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42)

어젯밤에 한서림은 오늘 연구실에 가보겠다고 말했고, 강해건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어제는 호텔에 들어와서 이중호를 불러 저녁으로 룸서비스를 시켜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외출준비를 마친 한서림이 방에서 나가자 거실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해건이 머무는 방의 문이 닫혀있는 걸 보니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전용기에서도 강해건은 안 잤으니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시차적응도 해야 하고. 한서림은 강해건을 깨우지 않기 위해 카드키를 챙긴 후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한!」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에드워드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한서림의 몸을 덥석 끌어안으며 반가워했다. 이어서 니콜라스와 제이든도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한서림을 포함한 네 명이 퍼퓸SR의 창단 멤버나 다름없었다.

한서림이 전공을 살려서 혼자 시작했던 페로몬 향수 연구에 에드워드가 먼저 합류했고, 1년 정도 후에 에드워드의 소개로 니콜라스와 제이든이 차례로 함께 하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오메가이고 니콜라스와 제이든은 알파인데, 현재 미혼은 니콜라스뿐이었다.

처음 시작할 당시만 해도 향수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네 명이 모여서 제조하고 연구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며 날을 새곤 했었는데, 어느덧 직원도 많아지고 각 나라에 매장을 오픈한 큰 사업체가 되었다.

「이번에 열흘 정도 머무를 거라고 했나? 한, 이거 와서 시향 먼저 해 봐. 향은 좋은데 뭐가 부족한지 피부 밀착도가 떨어져. 공식 그대로 했는데 이것만 왜 그런지 모르겠어. 뭔가 성분끼리 충돌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짧고 가벼운 인사를 마치자마자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니콜라스가 녹안을 빛내며 한서림의 팔을 이끌었다. 에드워드는 한서림의 가운을 챙겨주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바쁜 업무 탓에 퇴근 후에 회포를 풀자며 자리로 복귀했다. 이들에게서는 각자의 고유한 페로몬이 아닌, 퍼퓸SR 제품의 향이 났다. 한서림은 강해건과 결혼한 이야기를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어차피 이혼할 건데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니콜라스가 분사한 향수를 시향했다.

그때부터는 요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신향수 제조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점심도 배달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다. 이런저런 향들 속에서 후각은 조금 괴로워할지언정, 오랜만에 연구실에 틀어박히니 한서림은 마냥 활력이 돌고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사업보다는 연구실에 처박혀 있는 게 성격에 맞았다.

「한. 나도 함께 저녁 먹고 싶지만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제이든이 가운을 벗으며 멋쩍게 말할 때에서야 벌써 퇴근 시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점심을 대충 먹으면서 저녁에 함께 맥주 한잔을 하기로 했었기에 서두르는 모습이 의아했다.

「왜? 급한 일이 있는 거야?」

「사실 내 반려 오메가가 지금 임신 중인데 입덧이 심하거든. 그래서 웬만하면 모든 시간을 그에게 할애하려고 해.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데 아주 가끔 먹고 싶은 걸 말할 때가 있거든? 하필이면 오늘이지 뭐야. 딸기가 듬뿍 올라간 타르트가 먹고 싶대.」

「와, 축하해, 제이든. 이제 아빠 되는 거네? 그래, 얼른 가 봐. 오늘만 날도 아닌데.」

한서림은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하고는 제이든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계약한 대로 제가 임신을 하게 되면 강해건도 제이든처럼 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애초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 법이고,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강해건이 임신을 할 수 있다면 출산할 때까지 매일매일 제가 24시간 내내 붙어서 수발을 들어주면서 사죄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솔직히 그 어떤 누구보다도 지극정성으로 돌볼 건데,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라 한숨이 나왔다.

만약 강해건의 고통이 저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정혼하지도 않았을 거고, 언젠가는 제이든처럼 사랑하는 반려를 만나 결혼해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자꾸 강해건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끼고 있기에 더욱 복잡한 심경이었다.

