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42)

“당연히 해야죠. 그건 정해져 있는 일이잖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내숭 떨 필요 없어요. 어쨌든 오늘 식사한 후에 계약하려고 매니저한테 한 대표님 회사로 오라고 일러뒀습니다.”

왜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숭은 또 무슨 말이고. 저는 강해건으로 밀어붙여야 할지 다른 모델로 진행해야 할지 오전 내내 머리 터지게 고민했는데. 혹시 강해건은 이 광고를 처음부터 깔 생각이 없었던 건가. 계약이 성사된다는 기쁨으로 인해 고민은 금세 날아가 버렸다.

13.

강해건이 테이블에서 계산을 하고, 사장은 약속한 대로 몇 가지 요리를 포장해서 한서림에게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직원들과 함께 나눠 먹어도 충분할 듯했다. 한서림은 고마운 마음에 출시되는 신향수 중 몇 종류를 레스토랑으로 보내서 화답하겠다고 했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강해건은 매니저에게 연락해 지금 출발하라고 했다. 한서림 역시 강해건과 매니저가 갈 거니까 계약 준비를 해 놓고 광고 회사에 연락하라고 김 팀장에게 지시했다. 모든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 긍정적인 효과가 론칭 후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길 바랐다.

차 안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강해건의 페로몬이 더 적나라하게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미약하고 은은하게 개방했을 뿐인데도 유독 강해건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몸은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8년 전 비정기적 발정기가 갑자기 왔을 때는 이런 감상을 느낄 여유가 없었기에, 타인의 페로몬으로 이런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파의 페로몬에 설렘을 느끼는 일이 처음일 테다.

“그러고 보니, 8년 전에 강 전무 생일 파티에 왔었다면서요?”

강해건의 감미로운 페로몬에 취해서 안면근육이 풀어지고 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열심히 내리고 있는데, 조용했던 강해건이 기습질문을 했다. 한서림은 언제 설��냐는 듯 당황으로 바짝 긴장하며 반사적으로 강해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건이…… 생일 파티요?”

“네. 아니에요?”

“아, 네, 네. 갔었죠. 그건 왜요?”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긴장한 탓인지 조금 버벅거렸다.

“혹시 그때 언제까지 있다가 갔어요? 정확한 시간이 아니어도 돼요. 대략이라도. 게스트룸에서 자고 다음 날 해장하고 간 사람들도 있다던데, 그중에 있었어요?”

“아뇨.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일찍 갔습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입이 제멋대로 먼저 움직였다. 물어보는 의도를 알 수는 없으나, 그날의 섹스 때문인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8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왜?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예민하지도 않은 감이 묻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서림은 열 번 중에 한 번 맞을까 말까 한 감을 무시했다.

“그런데 자고 간 사람들 일어나서 해장할 때 같이 식사하지 않았어요? 아, 게스트들은 따로 식사를 했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네요. 나도 그때 몸이 안 좋아서 이틀 정도 앓아누워 있었거든요.”

“아…….”

정사의 순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눈을 떴을 때 몸의 상태로 보건대 격렬한 밤을 보낸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아서 이틀이나 앓아누웠다는 것은 섹스의 여파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강해건은 극우성 알파라고 들었는데, 아무리 섹스를 과하게 했다고 해서 앓아누울 수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혹여 섹스 이후 어떤 다른 문제가 생겼던 걸까, 걱정하는 한서림의 질문이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8년이나 지난 일은 갑자기 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한기가 스쳤다. 강해건의 눈빛도 페로몬도 심상치 않았다.

눈치가 없더라도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추론해보면 강해건이 찾는 사람이 저인 듯했다. 그런데 집요한 집착이 드러난 눈동자를 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한 달 내내 불안에 떨 때는 연락 한번 없었는데, 이제 와서 찾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서정 그룹의 저택을 나서며 목을 조르는 것 같았던 느낌이 떠올랐다.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서도 강해건이 제 정체를 알고 떠보는 건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확신을 갖고 싶었다.

“CCTV가 꽤 많이 설치되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걸 확인해 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전부 폐기시키셨더라고요.”

