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주시하고 있었더니 답지 않게 볼을 붉히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대놓고 유혹하는 페로몬이 온몸에 기어오르며 역겨움을 유발했다.
‘짜증 나게 하지 말지. 되도 않는 연기로 누굴 속이려고.’
낮은 저음이 차갑게 울렸다. 잠시 움찔했던 오메가는 이내 사락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메가를 소개해주는 브로커는 지금까지 비밀유지 조항을 잘 지켜왔고, 오메가들에게 돈 받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이해시켜서 보내주었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돈을 버는 행위였다. 그래도 오늘 그놈처럼 꼬여내려고 하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브로커에게 한소리 해야할 듯했다. 브로커에게 제시한 조건 중 하나가, 만나서 제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허락도 없이 유혹하는 천박한 페로몬을 뿌려댔으니까.
‘발정 페로몬만 확인하는 일이라는 건 이미 듣고 왔을 텐데요. 싫으면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가도 됩니다. 그러면 돈은 못 받아가겠네요.’
브로커까지 통해가면서 마구잡이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강유건의 생일파티에 왔던 동행자 2인들 중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꽤 많았던 탓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신원을 확인하고 출입시켰지, 동행인들은 이름만 적은 게 전부였다. 비약적이라는 건 알지만, 막말로 동행인들이 적은 이름이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확인한 결과, 그 오메가는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점이 있었다. 브로커에게 점만이라도 확인해서 보내라고, 돈을 더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건 본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라면서 거절했다. 그 속내야 뻔했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점이 있는 남성형 오메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웃돈을 얹어서 몇 번 안 되는 횟수로 받느니, 숫자로 미는 게 브로커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돌아서서 자위해요. 발정 페로몬으로 변할 때까지.’
‘…….’
‘왜요. 포르노라도 틀어줘요?’
손대지 않고 발정 페로몬을 확인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돌아서서 하라고 시키는 건 차마 그 더러운 모습을 눈에 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무감하게 창밖을 보면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고, 오메가가 발정 페로몬을 내뿜는 순간, 역겨움에 토기가 치밀어 올라 그대로 약속한 봉투를 쥐여주고 내쫓았다. 이번에도 아니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다잡는 것이 어려웠다.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 놈이 그동안 연기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연기가 훨씬 쉬웠다.
“하아…….”
강해건은 제 몸 위에서 잠든 한서림을 조금 더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한서림이 잠깐 움칠거리며 잠투정을 하는 것처럼 바르작댔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한서림의 수면 페로몬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개운함을 느끼자, 이 페로몬에 감싸여 잠들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랐다. 하지만 목덜미에 코를 박고도 원하는 만큼의 페로몬을 흡수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잠들어 있다지만 애초에 한서림 자체가 페로몬을 개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긴, 그조차 제가 시킨 일이었다.
한서림의 평상시 페로몬과 발정 페로몬은 불쾌하지만 그의 수면 페로몬은 달콤하다. 그 말은, 한서림에게 잘 때만 페로몬을 풀라고 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강해건은 앞으로 한서림을 제 침대에서 자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코를 박고 있는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페로몬을 핥아 먹는 것처럼.
그리고 강해건이 한서림의 안에서 크기를 키우려는 성기를 빼낸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한서림과의 섹스는 삽입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데 물고 빨고 하는 것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 욕심은 내도 되지 않을까, 그 정도 자격도 없는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51.
* * *
눈을 떴을 때 한서림은 어리둥절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노팅 도중 기절했던 것 같은데, 온몸을 감싼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제 페로몬 향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페로몬을 거둬들인 후 온기의 정체를 확인했다. 예상은 했으나, 눈앞에서 보자 확실히 더 얼떨떨했다.
강해건이 왜 나한테 안겨서 자고 있는 거지…….
한서림의 목덜미와 가슴 부근에 얼굴을 묻은 강해건이 폭 안겨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강해건이었다. 강해건과 둘이 사는 집이고, 기절 직전까지 섹스한 상대이며, 강해건이 노팅하던 중에 기절했으니, 지금 이 사람은 당연히 강해건이어야 하는데, 이런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제 목덜미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저를 안고 있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몹시 작게 느껴졌다.
“…….”
지금 상황만 보자면, 다른 오메가를 집으로 들여 발정 페로몬을 흘리게 하고, 배려 없이 자위도구 취급의 섹스로 한서림의 기분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던 사람은 강해건이 아니었던 건가 잠시 고민해야 했을 정도로, 품 안에 따뜻하게 안겨있는 넓은 등이 안쓰러워 보였다.
