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42)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려고 했다. 강해건은 더 말해 보라는 식으로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서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정말 질투를 하는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려고 했다. 그래서 한서림은 흔쾌히 제 생각을 고쳐먹고 강해건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뇨. 다시 맡아보니까 나는 것 같아요. 확실하게 냄새나요. 이건 다 두고 갈게요. 괜히 헛걸음했네요.”

투명하리만치 속이 보이는 행동에도 강해건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칭찬을 해주는 것처럼 한서림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목덜미를 그윽하게 한번 잡았다 놓았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쿵거리며 알 수 없는 기이한 소름이 척추를 따라 내달렸다. 그것은 당황스럽게도 성감과 닮아 있었다.

“오, 옷 안 챙겨도 되니까 이제 그만 갑시다. 아, 배고프다. 강해건 씨도 배고프죠? 저녁 뭐 먹을까요? 뭐 먹고 싶어요?”

누가 봐도 어색하게 벌떡 일어선 한서림이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거렸다. 별거 아닌 가벼운 손짓에 느꼈다는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여전히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이 낯설고 어색했다. 이전까지는 잠깐 그러다 말았다면, 지금은 꽤 오래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 다섯 시도 안 됐는데 벌써 저녁을 먹어요? 우리 룸서비스 먹은 지 아직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어쨌든 난 배고프니까 강해건 씨 밥 생각 없으면 나 혼자 가서 먹을게요.”

말주변이 없다 보니 떠올려낸 핑계가 고작 밥이었는데 다행히 그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강해건의 말처럼 룸서비스를 먹고 나온 지 고작 두 시간밖에 안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평소 먹는 양에 비해 적게 먹은 탓에 지금쯤 무언가 먹고 싶기는 했다. 한서림이 붙박이장의 접이식 문을 닫고 나오자 뒤따라 나오던 강해건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서림 씨 먹는 양 생각하면 배고플 수도 있죠. 그래서 뭐 먹을 건데요?”

“양고기 스테이크요. 여행 온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정말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이 실장님은 어디 가셨을까요? 근처면 같이 식사하자고 연락이나 해볼까…….”

“쓸데없는 사람 끌어들일 생각하지 말고 둘이 가죠. 여행 온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정말 맛있는 양고기 스테이크 레스토랑이라고 하니까 기대되네요.”

근육으로 촘촘히 다져진 팔이 자연스럽게 한서림의 어깨 위로 둘러졌다. 정말로 저에게 마음이 생겨서 이러는 건 아닐까, 여기에서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나 의아했지만, 강해건의 감정기복과 좀스러운 변덕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일은 저만 피곤해진다. 어차피 말싸움에서 이길 자신도 없고. 체념하면 편한 일이었다.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어깨동무를 당한 채로 레스토랑을 향해 걸었다. 솔직히 아파트에서 나오면 팔을 걷어낼 줄 알았는데 계속 어깨동무를 하고 있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체념하면 편했던 이전과 다르게 가까이에서 맡아지는 은은한 페로몬 향 때문인지 심장이 정상속도를 찾지 못하고 내내 빠르게 두근거렸다. 숨 쉬는 것마저 의식이 되는 탓에 신호등 앞에서 은근슬쩍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귀신 같이 알아챈 강해건이 품 안으로 더 끌어당긴 바람에 오히려 안기는 꼴만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는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심장을 외면하며 걸음걸이를 빠르게 했을 뿐이었다.

레스토랑은 때마침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서 다시 문을 열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은 덕분에 손님은 강해건과 한서림이 전부였다. 말이 레스토랑이지 단골 위주의 장사를 하는 데다가, 메뉴도 양고기 스테이크 단품이라서 일정한 양만큼만 파는 곳이며, 테이블도 6개가 전부인 골목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발견했어요?”

“에드워드가 예전에 이 동네 살았었는데 소개해준 곳이에요. 처음 왔을 때는 한국의 분식집이랑 비슷한 내부라서 좀 놀랐는데 먹어보고 더 놀랐다니까요. 보기에는 이래도 정말 맛있습니다.”

