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42)

  

“결혼 기사 보고서도 안 믿겼는데, 이렇게 보니까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결혼 축하드려요.”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하는 한서림과 다르게 강해건은 이번에도 한서림에게 푹 빠진 이상적인 배우자를 연기했다. 보고 있는 이들마저 웃음 짓게 만들 정도로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굴었다. 그런 강해건을 보면서 한서림은 저게 진심일까 연기일까 잠시 저울질을 하다가 의미 없는 일임을 깨닫고 이내 관두었다.

“그래도 신혼여행 내내 같이 있으면서 해건이가 대표님이랑 전보다 훨씬 많이 친해진 것처럼 보여요. 애가 좀 까칠해도 친해지니 괜찮은 놈인 거 아시겠죠?”

강해건이 사인을 해주는 사이, 이중호가 한서림에게만 들리게끔 슬쩍 속삭였다. 전보다 확실히 친해진 것은 맞아서 한서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은 놈인지에 대한 건 생각하기를 보류했다. 요즘 심장이 자꾸 이상반응을 보이는 게 불편해서.

그리고 주말에는 내내 호텔에서 뒹굴며 황홀한 섹스를 했고, 부서질 것 같은 몸으로 월요일과 화요일에 연구실에 갔다 왔더니 어느새 벌써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되었다. 예상과 다르게 연구실에 있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강해건과 보낸 날들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강해건이 다정할수록 한서림은 제 몫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죄책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기분을 느꼈고, 죄책감에 시작한 일이어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 그를 잘 보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전용기에 올라 한국으로 향했다.

강해건과의 결혼생활이 생각보다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싹을 움틔웠다.

한국에 도착해서 이중호가 강해건과 한서림을 강해건의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양가에 인사를 가야 하겠지만, 어차피 비즈니스로 이루어진 일인데 번거로운 일은 생략하고 싶다는 강해건으로 인해 어른들을 뵈러 갈 필요는 없었다. 한서림은 보고 싶지 않은 부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선물을 전달해야 하기에 강유건과는 따로 보기로 했다.

한서림의 옷과 소지품 몇 가지를 비롯해 얼마 되지 않는 짐은 이미 강해건의 아파트에 옮겨져 있었다. 한서림이 사용할 방은, 이 아파트를 올 때마다 머물렀던 그 방이었다. 그리고 강해건이 말했던 것처럼 한서림의 방에 있는 빌트인 옷장에는 계절별 옷이 가득 걸려있었다.

“이걸, 전부 다 새로 산 겁니까?”

“말했잖아요. 계절별로 준비해 주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뭘 이렇게까지 많이……. 나는 그냥 집에서 입을 추리닝 몇 벌이랑 출근할 때 입을 정장 몇 벌만 있으면 됩니다.”

“……한휘 건설이면 우리나라 건설 업체 중에서 일이위 하는 기업인데, 한 회장님이 정말 돈을 안 쓰셨나 봐요. 한서림 씨는 보면 볼수록 서민 같거든.”

문 근처에서 벽에 기대어 선 강해건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웬만하면 한서림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겠는데 전부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인 데다가 어림짐작만으로도 얼마를 썼을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서민이고 재벌이고 불필요한 낭비를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나는 딱히 불필요한 낭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 위치에 맞게끔 남들에게 보여지는 부분에도 신경 쓸 필요는 있죠.”

“남들한테 보이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스티브 잡스는 그런 걸 시간 낭비라고 여기고 뭘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에 일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늘 블랙 폴라티에 청바지만 입었습니다.”

“한 대표님은 스티브잡스가 아니고요.”

역시 말싸움으로는 이길 수가 없나 보다. 우습게도 정혼을 하면서 강해건의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고 했던 게 정말 현명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승부욕이 발동되니 이상한 일이었다.

“입어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옷이 반일 겁니다. 환불해도 되죠? 환불한 돈으로는 강해건 씨 이름으로 기부할게요. 강해건 씨 기사 좋아하니까 언론플레이를 해도 좋고요.”

46.

“기부는 알아서 하고 있으니 됐고. 마음에 안 들면 강 전무한테 따져요.”

“이거……, 설마 유건이가 준비한 것들이에요?”

“결혼도 식사로 대신했으면서 신혼집도 새로 안 구하고 내 집에서 산다고 엄청 잔소리하더니, 한서림 씨한테 옷 선물하고 싶다고 준비 좀 해달라니까 신나서 한 모양이네요.”