「한, 오늘도 늘 가던 곳으로 갈 거지?」

「그러자. 거기도 오랜만이네.」

다들 퇴근 준비를 하고, 한서림은 뉴욕에 있을 때 에드워드, 니콜라스, 제이든과 함께 자주 다니던 스포츠 펍으로 향했다. 펍은 강해건과 함께 머무는 호텔 근처에 있었다. 걸어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펍에 도착해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취향대로 맥주 한 병씩과 햄버거를 주문했다. 함께 먹는 안주로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버팔로 윙과 샐러리였다. 이들이 함께 이곳에 올 때는 늘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모두 대식가라서 햄버거를 추가로 더 주문하긴 하지만, 제이든이 함께였다면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가 추가된다는 정도였다.

저녁을 대신해 햄버거와 버팔로 윙으로 배를 채우고 간간히 맥주를 홀짝이기도 하면서 신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콜라스가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깊은 머스크 향의 향수 하나에서 피부 밀착도가 떨어졌는데, 한서림과 니콜라스가 하루 종일 매달렸으나 퇴근할 때까지도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탓이었다.

「여기서 말로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내일 출근해서 다시 파악해 보자. 그나저나 한, 오랜만에 돌아갔던 한국은 어땠어?」

「글쎄. 한국에 갔다고 뭐 어떨 게 있나?」

「한국에서 애인은 생겼고?」

「아니.」

「거 봐, 에드워드. 내가 뭐랬어. 한은 아직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자, 50달러 내놔.」

니콜라스가 만면에 기분 좋은 웃음을 띠고 에드워드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순순히 50달러 지폐를 꺼내 니콜라스의 손바닥 위에 거칠게 탁 올렸다. 뉴욕에서 지낼 때 심심치 않게 보던 모습이었다.

「니들 또 나 가지고 내기했냐?」

「우리 보스 걸고 하는 내기가 제일 재미있으니까. 누가 이길지 패를 까보기 전까지는 절대 모르거든.」

「3개월 동안 심심했겠네. 내가 없어서 무슨 재미로 살았대? 나 엄청 그립고 보고 싶었겠다?」

한서림이 이들의 장난을 받아주며 한술 더 뜨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니콜라스와 에드워드가 시선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정말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한서림의 목을 한 팔로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너무도 익숙한 향에 순간적인 소름이 돋았다.

「자기야. 오늘 연구실 간다고 하더니 나 몰래 바람피우려고 거짓말한 거였어요?」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몹시 가까이에 있는 강해건이 꿀을 머금은 목소리로 환하게 웃으며 가식을 떨었다. 심지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

이제는 ‘이 자식이 또 왜 이러지. 미쳤나.’ 하며 욕하는 것도 지쳐서 한서림은 고개를 돌리고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알파라는 이유로 니콜라스가 노골적인 강해건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다는 것에 미안해졌다. 그나저나 강해건이 갑자기 왜 나타났는지 의아했다.

39.

“강해건 씨가, 여긴 어쩐 일이예요? 혼자 왔어요?”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중호 실장은 보이지 않았다.

「맥주 한잔하려고요. 그나저나 소개 안 시켜줄 거예요? 진짜 나 몰래 바람피우고 있었던 건가?」

「엇, 설마 한의 애인이야? 아, 잠깐. 그 사람 맞지? 아닌가? 닮은 건가? 동양인은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잘 안 돼.」

일부러 한국말로 물었건만 강해건은 여전히 영어를 사용했다. 강해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에드워드가 끼어들었다. 연구실에서 한서림이 강해건의 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몇 번이나 강해건의 작품을 함께 본 에드워드라면 충분히 알아볼 가능성도 있었다. 한서림이 설명하려는 찰나 강해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해건입니다. 서림 씨 반려 알파고요.」

「바, 반려 알파요? 오, 세상에. 한, 너 결혼했어? 대체 언제? 아, 일단 인사부터 해야지. 반가워요, 에드워드예요.」

「니콜라스입니다.」

느낀 감정 그대로 호들갑을 떠는 에드워드와 다르게 니콜라스는 속으로만 놀라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인사했다. 한서림은 갑작스럽게 불편해진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강해건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서림의 옆자리에 앉으며 대화를 리드했다.

