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42)

“도와주고 싶으면 신음 소리 내주면 고맙고요.”

“…….”

머릿속에 뭐가 들었으면 저런 말을 하는지, 욕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강해건은 소파에 눕듯이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촬영할 때 보였던 반짝임이 전부 사라지고 어딘가 아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 또한 표면이 갈라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한서림은 멀뚱히 선 채로 조용히 강해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서림에게서 대답이 없자, 가지런하게 늘어져 있던 긴 속눈썹이 들리며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렌즈를 착용한 모양이었다. 어제 흑발로 염색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는 오늘의 광고 촬영을 위해서였고.

“음……. 왜 그런 표정으로 봐요? 뭐라도 진짜 하길 원하는 거예요?”

“아뇨. 정말로 몸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아. 요즘 신경 많이 쓰고 스트레스를 좀 받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러트 전조증상이 세네요. 오늘은 페로몬 개방도 아예 못 하니까 쌓여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가요.”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멋대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강유건에게 들었던 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서 머릿속을 정신없게 했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한서림이 두려움에 떨었다.

“갑자기 어디를요?”

“나머지는 러트 끝난 후에 다시 날 잡아서 찍고 오늘은 들어가서 쉬라고요. 상태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나름 걱정하는 기색을 비쳤는데, 강해건은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반응했다.

“한 대표님. 광고 한 번 찍는데 얼마가 드는지 알아요? 여기서 중단하면 돈만 이중으로 쓰는 거예요.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니까 마저 찍어요.”

“강해건 씨. 그러다가 갑자기 전조증상이 심해져서 페로몬이라도 새면요? 극우성 형질이 사이클 때 괜히 자발적 감금을 하라고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줄 압니까? 추가 비용은 내가 지불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강해건의 말을 자르면서까지 강경하게 나가는 이유가 있었다. 이러다가 강해건이 페로몬 폭주를 일으킬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그 정보에 대해 알고 있다는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반적인 사회적 제도를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잠시 가만히 바라만 보던 강해건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음……. 그럼 같이 갈래요?”

“네?”

“아, 내일은 출근해야 하나.”

“……왜요? 수요일이 아니라 내일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지금 느낌으로는.”

저런 대답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위험한 수준이긴 한 모양이었다. 몰랐더라면 어찌어찌 촬영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을 테다. 강해건은 한 시가 급한 상황이 되었을지도. 이렇게라도 의도치 않게 알아서 다행이었다.

“그래요. 그럼 지금 같이 가죠. 앞서 연출한 상황 때문에 갑자기 촬영을 접으면 이상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 아픈 척할 수 있겠습니까?”

“아픈 척은 됐고. 내 형질은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러트 증상이 있다고 하면 돼요. 광고 계약서에도 그 사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니까. 그건 내가 매니저 통해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들어왔던 것과 다르게, 나갈 때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강해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한서림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곧 강해건이 이중호 실장을 불러서 상황을 전달했고, 이야기를 들은 감독은 난감해했다.

“세트나 장비 그런 거 다 다시 빌려도 된다고 칩시다. 근데 우리 스케줄도 좀 고려해 주셔야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갑자기 촬영을 중단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감독님. 계약서 작성할 때 러트 관련해서는 명시되어 있는 부분 제가 직접 짚어드리고 특별히 더 강조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감독님이 스케줄 잡은 날짜가 러트 직전이라고, 저는 주기가 꽤 일정한 편이라고도 추가로 말씀도 드렸고요.”

강해건이 예의 바르지만 딱딱한 어투로 말하면서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미약하게 흘리자 감독은 언제 투덜댔냐는 듯이 바로 수긍했다. 같은 알파여도 극우성의 발정기 페로몬은 위협적이어서 감당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

그렇게 강해건과 한서림은 함께 촬영장을 벗어났다.