곧 서버가 주문을 받으러 와서 굽기의 정도만을 물었다. 강해건이 메뉴판을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아. 여긴 메뉴가 단일 메뉴라서 양고기 스테이크밖에 없어요.”

“그래요? 그럼 나는 미디움 레어.”

어제 에드워드와 니콜라스 앞에서는 굳이 영어로만 말을 하더니, 지금은 아예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한서림만 바라보며 한국말을 뱉어냈다. 솔직히 어제 강해건이 영어를 사용하는 걸 들으면서 거의 8년을 살았던 저보다 발음이 더 좋아서 놀랐었다.

“여기가 요리를 잘하긴 하지만, 그래도 양고기는 사람에 따라서 냄새가 좀 난다고 느낄 수 있는데 미디움 이상으로 하는 게 어때요?”

“내가 양고기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아요?”

빈정대는 말투와 달리 강해건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걸었다.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호의로 조언을 해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무시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한서림은 이내 고개를 돌려 서버에게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미디움 레어와 미디움 웰던으로 하나씩 주세요.」

한서림도 소고기 스테이크는 미디움 레어로 먹는 걸 즐겼으나, 예민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양고기 스테이크는 요리를 아무리 잘해도 특유의 냄새 때문에 늘 미디움 웰던으로 주문했다. 저는 이미 충고를 해줬으니 강해건이 못 먹겠다고 해도 절대 제 것을 나눠주지 말아야겠다고 소심한 다짐을 했다.

하지만 10초도 되지 않아, 혹시 강해건이 못 먹겠다고 하면 일단 제 것을 같이 먹고 그사이에 강해건의 것은 더 구워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상과 다르게 강해건은 미디움 레어로 구운 양고기 스테이크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게 왜 조금 심통 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강해건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귀여워하고, 제 것을 함께 나눠먹을 기회가 사라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이 순수하게 좋아하는 감정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저 때문에 생긴, 타인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페로몬 폭주에 늘 긴장하고 있는 강해건이 안쓰럽고 불쌍한데, 언제부터인가 죄책감보다는 설렘에 잠식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팬으로 좋아할 때와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결의 감정이었다.

“강해건 씨는 원래 성격이 다정한 편인가요?”

“글쎄요. 필요에 따라서는?”

“어떤 필요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아아. 그럼 나랑 있을 때는 일하는 것도 아닌데 왜 다정하게 굴어요? 여기에서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강해건이 늘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누구보다 늘 여유로워 보이니까. 그래도 한서림은 알 수 있었다. 저 역시 강박적으로 억제제를 먹으면서도 언제 비정상적인 발정기가 터질지 몰라서 겉으로는 티도 내지 못하고 바보처럼 웃으면서 내내 긴장하며 살아왔으니까. 자신이 안고 있는 위험에 대해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강해건은 맞는 약도 없다고 했으니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한서림 씨한테 다정하게 구는데 이유가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내가 행동 하나하나 할 때마다 전부 계산하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왜 맛있게 잘 먹고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지금 누가 시비를 걸고 있는데.

그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강해건의 잘생긴 입은 아주 못생긴 말만 뱉어냈다. 말의 내용만 들으면 싸우자고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강해건은 자신이 가진 무기인 얼굴을 이용해서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모든 잘못이 한서림에게 있는 것처럼.

그래, 마음이 더 큰 사람의 죄다. 체념 어린 생각이 한서림의 머릿속을 채웠다.

44.

“내가 잘못한 모양입니다. 미안하게 됐네요.”

“……이젠 왜 빈정대는 것처럼 들릴까요? 내 인형은 말을 잘 들어서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자식이 진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틀렸다. 지금은 강해건이 웃고 있는 예쁜 얼굴에 침은 물론 씹고 있는 양고기도 함께 뱉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좋아하는 걸까 잠시 고민했던 건 착각이다. 그동안의 두근거림과 설렘도 전부 저 얼굴에 속은 착각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말 잘 듣는 인형에 충실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내 역할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내 기대치가 높은 건가.”

