 왔다. 혹시라도 한서림에게 걸리게 되면 서정 그룹에서 나온 거라고 둘러대게 지시했다. 한서림이 매일 출퇴근만 반복적으로 한다는 보고를 받다가, 오늘 점심시간에 오메가 전문 병원에 갔다는 보고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임신이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나와 모주원과 우연히 마주쳤다며 보내준 사진을 보고 강해건은 이를 갈았다. 모주원을 제대로 본 건 가족 모임이 있던 호텔에서 처음이었으나, 그건 절대로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극우성 알파의 형질로 오감이 뛰어난 강해건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둔한 한서림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어진 보고에는 결국 준비해온 일을 터트릴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식하게 임신한 사람을 페로몬으로 압박하려고 하다니. 한서림이 페로몬 학대를 받아오며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분노가 들끓었다. 심지어 그런 애욕에 젖은 더러운 눈으로 한서림을 바라보면서, 어째서 위협하고 다치게 하려 했던 것인지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강해건은 지체하지 않고 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차피 강 회장의 정보력이면 제가 있는 곳쯤은 이미 알아냈을 것이다. 서정 그룹의 서자로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안의 권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한서림이 지키고 싶은 순수한 열망이, 절대 이용하지 않으려 했던 강 회장의 힘에 손을 뻗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습다, 한서림에게서 도망쳐 왔으면서 미련하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는 꼴이.

-그래, 해건아. 섬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고?

첫인사부터 세게 나오는 고 변호사는 강해건이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지 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장소야 어차피 옮기면 그만이니 상관없었다. 이미 탄로가 났기에 내일쯤 옮기는 게 나을 듯했다. 다만, 페로몬 폭주가 일어날 것이 문제였다. 인공섬에는 강해건 혼자밖에 없기 때문에 폭주가 일어나도 괜찮지만,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혹여 누군가 다칠 수도 있는 탓에 뒷수습을 감당하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극우성 알파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강 회장이나, 동생 일이라면 선악을 따지지 않고 발 벗고 나서는 강유건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그 또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강해건이 재앙 속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스스로 견뎌야 하는 것이 괴로울 뿐.

사실 한서림이 각인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를 잡으러 오는 것만 아니라면 강 회장 쪽에는 위치를 들켜도 상관없긴 했다. 막상 내일 당장 떠나려고 생각하니 귀찮은데 여기에 조금 더 머물다가 페로몬 폭주가 한 번 더 지난 후에 인도 쪽으로 갈까 싶기도 했다.

“제가 부탁드렸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장소를 물색하는 머릿속과 다르게, 강해건의 목소리에는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냉정하고도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증거 모으는 데 힘이 좀 들었지만, 준비는 다 해뒀다.

고 변호사의 대답에 강해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고 변호사가 강 회장의 사람인 것은 맞지만, 강해건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 변호사보다 유능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건질 게 좀 있던가요?”

-거기가 지금이야 표면적으로는 경호 회사인데, 원래 뿌리는 조폭 집안이었더라고. 한휘 건설하고 4대째 상당히 막역한 관계고. 태생은 못 속이는지 그쪽 일도 아예 손을 떼지는 못했던 모양이더구나. 돈세탁은 물론이고, 연예인이나 재벌가에 마약을 대는 브로커 짓도 하고, 연예인 스폰서 알선에 성상납이나 성매매까지 손대고 있더구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저것들을 한 번에 다 터트리면 모주원은 수습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한서림에게는 신경 쓸 겨를도 없어질 것이다. 아예 평생을 못 만나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지금 당장 터트려주세요. 조사하신 것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요. 이왕이면 구속 수사로 진행될 수 있도록 손써주시고요. 혹시 아버지가 아셔서 뭐라고 하시면, 모주원이 한서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협한다고 말씀드리면 될 겁니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뿌리까지 뽑아버리세요.”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페로몬 공격을 한 걸로 봐서 아예 없는 가능성도 아니었다. 모주원이 한서림 앞에서는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게 가소로웠다. 하지만 연극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고 했다. 강해건은 모주원을 무너트리는 것과 동시에 한서림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싶었다. 함부로 사람 가까이하지 말고 믿지도 말라고.

고 변호사가 알겠다고 대답을 할 때쯤, 요트 한 척이 섬으로 다가오는 게 시야에 담겼다. 반사적인 헛웃음이 흘렀다.

