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회장의 모임과 겹칠 것을 모르고 잔뜩 초대장을 뿌렸으며, 그중에 진짜로 참석한 사람이 몇 명 정도인지도 확실치 않은데,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강유건이 기억하는 사람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워낙 파티를 즐기는 사람인지라 생일파티와 다른 파티에 참석한 이들을 헷갈리기도 했다. 또한 모두 같은 시각에 왔다가 간 게 아니라, 자기 편한 시각에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간 사람도 있고 동행자를 데려온 사람들도 있어서 일일이 다 기억할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섞었던 그가 강유건의 손님이었는지, 강 회장의 손님이었는지, 손님의 동행자였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한 없이 닥치는 대로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발현한 지 8년, 페로몬 폭주가 시작된 지 6년이나 됐는데도 그 오메가를 찾지 못하니 조바심이 난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혹시 그날의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발현의 충격이 심해서 기억력 조작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정말 찾게 되면 가만 안 둘 것이다. 아니, 일단은 안심시켜서 각인부터 하고, 복수는 그 이후의 일이다.
강해건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자료에 한서림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어쩌면 제가 찾던 그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을 움틔웠다. 혹시나 맞다면, 각인부터 해서 페로몬을 안정시킨 후에는 정말로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를 갈았다.
* * *
“대표님, 점심 드셔야죠.”
“나는 생각 없으니 먼저들 먹어요.”
직원들을 내보내고 혼자 사무실에 남은 한서림은 담당 직원이 올린 광고 모델 후보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다른 후보들을 봐도 성격과 사생활이 어떻든 간에 강해건만큼 마음에 드는 모델이 없었다. 매일매일 오메가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스캔들이 끊이지 않아서 사생활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데도 타고난 매력과 연기력은 강해건의 배우 인생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최근 사나흘은 그의 스캔들 기사가 뜨지 않았지만.
한국 론칭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광고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한서림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그 바쁜 와중에도 한서림은 강해건의 광고를 진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특히나 광고 예산을 높게 책정했고 기대하는 마케팅 효과가 큰 만큼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이기도 했다.
성격이 그럴 줄은 전혀 몰랐지…….
강해건과의 미팅을 떠올리면 헛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런 무례한, 아니, 무례하다는 말조차 아까울 만큼, 강해건이 한 짓은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광고효과를 생각하면 납작 엎드려서라도 진행하는 게 득이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려는 찰나 한서림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한국에 와서 휴대폰 번호를 알려준 사람들은 부친과 모주원, 그리고 회사 사람들뿐이기에 어쩐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통화버튼을 터치하는 한서림의 손가락이 뻣뻣했다.
“네.”
-강해건입니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린 낮은 음성의 주인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어쨌든 아쉬운 건 이쪽이니, 강해건에게서 먼저 연락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에 놀랍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바쁜가요?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용건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쉽사리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그럼 지금 잠깐 봤으면 좋겠는데.
“네? 지금요?”
-네, 지금요. 한서림 씨 회사 앞입니다. 바쁘다고 하면 돌아가고요.
첫 미팅과 달리 강해건의 말투가 예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왜 만나자고 하는지 의아했다. 혹시 무례하게 군것에 대해 사과를 하려는 건가, 아니면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건가, 온갖 다양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아뇨, 바쁘긴 하지만 시간 내보도록 하죠. 지금 나가겠습니다.”
욕설을 섞은 부분에 대해서는 그날 그 자리에서 사과했으니 다시 사과할 생각은 없었고, 강해건이 보였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사과라면 받아줄 의향이 충분했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무턱대고 회사 앞으로 찾아온 것을 보면 아마도 사과하려는 것 같았다.
한서림은 시간 내준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바쁘긴 하지만 시간 내보도록 하죠.’라는 말을 강조하고는 재킷과 코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습관처럼 페로몬 향수를 뿌리고 샘플을 코트 주머니에 넣는 일도 잊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비상등을 켜고 정차해 있는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차 뒤로 많은 택시들과 승용차들이 줄지어 비상등을 켜고 있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이 근처에 볼일 있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강해건의 잘난 얼굴이 보였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볼 때마다 참 우아하게 잘생겼다 싶어서 감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타요.”
