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자기애가 넘치나 봐요. 왜 내가 한 대표님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즈니스에서 감정이 무슨 의미가 있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절대 정혼 따위 할 생각 없다고요.”
-그건 한서림 씨 사정이고. 그쪽 집안에서 정리해서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하면 깔끔하겠네요.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을게요.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목소리만으로는 강해건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밖에 없다. 애초에 한서림은 빙빙 돌리는 것을 잘하지도 못했다.
“그럼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나랑 손잡는 거 어때요?”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손을 잡자는 거죠?
“당연히 내 의사 무시하고 어른들끼리 결정한 정혼이죠. 당사자들이 안 하겠다는데 별수 있겠어요? 강해건 씨도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한 대표님. 아니, 한서림 씨.
한서림의 말을 끊은 강해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안 그래도 저음인데 깊은 울림이 느껴지자 알 수 없는 고압감이 느껴졌다.
-내 의사는 분명히 밝힌 것 같은데. 그쪽 집안에서 정리해서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하면 깔끔하겠다고.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겠다고요. 이 결혼을 깨고 싶으면 혼자 책임져요.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하지 말고.
강해건의 차갑고도 냉정한 반응에 기어코 참고 있던 짜증이 입 밖으로 치밀었다.
“이봐요, 강해건 씨. 결혼이 장난입니까? 이런 식으로 인생 망치는 거 억울하지도 않아요? 아니면 이 결혼했을 때 강해건 씨한테 뭐 대단한 거라도 떨어지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 인생까지 말아먹는 게 미안하지도 않아요?”
-……이상한 말을 당연한 일처럼 말하는 신박한 재주가 있네요. 한서림 씨 인생 말아먹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 아버지 아닌가? 그걸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나라고 이 결혼 좋아서 하는 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손을 잡고 이 결혼을 깨자는 거 아닙니까! 아, 진짜 답답해서 돌아버리겠네.”
-같은 말 반복인 것 같으니 먼저 끊죠. 어차피 내 의사는 다 전달했고, 한서림 씨는 나랑 절대적으로 결혼하기 싫은 것 같으니까.
“아니, 잠깐……!”
한서림이 뭐라고 다시 설득할 새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서림은 몇 분간 벙벙한 표정으로 휴대폰만 바라보다가 이내 욕설을 뱉어내며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강해건도 절대 원하지 않는 결혼인 것 같은데 어째서 파혼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나오는 것인지, 도무지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16.
* * *
한서림과의 전화를 끊은 강해건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뱉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모르게 진행한 한휘 건설의 한 회장이 황당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첫 미팅 당시 한서림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테니 제 행동이 당황스러웠겠지.
강 회장도 참으로 양심 없고 고약한 인간이지만, 한 회장도 비슷한 성정인 모양이었다. 강해건은 턱을 두어 번 쓸며 강 회장과 만났을 당시의 일을 상기했다.
강해건이 본가에 불려갔던 건 한서림과의 광고 미팅 일주일 전이었다.
본가에 도착했을 때 강 회장은 연회장처럼 넓은 거실에서 스크린 골프를 즐기는 중이었다. 힐끔 시선을 주더니 기다리라는 식으로 소파를 턱짓했다. 강 회장이 원하는 대로 기다릴까 했으나, 뻔히 짐작되는 용건에 강해건은 마음이 곱게 써지지를 않았다. 대화가 줄어들수록 부자지간의 골은 깊어지기만 했다.
“한 시간 후에 스케줄 있습니다. 갑자기 부르신 거라 이동 시간 고려하면 넉넉지 않은 시간이고요.”
거짓말은 쉽게 나왔다. 밖에서 낳은 강해건을 품어준 것은 강 회장이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모친 윤성아였다. 서정 그룹 계열사의 유빛 갤러리를 가지고 있던 윤성아 대표는 강 회장의 잦은 외도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나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살다가, 난소암으로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안 그래도 강해건은 강 회장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윤성아의 장례를 치른 이후 강 회장에 대한 반감이 더욱 깊어졌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강 회장은 혀를 차면서도 골프채를 수행비서에게 건네고 소파 상석에 앉았다. 그제야 강해건도 코트를 벗고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소파에 앉았다.
“왜 부르셨습니까.”
“어떻게 하루도 기사가 안 뜨는 날이 없어. 한창 때이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만, 적당히라는 걸 알아야지.”
