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2)

“결혼하면 번호 줄 테니까 앞으로는 한서림 씨가 시켜요. 밥은 본인이 사겠다고 했으니까.”

“네, 그럴게요. 아예 시간 정해서 매일 가져다 달라고 해도 되겠어요.”

“편한 대로 해요. 그건 그렇고. 히트사이클 주기가 어떻게 돼요?”

“네?”

“왜 그렇게 놀라요?”

목적이 분명한 사이니까 충분히 나눌 만한 대화 주제인데 뭘 저렇게 눈이 동그래져서 화들짝 놀라는지. 한서림은 단아한 이목구비를 가졌어도 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인데, 가만 보면 타고난 도도함을 상쇄시키는 귀여움이 있었다. 네 살이나 연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서림이 정말로 강유건과 같은 나이인지 순간적인 의심이 피어났다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계약서에 서로의 사이클은 같이 보내기로 했잖아요. 나는 오늘이든 내일이든 러트가 시작되면 한서림 씨 안에 사정할 때마다 노팅할 생각인데.”

“그건 상관없는데, 그……, 내가 주기가 일정하지 않아서요.”

“음? 알파도 아니고, 오메가가 사이클 주기가 일정하지 않다고요? 그건 또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요즘은 알파들도 주기가 꽤 일정한 편인데.”

옛날에는 오메가만 사이클 주기가 일정하고 알파는 비정기적으로 발생했었다. 오메가의 히트사이클 페로몬에 러트가 오는 경우도 많았고, 그에 따른 사건 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었다. 그러나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알파도 안정적인 사이클 주기에 들어섰다. 주기를 일정하게 해주는 약이나 주사도 존재했고, 의료보험까지 되니 대부분의 알파는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정기적 러트를 선택해 편하게 대비할 수 있었다. 알파도 아닌 한서림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히트사이클 전조증상이 있으면 얘기할게요.”

“주 2회 섹스로 계약되어 있으니, 하다 보면 사이클이 겹치는 날이 있겠죠. 그런데 말했잖아요. 나는 빨리 애를 낳아야 한다고. 한서림 씨는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다고 했고요.”

“그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그런데 왜 대답을 피해요? 상식적으로 히트사이클과 러트사이클이 겹쳤을 때 노팅하면 임신할 확률이 가장 높은데, 사이클 주기를 알아야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사이클 주기가 일정하지 않아도 임신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계약서에 내 치부를 밝혀야 한다는 내용도 없었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강해건 씨가 배려해줬으면 합니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뱉어낸 목소리와 말투가 단호하고 당당했다. 사이클 주기가 왜 일정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을 모양인가 보다. 임신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니 별로 상관은 없는데 왜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역시 한 대표님 성격으로는 쉽지가 않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이라……. 근데 이제 보니까 별로 말을 잘 들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오늘도 고집부린 게 벌써 몇 개인지 알아요?”

“하지만 이런 민감한 부분은……!”

“그래요. 존중할게요. 임신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하니 넘어가죠. 그래도 문제없다는 진단서는 준비해줬으면 좋겠네요. 왜 한서림 씨가 그런 억울한 표정을 해요? 정작 억울해야 할 사람은 이유도 듣지 못한 나인 것 같은데.”

우습게도 이렇게 한서림을 짓누를 때마다 기이한 쾌감이 살갗을 기어올랐다.

* * *

강해건의 집은 대체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매니저의 전화를 받은 강해건은 한서림이 잘 방을 알려준 후 잠시 집을 비웠다. 피곤하면 먼저 자도 된다고 했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서 먼저 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한서림은 조용히 걸으며 넓은 거실을 구경했다. 당장 이사를 갈 것처럼 최소한의 가구 외에는 삭막할 정도로 휑했다. 한서림이야 한국에 온 지 이제 겨우 3주가 지났으니 제집에 뭐가 없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밴 안에서 매니저에게 듣기로는 강해건이 독립 이후 계속 이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뭐가 이렇게 없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온 지 이제 겨우 3주밖에 안 됐을 뿐인데 강해건과의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몰려온 파도처럼 한서림을 휩쓸었다.