「서양인 눈에는 동양인이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보여서 구분이 잘 안 되죠?」

「네. 보스처럼 특출난 외모 아니면 구분이 쉽지 않아요.」

「이해해요, 동양인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서양인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서 지금 두 사람도 잘 구분이 안 돼요. 그래도 다행인 게 머리카락 색으로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어요. 에드워드 씨는 적갈색, 니콜라스 씨는 금발.」

에드워드와 니콜라스는 오메가와 알파라는 형질부터가 다르고, 그게 아니어도 누가 봐도 확연히 다르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강해건은 뒤끝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데 먼저 저런 말을 한 사람이 에드워드이기 때문에 한서림은 끼어들지 못했다. 그때 에드워드가 넉살 좋게 먼저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미안해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한이 내 보스예요. 절대 동양인 비하 발언 같은 거 아니었어요.」

「알죠. 나도 서양인 비하 발언 같은 거 아니었어요. 오해도 풀렸으니 나도 같이 마셔도 될까요? 아무래도 내 반려 오메가만 두고 혼자 호텔로 돌아가는 건 외로워서요. 서림 씨가 신혼여행 와서도 일한다고 나를 버려뒀거든요.」

허! 이 미친놈이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각자 휴가를 알아서 보내자고 한 게 누군데…….

욕하는 게 지칠만해지면 강해건은 다시 의욕을 불사르게 하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한서림이 황당한 표정으로 강해건을 바라봤지만, 강해건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본인의 맥주를 주문하고는 애정 넘치는 눈으로 한서림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누가 보면 아주 세상에서 사랑이 전부인, 사랑에 미친 알파인 줄 알겠다. 아니, 가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두근대는 심장이 제일 미쳤다.

「신혼, 여행이요? 맞다. 아까 보스한테 반려 오메가라고 했죠? 대체 언제 결혼한 거예요? 아니, 잠깐. 한, 아까는 애인 없다며.」

한서림보다 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에드워드가 물었다. 이들과 강해건이 친해진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는데 뭐가 이렇게 불안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 없으면 미혼인 척하고 다녀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아까 연구실에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타이밍을 놓쳤을 뿐입니다. 지금 맥주 마시면서 당연히 얘기하려고 했어요. 이거 봐요, 결혼반지와 시계로 하고 나왔잖아요.」

한서림은 억울한 척하며 제 손가락에 있는 반지와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강해건의 눈앞으로 척 내밀었다. 어차피 시계는 매번 차기에 결혼예물이든 뭐든 상관이 없는데 반지가 불편해서 빼고 나오려다가 챙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손가락이 비어 있는 것은 강해건이었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도 처음 보는 것이고.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는 경박하게 낄낄거리며 니콜라스가 했던 것처럼 손바닥을 쫙 펴서 니콜라스의 턱 앞까지 내밀었다. 미간을 찌푸린 니콜라스가 에드워드에게 받았던 50달러를 손바닥에 짝 소리가 나도록 놓는 모습이 보였다.

「니콜라스.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사기도 사람 봐가면서 치는 거지. 나처럼 똑똑한 사람한테는 안 통해. 이건 내가 준 돈 돌려받은 거고, 졌으니까 네 돈에서 50달러를 주셔야지. 아싸, 내일 제이든한테도 받는다.」

애처럼 해맑게 신나 하는 에드워드와 다르게 니콜라스는 한껏 찌푸린 낯으로 머니클립에서 50달러 지폐를 한 장 더 꺼내서 주었다. 강해건이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한서림과 눈을 마주쳤으나, 한서림은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이런 일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한서림과 다르게 강해건은 어쩐지 저를 두고 내기를 했다고 하면 또 이상한 꼬투리를 잡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 실장님은요?”

