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상했다. 이건 꼭 질투하는 것 같아서. 제멋대로에 기분도 오락가락하고 성격도 더러운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저의 잘못이었다.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자꾸 심장이 욱신거리고 저려서 한서림은 손으로 심장 부근을 꽉 움켜쥐었다.
죄책감이 좋아하는 감정으로 바뀔 수도 있나.
몇 번이나 떠올랐던 근본적인 질문이 또다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제가 겪었던 지옥 속에서 사는 강해건이 안타깝고 불쌍했을 뿐인데. 그래서 사죄하고 싶었던 건데. 저야 비정기적 발정기에 시달렸을 뿐 타인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으니, 어쩌면 강해건이 저보다 더 힘들고 괴로울 터였다. 그래서 불쌍했고 그게 저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걸 알게 돼서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동정이나 연민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인가.
역시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강해건이 다른 오메가를 집에 들인 순간 상처받았다는 것이며, 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욱신대고 아프다는 것이다. 자격이 없다고 해서 아픈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강해건이 원한다면 더한 일도 기꺼이 감내할 자신이 있었는데,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 혼란스러웠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커진 마음이 수습되지 않았다. 조금씩 인지하고 있던 마음이, 질투에 휩싸이자 주제도 모르고 본색을 드러내려고 했다.
아, 잠깐. 그런데 언제부터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더라…….
어째서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며 강해건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스스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강해건은 분명히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고, 성격도 괴팍하며, 기분파에다가 제멋대로에 변태이기까지 한 사람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고 여기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죄책감과는 별개로 속으로 욕도 정말 많이 했는데.
설마 잘생긴 얼굴로 홀릴 것처럼 웃으며 여러 번 설레게 해서? 아니면 원래 팬이었으니까 내적 친밀감 덕분에 장벽이 낮아서? 혹은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 샤워로 비정기적 발정기를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무한 감사를 하는 처지라? 그것도 아니면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그 어떤 이유를 가져다 대도 한서림은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착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팬이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도 강해건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구원자에 대한 감사함이었으니까. 객관적으로 강해건이 매력적인 건 맞지만, 정말로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강해건의 페로몬에만 반응하니까 감정마저 착각한다는 것이 가장 그럴싸한 이유였다.
역시 정이 들어서 감정을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페로몬의 지배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강해건의 페로몬에는 반응하니까. 객관적으로는 좋아할 자격도, 좋아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힘겹게 떠올려낸 이유들이 전부 억지스러워서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기어코 페로몬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합리화를 한 후에야 한서림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흐읏…….”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듣기 불편한 신음과 함께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이 더욱 진하게 끼쳐왔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몸을 집어삼킬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의 반응 없이 페로몬만 감지하는 것인데도 그랬다. 다만 의아한 것은 강해건의 페로몬 향은 전혀 맡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스트 룸의 방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원래 사용하던 게스트 룸을 한서림이 차지한 후,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더니 새로운 게스트 룸이 생겨 있었다. 처음에는 와서 자고 갈 사람이 없을 텐데 왜 게스트 룸을 새로 만들었나 싶었다. 가끔 강유건이 올 수도 있으니 그런 건가, 이내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한서림은 오래 생각하기를 거부하며 제 방에서 소취제를 가지고 나와 거실과 주방 구석구석에 뿌린 후,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심장이 욱신거리고 저린 이상증세는 이어졌으나,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린 덕분에 무시할 수 있었다. 저들이 밀폐된 방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켠 한서림은 매장별 판매추이 분석표를 확인하며 집중하려고 애썼다. 사람의 취향이 아무리 제각각이라고 해도 인종별로 선호하는 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미국은 날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각 주마다 매출 1위의 향이 달랐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비슷한 계열의 향들이 각 주마다 1위를 차지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강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향수의 인기가 많았다.
“…….”
겨우 10분이나 지났을까. 도어락이 해제되었다가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예상보다 빨리 불청객이 돌아간 것이다. 거실로 나가볼까 하다가 괜한 짓이라는 걸 알아서 일에 집중했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한국은 가장 은은한 플로럴 계열의 향들이 인기가 좋았다. 어떤 차이로 인해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겨우겨우 일에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연스럽게 대답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인 사람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강해건이었다. 한서림은 풍겨 오는 페로몬으로 강해건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 캐치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표정 관리를 했다.