강유건은 워낙 잘 꾸미고 다니는데다가 패션 센스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말은, 한서림의 옷장에 걸려있는 옷들도 객관적으로는 모자람 없다는 뜻이었다. 평상복도 적게는 몇 십만 원, 많게는 몇 백만 원이지만, 이 정도는 한서림도 사 입으니 괜찮았다. 어차피 한 번 사면 꽤 오랫동안 입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스리피스로 이루어진 이 정장 한 벌에 사오천 만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족히 스무 벌은 넘어 보이는 정장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옛날부터 강유건은 돈 씀씀이가 남달랐는데, 이런 스케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 페로몬 향수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금난에 몰렸을 때 투자해달라고 할 걸 그랬다. 그때는 왜 강유건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 전무 씀씀이로 이 정도는 돈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뭐, 서림 씨가 서민 마인드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정 환불하고 싶다면 강 전무랑 얘기해 보든가요. 말리지는 않을게요.”

“…….”

“근데 강 전무도 서림 씨의 서민 마인드를 알는지 모르겠네. 진짜 환불한다고 하면 강 전무가 무척 서운해 하고 속상해하긴 하겠지만, 뭐 어때요. 내가 속상한 것도 아닌데.”

사람 속을 박박 긁으면서도 강해건은 재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이쯤 되니 저게 강해건의 특기인 건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저 웃는 낯가죽을 벗겨내면 한껏 비아냥대고 시비를 거는 고약한 얼굴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그 얼굴도 심히 잘생겼을 것 같긴 하지만.

“됐어요. 안 그래도 유건이는 우리가 애만 낳는 목적으로 이혼 전제로 결혼한 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일부러 상처 줄 필요는 없죠. 어쨌든 잘 입을게요.”

“감사 인사도 강 전무한테 하시고.”

“그럴게요. 우선 그럼 짐부터 풀고 밥 먹을까요? 지금 시켜놓으면 짐 다 풀었을 때쯤 도착하겠죠? 메뉴는 뭐로 할까요?”

“난 그 집 음식은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까 서림 씨가 먹고 싶은 걸로 시켜요.”

“메뉴가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냥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다 말해도 돼요. 한식은 안 되는 거 없이 전부 해주시니까.”

강해건은 조각 같은 얼굴에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진한 미소를 선보였다. 또다시 심장이 정상적이지 않은 속도로 뛰면서 두근거렸다. 이건 부정할 수도 없이 뉴욕에서도 몇 번이나 느꼈던 설렘이었다. 죄책감이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건가, 몇 번이나 곱씹던 고민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 * *

“출근은 언제부터 해요?”

다음 날, 점심을 함께 먹으며 강해건이 여상하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오늘부터 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그래봐야 오늘과 내일 출근 후에 주말이라서 조금 길게 쉬기로 했다. 한국에서의 론칭도 무리 없이 이루어졌고, 두 달 사이에 잘 자리를 잡고 있는 덕분에 요즘은 특별하게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나름 여유로웠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하면 돼요.”

“당분간은 출퇴근시켜줄게요. 이전처럼 퇴근 전에 연락해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 결혼도 했는데.”

“그러니까 문제죠.”

“뭐가요?”

“결혼하자마자 변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

강해건은 낭만적인 말을 몹시 근사하게 뱉어냈다. 괜히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순간적으로 한서림은 저와 강해건이 열렬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건가 착각할 뻔했다. 그만큼 강해건은 낯간지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한서림을 녹이려고 했다.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강해건은 바로 재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당분간만 내가 하다가 강 전무한테 얘기해서 기사 내줄 테니까 그거 타고 다녀요.”

“……아뇨, 나도 비서 있습니다.”

“흐음……. 그 박쥐?”

“네?”

“몇 번 마주칠 때마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서 뒷조사 좀 해보니까, 그 비서는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던데요? 이리저리 박쥐처럼 잘도 붙어 다니더만. 그런 놈 뭘 믿고 달고 다녀요?”

한서림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미 한국에 오자마자 모주원에게 정보를 듣고 강해건의 광고를 진행하면서 확인한 바 있었다. 강해건도 뒷조사를 했을 줄은 몰랐지만.

“아니면 한 회장님이 붙여 놓은 끄나풀인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냥 떠본 건데.”

“…….”