한서림은 잠시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회의는 세 시이니 시간적 여유는 넉넉했지만, 회의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시간 많이 안 뺏을 겁니다. 그러니까 타요.”
한서림의 마음을 읽었는지, 강해건이 옅은 미소로 다시 한번 권유했다.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 상황인데, 왜 저 은근한 미소가 야릇하고 퇴폐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한서림은 제가 한 생각에 황당함을 느끼고는 조수석에 올랐다.
11.
한서림이 안전벨트를 착용한 걸 확인한 후, 강해건은 비상등을 끄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강해건의 차가 매끄럽게 나아가는 순간, 무심코 사이드 미러를 봤는데, 어째서인지 뒤에 정차하고 있던 여러 대의 택시와 승용차들이 일제히 한 번에 움직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밀폐된 공간이어서인지 은은하게 흘리고 있는 강해건의 페로몬 향이 진하게 달라붙었다. 어쩌면 비정기적 발정기를 고쳐준 페로몬이어서 더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때처럼 심기 불편한 기색은 드러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다정해서 포근하게 안겨있는 느낌의 페로몬이었다.
강해건이 작정하고 페로몬을 풀면 감당할 자신이 없지만, 솔직히 지금처럼 은근히 어루만지는 페로몬은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감지했던 타인의 페로몬 중에 단연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저를 고쳐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백 퍼센트 사심일지라도.
“…….”
“…….”
한서림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강해건을 곁눈질했다. 대화 없는 차 안에는 클래식 선율만 흘렀다. 우아하고 고상한 강해건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배우여서 그런지, 아까는 분명히 퇴폐적으로 보여서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한없이 단정하고 차분해 보이니 말이다.
한서림은 제 시선을 들키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보니, 시간을 많이 안 뺏을 거라고 했던 말과 다르게 잠수교를 건너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바쁜 시기라서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는데.”
“아무리 바빠도 점심은 먹을 거 아니에요.”
“……같이, 밥 먹자고요?”
“싫어요?”
“아니, 싫다기보다……, 순서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흐음……. 그때 사과하면 못 들은 말로 해준다고 했었나요? 이렇게 얼렁뚱땅 사과해도 받아준다고 하면 지금 하고요.”
강해건이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턱을 두어 번 쓸었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강해건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회색 빛깔의 머리카락은 여전했으나 오늘은 렌즈를 꼈는지 까만 눈동자였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지금 대충 해요?”
“……아뇨. 제대로 해요.”
사과를 할 거라고 잠시 잠깐 예상하긴 했으나, 정말로 사과를 한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날의 분위기로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짧은 며칠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서 사과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도 물을 생각은 없었다. 강해건도 며칠 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일일 테니까 존중하기로 했다.
“이태원에 아는 형이 하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음식도 괜찮고, 무엇보다 연예인이 가면 전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 있어서 다른 손님이랑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게 편하죠.”
웃음기를 머금은 강해건의 목소리와 어투는 꽤 익숙한 것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들었으니까. 그런데도 직접 들으니 깊은 저음이 생각 이상으로 감미로웠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그렇게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는지 철저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매력적인 미소로 설레는 말 몇 마디만 해줘도 안 넘어갈 재간이 없을 테다. 이런 특유의 매력을 가진 사람인데 연기력까지 받쳐주기에 지금껏 배우로서도 스캔들로 타격을 받지 않았을 테고.
“이탈리아 레스토랑인데 괜찮아요? 아, 외국 생활 오래 했다니까 한식이 나으려나. 형한테 얘기하면 한식 메뉴도 해주니까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봐요.”
미팅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말주변이 별로 없는 자신과 달리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도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다. 특별히 메뉴는 상관이 없어서 한서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건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아마 그가 작정하고 유혹한다면 한서림 역시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그렇게 보면 착각하는데.”
“네?”
“강 전무한테 듣자 하니 내 팬이었다면서요. 실물로 보니까 새삼 더 반하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강해건은 겸손은 떨지 않는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눈가까지 접히니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강해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상대가 설레어하는지 아는 게 분명했다. 대체 이 짧은 시간 동안 강해건의 외모와 매력에 몇 번이나 감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작품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첨예한 매력이었다. 제가 이토록 얼굴을 밝히는 인간이었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팬이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새삼 더 반하지는 않았습니다. 강해건 씨가 나한테 보였던 무례함을 생각해봐요, 내가 새삼 반하겠나.”