거실에 있는 가구나 가전은 벽걸이 TV, 소파, 테이블, 스탠드형 에어컨, 그리고 벽걸이 TV 아래 있는 낮은 높이의 거실장 테이블이 전부였다. 만약 TV가 벽걸이 형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TV 받침대로 쓰였을 것이다.

이 집에 처음 온 것도 아닌데 유리로 된 거실장 테이블 위에 작은 액자를 이제야 발견했다. 한서림은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액자는 같은 디자인으로 두 개였다.

“어, 이 사진…….”

8년 전 강해건의 방에서 도망칠 때 봤던 그 사진이 한서림의 시선을 먼저 잡아끌었다. 강해건이 강유건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당시에는 너무 정신없고 무서워서 얼굴만 확인하고 도망치느라 어떤 사진인지도 제대로 못 봤는데, 교복을 입은 채 꽃다발과 졸업장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강해건의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던 모양이다.

교복을 입은 강해건은 지금보다 많이 풋풋하고 앳된 모습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강건한 알파의 기운을 풍기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없었다. 당시에는 강해건의 뒷모습만으로도 위축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그와 함께 러트를 보내게 되었다. 이래서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는가 보다.

옆으로는 강해건이 우아하고 고매한 중년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기사에서 몇 번 봤던 서정 그룹 계열사인 유빛 갤러리의 대표이자 강해건의 모친인 윤성아였다. 그러고 보니 강유건의 생일 파티 때 윤성아 대표는 봤던 기억이 없었다. 기사에 의하면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그날엔 참석해 있었을 텐데.

기사를 통해 윤성아 대표가 운영하던 유빛 갤러리를 강해건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지는 복도에는 어림짐작으로도 가치가 상당할 그림이 전시하듯이 쭉 걸려 있었다.

보통 연예인들은 집에 자기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는다고 하던데 강해건의 집에서는 형제가 함께 찍은 졸업사진과 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제외하고는 강해건의 사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정 그룹의 언론보도용 가족사진을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는데, 이 집에서는 가족구성원이 다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볼 수 없었다. 더욱 희한한 건, 강해건이 서정 그룹의 서자이기에 정작 강 회장과 피가 이어져 있고 모친과는 남이나 마찬가지인데 유일하게 강 회장의 사진만 없는 것이다. 저처럼 학대를 받은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강해건 역시 부친과 사이가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9.

찬찬히 거실을 다 둘러본 한서림은 강해건이 저에게 내어준 방으로 향했다. 그의 침실과 바로 옆방이었는데, 게스트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넓었다.

‘아무리 내가 사생활이 문란했어도 지금 분위기 조성 다 해놨는데 다른 사람이랑 호텔에 갈 수는 없잖아요. 내 집에는 아무나 안 들이는 성격이라.’

강해건이 아무나 안 들인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과 달리, 방에는 당장 누군가가 들어와서 살아도 되게끔 필요한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기본 옵션인 붙박이장을 제외하고도 성인 두 명이 눕고도 자리가 많이 남을 만한 커다란 침대와 단조로운 책상, 미니 테이블과 소파까지. 가구만 있고 소소한 물건들은 없어도 이렇게까지 갖춰놓은 것을 보면 누군가는 이 방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스캔들이 나면서 찍힌 사진은 전부 서정 그룹의 계열사 호텔이었기에 이 방을 사용했을 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강유건이나 이중호 매니저일 것이다.

한서림은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세탁한 지 얼마 안 된 듯 베개와 이불에서는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문득 집이 이렇게 넓은데 혼자 살면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이 들락거리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강해건 혼자 생활하는 집이었다.