강해건이 톱스타 반열에 오른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다른 오메가와 호텔에 드나드는 탓에 강해건의 스캔들과 염문설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일 날이 없었다. 더구나 하룻밤 이상 이어진 인연이 없는 데다가, 직업을 불문하고 늘 남성형 오메가만을 고집하는 탓에 강해건의 취향에 대한 흉흉한 소문까지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강 회장은 한 번도 강해건의 스캔들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었다. 의외의 말을 듣게 되자 강해건은 다소 황당함을 느꼈다. 강유건은 초반에 주의를 좀 주긴 했으나, 사정을 설명한 이후로는 더는 강해건의 스캔들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넉 달 전에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오메가와 염문설에 휩싸였던 강 회장이 ‘적당히’라는 말을 하니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다 못해 우습기까지 했다.
“그 말씀 하려고 부르셨습니까.”
“그건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
“…….”
“언제까지 얼굴 팔고 다니려고. 이제 슬슬 회사로 들어와야지.”
이게 본론이었다.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강해건은 흘러나오는 조소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제가 양심이라는 게 있는 새끼면, 유건이 형 자리는 탐내면 안 되죠.”
스무 살이 되어서 서자라는 것을 알게 된 강해건과 다르게, 강유건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강해건을 친동생처럼 챙겨주었다. 강해건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마음의 빚을 진 것처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강유건이 서정 그룹에 얼마나 큰 야망과 포부를 품고 있는지 알기에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애정을 베풀어주는 마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가 유건이 자리라고 누가 그러든. 아무렴 내가 내 회사를 오메가 자식에게 줄까. 극우성 알파 자식 보려고 밖에서까지 애를 낳아온 내 노고를 헛되게 할 생각이냐.”
원래도 뻔뻔한 건 알았지만, 뻔뻔해도 너무 뻔뻔한 강 회장의 발언에 강해건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모친인 윤성아가 세상에 없다는 것은 슬프지만, 이런 꼴을 안 봐도 된다는 게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여러 번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형한테 위협이 될 생각이 없다고요. 개새끼도 자기 주인은 알아본다는데, 사람 새끼로 태어나서 지금껏 아껴준 형 등에 칼 꽂는 좆같은 짓을 어떻게 합니까.”
“위신 떨어지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얼굴 팔아먹고 살더니 천박한 것만 배워가지고는.”
강 회장이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강해건을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는 혀를 찼다.
강해건은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강유건이 있다면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며 거짓 웃음이라도 보이겠지만, 부친과 둘이 있을 때는 거북한 낯을 숨기지 않았다. 극우성이라는 형질을 이용해 더 강력한 페로몬으로 발현하게 하려고 강 회장이 강해건에게 열 살 때부터 주기적으로 약을 먹인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한 욕심은 참사를 부른다고,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스무 살이 되도록 발현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영양제라고 늘 먹어야 했던 약의 실체는 어머니인 윤성아가 밝혀서 강해건도 알게 되었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강 회장과 윤성아가 다투는 소리를 들은 것이 문제였다.
윤성아는 어떻게 애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강 회장은 별일도 아닌데 소란스럽게 굴지 말라며 윽박을 질렀다. 그때가 강해건이 발현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고, 늘 조용조용하고 인자했던 모친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터라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강 회장은 저를 서정 그룹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고, 도리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윤성아가 저를 아들로 생각해 주었다는 것.
강해건은 혹시라도 모친이 속상해할까 봐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날 이후로 더 세심하고 다정하게 챙겨주는 윤성아로 인해 울컥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유건은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강해건이 강 회장에게 날을 세우면 속상해하곤 했지만, 굳이 이야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강유건이 부친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은 환영할 일인 반면, 아버지라고 믿고 존경하는 이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는 강유건에게서 아무것도 뺏을 수 없었다.
“네 어미도 네가 그룹을 잇는 걸 보고 싶다고 늘 얘기했었던 건 벌써 잊은 거냐? 친어미가 아니라서 네 어미가 한 말은 말 같지도 않다는 거야?”
무슨 이런 좆같은 소리가 다 있는지. 아무리 자기 식대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태반인 세상이지만, 이 정도면 정신병을 의심하고 싶었다. 애초에 어린아이에게 그런 약을 10년이나 먹였다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겠지만.