“한 대표님은 생각보다 순진하단 말이죠. 어디 가서 사기당할까 봐 걱정된다니까.”

당황해서 되묻자마자 강해건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실 모주원의 정보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모주원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서정 그룹의 강해건이 못 알아낼 리가 없었다. 직업이 배우일 뿐이지, 서자라고는 해도 강해건은 엄연히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굴지의 대기업 차남이었다.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강해건에게는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줄 든든한 강유건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한서림 씨가 한 회장님과 사이가 안 좋다는 건 같이 만났을 때 눈치챘어요. 어차피 재벌가에서는 흔한 일이니 자세한 내막까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 비서 통해서 내 얘기나 우리 얘기까지 한 회장님 귀에 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아요. 그러니 그 비서를 자르든지, 한 대표님 편으로 만들든지 해요.”

“…….”

“굳이 추천을 해달라고 하면 나는 자르는 쪽을 추천하고 싶네요. 그런 놈들은 돈에 아주 쉽게 움직이는 놈들이라 언제 또 어디로 날아가서 붙을지 알 수가 없거든요.”

“특별한 사유 없이 해고하면 직원들이 동요할 겁니다. 우선 강해건 씨 얘기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내가 조심하도록 할게요.”

“왜 그런 조심을 하면서 피곤하게 살아요? 특별한 사유 같은 건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일을 전부 하면서 제일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 왜 피곤하게 사느냐고 물으니 웃겼다.

“내 필요에 의한 일이니까 특별한 사유는 내가 만들어줄게요. 비서는 새로 뽑아요. 강 전무 측에 얘기해서 고용할까 했는데, 그러면 강 전무의 끄나풀이 될 테니 똑같이 피곤해지겠죠. 서림 씨가 괜찮은 사람으로 알아서 뽑아요.”

“그럼 빠른 시일 안에 특별한 사유를 만들어 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겠지만 얘기하자면, 딱히 비서는 필요 없으니 새로 뽑지 않을 예정이고요.”

안 그래도 임 실장이 한 회장의 끄나풀인 것을 알고 어떤 사유를 만들어서라도 자르려고 했는데, 론칭과 결혼으로 정신이 없어서 지금까지 질질 끌고 왔을 뿐이었다. 손 더럽히는 일을 강해건이 대신 해준다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요.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부터 박쥐는 안 보이게 해줄게요. 강 전무가 그런 일 잘 하거든요.”

강유건을 졸업시키겠다고 했으면서 강해건은 말끝마다 강 전무, 강 전무했다. 애정이 엿보이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강유건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려는 건조한 느낌이었다.

“아. 그리고 계약서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괜찮아요.”

강유건을 통해서든 뭐든, 손 더럽히는 일을 대신 해준다고 하는데 계약서 조항 하나 더 추가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결혼 생활을 하는 내내 어떻게든 강해건에게 정말 진심으로 사죄하며 잘하겠다는 다짐도 몇 번이나 했고 말이다. 이제는 어쩌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집에서는 페로몬 풀지 말아요. 집뿐만 아니라 나랑 같이 있을 때는 늘. 섹스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히트사이클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럴게요.”

“그러고 보니……, 3개월 넘도록 히트사이클이 없네요? 혹시 억제제 먹었어요?”

“아뇨, 억제제는 안 먹었습니다. 나는 주기가 일정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보통은 삼사 개월에 한 번씩 오니까 이제 올 때가 되긴 했습니다.”

페로몬 학대로 망가졌던 몸을 계속 진료해주며 억제제를 처방해준 담당의에게 히트사이클로 속일 수 있을 만한 약을 받아오긴 했는데,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상황 봐서 금요일쯤에 먹고 주말을 함께 보낸 후에 월요일 출근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전조 증상 오면 새벽에라도 깨워요.”

“네.”

“아. 그리고 서림 씨, 계약서에 서로의 사생활 존중하기로 했던 항목 기억하죠?”

“……네. 각자의 애인에 대한 간섭 금지, 사생활은 언론 노출 금지잖아요.”

“오늘 손님이 잠깐 왔다 갈 겁니다.”

계약서 항목을 들먹이는 것으로 잠깐 불안하긴 했다. 그래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신혼집까지는 아니어도 저와 함께 생활하는 집으로 강해건이 남성형 오메가를 불러들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47.

강해건이 저를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라고는 짐작했다. 다만, 이혼 후에 이어서 찾을 줄 알았다. 촉도 별로 좋지 않은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정확히 맞아 들었다.