“……귀 빨개졌는데.”
“도끼병 있습니까? 히터가 너무 세서 더운 겁니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줄게요.”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별일도 없었는데, 아니, 오히려 지난 미팅에서 불쾌한 일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강해건한테 제대로 홀렸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내내 긴장 속에서 살아야했던 지옥보다 더 끔찍한 삶을 구원해준 사람이기에 한없는 아량을 베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이유가 뭐든 간에 한서림은 제가 꽤 쉬운 남자였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누구라도 강해건이 저런 식으로 나오면 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저는 쉬운 남자가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그러다가 또 쉬운 남자면 좀 어떤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본성을 알고 있으니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팬으로 좋아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강해건 때문에 속이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레스토랑에 미리 연락해둔 것인지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니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해건의 말처럼 직원의 안내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룸까지 안내한 남자는 메뉴판을 주고 나갔고, 강해건의 리드로 적당한 메뉴를 골랐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강해건은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아 눈을 마주치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그날은 미안했습니다. 몇 년 동안 신경 쓰고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서 신경이 날카로웠거든요. 미안합니다. 화풀이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무례하게 굴어서 기분 상했을 거 압니다. 비즈니스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됐는데, 정말 미안했습니다.”
막상 생각했던 이상의 정중한 사과를 받으니 조금 멋쩍어졌다. 한서림은 어색한 마음과 다르게 상대의 정중함에 진심으로 화답했다.
“네,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날 막판에 나도 좀 말이 심하긴 했으니까. 나도 미안합니다.”
“아뇨. 한 대표님은 할 말을 했을 뿐이죠. 그럼 그날 일은 잊어주는 거예요?”
강해건의 입에서 나온 ‘한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한국에 온 이후로는 직원들이 전부 대표님이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강해건이 부르는 것만 위화감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 통화할 때 ‘한서림 씨’라고 해서 그런가, 아니면 비즈니스 관계라서 호칭을 고친 건가, 잠시 생각했으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서 금세 잊었다.
“그래요. 뭐 좋은 일이라고 오래 기억합니까. 다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서로한테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광고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어요?”
“……광고가 되게 중요한 모양이네요.”
사과를 하고 계약도 할 줄 알았는데 김칫국을 마신 모양이었다. 강해건은 묘하게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뭐 때문에 또 뒤틀렸나, 방금 전에 사과했는데 또 무례하게 구는 건 아니겠지, 그의 표정을 주시하게 됐다. 그러나 다행히 강해건은 금세 표정 관리를 하며 부드러운 인상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첫 론칭이니까요. 신향수를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준비도 많이 했고, 연구원들과 직원들도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거 말고는 할 말 없어요? 예를 들면, 왜 내가 광고를 찍어야 한다든지.”
혹시 칭찬을 바라는 건가. 이 정도로 인기가 많으면 칭찬도 질리게 들었을 텐데.
그래도 칭찬은 계속 들어도 기분이 좋은 말이니까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칭찬을 바라는 표정이라기에는, 강해건의 눈빛이 몹시 날카로웠다. 새까만 눈동자가 직선적으로 다가와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한서림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로 어떻게 칭찬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페로몬 향수와 강해건의 문란한 이미지가 딱이라는 말은 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좀 돌려서 페로몬 향수와 강해건의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광고 모델은 무조건 강해건밖에 떠올리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강해건의 칭찬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며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직원이 테이블에 요리를 세팅하는 동안, 강해건은 함께 온 남자와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보니 아까 말했던 아는 형인 듯했다.
강해건이 인사시켜주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이 레스토랑 사장이라면서 한서림에게도 살갑게 인사를 해왔다. 악수를 청하는 손을 맞잡자 자연스레 몸이 가까워지며 페로몬 향이 끼쳐왔다. 아주 미약한 향이었으나 알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한국에는 페로몬 향수가 일반화되지 않아서 향으로도 형질을 구분할 수 있었다.
옛날 같으면 알파와 악수는커녕 가까이 가는 것도 두려웠을 텐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눈앞에 앉아 있는,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저를 치료해준 강해건 덕분이었다. 사과를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강해건이 보이는 분위기 때문인지,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기분이 좋았다.