흐트러진 흑발의 뿌리 끝에 은발에 가까운 회색이 자라고 있었다. 극우성 알파로 발현할 때 색소가 옅어졌다고 했었나. 발현은 보통 평균적으로 16세 전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와 관련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신비로운 색감을 갖게 된 것마저 제 탓처럼 여겨져서 이상했다.
강해건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어 보았다. 강해건의 행동에 언제 불쾌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았느냐는 듯이, 한서림의 마음에는 묘한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들어찼다. 저 때문에 페로몬 폭주를 겪어야 하는 강해건이 가여웠다.
“…….”
창밖에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것을 보니 너무 일찍 눈을 뜬 모양이었다. 몇 시인지 궁금했으나 벽시계 하나 없는 방에서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강해건이 깰 것 같았다. 한서림은 지금 이 시간 동안만이라도 편히 쉬라고 생각하면서 강해건의 몸을 마주 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혹사당한 몸만큼이나 심장에서도 근육통이 느껴지는 것처럼 욱신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한 낮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깨어있던 것인지, 색소가 옅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저를 직시하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
“…….”
말없이 서로의 눈만 응시하기를 한참, 한서림은 기분이 묘하게 이상해지려고 했다. 마치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뜨거운 밤을 보내고 맞은 아침, 자는 동안에도 보고 싶었던 것처럼 애정 넘치는 눈빛 같지 않은가. 제가 한 생각에 소름이 돋은 한서림이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며 분위기를 깼다.
“좆같았던 기분은, 좀 나아졌어요?”
“……그런 말 해도 별로 양심의 가책 같은 거 안 느끼는데. 미안하지도 않고요.”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됐는지, 강해건의 저음이 조금 허스키했다. 얼굴에 달고 있는 옅은 미소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상관없어요. 그냥 내가 말 잘 듣는 인형 역할을 잘하고 있나 궁금했던 것뿐이니까.”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은 강해건이 제게 가질 감정이 아니었다. 찾고 있는 오메가가 저라는 걸 알게 되면 복수심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뭐가요?”
“말 잘 듣는 인형 할 필요 없다고요.”
강해건이 상냥하게 속삭이듯이 말하며 한서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더라면 강해건이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할 만큼 부드럽고 다정한 행동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혹시 집으로 오메가를 들이고 어제 배려 없는 섹스를 했다고 미안해하는 건가. 양심의 가책 같은 거 안 느끼고 미안하지도 않다고 했으면서, 강해건은 입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었다.
“왜요? 잘하고 있다면서요.”
“너무 잘해서 재미가 없나…….”
세 달 전만 됐어도, 아니 두 달 전만 됐어도 이게 사람을 가지고 노나, 하고 속으로 욕했을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행동 또한 닭살 돋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속내를 파악하려고 애썼을 것이고. 그런데 일정한 속도의 손길이 기분 좋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게 귀여워 보이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아까 잠깐 깼을 때만 해도 안쓰럽고 가여웠는데.
“이거 봐요. 재미없게 반응도 안 하네.”
“……어느 장단에 맞춰서 캐릭터를 설정해야 하는지 눈치 보고 있는 겁니다.”
“그냥 원래 성격대로 해요. 나한테 맞출 필요 없으니까.”
“그럼 나 진짜로 내 성격대로 합니다?”
“그래요.”
지금의 강해건은 진짜 이상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달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이상했고, 쉼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이상했고, 성격이 개조된 것처럼 착한 척하는 것도 이상했다. 한마디로 다 이상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저 스스로가 제일 이상했다.
“지금 한 말 무르고 싶다고 해도 모른 척할 겁니다.”
“얼마나 성격이 괴팍하기에 이러는지 궁금해지네요.”
“……일단 비켜 봐요. 허리랑 다리가 너무 쑤셔서 욕조에 좀 들어가야겠으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강해건의 반응을 보기 위해 조금 강한 어조로 말했는데, 강해건은 순순히 손을 떼어내고 몸을 떨어트렸다. 얼른 욕실로 가라는 것처럼 턱짓까지 했다.
이렇게 쉽게 온기가 멀어질 줄 알았더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할 걸 후회가 됐다. 상당히 아쉬웠다. 그런데 허리랑 다리가 쑤시는 것은 사실이라 반신욕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제 저녁도 거르고 시달린 탓에 허기도 져서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뭐 먹을래요? 주문해놓고 씻으러 들어가게요.”
