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78화
“으음~”
패션쇼가 끝난 뒤에도 찰스 왕세자는 단꿈에 젖어 있었다.
보통 패션쇼 하나가 끝나면 허무하다가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성공적인 패션쇼였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핵심에는 바로 장연욱이 있었다.
“참 안타까워. 동양인이 아니라 우리 영국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역시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장연욱이 영국인이었다면 평생 런던에 붙잡아 둘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오- 또 올라왔군.”
찰스는 SNS가 사회의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패션쇼를 진행하고 새로운 패션을 리드하기 위해서는 SNS가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라는 것에는 공감을 했다.
그렇다고 그가 SNS를 들여다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루 종일 SNS 살펴보는 중이었다.
[새로운 유행의 아이콘!]
주로 영향력 높은 셀럽들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현재 그들은 모두 장연욱과 장혜나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웠다.
오죽하면 SNS 전체가 장연욱, 장혜나 이름으로 뒤덮을 정도일까.
이번 패션쇼에서 크게 감명을 받은 셀럽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계속 언급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왓슨. 이걸로 부족해. 이번 패션쇼에 참석한 셀럽들에게 공문이라도 돌려야겠어. 장연욱을 더 언급해 달라고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요청해 보겠습니다.”
“단순히 요청으로는 부족해. 반드시 하게 만들어.”
완전히 장연욱에게 푹 빠져 버린 왕세자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것이 엄한 곳에 왕권을 사용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왕세자님. 여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한창 바쁠 때 그 할망구가?
벌써부터 똥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여왕 앞에서 그런 표정을 적나라하게 보일 순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부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 두 사람의 신경전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시기가 아니던가.
“부르셨습니까.”
“아, 왕세자. 어서 와. 상의할 것이 있어서 불렀어.”
“예.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얼른 용건만 듣고 여길 빠져나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유명한 스타들이 내가 이번에 진행하는 클래식 공연에 참석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서 말이야.”
“공연에요?”
“그래. 아무래도 네가 저번에 진행한 패션쇼 때문인 것 같아.”
그제서야 왕세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 패션쇼에서 장연욱을 본 스타들이 그가 여왕의 공연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는 걸 듣고 몰려드는 것이었다.
갑자기 없던 의욕이 샘솟는 찰스였다.
“명단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응. 여기 있어. 내가 고르는 것보다는, 이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네가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찰스는 명단을 스윽 살펴보았다.
전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스타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들 중 찰스는 연욱에게 훗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빠르게 추려냈다.
“혹시 공연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될지도 알 수 있을까요?”
“자세한 공연 프로그램을 알고 싶다는 거지?”
“네, 제가 여기서 보고 조율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여왕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찰스는 이런 쪽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이지 않던가.
그는 자세히 프로그램 내용을 살펴보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나를 도와주는 건 참 오랜만이네.”
찰스는 부드러워진 여왕의 눈빛을 마주하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왜 그렇게 여왕과 신경전을 벌였을까.
사실 여왕을 도우려는 게 아니라 연욱을 돕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 공연은 제가 책임지고 맡아 보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여왕의 저런 눈빛은 너무 오랜만이라 찰스는 이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고 있었다.
* * *
복잡한 런던 도심.
시간이 낮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흐린 탓에 조금 도심 속이 어두워 보였다.
다차선 도로에는 고급스러운 승용차와 화물을 배달 중인 트럭, 택시, 그리고 도로의 균형을 수호하는 경찰차가 보였다.
워낙 차가 많아서 그런지 그들은 움직이다 멈추는 걸 반복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도보에는 수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담배를 피는 사람, 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 등등.
여느 도심과 다를 바 없이 이곳도 똑같았다.
나는 그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런던 도심을 사진으로 봤을 땐 서울이랑은 참 많이 다른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걸어보니 외형만 다를 뿐, 그 안은 비슷했다.
“너무 딱 붙어서 경호하실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잖아요.”
런던을 구경하고 싶어서 주변 경치를 만끽하며 걷고 있었지만, 경호원들 때문에 마냥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럼 거리를 조금 유지하면서 경호하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깨 넓은 형님들이 사방으로 날 감싸면서 걷고 있는 걸 보고 사람들이 이상한 눈을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
“휴. 이제야 숨 좀 쉬겠다.”
혜나 누나도 말을 안 하고 있었지, 나랑 똑같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여긴 건물이 참 예쁘다.”
경호원들이 조금 거리를 벌리면서 우린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어차피 여행이라고 해봤자 런던 도심 속을 걸어 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도 엄청 자유롭다고 볼 수도 없었다.