강해건의 페로몬에서 미약한 분노와 짜증이 느껴졌다. 기록이 없다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심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그 사이 퍼퓸SR 사무실에 도착했고, 두 남자는 차에서 내렸다.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한서림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그 사람은 왜 찾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뇨.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어쨌든 한 대표님은 당일 밤에 갔다는 거죠?”

“……네.”

“그럼 됐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인해 궁금한 것은 많았으나, 차갑게 자르는 말에 더는 질문할 수가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고, 곧 강해건의 매니저가 도착해서 계약을 진행했다. 원하던 대로 계약서에 날인하고 구체적인 촬영 스케줄까지 한번에 정리가 되었는데, 어째서 이토록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하아, 흣…….”

한서림은 침대에 누운 채로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신음을 뱉어냈다. 강해건의 페로몬에 취한 이후, 이틀 내내 욕구불만에 시달리다가 주말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참지 못하고 속옷 안으로 손을 넣은 것이다.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은 심리 치료를 받고 일에 매달리면서도 몇 번인가 연애를 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연애가 1년이 넘은 탓에 많이 쌓였을 테다.

그런데 강해건의 페로몬에 설렘을 느낀 순간부터 지금껏 쌓아둔 욕구가 한 번에 흘러넘치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그 옛날에 강해건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은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어제와 그제는 엄동설한에도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죽였고, 오늘도 출근을 했더라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기를 훑는 손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남성형이라고 해도 오메가인 탓에 뒤로 더 느끼는지라 성기만 흔들어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미 뒤에서는 오메가 액이 흐르고 있었다. 한서림은 성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젖어있는 뒤를 매만졌다. 은밀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입구를 덧그리듯이 만지작대다가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아……, 으응…….”

중지로 안을 휘저어도 타는 듯한 갈증은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자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깊어서 제 손가락으로는 만져지지 않았다. 조금 더 크고 두껍고 긴 무언가로 안을 꽉 채우는 압박감을 느끼고 싶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때처럼.

몸을 웅크리면서 손가락 두 개를 한번에 더 넣었다. 손가락 세 개를 집어삼킨 입구는 빠듯하게 벌어졌는데, 어째서 만족감은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방 안에는 한서림의 의도적으로 개방한 페로몬 향이 빼곡하게 차 있었지만, 후각에서 느껴지는 것은 저를 설레게 했던 강해건의 유혹적인 페로몬 향이었다.

환향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밀하게 살갗을 애무하는 그의 페로몬이 몸을 더 달아오르게 했다. 절정을 맞고 싶은 노골적인 욕구가 넘실거려도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는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적나라한 그의 페로몬에 취하고 싶었다. 성기를 강하게 압박하며 빠르기를 더하고,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의 속도도 높였다.

“하, 조금, 만 더…….”

그리고 저를 취하게 했던 강해건의 야릇하면서도 퇴폐적인 미소를 떠올리는 순간, 성기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탓에 절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손을 흥건하게 적신 정액을 보자 허탈함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정액과 오메가 액으로 범벅된 손을 씻는 사이에도 몇 번이나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뻔했기에 마음이 급하지는 않았다. 한서림은 페로몬을 거둬들이고 창문을 활짝 연 후, 과하다 싶게 방 안에 페로몬 향수를 뿌린 후에야 인터폰을 확인했다. 역시나 모주원이었다.

1층 공동현관을 열어주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니 무언가에 화가 난 듯한 모주원의 얼굴이 보였다. 당장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한 표정이었다. 온도가 낮아진 진한 페로몬이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주원 역시 알파이기 때문에 페로몬 향수를 과하게 뿌렸다 할지라도, 혹시나 남아 있는 발정 페로몬 잔향에 반응을 보일까 봐 샤워가 더 급했다.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편하게 있어, 나 샤워만 좀 하고 올게.”

“얘기부터 하자.”

모주원이 손목을 잡아챘다. 언제나 배려가 생활인 녀석이었는데, 특히나 한서림에게는 유난스럽게 굴었던지라, 안 하던 행동을 하자 어리둥절했다.

“주원아, 나 지금 일어났어. 금방 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잡혔던 손목을 빼내자, 모주원은 짜증나는 표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 걱정돼서 모주원이 원하는 대로 그냥 얘기부터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발정 페로몬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들을 심심치 않게 접했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구원받았으나, 어쨌든 8년 전 그날도 발정 페로몬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던가. 한서림은 모주원을 거실에 두고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14.