12.
“와, 페로몬 향 되게 좋으시네요.”
“제 페로몬은 아니고 페로몬 향수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칭찬에 민망했으나, 한서림은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강해건이 헛웃음을 흘리는지 모르겠다. 광고 미팅을 했으니 페로몬 향수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러나 말을 잇는 사장으로 인해 곧 강해건에게서 시선을 떼야 했다.
“페로몬 향수요? SNS에서 봤어요. 해외에서만 판다고 하던데 어떻게 구하셨나 봐요. 좋은 향은 다 솔드아웃이라고 하던데 운이 좋으시네요.”
“아, 사실 제가 그쪽 일을 하고 있어서요. 한서림입니다.”
명함을 건네자 사장이 갑자기 반색하며 활짝 웃었다.
“대표님이시네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대표님 빽으로 페로몬 향수 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제 페로몬 향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해외 직구는 어려워서 도통 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예상했던 대로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자신의 페로몬 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알파나 오메가는 어디에든 존재했다. 페로몬 향은 자신이 선택할 수가 없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지닌 형질이 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같은 향을 지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직도 신비한 일이었다.
“아직 기사를 안 냈는데 곧 한국에도 론칭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샘플이 있긴 한데, 향이 마음에 드신다면 써보시겠어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지금 뿌리신 그 향인가요?”
“네. 이번에 출시하는 신향수예요.”
한서림은 코트 주머니에서 습관적으로 넣었던 샘플 향수를 꺼내 사장에게 건넸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만난 첫 고객이었다. 이렇게 좋아해 주니 덩달아 한서림까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와, 출시도 안 된 향수를 받다니. 오늘 식사 값 받으면 안 되겠는데요.”
“밥은 내가 사는 건데.”
조용히 지켜보던 강해건이 끼어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강해건의 페로몬 향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네가 사는 거면 당연히 받아야지. 그럼 한 대표님 가실 때 집에 가서 저녁으로 드시라고 맛있는 것들 좀 포장해드릴게요. 아, 음식 나왔는데 제가 너무 오래 있었네요. 서비스도 드릴 테니까 편하게 식사하세요.”
사장은 샘플 향수를 손에 꼭 쥐고는 룸에서 나갔다. 그제야 한서림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을 보니 주문했던 것보다 요리의 가짓수가 많았다. 강해건과의 친분으로 이미 서비스를 준 것 같은데, 또 준다면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체질상 살이 잘 안 쪄서 그렇지 한서림은 의외로 대식가였다.
“지금 이 향이, 한 대표님 페로몬이 아니고 페로몬 향수를 뿌렸다는 거죠?”
“네. 아무래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한테 홍보하기 좋으니까요. 미국에서도 늘 페로몬 향수를 뿌리고 다녔어요. 그런 식으로 직원들이랑 홍보도 꽤 했고요.”
“아아……. 진짜 페로몬이 아니었구나.”
강해건이 허탈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페로몬 향수 회사 대표가 직접 만든 향수를 뿌리는 게 이상한 일인가 싶어서 강해건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더는 그에게서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화제를 돌리며 식사하기를 권했다.
식사를 하면서 한서림은 언제 다시 광고 이야기를 꺼낼까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저도 모주원처럼 넉살이 좀 있으면 밥 먹으면서도 쉽게 대화를 끌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한서림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던 강해건이 식사에 집중하는 탓에, 식사할 때는 대화를 안 하나 보다 할 뿐이었다.
“그럼 섹스할 때도 진짜 페로몬은 개방 안 해요? 히트사이클 때라든가.”
예상은 빗나갔다.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강해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를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고요하게 식사를 하던 중이어서인지, 강해건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내용은 반갑지 않았을지언정.
“네?”
“아. 혹시 내가 무례한 질문을 한 건가요? 포인트는 섹스가 아니라 페로몬 개방인데. 히트사이클은 예시이고.”
당혹감 어린 표정이 드러나자마자 강해건이 먼저 선수를 쳤다. 무해하게 웃는 낯을 보니 화를 낼 마음도 사그라졌다. 강해건은 아마도 전생에 저 얼굴로 우주를 구했을 거다.