“손님은 돌아갔어요?”
“내가……, 지금 기분이 아주 좆같은데, 말 잘 듣는 인형 좀 할래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옷 벗고 다리 벌려요.”
방금 전까지 다른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을 풍기게 했으면서 뻔뻔하기도 하지.
그러나 강압적이면서도 무례한 요구에도 한서림은 노트북을 정리하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제 입으로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고 한 탓에 담담하게 표정 관리를 해내고 있었으나, 시궁창에 처박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페로몬 풀지 말아요.”
이미 계약서에도 추가된 사항을, 강해건은 명령하듯이 한 번 더 짚었다. 한서림은 티셔츠만 벗어낸 후에 페로몬 향수의 향을 제거하기 위해 소취제를 뿌렸다. 짐작해보건대, 강해건은 이게 저의 진짜 페로몬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듯했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진짜 페로몬을 풀게 되면 강해건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간헐적인 그의 페로몬 폭주에 불을 지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한서림은 페로몬 향수의 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마저 옷을 벗었다. 제 기분이 더러운 것과는 별개로 계약서 조항은 이행해야 했다. 일주일에 2회 이상 섹스를 하기로 했으니 강해건이 원할 때 거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주말에 했던 게 마지막 섹스였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 연구실에 나갔으니 이번 주는 오늘이 두 번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강해건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아까 그 오메가한테 휘둘렀던 좆대가리를 어디에 들이대느냐고 따귀를 날리면서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그만큼 화가 나고 짜증 나고 비참한데,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의 농간 앞에서 상처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일말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서림은 담담한 표정으로 속옷까지 벗어내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 자, 잠깐……!”
언제 곁으로 다가온 것인지, 한서림이 등을 보인 채 침대로 올라가자마자 우악스러운 손길이 허리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성기의 끄트머리를 구멍에 처박을 것처럼 들이댔다. 당황스러움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옷도 벗지 않은 채 바지 안에서 발기한 성기를 꺼내 쥐고 있는 강해건이 보였다. 강해건의 것이 평소에도 묵직함이 느껴질 정도로 크긴 했으나,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기한 것 같지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세워서 위협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말 잘 듣는 인형이라면서요. 왜 거부해요?”
“아니, 거부가 아니라, 무식하게 처박으려고 하니까 그렇잖아요!”
“물고 빠는 거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젖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찢어질지도 모른다고요.”
“하아……. 무슨 인형이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해. 박고, 흔들고, 싸고. 한서림 씨를 임신시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면 충분한 거 같은데.”
냉정하게 차가운 말을 듣는 순간, 싸한 한기가 살갗을 기어올랐다. 신혼여행에서 함께 했던 강해건과 지금의 강해건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49.
“…….”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기대할 이유가 없다. 강해건이 원하는 대로 전부 맞춰주고 아이를 낳아주는 것까지. 그것까지만 해내면 된다. 그런다고 해서 그의 페로몬 폭주가 멈추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한서림이 생각한 사죄의 방법이었다. 그러니 강해건이 저에게 무슨 짓을 해도 감상적으로 굴 이유가 없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자 불쾌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저 때문이라고, 제 탓이라고 여기면 되는 일이다. 다만, 머리로는 잘 알겠는데 가슴이 저리는 이상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강해건이 아무리 열 받게 해도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미운정이라도 들었나 보다. 한서림은 욱신거림을 무시하며 단정한 동작으로 엎드려서 자세를 잡았다.
“그래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말 잘 듣는 인형은 닥치고 있을 테니까.”
머리로 정리한 덕분에 조금 더 상냥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오메가를 집으로 불러들인 일이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질투할 일이 아니고,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기로 했음에도 한서림은 삐딱해진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기려고 했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는 게 옳은 표현일 테다.
뭐라고 한마디 할 것 같았던 강해건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한서림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후로는 몸의 대화의 향연이었다.