이중호 실장이 운전하는 밴에 오른 후부터 강해건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린 탓인 듯했다. 강해건이 컨트롤하고 있는데도 차 안에 미약한 페로몬이 새고 있었다. 저렇게 억지로 누르고 있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서림 역시 비정기적 발정기에 시달릴 때, 특수 억제제로 강하게 눌렀어도 아주 가끔 제멋대로 페로몬이 터졌으니까. 8년 전 그날이 아주 가끔에 속하는 날이었다.

“답답하면 페로몬 풀어도 됩니다.”

“억제제 더 먹었더니 참을 만해요.”

“나는 괜찮……. 아, 혹시 매니저님 때문에 그런가요?”

“중호 형은 어차피 베타라 상관없어요.”

“그럼 페로몬 개방해요. 억지로 누르고 있으면 더 안 좋잖아요.”

우성이나 열성도 그러한데 극우성은 오죽할까. 한서림은 나름대로 배려해서 한 말이지만, 강해건은 비웃음을 담은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남 앞에서 보여주는 취미 있어요?”

“네?”

“혹시 한 대표님한테 저질스러운 변태 성향이 있나 해서요.”

“저질, 변……. 저기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페로몬 풀면 한서림 씨는 맨정신으로 못 있을 텐데, 변태 성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자신 있는 건가?”

강해건이 한서림의 몸을 눈길로 쓸어내리는 그 순간, 하필이면 한서림은 룸미러를 통해 이중호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운전을 하고 있는 이 실장이 괜히 흠흠, 헛기침을 했다. 강해건이 말하는 바를 못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24.

“보여줘도 된다고 하면 페로몬 풀고. 나는 상관없거든요. 형, 좋은 구경 하겠다.”

“아, 저 미친 새끼가 진짜. 러트 증상이면 좀 닥치고 있어. 정신 사나워서 운전에도 방해되니까. 죄송합니다, 대표님. 쟤가 원래 정상이 아니라 가끔씩 저래요. 이해 좀 해주세요.”

한서림이 어색한 만큼 이중호 실장도 어색한 듯했다.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며 눈치를 보니 말이다.

“네.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강해건 씨, 나 그런 취미 절대 없으니까 참아 봐요. 내가 한 치 앞을 못 보고 실언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그때 마음껏 풀어요.”

그런데 문득 걱정이 들었다. 극우성 형질의 사이클 때는 법적으로 자발적 감금을 하도록 되어있는데, 함께 보내는 상대는 괜찮은지에 대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보지 않았기에 들은 바가 없었다.

“이랬다저랬다 하네.”

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강해건을 온전히 받아낼 것이다. 그의 지옥을 조금이라도 나눠야 죄책감이 점차 옅어질 테니까. 철저히 저를 위한 선택이었다.

“역시 말을 자주 바꾸는 타입인가 봐요.”

뒤끝 한 번 더럽게 기네.

“귀엽게.”

변명을 하려던 타이밍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돌려 강해건과 눈을 마주쳤다. 차에 타자마자 렌즈를 뺀 탓에 회색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박혀왔다. 느슨하게 풀어진 강해건은 위태로워 보였다.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하필이면 퇴근 시각에 걸려 차가 많이 막혔다. 옅은 미소를 걸치고 여유로워 보이는 강해건에 비해 한서림이 더 불안함과 초조함에 떨었다.

극우성 알파의 러트 페로몬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한 번 망가졌던 몸이니 다시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죄책감이 짙다지만 너무 겁 없이 불구덩이로 달려든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몰려오며 오만 걱정이 다 들었다. 그런데 제가 감당할 수 없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강해건이 페로몬 폭주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흥분에 취해 마음껏 만족하길 바랐다.

도어록이 해제되고 아파트에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강해건에게서 어마어마한 양의 페로몬이 확 터졌다.

“흐읍…….”

파도에 떠밀려가는 것처럼 온몸을 휩쓰는 페로몬에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이럴 거면서 차에서 풀라고 당차게 말한 거예요?”

