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강해건 씨는 어디에 있죠?”
“저기 맨 끝에 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중호 실장이 가리킨 곳에는 총 다섯 개의 문이 있었다. 홀에서 보는 것으로 내부 크기를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인터뷰용으로 사용된다고 하니 아마 좁지는 않을 테다. 한서림은 나머지 사람들이 테이블에 자리 잡는 것을 본 후, 당당한 걸음으로 맨 끝 룸으로 가서 문 앞에 섰다.
들뜬 기분으로 왔는데 왜 갑자기 긴장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하도 반복적으로 본 탓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네’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문을 여는 손이 약간 떨렸다.
“아…….”
문을 열자마자 후각을 자극하는 감미로운 향에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페로몬 향수를 뿌린 것처럼 은은한 향인데도 한서림에게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여전히 달콤하고 아찔한 페로몬이었다. 그날의 일은 단편적인 것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도 페로몬 향만큼은 정확히 기억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호흡을 갈무리하고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가장 먼저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짙은 회색의 눈동자였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내추럴한 모습의 강해건은 머리카락 색깔도 눈동자와 같은 회색이었다. 오묘하고도 신비한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 나왔다. 화면에서 볼 때마다 감탄하긴 했으나, 참 아름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퍼퓸SR 대표 한서림입니다.”
“강해건입니다.”
분명히 매너가 좋고 예의가 바르기로 정평이 자자하다고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강해건은 일어나지도 않은 채 건방진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한서림은 오늘 강해건의 컨디션이 별로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개의치 않고 강해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음료를 마시고 있던 강해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보기만 할뿐, 음료를 주문하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한서림은 스스로 벨을 눌러 직원을 호출하고 자신이 마실 음료를 주문했다. 그때까지도 강해건이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탓에 머쓱한 눈길로 룸을 둘러보기만 했다. 예상대로 내부는 좁지 않았다. 홀에 남은 인원이 다 들어와도 적당한 크기였다.
“…….”
“…….”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줄 때까지도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탐색하기만 했다. 간간이 눈이 마주쳤으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주문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한서림이 먼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광고 촬영을 하게 될 페로몬 향수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풀까 하다가, 너무 노골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초점을 강해건에게로 맞췄다.
“머리카락 색깔이 예쁘네요. 새 작품 들어가나 봅니다.”
“아뇨. 아직 작품은 고르고 있는 중이고 이게 원래 내 머리카락 색입니다.”
“그럼…….”
혹시나 무례할까 싶어서 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으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강해건은 한서림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안다는 듯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눈동자도 마찬가지고요. 발현하면서 눈동자랑 머리카락 색소가 옅어졌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때는…….”
8년 전 깨어났을 때 옆에서 잠들어 있던 강해건은 분명히 흑발이었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눈동자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짙은 흑발은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보통 16세 전후로 발현하니까, 8년 전에는 염색이었던 걸까. 하지만 한서림은 궁금증을 뒤로한 채 곧 현실을 자각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강해건이 그때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괜한 말로 민망한 과거를 꺼내서 불편한 상황을 초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는?”
“어……, 그,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염색하고 렌즈 착용하니까요. 아버지가 싫어하셔서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만남에서는 굳이 감출 이유가 없잖아요. 어차피 뻔한데 내숭 떨 필요도 없고.”
“네?”
알아들을 수 없는 화법에 한서림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강해건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날카롭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강해건이 풍기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아우라로 인해 한서림은 괜히 긴장이 되어서 입안이 마르는 탓에 자꾸 녹차를 마셨다. 그럴수록 입안은 더욱 텁텁해지기만 했다.