“그런가 봅니다.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하네요. 더 노력해 보도록 할게요.”

일부러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양고기를 썰었다. 차마 강해건 앞에서 내보일 수 없는 감정을 담아서 아주 전투적으로.

“그렇게 해서 고기가 남아나겠어요? 누가 보면 나한테 칼질하고 싶은 거 괜히 음식에 대신하는 줄 알겠어요.”

알면 됐다.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맥주와 함께 삼켰다. 제 심정을 드러내듯 양고기가 짓이겨져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말 잘 듣는, 아니,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했으니 말을 더 잘 듣도록 노력해야 하는 인형인데, 감히 어떻게 주인님한테 칼질을 하겠어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입니다.”

“……주, 인님?”

강해건이 묘한 표정으로 변해서 눈을 마주친 후에야 한서림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맞다, 이 새끼 변태였지…….

요 며칠 다정하게 대해줬다고 너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강해건의 변태력에 적응이 되어 싫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후로 정신이 해이해졌다. 그 죄로 제 무덤을 스스로 판 꼴이 되었다. 한서림은 어떻게든 말을 돌리기 위해 두뇌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이 실장님은 오늘 어디 가셨어요? 이 실장님도 여기 좋아하실 것 같은데.”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직원이 가이드 해준다고 해서 아침 일찍 나갔다던데요.”

“다행이에요. 같이 다녀주실 분이 계셔서.”

강해건이 순순히 대화에 따라와 줬다고 내심 안도했으나, 그건 한서림의 착각이었다. 강해건의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왜 자꾸 잊는지 모르겠다.

“근데, 나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싶은가 봐요.”

“절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는 늘 ‘주인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주인님’이라고 하던데.”

“절대로 아니거든요.”

“원한다면 둘이 있을 때는 ‘주인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나쁠 것 같지 않는데.”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본 강해건이 피식 웃었다.

“장난도 못 치겠네. 주인님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찌르겠어요.”

“나는 말 잘 듣는 인형이니까 강해건 씨가 원한다고 하면 찔러볼게요. 최선을 다해서.”

“이왕이면 얼굴은 빼고. 얼굴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

웃는 낯으로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뻔뻔한 말에 한서림은 의욕과 함께 식욕도 가시는 것 같았다. 이길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대적하면 안 된다는 걸 자꾸 잊어서 불필요한 말을 하게 된다. 장난인 걸 알았던 순간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됐을 것을, 괜히 식욕만 잃었다. 한서림은 강해건 앞에서 말하기 전에 반드시 세 번 이상 생각해 본 후에 입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오. 어떻게 같이 들어 와?”

이중호도 이제 막 호텔로 들어온 참인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두 남자를 반겼다. 한서림과 강해건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은 후, 근처 펍에서 니콜라스를 만나 가볍게 맥주 한잔을 마시고 오는 길이었다. 한서림은 오래 걸릴 일이 아닌 데다가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혼자 가겠다고 했으나 강해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랑 같이 있고 싶은 건가, 하는 착각을 또 잠시 했더랬다.

펍에서도 강해건은 가식을 숨기지 않았는데, 집을 구경할 수 있게 허락해줘서 고맙다며 니콜라스에게 화분을 선물한 것이었다. 대체 저건 왜 사는 건가 했는데 니콜라스에게 주는 걸 보고 많이 놀라긴 했다.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남의 알파에게 화분을 받게 된 니콜라스는 전혀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서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한 대표님은 출근한 거 아니었어요? 열흘 내내 연구실 나갈 거라고 했잖아요. 헐, 설마 너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곳까지 따라갔던 거냐? 이 자식 완전 민폐네.”