이토록 농도가 진하고 밀도 높은 페로몬은 처음이었다. 위협이 되지는 않는데 자꾸만 몸에 힘이 빠지며 속 깊은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미약하게 차오르는 흥분이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코와 입을 막았는데도 어느새 피부로 침투해 뇌까지 파고든 페로몬이 정신을 장악하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용기는 인정할 만하네요. 한서림 씨 형질이 꽤 좋은가, 다른 오메가들은 이 정도 페로몬이면 바로 주저앉거나 벌벌 떨던데. 질질 싸는 애들은 부지기수였고.”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제야 비로소 극우성 형질이 사이클 때 왜 자발적 감금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강해건의 페로몬에만 반응을 보이는 몸이라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지, 다른 오메가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까지 강해건과 러트를 보낸 오메가들은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나름 걱정했는데, 한 대표님이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되네요.”

강해건이 페로몬을 컨트롤한 것인지 한결 가벼워진 덕분에 호흡이 편해졌다. 몸 속 깊은 어딘가가 간질거리던 감각도 사라졌고, 서서히 차오르던 흥분도 가라앉고 있었다. 무언가 강렬하게 뇌를 압박하던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씻어요. 나는 방에서 씻을 테니까.”

어쩌면 강해건에게는 사이클만 함께 보내는 극우성 형질의 파트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러한 연유로 몇 안 되는 극우성끼리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만들어준 협회가 존재했다. 원하는 취향에 따라 매칭시켜주기도 했다. 하다못해 우성인 모주원에게도 사이클만 함께 보내는 우성 파트너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로 인해 실제로 연인 관계로 발전하거나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이야기일 뿐, 감정을 배제한 채 짐승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며 치를 떨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극우성 오메가의 인터뷰를 본 적도 있다.

극우성 형질은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극우성이기 때문에 겪는 불편함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우성 오메가이면서도 페로몬 학대로 인해 제대로 된 형질을 누릴 수 없었던 한서림은 그런 극우성의 삶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콘돔은 있습니까? 없으면 씻기 전에 사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강해건의 페로몬이 안정되고 정신이 맑아지자, 가장 먼저 챙겼어야 하는 게 떠올랐다.

“이상한 말 하는 게 취미인가? 아니면 습관?”

“네?”

“콘돔이 왜 필요해요? 이 기회에 임신하면 시간 단축되니까 더 좋은 일이잖아요.”

“아…….”

이전 연애에서 만났던 알파들에게 병적으로 콘돔을 고집했었기에 무심코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잠시 강해건과의 사이를 망각했다. 괜한 질문을 했다가 귓가만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데……. 평소라면 당연히 콘돔을 사용하겠죠. 그런데 한서림 씨, 나랑 하룻밤만 섹스하고 안 볼 사이였어요? 계약서 내용 벌써 잊은 거예요?”

“아뇨. 내가 실언했어요. 목적이 분명하니까 콘돔이 필요 없는 사이인데, 잠깐 잊었습니다.”

“나한테 조금 더 집중해주는 게 어때요? 말 잘 듣는 거엔 그런 것도 포함인데.”

귓불을 매만지는 강해건의 손길이 은근했다. 한서림은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려는 걸 의식적으로 참아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뒤엎어도 되고요. 마지막으로 기회 주는 거예요.”

“아뇨. 안 싫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행이네요. 그럼 씻어요.”

강해건이 짙은 미소를 보이고 방으로 들어간 후, 한서림도 코트와 재킷을 벗어서 거실 소파에 가지런히 두고 거실 욕실로 향했다. 한서림이 선호하는 건식이었다. 제법 넓은 욕실에는 호텔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수건들이 차곡차곡 쌓아져 있었고, 선반에는 무향의 입욕제가 줄 맞춰 놓여 있었으며, 한쪽에 부드럽고 폭신한 재질의 가운도 걸려 있었다. 어차피 벗을 거니까 욕실에서 나갈 때는 저 가운을 입으면 될 듯했다.

