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42)

“내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빚 있는 줄도 몰랐다가, 그 빚 고스란히 떠안아서 채희랑 날 잡고 청첩장 다 돌렸다가 파혼한 거 기억 안 나냐?”

“아……, 그랬었지.”

“아오, 저 무심한 새끼. 네가 그 돈 해결해줬으니까 내가 한번 참아준다.”

당시에 이중호가 조금만 더 빨리 말했어도 바로 도와줬을 테니 파혼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중호는 끝까지 강해건에게 손 벌리지 않았고, 그 상황은 회사로 찾아온 사채업자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강해건은 그 자리에서 이중호 부친의 빚을 전부 갚아주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중호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에 빠트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 거 맞네…….”

강해건의 낮은 중얼거림은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았다.

***

“네가 계속 바쁘다고 해서 마음 쓰였는데, 이제라도 얼굴 보고 사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모주원은 점심시간에 한서림의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그날 호텔에서 이상하게 여기게 된 의문 때문인지 한서림은 모주원의 얼굴을 보는 게 조금 불편했다. 그동안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처럼 생각했던 사람인데도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제가 생각하던 모주원과 실제의 모주원이 다를 수도 있다는 간극을 깨달은 탓이었다. 어쩌면 혼자 모주원에게 실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호텔에서, 강해건 때문에 너무 열 받아서 네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페로몬을 그렇게까지 풀었어. 네가 알파 페로몬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아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정말 미안하다.”

모주원의 사과는 진중했으나, 한서림의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모주원의 페로몬은 한서림이 고통받던 시절에도 유일하게 편하게 느꼈던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언제나 붙어 다녔기 때문인지 심리적 거부감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강해건이 페로몬으로 감싸주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한서림이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몸으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한서림은 언제나 내 편이라고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 인해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네가 왜 강해건 씨 때문에 열 받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아버지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했던 요구는 부당했어. 너도 옆에서 다 들었으니까 알잖아. 그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페로몬으로 압박하려는 것도 몰상식한 행동이었고.”

“아저씨가 그러시는 거 하루 이틀 일 아니잖아.”

“그럼 나는 계속 당해야 한다는 의미야? 내가 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그때 너는 네 페로몬으로 나를 보호해줄 수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보기만 했어. 이전처럼 나중에 위로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수많은 기회가 있었고, 충분히 페로몬 학대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방치했던 모주원에게 느낀 배신감이 생각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다. 제멋대로 입 밖으로 터지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실망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모주원이 저를 지켜줄 의무는 없는데.

그러면 우정을 앞세워 그렇게 유난스럽게 굴지를 말든가.

삐뚤어진 말이 또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한서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주원이 그래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 더는 전처럼 가까운 친구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우정이 얼마나 깊으면 페로몬 공격당하는 친구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건지 이해가 안 되네. 한 회장님을 경호하는 그쪽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적어도 서림 씨를 위하는 척하면서 위선 떨지는 말아야죠.’

강해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모주원이 저를 위하는 척하면서 위선을 떨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모주원은 방관자였다. 지금껏 페로몬 학대를 당하는 친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실망감과 상실감이 번졌다.

6.

그렇다면 모주원은 무엇을 위해 제 곁을 지키며 유난스러운 우정을 쌓아왔단 말인가.

“아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너를 탓하는 게 아냐. 정작 강해건 씨는 내 편에서 나를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왜 네가 강해건 씨 때문에 열 받았는지 궁금할 뿐이지.”

“정혼이어도 아저씨는 네 아버지야. 강해건이 네 아버지를 공격한 거라고. 열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주원아. 나 지금 처음으로 너랑 대화가 안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왜 당연해? 강해건 씨는 내가 페로몬 공격을 받으니까 방어해준 것뿐이야. 그럼 그 상황에, 강해건 씨도 너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야 했어? 내 아버지니까 그러면 안 됐던 거라는 말이야?”

