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198화 (198/200)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98화

"이거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 같군요."

80년대 음악 시장을 주름 잡았던 존 레닉의 말이었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는 걸 잊을 만큼 혼이 쏙 빠지는 것만 같았다.

"건방지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확히 우리 재단이 가야 할 방향을 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

오늘 회의에 참석한 이사들 모두 대표의 빈 자리를 바라만 보았다.

불과 1시간.

1시간 전만 해도 장연욱이 대표 자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회의장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재단 활동 반경을 늘리는 건 좋지만, 회원제로 바꿔서 인원 수를 늘리겠다는 건 조금 납득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이 운용하는 자금은 1조원이 넘습니다. 우스운 건 대표를 포함한 총 13명의 사람들이 재단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죠."

"장연욱 덕분에 우리 재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후원금이 여기 저기서 모여들고 있고요. 후원금을 정기적으로 내는 사람은 재단의 회원이 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건데, 솔직히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연욱이 들고 온 안건은 바로 기존에 있던 재단 회원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었다.

13명 밖에 되지 않은 재단 멤버.

13명 모두 이사회 멤버이며, 그중에서 선출되는 대표가 재단을 리드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장연욱은 그동안 이어져 온 것들을 바꾸려 하고 있다.

"그래서 다들 승인하자는 겁니까? 우리가 비밀리에 수집한 물품들을 전부 공개해야 할 텐데요?"

회원제.

후원금이 많이 모이는 건 좋으나,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것들을 모두 공유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여기 사람들은 돈이 넘치도록 많다.

후원금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좋아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까 장연욱 대표가 그랬지요? 이 재단의 설립 목적을 잊지 말라고. 레비 회장은 순수하게 음악 문화 발전을 위해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개방을 거부하고 우리 만족을 위해서만 재단을 움직인다면 그 목적을 잃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재단 설립 목적은 결국 돈 때문이 아니라 음악 발전을 위해서였다.

장연욱의 안건을 무시하는 건 곧 재단을 부정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치를 부리려고 재단을 운영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안건을 거부하면 결국 우리 스스로 크로노스 재단은 귀족들의 취미 생활이라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공이 많아지면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처럼 시스템을 유지하는 게 합당합니다."

찬성하는 의견도 있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정작 안건을 제출한 대표라는 사람은 자리를 비운지 오래인데, 남아 있는 이사들만 팽팽한 토론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역시 이상해.

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엘리자베스 여왕만이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혹시 이걸 노린 건가?'

장연욱이 대표로 선출되는 건 레비 회장의 뜻이니 당장 막을 수는 없으나, 기회를 봐서 빠르게 해임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아까 분위기로 봐서는 내일이라도 해임 안건을 올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하는 행태를 보라.

대표 해임 건은 벌써 옛날얘기가 되어 서로 회원제를 두고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장연욱을 쫓아내야 한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는 것이다.

'진짜 의도한 거라면…….'

정말 작정하고 이사회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 서로 싸우게 만든 걸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장연욱은 진실로 대단한 놈이다.

저 돈 많고 거대 조직 안에서 숱한 정치 생활을 해 온 저 사람들을 감쪽 같이 속였다는 뜻이니까.

'그놈은 음악을 할 게 아니라 정치를 했어야 했네.'

물론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뭐,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연마한 여왕의 직감은 장연욱이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답답합니까? 재단 설립 목적을 이대로 부정하자고요?"

"그게 아니라 어차피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걸 굳이 왜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 오냐는 겁니다!"

점점 열기가 가열되고 언성이 높아지자 여왕이 중재에 나섰다.

"다들 진정하세요."

여왕의 한 마디에 다들 하던 말을 멈췄다.

비록 서로 국적은 달라도 여왕의 위치를 무시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가장 연장자가 아니던가.

"이건 다음에 다시 토론을 해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죠."

"여왕의 뜻이 그러하다면……."

"흠흠.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장연욱 대표는 끝까지 회의석을 지켜야지, 어딜 간 겁니까?"

"아까 못 들으셨습니까? 레비 회장이 장 대표를 급히 찾는다고."

오늘 내일 하고 있다는 레비 회장이 장연욱을 급히 찾았다는 건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일 수도 있다.

"휴-. 레비 회장이 얼른 쾌차하고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병원에 알아보니, 더는 가망이 없다는군요."

"아쉽게 됐습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레비 회장이다.

그보다 더 장수를 누리고 있는 여왕은 왠지 남일 같지가 않아 마음이 쓰였다.

***

"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요. 회장님이 부르시면 당연히 와야죠."