“……외식할까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기삿거리 제공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결혼하면 끝인 줄 알았더니 언론플레이는 아직도 하는 모양이었다. 한서림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 서운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강해건이 자기 자리에서 정혼 비즈니스를 충실히 이행하는 만큼, 저 역시도 그러면 되는 것이다. 아니, 강해건이 이 비즈니스에 불성실하다고 해도 그의 인생을 망친 저는 강해건에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니 욕심내면 안 된다.
강유건이 옷장에 채워 놓은 옷들 중, 강해건은 한서림이 입을 옷을 직접 골라주었다. 한서림은 군말 없이 입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나서 막상 나가려고 보니 촌스럽게 강해건과 커플룩을 입은 모양새였다. 엄밀히 말하면 완전 똑같지는 않고 디자인의 디테일이 살짝 다른 시밀러룩에 가까웠다. 사진 찍힐 것을 대비한 모양이었다.
“손.”
“……네?”
아파트 근처 고층 건물 최상층에 있는 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갑자기 강해건이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제 손도 작지는 않은 편인데 강해건의 손은 유독 더 컸다. 문득 어젯밤 골반을 움켜쥐었던 느낌이 생생히 살아났다.
아, 미쳤나.
“왜 얼굴이 빨개져요? 나랑 손잡을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건가?”
“역시 도끼병이 있나 봐요. 낯부끄럽고 오글거려서 빨개진 겁니다.”
“결혼도 한 사이인데 손잡는 게 왜 낯부끄럽고 오글거려요?”
“……그래요. 이왕 목적을 가지고 온 거 제대로 합시다. 어떻게, 깍지도 끼울까요? 아니면 귀엽게 엄지만 잡아줄까요?”
뻔뻔하게 대답하자, 강해건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웃더니 손을 잡아왔다. 자연스럽게 손가락 마디마디가 얽히며 깍지가 끼워졌다. 온기가 들어찬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적응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안내를 받아 자리에 가기까지, 한서림은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손을 놓고 싶은데, 마주 닿은 온기가 다정해서 놓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이 놓아졌다. 어쩐지 아쉬웠다.
“물티슈 좀 주시겠어요?”
주문을 마치면서 한서림이 서버에게 부탁했고, 서버가 물티슈를 가져다주자마자 하나는 강해건에게 건넸다.
“찝찝했죠? 내가 원래 손에서 땀이 잘 안 나는데 엘리베이터 안이 좀 더웠나 봐요.”
“……여기는 안 더우니까 땀 안 나겠네요.”
테이블 위로 올라온 손이 방금 물티슈로 닦아낸 한서림의 손을 맞잡았다. 얼떨결에 손이 끌려간다 싶은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서로를 마주 보며 테이블 위로 각자의 한쪽 팔을 뻗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우고 있는 닭살 돋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강해건의 뛰어난 연기력을 익히 알고 있는데도 까만 렌즈를 낀 눈동자가 직선적인 애정을 보내오니 아랫배가 왈칵 조여지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죠?”
“불편하면 내가 옆자리로 가고요. 나란히 앉아서 먹어도 나는 상관없는데.”
“아뇨. 주문한 음식 나올 때까지 이대로 있죠. 사진도 이게 더 낭만적으로 찍히겠네요.”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자, 강해건이 엄지로 은근하게 손등을 쓸며 피식 웃었다. 안 속는다는 듯이.
“낭만적으로 찍히고 싶으면 좀 더 예쁘게 웃어 봐요. 눈으로 욕하지 말고.”
52.
강해건은 정말로 주문한 요리가 나올 때까지 테이블 위에서 손을 맞잡고 있었다. 테이블끼리의 간격이 꽤 있어서 근처 테이블의 대화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 말은, 한서림과 강해건도 표정관리만 잘하면 어떤 대화를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결혼 전과 달리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한서림은 이제 꽤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복화술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아마도 탁월한 연기력을 갖춘 강해건에게 배운 것이 효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손에 땀 차는 것 같은데, 찝찝하지 않아요?”
“별로.”
“나는 찝찝합니다.”
“참아요.”
“……이제 말 잘 듣는 인형 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하라더니.”
“잘 안 들려요. 뭐라고 했어요? 내가 옆자리로 갈까요?”