“괜히 어머니 핑계 대지 마시죠. 하늘에서도 분통을 터트리실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어머니를 한 번도 친어머니가 아닐 거라고 의심조차 해본 적 없습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저를 잘 키워주셨고요. 극우성 오메가였다는 친모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제게 어머니는 한 분뿐이니까요. 팔자 고치려고 돈 받고 애 낳자마자 떠난 사람이 어머니입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형에게 위협이 될 생각도 없고, 제 인생을 한낱 회사 따위에 걸 생각도 없습니다. 회사는 목숨보다 아끼는 아버지가 잘 지키세요.”
“이런 배은망덕한……!”
강해건의 강한 언사에, 소파 팔걸이를 꽉 쥐며 부들부들 떠는 강 회장의 꼴이 볼 만했다. 어릴 때는 그토록 대단하고 무섭고 거대하게만 보였던 아버지였는데, 이렇게 보니 왜 그리 무서워했나 싶을 정도로 가소로웠다. 여전히 자식들의 인생을 쥐고 흔들려는 행태도 못마땅했고 말이다.
문득 그날 발정기의 오메가와 부딪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약의 부작용이 심했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까지 발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때 발현해서 다행이지, 가족들 몰래 약을 들고 찾아가서 만났던 집안 주치의 정 박사는, 약물 복용을 더했더라면 분출되지 못한 페로몬으로 인해 발현은 고사하고 아예 몸이 망가져서 평생 고생하며 살았을 거라고 했다. 최악의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 회장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워졌다.
“용건 끝나셨으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강해건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제 소임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상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코트를 챙겨서 등을 돌렸다. 강유건에게는 미안하지만, 억지 연기로 화기애애한 가족을 연출하는 것이 구역질나서 이번 설에는 스케줄을 핑계로 해외에 가든지 해서 강 회장의 얼굴을 안 봐야겠다는 결심에 미쳤을 때였다.
“그럼 선택하거라.”
깊게 가라앉은 무거운 강 회장의 음성에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야욕으로 얼룩진 탁한 눈동자가 정확히 강해건을 직시해왔다. 순간적으로 뱀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이 번졌다.
“서른 전에 회사로 들어오든지, 회사에 도움이 되도록 정혼을 하든지. 네가 선택하거라. 뭐가 더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구나.”
“하아……. 제발 적당히 좀 하세요. 저도 제 인생이 있습니다.”
강해건은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양자택일을 하라며 제안한 내용은 두 가지 다 거지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이고 독선적일 수가 있는지.
“이 집안에서 태어나 누릴 만큼 누렸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도 치러야지. 배우 생활도 서정의 이름을 이용해서 시작했으면서 내놓는 건 없이 전부 쥐기만 하려고?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
“그래, 네가 정 싫다면 유건이를 보내면 되겠구나. 네가 아무리 극우성이라도 오메가만큼 팔리지는 않을 테니.”
강 회장이 오메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뱉는 순간 강해건은 토기가 치밀었다. 친자식을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17.
강 회장은 강해건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강유건은 강 회장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비혼주의자를 선언한 지 오래였다. 연애는 쉬지 않고 하는 강유건이 왜 비혼주의를 선언한 지에 대해서는 강해건만이 알고 있었다. 어쨌든 강 회장이 대가 끊어질까 봐 불안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강해건이 극우성 형질이기에 더욱 2세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강 회장의 사정이었다. 강해건은 그 상황을 조금도 배려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데 여기서 거절하면 강유건을 얼마나 괴롭힐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냥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해건 때문에 강유건이 희생하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짤 것이다. 그러면 착한 강유건은 비혼주의자를 선언한 것이 무색하게, 강해건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대신 정혼할 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유독 강해건을 예뻐했던 강유건은, 강해건을 위해 대부분을 자발적으로 양보하며 배려해준 형이었다. 그 부분을 이용해서 강 회장은 강해건을 움직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겨운데도 강유건을 또 희생하게 할 수 없었다. 특히나 강해건은 저 때문에 6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졌던 강유건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제가 정혼하면……, 형한테는 강제로 결혼하라고 하지 마세요.”
“지가 아무리 비혼 뭐 어쩌고 떠들어봐야 오메가가 알파 없이 어찌 산다고.”
혀를 차는 강 회장이 추악하게 느껴졌다.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오메가가 알파 없이 살 수 없다는 마인드를 어떻게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인지. 옛날이야 알파만 존중받는 더러운 세상이었다지만, 지금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알파보다 오메가의 위상이 더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고난 형질만 믿고 노력하지 않았던 알파들은 놀라운 집념으로 노력한 오메가에게 금세 따라잡혔다. 현재 사회 지도자층의 형질 비율도 알파와 오메가가 비슷한 실정이고 말이다.