한서림도 뉴욕에 가기 전까지는 강해건의 아파트보다 훨씬 더 넓은 저택에서 살았지만, 한 회장의 집에는 언제나 고용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집이 넓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감상을 느낄 만한 상황이 없었다. 뉴욕에서는 혼자 살기 적당한 20평대의 아파트에서 지냈고,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파트는 30평대였다.

사실 한서림은 30평대도 혼자 살기에는 넓다고 생각했다. 한휘 건설의 외아들로 지나치게 풍족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뉴욕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던지라, 어느덧 적당히 평범한 기준으로 사는 게 좋다는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돈이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매번 문제는 일어나니까. 그렇다면 너무 없는 것보다는 너무 많은 게 나을 테지만, 보통의 미학을 찬양하게 된 한서림의 가치관은 명확했다.

“차라리 지금 자두는 게 나으려나…….”

강해건의 러트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 그편이 현명할 수도 있었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먼저 잘 마음이 없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한서림은 일어나서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온화함이 몸을 감싸자 금세 잠이 들 것처럼 편해졌다.

아까 강해건이 히트사이클 주기를 물었을 때 놀랐던 심장도 평온해진 지 오래였다. 강해건의 페로몬으로 비정기적 발정기가 치료된 이후 히트사이클이 사라졌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어도 대답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잘 둘러댄 것 같았다.

임신은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언제가 더 좋은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병원에 한번 가야할 듯했다. 어차피 강해건이 요구한 진단서를 받아야 하기에 가긴 가야 했다. 예전에 치료해주던 의사와 상담을 한 후, 시간이 좀 지난 후에 히트사이클인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펠라티오를 할 때도 느꼈지만, 저에게 발정기가 없더라도 강해건의 페로몬에 반응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제 페로몬을 컨트롤하는 것에서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만약 제어하지 못해서 다른 알파나 오메가들처럼 진짜 제 페로몬이 터진다면…….

거기까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한서림만 두려운 일이 아니라, 제 페로몬이 강해건에게 어떤 영향을 다시 미칠지 알 수 없기에 강해건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강해건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서림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에 눈이 뜨였다. 강해건이 새벽에 깨우거나 덮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직 러트가 시작되지 않은 듯했다.

“으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방에 붙어 있는 욕실에서 대충 양치와 세우만 했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쳐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잠결에 미약하게 배출된 제 페로몬을 거둬들이고 습관처럼 페로몬 향수를 제 몸에 분사했다. 손목과 목덜미는 물론, 언제 러트가 시작될지 모르기에 엉덩이 부분과 앞에도 뿌렸다. 조금 더 방에 머물며 뒹굴거릴까 하다가 배가 고픈 탓에 방에서 나갔다. 강해건의 침실 문은 닫혀있으니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거실이 고요했다.

어제 뭘 먹었는데 이렇게 배가 고프지…….

생각해 보니 광고 촬영 현장에서 먹은 샌드위치 한 조각과 늦게 먹은 저녁이 전부였다. 평소 한서림이 먹는 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강해건이 갑자기 히트사이클 주기를 묻는 바람에 체할 것 같아서 원래 먹는 양의 반도 못 먹었으니까.

한서림은 주방을 기웃거리며 이곳저곳을 열어보았다. 냉장고에는 다양한 종류의 술과 음료수, 물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한 찬장에도 레토르트 식품조차 없었다. 실망감으로 인해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야…….”

결혼해서 이 집에 들어와 살면 냉장고와 찬장부터 채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컵라면이나 레토르트 식품은 바쁠 때 아주 유용했다. 귀찮을 때도.

거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올려 무릎을 모으고 배달앱을 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24시간 배달해주는 업체 중에 골라야 했다. 다 맛있을 것 같아서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최종후보로 겨우 세 개를 뽑았다. 돼지김치찌개, 간장게장 정식, 비빔밥과 차돌된장찌개 세트. 뉴욕에서 지낼 때는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한식을 꽤 그리워했었나 보다.