옷을 벗어낸 한서림은 샤워만 하려다가,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온도를 맞춰두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입욕제 하나를 풀자 금세 거품이 몽글몽글하게 수면을 채웠다. 향이 없다는 것에서 강해건의 취향을 확고히 알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이 안온하게 피부를 감싸자 근육이 이완되며 노곤한 기운이 몰려왔다. 거품기 버튼을 누르자 마사지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자각하지 못했었는데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촬영장에서 몹시 다정하고 낯간지럽게 구는 강해건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탓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아까 함께 있던 김 팀장 말에 의하면, 보통 광고 촬영 현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다고 하던데 오늘은 강해건의 연애 이야기가 주였다. 강해건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실 광고주인 한서림의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강해건이 거짓으로 페로몬 향수 칭찬도 여러 번 한 터라 나쁘지는 않았다.

10분 정도 몸을 담그고 있다가 매끈해진 살갗에 감탄하며 일어섰다. 원래도 피부가 많이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지금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입욕제의 브랜드와 이름을 확인했다. 평소에 반신욕을 즐기기에 웬만한 입욕제는 다 써보며 맞는 입욕제를 찾아냈는데, 브랜드 이름조차 낯설었다. 어쨌든 이름을 외웠으니까 집에 사다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욕조에 탑재된 물 빠짐 버튼을 누른 후,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냈다.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가운을 입기 전, 챙겨가지고 들어온 페로몬 향수를 뿌렸다. 피부 밀착도를 높이기 위해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분사했다. 제 페로몬 때문에 강해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니, 혹시라도 제 페로몬을 다시 마주하면 강해건의 증상이 악화될까 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욕실에 비치되어 있는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린 후 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입고 왔던 옷은 단정하게 개서 코트와 재킷 위에 올려두었다. 강해건은 아직 씻고 있는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한서림은 소파에 앉아서 비서인 임 실장에게 내일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김 팀장에게는 업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꽤 기대했나 보네요.”

불현듯 들려온 낮은 음성에 고개를 돌리니 편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강해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타고난 피지컬에 관리까지 하니 탄성이 안 나올 수가 없는 몸이다. 저런 옷을 입고 있는데도 아까 촬영장에서처럼 광고 촬영을 하는 듯했다.

“씻으면서 페로몬을 좀 빼내서 그런지 이제 좀 괜찮아졌는데. 뭐 억제제 효과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네? 그럼 왜 같이 오자고…….”

“혹시나 해서 그랬죠.”

“나는 지금 해도 상관없어요.”

“물고 빠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요.”

“……네.”

“내가 하는 게 싫은 거지, 한서림 씨가 빨아준다고 하면 거절할 마음은 없고요.”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커다란 몸이 앞으로 다가와 스치듯이 가볍게 한서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25.

“아, 잠깐 상상했는데 바로 서네.”

어이없다는 듯한 중얼거림으로 손을 거둬낸 강해건은 이내 한서림의 옆에 털썩 앉았다. 힐끔 시선을 내리자 트레이닝 바지 너머로도 묵직하게 부푼 것이 그의 다리 사이에 존재했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헐렁한 바지에도 저렇게 티가 날 정도면 완전히 발기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 가늠되지 않았다.

‘입 쓸 줄 알아요?’

‘네?’

‘자지 빨 줄 아냐고.’

무례하고 모욕적으로 여겨졌던 첫 미팅에서의 대화가 상기되었다. 자기가 하는 건 싫어도 펠라티오를 받는 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입은 잘 못 쓰고 구멍을 잘 써요?’

불필요한 말까지 함께 떠올랐다는 게 문제지만.

“페로몬 좀 풀게요. 앞으로 사이클 때 함께 보내려면 익숙해지는 편이 한서림 씨한테도 편할 테니까.”

“네.”

허락과 동시에 알파의 진득한 페로몬이 살갗에 달라붙어 온몸을 어루만졌다. 마치 부드럽고 질척한 혀로 핥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착각하는데.”