“형. 남의 신혼여행에 따라와 놓고 묻는 질문치고는 좀 뻔뻔하지 않아? 신혼여행 왔는데 마치 나 혼자 독수공방하길 바랐던 사람처럼 말하네? 지금 여기서 제일 민폐인 사람이 누구일까?”

그러니까 애초에 네가 이중호 실장을 협박해서 데려오지 않고, 각자 휴가를 즐기자는 말만 안 했어도 되는 일 아니었냐. 라고 따지기에는 이미 강해건을 이해하고 있는 범위가 넓었다. 한서림은 언제부터인가 강해건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릇이 작은 저가 알 수 없는 빅픽처가 있겠지, 하며 납득하고 합리화했다.

로비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이들은 몸을 실었다.

“허! 와, 미친. 내가 너 또라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신박한 또라이일 줄은 또 몰랐다. 야, 내가 남의 신혼여행에 따라오고 싶어서 왔냐? 이번에 같이 안 가면 휴가도 없이 내내 굴리겠다고 협박한 놈이 누군데!”

“뉴욕 너무 좋다고 신나서 매일 관광하고 있으면서 되게 억울한 척한다. 연기도 못하면서.”

“아오, 저걸 진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이중호의 주먹을 보며, 한서림은 저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강해건은 은근히 말을 얄밉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로 웃으며하는 말이기 때문에 충분히 넘어가줄 수 있을 정도지만, 이중호는 그 얼굴에 속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한서림도 속지 않다가 최근에는 좀 속게 되었지만.

“내일은 같이 움직여야 되는 거 알지?”

“어제도 말했잖아. 한 대표님, 우리 내일 점심 진짜 맛있는 거 먹어요. 대표님이 알려준 식당들 중에 맛없는 곳이 정말 단 한 군데도 없었거든요. 어쩜 그렇게 맛집을 다 꿰고 계신지, 아주 감탄했다니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으며 언제 성질을 냈냐는 듯이 이중호가 실실거렸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제가 오늘 갔던 양고기 스테이크 집도 꽤 괜찮은데 거긴 골목 골목이라 길이 좀 복잡해서, 혹시 한국에 가기 전에 시간이 되면 안내해 드릴게요.”

“아……. 저는 양고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한 대표님, 혹시 완전 맛있는 피자집은 없어요? 내일 점심은 우리 피자 먹읍시다.”

“네, 피자를 먹는 건 괜찮은데, 제가 아직 강해건 씨한테 내일 스케줄에 대해서 들은 게 없어서요. 같이 어디를 가나요?”

한서림이 강해건과 이중호를 번갈아보면서 묻자, 이중호 실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강해건을 한번 노려본 후 설명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내일 봐. 로비에서 열한 시. 늦지 말고.”

어느새 룸 앞에 도착해 카드키로 문을 연 강해건이 자기 할 말만을 마친 채 한서림의 팔을 끌어당겨서 들어가 버렸다. 쿵, 닫히는 문 너머로 육두문자를 내뱉는 이중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강해건이 진짜로 저에게 마음이 생겨서 소유욕을 드러내는 건가,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죄책감으로 시작한 일인데 어째서 기대를 하는 것인지 스스로가 꼴사나웠다.

“내일 우리 어디 갑니까?”

“강 전무가 신혼여행 재미있느냐면서 사진 보내라고 난리예요. 매일매일 괴롭힌다니까.”

“아아…….”

“어차피 보도 자료용 사진이 필요하기도 하고.”

신혼여행을 온 후 잊고 있었으나 강유건의 성격이면 그럴 만도 했다. 강해건과 한서림의 결혼이 이혼을 전제로 한 가짜 결혼인 줄도 모른 채 진심으로 축하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어디로 가려고요? 생각해 둔 곳은 있어요? 사진은 브루클린 브릿지 걸으면서 포토 스폿에서 찍거나, 센트럴파크에서 찍으면 잘 나올 것 같은데.”

“나보다는 한서림 씨가 더 잘 알 테니까 장소는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요. 난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으니까.”