그런데 강해건이 먹을 것도 시켜야 하나 고민이 됐다. 어제 늦은 저녁을 배달시켰던 곳에서 주로 시켜먹는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처를 못 받았다. 어제 먹어본 바로는 조금 심심하다 싶게 간이 돼서 건강한 맛인데도 무척 맛있었는데, 아무 데서나 주문하면 간이 셀 것 같았다. 그래도 남의 집에서 제 것만 주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일단 주문하고 강해건이 안 먹으면 제가 다 먹기로 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가장 무난한 돼지김치찌개를 선택하고, 계란프라이 다섯 개를 추가한 후 결제를 하려던 찰나였다.

“일어나 있어서 다행이네요.”

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거대한 몸이 나타나서 시야를 막았다. 언제 일어나서 씻은 것인지 강해건은 꽤 말끔한 모습이었다.

“잘 잤…….”

한서림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며 잘 잤냐고, 러트는 아직 오지 않은 거냐고 물으려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회색빛 눈동자가 진해져서 정염에 물들어 있었고, 의식하는 순간 감지되는 페로몬 향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누가 맡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인 욕구가 가득한 발정 페로몬이었다.

“어엇……!”

허리를 숙여 한서림을 번쩍 들더니 그대로 어깨에 들춰 멘 강해건이 자신의 침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관능적인 강해건의 페로몬에 휩싸여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챌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방에 도달해서 침대에 내팽개쳐지는 것과 동시에 눈이 돌아간 강해건이 보였다.

“한서림 씨 외모가 정말 내 취향이긴 한가 봐요.”

“네?”

강해건은 중얼거린 말에 대한 부연설명 대신 조급한 투로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옷 벗고 엎드려요.”

극우성 알파의 러트가 시작되었다.

* * *

어깨에 들춰 메고 온 한서림을 침대에 던지듯이 내려놓은 강해건은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어냈다. 이미 커다란 성기는 한계까지 발기해서 선액을 흘리며 아랫배에 바짝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전라가 된 상태로 시선을 돌리자, 한서림이 벗으라는 옷은 안 벗고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 벗고 엎드리라니까…….”

낮게 혀를 차며 중얼거린 강해건이 한서림의 티셔츠를 잡았다. 한서림이 자기가 벗겠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탓에 티셔츠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부드러운 천 조각이 볼품없이 찢겨나갔다.

“이런, 아깝네. 잘 어울렸는데.”

어깨에 들춰 멜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거실 소파에서 큼지막한 티셔츠에 싸여서 다리를 올려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이상한 음심이 동한 게 문제였다. 아니, 러트가 시작되고 있으니 욕정이 넘쳐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서 옷까지 찢어버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내, 내가, 내가 벗을게요.”

강해건의 손이 반바지에 닿는 순간, 찢어진 셔츠로 인해 당황으로 물들어 있던 한서림이 다급하게 바지를 벗어냈다. 어제 속옷을 주지 않은 탓에 한서림도 바지를 벗는 순간 반쯤 힘을 받은 성기를 드러냈다. 얼굴에서는 희미한 정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아마도 페로몬의 영향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발기하고 있는 것일 테다.

“엎드려요.”

계약에 의한 섹스이고 발정기를 잠재울 수단일 뿐이기에 한서림의 쾌락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목적이 분명했던 강해건은 단 한 번도 상대의 쾌락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제가 찾는 오메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 후에, 역겨우면 내치고 컨디션이 괜찮다 싶으면 그저 사정하기 위해 박기만 했다. 한서림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대해 줄 마음은 없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조금 장기적으로 몸을 섞어야 한다는 것뿐이니까.

30.

한서림은 머뭇거림 없이 엎드렸고, 강해건은 그의 골반을 틀어쥐고 끌어당겨 자세를 잡았다. 한서림에게서 풍기는 페로몬 향이 거슬렸다. 그의 페로몬을 덮기 위해 제 페로몬을 더 풀었다. 섹스를 하면서 최대한 페로몬을 많이 빼낼수록 러트의 여파도 적으니 일석이조였다.