“아, 윽……. 조금, 만 천천……, 하윽!”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폭렬하게 안을 때려 박았다. 극점이 짓눌릴 때마다 한서림은 사지를 벌벌 떨면서 허리를 휘었다.
“아!”
찰싹, 엉덩이로 커다란 손바닥의 힘이 가해지는 순간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안에 물고 있는 그의 것이 한껏 조여졌다.
“왜 이렇게 꽉 물어요. 좀 놔줘야 움직이죠.”
그동안 강해건과 몇 번이고 했던 섹스와는 달랐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키스나 애무가 없었을 뿐 섹스를 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자위기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섹스는 둘이 하는 행위인데 지금의 강해건은 배려가 조금도 없었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아마 손님으로 왔던 오메가 때문에 제 기분이 더러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강해건은 사정과 노팅만이 목적인 것처럼 거칠고 사납게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의무적인 삽입에도 빠른 속도로 극점만을 찔리고 있는 한서림은 그의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제, 발……, 흐읍, 살살 좀……, 아아!”
찰싹, 다시 한번 엉덩이에 화끈거림이 지나갔다.
“좋다고 허리 흔들면서 씹어대는 주제에, 엄살 부리지 마요.”
쾌감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몸은 본능적으로 더 큰 자극을 좇아 허리를 흔들었다. 뜨거워진 내벽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처럼 강해건의 성기에서 정액을 짜내기 위해 한껏 조이며 차지게 움칠거렸다. 차마 한서림이 불평불만을 드러낼 처지가 아니라서 참고 있지만, 이렇게 자위기구 취급하듯이 일방적으로 날뛸 거라면 굳이 왜 지금 섹스를 하자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빨리 임신시켜서 이혼하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야 조금 더 수월하게 그 오메가를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꽤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비슷했던 강해건의 기분이, 그 오메가가 다녀간 이후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유추해볼 때, 강해건 역시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닌 듯했다. 저를 찾아내기 위해 아무나 안 들인다는 집으로 오메가를 들이고, 타인의 페로몬 향을 역하게 생각하는데도 발정 페로몬을 참아냈다고 생각하니 그의 인생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아마 강해건은 저를 찾기 위해 매번 불쾌하고 싫은 일을 견뎌냈을 것이다.
아니,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었다. 강해건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짜증을 억누르는 만큼 한서림도 상처받지 않은 척하며 비참함을 감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저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깊어졌고, 자기합리화를 하려고 애쓰면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강해건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서운해졌다.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할 감정이 공존하며 한서림을 혼란스럽게 했다.
한서림은 차라리 빨리 강해건이 사정하고 노팅해서 잡다한 생각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자위기구 취급을 당하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새삼 어려울 것도, 실망할 이유도, 슬플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흐윽……, 아, 으응! 읏…….”
합리화한 정신과는 별개로 침대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 * *
“후우…….”
노팅이 풀리자, 강해건은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조금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뱉어냈다. 품에 안겨있는 남자의 몸이 따뜻했다. 한서림은 강해건이 두 번의 사정을 하고 첫 번째 노팅을 할 때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다. 침대로 무너지는 몸을 잡아채 돌려서 제 몸 위로 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노팅이 풀릴 때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한서림의 몸을 안고 있었다.
부풀었던 성기가 크기를 줄이면서 노팅이 풀렸으니, 이제 그만 한서림의 몸을 제 몸에서 내려두어도 되건만, 강해건은 움직임 없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냥 그러고 있고 싶었다. 불편할 수 있는 이 자세가 생각보다 꽤 편하고 안정감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이게 알파로서의 본능인지, 한서림에 대한 특별한 마음 때문인지 헷갈렸지만, 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두 달간 일주일에 2회 이상씩 한서림과 섹스했고, 섹스할 때마다 노팅을 했는데도 아직 임신 소식은 없었다.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된 오메가를 찾는 것과 별개로, 혹시나 이혼 후에도 가능하다면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성이 잘 맞는 것인지 속궁합도 좋았고, 할 때마다 전에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우니까.
“…….”