“글쎄요. 최근에는 일이 바빠서 별로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요.”
“페로몬 향수 뿌리면 답답하지는 않아요? 내 페로몬과 상충되거나 섞여서 향이 변하거나, 그런 건 없고요?”
한서림은 이제야 대화의 요점을 알아챘다. 강해건은 자신이 찍을 페로몬 향수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광고 이야기로 넘어갈 것 같아서 성심성의껏 대답해줄 마음이 생겼다.
“답답하지는 않아요. 일반 향수와 비슷하니까. 그런데 페로몬 향수는 피부 밀착도 면에서 일반 향수보다 더 섬세해서 내 페로몬과 상충되지는 않아요. 진짜 나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이라고 착각할 만큼 정교하거든요. 물론 내가 페로몬을 얼마만큼 개방하느냐에 따라 향이 섞일 수는 있어요.”
“그럼 섹스할 때도?”
“아무래도 흥분하면 페로몬 컨트롤이 쉽지 않으니까 진짜 페로몬 향이 더 짙긴 하겠죠. 페로몬 향수를 몸에 쏟아붓지 않는 이상.”
이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례였다. 대부분의 알파나 오메가는 흥분하거나 발정기를 맞았을 때 페로몬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그건 본능이었다. 사실 행위 중에는 향에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더 많은 페로몬을 쏟아내서 상대에 대한 소유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강력한 페로몬 샤워를 받은 이후, 비정기적 발정기가 치료되면서 특수 상황에서도 쉽게 페로몬을 컨트롤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이 생겼다. 페로몬 샘은 정상이 되었다는데 히트사이클도 오지 않고 아무리 흥분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페로몬 향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과 임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서림은 베타나 다름없었다.
“그 말은, 그런 상황에서는 진짜 페로몬이 드러난다는 거죠? 향수를 몸에 쏟아붓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강해건 씨도 알파니까 러트 때는 페로몬 컨트롤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강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서림의 앞접시가 빈 것을 보고 요리를 덜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강해건이 요리를 덜어주었다. 이래서 매너가 좋다고 소문이 난 건가 싶었다.
페로몬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강해건이 관심을 보여주니 솔직히 기뻤다. 첫 미팅에서 이런 대화를 했더라면 그가 장난식으로 말했던 것처럼 강해건에게 새삼 더 반했을 거다. 디저트를 먹으면서도 같은 주제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삼 년 전이었나? 강 전무한테 페로몬 향수를 선물 받았던 적이 있거든요. 친구가 만든 거라고. 이번에 얘기 들어보니까 그게 한 대표님이더라고요.”
“아. 그때 내가 준다고 하는데도 굳이 매장에서 종류별로 잔뜩 사더라고요. 지인들한테 선물할 거라고.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아무튼 유건이도 우리 향수 마케팅에 일조했다니까요. 그래서 유건한테 받은 향수는 써봤어요? 어땠어요? 그때 출시한 것보다 이번에 출시할 신향수가 훨씬 더 정교하긴 한데…….”
강해건에게서 어떤 피드백이 나올지 몰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하는 기대감인 것 같기도 하고, 부정적인 평가가 나올까 봐 생긴 불안감인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인 걸 보면 불안이 더 큰 것 같지만. 페로몬 향수에 지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강해건의 앞에서는 이유 없이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아뇨. 내가 향에 좀 민감해서요. 사실 내 페로몬 아니면 다른 사람 페로몬은 좀 역하거든요.”
“어……, 그럼 광고 촬영 때…….”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뱉어내던 한서림이 멈칫했다. 아직 광고 계약을 하지 않았는데 앞서나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내 페로몬이 아닌 타인의 페로몬을 역하게 느끼는 일은 같은 형질이 아니어도 흔하게 있기에 페로몬 향수가 성공한 것도 있었다. 체내에서 나오는 향과 의도적으로 사랑받기 위해 만든 향은 맡는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바가 크게 다르니까. 개인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면 페로몬 향수의 향은 선택할 수 있기에 불호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강해건은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계약 걱정을 하는 한서림을 안심시켰다. 첫 미팅에서 같은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맥락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정확하게 이해가 됐다.
“그 말은, 계약하겠다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