“그런데 왜 둘이 따로 보자고 했는지……. 아, 혹시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들거나 조율할 부분이 있나요? 그런 거면 우리 변호사와 담당 직원도 함께 있는 게 더 진행이 빠를 텐데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분명히 대화를 하고 있는데 왜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지금 맥락에서는 이해되지가 않았다. 혹시 정말로 제가 오메가이기 때문에 하룻밤 상대로 생각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라면 강해건이 이렇게 대놓고 짜증 난다는 듯한 신경질적인 페로몬을 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혹적인 페로몬을 흘린다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들어오자마자 감지했던 그의 페로몬 향은, 너무 오랜만에 느낀 탓에 감미롭다고 착각했을 뿐, 그는 계속 페로몬을 통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한서림은 조금 아연해졌다. 강해건은 자기 입으로 밝히기 불편한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거라면 매니저를 통해서 얘기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음……. 그럼 혹시 광고 개런티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글쎄요, 돈은 나도 있을 만큼 있어서 그런지, 개런티가 얼마든 간에 별로 아쉽지가 않네요. 나 서정 그룹 서자잖아요. 그거 다 까고 데뷔했는데 설마 돈 몇 푼에 아쉬운 소리 하겠어요? 해외에 오래 계셨다더니 나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그럼 사전조사라도 하고 오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리 봐도 강해건이 저를 기억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강해건이 왜 삐딱하고 무례하게 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탓에 어리둥절했다. 사전조사라고 할 것도 없이 한서림이 유학을 가고 몇 달 안 돼서 그가 데뷔했기에, 그때부터 팬을 자처하며 살아와서 이미 강해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한서림은 제 입장을 구구절절 설명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한편으로는 강해건은 현재 명실상부한 흥행 보증수표이고, 연기력마저 뛰어난 톱스타이니 배우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 몇 분만으로도 강해건이 불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아니, 강해건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며 은근하게 한서림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밀도 높은 페로몬을 풀어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면 살갗이 찢기는 듯한 고통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도 모르게 의식의 흐름대로 가던 생각을 끊어내며 한서림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페로몬으로 학대를 일삼던 아버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자유를 얻게 해준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조금 무례하게 군다고 해도 웃어넘겨 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아니면……, 혹시 미팅 끝나고 바로 호텔로 가길 원하는 건가요?”
기껏 고민해서 망설이다가 물어본 것인데, 강해건이 황당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민망함을 느낀 한서림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이럴 바에는 속 시원하게 둘이 따로 보자고 한 목적을 밝혀주는 게 서로 편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람을 눈치 보게 만드는 것인지 성질이 나려고 했다. 그래도 은혜를 생각해서 최대한 참아보자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강해건에게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
“입 쓸 줄 알아요?”
“네?”
“자지 빨 줄 아냐고.”
금욕적인 얼굴에서 저급한 단어가 나왔다. 한서림은 정제되지 않은 말에는 면역이 없었다.
“그게 무슨…….”
“페로몬의 지배를 받는 오메가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당황한 건 아닐 텐데, 지금 내숭 떨어요? 아까 내숭 떨 필요 없다고 말한 것 같은데. 어차피 서로 다 아는 처지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강해건에게서 나오는 짜증스러운 감정을 담은 페로몬의 밀도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런 모욕은 겪어본 적이 없어서 당황한 탓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거리며 날뛰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혹시나 저를 기억해서 하는 말은 아닐까 눈치를 살폈다.
“아니면 입은 잘 못 쓰고 구멍을 잘 써요?”
혹시나 그날의 일을 말하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강해건은 저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했다.
그러니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공적으로 만난 미팅 자리에서 이 무슨 망발인지, 배우가 아니라 양아치와 마주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없는 향수라고 하지만, 사람이 우스워 보이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한서림은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마인드컨트롤을 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까지 강해건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고 참은 것이 무색하게 광고고 뭐고 그냥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강해건 씨. 내가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상당히 무례하네요. 사과하면 지금 발언은 못 들은 걸로 해주겠습니다.”
한서림이 어설프게나마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하며 최대한 차분하게 제 의사를 어필했으나,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다 들어놓고 어떻게 못들은 걸로 합니까.”
“그래서. 사과하지 않겠다고요?”
“어차피 이것도 비즈니스인데 모르는 척하면서 내숭 떨거나 시간 끌지 말자고요, 짜증 나니까. 나 시간 남아도는 사람 아닙니다.”
비즈니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계속 이런 태도를 취했단 말인가.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기가 막혔다. 더는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한서림은 지금까지 유지했던 차분함을 벗어던지고 원래 제 성격대로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다.