한서림은 신기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고 했던 말 때문에 성질을 죽이고 있는 걸 아는데도 그와 함께 있으면 편했다. 신혼여행 기간 내내 제가 어떻게 지냈던가. 지금까지 페로몬 폭주가 언제 터질지 몰라서 매일을 불안한 긴장 속에서 보냈는데, 뉴욕에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몹시 마음이 평온했다. 우스운 생각이라는 걸 아는데도, 한서림과 함께 있으면 긴장이 풀리고 즐겁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혼으로 인한 계약 이행의 일부일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한서림과의 시간과 섹스를 꽤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아까 낮에 왔던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에 급격히 나빠진 기분이 지금은 나아졌다.
한서림은 여러 의미에서 욕심나는 사람이었다. 일단 외모가 완벽하게 제 취향이었고, 고분고분한 척하다가도 실수인 것처럼 내뱉는 날카로운 진심들도 유쾌했으며, 대화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한 것은 물론, 전희 없는 섹스마저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자꾸만 한서림에게로 이끌리는 시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페로몬 폭주만 아니라면 이대로 제 옆에 평생 눌러 앉혀 놓고 싶을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그래서 다치게 할 수 없었다. 부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와도 상관없으니, 폭주 직전에 지금까지처럼 전조 증상이 강하기만을 바랐다. 그래야 한서림을 먼저 피신시킬 수 있을 테니까.
강해건은 어떻게 봐도 성정이 바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첫 번째 페로몬 폭주에서 폭격을 받고 다친 사람이 강유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며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치료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돈으로 보상해준 이후에는 기억에서 지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편한 사실은 잊고 사는 게 편하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 그만큼 강해건은 타인이 받는 피해뿐만 아니라, 타인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잘도 자네…….”
그런데 언제부터 한서림이 강유건에게만 해당하던 예외가 되었을까.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몸인 탓에, 강유건을 비혼주의자라고 외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자신 역시 평생 누군가에게 감정을 주지 않고 외롭게 살겠다고 결심했다.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페로몬 폭주로 다친 강유건이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스로에게 했던 맹세였다.
강유건이 얼마나 아이들을 예뻐하는지 알고, 자기 아이를 낳아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라고 했기에, 가장 소중한 형의 희망을 빼앗은 죄로 저는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여겼다. 이후 강유건은 비혼주의자를 선언하며 모든 관심을 회사로 돌려 일 중독이 되었으나, 강해건이 볼 때는 현실도피이자 살아내려는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어떻게 혼자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한서림은 욕심나는 사람인 동시에 곁에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피해왔던 일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저도 모르게 즐거워하다가 정신이 확 들고는 했다.
그런데도 욕심이 나니 미칠 노릇이었다. 저는 8년 전의 그 오메가를 찾아내서 각인해야 하는데. 그래서 애초에 계약서에 각인 금지 항목과 2세 출산 이후 이혼이라는 항목을 넣은 것인데.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이 커지는 게 느껴질수록 불편했다.
“아…….”
잠든 한서림에게서 아주 미약하게 페로몬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 한서림이 은은하게 풀고 다니는 향과는 전혀 달랐다. 의식해서 조절하는 평상시의 페로몬, 잠들었을 때 무의식중에 흘리는 수면 페로몬, 흥분하면 쏟아지는 발정 페로몬이 전부 조금씩 다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역겹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아니,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져서 취하는 기분이었다.
50.
“…….”
강해건이 오메가의 페로몬에 역함을 느끼지 않은 것은 페로몬 폭주가 일어난 이후 처음이었다. 왜 기분 좋게 달콤한 것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한서림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겨서 페로몬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한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어서 한서림에게 익숙해진 탓에 거부반응이 없는 것인가. 답을 알 수가 없는데도 달콤한 향기가 폐부를 파고들며 마음을 편해지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초반에는 한서림의 구역질 나는 페로몬 냄새를 참아가면서 섹스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그런데 한서림의 평상시 페로몬과 발정 페로몬의 냄새가 달랐던가…….