한서림은 감정에 치우칠수록 점점 더 침착해졌고, 목소리는 냉정해졌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평생을 참기만 해서인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터진 울컥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 나는? 아버지가 나를 페로몬으로 학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나는 평생 그렇게 당하면서 살아야 돼? 대체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 회장이 불행해졌으면 좋겠다. 한휘 건설이 망해서 길바닥에 나앉고 그런 의미의 불행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다. 다른 걸로 피해를 받는 게 아니라, 저와 똑같이 페로몬으로 학대를 받고 남은 생을 두려움에 떨면서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늙어 죽었으면 좋겠다. 단 한 번도 풀어내지 못한 원망은 넘쳐흐를 정도로 쌓이기만 해서 점점 추악해져만 갔다.

“진정해, 서림아. 내가 말실수했어. 그런 의미가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아니, 전혀 모르겠어.”

“그래. 미안하다. 사과하러 와서 괜히 네 기분만 더 나쁘게 만들었네. 내가 미안해. 화 풀어라, 서림아.”

모주원이 페로몬을 조금 더 진하게 풀며 한서림을 달래려고 했다. 강해건을 만나기 전까지, 유일하게 편하다고 생각했던 알파의 페로몬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이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살갗을 어루만지는 페로몬이 소름 끼쳤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뀐다고 해도 늘 고마웠던 모주원에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한서림은 스스로에게도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너 혹시 그 자식이랑 각인한 건 아니지?”

“뭐?”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한서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각인한 건 아니었으나, 강해건이 돌아오면 바로 각인부터 하자고 할 것이다. 메시지가 읽음 표시로 바뀌었으니 음성 녹음 남긴 걸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강해건은 제가 그 오메가라는 걸 알게 됐는데도 2주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분노와 원망, 복수심은 이제 어쩌면 배신감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그 새끼 페로몬에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네 말처럼 그 자식이 페로몬으로 너를 보호하려고 했던 건 맞는데, 의도에 상관없이 너 내 페로몬 아니면 다른 알파 페로몬에는 거부 반응이 심했잖아.”

분명히 걱정에서 비롯된 말일 텐데 왜 염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의아했다. 한서림은 아무래도 제가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주원의 페로몬이 은근하게 성적 의도를 담고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예민함이 높아서일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모주원이 저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리는 없을 테니까.

“아, 그 새끼랑은 이혼할 거라고 했었지. 미안, 걱정돼서 물어본 거였는데, 이혼이 전제라면 각인할 이유가 없는데 내가 경솔했다.”

“주원아.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경솔하기보다는 과한 걱정 같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곧 점심시간 끝나거든. 아,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랑 결혼한 사람인데 강해건 씨한테 ‘그 자식’이나 ‘그 새끼’라는 호칭은 안 썼으면 좋겠다. 내 앞에서는.”

한서림이 먼저 일어나서 계산대로 갔다. 카드를 꺼내 계산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모주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서림은 어릴 때부터 부친에게 페로몬으로 학대와 폭력을 당해왔기에 알파 페로몬에 강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호감을 지닌 아주 미약한 알파 페로몬에도 겁을 먹고 두려워하고는 했다. 그 부분을 이용해서 모주원은 한서림에게 제 페로몬에 익숙해지게 만든 다음, 다른 알파들이 은은한 페로몬 향을 풍길 때 자신의 향으로 덮어주며 한서림을 안심시켜주곤 했다.

그렇게 저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아니, 만들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강해건 같은 게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뭐 해? 안 가?”

“어, 가야지.”

한서림의 곁으로 다가간 모주원은 조금 더 노골적인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한서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슬쩍 한서림의 목덜미를 살펴봤으나 각인의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지?

모주원의 기억이 맞다면, 언제부터인가 아무리 페로몬을 흘려보내도 한서림에게서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지금 이 식당 안에서처럼 불특정 다수의 알파가 섞여 있는 자리에서도 예전처럼 모주원의 페로몬에 안심하지도 않았다. 더는 알파 페로몬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위협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페로몬의 지배를 받는 오메가로 태어난 이상 이럴 리가 없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러한 변화는 한서림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부터 시작되었다. 분명히 계기가 있었을 텐데 한서림이 입을 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모주원은 제 속내를 숨기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자리를 지키며 위장 친구로나마 관계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강해건과는 이혼을 전제로 한 정혼이고, 이혼 후에는 한 회장이 어떻게 해서든 한서림과의 결혼을 밀어붙인다고 했으니 그걸 믿고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 악역은 한 회장의 몫이 되고,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서림에게 무해한 존재가 되어 영원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한서림과 각인해서 평생 제 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