“뭐, 를요?”

“그렇게 먹고 싶어요?”

한서림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위치를 파악한 강해건이 저속하게 지껄였다. 한서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몸을 움직였다. 말 잘 듣는 인형이 되어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자리를 옮긴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 번도 안 해본 짓을 하려니 주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잘할 수 있을까…….

몇 번인가 펠라티오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다. 뉴욕에서 사귀었던 알파들은 한서림이 진짜 페로몬을 풀면 구음을 마다할 정도로 본격적인 삽입을 하고 싶어서 안달했으니까. 솔직히 펠라티오를 하기 싫어서 그런 타이밍에 일부러 페로몬을 풀며 도발한 적도 있었다.

“생각보다 적극적이네요.”

“적극적인 건……, 취향이 아닌가 봐요?”

“그럴 리가. 빨아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그 작은 입에 반이나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강해건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스스로 바지를 살짝 내려 반쯤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속옷은 입지 않았던 모양이다. 단정한 손이 두어 번 성기를 훑자, 조금 더 크기를 키웠다. 지금도 부담스러운데 어디까지 커지려고 저러는지, 당황스러웠다.

“계속 그렇게 보기만 할 거예요?”

의도가 다분한 손길이 볼을 어루만졌다.

“먹고 싶다는 듯이 빤히 쳐다본 걸로도 모자라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다리 사이로 내려갔잖아요. 아니면…….”

수치심을 주려는 것처럼 저속함을 꼬집은 후 이어진 말은,

“먹여줘야 하는 건가.”

다소 고압적이었다. 나른한 음성이 귓가에 꽂힌 것과 동시에, 큼지막한 손아귀에 잡힌 목덜미가 음습한 곳으로 끌어당겨졌다.

그다지 강압적이지는 않았으나 샅에 파묻히는 순간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페로몬이 가장 많이 농축되어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반들반들한 선단이 입술 선을 덧그리며 지나갔다. 그러더니 장난치듯이 입술을 꾹꾹 눌러왔다.

“한 대표님. 벌려요.”

애정이 깃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다정한 목소리에 한서림은 손을 들어 기둥을 쥐고 입을 벌렸다. 뿌리 부근을 잡고 있던 큼지막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전과 달리 강해건의 페로몬에 취한 탓인지 거부감은 없었다. 제가 해본 적은 없어도 받았던 기억을 되살리면 어렵지 않을 듯했다. 크기는 좀 버거울지언정.

귀두만 입에 물고 빨다가 혀를 내어 느릿하지만 꼼꼼하게 기둥을 핥았다. 일단 흥건하게 적셔놔야 입에 넣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하아…….”

위에서 미세하게 거칠어진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리더니 손에 잡혀있는 성기가 크기를 키웠다. 별거 아닌 강해건의 반응에 뒤에서 오메가 액이 조금 흐르며 얕은 쾌감을 동반한 성적 긴장감이 고조됐다. 조용한 공간에는 질척이는 소리만 외설적으로 울렸다.

어느 정도 적셨다는 생각이 들어 한서림은 꼿꼿하게 선 것을 다시 귀두부터 입안으로 삼켰다. 욕심을 내며 조금 더 깊게 머금었으나 강해건이 말했던 것처럼 채 반도 담을 수가 없었다. 조금 빠르게 고개를 움직이면서 입술을 오므려 삽입을 하듯이 빨자 완전히 발기한 줄 알았던 성기가 더 부풀었다. 이번에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어설플까요?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래선 안 하느니만 못하잖아요. 혀도 써야죠.”

계속해서 크기를 키우고 있는 주제에 지적을 받으니 억울했다. 그러나 입이 커다란 기둥으로 막혀있는 탓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움직이며 이번에는 그의 말처럼 혀도 함께 움직였다. 성기가 입안에 빠듯하게 들어찰 정도로 또다시 커졌다.

이게 미쳤나. 어디까지 커지려고……. 대체 다리 사이에 뭘 달고 다니는 거야.

