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2)

인사도 하기 전에 한 회장의 일침이 날아왔다. 한 회장은 정확하게 한서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는 한 회장의 페로몬 학대에도 끄떡없는 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서림은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다른 알파나 오메가 페로몬에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수차례 확인했지만, 그동안 페로몬 학대를 일삼던 한 회장의 페로몬에도 정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음을. 병원에서 확실하게 진단받은 건데도 불안했다. 강해건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의 페로몬에만 반응하는 것처럼, 어쩌면 한 회장의 페로몬에도 아직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온 세포들이 거부반응을 보이며 심장이 요동쳤다.

“저희가 늦지는 않았는데, 다들 일찍 오셨나 봅니다.”

그때 강해건이 한서림의 손을 잡은 후, 반대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며 싸늘한 음성으로 답했다. 어제 나눴던 대화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강해건이 한 회장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른들이 일찍 오시는 줄 알았으면 저희도 일찍 출발했을 텐데, 일방적으로 전달받은 일정이라 스케줄도 취소하고 약속 시각에 정확히 맞춰서 왔는데도 혼날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 일찍 오실 거라면 미리 언질 좀 해주세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욕먹으니까 억울해서요.”

웃고 있는 얼굴과 다르게 강해건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어째서인지 한서림은 안심했다. 마주잡고 있는 손이 든든했다.

8.

“자네가 스케줄까지 취소하고 온 줄은 몰랐네. 앞으로는 약속을 정할 때 자네 스케줄도 고려하겠네. 그래, 무슨 약속을 취소하고 왔는가? 중요한 스케줄이었으면 내가 미안할 것 같네만.”

자신들의 몫으로 비워진 자리에 앉자마자 한 회장이 허허 웃으면서 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한 회장은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한 면모를 그대로 드러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강해건 앞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다. 한 회장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강해건은 서정 그룹의 사람이고 형질 또한 극우성 알파이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저 역겨울 뿐.

“몹시 중요한 스케줄이었습니다. 주말이라서 서림 씨랑 데이트하려고 했거든요.”

상큼하게 웃는 낯으로 대답한 강해건 덕분에 한서림은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일그러진 한 회장의 표정이 볼만했다. 옆에 있던 강 회장이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으나 강해건은 개의치 않아 하며 한서림에게 물을 챙겨주었다.

강 회장과 한 회장의 알파 페로몬이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쩌면 강유건에게서 풍기는 페로몬 향수가 강해서일 수도 있고, 페로몬을 풀어 감싸주고 있는 강해건 덕분일 수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한서림은, 강해건이 둘러준 페로몬과 놓지 않는 손으로 인해 긴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피부에 밀착된 페로몬과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불안함까지 녹여버린 듯했다.

친목 도모의 형태를 띠고 있는 가족 모임이었으나, 노골적으로 비즈니스 이야기가 오고 가면서도 식사 분위기는 나름대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강유건이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강해건은 일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온몸으로 관심 없음을 표현하며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한서림은 그들의 이야기를 안 들리는 척 무시하며 강해건이 챙겨주는 대로 먹는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왜 안 먹어요?”

한서림이 강해건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해건은 요리가 준비된 순간부터 회전 테이블을 돌려가며 한서림의 접시에 놔주기 바빴다. 접시가 조금 비워지기 무섭게 새로운 요리를 퍼주곤 했다. 정작 강해건의 접시에 조금 담겨져 있는 요리는 처음 담아놓은 그대로 줄어들지 않았다.

“밥맛없어서요.”

눈웃음과 함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은근하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분명히 같은 의미일진대, 일전에 입맛이 없다고 했던 말과 지금 밥맛이 없다고 하는 뉘앙스가 사뭇 달랐다. 전에는 식욕을 잃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재수 없다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서림 역시 한 회장과 마주한 식탁이 밥맛 떨어졌지만, 안 먹어 봐야 저만 손해인 것 같아서 배라도 채우자는 심보로 일부러 더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다.

“둘 사이가 아주 보기 좋구나. 아이 소식은 아직이고?”

한참 비즈니스적인 대화가 오가는 것 같더니, 벌써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는지 강 회장이 껄껄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한서림은 2세에 대한 계약 조항이 강해건이 원해서가 아니라 강 회장과의 딜 때문에 생긴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결혼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상당히 노골적이시네요. 알파, 오메가가 무슨 애 만드는 기계도 아니고.”