사회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관심도 없이 옛 사고방식에 안주해있는 강 회장의 발언이 너무 구시대적이라 작정하고 반박할까 했지만, 어차피 알아들을 사람도 아니기에 입만 아플 것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대화가 될 것이다. 그래서 강해건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제 이득을 하나라도 더 챙기는 쪽을 택했다.
“다시는 저한테 회사로 들어오라고도 하지 마세요. 제 배우 인생에도 간섭하지 마시고요.”
“…….”
“대답, 안 해주시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러마.”
마지못한 강 회장의 대답에 강해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강 회장에게 당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미숙하고 어려서 당했던 지난날과 달리, 여러 번의 경험과 시행착오로 강해건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어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제가 구두 약속은 못 믿어서요. 한두 번 뒤통수를 맞았어야 말이죠. 고 변호사님 부르세요. 이 자리에서 계약서 쓰고 공증까지 받게.”
강해건은 비집어 나오는 비아냥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뭐라고 더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던 강 회장은 이내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곁에 서 있던 수행비서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한휘 건설 외아들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계열사이니 그룹에 큰 도움이 될 게다.”
상대가 누군지는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서정 그룹이나 한휘 건설이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식들을 희생시키는 똑같은 작자들일 뿐이다. 가끔은 부모가 강압적으로 정혼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위해 정혼하는 당사자도 있으니, 어쩌면 한휘 건설의 외아들이라는 놈도 그런 썩은 생각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고.
정략결혼은 비즈니스의 일환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해건은 아직 저를 발현시킨 오메가를 찾지 못한 상태라 가슴이 답답했다. 그 페로몬 향에 취해서 뇌가 녹을 것 같은 달콤함에 취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런 더러운 기분은 흔적도 없이 금세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결혼 유지 기간은 최대한 짧게 하겠습니다.”
“아이 하나만 낳으면 언제든 이혼해도 좋다. 별거를 하더라도 애 낳은 후에 법적으로는 결혼생활을 1년 정도 더 유지하는 게 잡음이 덜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 변호사가 도착했고, 각자의 입장과 이기심을 채워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을 어길 시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생각 이상으로 강력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강해건은 최대한 빨리 아이를 낳고 이혼한 후에,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으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를 발현시킨 오메가를 찾아내리라고 다짐했다.
* * *
결코 강해건과의 정혼으로 한휘 그룹에 도움이 되지 않겠다고 했던 한서림의 다짐은 채 하루도 되지 못해서 무너졌다. 아니,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강유건에게 강해건을 설득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결혼 축하 인사부터 전한 강유건에게 부탁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화제가 전환되었다. 매번 강유건이 대화를 이끌어갔던 습관으로 인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한서림은 말을 자를 타이밍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옛날에 서로 고민 얘기하고 그랬었잖아. 나는 알파들 완전 싫어하고, 너는 알파 페로몬 싫어하고.
“그랬었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같이 알파 욕 해주는 친구가 너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기억하지. 그런데 있잖아, 해건이가…….
강유건이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한서림이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자, 이어서 걱정의 기색을 비치며 염려를 드러냈다.
-사실 결혼 후에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이미 만나고 있다고 하니까 걱정돼서. 너도 미리 알고 있어야 다치기 전에 대비할 수 있을 거고…….
“다쳐? 뭐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음, 그게…….
“유건아, 편하게 말해.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눈치 보면서 얘기했다고.”
어쩌면 듣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강유건의 입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대외비라고 전해진 말에 한서림은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강해건이 간헐적으로 폭발하듯 터지는 페로몬 폭주 때문에 통제력을 잃고 가끔씩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강유건의 생일파티 날 밤에 누군가와 섹스한 이후부터.
“아……. 나 그거 뉴스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아주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는 희귀한 증상이었다. 페로몬 폭주는 본인의 몸이 고통스러운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형질의 알파는 상대적으로 버텨낼 수 있는데, 형질이 반대인 오메가는 뇌손상이나 자궁구의 파열, 혹은 페로몬 샘이 망가지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6개월 동안 병원 신세 진 적 있거든. 그때 해건이가 내 손 잡고 울면서 그러더라. 혹시 자기가 완치가 안 됐는데 누군가와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사람한테 꼭 얘기해달라고.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숨기지 말고 다 얘기해주라고. 자기 입으로는 그런 끔찍한 말을 죽어도 못 할 것 같다고.