한서림은 모주원과 지금보다 더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예민한 거라고 애써 넘겨보려 했으나, 모주원의 페로몬에 분명한 성적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식당에서 나올 때는 한 번 하자고 유혹하는 것처럼 혹은 그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겁탈할 것처럼 아주 노골적이라서 도저히 모르는 척해줄 수가 없었다.

모주원이 변한 것일까, 원래 그랬는데 제가 몰랐던 것일까.

답은 알 수 없어도 거리를 둬야 한다는 현실은 자명했다. 모주원은 지금껏 한서림이 페로몬 학대를 당할 때마다 도와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사과를 바란 적이 없으니까 상관은 없지만, 명확한 것은 이제 더는 제가 가장 가깝게 여기는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그런 적나라한 성적 페로몬을 흘리지 않는다.

늘 편하게 느껴졌던 모주원의 페로몬이 저를 강제로 겁탈할 것처럼 위협했다. 그건 어릴 때 한 회장이 오메가를 집으로 들일 때마다 집안에 진동하던 냄새와 닮아 있었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었다. 한서림은 그 부분을 간과할 만한 성격이 못 되었다. 한 걸음 물러나야 상대가 제대로 보인다는 말을 몸소 실감했다.

마음이 변하는 만큼 관계성이 변하는 것은 당연했다.

“보고 싶다…….”

강해건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은 만큼 걱정이 됐다. 녹음을 남긴 이후로도 아무런 연락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아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강해건은 받지 않았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받지 않는 듯했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옆에 있었으면서도 내내 모른 척했던 저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화를 내도 좋고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일단 돌아와서 각인 후에 하기를 바랐다. 하루하루 날짜가 흐를수록 강해건의 걱정으로 피가 말랐다. 벌써 보름째였다.

강해건이 많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것은, 집을 나간 지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나고 도어록이 해제되었다. 거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있던 한서림은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주시했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던 강해건이 돌아왔다.

“…….”

“…….”

제가 남긴 음성 메시지의 진실이 충격이었던 걸까. 모자를 푹 눌러쓴 강해건은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날렵했던 턱선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외모 특유의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이미지도 서늘해 보였다. 저를 감싸주고 보호해주었던 페로몬의 분위기도 냉랭하기만 했다. 그의 페로몬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저를 경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강해건의 반응은 각오를 했다고 해서 타격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

강해건이 찾고 있는 오메가의 정체가 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돌아오면 욕을 하든, 원망의 말을 쏟아내든, 멱살을 잡든, 페로몬으로 압박을 하든,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강해건은 한서림을 못 본 것처럼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건 한서림이 예상했던 반응에 없는 것이었다. 무언가 가슴에 덜컥 걸려서 숨통이 전부 꽉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어째서, 왜, 화조차 내지 않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7.

강유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려보면 강해건은 그 오메가에게 깊은 원망과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유건에게 듣지 않았어도 한서림은 그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아버지에게 가진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을 테니까. 한 회장이 한서림의 몸을 망가트렸던 것처럼, 한서림은 강해건의 몸을 망가트렸다. 한서림은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한 회장을 죽이고 싶었다. 그 정도로 검게 타들어간 추악함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강해건은…….

당황한 한서림은 강해건의 방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 사실은 강해건이 돌아오면 무릎 꿇고 사죄부터 할 생각이었다. 강해건이 저를 공기 취급하며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내 방 앞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벌컥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회색 눈동자가 싸늘했다. 주변을 얼려버릴 것 같은 목소리가 한서림을 찢으려 했다. 그러나 한서림은 망설이지 않고 강해건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내가,”

“아, 씨발.”

