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93화
“투어 끝났다고 연락 끊으면 안 된다. 알겠지?”
랜디 이 양반은 참 감정적이다.
무분별하게 화를 내고 감정 조절을 못 한다는 뜻이 아니다.
뭐랄까.
감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공항에서 우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아냐. 넌 왠지 그럴 거 같아서 불안해. 혜나 너라도 날 잊으면 안 돼.”
“호호. 알겠어요.”
랜디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투어가 끝이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서 한번 더 공연을 해야 한다.
사실상 앵콜 공연이었다. 단, 랜디는 다른 스케쥴로 인해 이번 무대에는 참여하지 못 한다. 그래서 나와 누나는 LA에서 월드 투어를 마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입국장에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얘기를 듣게 됐다.
“예? 전세기요?”
- 응. 크로노스라는 기업 알지?
“알죠.”
대기업 반열에 들어가 있는 인터넷 플랫폼 기업이었다.
SNS와 접목해 배달 서비스와 각 분야를 이어주는 곳인데, 앞으로도 여긴 엄청난 발전을 이루면서 아마존과 쌍두마차를 달리게 된다.
그런데 뜬금 없이 거기서 왜 우리를 위해 전세기를?
- 나도 모르겠다. 꼭 지원해 주고 싶다는데, 이미 공항에 전세기도 가져다 놨더라. 그래도 너한테 허락은 받아야 하니까 내가 지금 전화를 하는 거야.
강 대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고 목적인가?
투어 활동을 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후원이 들어오고 광고 문의가 들어오긴 했다만.
전세기부터 가져다 주는 곳은 처음이었다.
“누나 어떡할래?”
“뭐, 난 좋아. 공짜라는 거잖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광고 때문 아닐까? 크로노스 광고 정도는 찍어 줄 수 있지 않아?”
월드 투어로 인해 계속 비행기를 타느라 누나는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라도 슬슬 힘든 모양이었다.
퍼스트 클래스보다 훨씬 더 편한 전세기를 타는 것도 누나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대표님. 알겠다고 전해 주세요.”
- 그래. 거기 잠깐 있어 봐. 그쪽에서 사람들이 갈 거야.
전화를 끊고 나서 5분도 안 돼서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이 몰려 왔다.
“오늘 두 분의 경호를 맡은 릭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경호 인력이었다.
덕분에 10명이 넘는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전세기가 있는 곳까지 왕 행세를 하면서 올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로노스 전 회장, 레비 리들 님의 수행 비서를 맡고 있는 톰 우든이라고 합니다.”
오십 중반 정도로 보이는 톰 우든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넓은 어깨와 튼튼한 몸을 하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주름살과 백발이 아니었다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 네. 반갑습니다. 오늘 저희를 초청해 주신 분이군요. 덕분에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오랜 투어로 많이 힘드실 테니, 여기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군요.”
크로노스 전 회장의 수행 비서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일 터. 그런데도 우리를 배려해 일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근데 레비 회장이 아직 살아 있었나? 나이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저기 리들 씨.”
“아. 편하게 톰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비행기가 이륙한 지 시간이 좀 지났을 때, 나는 톰이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식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비행기에서 먹은 식사 중 가히 최고였습니다. 거기다 논알콜 칵테일까지 만들어 주는 승무원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라면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비행기에서 꼭 라면을 먹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별미긴 하죠.”
전세기는 역시 전세기였다.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먹을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음식을 양껏 먹은 뒤 누나는 먼저 잠에 들었고, 난 톰이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자 자리에 앉았다.
“이제 슬슬 얘기를 해주시죠. 크로노스가 이유 없이 제게 이런 호의를 베풀진 않을 텐데요. 혹시 광고 때문인가요?”
“음. 아닙니다.”
“그러면 제게 작곡을 맡기실 게 있습니까?”
그러자 톰의 표정이 달라졌다.
음악과 관련된 거였구나.
“맞습니다. 예리하시군요.”
“제 직업이 음악가잖아요. 광고가 아니라면 작곡이라고 생각을 했죠. 제게 어떤 장르의 작곡을 맡기려고 하시는 거죠? 광고 음악입니까?”
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요?”
그는 잠깐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옆에 줄곧 놔두었던 검은 케이스를 내 앞에 놓았다.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케이스 안에는 헌 악보가 들어 있었다.
세월이라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 따로 특수 처리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헌 악보에 적힌 음표를 살펴보았다.
그리 길게 볼 필요도 없었다.
“레퀴엠이군요.”
레퀴엠.
장례식장에 쓰이는 장송곡이다.
그리고 이건 그 유명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었다.
“그런데 이거 설마 원본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그것도 모차르트의 제자였단 쥐스마이어의 것이 아닙니다. 모차르트가 죽기 전까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악보입니다.”
원본이 어떻게 일개 기업인 손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차르트가 죽기 전 썼다는 악보의 원본이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고요?”
