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80화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베토벤의 명곡이다.
오른손으로 만들어내는 환상의 멜로디.
이 아름답고 청아한 도입부 멜로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혹되었다.
장연욱이 연주하는 것 역시 그러했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유명한만큼 이젠 진부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연욱이 연주하는 건 뭔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장연욱이 연주하고 있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오리지널 연주가 아닌, 그가 쇼팽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마음대로 해석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다.
‘쇼팽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베토벤인가!’
이그니치는 붙잡고 있던 지휘봉이 부르르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지휘봉을 던져 감히 베토벤의 곡을 모욕하는 저자의 연주를 막고 싶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하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장연욱이 만들어내는 음악의 마법에 자신도 속박되어 버린 것일까?
저 우매한 청중들처럼 말이다.
이그니치는 멍하니 연욱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엘리제를 위하여.
볼품 없는 외모와 키.
음악 말고는 무엇 하나 내놓을 게 없는 사람, 베토벤.
그는 가정을 이루고 싶은 열망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2명의 백작 영애에게 거절을 당한 뒤 큰 상심에 빠져 있던 그는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에게도 청혼을 거절당하게 된다.
그 뒤로 베토벤은 희망을 잃고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 찾아온 사랑이 있었다.
옛날에 베토벤이 한 여인과 나눈 편지들이 발견되었는데, 베토벤은 그 여인을 K라는 이니셜로 불렀고 그 여인을 위한 노래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하게 된다.
문제는 대체 그 K라는 여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엘리제를 위하여’를, 불멸의 여인을 위한 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곡은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든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전형적인 사랑의 세레나데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만든 곡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장연욱이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무한의 사랑보다는 알 수 없는 갈등이 느껴졌다.
분명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정이 느껴지는 갈등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마 이것을 느낄 사람이 몇이나 될진 모르겠으나, 이그니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이 곡은 기존의 원곡과 해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점점 더 원곡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면서 이그니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 젊은이는 또 한 위대한 음악가의 명곡을 망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전혀 그런 거 같지도 않은 듯 보였다.
‘모두 홀려 버렸어. 완전히.’
‘엘리제를 위하여’의 기존 박자를 무시하고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강렬하게 리듬을 만들어가는 연욱을 바라보는 청중들은 대다수가 넋이 나간 채였다.
왜 연욱이 의도적으로 리듬을 조절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매혹적인 멜로디와 더불어 강약을 조절하는 박자가 마치 최면을 보는 듯했다.
의도적으로 정신을 깨우고 있던 이그니치도 하마터면 그 최면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뻔했다.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뜨며 그는 연욱의 마법에 빠지지 않고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버틴 끝에 마침내 곡이 끝났다.
“와아아-!!”
“브라보!!”
곡이 끝나기 무섭게 청중들이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연욱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청중들.
꼭 광신도를 보는 것만 같았다.
‘끝나고 한 마디 따끔하게 해줘야겠군.’
이그니치는 이제 그만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청중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오-.”
“또 한 곡을 더 치려는 건가?”
눈을 돌려 보니 앵콜 곡이 끝난 연욱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건반 위에서 손을 까닥이고 있었다.
‘설마 한 곡을 더 한다는 건가?’
그런 의문을 풀어주듯 연욱의 연주가 시작됐다.
웅성거리던 청중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고, 이그니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휘석에 다시 앉아야만 했다.
‘월광 소나타?’
뒤이어 연욱이 들려주는 곡은 바로 베토벤 최고의 소나타라 불리는 ‘월광 소나타’였다.
정말 달빛이 강가에 걸려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바로 그 소나타.
베토벤이 만들어낸 최고의 소나타라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천천히 시작되는 감미로운 월광 소나타의 도입부는 달빛의 그것을 느낄 만큼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1악장 중반부터 원곡과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악보 그대로 페달을 밟으며 그 중후한 음색을 살리는 데에 집중되어 있지만, 섬세한 부분에서 연욱만의 해석이 드러났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그렇듯, ‘월광 소나타’ 역시 베토벤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알려져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사랑 노래라면 ‘월광 소나타’는 청혼을 위한 곡에 가깝다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지금 연욱이 연주하는 ‘월광 소나타’는 누군가에게 청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어지는 건가?’