“이상하네. 중호 형은 왜 찾아요?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하나도 안 친합니다. 그냥 강해건 씨가 혼자 와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나보다 중호 형이 더 보고 싶었던 거예요?”

“아니……, 왜 사람 말을 곡해해서 듣고 그래요.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이 실장님은 영어도 못 하시고 뉴욕은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강해건 씨가 혼자 나타났으니까 어디서 길이라도 헤매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 그런 거죠.”

“……한서림 씨가 왜 중호 형을 걱정하는 건데요?”

방금 전에, 영어도 못 하고 뉴욕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어디서 길이라도 헤매고 있을까 봐, 라고 했냐, 안 했냐. 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이 또라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뇌를 열어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한서림은 또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인형 같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아니에요. 걱정 안 해요. 이 실장님이 영어를 못 하든 말든, 뉴욕이 처음이든 말든, 길을 헤매든 말든, 막말로 내 알 바 아니죠. 이 실장님도 스마트 폰 가지고 있는데 번역기를 쓰든 지도 앱을 보든 알아서 하겠죠. 하나도 걱정 안 됩니다.”

“예쁜 말을 되게 가식적으로 하네요.”

어쩌라고, 이 미친놈아! 원하는 대로 말을 해줘도 지랄이냐.

이번에는 욕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기에, 기침하는 척하며 겨우 기침 소리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 빌어먹을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저만 아니라면, 삐뚤어진 강해건의 성격을 개조시켜달라고 전문가에게 던져주고 싶을 정도였다. 극우성은 다 이렇게 성격이 더럽고 대화가 안 통하나, 싶은 비약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걸 다 알면서도 매번 강해건이 작정하고 유혹하는 듯한 표정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두근거리는 저 스스로가 한심했다.

「근데 한, 정말 그 사람 맞아? 아니야?」

에드워드는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한서림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물었다. 아무래도 얼굴을 보면 비슷한 것 같은데 한서림이 좋아했던 배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 강해건이 이름을 말하며 인사했을 때도 긴가민가했던 거다.

「……맞아.」

한서림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건은 할리우드에 진출하지 않았고, 작품 중에서도 미국 쪽으로 수출된 것이 없으니, 뉴욕에서는 강해건을 모를 만도 했다. 에드워드 역시 한서림이 늘 강해건의 기사를 검색하고 작품 보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전혀 몰랐을 테다.

「뭐? 정말 그 배우라고? 어쩐지! 내가 아무리 구분 못 해도 눈썰미는 있다고! 와우. 한, 정말 성공했구나. 내 보스가 그쪽, 미스터 강의 엄청난 팬이었어요. 매일매일 기사 검색은 기본이고, 연구하다가도 잘 안 풀리면 늘 그쪽 영화나 드라마, 예능을 봤고요.」

「서림 씨가 내 팬이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것도 결혼을 약속한 이후에 알게 된 거였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매일매일 나를 생각한 줄은 몰랐는데 기분 좋네요.」

능청스럽게 대응하는 강해건을 보고 있자니 한서림은 정말 사교성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에드워드야 워낙 활달하고 말이 많은 스타일로 진짜 사교성이 좋은 쪽이었지만, 강해건은 철저하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단 멤버 네 명 중에 에드워드와 제이든은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사람 사귀는데 거리낌이 없는 반면, 한서림과 니콜라스는 말이 별로 없고 사람과 친해지는 과정을 귀찮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한서림은 눈짓으로 니콜라스에게 불편하지 않은지 의사를 물었고, 니콜라스는 괜찮다는 듯이 싱긋 미소로 답했다. 문제는 그걸 강해건이 봐버렸다는 거지만.