“해건아…….”

제법 무례한 강해건의 반응에 강유건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슬쩍 눈치를 주었다. 사실 한서림도 강해건이 웃음기를 싹 거둬내고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애 생기면 어련히 알아서 말씀드릴 텐데, 뭐가 그렇게 급하시다고…….”

강유건의 만류에도 강해건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말씀드리는데요. 앞으로 이런 자리에 저희 부르지 마세요. 부르셔도 이제 안 올 겁니다. 저는 비즈니스에 관심도 없고, 서림 씨는 자기 사업 있는 사람입니다. 두 분께서 저희를 이용하신 건 정혼으로 만족하세요. 대충 식사 끝난 것 같으니 저희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강유건이 당황해서 눈치를 본다는 걸 느꼈으나, 한서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강해건은 대충 고개를 까딱인 후 한서림의 손을 잡았다. 룸에서 나오는 동안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배고프죠?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갈까요?”

룸에서 나오자마자 한서림이 물었다. 강해건이 한 입도 안 먹은 게 신경 쓰였다. 한 회장 앞에서 저를 배려하고 감싸주었기 때문인지, 강해건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기도 했다. 문 앞에 다른 경호원들과 함께 대기하고 서 있는 모주원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게 다였다. 아까 들어갈 때 눈인사 이후로, 모주원은 일하는 중이라서 그런지 더 아는 척하지 않았다. 지금은 통화 중이기도 했다.

“서림 씨는 많이 먹었잖아요. 배 안 불러요?”

“걔는 홍콩으로 보내. 계산 잘하고.”

강해건의 목소리와 모주원이 전화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 겹쳐졌다. 회사 경호 인력이 해외 출장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한서림은 모주원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레스토랑의 홀을 통과하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는 문으로 향했다.

“평소 먹는 거에 반도 안 먹은 겁니다. 벌써 배부를 리가 없죠.”

사실 어느 정도 배가 차긴 했으나 한서림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강해건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배가 찢어질 때까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거기 갈래요? 우리 배달 시켜 먹는 곳. 한 번도 데려간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좋죠. 안 그래도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배달도 그렇게 맛있는데 직접 가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지 벌써 기대…….”

“서림아. 잠깐 얘기 좀 하자꾸나.”

이제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한 회장의 목소리에 한서림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따라왔는지 한 회장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뒤로 모주원과 다른 경호원도 한 명 더 보였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룸에 강 회장의 비서가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강 회장의 통화 때문인지 곧 강유건까지 룸에서 나왔다. 강유건의 뒤로도 비서와 경호원들이 따랐다. 가족 모임이라면서 강해건의 말처럼 뭐가 다들 이렇게 유난스럽고 거추장스러운지 모르겠다.

“어? 회장님, 화장실은 반대쪽입니다. 길을 헷갈리셨나 봐요.”

강유건의 멘트로 한 회장이 화장실을 핑계로 따라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따라 나왔나 싶었다.

“화장실 때문은 아니고, 서림이한테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나왔네.”

“아, 잘됐네요. 저도 해건이한테 할 얘기가 있었거든요. 저희가 자리 이동하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세요.”

강유건이 강해건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으나, 버티고 서 있는 강해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겠냐는 듯이 무식할 정도로 한서림만 올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한서림은 괜찮다는 듯 강해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건은 얼굴 한 가득 싫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말 잘 듣는 인형처럼 강유건을 따라갔다.

강해건이 말 잘 듣는 인형이라니…….

무심코 한 생각에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대화를 허락한 이유는, 한 회장의 페로몬 학대에도 괜찮은지 알기 위해서였다. 의사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강해건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은 후 확인해 본 적이 없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장소 불문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니, 특별한 이유 없이도 학대를 일삼던 무식한 사람이라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서림의 마음이 편한 이유는 근처에 강해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이 한서림의 입에서 나왔다. 한 회장은 한서림의 반응 따위는 처음부터 무시했던 것처럼 고압적으로 자기 할 말만을 뱉어냈다.

“강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간단하게 하마.”

“…….”

“강해건이가 서정 그룹으로 들어가게 설득해라. 그러면 너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을 테니,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열사 중에 엘리베이터 쪽을 받아.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그것만 챙기면 너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테니까.”

쌍욕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다행히 입술이 벌어져서 언어로 만들어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히 비즈니스 계약서를 썼다고 했는데 욕심이 지나쳤다.