“예. 쥐스마이어의 손을 거치지 않은 모차르트의 악보 원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거기다 모차르트의 부인이었던 콘스탄체가 돈을 벌기 위해 블랙 마켓에다 악보를 팔아 버렸죠. 그렇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저희 회장님이 갖게 되셨던 겁니다.”
모차르트에게는 악연이나 다름이 없는 콘스탄체.
모차르트를 돈버는 기계처럼 썼던 콘스탄체는 그가 죽은 뒤에도 돈을 얻고자 남편의 유품을 전부 블랙 마켓에 팔아 버렸다.
거기에 모차르트 희대의 업적이 될 뻔한 레퀴엠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만들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바통을 이어받아 완성하긴 했으나, 제대로 된 완성작이 아니라며 크게 비판을 받았죠. 그리고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어느 부분을 직접 작곡했는지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죠.”
톰은 케이스에 들어 있던 악보를 하나씩 꺼냈다.
보는 내가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혹시라도 악보에 손상이 갈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 내 눈빛을 읽은 것일까.
톰이 나지막이 웃는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별도로 제작한 사본입니다. 원본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죠.”
그제야 나도 마음이 놓였다.
“하도 이 악보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회장님께서 일부러 돈을 들여 정교한 사본을 만들어낸 겁니다.”
톰은 악보를 하나씩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 악보들을 보면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어느 정도 완성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쥐스마이어의 완성본과 비교한다면 모차르트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있죠.”
미완성작인 모차르트의 레퀴엠.
모차르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도 매번 궁금했다.
그가 만약 레퀴엠을 완성시켰다면 어떤 음악이 나왔을까 하고 말이다.
“이 악보를 저한테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단순히 레비 회장이 ‘나 이런 악보도 있다? 쩔지?’ 라고 자랑하려고 가져온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의뢰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의뢰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완성해 주시겠습니까?”
“······?”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레퀴엠을 완성시켜요?”
“예. 수많은 작곡가들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리메이크하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쥐스마이어의 것을 넘을 수 없었죠. 그리고 회장님 역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계십니다.”
톰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레비 회장님은 이제 언제 세상을 떠나실지 모릅니다. 그분의 마지막 소원은 단 하나. 바로 미완성된 레퀴엠을 완성시키는 겁니다.”
그 영감 참 마지막 소원이 거창했다.
“그래서 여러 저명한 지휘자들과 작곡가들을 만나 의뢰를 하는 중입니다.”
“레퀴엠을 완성시키려고요?”
“예.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차르트의 마지막 곡, 레퀴엠.
곡을 만들던 당사자가 죽은 마당에 레퀴엠을 완성한다라.
그것도 모차르트 제자, 쥐스마이어가 간신히 완성시킨 곡을 전부 다 부정하면서?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의뢰이긴 했다.
“이해합니다. 어려운 부탁이겠죠. 그래서 수많은 작곡가가 거절을 해왔습니다. 감히 그 곡을 자기가 완성할 수 없다고 말이죠. 분명 미스터 장께서도······.”
“제가 언제 안 된다고 했던가요?”
“예?”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 못할 건 없죠.”
레비는 신선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대답은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군요.”
“그런가요? 모차르트가 그동안 만든 곡들을 잘 파악한다면 그가 어떤 성격을 가졌고, 또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선호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원본 악보까지 구해다 주셨잖아요. 작곡가의 악보 안에는 그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죠.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아요.”
작곡가를 대변하는 건 바로 그가 만든 악보다.
거기서 그의 감정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기는 것이다.
특히 모차르트 같은 본인 감정에 솔직한 사람은 더더욱 숨기려 하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려고 한다.
“모차르트보다는 아니겠지만, 최대한 비슷하게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대단하시군요. 이제까지 만나본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없어 보였는데 말입니다.”
톰은 악보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의뢰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다른 작곡가들은 이미 작업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다들 자신은 없어도 의뢰를 다 받긴 했나 보네요.”
“예. 상금이 크게 걸릴수록 거부하기가 힘들기 마련입니다.”
“전 딱히 상금이 필요하진 않아요.”
돈은 차고 넘치게 많고, 내가 원하는 건 저 악보뿐이었다.
과연 죽기 전까지 작곡을 멈추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어떤 감정으로 저 곡을 만들고 있었던 것일까.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저 악보를.
그리고 모차르트의 소용돌이 치는 그 감정을.
“정말입니까? 상금이 필요하지 않으시다고요? 경쟁에서 이기게 되면 큰 금액을 얻을 텐데요?”
“그럼 부수입 정도라고 생각해 두죠. 주는 걸 거절하진 않습니다.”
그러자 톰이 다시 한번 미소를 보였다.
의미심장한 입가를 보고 있자니 궁금해졌다.
“왜 그러시죠?”
“그게······ 부수입이라고 하기에는 상금이 매우 크거든요.”
하긴.
대기업 회장님이 돈을 걸 정도면 수십억 단위는 그냥 넘을 것이다.
“상금 천억. 그리고 크로노스 기업의 일정 비율의 지분. 어떻습니까?”
하마터면 들고 있던 악보를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