사과의 말을 시작도 하기 전에 듣기 싫다는 듯이 단절당했다. 하기야 왜 아니겠는가. 저만 해도 한 회장이 사과를 하면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사과처럼 여겨져서 가증스럽고 역겨웠을 것임이 자명했다. 강해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사과가 아니라, 저 역시 강해건과 비슷한 피해자라서 그 마음을 알기에 사죄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해건은 짜증의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한서림을 노려보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들어올 때는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강해건의 회색빛 머리카락이 뿌리쯤에 꽤 많이 자라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정말 미안해요. 이런다고 강해건 씨 화가 풀리지는 않겠,”

“저기요, 한 대표님. 듣기 싫으니까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요. 그쪽 무릎은 그렇게 싸구려인가? 왜 아무 데서나 무릎을 꿇어, 꼴사납게.”

역시 사과조차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서림은 사과마저 거부하는 강해건에게 뭐를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실상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사과가 맞을지도 모른다. 사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지금 나 개새끼 만들고 싶어서 시위하는 거예요?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네.”

고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강해건이 한서림에게 일어나라는 듯이 턱짓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한서림은 어쩔 수 없이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야 했다. 그런데 냉소 가득하게 싸늘한 줄만 알았던 회색 눈동자에 상처와 아픔이 깃든 게 보였다. 타인의 눈을 보며 감정을 눈치챈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강해건의 감정은 투명할 정도로 잘 보였다.

그럴 리가. 이번에도 착각하면서 제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모양이었다. 상처와 아픔이 아니라, 원망과 배신감으로 난자해져 있을 텐데.

“당분간 휴가 좀 내요.”

“휴, 가요?”

“임신할 때까지 섹스만 하려고.”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조소 어린 말에 상처를 받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런데도 왜 각인하자는 말부터 하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다. 제가 그 오메가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 어째서 정혼 계약서의 내용을 지키려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저라면 계약서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당장 각인부터 해서 페로몬을 안정시킨 이후에 다음 문제를 생각할 텐데 말이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고, 지금은 우선순위가 명확한 상황이었다.

“……그것보다는 각인부터,”

“질리네, 진짜.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지? 정말 일부러 짜증 나게 구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신혼 놀이는 이 정도면 충분했던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나? 지겨워진 마당에 내가 시간까지 낭비해야 돼요? 더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휴가 내요. 임신할 때까지.”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원망과 복수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저와는 현존하는 유일한 치료 방법인 각인을 하고 싶지 않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임신할 때까지 섹스하겠다고 휴가 내라는 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각인은 역겨운데 섹스는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한서림은 지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라서, 강해건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고 각인하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서림은 방으로 돌아와 김 팀장에게 연락해 휴가 일정에 대해 알렸다. 우선 잡혀 있는 미팅 스케줄들은 미루거나 김 팀장이 대신하기로 했고, 급한 일들은 메일로 받아서 재택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백화점 입점에 관한 건이었는데, 그 또한 상관없었다. 강해건을 기다리며 초조함과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탓에 일에 매달리는 동안 진행했던 사안이기에, 없던 일이 된다고 해서 아쉽지도 않았다. 인지도가 더 높아지고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며 매출이 증가하면 백화점 측에서 먼저 입점 제안을 할 테니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신향수 개발 문제로 인해 뉴욕에도 한 번 갔다 와야 했으나,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신향수 공개 일정을 미루게 되더라도 괜찮으니 우선은 뉴욕에서 알아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니콜라스, 에드워드, 제이든에게도 단체 메일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있던 중국 론칭까지 홀드시켜서 무기한 연기하고 나니, 장기 휴가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인데도 정리는 수월했다. 대표가 자리에 없더라도 회사가 돌아가게끔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이럴 때 유용했다.

아직 환한 대낮이긴 했으나, 일어나서 샤워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다시 씻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거실로 나가자 강해건이 식탁에서 배달음식의 포장을 뜯고 있었다. 앞으로 저와 함께 식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딱 1인분만 배달시킨 걸 보니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쩜 이렇게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는지 모르겠다.

“밥 먹을 때까지 기분 잡치고 싶지는 않은데.”

강해건은 꺼지라는 말을 우아하게 포장했다. 비록 표정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을지언정.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썼던 계약서를 수정했으면 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계약서 조항을 이행하겠다고 휴가까지 내게 한 사람이니 원칙대로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각인 금지’ 조항을 수정하거나 삭제해야 했다. 한서림이 설명하려는 찰나, 강해건이 먼저 대답했다.