‘강 전무에게 강제 결혼을 시키지 않을 것, 그리고 나를 서정 그룹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것.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딜했어요. 강 전무는 회사를 욕심내는데, 나는 강 전무 등에 칼 꽂고 싶지 않아서.’

강해건이 어떤 조건으로 강 회장과 딜을 해서 이 결혼을 진행한 건지 이제는 안다. 한서림도 결코 강해건의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한 회장의 등에 꽂으면 모를까.

59.

“제가 왜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째서 이런 뻔뻔한 부탁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자식 가지고 장사하셨던 거네요.”

“그럼 자식새끼라고 하나 있는 게 천박한 오메가인데, 효도할 재주가 없으면 그거라도 해야지.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답이냐.”

하아……, 효도를 맡겨놓으셨나.

뚫린 입이라고 교양 있는 척하며 쏟아내는 막말이 혐오스러웠다. 한 회장에게 페로몬 학대만 안 당했어도 한서림은 한휘 건설을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렇게 효도를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효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강해건이가 너한테 하는 거 보니 어찌나 챙기던지, 네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겠더구나. 오메가도 잘 찾으면 써먹을 데가 있다더니 너 키우느라 헛돈 쓴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냐.”

과한 탐욕을 가진 이의 눈빛이 소름 돋게 형형했다. 추악하고 저질스러웠다. 한서림은 제가 고통받았던 것 이상으로 한 회장이 무너지고 진창에서 구르길 원했다. 정신적으로 끔찍한 괴로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모르게 저주해왔다. 악으로 똘똘 뭉친 검은 불씨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서정 그룹 계열사 중에서 엘리베이터만 네가 가져오면 된다. 우리 회사에서 매년 지출이 제일 큰 분야가 엘리베이터니까 돈 새는 구멍을 한번에 막을 수 있을 게다. 그동안 서정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지……. 그 돈만 새지 않았어도……. 아무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건이 꼬여내서 가져와라.”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년 한휘 건설의 주가가 상승하고, 입지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는데, 왜 못 가진 사람처럼 저렇게 궁상맞게 돈, 돈 거리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너도 네 어미 죽인 값은 제대로 해야지 않겠니.”

토기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독사 같은 눈으로 비열하게 웃는 얼굴을 칼로 그어 난도질하고 싶다는 기이하리만치 위험한 덩어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한서림의 모친은 한서림이 여섯 살이 되던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페로몬 학대의 시작은 알파가 아닌 오메가로 발현한 것이었으나, 모친의 사망 이후 물리적인 폭력이 더해졌다.

‘네가 네 어미를 죽인 거야. 너만 아니었으면 죽을 일도 없었어. 살인자 새끼.’

횡단보도에서 브레이크 고장인 신호 위반 차량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고, 한서림의 모친은 한서림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정황이 명백한데, 한 회장은 모친을 마치 제가 죽인 것처럼 몰아가며 뒤틀린 화법을 사용해서 페로몬 학대와 물리적 폭력의 근거로 내세웠다. 친자식인데 벌레만도 못한 것을 보는 경멸 어린 시선도 숨이 막혔었다. 어린아이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머니가 목숨을 바쳐가며 구한 자식에게, 그 어미를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다. 살인자라고 하지도 않고요.”

“그런다고 해서 네가 네 어미를 죽인 사실이 달라질 것 같으냐?”

“아버지는 미치셨어요.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한 회장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너무 어릴 때부터 같은 말을 들어온 탓에 가끔은 한 회장의 말처럼 저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가, 제가 어머니를 죽인 건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주입식 세뇌는 멀쩡한 사람의 이성과 판단까지 흐릿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서림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또다시 저 추악한 간악함에 놀아날 수는 없었다.

“천박한 오메가 따위에게 말이 통할 거라고 기대한 내 생각이 짧았지…….”

“제가 싫다면요? 저는, 아버지가 써먹고 싶을 때 써먹으라고 있는 오메가가 아닙니다. 아버지한테 이용당하려고 오메가인 게 아니라고요. 저한테서는 아무것도 뽑아낼 게 없으실 테니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구멍가게 같은 사업 하나 한다고 건방져졌구나.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으냐? 그래 봐야 오메가인 것을.”

한 회장이 쯧쯧 혀를 차며 페로몬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살갗을 불태우고 피부를 갈기갈기 찢을 것 같은 공격적 의도가 가득한 분노 섞인 폭력적인 페로몬이 한서림을 옭아맸다.