「어라? 잠깐. 아니 그렇게 팬으로 오래 좋아한 사람이랑 결혼까지 성공했으면서 신혼여행을 왔는데 연구실에 출근을 한 거라고? 한, 제정신이야?」

「에드워드 씨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죠? 나 오늘 많이 외롭고 서운했어요. 그렇지만 서림 씨가 일을 워낙 좋아해서 존중해 주는 거예요. 나는 많이 외롭지만……. 솔직히 이 시각까지도 호텔로 안 돌아오기에 찾으러 나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고요. 테라스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아주 둘이 죽이 척척 맞는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불필요하게 고퀄리티 연기를 선보이는 강해건은 재능 낭비를 제대로 하고 있었다.

40.

이후로도 약 한 시간 정도 더 강해건의 재능 낭비를 보다가 에드워드가 반려 알파의 전화를 받고 들어가 봐야 한다고 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브루클린에 사는 에드워드가 먼저 지하철역으로 달려가고, 강해건이 이중호의 전화를 받는 사이 내내 조용했던 니콜라스가 조금 걱정 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알파, 뭔가 나를 경계하는 것 같은데. 혹시 우리가 알파랑 오메가라서 괜히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전혀 아닐걸.」

「이상하네. 네 알파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데, 뭔가 페로몬으로 나를 경계하는 그런 느낌이 자꾸 들어.」

「나는 전혀 못 느꼈는데?」

「그런 건 알파들끼리만 느낄 수 있으니까. 오메가들도 기 싸움 하고 그럴 때 알파는 모르는 그런 페로몬으로 상대하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같은 형질끼리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니콜라스의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강해건이 니콜라스를 경계하려면 질투가 베이스에 깔려야 하는데, 저와 강해건은 질투라는 감정이 끼어들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사랑으로 한 결혼도 아닌 데다가 저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강해건이 니콜라스를 경계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여차하면 나는 알파여도 알파만 좋아한다는 걸 밝혀야겠어. 아, 그러면 혹시 더 경계하려나?」

「그런 거로 경계하고 그럴 사람 아냐. 네가 성향을 밝힌다고 해서 자기에게 마음 있을 거라고 착각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 니콜라스. 네가 착각한 것 같으니까.」

퍼퓸SR의 창단 멤버들은 서로를 결코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각자의 취향이 확고한 탓이었고, 덕분에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일에 지장을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서림이 이들을 창단 멤버로 받아들이는 데 제일 중요하게 작용했던 점이기도 했다.

「아, 맞다. 이번에 집에서 챙겨갈 건 없어? 한국도 이제 곧 여름인데 여름옷이라든가.」

「안 그래도 몇 벌 챙겨가려고 했어.」

평범함의 미학을 좋아하게 된 이후, 한서림은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뉴욕 집에 가지고 있는 옷들도 작년에 산 게 많아서 거의 새거였기에 이번 기회에 챙겨가려는 것이다.

「언제 올래? 혹시 네 알파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내가 대충 챙겨서 연구실로 가지고 가도 되고.」

「음……. 내 귀가 이상한 건가? 내 오메가 여름옷이 왜 니콜라스 집에 있다는 걸까요?」

언제 통화를 끝낸 것인지, 강해건이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강해건 씨, 지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살았던 집을 니콜라스가 렌트해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집 관리도 대신 해주고 있고요. 그래서 내 짐이 남아 있는 거예요.」

「…….」

한서림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변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자못 억울했다. 못 믿겠다는 듯한 강해건의 표정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분명히 ‘서로의 사생활 존중(각자의 애인에 대해 간섭 금지, 사생활은 언론 노출 금지)’라는 항목을 강해건이 직접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원래 에드워드가 지내고 싶어 했는데, 내가 신향수 개발 시즌에는 뉴욕에 와서 지내야 하니까 에드워드의 반려 알파가 집 비워주는 거 귀찮다고 해서 니콜라스가 떠안게 된 거예요.」