“으읏…….”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양손으로 우악스럽게 잡고 벌린 후 마른 입구에 선단을 비볐다. 가늘게 떨리는 허리가 기이한 감상을 자아냈다. 몇 번 문질러주지도 않았는데 선액으로 젖어가던 입구에서 오메가 액이 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삽입하면 한서림이 아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힘주어 넣으려는데,

“하……. 점이, 있었네?”

엉덩이와 허벅지가 이어지는 사이에 작은 점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서림은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듯했다.

“읏, 네?”

만약 러트가 조금 더 진행됐더라면 제정신이 아니라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눈에 띄는 큰 점도 아니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아주 작은 점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점을 많이 봤지만, 한서림처럼 8년 전의 오메가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 너무 오래돼서 정확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순간적인 느낌이 그러했을 뿐.

“한서림 씨. 정말 그날 일찍 간 거 맞아요?”

“무슨……. 하으, 거, 거기가 아니라…….”

성기로 점을 꾹꾹 누르면서 묻자, 침대를 받치고 있던 단정한 손이 뒤로 넘어와 거리낌 없이 기둥을 덥석 잡았다. 낯설지 않은 상황에 불현듯 그 순간이 겹쳐졌다.

‘하……. 이것까지 예쁘네.’

한참 열기에 시달리다가 자꾸만 시선을 빼앗는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있는 작은 점을 성기로 뭉근하게 눌렀었다. 별거 아닌 이 점이 왜 이렇게 야하고 흥분을 고양시키는지 이유도 모른 채 점을 없앨 것처럼 꾹꾹 짓이겼었다. 그때 오메가가 허리를 흔들며 손을 뒤로 뻗어 기둥을 잡고 구멍으로 이끌었다.

“읏, 씹…….”

그날의 일이 완벽하게 재연되었다. 강해건의 기둥을 잡은 한서림이 엉덩이 사이로 가져가 그대로 귀두를 삼켜버렸다. 쑥 빨려 들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선단에서 느껴지는 빠듯한 조임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며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수축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페로몬이 또 한 번 쏟아지듯이 터져 나왔다.

“하……. 입은 못 쓰더니 정말 구멍을 잘 쓰나 봐요.”

말과 동시에 강해건은 강하게 허리를 치받으며 단번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짧은 순간, 강렬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아흑! 아, 아파……. 흐읍…….”

한서림의 상체가 무너졌고,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위태로워 보였다. 무리하게 쑤셔 넣어도 다 넣지 못할 것처럼 구멍이 몹시 작았는데, 오메가 액을 흘리고 있는 구멍은 힘겨워하면서도 꽉 잡아 문 성기를 놓아주지 않았다.

“힘 빼요. 그래야 움직이지.”

“으응, 자, 잠깐만……, 잠깐만, 적응할 시간, 하악……!”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가늘게 몸을 떠는 한서림을 보자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적응이고 뭐고 강해건은 엄청난 압박감을 선사하는 구멍에 제멋대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깊게 쑤셔 박으면 차진 내벽이 기둥을 부드럽게 감싸며 빨아 당겼고, 허리를 물리면 빼지 말라는 것처럼 연한 속살이 딸려 나와 시야를 자극했다.

“아, 아! 윽……, 하읏……!”

그때부터 강해건은 이성을 잃고 폭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숱하게 봤던 장면인데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은 것은, 아무래도 러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고 합리화했다.

* * *

“아, 흐윽……!”

강해건을 받아내면서 한서림이 할 수 있는 일은 흔들리는 몸을 방치한 채 신음을 쏟아내는 것뿐이었다. 강렬한 쾌락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한서림은 제 페로몬을 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극우성 알파의 밀도 높은 강력한 발정 페로몬을 쏘이니 제 페로몬이 멋대로 새려고 했다. 강해건의 페로몬에만 반응하게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 제 페로몬이 개방된다면 강해건에게 더 큰 악영향을 끼칠까 봐 두려워서, 넘쳐흐르는 환락에 사로잡힌 몸과 정신으로도 필사적으로 페로몬을 가두는 것에 집중했다. 아주 잠깐만 긴장을 풀어도 페로몬이 터질 것 같았다.