한 회장은 이런 순간마다 한서림이 얼마나 공포에 떨며 두려워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같은 방식으로 학대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히트사이클이 아닌데도 페로몬 샘에 이상이 생겨서 비정기적 발정기가 올 때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

한서림은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손으로 은근하게 제 입을 막았다.

한 회장의 페로몬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반응은 없었다. 그 말은, 한 회장의 페로몬 학대가 한서림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강해건과의 정사 전까지는 한서림을 그 무엇보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했던 부친의 페로몬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역시 확인하길 잘했다. 이제 한서림이 무서운 건 오로지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뿐이었다.

“후읍!”

그 순간, 한 회장이 갑자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페로몬을 전부 거둬들였다. 근처에 있던 모주원과 다른 경호원도 마찬가지였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네요.”

한 회장의 비인간적이고도 잔인한 페로몬 압박이 시작된 지 3초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지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걸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시점이니까.

강유건과의 대화가 짧았는지, 어느새 나타난 강해건이 보호하는 듯한 페로몬으로 한서림을 빈틈없이 가두었다. 다른 이의 페로몬은 한서림 근처에도 닿지 못하도록. 그 기저에는 알파들끼리만 감지할 수 있는 한 회장을 향한 공격성 페로몬도 섞여 있었다. 한 회장이 우성 알파라고 해도 나이도 있는 데다가, 극우성 알파인 강해건의 페로몬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당장 페로몬 거둬요!”

모주원이 한 회장의 앞을 막아서며 공격적인 페로몬을 개방했다. 한서림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나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오메가의 경우 다칠 수도 있는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그런데 모주원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페로몬을 내뿜고 있었다. 만약 강해건의 보호 페로몬으로 감싸이지 않았더라면,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 안 되었더라면 한서림도 피해를 봤을 것이기에 모주원에게 몹시 실망했을 만한 상황이었다.

강해건과 모주원의 페로몬이 팽팽히 맞섰다. 강해건의 페로몬이 좀 더 밀도가 낮아지고 짙어진다 싶더니 이내 모주원의 페로몬은 감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한서림은 강해건의 페로몬 안에서 편히 호흡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사람 지키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오만한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귀찮다는 듯이 뱉어낸 말과 동시에 강해건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모주원이 비틀거렸다. 승패는 이미 갈린 상황이었다. 모주원과 경호원이 한 회장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모주원은 한서림에게 원망 어린 눈길을 보냈다. 한서림은 그 눈빛의 의미를 해석할 수가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같은 그런 페로몬에, 그 어린 나이부터 학대를 당했던 거라고요?”

“……아마, 그럴걸요.”

“왜 남 일처럼 얘기해요? 억울하거나 화나지도 않아요? 서림 씨가 상습적인 학대를 받으면서 면역력이 생겨서 그렇지, 저 정도 페로몬이면 오메가들은 못 버텨요.”

“나도 처음에는 못 버텼어요. 기절한 적도 많았으니까.”

“하……, 씨발.”

강해건은 당장 무언가라도 때려 부술 기세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모주원은 어떡하느냐면서 저를 안쓰럽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막상 페로몬 학대를 당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렇게 대신 화를 내주며 페로몬으로 보호해준 사람은 강해건이 처음이었다.

“고맙습니다. 대신 화내 줘서. 그리고 보호해 준 것도요.”

그래서 깨달았다. 학창시절에는 어리니까 힘들었더라도, 이십 대가 되었을 때는 모주원 역시 우성 알파에 형질이 좋은 덕분에 적어도 한 회장 앞에서 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페로몬을 둘러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주원은 강해건에게 맞설 정도로 페로몬을 다룰 줄 알면서도 한 번도 한 회장 앞에서 한서림을 감싸주지 않았다.

이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서림이 페로몬 학대를 받을 때 모주원은 옆에 있으면서도 늘 안타까운 표정만 한 채 가만히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모주원이 저를 보호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간의 유난스러웠던 우정을 생각해보면 매번 가만히 있던 게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한 회장과의 관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림아, 괜찮아?”

한 회장을 무사히 룸으로 들여보낸 모주원이 급하게 다가와 한서림의 어깨를 잡고 세심하게 살폈다. 페로몬을 거둬들인 강해건은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여실히 나타내며 한서림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모주원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내 사람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시죠.”