“너무 도심 깊은 곳으로 가시면 경호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는 가면 안 된다.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면서 경호원들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린 조금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푸드 트럭도 있고 길거리 음식들을 파는 천막이 즐비했다.
“와, 도넛 하나만 먹을까?”
“그럴까?”
길거리 음식이라고 해봤자 빵과 도넛들이었다.
몇몇 처음 보는 음식들이 있긴 했는데, 올리브를 기름에 푹 절인 것과 이상한 비린내가 나는 이름 모를 음식도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영국 음식은 무척 맛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나마 하나씩 산 도넛도 맛이 썩 좋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머무는 숙소에는 밥이 엄청 잘 나오잖아.”
영국 음식이 형편없다고는 하나, 버킹엄 궁전은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메뉴가 있으면 딱딱 가져다주고 맛도 매우 훌륭했다.
나와 누나는 레몬에이드를 하나씩 들고 쪽쪽 마시면서 공원 안을 걸었다.
평화롭다.
지금은 음악이나 일에 관한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누나랑 같이 오랜만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고 있으니 한결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응? 연욱아. 저기 봐.”
누나가 가리킨 곳에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에 낡은 캔이 있는 걸 보니,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이 주는 돈을 조금씩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들려오는 선율이 심상치 않아 우리 둘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응? 이거 설마?”
어눌한 한국말이긴 했지만, 기타로 연주하는 멜로디는 분명했다.
이건 나와 혜나 누나의 1집 앨범 타이틀 곡인 ‘함께 해’였다.
“신기하다. 설마 런던에서, 그것도 이런 공연에서 우리 노래를 듣게 되네.”
비록 부족한 발음과 노래 실력도 그리 훌륭한 편은 아니었지만, 나와 누나의 곡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우리 둘은 모자를 눌러 쓴 아저씨가 노래하는 걸 끝까지 들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3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말했다.
“친구들. 그냥 공짜로 듣기만 할 거야? 그럼 너무 섭섭······ 응?”
그는 나와 누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기겁하며 소리쳤다.
“서, 설마 JJ?!”
“오. 우리를 알아요?”
“당연히 알지!! SNS에서도 온통 너희들 얘기밖에 없잖아. 그리고 난 K-POP 광팬이라고. 특히 너희들 노래를 제일 좋아해! 하나님 맙소사. 이게 꿈이야 생시야.”
어깨에 매달고 있던 기타를 벗으며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난 오스틴이라고 해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내 음악을 들을 줄이야. 정말 형편 없는 솜씨였죠? 미안합니다.”
영혼이 참 자유로워 보이는 생김새와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목소리도 나름 괜찮았다. 다만, 어떻게 본인의 목소리를 써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저기 오스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때 재밌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노래를 들려주신 대가로 함께 여기서 공연을 해 보는 게 어떨까요?”
“네? 저, 저랑요? 진심입니까?”
“네. 옆에서 기타를 연주해 주시면 우리가 노래를 부를게요. 좋죠?”
“무, 물론입니다!”
나는 뒤에 떨어져 있는 경호원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들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사인이었다.
“누나. 한 곡만 부르고 가볼까?”
“좋지.”
나와 누나는 벽돌로 만들어진 둥그런 공용 의자에 앉았다.
오스틴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기타 줄을 잡고 있었다.
난 그런 오스틴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떨 필요 없어요.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연주해 주세요.”
“아, 네!”
오스틴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시작되고, 나와 누나는 첫 앨범 타이틀곡을 불렀다.
“조금씩 내게 다가오는 그대. 너무 가까워지는 건 싫어.”
“하지만 내게서 멀어져서도 안 되죠.”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였다.
가사를 안 까먹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그대와 떨어지는 건 너무나도 싫어. 하지만 말은 못 하겠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어쩌면 내 마음이 열릴 수도 있잖아~”
그런데 노래 중반쯤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디서 듣고 있었던 건지,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길을 지나가던 사람도 나와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는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 쪽에 다가왔다.
짤랑~
텅텅 비어 있던 캔에 동전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노래가 후반부로 가자 아예 지폐를 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고작 5분도 안 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모인 사람들 숫자만 서른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로 오래 떨어져 있던 우리. 이젠 헤어지지 않고 모든 걸 함께 해.”
마침내 노래가 끝이 났다.
이미 자리까지 잡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마치 작은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호응이었다.
“앙코르!!”
원래는 딱 한 곡만 부르고 돌아가려 했는데, 그냥 돌아가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손을 벌벌 떨고 있는 오스틴에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몇 곡 더 해 볼까요?”
그 말을 들은 오스틴은 곧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보였다.