“네. 그럼 동선 짜볼게요.”

“서너 군데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렌트해둔 차 아직 한 번도 안 탔으니까 내일은 차 끌고 나가죠. 옷도 각자 몇 벌씩 챙겨서 들고 나가려면 짐이니까.”

차는 강유건이 배치해준 직원이 렌트해둔 것이었다. 말만 들었을 뿐 3일 내내 호텔 주차장에서 한 번도 움직인 적은 없었다. 한서림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그저 강해건이 사용하려나 보다 했었다. 뉴욕의 교통체증을 생각하면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할까 했지만, 짐이 있다면 차가 나을 것이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옷은 왜요?”

“장소마다 갈아입어서 다른 날처럼 보이게 하려고요. 그래야 강 전무가 안심하지.”

“…….”

이 또라이 자식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이중호의 말처럼 강해건은 그냥 또라이가 아니다. 아주 신박한 또라이다. 애초에 옷 욕심도 없고, 패션에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가진 옷도 몇 벌 없었다. 그런데 팔자에도 없는 패션쇼를 뉴욕 길거리에서 하게 생겼다.

“저녁은 야경 멋있는 레스토랑으로 가죠. 드레스코드 있으면 미리 말해주고요.”

여상하게 하는 말에 한서림은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옷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벌써부터 피곤했다. 그래서 은근슬쩍 핑계를 대 보았다.

“야경 볼 수 있는 레스토랑도 예약해 둘게요. 근데 장소마다 옷 갈아입는 거 귀찮지 않겠어요? 딱히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곳도 없을 텐데.”

“불편해도 하루에 끝내버리는 게 나아요. 직업이랑 안 어울리긴 하지만 사진 찍는 거 별로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이유, 물어봐도 됩니까?”

“사진에서는 행복해 보이니까요.”

지나친 억측인 것을 알지만, 강해건은 마치 자신이 행복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자기 때문에 다쳐서 오메가임에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강유건에 대한 죄책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의 원인이 저라서 한서림은 순간적으로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며 저려왔다. 저는 강해건을 좋아할 자격이 없다는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45.

* * *

한서림은 이토록 고단한 하루를 보내본 적이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몹시 힘든 하루였다. 뉴욕의 각 스폿을 돌아다니며 매번 옷을 갈아입고 사진을 찍는 일은 보통 사람이 감내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이중호 실장은 ‘야, 너 내 휴가는 핑계고 사실 나 찍사로 데려온 거였지?’라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사진을 찍어주는 일에 열을 올렸다. 거기까지 만이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매 장소마다 이중호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그건 온전히 한서림의 몫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은, 목적이 사진이었던 것을 증명하듯 사진만 빠르게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중호가 운전을 했기 때문에 한서림은 매번 뒷좌석에 앉아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았다.

체력이 무시무시한 강해건은 빡센 일정에 온종일 다정함을 선보였는데, 차에 탈 때마다 한서림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많이 피곤하냐는 등 걱정 어린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제대로 키스 한번 한 적도 없는 사이인데 굳이 자꾸 입 맞추는 사진은 왜 찍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또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물 좀 마실래요?”

“네.”

“아, 흘렀다.”

강해건의 곧은 손가락이 다가와 한서림의 입술을 쓸었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는데, 하루 동안 보인 강해건의 다정함이 평소와 달리 가식이 아니라 진심 같아서 자꾸 기대를 하게 된다. 그래도 강해건 덕분에 버틴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서림만 열어볼 것 같은 신혼여행 사진은 겹겹이 쌓였고, 그 와중에도 모델이 좋아서인지 참 잘나왔다.