느릿하게 저 어두운 하늘을 유일하게 비추는 달빛의 외로움을 달래는 ‘월광 소나타’. 그러나 연욱의 손에서 나오는 ‘월광 소나타’는 달빛의 외로움을 달래는 느낌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풀어내는 것만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이그니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설마했던 생각이 점점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 ‘월광 소나타’는 방금 전 연욱이 들려준 ‘엘리제를 위하여’와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사랑을 노래하는 게 아니잖아. 마치······.’
연욱의 ‘월광 소나타’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말하고 구애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여기에서 포기한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정체 모를 여인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고 했던가.
베토벤이 K라는 이니셜로 불렀던 그녀.
그녀는 베토벤과 미래를 함께 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마지막에 결국 베토벤은 그녀를 포기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K가 베토벤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 베토벤 스스로가 물러난 것이 아니냐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이그니치는 그 추측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연욱이 들려주는 ‘월광 소나타’에서 베토벤의 괴로운 심경과 여전히 K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놀라웠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그니치는 눈앞이 흐릿해져 갔다.
곡을 듣고 감동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동안 자신이 믿고 있었던 클래식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눈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
설마 이 두 곡이 이렇게 정교한 음악적 마법에 연결되어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아니. 세상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직 베토벤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비밀을 오늘 연욱이 낱낱이 밝혀내고 있었다.
이 두 곡은 한 여인을 위한 베토벤의 사랑과 슬픔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말이다.
따라란-!!
‘월광 소나타’의 핵심이라 불리는 3악장.
폭풍의 소나타라고 불릴만큼 ‘월광 소나타’의 1악장과 2악장과는 구조부터가 다른 음색과 리듬을 보여 준다.
잔잔했던 강에 폭풍이 이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곡이 이어지고 격정으로 치닫는 음표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이그니치는 베토벤의 분노가 느껴졌다.
왜 난 그녀와 이어질 수 없는가에 대한 분노.
이 버러지 같은 운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분노와 절망을 이겨가며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영원히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도 3악장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왜 이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이그니치는 묵묵히 폭풍의 3악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마침내 곡이 마무리되었다.
강렬했던 3악장은 마지막에 꺼져 가는 불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 청중들은 여전히 고요했다.
‘엘리제를 위하여’ 때는 음악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쳤다면, 지금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그리고 들려오는 연욱의 한숨.
이그니치는 거기서 보았다.
연욱의 눈가에 조금씩 흐르는 눈물을 말이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월광 소나타’나 사실은 장연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해석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말끔히 사라지는 눈물이었다.
연욱은 지금 이그니치와 청중들이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베토벤의 그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연주자가 잘 이해하였기에 저런 눈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와아아아-!!”
곧이어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쏟아졌다.
연욱은 미소를 지으며 청중을 향해 인사를 올렸지만, 그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아직도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면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이그니치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쇼팽 때 보여 준 그 오만함이 이제는 유일하게 원작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연주자의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보였다.
연욱은 청중을 향한 인사를 끝난 뒤 이그니치에게 다가갔다.
“마에스트로. 혹시 방금 전 제 연주가 언짢게 들리셨다면······.”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이그니치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연욱과 악수를 나누었다.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답고 슬픈 소나타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습니다.”
맞잡은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지금까지 내가 믿고 있던 클래식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군요.”
“그럴 리가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는 장연욱 당신이 오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산 사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오만했던 건 나였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역시 나였습니다.”
그리고 연욱과 격한 포옹을 나누며 말했다.
“앞으로도 당신의 음악은 꼭 듣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베토벤 말고도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겨진 뜻을 모두에게 풀어주시길.”
이그니치와 연욱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더는 말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서로의 진심이 눈빛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연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테이지 뒤로 물러났다.
이그니치도 지휘봉을 내려놓고 청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지휘를 지켜봐 줘서 고맙다는 뜻의 인사가 아니었다.
그동안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새로운 지휘를 보여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이제 나도 떠날 때가 된 거 같군.’
더는 지휘봉을 들고 지휘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후회가 되진 않는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음악의 눈과 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웃으면서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