최대한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편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대충 걸쳐 입었다. 습관처럼 페로몬 향수를 뿌리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모주원은 허리를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댄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네가 있는 거 아니고?”

모주원의 곁에 앉으며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차가운 되물음이었다. 모주원이 이렇게까지 까칠하게 굴었던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나? 나는 아무 일도 없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서림은 볼을 긁적였다. 모주원과 눈이 마주쳤고, 아픈 눈동자가 다가와 박혔다.

“나한테는, 그래도 나한테는 먼저 말해줄 수 있었던 거 아니냐.”

“뭔 소리야. 뭘 먼저 말해줘? 알아듣게 얘기해야 나도 얘기를 하든 말든 하지.”

“……결혼한다며.”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절망적인 목소리를 내는 모주원이 낯설었다.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결혼을 하는데?”

“하……. 모르는 척 안 해도 돼. 이미 기사까지 다 떴으니까. 서림아, 나한테는 언제 말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뭘. 나 지금 벽 보고 얘기하는 기분……. 아, 잠깐. 잠깐만. 너 설마 지금 내가 결혼을 한다는 거야?”

표정을 보니 정말 그런 모양인가보다.

“진짜로? 내가 결혼을 한다고? 누구랑?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기사는 또 왜 떴는데? 이게 뭔 개소리야…….”

모주원은 심각한데 한서림은 황당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와서 이러는 건지, 자다가 봉변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 사이, 모주원이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에 떠 있는 기사를 클릭해서 읽어주었다.

“……하여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광고 촬영을 위한 첫 미팅에서부터 첫눈에 반해서 서로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으나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입장이라 조심스러운 탓에 섣부른 기사나 추측은 자제해달라고…….”

“미친 거 아냐? 뭐? 첫 미팅에서부터 첫눈에 반해서 서로에게 호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미친.”

정말 그랬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을 것이다. 이 기사를 강해건이 보고 얼마나 황당해하고 어이없어할지 눈에 선했다. 자신도 이런데 그는 오죽할까.

“그리고 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 관계자가 누군지 얼굴 좀 보고 싶다.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를 하든가 해야지. 와, 기가 막혀서.”

강해건은 스캔들이 하도 많았으니까 신경도 쓰지 않으려나. 그런데 지금까지처럼 하룻밤 스캔들이 아닌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이라고 기사가 난 것이 이상했다.

“그럼……, 아니라는 거야?”

“장난하냐? 아니, 그리고 너는 나한테 확인도 안 하고 지금 기사만 믿고 달려와서 이런다고? 내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친구였냐? 막말로 진짜로 내가 결혼하면 너한테 먼저 말하지, 이런 기사로 알게 하겠냐고. 나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니다.”

한서림이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모주원 역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솔직히 하루가 멀다 하고 스캔들 나던 강해건이 요즘 잠잠했는데, 너랑 둘이 데이트하는 사진이 떴어. 옷을 보면 한 번 만난 것도 아니야. 심지어 문란의 아이콘인 강해건이 호텔도 아니고 대낮에 정상적인 데이트를 했다고. 강해건이 너네 회사 앞까지 찾아가서 너를 픽업하는 사진도 있었고. 강해건 스캔들에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는 줄 알아? 찍힌 사진은 죄다 호텔이었어. 다들 강해건이 달라졌다면서 네 신상 털고 있는데 어떻게 안 믿어. 더구나 아저씨도 그렇다고 하시는데.”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와는 행보가 다른 기사에 모주원이 오해한 것은 억지로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지막 말이 한서림을 옭아매서 입안을 마르게 했다.

“잠깐만. 나 정리 좀 하자.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렇다고 했다는 게 무슨 말이야?”

“기사 보자마자 너한테 전화했는데 폰이 꺼져있어서 아저씨한테 먼저 전화 드렸어. 그랬더니 너 서정그룹 강해건이랑 정혼한다고 하시더라. 그 말 듣고 바로 달려온 거야.”

“…….”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너무 기가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도 일부러 안 받는 줄 알았어.”