야경이 눈부신 레스토랑에서도 식사를 하는 건지, 사진을 찍는 건지 모를 시간이 지나갔다. 한서림이 스테이크와 와인도 제대로 먹지 못하자 강해건이 내내 챙겨주었다. 바로 맞은편에 이중호가 있어서 어쩐지 눈치가 보였으나, 이중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강해건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았더라면 한서림은 체력이 방전되어 표정관리도 못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씻는 것은 고사하고 챙겨 나갔던 옷들도 정리하지 못한 채 한서림은 그대로 침대로 파고들어 뻗어버렸다. 다음날 오전에 눈을 떴을 때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진 제 모습을 보고 배시시 혼자 웃기도 했다. 강해건이 갈아입혔다는 것을 알아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옆자리에서 잠든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준비하고, 도망치듯이 연구실로 갔는데 다행히 강해건은 그 부분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연구실에서 신향수 제조에 열을 올리며 힐링을 한 후, 저녁에는 강해건, 이중호와 만나서 뮤지컬을 감상했다. 이중호는 ‘라이온 킹’을 보고 싶어 했으나, 한서림이 그전에 둘이 있을 때 ‘팬텀 오브 오페라’를 보고 싶다고 흘렸던 말 때문인지 강해건은 이중호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보여주는 대로 보라며 ‘팬텀 오브 오페라’의 티켓을 사 왔다.

“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뭔 내용인지는 대충 알겠더라. 괜히 대작이 아니라니까. 한 대표님도 재미있게 보셨어요?”

뮤지컬을 보고 나오면서 이중호가 넉살 좋게 물었다. 피로가 덜 풀린 채로 온종일 연구실에서 머리를 썼던 터라 보고 싶었던 기대와 달리 중반 부분부터 졸았지만, 한서림은 뻔뻔하게 웃는 낯으로 답했다.

“네, 재미있었습니다. 실장님은 어떠셨어요? 혹시 라이온 킹도 보고 싶으시면 예매해둘 테니까 내일 와서 보실래요?”

“재미있었기는 무슨. 거짓말도 잘 하네. 계속 잤잖아요.”

어쩐지 내내 설레게 해준다 했다. 역시 심보 고약한 놈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퇴근 후에 만났을 때부터 닭살 돋게 다정한 짓을 하고 잘 챙겨주기에 사실은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강해건에 대한 재평가를 내릴 뻔했는데 취소다.

“계속 잔 건 아닙니다. 중반 부분부터 아주 잠깐 졸았을 뿐이지.”

“코까지 곤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꽤 뻔뻔하네요.”

“코는 안 골았거든요?”

“잠든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엄청 시끄럽게 코 골아서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데.”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심하게 된다. 이제 장난도 칠 정도로 친해진 건가 싶어서 기뻤지만, 한서림은 차가운 얼굴에 억울한 표정을 만들어낸 후 이중호에게 물었다.

“실장님, 저 코 골았습니까?”

“아뇨. 저는 한 대표님이 잔 것도 몰랐는데요?”

그것보라는 식으로 강해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관심 없다는 듯이 뻔뻔한 낯으로 무시했다. 그러자 이중호가 피식 웃으면서 한서림을 달랬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이 자식 성격이 모나서 그래요. 우리, 아니, 한 대표님이나 나처럼 마음 넓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줘야지 어쩌겠어요.”

의미도 없는 ‘우리’라는 단어에 꼬투리가 잡혔던 이중호는 재빨리 단어 선택을 정정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한서림은 혼자 잠깐 웃었다.

호텔로 돌아와 이중호의 방에서 세 남자는 술판을 벌였고, 다음 날은 강해건을 제외한 이들이 숙취로 인해 각자의 침대에서 끙끙 앓다가 오후 늦게 한인 식당에 가서 해장을 했다. 술을 제일 많이 마신 사람은 강해건인데 극우성 형질이라 취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숙취까지 없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님들 중 강해건을 알아본 이들이 있어서 때아닌 사인회가 열렸으나, 강해건은 불쾌한 기색을 전혀 비치지 않고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질문에 답해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이중호가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눈치껏 매니저 역할을 하는데도 오히려 이중호를 말리기도 했다. 강해건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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