정제되지 않은 불만이 터져 나왔으나 입 밖으로 뱉어낼 처지가 아니었다. 혀에 닿는 울퉁불퉁한 핏줄이 낯설었고, 부드러웠던 입술은 부르틀 것 같았다. 강해건도 흥분했는지 귀두 끝에서 선액이 흘러나왔다. 비릿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입 안을 가득 채운 페로몬 향 때문인지 달콤하게 느껴졌다.

“실력을 보니까 그때 왜 대답 못 했는지 알겠네요. 입을 제대로 못 쓰면 구멍이라도 잘 써야 할 텐데 말이에요.”

야, 이 자식아. 닥쳐라, 좀.

강해건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제 욕구에도 충실한 한서림은 무릎 꿇은 다리를 슬쩍 벌렸다. 어느새 발기해버린 성기 때문에 불편한 탓이었다.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발바닥이 축축했다. 뒤에서 미약하게 흐르고 있는 오메가 액이 쌓여 가운을 적시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며칠 전 눈을 뜨자마자 강해건을 떠올리며 자위했던 생각이 나면서 얼굴에 열이 오르고 귓가가 뜨끈해졌다. 이 행위를 시작하기 전부터 강해건의 손이 목덜미와 귀, 볼 따위를 멋대로 만지고 있으니 홧홧하게 달아오른 열기가 전해질 터였다. 그 사실은 한서림의 흥분을 더욱 고양시켰다. 울컥, 오메가 액이 제법 쏟아져 나왔다.

“빨면서 뒤에 자위해 볼래요?”

“……?”

잘못 들은 것 같아서 시선을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채가 돌아 짙어진 회색 눈동자가 고혹적이었다. 강해건은 변태처럼 성기로 볼 안쪽의 연한 살을 꾹꾹 누르며 사탕을 문 것처럼 볼록 튀어나온 뺨을 만지고 있었다. 무기라 해도 부족함 없는 흉포한 성기가 한쪽으로 치우친 탓에 상대적으로 벌어져서 공간이 생긴 반대쪽 입술 틈으로 타액이 흘렀다.

“내가 시키는 건 다 하겠다면서요. 왜, 그건 못 하겠어요?”

이 변태 새끼가 진짜…….

물론 불과 며칠 전에도 했던 짓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오메가니까 성기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타인이 보고 있는 상황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는 말에 이런 것도 포함인 줄은 몰랐다. 욕이 올라와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한서림은 제 볼 안쪽에 성기를 비비며 장난을 치는 행태를 그냥 둔 채, 단단하게 여몄던 가운의 끈을 풀어냈다. 팔을 빼내는 사이 입안을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 야하게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 선을 덧그리듯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한서림이 가운을 벗길 기다리고 있었다. 윗입술을 문지를 때는 코에 조금 더 가까워져서인지 달큼한 페로몬이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았다.

완전하게 가운을 벗어낸 후 다시 그의 성기를 입에 물고 손을 뒤로 가져갔다. 이미 짐작하긴 했지만 엉덩이 사이는 벌써 많이 젖어 있었다. 제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지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째서 더 흥분이 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입구를 덧그리다가 손가락을 하나 집어넣었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 강해건의 발이 한서림의 성기를 은근하게 문질렀다.

“으음……, 내 거 빨면서 세웠나 봐요. 그럼 뒤도 젖었을 텐데.”

셀 수 없이 많은 오메가, 특히 남성형 오메가만 만나봤으니 강해건은 오메가의 몸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뒤가 먼저 젖고 발기한다는 것은 중, 고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내숭 떠는 걸 싫어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은 탓에 아닌 척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서림은 긍정의 의미로 성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하나로 장난 그만하고 더 넣어요.”

“……우웁!”

흐물흐물해진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더 넣을 때였다. 강해건이 허리를 쳐올렸고, 귀두만 들어와 있던 성기가 갑자기 확 입안으로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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