“내가 네 전화를 왜 일부러 안 받아. 그럴 이유가 없잖아. 배터리 나갔나 봐. 어제 야근하고 새벽에 들어왔는데 피곤해서 바로 뻗었어.”

얼떨떨한 정신으로 말을 하면서야 어제 집에 온 후 휴대폰을 충전하지 않은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에 다시 확인사살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내가 정혼한다고 하셨다는 거지? 그 서정 그룹의 서자 톱스타 강해건이랑?”

“어.”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주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무언가 발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 강해건 소속사에서 공식 입장문 발표했는데 열애설 인정했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고 아직까지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라고. 너는 정말 모르는 일 맞아?”

“와, 진짜 돌겠다. 이게 무슨……. 모주원, 넌 내 반응 보면서도 날 의심하고 싶냐? 아니, 강해건은 무슨 생각이래? 그걸 왜 인정해? 뭐? 결혼을 전제로……. 와……. 말도 안 나오네. 이 사람들이 단체로 미쳤나. 아버지한테 전화 좀 걸어줘. 확인해 봐야겠어.”

한서림이 팔까지 걷어붙이며 흥분하자, 그제야 모주원의 표정도 조금 달라졌다. 저한테 확인도 하기 전에 기사를 믿었다는 게 서운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주원이 한 회장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건 후, 휴대폰을 한서림에게로 넘겼다. 한서림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귀에 댔다. 곧 독선적이면서도 강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서림은 부친과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한 회장은 사업적인 이득만을 이야기하며 절대로 정혼을 깰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고 시키는 대로 하라면서 윽박질렀다. 한서림도 지지 않으며 왜 그런 일을 멋대로 정하느냐고 대들었으나 감정의 골만 악화되었다.

한서림이 말하고 있는 도중 한 회장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저도 감정이 있고 생각을 할 줄 알며 선택권이 있는 사람인데, 한 회장은 늘 무시했다. 빛을 잃은 휴대폰 액정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한서림은 강해건과의 정혼이 사실이라는 것만 확인한 꼴이 되었다.

“하, 씨발…….”

“너한테 말도 없이 아저씨 혼자 결정하신 일이야?”

“……싸우는 거 다 들었잖아.”

힘이 쭉 빠져버렸다. 상대가 강해건이라는 건 둘째 치고, 부친의 사업적 희생양이 되는 것이 못 견디게 혐오스러웠다. 저 혼자만의 사업을 시작한 것도 부친에게서 벗어나 한휘 건설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당할 위기에 처한 현실이 끔찍했다.

한서림은 몸에 힘을 쭉 빼고 소파에 기대듯이 누웠다. 그제야 모주원이 다소 풀어진 기색으로 한서림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까 화를 내듯이 굴었던 건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인데 기사로 접하게 한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말투와 태도, 페로몬까지 평소처럼 돌아온 것을 보면.

“머리부터 말려. 감기 걸리겠다.”

“됐어. 지금 머리가 대수야? 내 인생이 걸린 일인데. 아, 진짜 짜증 나네.”

몇 번의 심호흡을 하며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 통화 내용의 여부를 떠나 부친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이 상황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내몰린 상황이고,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그로 인해 한 회장은 한휘 건설에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며, 정혼의 상대는 저를 처음으로 설레게 했던 알파인 강해건이다.

그런데 왜 강해건이 이 정혼을 수락한 것인지, 어째서 먼저 언론플레이를 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서정 그룹 계열사에 건설이 없긴 했으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업체의 크기가 너무나 다른데. 이제 와서 강해건이 결혼으로 이미지 세탁을 위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막말로 강해건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이었다.

15.

강해건…….

그를 떠올리자 마치 연상 작용처럼 그와 만났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기억나지 않는 뜨거웠던 밤, 첫 미팅에서의 무례함, 진중한 사과,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 처음으로 느낀 두근거리는 설렘, 그리고 오늘 아침의 추잡한 욕망까지. 페로몬에 휘둘린 것도 사실이지만, 솔직히 상대가 강해건이라는 것은 거부하는 게 쉽지 않은 유혹이기도 했다.