「나를 두고 신향수 개발 때는 뉴욕에 와서 지내려고 했어요?」

「그때는 한국에 가기 전이었으니까 결혼 얘기도 없었을 때거든요?」

「화내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래서 서림 씨가 일 때문에 뉴욕에 오게 되면 알파인 니콜라스와 한집에서 지내는 거고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억울해서 그런다는 말은 강해건이 치고 나온 말에 의해 끝맺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서림도 짐만 보관하고 이혼할 때까지는 니콜라스에게 집을 아예 빌려줄 생각이었다. 신향수 개발이라는 목적으로도 강해건을 두고 혼자서는 뉴욕에 오지 못할 것 같아서.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애 감정이 없어도 알파와 오메가인데 그럴 수는 없죠. 한이 뉴욕에 돌아오면 나는 친구 집으로 가고 집을 비워주기로 한 조건이었어요. 한이 집을 관리해주면 렌트비를 안 내도 된다고 해서 들어간 거라고요. 그리고 나는 알파 좋아합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니콜라스마저 억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제야 강해건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지워내며 다시금 예쁜 미소를 만들어냈다.

「아하. 그럼 그 집에 놀러 가 봐도 될까요? 우리 서림 씨가 살던 집이 궁금해서요.」

「당연하죠. 언제 오실래요? 나는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아니면 말 나온 김에, 내일 저 출근해 있는 동안 한이랑 함께 가서 보실래요? 뉴욕에 있는 동안 그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면 비워줄게요. 나는 친구 집으로 가도 됩니다.」

니콜라스의 노력이 가상해서 한서림은 미안함을 느꼈다. 뉴욕으로 오기 전에 이번에는 집을 비워줄 필요 없다고 미리 말을 해놨던 터라 더 그랬다. 이제 와서 갑자기 머물 집을 구하려면 인간관계가 협소한 니콜라스가 고생할 것이 뻔했다. 강해건이 무리하게 요구를 한다면 니콜라스가 당분간 호텔에 머물도록 체크인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우리도 호텔을 잡았는데 당신에게 그런 불편함까지 감수하게 할 수는 없죠. 그럼 내일 낮에 가서 서림 씨 여름옷 챙기면서 구경만 할게요. 집을 비워줄 필요는 없고요.」

「그래요. 한, 비밀번호는 네가 쓰던 그대로야.」

이렇게 어이없었던 오해는 일단락되었다. 애초에 강해건이 왜 이러는지 한서림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 * *

호텔로 돌아온 강해건은 한서림이 방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자신도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페로몬 폭주에 대한 전조증상도 전혀 없고, 컨디션도 좋았다. 솔직히 한서림과 함께 있으면 재미있었다. 제 취향범벅인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건, 꽤 보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괴롭히게 되는 이상한 짓을 하는 거였다. 어차피 신혼여행 명목으로 온 뉴욕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고.

불필요하게 신혼여행을 가야 한다는 짜증 때문에 각자의 휴가를 보내자고 말은 했으나, 강해건은 반나절 만에 심심해졌다. 이중호는 뉴욕에 처음 왔다고 들떠서 점심을 함께 먹자마자 관광을 하겠다고 나갔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중호와 같이 갈까 고민을 안 한 건 아닌데, 관광에 취미도 없을뿐더러 귀찮아서 호텔에 머물렀다. 아까 이중호가 지갑을 잃어버리고 호텔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 어떻게 하냐고 전화를 걸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중호는 택시 기사를 바꿔주었고, 강해건은 호텔의 이름을 말한 후 위치를 확인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택시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직원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한 후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 한서림에게 갔더니 니콜라스와 둘이서 소곤거리고 있는 모습이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처음부터 니콜라스가 한서림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펍에서 페로몬으로 장난을 쳤던 건, 결혼을 했으니까 보여주기로 행한 일이었다. 알파들의 세계에서는 그게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여차하면 나는 알파여도 알파만 좋아한다는 걸 밝혀야겠어. 아, 그러면 혹시 더 경계하려나?」

강해건이 들은 대화는 꽤 앞부분부터였으나 일부러 심통을 부린 것이었다. 한서림이 이번에는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예쁜 얼굴에 억울함을 달고 있는 모습도 음심을 동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할 말을 다 하면서 대꾸하는 것은 취향이 아닌데 자꾸 보고 싶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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