“하, 으응…….”

엎드린 몸을 지탱하는 게 힘겨워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강해건이 성기를 슬쩍 물리고 체위를 바꾸었다. 함께 쓰러진 몸은 한 방향을 보며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되었고, 큼지막한 손에 오금이 잡혀서 들린 탓에 다리 사이가 적나라하게 벌어졌다.

“으흑!”

강해건이 잠깐 물렸던 성기를 거세게 치받으며 행위가 이어졌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단단한 근육으로 점철된 그의 다리가 들어왔다. 상대적으로 편했던 남은 다리마저 그의 다리에 짓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이 덫에 갇힌 기분이었다.

“페로몬, 거둬요.”

“흐읏, 네?”

“역하니까, 후으, 페로몬 거두라고요.”

“그, 그게 내 맘대로……, 하윽!”

거절 비슷한 의사가 끝나기도 전에 흉포한 성기가 예민하게 달아오른 안을 강하게 짓찧었다. 강해건의 요구대로 해주고 싶은데, 페로몬 향수라서 의지대로 향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신향수는 향기 지속시간이 더 길어졌고, 피부 밀착도를 최고 수준으로 높인 만큼 물에 씻어도 잘 날아지지 않는다. 당장 향수의 향을 지우고 싶으면 소취제를 뿌려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건에게 온몸이 결박당해서 갇혀 있는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다른 오메가들처럼 흥분해서 페로몬 컨트롤 능력이 상실된 척하며 그저 제 페로몬이 새지 않도록 정신을 놓지 않는 수밖에.

“하, 그 향만 아니면 진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짓씹으며 중얼거린 강해건이 다시 거센 움직임을 이어갔다. 한서림은 예민하게 들이치는 쾌감에 몸을 떨며 시트를 손에 꼭 쥐고 끝나지 않는 시간을 버텨냈다.

몇 번이나 체위가 바뀌었고, 몇 번일지 모를 사정이 이어졌으며, 이내 처음과 같은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계속 체위를 바꾸면서도 가장 자주 접하는 자세인 걸 보면, 아마도 강해건이 깊은 지점까지 넣을 수 있는 후배위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흐, 으응…….”

잠시 쉬어가려는 것처럼 얕게 치받는 몸짓에도 몸이 벌벌 떨리는 전율이 등골을 내달렸다. 기억하기로는 강해건도 다섯 번 이상 사정을 했는데, 크기를 줄이지 않는 성기에 슬슬 겁이 나려고 했다. 한 번도 건드려진 적 없는 곳이 귀두에 계속 찍혀 눌렸기 때문인지, 얕은 움직임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간질거림이 온몸을 괴롭혔다.

“세게, 아흣……, 더, 세게…….”

“후우……. 이렇게 페로몬에 절여졌는데도 잘 버티네요. 한서림 씨가 극우성이라고 해도 믿겠어.”

칭찬 아닌 칭찬과 함께 또다시 잔악함 움직임이 이어졌다. 오메가에게 체력과 형질은 그다지 큰 상관이 없지만,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견디며 버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한서림 역시 이 지경으로 몸을 혹사당하면서도 자신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강해건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었더라면, 그가 두 번째 사정을 했을 때 페로몬에 절여져 이미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아! 아, 흑……. 읏, 아……, 아!”

강해건이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그가 싸질러 놓은 정액과 오메가 액이 미약한 틈새를 비집고 흘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해건과의 상성이 좋았다. 유독 한 곳만을 찌르며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던 한서림의 성기에서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묽은 정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해건의 것을 물고 있는 구멍이 지나치게 바짝 조여지며 그에게서도 정액을 쥐어짜 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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