“혹시, 아버지가 사람 보냈어요? 저 잡아 오라고?”

-글쎄. 내가 알기로 따로 그런 지시사항은 없으셨는데.

“……알겠습니다. 일단 부탁드린 일 최대한 빨리 진행해주세요.”

강 회장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면서 최소 열 명 이상을 태울 수 있는 요트는 당당하게 강해건의 사유지에 정박하고 있었다. 고 변호사가 거짓말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는 의미는 이미 입구에서 보안 통과를 마쳤다는 뜻인데, 강 회장의 힘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몸을 일으킨 강해건은 느릿한 걸음으로 요트가 정박한 곳으로 향했다. 불법 침입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기분도 안 좋은데 여차하면 페로몬으로 전부 짓눌러버릴 생각이었다. 베타라면 무력을 행사할 의사도 다분했고.

“…….”

“…….”

그러나 요트에서 내린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강해건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굳은 것처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내내 미친놈처럼 한 사람만 내리 생각한 탓에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곧은 자세와 바른 걸음으로 다가와 강해건의 눈앞에서 멈춘 상대는 어떻게 봐도 한서림이었다.

이러면 도망친 의미가 없어진다.

“……내 사유지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

제멋대로 터지려는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삐딱한 인사를 택했다. 본능적으로 한서림을 지키기 위해 쓰레기처럼 반응하는 제 모습을 보니, 자각한 것처럼 원망과 증오보다는 사랑이 더 큰 모양이었다. 각인하다가 다칠 것이 우려돼서 기껏 도망쳐 왔는데, 한서림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얼마 시일이 지나지 않아서 강 회장이 움직일 것은 예상했어도, 각인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한서림이 저를 찾아낼 거라는 건 전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잡힐 거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서림은 강해건의 페로몬을 흡수하려는 것처럼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강해건은 한서림이 온 것에 대한 당황을 숨기며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페로몬을 조금 더 밀도 있게 풀어주었다.

“혼인 신고서를 보여줬더니 들여보내줬습니다. 강해건 씨가 바리게이트를 많이 세워놨을 것 같아서 꽤 걱정하면서 왔는데, 의외로 별다른 문제 없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봐요, 이거 불법 침입이에요. 사람 불러서 개처럼 끌어내기 전에 나가요.”

“임신했다고 메시지 남겼는데 못 봤습니까? 같이 돌아가요.”

“누구 마음대로.”

“아니면 나도 여기서 살아도 되고.”

한서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간 미소를 보였다.

“하……. 안 본 사이에 되게 뻔뻔해졌네.”

“강해건 씨는 필요에 따라서 다정해질 수 있다고 했었죠? 나는 필요에 의해서 뻔뻔해지는 것쯤이야 몇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사업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는데, 뻔뻔해지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죠.”

처음 미팅에서 만났던 한서림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사뭇 반갑기까지 했다. 말 잘 듣는 인형을 운운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안다. 죄책감에 짓눌린 채로 생기를 잃고 스러져가는 모습보다는, 지금처럼 할 말 다 하면서 당당하고 고아한 모습이 한서림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뭘 믿고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지? 강 회장이랑 손이라도 잡았어요?”

“나 아무하고나 손잡는 사람 아닙니다.”

“근데 아버지 개들을 뭘 저렇게 많이 끌고 왔어.”

강해건이 한서림의 어깨너머를 턱짓했다. 그곳에는 어림짐작으로도 열 명은 되어 보이는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경호원을 많이 붙이실 줄은 나도 몰랐어요. 강해건 씨한테 찾아갈 수 있도록 전용기를 내달라고, 혹시 모르니 경호원을 데려간다는 말을 하긴 했는데…….”

어째서 한서림이 저에게 찾아오기 위해 강 회장에게 전용기까지 내달라고 했을까. 도망치면서도 한서림은 저를 절대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불안이 요동쳤다.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

78.

“전용기도 내주고 좆같은 개들까지 붙여놓은 거 보니까, 아버지도 임신 사실을 아셨나 보네요.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달려가서 예쁨이라도 받고 싶었나 봐요?”