“이봐요, 강해건 씨. 그쪽은 비즈니스를 이딴 식으로 합니까?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아, 씨발. 그쪽만 짜증 나냐고. 그쪽 때문에 나도 짜증 납니다. 이 광고 찍기 싫으면 정식으로 거절해요. 어린애처럼 삐딱하게 굴지 말고. 다 큰 성인이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오늘 미팅은 여기서 그만두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잘 참아내다가도 터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한서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문 쪽으로 향했다. 강해건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서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감지되는 페로몬 향으로 추측해보건대 꽤 화가 난 듯했다. 서정 그룹의 극우성 알파 아들이라고 왕자님처럼 떠받들어지며 애지중지 컸나 보다. 그러니 저렇게 버릇이 나빠졌지.
그러나 문을 연 한서림은 자신이 했던 말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나가기 직전에 고개를 돌린 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회색빛의 깊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페로몬에서 느껴지는 잔뜩 열 받은 감정과 다르게 의외로 강해건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씨발이라고 욕한 건 미안합니다. 내가 원래 사람 면전에 대놓고는 욕을 안 하는데 그쪽이 워낙 좆같이 굴어서 입이 멋대로 움직였네요. 내가 그래도 유건이랑 인연이 있어서 충고하는데, 다른 광고주들한테는 이딴 식으로 굴지 말아요. 네가 좆같이 굴면 네 인생도 좆같아지길 비는 사람들만 늘어나니까.”
한서림은 후회 없을 정도로 할 말을 전부 한 후에 미련 없이 룸에서 나왔다. 속은 시원해졌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은인 같은 사람이라서인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04.
* * *
3월이 끝나지 않았던 8년 전의 그 날은, 봄이라고 부르기에는 서늘한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가장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었다. 생일을 맞은 주인공의 성정을 닮아서인지 몹시 온화하고 맑기도 했다.
-미리 말을 하지. 나 지금이라도 갈까?
스케줄을 일일이 보고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모주원이 나중에 알게 되면 서운해할 것 같아서 연락한 참이었다. 역시나 모주원은 한서림이 혼자 움직이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과 불안을 드러냈다. 학창시절에는 같은 학교를 다니니 붙어 다니는 것에 대해 별다른 자각을 하지 못했는데, 다른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모주원이 과할 정도로 저에게 모든 시간을 맞추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던 차였다.
“초대장 있어야만 입장 가능할걸.”
강유건이 동반 2인까지 가능하다고 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네 경호원이라고 하면 되잖아.
“선물만 주고 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서정 그룹 강유건 생일 파티라며. 거기 알파들 득실거릴 텐데 정말 괜찮겠어?
우회전을 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핸들을 돌리며 한서림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친구인 덕분에, 모주원은 유일하게 한서림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전에는 나름대로의 배려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요즘 들어 자꾸 알파에 대한 직접적인 걱정을 드러내는 것이 답답하고 거부감도 들었다. 마치 제 오메가를 대하는 것 같지 않은가.
“주원아.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의지할 수는 없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
“그게 아니라……, 나도 벌써 스물넷이고 곧 유학도 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수는 없다는 거지. 가서 혼자 유학 생활도 해야 하고, 이후에는 사회생활도 해야 하잖아. 이제 도망만 칠 게 아니라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겠다 싶어서.
-서림아. 그건 트라우마가 아니라 아직도…….
약간 강경하게 말하던 모주원이 말끝을 흐렸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면 한서림이 예민해지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사실 의사에게서 특이사례이기에 완치 법조차 찾지 못했다고 들었다.
한서림은 조용히 모주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이러다가 모주원에게 의지하고 의존하게 되면서 그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모주원이 연애를 안 하는 이유가 저 때문인 걸 알고 있기에 이 기회에 조금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을 테다.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었는데도 반복된다면 결국 모주원도 지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좋은 친구마저 잃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 비극만큼은 막고 싶었다.
-아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바로 갈 수 있게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미안하게……. 됐어, 걱정하지 말고 너 일 봐.”
-……내일 너네 집으로 갈 테니까 운전 조심해.
“어. 내일 보자.”