언제나 토기 치미는 냄새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무시했던 터라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달랐을 것이다. 평상시 페로몬과 발정 페로몬의 향이 같은 알파나 오메가는 절대로 없으니까. 역한 것은 매한가지라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세 가지의 페로몬 향을 가지고 있는데, 평상시 페로몬, 수면 페로몬, 발정 페로몬이었다. 그 세 가지의 페로몬 향이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고유의 향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서 느끼는 향은 전부 달콤하거나, 전부 역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한서림의 수면 페로몬이 몹시 좋았다. 그동안 한서림에게서 풍기던 향에 토기가 치밀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아. 마음이 생기면 싫었던 페로몬 향도 좋아질 수 있는 건가.
만약 이 가설에 신빙성이 있다면 지금의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된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조만간 정 박사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한서림에 대한 마음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뉴욕에서부터였으니 얼마 안 되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짜증 나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부러 이중호를 데리고 갔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존재를 주장하는 무의식의 감정이 한서림과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게 했다. 뉴욕에서는 멍청하게 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그저 한서림이랑 있으면 재미있어서라고 여겼다.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 것은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때쯤이었다.
“…….”
그래서 일부러 오늘 오메가를 불렀다.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건 강해건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다. 한서림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느꼈으나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여겼다. 만에 하나 한서림도 저와 같은 감정을 키우고 있다면 곤란하니까. 아니, 상처받은 게 아니라 불쾌했을 것이다. 강유건이 비즈니스를 할 때 감정이 들어가는 순간 망하는 거라고 여러 번 얘기했었는데, 그 짓을 지금 강해건이 하고 있었다.
결혼을 유지하는 기간만 잠시 즐기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들었던 생각을 무시했다. 그럴수록 강유건에 대한 미안함은 깊어질 것이고, 한서림과의 이혼은 어려워질 것이며, 그 오메가를 찾아냈을 때 각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꾸 페로몬 폭주 주기가 짧아지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빨리 찾아내서 각인을 해야 했다.
8년 전의 오메가를 찾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왔다. 주기적으로 의뢰를 받아주는 브로커도 있었고, 혹시 생일파티에 왔었을 만한 연예인이면 직접 꼬여내기도 했다. 확신도 없이 특정 짓는 것도 참 웃긴 일이지만, 당시 강유건이 엔터 사업에 손을 댔던 시기이니 가능성은 있었다. 실제로 연예인이 많이 오기도 했었고, 연습생들도 꽤 있었으니까.
어쨌든 찾아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오메가를 만난 날은 어김없이 불쾌했다. 그래도 오늘 불러들인 놈을 봤을 때는 조금 기대를 했던 것도 같다. 그저 흐린 빛에 어렴풋하게 봤던 잔상 같은 이미지와 꽤 비슷한 느낌이었던 덕분이다. 정확한 기억이 아님에도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기대를 한 것과 동시에 가슴 부근이 욱신거렸다.
문득 한서림과 나란히 서 있는 오메가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뜻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걸린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 탓인지도 모른다. 물론 자세히 보니 이목구비의 느낌이 전혀 다르긴 했지만.
‘손님 도착하셨네요. 나는 잠깐 나가볼게요. 이 실장님이 급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잠깐 나와 달라고 해서요.’
문을 열어준 한서림은 아무런 감정의 고조도 없이 평이하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양심적인 이중호가 불필요한 자책을 하며 한서림을 불러낸 모양이었다. 제가 한 쓰레기 짓에 괜한 사람이 고생을 했다. 솔직히 한서림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문을 열어주고 그 오메가와 마주한 후에 여상하게 말을 뱉어내고 나간 것에, 어찌할 새도 없이 심장이 저렸다. 제가 일부러 벌린 판인데도 불구하고.
‘저기……, 계속 현관에 세워두실 건가요?’
한서림이 닫고 나간 문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이건 한서림에게도 못 할 짓이었지만, 저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커져 버린 감정의 실체는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이대로 한서림이 저에게 질려버리고 인간말종 취급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쪽 방으로 들어가서 옷 벗어요.’
게스트 룸의 용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드라마, 영화 촬영 일정이 빡빡할 때 이중호가 자고 함께 움직이거나, 놀러온 강유건이 술을 마시고 자는 용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의도가 분명한 목적으로 만들었고, 의도대로 오메가를 게스트 룸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저만 벗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