“변호사랑 상의해보고요.”

“그걸 왜 변호사랑…….”

“비즈니스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변호사 없이 함부로 계약서에 손대지 말라고 배웠거든요. 우리 집안도 집안이지만, 내가 극우성이라 집에서 좀 귀하게 커서요.”

그게 극우성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리둥절해지려는 찰나,

“그쪽은 그 집안에서 안 귀한 자식이라 모르려나요.”

그제야 한서림은 강해건이 왜 뜬금없이 개연성 없는 말을 덧붙였는지 이해했다.

“귀한 자식에게 페로몬으로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는 없잖아요.”

강해건은 한서림에게 상처 주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이제 강해건의 복수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제가 속으로 아버지에게 퍼부었던 저주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강해건에게 저는 한 회장과 다를 바 없는 가해자가 되었으니까.

차이점이 있다면 의도했느냐, 의도하지 않았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한서림이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아, 들어가서 깽판 치고 싶네. 미친 척하고 페로몬으로 다 짓눌러버리고 싶어. 어떡하죠?’

‘허락해주면 제대로 복수해줄 수 있는데, 나한테 기회 줄래요? 그래도 서림 씨가 그간 받은 고통에는 기별도 안 가겠지만, 작정하면 뇌에 문제 정도는 생기게 해줄 수 있는데. 학대 가해자랑 방금 그 새끼 포함해서.’

‘저런 쓰레기 새끼도 아버지라고…….’

저를 대신해서 진심으로 화를 내줬던 것이 꿈처럼 여겨졌다. 그때는 정말 강해건의 표현대로 신혼 놀이였나 보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백 번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다정했던 강해건을 그리워하는 제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제가 그 오메가라고 밝힌 이상, 어떻게 해도 그때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인데.

“얘기 끝났으면 나 밥 좀 먹고 싶은데. 그쪽 얼굴 보면서 먹기엔 내 비위가 그리 좋지 못해서요. 섹스는 밥 먹고 할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한서림은 그제야 강해건이 제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방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명치끝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콱 막혀서 숨을 쉬는 게 답답했다.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68.

“페로몬 풀지 말아요. 기분이 좆같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무덤덤한 경고와 함께 강해건의 페로몬이 팍 터져 나왔다. 한서림은 숨을 쉬기 불편할 정도로 방 안에 자욱한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셨다. 성적인 의도가 가득 담긴 페로몬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강해건의 침대도 오랜만이었다. 그가 집을 비운 3주 내내 이 방에는 들어올 일이 없었으니까.

“뭐 해요. 안 벗고.”

노골적으로 뿌려대는 성적 페로몬과 달리, 이미 탈의를 끝내고 나체로 서 있는 강해건의 다리 사이에는 커다란 것이 축 늘어져 있었다. 매번 시작도 하기 전에 흉흉하게 발기해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발기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크기일 수 있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저런 무기 같은 것을 다리 사이에 매달고 다니면서도 강해건은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그쪽 감상하라고 있는 몸은 아닌데.”

“아…….”

“오메가가 알파 밝히는 거야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이래놓고 또 박히면서는 엄살 떨 거 생각하니까 환멸 나네. 내가 강간하는 것도 아니고.”

강해건이 상처를 주는 건 겨우 이 정도였다. 각인을 하다가 만일의 경우 페로몬 폭주가 일어난다고 해도 치명상까지 감수하겠다고 다짐한 한서림에게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데, 말 몇 마디에 상처를 입을 리가.

담담하게 생각하는 머릿속과 다르게 욱신욱신 저리는 가슴은 꽤 고통스럽게 통증을 호소했다. 가뭄이 든 땅처럼 바짝 말라버린 심장이 버석하게 갈라졌다. 한서림은 꽉 쥐어짜지는 심장의 아픔을 무시한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깊은 배신감과 원망에 휩싸인 강해건이 그 어떤 비수를 던진다고 해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말이야 바른말로, 저를 찢어발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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