전화를 끊자,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오늘 파티를 주최한 강유건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서림이 재벌가의 자녀들이 진학하는 특수 사립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공이 달라서인지 캠퍼스 내에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워낙 유명해서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서정 그룹의 자제로 소문이 자자하기도 했지만 빼어난 미모로 인기도 많은 탓이었다. 그런 강유건과의 인연은 지난 학기 교양 수업에서 교수가 임의로 짜준 2인 1조 과제를 함께 하게 되며 시작되었다. 같은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인지 더 편하기도 했고, 오메가이기에 겪는 고민 같은 것도 나누며 잠깐 꽤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초대장 확인하겠습니다.”
사유지가 시작되는 공동 대문을 통과하면서 운전석 창문을 열어 직원에게 강유건이 모바일로 보내준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확인되셨습니다. 좌측 서편 주차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파티는 본관이니 주차하신 후, 안내에 따라 입장하시면 됩니다.”
공동 대문인 정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는 고용인에게 주차를 맡기고 안내에 따라 본관으로 향했다. 서편 주차장에서 본채까지 생각보다 거리가 꽤 됐지만 정원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아직 완연한 봄이 아닌데도 깔끔하게 가꿔진 넓은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들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정교하게 조각되어 물을 내뿜는 석분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휘 건설의 외아들로 살아오면서 누린 것이 없더라도 제 집안이 대단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정 그룹은 차원이 달랐다. 짧은 시간 내에 저도 모르게 압도당해서인지 조금 위축되는 것 같기도 했다.
“코트 보관해 드리겠습니다.”
본채에 입장하며 코트를 벗어서 고용인에게 건넸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 억제제가 있었으나 집에서 출발할 때 먹고 왔으니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한서림!”
마치 연회장 홀을 연상시키는 운동장만 한 거실을 둘러보며 이미 도착한 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을 찾는 도중,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주인공인 강유건이었다. 드레스코드가 캐주얼 정장이라고 했을 때 예상했던 대로, 그는 우아하고 세련된 슈트를 입은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와줘서 고맙다.”
“초대해줘서 내가 더 고맙지. 근데, 무슨 생일 파티가 이렇게 화려해?”
한서림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는 강유건 역시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아버지가 비공개 모임으로 파티를 여시는데 날짜가 겹쳤더라고. 사실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일부러 날짜를 겹치게 하신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초대한 사람 중에는 아직 반도 안 온 것 같아.”
어쩐지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했다. 특히나 강유건의 생일 파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른들이 꽤 많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내키지 않아도 강 회장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싶었다. 부친 때문에 어른 알파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으나 잘 참으면 예의를 지키며 인사하는 일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알파 교수의 강의도 들었으니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테다.
“그, 너희 아버지께 인사드려야 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오늘은 아버지가 내 친구들 귀찮게 하지 않기로 약속해주셨어. 아마 아버지 손님들한테 나랑 해건이 인사시키는 것만으로도 엄청 바쁘실걸. 저것 봐라, 해건이는 벌써 잡혀있네. 이따 기회 봐서 인사해도 되고, 아니면 그냥 놀다 가도 돼.”
자유분방한 강유건의 발언에 한서림은 내심 놀랐다. 한서림의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는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한 회장의 말이 곧 법이었다. 불쾌하게 번져가는 생각을 흩어내며 강유건이 힐끗 시선을 두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눈에도 알파의 기운을 풍기는 거구의 남자가 어른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확인할 수 없어도 강유건이 늘 자랑하던 동생 강해건인 모양이었다.
“맞다. 생일 축하해. 선물로 뭘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했는데, 필요한 건 전부 있을 것 같아서. 그래도 이런 건 여러 개 있어도 되니까 너한테 어울릴 만한 걸로 골라 봤어.”
강유건과 고민을 얘기하다가 자신의 페로몬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선물로 향수를 골랐다. 강유건에게 어울릴 만한 향을 고르느라 백화점에서 시간이 꽤 걸렸다. 강유건이 말하기를, 자신은 비혼주의자인데 제 페로몬 향에 드러난 감정을 멋대로 해석하고 귀찮게 구는 알파들이 재수 없고 역겹다고 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한서림도 그 부분에는 공감했다. 그런 경우 대부분 모주원이 해결해주고는 했으니까. 물론 한서림은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지에 상관없이 알파의 페로몬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모주원을 제외한 알파가 재수 없고 역겹다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이런 일반 향수로 밀도가 높고 섬세한 진짜 페로몬을 전부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페로몬을 아예 개방하지 않은 채 향수를 뿌리면 어느 정도 희석은 시킬 수 있을 테니 나름 괜찮은 선물일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유건이 해맑게 웃으며 선물을 받아들고 기쁜 기색을 보였다.