“너는.”
-어? 나 뭐?
“6개월이나 병원 신세 졌다며. 괜찮아진 거야? 치료는 제대로 됐어?”
-이래 봬도 내가 대단한 기업 아들이잖냐. 내로라하는 전문 의료진 쫙 달라붙어서 완치됐지.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어.
놀란 마음에 강유건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마지막에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저도 모르게 캐치했다. 완치가 됐고 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다면서 무언가 감정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혹시 강해건을 원망하는 건가 싶었지만, 원망과는 조금 다른 슬프고 씁쓸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결론은 정혼을 하게 되면 한서림 역시 그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인데, 어차피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제 몸을 바꿔버린 강해건의 페로몬에는 그래도 반응을 하기 때문에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실 나도 잊고 지내다가 너희가 결혼한다니까 생각나더라. 그동안은 해건이가 한 번 이상 만난 사람이 없었거든. 솔직히 너한테 말 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 파혼의 사유가 될 수도 있으니까.
충분히 파혼의 사유가 될 수 있었다. 이걸 빌미로 한서림은 당당하게 정혼을 물릴 수 있었다. 만약 강해건의 고통이 저로 인한 게 아니었더라면 부친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그의 상처를 이용해서라도 정혼을 깼을 것이다.
-그런데 서림아. 최악의 경우 네가 다치는 것도 걱정이 되지만, 나는 해건이가 또 그렇게 무너지는 꼴은 못 보겠더라.
강유건의 진심 어린 고백이 정통으로 날아와 심장을 욱신거리게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두려움과 공포의 세월이었고, 뉴욕에서는 무난하고 평탄하며 몹시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일들이 한 번에 들이닥치는 것일까.
“너 정말 완치된 거 맞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그럼. 운이 좋았어. 의사들이 완치된 게 기적이라고 하더라.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괜찮으니까 해건이가 죄책감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는데, 몇 개월 전에도 페로몬 폭주가 있었거든. 그래도 전조증상을 빨리 알아채서 주치의 선생님 바로 불렀다더라고.
“주치의 선생님이 오시면 괜찮은 거야? 뉴스에서는 약도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보통 특수 억제제를 먹는다고는 하는데 그게 또 듣는 사람이 있고 안 듣는 사람이 있나 봐. 해건이는 후자고. 그래서 수면제를 다량 투약해서 폭주가 지나갈 때까지 강제로 재우는 거지. 격리시켜 놓으면 자는 동안 페로몬이 제멋대로 폭주해도 다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힘들지만 그걸 겪어야 하는 당사자는 오죽하겠어.
욱신대던 심장이 누군가 꽉 쥐어짜는 것처럼 조여졌다.
18.
“그런데 유건아, 정말 그때 그 오메가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된 게 맞아? 확실해?”
문란의 아이콘 강해건이 저랑만 섹스한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그날로 단정 짓는 것인지 의아했다. 한서림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강유건은 한서림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응. 나는 잘 모르겠지만 해건이는 확신하더라고. 정 박사님 소견도 그렇고 혹시 몰라서 미국 학회에까지 내용이 갔는데 비정상적인 페로몬과의 충돌로 생긴 일은 확실하대.
고의성이 없다 할지라도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강해건이 컨트롤 할 수 없는 페로몬 발작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자괴감을 느낀다는 말에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생긴 일이 확실하다고 해서.
부정할 수 없는 게, 비정기적인 발정기에 통제할 수 없이 새는 페로몬은 한서림의 주치의도 비정상적인 페로몬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증거도 명확했다. 또한 강해건이 본인 입으로 강유건의 생일 파티 이후에 이틀 정도 앓아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때 생긴 부작용일 때문이었을 테다. 아마 강해건은 그로 인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해건이가 그 오메가를 찾으려고 그렇게 스캔들을 일으키는 거라고 하니까 뭐라고 못 하겠더라고. 뭐, 내 선에서 막아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랬구나…….”
강해건이 그런 고통을 안고 사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에게 그런 격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아무리 극우성 알파라고 해도 강해건 역시 미세한 반응이나 변화가 있었을 텐데. 그래서 한서림은 차마 그날의 오메가가 저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