하지만 강해건이 제 인생의 구원자라고 해서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집안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강해건과는 별개로 또다시 열이 뻗쳤다. 열애설을 인정한 거로도 모자라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확신까지 심어준 강해건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작 당사자들끼리는 그 사안에 대해 단 한마디도 대화를 한 적이 없는데.

“주원아.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가주라. 대책을 좀 세워야겠어.”

“……그래. 아니라는 거 알았으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 지금 일어났다면서 대책 세우더라도 밥은 먹고 세워. 도울 일 있으면 전화하고.”

“어, 그럴게.”

모주원을 배웅한 한서림은 급하게 침실로 향했다. 강해건의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휴대폰 충전이 시급했다.

한서림은 휴대폰을 충전하자마자 쌓여있는 메시지를 확인할 새도 없이 강해건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흥분하며 날뛰는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단조로운 통화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다행히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전에 듣기 좋은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네.

“한서림입니다.”

-알아요.

“알고, 있었어요?”

-번호 저장해뒀으니까요.

“아니, 그거 말고요.”

오늘 기사가 떴으니 무엇에 대해 묻는 건지는 강해건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강해건은 한서림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내 예의 바른 말투로 까칠한 음성이 넘어왔다.

-전화 예의가 되게 바른가 봐요. 주어, 목적어, 전부 생략하고 알고 있었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정혼하는 거, 알고 있었냐고요. 오늘 기사 떴잖아요. 강해건 씨 측에서 인정했고.”

강해건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면서 물었다. 알고 있었으니 인정 기사가 난 것이겠지만, 혹시나 저처럼 집안의 희생양으로 강해건도 기사를 보고 알게 된 것이라면 아군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강해건은 서정 그룹의 서자이니 희생양이 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집안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한휘 건설의 한서림과의 정혼도 말이 되고.

-흠……, 이상하네. 한서림 씨는 왜 몰랐다는 것처럼 들릴까요.

지루함을 닮은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갑작스러운 혼란함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몰랐으니까요. 지금 기사를 보고 아버지께 확인해서 알았습니다.”

-오늘……, 알았다고요? 그것도 기사를 보고?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어이없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강해건 씨 반응 보니까 강해건 씨는 알고 있었나 봐요. 당사자인 나만 제외하고 다 알고 있었나 보네요.”

-알다마다. 연애결혼으로 위장할 시나리오까지 받아 봤는데. 나 혼자 생 쇼한 거였네요.

“시나리오요?”

-아닙니다. 정혼 관련해서 비즈니스 계약서는 비서실 통해서 이미 작성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쇼윈도니까 서로의 사생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도 계약서 써야겠죠.

“계약……서라뇨?”

-어떤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줬으면 좋겠어요. 결혼 전에 사진은 많이 찍힐수록 좋으니 내가 데리러 가죠. 언제 시간 됩니까.

당사자도 몰랐던 정혼을 두고 이미 집안끼리는 비즈니스적인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부친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더욱 명확해진 탓에 기분이 더러웠다. 오메가로 발현한 것을 그토록 못마땅해하며 학대를 하더니, 결국에는 팔아넘기는 것이다. 제가 강해건과의 정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천박한 오메가로 발현했으면 알파라도 제대로 잡아서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아주 어릴 때부터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그 반감으로 연애결혼을 지향했고, 페로몬 학대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한 회장이 원하는 것은 절대 들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특히나 한 회장이 목숨처럼 아끼는 한휘 건설에는 아주 조금의 도움도 되고 싶지 않았다. 페로몬 학대로 인해 비정기적 발정기로 시달렸던 한서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강해건과의 정혼은 그 모든 일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봐요, 강해건 씨. 무슨 생각으로 정혼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결혼 할 생각 없습니다.”

의지를 담은 탓인지 한서림의 입에서 강경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흘렀다. 강해건의 반응은 역시나 예상을 빗겨갔다.

-정말 이상하네. 그걸 왜 나한테 말해요? 그쪽 집안에서 정리하는 게 순서 아닌가? 아버지는 오늘 한 회장님과 골프 치러 가셨다던데.

“그건 어른들 사정이고.”

-…….

“왜 말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강해건 씨는 이 결혼을 하겠다는 거예요?”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어떤 딜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해건의 목소리는 결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해건 씨. 나 좋아합니까?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이 결혼을 하려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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