혹시라도 근처 테이블에 들릴까 봐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는데, 강해건은 뻔히 다 들은 표정으로 싱글거리며 되물었다. 이전에는 몰랐으나 뉴욕에서부터 느낀 점은, 강해건이 예상외로 장난기가 많고 생각보다 여우 같다는 거였다.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예전에는 보여주기 위한 것과 진짜를 구분하지 못했는데, 신혼여행 때부터는 이상하게도 구분이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이 헷갈렸고, 이 또한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음식 나왔네요. 아쉽고 서운하지만 이제 손을 놔야겠어요.”
타이밍 좋게 다가온 서버를 보며 한서림이 환하게 웃었다. 제 손에서만 땀이 나는 탓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강해건은 비위가 좋은 모양이었다. 사진에 찍히기 위해 이런 찝찝함까지 참아주는 걸 보면.
“아쉽고 서운하면 내가 옆자리로 갈까요? 나는 왼손으로도 먹을 수 있는데.”
“……적당히 해요. 이 정도면 사진은 찍힐 만큼 찍혔으니까 밥은 편하게 먹자고요.”
서버가 요리를 내려주고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한서림이 상큼한 미소와 함께 복화술을 했다. 강해건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외식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강해건은 식사 내내 한서림을 챙겼고, 한서림 역시 그 정도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SNS에는 실시간으로 두 사람의 사진이 인증되고 있었다.
“오늘부터 침실은 같이 써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강해건의 난데없는 제안에 한서림은 약간 놀란 표정을 했다. 아까 눈떴을 때 저에게 폭 안겨서 잠들어 있더니, 어쩌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타입인가 싶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 강해건의 수많았던 하룻밤 스캔들과 염문설을 생각해 보면, 누가 옆에 없으면 허전해서 못 잘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초반에도 눈떴을 때 먼저 일어나지 말고 옆에 있어줄 걸 그랬다. 그때는 저처럼 누군가와 아침을 맞이하는 걸 싫어할까 봐 눈치를 봤었는데.
“갑자기 왜요?”
솔직히 누군가와 함께한 침대에서 잠을 잔 것은 강해건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아서 적잖이 놀라기도 했었다. 이 또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반응인지, 익숙함에서 생긴 습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서림 씨 수면 페로몬이 꽤 편하더라고요.”
“네?”
잠든 사이에 무의식중에 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강해건이 편하게 느낄 줄은 미처 몰랐다.
“뭘 그렇게 놀라요?”
“그……, 아니, 언제, 그러니까…….”
한서림은 제 페로몬이 강해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몰라서 제대로 된 단어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그런데 강해건을 보니 저의 수면 페로몬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본인 입으로도 꽤 편하다고 했고.
하지만 만일의 사태라는 것이 있는데 정말 함께 자면서 수면 페로몬을 풀어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부작용이 잠재되어 있다가 갑작스럽게 페로몬 폭주를 일으키게 하면 어떡하지. 발정 페로몬이 아니면 괜찮은 건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들이 한서림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페로몬 풀지 말라고 한 거 못 지켜서 그래요? 이상하네, 약속 못 지켰다고 해서 서림 씨가 창백해질 정도로 험하게 대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나 베타 아니고 알파예요. 수면 페로몬이 무의식중에 샌다는 기본 상식도 모를까 봐요?”
“그래도 미안합니다.”
“나 지금 운전대랑 얘기하나. 서림 씨 수면 페로몬 편하고 좋아서 같이 자고 싶다고 한 건데, 왜 자꾸 사과를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강해건이 운전대를 톡톡 치면서 사람 좋게 웃었다.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된 페로몬이 저의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이었다는 걸 알게 되어도 제 페로몬을 편하다고 여겨줄까 의문이었다. 역시 그동안은 페로몬 향수를 뿌려서 강해건이 거부반응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런데 몸이 더 망가질 수 있는 위험성 앞에서 강해건이 제 진짜 페로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의아했다. 아무리 당시의 페로몬이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이었다고 해도 히트사이클 때와 비슷했다. 그러니 폭주를 불러일으킨 제 페로몬에, 쉽게 말해 비슷한 향인 수면 페로몬에도 강해건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켜야 정상 아닌가 싶은 거다.
“아니면 나랑 한 침대에서 자기 싫어서 그래요?”
“그럴 리가요.”