“역시 서림이는 센스가 있다니까. 고마워, 이거 뿌리고 다니면 이제 편하겠다.”
“그래도 완전히 커버되지는 않을 거야.”
“알지. 내 페로몬은 개방 안 하고 향수만 잔뜩 뿌리고 다니면 돼. 그래서 나 취미로 향수 모으잖아.”
킥킥대며 기대감을 내비치는 얼굴이 화사했다. 그때 누군가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이 한서림의 시야를 장악했다.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했는데도 존재감이 상당했다. 피지컬이나 풍기는 아우라로 봐서는 완벽한 알파였다. 요즘은 외향으로 알파나 오메가, 베타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은데, 저렇게까지 대놓고 알파라는 것이 극명하게 두드러지는 사람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심지어 뒷모습만으로도 말이다.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저 알파의 페로몬도 아버지처럼 무섭겠지, 본능적인 거부감과 공포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강유건이 동생이라고 했던 사람도 알파의 아우라를 강하게 풍기는 저런 느낌이지 않았나 싶었다. 고개를 돌리니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남자가 사라져있었다.
05.
“뭘 그렇게 봐?”
“어?”
“아, 해건이? 아까 말한 내 동생이야. 드디어 아버지한테 풀려났나 보다. 이따가 인사시켜줄게.”
한서림의 시선을 따라간 강유건이 설명했다. 어릴 때는 남성형 어른 알파에게만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는데, 페로몬 학대가 반복적으로 지속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페로몬으로 오메가를 짓누를 수 있는 알파라는 형질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한서림은 대답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또 누구 도착했나 보다, 얼른 가 봐. 내가 주인공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아, 미안. 이따가 보자. 먼저 온 애들 저쪽에 있으니까 같이 놀고 있어.”
“어. 알아서 놀다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강유건을 이제 막 도착한 사람에게 보내고 구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조금 나누다 보니, 모여 있는 사람은 전부 베타와 오메가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서림은 내심 안도하며 그들에게 섞였다. 모주원이 없는 상태에서는 알파와 섞여 있는 것에 심리적인 부담감이 상당했다. 그래서 오늘 파티도 핑계를 대고 빠질까 하다가 큰 용기를 내서 온 것이었다. 부디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음식을 먹으며 보드게임에 한창 빠져 있다가, 칵테일을 한두 잔 마시면서 긴장을 늦추고 자연스럽게 한 친구의 유학 이야기로 넘어갔다. 한서림 역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당장 다음 주에 떠난다는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한참 몰입했을 때였다.
“야, 갑자기 이거 무슨 냄새냐?”
“그러게? 엄청 달콤한데?”
“헐. 이거 완전 발정 난 오메가 페로몬 아냐?”
옆 테이블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던 알파 무리에게서 들린 말이었다. 그 순간 한서림은 갑자기 등골이 싸해지면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도 들었다. 은밀한 곳에 고인 열들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히트사이클과는 다른 비정기적 발정기의 전조증상이었다. 몹시 위험한 상황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부친의 페로몬으로 학대를 받으며 살아왔기에 생긴 부작용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수준에서 거의 매일 억제제를 복용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오늘도 분명히 집에 출발하기 전에 억제제를 먹었는데 왜 하필 지금 이러는지 영문을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 * *
오늘 강해건을 만나고 왔기 때문일까, 지금 강유건과 통화 중이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8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위기인 줄 알았는데 기회가 되었던, 아찔했던 그 순간.
-정말? 오늘 해건이랑 만났다고? 어떻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면서 사업 이야기까지 갔다가 결국에는 강해건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강유건이 출장으로 뉴욕에 올 때마다 만났었는데,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는 2년이 넘었다.
“퍼퓸SR 광고 계약하려고.”
-드디어 한국에도 들어왔구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