몇 달 전 봤을 때랑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래도 그땐 정정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얼굴에 생기가 없고 손도 간신히 들 정도였다. 그는 온갖 의료기기를 옆에 갖추어 놓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난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얼른 다시 건강을 되찾으셔야죠."

"후후. 그런 소리는 할 필요 없습니다. 나도 때가 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레비 회장은 인공 호흡기도 불편한지 떼어 버렸다.

"회, 회장님!"

톰이 다급히 달려와 봤지만, 그는 손을 저었다.

"됐네. 이깟 거 더 마신다고 나아지는 게 있나?"

"그, 그래도……."

"자네도 이제 그만 날 놔줄 때가 됐어."

"……."

톰은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뭔가 조금은 부러웠다.

자신을 위해 평생을 충성하는 사람을 레비 회장은 곁에 두고 있다는 거니까.

"톰에게 들었습니다. 살리에르의 악보와 일기를 가져 가셨다고요?"

"예. 흥미롭더군요. 회장님이 살리에르의 자료를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살리에르만큼 음악 역사상 제 호기심을 자극한 사람이 또 없었어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르의 자료를 모으는 데에 더 치중했다는 걸 그의 유물 창고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살리에르는 모진 풍파도 모두 비껴나가며 음악 발전에 힘을 쏟았습니다. 궁정작곡가로 평생을 살아왔죠. 몇 번의 왕이 바뀌었는데도 말입니다."

"그건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 보통 궁정 작곡가라고 해도 정치적인 이유로 파면을 당하곤 합니다. 결국 궁정 안에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살리에르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모든 위기에서 벗어나 장수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살리에르가 정치적으로 엮일 뻔한 위기를 잘 모면했다는 겁니까?"

"잘 모면한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문제가 생기지 않게 사전에 차단을 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신기한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살리에르에 대한 배경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나조차도 관심이 없어서 별로 알아보지도 않았다.

최근 살리에르의 악보를 해석하면서 그의 행적을 조사하긴 했는데, 세세한 것까지 알아낼 순없었다.

"그래서 저는 살리에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자금을 지원했었죠. 그렇게 해서 그가 쓴 일기와 악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일기를 읽어 보셨습니까?"

"전부 다 읽진 않았습니다. 번역이 이상했던 건지, 아니면 제가 뭔가를 이해하지 못 하는 건지 뜬구름 잡는 내용들이 많더군요."

일기를 몇 번이나 읽어 보려고 했으나, 도통 뜻을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많아 포기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이상하게 된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살리에르가 마치 암호처럼 일기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걸 해석하고자 돈을 꽤 많이 쏟아 부었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레비 회장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레퀴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새롭게 작곡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사람이면 분명 살리에르에 대한 비밀도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레비 회장이 나를 재단 대표로 세운 이유가 정말 그것이었나.

살리에르에 대한 비밀을 풀려고?

"물론, 재단을 맡긴 이유는 단순히 살리에르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밖에도 우린 아직 풀지 못 한 수많은 음악적 미스테리가 있어요. 장 대표라면 그것들을 해결함과 동시에 음악 문화 발전에 힘을 다할 거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글쎄요. 사실 아직도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겸손하시군요. 회의 내용은 대충 톰에게 들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멤버쉽 시스템을 새롭게 바꾼다면서요? 장 대표를 괴롭히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이사들이 그것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노림수가 꽤 날카로웠어요."

"딱히 노린 건 아닙니다. 정말 전 회원제를 바꿀 생각입니다."

나에 대한 이사들의 관심도가 줄어 들고 회원제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일이다.

완전히 노리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하겠다고 했으니 무조건 밀고 나갈 것이다.

"아무튼, 살리에르에 대한 연구는 잠깐 중단이 되었습니다. 원한다면 연구를 재개해도 됩니다.

이미 연구비가 책정이 되어 있어 이사회가 승인 할 필요도 없어요."

"살리에르에게 정말 남모를 비밀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죠. 혹시 장 대표에게도 남모를 비밀이 있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날 바라보는 레비 회장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아차 싶었다.

그는 곧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비밀은 있기 마련이죠. 더는 캐묻지 않겠습니다."

정말 살리에르에게 뭔가 있는 것일까.

"살리에르는 일기와 악보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걸 하나로 이어서 본다면 새로운 관점이 나올 수도……."

레비 회장의 말이 점점 옅어지더니, 이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난 당황해서 뒤에 있는 톰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잠에 드신 겁니다."

"아…… 네."

"이만 돌아가시죠. 모시겠습니다."

나는 방에서 나와 밖에서 대기 중인 롤스로이스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레비 회장이 말한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살리에르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라…….'

일기와 악보를 하나로 두고 본다?

"어?"

그때 뇌격이 치듯 무언가가 번뜩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