“이번엔 얼굴로 욕하네. 어차피 일주일에 2회 이상 섹스하려면, 한 침대에서 자는 게 더 편하지 않아요? 매번 하자고 말하기도 그렇고. 같이 자다 보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잠버릇이 심해서요.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잠꼬대도 합니다. 그래서 매일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좀…….”
“되게 얌전히 자던데. 없는 잠버릇도 만들어낼 정도로 나랑 같이 자는 게 싫어요? 은근히 기분 나쁘네.”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잠버릇이 심해요. 그날만 얌전했던 겁니다.”
한서림은 저의 수면 페로몬이 강해건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이상 피하고 싶었다. 혹시 예전 의사에게 찾아가서 물어보면 답변을 들을 수 있으려나. 그런데 워낙 특이케이스라서 의사라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의견을 좁히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강해건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은근슬쩍 손을 잡아 왔다. 작정하고 근사한 미소를 보이는 걸 보니 미인계를 쓰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같이 자는 걸 동의할 수는 없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예쁜 척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여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손을 잡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누구 마주칠 수도 있잖아요.”
“……이거 강해건 씨 집 전용 엘리베이터인 거 알고 있거든요.”
“안 속네.”
“손잡고 싶으면 그냥 말을 하지 무슨 그런 성의 없는 핑계……, 어? 갑자기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요?”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가장 높은 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였다. 아까보다 제 손에서 땀이 기이할 정도로 많이 나서 축축해졌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살펴보니 그건 제 손에서 난 땀이 아니었다. 강해건의 양손이 다 젖어있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미인계라고 여겨질 정도로 눈부시게 웃은 게 거짓말처럼, 창백해진 얼굴도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강해건 씨, 어디 아파요? 이 식은땀 좀 봐. 갑자기 왜 그래요?”
“……아, 씨발.”
“119 부를까요? 괜찮아요?”
“오늘은 호텔가서 자요. 내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로 집에 오지 말고.”
“네? 아니,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러라면 좀 그래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아……, 연락할 때까지, 절대 오지 말아요. 죽고 싶지 않으면.”
고통 어린 거친 숨을 뱉어내면서 강해건은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마지막 말은 거의 씹는 듯이 말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강해건의 걱정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한기가 끼치고 오한이 든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의 페로몬에서 짙은 공격성이 느껴졌다. 마치 부친에게 페로몬 학대를 당할 때와 비슷했다.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며 살갗을 기어오르는 불쾌감과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해건은 비틀거리며 혼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닫히는 문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하아, 하아…….”
한서림은 가슴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더 강해건의 저런 페로몬에 노출되어 있었더라면, 기어이 피부가 타들어가고 찢기는 듯한 통증을 겪었을 것이다. 급하게 몰려온 두려움은 겁을 먹게 만들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당황스러워하다가 불현듯 강유건과의 통화가 생각났다.
-몇 개월 전에도 페로몬 폭주가 있었거든. 그래도 전조 증상을 빨리 알아채서 주치의 선생님 바로 불렀다더라고.
‘주치의 선생님이 오시면 괜찮은 거야? 뉴스에서는 약도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보통 특수 억제제를 먹는다고는 하는데 그게 또 듣는 사람이 있고 안 듣는 사람이 있나 봐. 해건이는 후자고. 그래서 수면제를 다량 투약해서 폭주가 지나갈 때까지 강제로 재우는 거지. 격리시켜 놓으면 자는 동안 페로몬이 제멋대로 폭주해도 다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힘들지만 그걸 겪어야 하는 당사자는 오죽하겠어.
강해건이 겪어야 하는 지옥은 한서림의 상상보다 더 끔찍했다. 소름이 잔뜩 돋은 살갗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다시는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짊어지고 살아왔던 지옥을 없애준 구원자가 대신 지옥 불에 빠져있었다. 차라리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로 다치는 게 나으려나, 언젠가 했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소름 끼치게 깨달았다. 또다시 공포 속에서 살게 되면 이제는 정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어렸고 뭘 모르기도 했던 시기라서 늘 움츠린 채 긴장 속에서 겨우 버틸 수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일상의 안락함을 알아버려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이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이성과 달리 한서림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53.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강유건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정말로 페로몬 폭주의 전조 증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일이 설명되지 않았다.
횡설수설했는데도 귀신같이 알아들은 강유건은 주치의에게 연락한 후 바로 오겠다며 한서림에게 아파트 건물에서 나가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도 한서림은 주저앉은 채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느꼈던 예전의 공포와 강해건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 대한 죄악감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