극우성 알파에게서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소유욕이 번들거렸다.

60.

“그쪽보다 더 오랜 시간 알아 온 친구입니다. 정혼 따위로 맺어진 그쪽이 끼어들 사이가 아니라고요.”

기분 나빠하는 모주원의 말에도 강해건은 코웃음을 쳤다.

“우정이 얼마나 깊으면 페로몬 공격당하는 친구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건지 이해가 안 되네. 한 회장님을 경호하는 그쪽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적어도 서림 씨를 위하는 척하면서 위선 떨지는 말아야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쪽이 뭘 안다고.”

모주원이 이를 갈면서 먼저 페로몬을 개방했다. 오메가에게는 위협적일 만큼 공격적인 페로몬이었다. 그와 동시에 강해건도 만만치 않은 페로몬을 쏟아냈다. 강해건은 한서림을 보호 페로몬으로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 보자는 건가. 난 상관없는데 그쪽은 감당할 수 있겠어요? 친구라고 했는데 괜히 다치게 했다가 서림 씨한테 미움받을까 봐 걱정되네. 서림 씨가 나 미워하면 그쪽 책임입니다.”

강해건은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모주원을 박박 긁고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되었다.

“그만 해요. 주원아, 너도 얼른 가. 우린 나중에 얘기하자.”

한서림이 중간에서 중재했을 때야 두 사람은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모주원은 한서림 때문에 참는다는 듯이 끝까지 강해건을 노려본 후에야 돌아섰다.

“어차피 꼬리 말고 도망갈 거면서 덤비긴 왜 덤벼.”

둘만 남은 복도에서 강해건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들어가서 깽판 치고 싶네. 미친 척하고 페로몬으로 다 짓눌러버리고 싶어. 어떡하죠?”

“…….”

“허락해 주면 제대로 복수해줄 수 있는데, 나한테 기회 줄래요? 그래도 서림 씨가 그간 받은 고통에는 기별도 안 가겠지만, 작정하면 뇌에 문제 정도는 생기게 해 줄 수 있는데. 학대 가해자랑 방금 그 새끼 포함해서.”

“무서운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요. 나도 아버지랑 말싸움 좀 했더니 기력이 달려서요. 에너지 보충 좀 해야겠어요.”

“저런 쓰레기 새끼도 아버지라고…….”

강해건이 혼잣말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으나, 강해건의 팔을 잡아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는 한서림은 못 들은 척했다. 한서림 역시 한 회장이 쓰레기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복수를 하게 되더라도 제가 직접 하고 싶었다. 강해건의 고운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었다. 한서림이 먼저 따뜻한 손을 잡으며 깍지를 끼웠다.

* * *

“아, 흣……, 왜 자꾸……, 으응!”

강해건이 빨아올린 젖꼭지가 쓰라렸다. 얼마나 핥고 물고 깨물었는지 이제는 쾌감인지 통증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의무적으로 행하는 섹스에서도 전희는 없었으나 한서림이 만족하는지 계속 살폈던 강해건은, 오늘 처음으로 본격적인 애무를 하고 있었다.

페로몬 학대를 받아온 지난날을 위로하는 것처럼.

저녁을 먹고 와서 각자 씻고 한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 해도 섹스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강해건이 한서림의 품에 파고들어 목덜미에 키스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졌다.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으니 아마 베타랑 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럼 그동안 있었던 하룻밤 스캔들 상대들에게도 페로몬을 개방하지 말라고 했을까.

“흐, 으응……!”

불현듯 의심이 떠오르려는 찰나 반대쪽 젖꼭지가 깨물렸다. 강해건의 큼지막한 손은 지금껏 괴롭힌 젖꼭지를 유린하더니 허리와 옆구리를 마구잡이로 더듬었다. 크기를 키워 단단해진 강해건의 묵직한 성기가 허벅지를 짓눌렀다. 두툼하고 무거운 온기가 허벅지에 비벼지고 눌릴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하으……, 흣…….”

집으로 불러들인 오메가만 생각해 봐도 한서림은 제 의심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해건이 남성형 오메가만 만나면서 문란의 아이콘이 되어 스스로 이미지를 망친 이유는 발정 페로몬을 확인하려는 심산이었을 테니까. 저에게 페로몬을 개방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간의 섹스로 페로몬 향수를 발정 페로몬이라고 착각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게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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