“혹시……, 오메가가 오는 겁니까?”

“네. 말했잖아요, 나는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하는 당당한 대답이었다. 강해건이 찾고 있는 오메가가 한서림 자신이 아니라면, 한서림은 지금 강해건에게 따귀를 날리고 이혼을 요구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심장이 욱신거리고 저렸다.

“아. 그래도 혹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소문이 나게 된다면 서림 씨 지인 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네요.”

뻔뻔한 요구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당연히 수긍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뻐근한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제 정체를 들키지 않고 강해건에게 도움이 되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겠다고 다짐하며 강해건이 원하면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협조할 자신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서운함과 슬픔이 한서림을 에워쌌다.

* * *

대체 이런 사람은 어디서 알고 부르는 것인지, 이중호는 강해건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외모로 형질을 판단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남자처럼 한눈에 형질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 사람은 오메가였다. 어쩐지 도도한 이미지가 한서림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강해건이 시킨 대로 약속된 장소에서 접선해 데려오긴 했는데 정작 올려보내려고 하니 영 내키지 않았다. 강유건과 이중호를 제외하고는 타인이 제집에 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하는 성격인데 어째서 집으로 부르는 것인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제는 혼자 사는 집도 아닌데.

주차장에서 내려 강해건의 아파트 호수를 호출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는 것은, 강해건이 출입을 허가했다는 의미였다. 입을 쩍 벌린 엘리베이터에 오메가를 태우면서 이중호는 지겨운 말을 반복했다.

“계약서대로 이 일은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어길 시 법적인 절차를 밟게 될 거고, 그건 그쪽이 해건이와 싸우는 게 아니라 서정 그룹과 싸우는 일이 될 겁니다. 올라가서는 해건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요.”

“벌써 세 번이나 말씀하셨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생긋 웃는 남자의 대답을 끝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이중호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한서림이 집을 비웠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은 거다.

얼굴 몇 번 보고 의례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누었던 지난날과 달리, 뉴욕에서 한서림과 꽤 친하게 지낸 탓에 제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닌데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다. 한서림은 몹시 차갑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마음이 상당히 따뜻한 사람이었고, 모난 구석 없이 둥글둥글한 성격이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누구와도 허물없이 잘 어울릴 만했고,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면서는 인간적으로 그에게 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았다. 강해건의 못된 짓을 제가 도운 거나 마찬가지니까.

솔직히 결혼 전에는 강해건이 아무리 하룻밤 상대를 매일 갈아치우며 문란하게 살았어도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리 원치 않는 정략이었다고는 해도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신혼집으로 다른 오메가를 부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중호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 진짜…….”

결국 주차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중호는 참지 못하고 한서림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상도덕이 있지, 뉴욕에서 그 많은 맛집을 소개받아 놓고 이런 상황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이중호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는 그 몇 초가 입안을 바싹 마르게 했다.

제발 집에 없어라, 제발 집에 없어라…….

-네. 한서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이중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쩐 일이세요?

반갑게 인사하는 한서림의 여상한 목소리에서는 아직 오메가가 그의 집으로 갔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만약 집이라면 차라리 마주치기 전에 빼내는 게 나을 것이다.

“혹시 집이세요?”

-네.

“아, 그럼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엄청 급한 일이라서요. 제가 지금 해건이 아파트 앞에 있는 커피숍인데 바로 나오실 수 있을까요? 정말 아주아주 급한 일입니다. 지금 당장 만나야 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나갈게요.

무슨 일인지 묻지 않는 건 조금 의아했지만, 제가 워낙 급하다고 설레발을 쳤으니 일단 나와주는 것 같았다. 아직 강해건이 오메가를 집으로 부른 건 모르는 듯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강해건의 아파트 층수에 도착한 게 보였다.

복도에서는 마주쳐도 모르겠지.

아, 최상층에는 강해건 집 하나밖에 없는데.

강해건의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집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는데, 강해건이 공사를 맡겨서 복도를 내고 현관문을 달았다. 혹시나 마주쳤다면 누구라고 핑계를 댈지 머리를 굴리며 이중호는 빠르게 커피숍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페로 들어오는 한서림을 보며, 이중호는 역시나 전화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무표정인 탓에 한없이 차가워만 보이는 얼굴이 이중호를 발견하고는 옅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오랜만입니다, 한 대표님. 별일 없으셨죠?”