일부러 비아냥거려도 한서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강 회장님께 예쁨받을 생각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강해건 씨를 찾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 강 회장님이었을 뿐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강해건 씨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동안 돈 낭비, 시간 낭비를 많이 했거든요. 뒤늦게라도 강 회장님을 떠올렸으니 오히려 다행이죠.”

“그쪽이 나를 왜 찾는데.”

“그러는 강해건 씨는 왜 도망갔어요? 왜 이런 곳으로 도망 와서 연락 두절 상태로 숨어 있었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그렇게 밉다면 일단 각인부터 한 이후에 나를 망가트리는 게 더 속 시원한 방법 아닌가요?”

당당한 되물음은 강해건이 왜 도망쳤는지 답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불안이 요동쳤다. 설마 자기가 다칠 걸 알면서도 각인하자고 찾아온 거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강해건은 일부러 다른 가능성을 꺼냈다.

“그건 그쪽 방법이고. 왜 왔냐니까? 아아……, 임신했다고 했지. 내 페로몬이 필요해서 온 건가?”

“강해건 씨 페로몬이 필요한 상황이 되긴 했죠. 강해건 씨가 내건 결혼 계약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2세 출산이었습니다. 모든 계약 조항이 임신을 위한 거였고요.”

얼마나 마음을 독하게 먹고 왔는지, 한서림에게서는 각인하자고 울며 매달리던 유약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강해건은 슬쩍 시선을 내려 한서림의 배를 바라보았다. 이제 4주라고 했기에 당연하게도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저 배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러 페로몬을 풀어주고 있지만, 한서림을 사랑한다고 해서 원망과 배신감이 말끔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질게 구는 것이 더욱 수월한지도 몰랐다.

“진짜 뻔뻔해졌네.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나한테 지금 페로몬 구걸도 못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태아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강해건 씨 페로몬이 필요합니다.”

“구걸은커녕 되게 당당하게 요구하네.”

“강해건 씨가 원하는 방식이 구걸이라면 그렇게 하고요.”

“이봐요, 나한테 페로몬 맡겨놨어요? 내가 누구 때문에 페로몬 폭주로 좆같은 인생이 됐는데.”

“…….”

한서림의 맑은 다갈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떨리면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잠시였다. 나약하고 안쓰럽게 요동치던 눈동자는 3초도 되지 않아서 강건한 빛을 내며 강해건을 올곧게 응시했다.

“내가 보기 싫어서 여기에 와 있는 거라면, 나는 각인 후에 내 집으로 돌아가서 지낼게요. 나 때문이라면 내가 나갈 테니까 집으로 돌아와요. 혼자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있지 말고.”

역시 한서림은 저와 각인할 생각인 것이다. 차라리 각인 도중 페로몬 폭격을 받을까 봐 무서워서 각인하지 못하겠다고 살려달라는 시늉이라도 했더라면 제가 여기까지 도망쳐올 일도 없었다. 이러니 한서림을 죽도록 원망하면서도, 종내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며 한서림의 안위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잠식되는 것이다.

“그 집에 그 알파가 살고 있던데, 내 아이를 임신했으면서 그 집으로 가겠다고요?”

“주원이한테 집 비워달라고 했습니다.”

내키든 내키지 않든, 상황 때문에라도 모주원은 그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어질 테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중호나 강유건을 통해서 한서림의 집은 정리하게 할 생각이었다. 다른 알파 따위가 머물렀던 곳에 한서림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애초에 두바이로 떠나오면서 생각했던 게, 적당한 시기가 되면 지금 지내고 있는 제 아파트의 명의를 한서림의 이름으로 돌려놓으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강해건 씨가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한서림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강해건에게 내밀었다. 이 서류는 결혼 전에 고 변호사를 불러서 작성했던 계약서였다. 강해건은 계약서 조항을 무감한 눈으로 훑었다.

-빠른 임신을 위해 섹스는 일주일에 2회 이상

-러트와 히트사이클 함께 보내기

-노팅 거부 금지

-서로의 사생활 존중(각자의 애인에 대해 간섭 금지, 사생활은 언론 노출 금지)

-각인 금지

-2세 출산 후 이혼

다시 보니 이렇게 쓰레기 같을 수가 없다. 한서림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이 계약서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짐승만도 못한 것인지 알아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한서림은 당시에 이걸 읽고 무슨 생각으로 순순히 사인했던 것인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