“……저희 어제 같이 뉴욕에서 돌아왔습니다만. 여기까지 데려다주셨잖아요.”

“아, 그랬죠.”

이중호는 연신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죄를 짓고 나니 제 발을 저리게 된다.

음료 두 잔을 각자의 앞에 놓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강해건과 셋이 있을 때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듯했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차를 한 모금 음미한 한서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장님.”

“네?”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오늘 없는 용건 만들어서 저 왜 불러내셨는지 압니다.”

“네? ……헉. 혹시 마주치셨어요?”

“네. 제가 문 열어줬습니다.”

“아, 그게 제가 타이밍을 잘못 계산해가지고……. 앞으로는 좀 더 일찍 연락, 아니, 그게 아니라…….”

차라리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할 걸 그랬다. 마음이 무거웠으면서도 망설이느라 이 사달을 만들었다. 진짜 죄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중호는 제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한서림의 눈치를 봤다.

“실장님, 저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아까 그 오메가분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강해건 씨와 저는 실장님께서 아시다시피 계약으로 이루어진 정략결혼이고,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잖아요. 결혼을 했으면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결혼생활 유지하는 중에는 배려해야죠. 어떻게 다른 상대를 호텔도 아니고 집에……, 아니, 제 말은 호텔에서는 만나도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집에서 만나는 게 비밀을 지키기 쉬우니까요.”

몹시 의연하고 차분한 한서림의 말에 이중호는 입이 딱 다물렸다.

“강해건 씨가 호텔 들락거리는 거 기자나 불특정 다수에게 사진이라도 찍힌다고 생각해 보세요. 수습하기 힘들 겁니다. 그런데 집은 일단 엘리베이터 보안이 철저해서 몇 층에 방문한 손님인지도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여차하면 제 친구라고 둘러대면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강해건 씨가 요구하면 집으로 보내주세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리도 태연하고 침착할 수 있는지, 이중호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혼이고 뭐고 멱살을 잡아서 따귀를 날리며 쌍욕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한 대표님, 보살이세요? 아니면 천사의 환생?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세요. 해건이가 지 꼴리는 대로 하는 것처럼 한 대표님은 한 대표님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죠. 제가 아주 심한 욕만 아니라면 해건이 욕도 같이 해 들릴 수 있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안 나오려고 하다가 이 말씀 드리려고 나온 겁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정말로 몸을 일으키려는 한서림을 보며 이중호는 당황했다. 적어도 아까 올려보낸 오메가가 나올 때까지는 잡고 있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잠깐만요. 지금 그 집으로 올라가시겠다고요?”

“네. 안 될 거 있습니까?”

“그래도 지금 그 집에는…….”

“혹시나 문제가 터졌을 때 제 지인이라고 할 거니까 제가 같이 있어야 수습하기가 쉽죠. 어차피 제 방은 따로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소를 보이는 여유에서 이중호는 넋 빠진 표정을 했다. 재벌들은 다 저런 건가. 강해건만 성격 나쁜 또라이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한서림은 성격 좋은 또라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강해건과 한서림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상관할 필요는 없지만, 그 오메가를 배달한 사람이 저이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고 씁쓸했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카페를 나서는 한서림을 잡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차가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달고 담담하고 평온하게 내뱉는 말과 다르게, 한서림의 눈동자에 상처가 한가득 차오른 것을 본 탓에 몹시 답답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뉴욕에서 함께 지냈더라면 누구라도 한서림이 강해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테니까.

48.

* * *

이중호 실장을 카페에 두고 돌아오긴 했지만, 정작 한서림은 아파트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이중호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즈니스의 일환임을 어필하며 무던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혼자 있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의 뻐근함이 짙어졌다.

이러면 꼭 상처받은 것 같지 않은가. 우습게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해건과 다른 공간에 있었다.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 향이 거슬렸다. 이건 분명히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이었다. 그래서 센 척했던 것과 달리, 문 앞에 멍청하게 서서 들어가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평생 만날 일 없이 조용히 팬으로만 응원하려던 강해건과의 시작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저는 강해건을 좋아할 자격이 없었다. 열렬한 팬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순수한 팬심이었다. 강유건의 동생이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나, 강해건과 뭘 어떻게 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저 저에게 자유를 준 이에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한 일이다. 강해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팬이 되어 응원하고 그가 광고하는 제품을 사들이는 것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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